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냐 vs 십자가냐? (행 17:10-34)


아테네의 우상과 vs 바울의 십자가



(행 17:10, 개역)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행 17:11, 개역)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2, 개역)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 17:13, 개역)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행 17:14, 개역)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행 17:15, 개역)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행 17:16, 개역)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 17:17, 개역)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행 17:18, 개역)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19, 개역)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행 17:20, 개역)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행 17:21, 개역)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 17:22, 개역)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3, 개역)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개역)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개역)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7, 개역)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개역)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개역)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30, 개역)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개역)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2, 개역)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17:33, 개역)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행 17:34, 개역)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일단 철학이란 하나의 마술과 같은 속임수입니다. 트릭.

왜냐하면 다수가 되지 않으면 그들은 사라집니다. 곧 대중성, 인기, 유행 말입니다.


그건 또 왜 그러냐 하면 바로 몸 때문입니다.
가짜 몸에서는 가짜가 나올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에너지요 삶의 원동력인 운동(능동성)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의 수 많는 우상들을 바울이 목격하고 

이들은 매사가 종교성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행 17:22, 개역)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종교성이란 쉽게 말해서 주객이 뒤바뀐 것을 말합니다.
즉 주체가 되어서 뭐든지 믿고파 안달이 난 몸을 어쩔수 없이 채우고자 하는 결핍상태라는 겁니다.


종교성이 많도다 즉 충만상태란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상태이다는 겁니다.
한 쪽이 가득차 있다면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은 아주 아주 결핍된 갈증 상태인 겁니다.
몸 자체가 율법 또는 양심에 저촉 받는 강퍅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뭡니까? 진리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진리에 대한 결핍이다는 거죠.

진리를 대상물로 삼아서 그 진리를

진리이다 싶으면 쪽쪽 스폰지처럼 빨아들여서 몸에 저장하는 방식입니다.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나 바리새인이나 다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카페트 배경으로 깔려 있는 자들에게

즉 종교성이 가득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이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한 죽음과 부활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성만 가득할 뿐이지, 복음은 전무한 부재상태입니다.

결국 종교성이 박살이 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당연히 방어기제가 작동합니다.

몸이 저절로 반응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몸이란 숙주이기에

마귀가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방금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에서 먼저 시비 걸 듯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 충돌로 깡패들로 돌변한 사람들에게 쫏겨남을 당합니다.


그 속에서 아손을 하나 건집니다. 그를 대표성으로서 그 가정을 건지듯 말입니다.

그리고 베뢰아로 갑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여서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날마나 성경을 상고(연구)하면서

귀족들도 많이 믿게 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무리들이 끝까지 따라와서 결국 소동을 일으키는 겁니다.

얼마나 제대로 푸우욱 깊숙이 찔렀으면
저들에게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길래

얼마나 제대로 찔렸으면 바울을 따라 왔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도망치듯이 아덴으로 갑니다.

아덴으로 가니까 피신 온 것이 아니라

다급하게 임시적으로 우연적으로 간 것이지 예정에 없던 행로입니다.

분명 피신처로 잠시 와놓고서는

전혀 아무일도 없었는냥

또 그 아테네를 발칵 뒤짚어 놓는 겁니다.
이런 우연이 필연보다 더 필연적인것이 어디있나요?
남 말 하듯, 아무일 없는 듯, 모든 것이 우연 우발 발생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 낯설음을 새롭다 또는 새 영의 일이다 라고 합니다.

그 아테네를 십자가라는 꼬챙이로 푸욱 푸욱 수셔대면서 말입니다.


저들의 속내가 들통나야 합니다.

그리고 비교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말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과 비교시켜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들이대 수셔대는 겁니다.


바울이 무지 바쁩니다.
성령이 바울이라는 축구공을 뻥차서 이리저리 드리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종교성에 시비를 걸며 태클을 걸고 있습니다. 그냥 못 넘어갑니다.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이들에게 들이대면서 넘어뜨리고 있는 겁니다.


뭐 진리를 사랑한다고? 철학 한다고?

그거 종교성이야

마약이야
속임수야
트릭이야 트릭
초등학문이야


진리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진리를 소유해서 자기가 진리가 되고픈 거야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몸의 본심이야


인간이 신이 되고파서 철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신이 되고픈 인간(동일성)
신을 뛰어넘고 싶은 인간(차이성)

진리가 되고픈 인간, 진리를 뛰어넘어서고픈 인간, 그런 초인 마저 뛰어넘는 인간(개별성, 초월성)


그래서 소크라테스처럼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진리에 대해서 운운하면서 하루 종일 토론을 하는 것이 그들의 일과였습니다.

몇 번 토론하고 나면

돌고 돌고 돌아서 뻔한 이론이 되고 맙니다.
또 권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더더욱 갈증만 더하도록 늘 새로운 사상에,
새로운 이론에 목말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머리에 저장이 된 것은

뻔한 스토리(역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자극제를 찾아서 이미 정복한 산이 아닌, 미지의 산을 정복하고자 하는 겁니다.

뭐 새로운것 없나? 모호해! 모호해! 또 의심에 의심을 해보니 역시나 단점이 있고 

한계가 있으며 모순된 것들이 너무 많아! 완벽하지가 않아!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기에 의문을 해결할수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잘개 잘개 분절시켜서

더욱더 풍성한 생명으로 창조할수 있는지를

분석하고 분석하는 겁니다.


이것이 생명철학 소피스트(들뢰즈)의 철학 아닙니까?


이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부터 궤변론자로 불렸습니다.

무조건 반대를 하고부터 마는 반진리를 추구하는 겁니다.

즉 반진리라는 역설을 주장한거죠. 거짓의 역능을 말하는 겁니다.

과연 너가 말하는 진리가 진리 맞기는 맞나 라고 반대부터 해서

분석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 무조건 이기기만 하면, 이겨서 상대방을 아작내는 겁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부터 진리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이기는 것만 관심둔다고 비판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진리에 대한 동일성추구입니다.

후대에 즉 지금 현대에 와서 바디우는 이 진리에 대해 회귀하자,
진리(불가능성, 불멸성)에 다시 도전하자 라고 

플라톤주의를 재귀환시킵니다.


여기에 반해 소피스트는 동질성의 반대인 차이성 추구, 즉 반플라톤주의입니다.

반 진리입니다.

시뮬라크르 - 환영, 유령 곧 내재성을 추구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잠재성을 추구합니다.
이 반진리의 영향으로 헤겔의 변증법 정반합 사상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두 사상의 대립 속에 사도바울이 투입이 되어 그들과 논쟁하게 됩니다.


(행 17:13, 현대인)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그 곳까지 와서 군중들을 선동하여 소란을 피웠다.』

(행 17:14, 현대인) 『그래서 신자들이 바울을 즉시 내보내 바닷가로 가게 하였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행 17:15, 현대인) 『안내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아테네까지 데려다 주고 실라와 디모데도 속히 자기에게 오게 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갔다.』

(행 17:16, 현대인)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크게 격분하였다.』

(행 17:17, 현대인)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유대인 및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하고 또 장터에 나가서 날마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행 17:18, 현대인) 『그때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도 바울과 논쟁하자 어떤 사람은 `이 수다장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 같다.' 고도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과 그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 17:19, 현대인)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전하고 있는 이 새 교훈은 무엇이오?』

(행 17:20, 현대인) 『당신이 이상한 것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소'』

(행 17:21, 현대인) 『(아테네 사람들과 그 곳을 찾는 외국인들은 보다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데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행 17:22, 현대인) 『바울은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은 분들입니다.』

(행 17:23, 현대인) 『내가 이리저리 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처를 살피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까지 모르고 예배해 온 그 신을 내가 알려 주겠습니다.』



저들의 진리가 뭐, 예술로써 조각과 건축기술 회화 특히 시,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이 시학이 모든 것들의 종점이다 라고 하고 있듯이

진리를 이런 등등의 것으로 표상화 한것이라

우상으로 볼것이 아닌 예술로써 진리를 형상화 한 차원의 시선으로

또 그로 인해 진리를 탐구하는 차원에서 토론을 펼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한덩어리로써 그들은 예술 학문 토론 건축 삶 시 문학 등을 말입니다.

예술로 보자는 거죠. 우상이 아니라 예술.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것은 다 핑계로써 그저 우상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약속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준 것이 아니다는 거죠.

우상은 돌삐 조각만을 우상으로 보는게 아닙니다. 탐욕의 마음자세를 우상으로 봅니다.
육의 소욕을 우상으로 본 겁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성령의 소욕을 증거합니다.

그러니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 드립니다 라는 것 까지 보고서는 도저히 참지 못해서

참진리를 저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신을 추구하는 플라톤 철학이든

신의 반대, 진리의 반대성을 추구하는, 인간 그 자체를 추구하는 소피스트 철학(불교)이든


둘 다 선악의 몸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우상을 만들 수 밖에 없는 몸임을 지적하는 겁니다. 우상, 돌삐가 아닌 비언약을 만드는 것 말입니다.

약속 아닌 것만 골라 골라서 만들어 조작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와 반대되는 예수님의 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십자가의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진리의 광장,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 아데오바고 언덕에서,

즉 저들의 법정에서

너거 다 가짜야 라고 선언하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들어갑니다.

강이아빠 말 마따나 들이대는 침략 그 자체 입니다. 한판 붙자 전쟁뜨자 라고 말입니다.
추수란 추수의 때란 종말의 때란 들이닥침이요 거두어 들이는 겁니다. 갈라지는 전쟁 상황입니다.

참으로 대차죠? 한순간에 다 무너뜨려 버립니다.

뭐 삼십 육년 된? 성전? 맞나 !!! 아 사십육년이네요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 성전을 하루만에 다 무너뜨리겠다고?
뭐? 그래놓고 삼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즉 이 말은 너희들 몸 오늘 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닙니까?

그래 놓고 다시 3일 만에 살리겠다는 겁니다.
허무는 것도 불가능! 지 혼자서? 다시 세우는 것도 불가능.

가짜 즉 우상이다는 겁니다. 약속이 아닌 것들이다는 거죠. 속임수이다 는 겁니다.

예수님 몸 만이 약속이다는 겁니다.
참성전이요(유대인에게는 걸림돌)
참진리(아테네 사람 헬라인에게 어리석음)가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창조주께서 주신 약속은 딱 하나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복음증거가 저들의 상대적인 몸을 증거하는데


너희들의 몸 추구는 신에게 바쳐서 그 신(진리)과의 동일성이든 차이성이든
결국 기쁨, 즐거움 즉 복을 추구하는 것 아니냐?
그래서 손으로 바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참된 신 예수님은 뭔가를 받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다 라고

이전까지 듣어보지도 못한 전혀 낯선 신, 낯선 진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주고받는 거래로써의 신이 아니다는 겁니다. 즉 개방성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 차이성으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인간에게서 출발한 진리, 즉 그리스철학에서의 진리개념은 주고받는 소통이, 개방성이,
일종의 거럐로써 신이나 진리개념을 끌어와서 실천력과 동일성 차이성을 추구하는 것이


그런것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다 곧 진리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비언약(우상)의 특징이 소통을 자기들 멋대로 한다는 겁니다. 부조리죠.
여기에 복음은 더 멋대로 합니다. 막살기입니다. 더 부조리죠.
소통이 아닌 단절로써의 소통이지요. 즉 단절의 단절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인간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상도 인간의 손에서 나온 창작물이듯

우상은 자기투사로써 신과 진리는 자기투시로써

결국 자기유익을 위한 것이다는 겁니다.

다 나 잘 되라고 있는 것이다는 거죠.

진리가 잘되는 것이

우상이 잘 되는 것이

다 나 잘되라고 있는 것이다는 겁니다.

나로 출발해서 나로 회귀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상 곧 자기를 위한 것, 비언약인 겁니다.


이것을 소피스트는 노동(복수심, 원한)을 거부하는 놀이,
게임, 감각, 쾌락, 향유, 즐거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기쁨만이 되돌아 온다는 영원성이라는 겁니다.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 주사위 놀이.

이것이 강요된 선택(마귀장난)인줄도 모르고 자유 자유 자유다 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럼 복음은 뭐냐? 상대적으로 주시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주사위 던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받기만 할 뿐입니다.


그럼 받기만 하는게 뭐냐? 바로 관계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받도록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자체가 단절이 되는 겁니다.


왜 단절이냐?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도 가짜로 판명이 난 판국에

지금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회개 밖에 없다는 겁니다.
주여 저는 마땅히 단절 되어야 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래서 단절이요 이 단절성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겁니다.


회개란 십자가에서 태어난 자만이 이 복음을 듣도록 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 불가능성 중의 불가능성이니

마치 약올리듯이 맛배기만 보여주고 떠나버리는 겁니다.


싶패한 겁니까? 신학계에서 실패했다는 둥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접근했다는 둥 말들이 많지만 그것 다 헛소리고요


듣는 사람은 다 듣도록 되어 있었기에 그냥 떠나버립니다.

약반 바짝 오른 사람들 많았습니다.

뭔가 새것이 안나타나나? 뭔사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유행처럼

뭔가 새것을 바라는 자들에게도

그 소욕을 충족시켜주는 바울의 증거가 아니였습니다.


바울은 그저 회개하라 그 소리만 하고 간 겁니다.


불타는 지옥같은 아테네를 변화시키자
오라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자 세상을 변화시키자 라고 노래 안불렀습니다.

지옥 맛을 아직 덜봤구나 더 봐라 라고 내버려 두는 겁니다.

새 것을 바라는 자들에게 뭔가 감질맛 나는 새로운 것을 준것도 아니요

보편성의 동일성의 신을 알려준것도 아니요

시뮬라크르 차이성의 내재적인 인간 참된인간추구를 알려준것도 아닌


오로지 회개하라 라는 소리만 한 겁니다.

왜냐 설명해서 될 문제도 아니요

전도도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챙길자는 다 챙기고 훌쩍 떠나버립니다.

마치 안식의 주인의 부메랑 기술 즉 자살방지기술처럼

자살하지마 라는 식으로 회개하라 라고 외치고 떠나버리는 겁니다.



이 몇마디만 듣고도 귀있는 자는 다 듣고 눈있는 자는 다 보았습니다.


좀더 설명해 달라

다음 번에 다시 들려도

여운이 무척 많이들 남아서

그들을 다 배려해주는 바울이 아닙니다.


회개해 라는 말만 던지고 가는 겁니다.


즉 사상이나 즉 철학이나 인간의 깨달음 

인간의 진리사랑 진리찾기 그런 실천력 등등에


회개 하라는 말은 그거 다 단절시키는 더 이상의 모호함이 없고

의문의 것이 없는

완벽하게 완료된 것을 지금 알려줬다 라는 겁니다.


깨달아서 알게되는 것도 아니요

진짜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반성해서도 아닌


회개가 대상이 아닌


회개가 주체로써 회개가 마치 의인화처럼

회개가 알아서 자기가 택할 자만 챙기고 휙 떠나가버리는 식입니다.


그러니 회개 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는 사람도

회개가 덮치면 저절로 예수님을 믿고

저절로 믿게되는 회개의 대상물로써

저들에게 그 증거로 남겨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야 말로 진짜 불가능성 중의 불가능성이지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예수님 마음대로이다 라는 겁니다.

왜?


저들의 그리스철학을 보세요 저거들 멋대로 아닙니까?

진리 찾겠다고?

원본 찾겠다고

원본은 없어, 우리는 사본을 추구할 거야 라고

저거들 끼리 싸우면서 지혜를 보완 보완 또 보완하면서 까지 왔지만


원본 왜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제시한 것이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물론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에게 제시한 예수님의 발언으로써

내가 다윗의 자손으로써 다윗이 말한 주다 라고 말씀하셨듯이


지금 바울은 너거 원본추구한다매? 그 원본의 자녀가 되길 바란다메?


또 아빠는 없어 앙띠오이디푸스야 라고 아빠 없이도 충분히 자녀가 될수 있어 라고
소피스트 들뢰즈가 말하는 것 처럼 자녀가 되고파 한다는 겁니다.

하여튼 자녀되길 바라지? 진리를 추구하지?


그래 원본 여기 있다. 이 원본은 너희들에게 받기를 바라는 받는 분이 아니야

너희들이 손으로 바칠 것 없어

너희 손으로 지은 신의 집에 있지도 않아

그러니 회개하란 말야

그 원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분이야

이 분의 자녀는 다 회개하게 되어 있어


왜? 엉뚱한 것을 신이라고 했으니 말야


뭔가 부족한 것처럼 그 결핍을 채울려고 했으니 말야

저절로 아니였구나 라는 회개가 저절로 나오도록 되어 있어


라고 몇마디 한 것 없이 즉 저들이 듣기에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말했다고 툴툴 털고 챙길자 다 챙기고 떠나가 버립니다.


헐 !!!!!!!!!!!!!!!!!!!!!!!!!



주님 손해 본 것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된 거죠 뭐


인간만이 아쉬워 하죠

채울라 채울라 카고 있는데 미끄러져 버리는 겁니다.


저들이 들어야할 소리는 전부 다 말했습니다.

딱 할 말을 딱 맞춤맞게 다 했고요

맞습니다 맞고요 다 들려줬습니다.


복음의 씨앗은 제대로 뿌려진 겁니다.

문제는 그 씨앗에 의해서 정체만 들통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챙길 것 다 챙기고 30배 60배 100 배 다 열매맺도록 하셨습니다.

이 보다 더 부조리 한게 없다. ㅋㅋㅋ


뭐 문제 있나요? 문제 없어 문제 없어

그럼 떠나도 상관 없죠?


또 뿌리러 말입니다.


씨앗이 알아서 가려냅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씨앗이 알아서

복음이 알아서 다 챙깁니다.

주님 소관이지 사도바울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우상을 무너뜨려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것이지

지식에 더 지식을 더하는 것이 전혀 중요치 않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충분히 다 증거했기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의 뭐?

스피드 즉 도끼입니다.

자기 발등 찍어야 하듯이

우상을 찍고 찍어  파헤치던가?

자기 범죄한 손, 늘 가따바친 손, 늘 신전을 건축하는 손, 늘 영웅을 조각하는 손을 짤라야, 

찍어 버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할례하라 찍어라 짤라라 라는 겁니다. 즉 회개 하라는 겁니다.

할례는 몸을 치는 겁니다. 짤라내는 겁니다. 눈이든 팔이든 꼬추끝이든
짤라내고자 하는 십자가의 대상물인 몸을 염두한 겁니다.
육의 단절 입니다.

진짜 할례 하거나

진짜 손 짜르거나 말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다 예수님 믿는게 가능하게요?
가능한 것 말고, 불가능한 마음판을 할례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라는 말을 말로 하면 다 예수님을 믿는게 가능하게요?
이 단순한 것 조차도 마귀가 심겨져서 누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소리를 못한다고 ㅋㅋ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속임수를 부린다는 것을 애들도 다 아는데?
아니 그럼 자신들은 목사로써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소리를 할 줄 아니까

그 자체로 정당하다는 자기 정당성 아닙니까?

그게 무슨 예수 믿는 사람이고? ㅋㅋㅋ
아이고마 이런 자들이 목사자격증을 땃으니 원 ㅋㅋㅋ
사기꾼들이지요.
육적인 할례로 떠보겠다는 시험인 겁니다.
약속 아닌 것을 받은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

성령으로 인한 회개 탄식 상한심령이 되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라

새로운 지식으로 인해 자신들이 봉착한 난제 수수께끼를 풀이하는

해석법 새로운 지식 등등을 추구하고 있으니


회개와는 전혀 무관한 겁니다.


그러니 회개 말고 지식 좀 더 알려달라는 겁니다.

신, 진리, 불멸, 불가능성에 대한 지식이 어차피 신을 추구하는게 같으니까
좀 더 자세히 충분히 알려달라는 거죠


아니! 말라꼬요!!

뻔뻔스럽게 싸가지 없고 입에 침도 안바르고 거짓말 하듯이 느껴질정도로

자기가 말 꺼내놓고 다 설명도 안해주고

그냥 휙 가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싸가지 없나요

얼마나 뻔뻔스럽나요 자기가 말 꺼내놓고 말이죠.

얼마나 거짓말 같나요 그래서 부활이야기 하니까 많이들 비웃었습니다.
얼마나 얍삽합니까? 해결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갈증만 더하도록 결핍만 생기는 구멍이 뻥  뚫혀져 매꾸어 넣을 길이 없도록 하는 겁니다.
빈공터라는 전쟁의 소욕만 불러일으킨 겁니다.


마리아의 기도처럼 얍삽하게 전쟁 붙여놓고 자기는 뒤로 빠져 누락되는 식이다는 거죠.
싸움 붙이고, 두 소욕을 충돌 시켜놓고
자기는 정작 얍삽하게 뒤로 빠져 구경이나 하고 있는 겁니다.
보호자 싸움이니까 말이죠.

사두개인처럼 부활이 아니라 어느정도로 천국과 근접, 신과 근접,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바울로처럼 페드로처럼 그렇게 살수 없을까?

욕심도 없이 ~~~~ 이런 근접 동일성을 추구하거나

또는 바리새인처럼 부활되어도 내 몸이 부활되어야지
남의 몸, 저 더러운 세리의 몸은 부활되면 안돼!
내가 제일 거룩으로 구별되는 차이나는 자야 라고
여전히 자기 몸의 부활로 잇기 잇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든 말든 사도바울 내 소관이 아니다 라고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라는 식으로

훌훌 먼지 털 듯이 털어버리고 바로 나가버리는 겁니다.
단절의 몸인 예수님의 부활의 몸 증거 했으니 손 터는 겁니다.


이거 뭐 훵하니 썰렁 ~~~~~~~~해 지는 겁니다.

얼마나 얍삽합니까? 수수께끼 던져 놓고 답도 안갈쳐 주고!
이게 무슨 진리의 광장이냐 말이죠. 아레오바고.

진리를 안 갈쳐주지롱 이라고 놀리듯이 애간장타게 하고서는 가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사람을 좋게 하거나

이해하기 쉽게 납득이 가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툭 내뱉듯이 내뱉고 그 말씀이 알아서 움직여

운동력으로 알아서 가려내고 좌우의 어떤 날썬 검보다 예리하게 가려내어서

챙길 것 다 챙기는 것을

바울 본인도 도리어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졌으니

전혀 아쉬운 것 없이

즐겁게 나가는 겁니다.

신나는 종말이지

안타까워 하는 종말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 말씀의 운동력은

저들의 소피스트 철학 시뮬라크르의 내재성 운동력 보다

더 명료하고 또 완벽한 운동력이니


사도바울이 소피스트(들뢰즈의 생명철학)에게 깨진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아작 박살이 난 셈입니다.


원본이 없다고? 원본이 왜 없어! 여기 있잖아

라고 제시를 했으니

유구무언입니다.


괜히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던 사두개인들에게


(마 22:23, 개역)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34, 개역)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부활이신 예수님을 시험할려는 바리새인(부활있다)에게 왜 다윗의 자손을 언급하시느냐?


(마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그와 같은 의미로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분을 소개하는 식입니다.


즉 저들을 믿게 해 줄려고 안달이 난게 아니라

그 반대로 단절 시키고자 가로막고자


뭐 진리를 찾겠다고? 진리와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하고프다고?

아나 여기있다

문은 닫혔다

차단의 목적으로 문을 박윤진 성도가 언급했듯이

인물 누구 곧예수님 자신이

문으로써

차단으로써 

종말로써

단절로써 지금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차단 하겠다는 겁니다.

짤라내겠다는 겁니다.


즉 진리를 찾는 사람을 찾는게 아니라

진리 앞에서 나는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는 자를

회개가 찾아내는 겁니다.


그 사람 다 챙기고 휙 떠나가버리니

이 얼마나 무조건 성공입니까

실패란 없습니다.


진리의 해석법이

동일성이든

차이성이든

이를 합친 정반합이든

다 인간의 손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저들은 동질 근처도 못간 동일성 시늉만 한 것이고 충분히 동일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차이 근처도 못간 차이성 시늉한 것이고 제대로 차이를 내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개별 근처도 못간 어설픈 개별성으로 제대로 개별화되지 못한 겁니다.


육적 할례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손으로 하는 것이 그것 밖에 안되기에 손 할례가 아닌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그 피로써, 오직 사랑으로써, 긍휼히 여길자를 여김으로써

사랑 하실자를 사랑하시겠다는 겁니다.



달음박질 함도 아니요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롬 9:10,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오직 그분의 뜻대로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은 건방지게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숙제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알아서 숙제할 뿐이요

사도바울 본인 조차도 그것을 누려야 할 판국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잖아요


달음박질 한 자도 아닌자들

원함으로 인해 긍휼함을 입은자들이 아닌 자들


오로지 토기장이의 권한으로만 긍휼히 여길자 긍휼히 여기고,
주님 마음대로 하시고자 하시는 자로 강퍅케 하는 자로


이렇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 현상이 아테네에서 성공적으로 나타남을 목격하고서는

휙 떠나버리는 겁니다.


지금 바쁩니다.

또 고린도에 가서 또 씨앗 뿌리고 갈라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또 떠나고 또 떠나고

긍휼이냐 강퍅이냐 그 갈라지는 현장을 보고

바울은 손 털고 갈 뿐입니다.



그러니 이 복음을 위해서 철학도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긍휼을 위해서 강퍅함이 동원이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왕과 군사를 통해서 큰 영광을 받으셨듯이

그들의 강퍅함이 이 복음의 복음 되심

주의 주 되심을 위해서 동원이 되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확인하는 종말을 누리기 바쁜 겁니다.

주워 먹기 바쁜거죠.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바울은 참으로 뻔뻔하고, 싸가지 없고, 지가 말 끄내놓고 마무리 짖지도 않은 거짓말하는,
얍삽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서는 손털고 챙길것 다 챙기고서는 빠져버리는


그야말로 아! 속았다 라는 기분이 들도록 하겠지만

뭐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손 털 털 털고

신나게 그 다음 장소 고린도에서도, 또 이 신나는 종말을 터트려
종말의 소욕으로 인한 갈라짐을 목격해야지 라고

옮기기 바쁜 겁니다.



우리도 철학 보다 복음을

썩어질 내 몸 보다, 다시 사신 주님의 몸의 운동력을

사도바울처럼 누리기를 바라고 바래야 할 것입니다.

이런 약속 아닌 것들을 배경으로 깔고서, 약속은 우상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개역)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4, 개역)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5, 개역)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강퍅케 하는 성령 (행 17: 1- 9)

2013/09/11 14:25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강퍅케 하는 성령 (행 17: 1- 9)


안식일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유대인들 강퍅케 만들기


죽을 곳만 골라서 사도바울을 등 떠미시는 이유?



(행 17:1, 개역)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행 17:2, 개역)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 17:3, 개역)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4, 개역)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 17:5, 개역)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행 17:6, 개역)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 17:7, 개역)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 17:8, 개역)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행 17:9, 개역)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보통 인간 같으면 충돌이 있을만한 곳은 피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다릅니다.

자신의 소욕을 반드시 피력 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아시아행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복음을 전파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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