믿음이 어디 있느냐? 불가능성에 대한 도전과 예수 라는 문



(눅 8:22, 개역)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눅 8:23, 개역)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눅 8:24, 개역)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5, 개역)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예수님은 항상 불가능한 것만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즉 이 말은 정말로 그 불가능성을 실천하라 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자꾸 자꾸 집요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유는

자꾸 자꾸 자극을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자극요?

자극 줘서 뭐하게요?


자극이란 일종의 충돌로써 하나의 접힘현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곧은 목을 꺽어버림으로써 자기부정케 하시는 겁니다. 그런 접힘으로써, 단절 삭제로써
나 외에 한 다른 의를 쳐다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를들어 예수님은 본인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악마의 나라가 전제된, 
마귀나라가 카페트 배경으로 깔려 있는 상태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극 곧 충돌이란 바로 이 악마의 나라 곧 애굽나라에 배여있는 그 신체로는 안된다고

자꾸 자꾸 원망할 만한 곳으로만 인도하고

죽을 곳으로만 인도하여서


자꾸 그 신체에 자극이 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홈파기처럼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마조히즘 - 생산기계, -되기, 전쟁기계-되기)



오늘 본문에 풍랑 곧 광풍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즉 단어만 들어도 우리 신체의 즉각적인 반응은

일단 회피성의 부정적인 의미이다는 겁니다.


감히 누가 풍랑을 즐거워 하고 기뻐하면서

광풍을 사랑하는자가 있느냐 말입니다.


좀 다른 말로 만약 핵폭탄을 누가 사랑하며 즐거워 하고 기뻐하면서

어서 어서 터지기를 바라는 자가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어서 빨랑 와라 심판아. 어서 와야 나는 기쁘다 종말아
신나는 종말로 받아들이기를 기뻐하는 자가 어디있냐 말이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십자가라는 저주를 그렇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예수님께 묻기를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다 저 사람 저주 받아서 그렇지요?

아니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아이고 기뻐라!!!!


유대인 회당에서의 제물에 유대인의 피가 빌라도로 인해서 묻게 되었다
이거 뭔가 잘못 된 것 아닙니까? 예수님?


나도 빌라도 손에 죽이러 왔거든!!!


안됩니다. 주여 저 베드로가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예수님과는 그 어떤 누구도 대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가능성에 우리는 놓여지는 겁니다.

감히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니

감히 예수님과 사귐에 놓여지다니

감히 예수님과의 관계성에 놓여졌다는 자체가


이미 불가능 속에 있는 겁니다.




상위 1% 귀족남과 하위 1% 무일푼이 만났다



물론 이 영화를 불가능성이 가능성이 되었다고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지만

그 반대죠. 기적이라고 여긴 것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기적이 되지 않게 된 것이지요.
친구가 된 것이 기적이라고 친구를 평준화로 본 것으로써의 기적이니 그것은 기적이 아니구요
평준화가 끝까지 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수직으로써 불가능한데도 만남 자체가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는 겁니다.
왜? 가능성으로 바뀐게 기적이 아니라. 수직적인 그 불가능성 그 자체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기적인 겁니다.

제가 이 포스터 올린 이유는 언발란스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전혀 안 어울린다는 겁니다.
저번에도 그런 글을 올렸는데 언발란스 전혀 전혀 어울릴수 없는 아니올시다 라는 관계입니다.
그래야 마귀가 숨어있다가 나오는 거죠. 저런 만남은 전혀 마귀가 시기하지 않죠. 오히려 박수를 치죠.

복음에서는
원수와 피와의 만남이 그렇다는 겁니다. 마귀가 견디질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무인 숙제는

반드시 그 신체를 자극 시켜서

예수님나라와 마귀나라와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구별 시키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거룩.
거룩 입히기 입니다.


오늘 페이스북 대화 중에

강이아빠가 문이라는 소재로 사진을 찍어서 올렸길래

그 문이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박윤진 성도님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수련회때 시편 곧 문은 예수님이다 라는 누구 라는 그 인물이


반드시 하실 역할은 바로 문을 가로막아 차단하여서

너 그런 신체로는 안돼 라고 단절 시키는 숙제를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또 착각하기를 그럼 딴 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그 불가능한 딴 몸이 되느냐 라고
성화론자들처럼 그 다른 몸을 만들기 할려고 또 근육키우고자 시도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말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지킬것이 단 한 개도 없다는 뜻에서 기쁜소식입니다.

그럼 왜 너 그런 신체로는 안돼 라고 지적하실까요?


바로 그겁니다.

지적 받는 그 자체가 바로 관계성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넘어오신다는 겁니다.
사생아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회개의 달인들 조차도 맺을수 없는 그 불가능한 관계성을

예수님은 단 한번도 회개한적 없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회개? 너 하지마 내가 회개 다 해줄게! 느낌 아니까! 라고,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 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제가 이렇게 머리가 나빠도 운 좋게 외운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6장 33절로 외웠습니다. 요6 33 물론 틀렸지요
그러나 접근성으로써 아래 위로 살펴보면 나옵니다.


(요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이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일이 뭐냐?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어라 입니다.


날 먹어라 라는 겁니다.
믿고 먹어라 입니다.


우와 이 무슨 또 엽기적인 말입니까?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한복음 6장 마지막 부분에는 이 말 때문에

그 동안 수많은 기적을 보면서 따라오던 수천명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요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왜? 예수님 자신이 문이기에 차단하시겠다는 겁니다.

 

한술 더 떠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가지 왜?

가 가 가 가란 말야 응?


(요 6:60, 개역)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베드로가 말씀이 여기 있는데 왜 갑니까?

맞습니다. 이런 싸가지 없음이 바로 주님이 심은 믿음입니다.


(요 6:68,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즉 적어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뜯어먹고 마실수 있는 그 뻔뻔함이 없다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바로 이런 자극 곧 충돌이야 말로

예수님 자신의 욕망을 피력시키시는 일입니다.

반드시 그 숙제 내가 완성하마 너는 가만히 있어 나만 쳐다봐

어떻게 숙제를 다 완성하는지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해 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바라보기 라는 관계성 사귐이 바로 같이 풍랑 속으로

광풍 속으로

같이 함께 사건 속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반드시 그런것들을 격도록 하시는 겁니다.


왜?


이미 다른 몸이기에


다른 몸 될려고 할 필요 없이


이미 딴 몸이기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예 불가능성 속에 살도록 되어 있지

가능성으로 바꾸어서 가능케 하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성경은 사람의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불가능성 속에서 아예 집짖고 낮잠자고 푹 쉬도록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본인이 문으로써 미리 차단하고 걸러내는 작업은 주님 본인이 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아 문은 예수님이구나 라고 인식토록 만드는 겁니다.


왜? 분명! 나는 문지방을 건너서 문을 통과해서 나왔는데

문으로 들어가서 문 바깥 또는 안으로 들락 날락 했는데


아니 이 문이 저절로 움적어서 들어가기 전 상황으로 맹글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리새인이나 성화론자들처럼 우깁니다.

전 분명히 문을 통과 했는데요?


주님은 반칙으로, 부조리로, 언제 통과 했느냐?

거봐라 너는 한발짝도 이 문을 통과 한적이 없지 않느냐 라고

문이 이동을 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실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격은 일입니다.


단 한사람 빼고 모조리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라는 말씀을 이루신 겁니다.


예수님 숙제 완료 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뭐 위에서 언급한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는데? 라는 소리 보다

더 엽기적이지요?


아니 가면 갈수록 태산 아닙니까?


불가능성 맞죠?


단 한 놈도 하나님의 일을 한 적이 있는 놈이 없어야

하나님의 일입니다.


만약 단 한 사람만이라도 하나님의 일을 한 자가 나타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입니다.


왜 말도 안되는 성화론을 따르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해가


저런 사기를 치면서 돈을 벌고 있으니 그 멋들어진 쇼에 다 말려가고 있으니 ㅋㅋㅋㅋ
오히려 참 감사하죠

그러니 불가능성이 맞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셈이니까요


저런 놈들은 풍랑 광풍 마저도 뚫을려고 할 겁니다.


그 불가능성에 도전을 할 겁니다.


도전 하는거야 말릴수 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 버리면 골치 아파 집니다.


교주 하나 나타나게 되니까 말이지요


교주 하나 나타나도 말릴수 없겠지만

그 교주 덕분에 문에 턱 걸려서 차단 당한다는 것이 문제이겠지요.


세상에나 분명!

그 광풍을 뚫었는줄 알았는데

그 광풍이 이동을 해서 너는 이 광풍의 문을 왜 통과하지 않았느냐 라고

반칙을 벌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 혼자 통과 했다고 우겨본들 소용이 없어요

법정에서 모든 목격자들이 넌 통과 한적이 없다 라고 할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정 통과 했으면 지금 다시 해서 통과 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천배나 강한 광풍으로 위협을 해서

우연히 운 좋게 당첨된 복권을 하루 아침에 다 흥청망청 다 쓰도록 해 놓고서는

너가 언제 복원 당첨이 되었으냐? 오히려 더 피폐해 졌지 않느냐? 그게 무슨 복이냐?

복권이 아니라 망권이지!!


문을 통과한 줄 알았는데

문이 이동해 버리니까

문을 통과한 적은 없고 오히려

다 다시 돌아갈래 라고 없어져 망해버린 애굽을 갈급해 하면서

애걸 복걸로 애굽을 찾아 헤매며 되돌아 가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라는 문과 상관이 없었던 겁니다.


다들 발길을 돌려서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분명 출애굽 해서 그 애굽나라 문을 나와서 광야라는 길을 통해서 다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중간에서 다 탈락 당하는 겁니다.


문 근처도 못가보고서 말입니다.


불가능성(출애굽) -> 불가능성(광야) -> 불가능성(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단절(최고의 생존국가 에덴동산 같더라를 포기하라구?) -> 단절(광야라는 죽음 속) -> 불가능성(거인족 살더라 속았다)


이것은 예수님 본인이 문으로써 차단 단절의 기능을 제대로 보여주시고자 함입니다.



그제서야 자극을 받은 몸 신체는 따지기 시작 합니다.


그럼 누가 들어갈수 있습니까?


누가 구원 될 수 있느냐?

저는 이 말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악마들의 환경 때문에

하도 구원 구원 세뇌를 당해 마약을 먹은 듯이

당연히 구원이 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성경 보면 반대입니다.

목사 설교 듣지 마시고 제발 성경 보세요

물론 성경 봐도 보고싶은대로 보니까 어차피 안되겠지만


완전 다르다니깐요.


구원 준다는 소리 없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차단 시키겠다는 소리 뿐입니다.

왜?

예수님 본인이 문이니까 말입니다.


예수님 본인이 곧 문이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요 떡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라고

문으로써 날 못 통과하는 놈은 탈락이라고 강한의지로써 단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보 같이 개방이라고 보는 자는

아직 구약 조차도

출 애굽과 광야 그리고 입 약속의 땅 조차도

모르는 겁니다.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바뀐적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 다시 불가능성에서 다시 불가능성으로


계속 불가능성 뿐입니다.


어디 가능한게 어디 있습니까?


문지방이 이동해서 옮겨지는데? 가능했다고? 통과했다고?


가능성이 아니면 돈이 안됩니다.

가능성을 말해야 교회는 먹고 사는 겁니다.

그것이 유전이 된 겁니다.


그들과 숙명적으로 충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싸움이 없는 성도는 결국 가짜인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데리고 일부러 광풍 속으로 들어갑니다.

불가능성으로 들어갑니다.

가능성으로 바꾸기 위해서?

불가능성을 통과해서 믿음 좋다는 소리 듣도록 훈련 시키기 위해서?

처음은 누구나 욕먹기 마련이니 지금처럼 계속 훈련해서 익숙하게 숙달되게 습관화 시키면

우리 몸에 더 이상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몸에 딱 맞는 안성맞춤이 되게 하실려고 하는 것입니까?


문제는 이 일회성 단회성 밖에 없는데?


즉 가능성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단회적이기 때문에

훈련 같은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니깐요?

참 나 반복하면 가능해진다고 속이는게 성화론 아닙니까?

아님 운 좋게 머리 똑똑하고 몸이 아주 좋아서 특수훈련군부대 출신이면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애초부터 불가능성이 아니겠지요!

출발선이 틀리니까 말입니다.


그런 부조리를 다 주님께서 아시고

미리 주님께서 문을 이동시키시는 이유입니다.

백날 문을 넘어서도

주님은 테잎 돌리듯이 언제 문을 통과했느냐 라고 하시면

우리는 백날 해도 문을 통과 한적이 없게 되는 겁니다.

내 쪽에서의 숙제가 아닌

예수님 쪽에서의 숙제이니 문을 이동시킨다니깐요


그러니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간다고 뻔뻔스럽게

위에서 뭐라 표현했더라?


아 맞다. 요! 있네요


베드로가 말씀이 여기 있는데 왜 갑니까?

맞습니다. 이런 싸가지 없음이 바로 주님이 심은 믿음입니다.


(요 6:68,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싸가지 없게 이동시켜 버리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제일 문에 가깝고 세리 창기가 제일 문에서 멀고 먼데

문이 문을 이동시켜 버려서 

방금 마침맞게 문을 바리새인이 통과 해서 자랑질 하면서 세리를 정죄할 때


문이 제일 끝의 창기 세리에게 향해 가버니까

실컷 정죄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들은 문을 통과 못했고

창기와 세리가 문을 통과 하게 되니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치 지옥 이미 갈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심부름 시킬려고 이러쿵 저러쿵 부려 먹을려고 하는 겁니다.


기가 차죠 기가 차

지옥 간 놈이 천국의 사람을 부려먹고 있으니
그러니 지옥을 이미 간 것이죠.

아직 맛을 덜 봐서 그런 겁니다.

정신 못 차리기 때문입니다.


오죽 정신이 나가 버렸으면

아니 성전에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주님이 주셔서 십의 이조를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그 딴 것들을 나열하는 겁니까?


완전히 정신이 나가도 한 참 나간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정신 나간 놈들만 교회에 가득차 있는 겁니다.


마약 먹은 놈들이 한둘이가 아니니 원



좀 제대로 직시 하세요

문이 이동 했다니깐요


바보 같이! 진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사랑은 움직이는 겁니다.


문이 움직였으니 문을 넘어간적이 없어요

그러니 안과 밖을 모르는 겁니다.


안에 들어갔다고 우겨도

밖과의 차이를 알길이 없는 겁니다.

안이나 밖이나 그게 그거인 겁니다.


진짜 문이라면

나에게 이 문 안과 밖의 차이를 제대로 알려 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밖에서 하던 짖 

그대로


주여 저는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이 딴 말을 어떻게 감히 할수 있으냐 말입니다.


그런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리 때문입니다.

매국노 때문에

원수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계명을 지킨게 아니라

살인을 처음부터 했던 겁니다.

마음으로 미워한 것이 이미 살인이거든요.


감히 살인해 놓고서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으냐 말입니다.


자 그럼 왜 광풍 속으로 집어 넣습니까


맞습니다. 이 몸은 아니구라 라는 겁니다.

이 신체는 가짜이구나

백날해도 안되는 몸이구나 라를 것을 직시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놀랍게도 다른 몸을 주십니다.


다른 몸이 뭐냐?

내가 다른 몸이 되는게 아니라

나의 몸은 여전히 그 몸인데

다른 몸이 옆에서 함께 해 주시더라 라는 겁니다.


그 몸은 나랑 전혀 안어울리고

전혀 맞지도 않고

전혀 함께 할수 없는

합쳐질수가 없는 그런 몸이다는 겁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딴 몸이

광풍도 뚫지도 못하는 믿음 없는 몸인줄 뻔히 아시면서도

함께 하시겠다고

그 광풍 속에서도 때려죽어도 손을 놓지 않겠다고

끝까지 붙드는 몸이 옆에 있다는 겁니다.


그 몸은 광풍 속에서만 느낄수 있는 몸입니다.

종말에만

불 속에서만

때려죽어도 안 놓겠다는 손입니다.


내가 뿌리치고 또는 그 손을 우짜다가 놓쳐버려도 상관 없는

주님 쪽에서 붙잡겠다고 하시는 몸이기에


그 몸 자체가 이 단절성 속에서만 

우리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라는

아주 아주 장난끼 심한


요 ~~ 물


요 ~~~ 물



바로 불가능성의 몸입니다.


우리는 건방지게

싸가지 없게

뻔뻔스럽게

그 몸과 사귀고 있는 그의 여자입니다.


여자의 역할은

미끄러지기만 하면 됩니다.

아니 저절로 미끄러집니다.

몸 자체가 미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미끄러운 예수님의 리마리오 몸은

우리를 끈적 끈적 하게 붙드시는 겁니다.



왜 광풍 속으로 들어갔을까요?

맞습니다.

믿음 없다는 것을 지적 받기 위함입니다.


화가 난다 화가나 앵그리버드처럼

믿음없다는 소리에 화가나서 확 그냥 막

당장 믿음 있게 만들어 버릴까요? 화나는 김에? 확 만들어?


믿음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여자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래서 문이 이동하는 겁니다.


믿음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믿음 있으면 됩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신랑이 다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자 그럼 이 본문으로 얼마나 수십년 동안 우리는 사기치는 소리를 들어왔습니까?

믿음 없는 자라고 


믿음 없는 것을 맞춘 것은 맞지만

그렇게 설교 하는 자들도 믿음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 죄인 취급 당해 정죄받기만 바빴던 겁니다.


우리는 믿음 있으면 큰일 납니다.

제발 믿음 없으세요

그래야 예수님이 자신의 믿음을 뽐 내시면서 다가오시는 겁니다.

문이 이동해 버리는 겁니다.

일부러 사건을 이중적으로 중첩시키시는 겁니다.

이것을 드라마화 라고 하는데


믿음 좋은 놈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지켰다고 가차이 있고

가장 믿음 없다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주변인들 모두가 믿음 없는 놈이라고 아예 정죄하는 그 가운데


이 두 상황이 중첩이 되어서

예수님의 믿음은 발동하는 겁니다.

문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쓰르륵 문이 바다 건너고 산을 건너고 쓰르륵

귀신을 본 것 아닌가 하고 두려워 덜덜덜 떠는 것이 광풍보다 더 심한 공포인 겁니다.


(마 14:25, 개역)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개역)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그야말로 광풍 보다 더 심한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입니다.

그 문을 보고 베드로가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합니다.

불가능성에 도전 하는 거죠.
불가능성에 도전하세요. 도전을 반대하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도전이 성공하면 안되는 겁니다.

3초 세 걸음 딛게 하고서는 주님께서 물에 빠뜨려 버립니다.

단절 시켜 버립니다.
성공 못하도록 하시는 섬김 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나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덜게 하는 예수님의 방법?
그것이 섬김 입니다.

쭐꾸덩 미끄러지는 겁니다.

꽈당 하면서 굴욕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불가능성을 성공하도록 하는게 아니라

실패토록 만드는 겁니다.


감히 지가 뭔데 문을 통과 하느냐 말이지요.

문이 이동해서 올 때 까지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래야 단절 차단이 되어서 통과하지 못하는 자를 보고서는

저 사람이 탈락 될 정도면 저 같은 놈은 백번 천번 지옥가도 마땅합니다를 알아야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롬 4장)

불쌍히 여김 받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섬김 때문이지

내 믿음이 광풍을 뚫어서가 아님을

물 위를 걸을수 있는 믿음이 있어서가 아님을


오로지 주님께서 문이 되셔서 문을 이동시켜 오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 되심 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알랑 바디우는 이 불가능성에 도전 하라고 합니다.
불가능에 도전 하십시요.
유익되는게 엄청나게 많습니다.

도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이 불가능성 속에 이미 살고 있음을,

그것을 넉넉히 누리도록 되어 있다 라고 말입니다.

막살아라 제발.

막사는 즐거움 뿐입니다. 곧 불가능성 뿐입니다.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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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규






문 밖에 서서 기다려

문 열렸으나 초대받은 자만

누군 초대하고 그러지 못하고

차별이라 아우성

차이를 드러내고자 의도된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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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서서 기다려

문 열렸으나 초대받은 자만

누군 초대하고 그러지 못하고

차별이라 아우성

차이를 드러내고자 의도된 조치

문 밖에 서성이며 돌아가는

문 턱 안과 밖 시간의 층위

이것이 최고의 선이자 평등

이해될 자만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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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 Jin Park님 외 2명이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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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난 이해 안 됨 ㅋㅋㅋㅋ


보편성(플라톤), 개방 철학 - 남성 시스템

특이성(니체 들뢰즈), 차이 철학 - 여성성 - 빠롤 미끄러지는 언어

개별성(히스테리-자궁-매트릭스 구조=부정의 부정 철학) 헤겔 지젝 - 전지적 각하 시점 - 공포 속에서 보기

문이란 개방이 목적이 아니라 단절 차단이 목적


9시간 전 · 편집됨 · 좋아요 · 2


Yun Jin Park WOW~~~역쉬!!!

11시간 전 · 좋아요 · 1


최일규 해설이 죽이네요 ㅋ

10시간 전 모바일에서 · 좋아요 · 1


Yun Jin Park 門의 목적은 [누가 문을 만들었는가]를 질문하게 하는 것. 원래 막혀있었기에......

9시간 전 · 편집됨 · 좋아요 취소 · 2





























누가 나의 어머니며, 나의 동생 이냐? (눅 8:16-21)

2013/09/09 18:50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누가 나의 어머니며, 나의 동생 이냐? (눅 8:16-21)



(눅 8:16,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 8:17, 개역)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눅 8:19, 개역)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눅 8:20, 개역)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눅 8: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마 12:46, 개역)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마 12:47, 개역)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마 12:48, 개역)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 12:49, 개역)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마 12:50, 개역)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인간이란 일단 육의 굴레에서 못 벗어납니다.

만약 벗어난다면 그것은 육의 관계와는 이제 무관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될 일이 없습니다.

(자 그럼 죽음을 미리 앞당겨 봅시다)


불교에서도 또는 사상가들에게서도 소위 출가라는 의미가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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