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퍅케 하는 성령 (행 17: 1- 9)


안식일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유대인들 강퍅케 만들기


죽을 곳만 골라서 사도바울을 등 떠미시는 이유?



(행 17:1, 개역)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행 17:2, 개역)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 17:3, 개역)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4, 개역)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 17:5, 개역)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행 17:6, 개역)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 17:7, 개역)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 17:8, 개역)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행 17:9, 개역)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보통 인간 같으면 충돌이 있을만한 곳은 피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다릅니다.

자신의 소욕을 반드시 피력 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아시아행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복음을 전파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럼 뭡니까?

소욕(유익)이 있는 곳만 골라서 간다는 겁니다.
즉 관계성(네트워크 흐름)입니다.
주인 싸움, 보호자 싸움입니다.


그 육의 소욕이 팽팽한 곳에 가서

성령의 소욕을 들이댐으로써

졸지에 충돌이 격하게 일어나는 그 현장 속에서 복음은 그 값을 하는 겁니다.
복음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인간을 위한 복음은 없습니다. 자기만 드러낼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부러 애굽 속에 탁란 시켜 놓고

한꺼번에 빠져 나올 때

마귀가 곱게 보내주지 않겠다는 그 강퍅함을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그 속에서 구원 곧 성령의 소욕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소욕이 드러날려면 반드시 육의 소욕이 덩달아 동원이 되어

카페트 배경으로 깔리는 식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그렇게 지난 시간에서처럼 고생 고생을 하면서

성령의 바울 죽이기를 통해서 간수를 살려내었듯이


또 마치 열국의 어무이 사래가

애굽 족장에게 첩으로 인신매매로 아브라함이 팔아 넘겨서 팔려간 사라,

애굽의 여러 아내 중에 하나로 이뻐서 첩살이로 들어갔는데

정작 애굽의 씨가 말라버리는 애굽여인들의 태가 다 닫혀버리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창 12장, 장 20장)

(창 12:18, 개역)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창 12:19, 개역)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 20:7, 개역)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창 20:18, 개역)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아이구 형님! 감히 못 알아보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형님 이것 받고 여기를 떠나 주세요 라고


괜히 그것을 마치 순찰하듯이 선발대로써

사래가 팔려갔는데

오히려 형님 대우 받으면서 도로 돌려주게 되는 겁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거죠.


이것이 범죄는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교환 즉 증여 잉여이다 라는 겁니다.

너거들의 흐름(잉여)을 다 끊어버리겠다는 겁니다.
따른 낯선 흐름, 새 흐름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복 된 자를 축복하면 축복받고, 복의 사람을 저주 하면 저주 받는 겁니다.

(창 12:1, 개역)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개역)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개역)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감히 믿음의 사람을 몰라보고 말이야,

나중에서야 아이구 형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고 나오는 겁니다.


사도바울과 실라가 괜히 로마시민권을 가지도록 하신게 아닙니다.

아이고 형님 몰라봤습니다 라고 얼른 풀어줍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마치 복의 사람처럼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처럼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을 영접하면 복이 되고

즉 있는 자는 더 받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외침을 거부하면 저주가 되는

즉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그야말로 십자가가 가는 곳마다

이런 갈라지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어차피 풀려날것 왜 매맞고 감옥게 갖히고 왜 그런 것이 필요하냐?
해석불가 입니다. 수수께끼 비밀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즉 가르는 단절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섬김이요 선지자 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참으로 얄밉게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곳에만 골라 골라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소동이 벌어지게 되니까 말입니다.

즉 가장 육적인 소욕이 있는 곳에만 골라 골라 가는 것이

성령의 액션 이다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당, 예배당만 골라 골라서 말이죠.


그 발걸음 발걸음은

그야말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로 몰아갑니다.


보이는 것들은 그저 배치물에 해당 될 뿐입니다.

감옥이라는 공간

보석금으로 풀려나듯이 거기에 사용되는 돈

안식일이라는 시간

회당이라는 공간

이런 것들은 다 인간의 눈으로 감지 가능한 감각적인 보이는 것들입니다.


이런 모든 피조물들이 보이지 않는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이 됨으로써

하나의 무기로써 작용이 되는 겁니다. 거룩한 무기 말입니다.

거룩한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입니다. 도구죠.


그러니 구지 사도바울이 그런 것들을 소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따라올 뿐입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사도바울의 증거를 높이고자 함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즉 나타낸다는 것은 안보인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여기에 보이는 것들이 동원이 된다는 것은
이제 보이지 않도록 누락이 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말은

이제 보이는 것들은 누락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락 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졸지에 강퍅하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미리 알아서 일까요?

그래서 골라 골라 죽을 곳으로만 골라 가는 겁니다.

오히려 남들은 가장 피할 곳이라고 여겨서 피하는 그런 곳을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청년 두명이 있는 무덤가를 일부러 골라 가시고

유대인들이 피하는 사마리아 야곱의 우물가를 일부러 골라 가셔서


의도적으로 팔을 어긋맞게 하시듯이 말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은 그럼 믿음의 조상처럼 복의 근원처럼

슈퍼영웅이 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바울 본인도 누락되기 위해서 배치되는 배치물에 불과한 겁니다.
자신이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앞장세우는 겁니다.


즉 이 분이 나의 진정한 심판자이다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가 주가 되셨고

나도 그를 핍박하던 자였는데 나의 주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무릎을 이유 없이 꿇었듯이

너희도 꿇어라 라는 겁니다.


영문도 모르는채 쳐들어와서 꼼짝마 널 체포하겠다 라고 바울이 외치는 겁니다.


웃기죠 어디서 굴러온 뼉따귀가 쥐뿔도 없으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혐의로 체포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소리 아닙니까


그러니 애굽와 바로(파라오) 왕이 맞다니깐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나를 체포하겠다는 것이냐?



과거에는 신과 왕으로써 체포하고 죽이고 합니다.
포로잡고 하죠. 즉 전쟁의 모든 원인이

신과 왕입니다. 이름싸움입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데?

(출 5:2, 개역)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 신 편이냐? 이 왕의 편이냐? 아니면 저 신, 저 왕의 편이냐?

개인의 성향, 의향, 민주주의, 자유 그 딴거 다 소용없습니다.

가족에게 칼이 목에 들이닥치면 배부른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뭐 21세기 지성의 시대에 교육열이 어떻고 저떻고 다 소용없습니다.

앞으로의 전쟁도 결국 이 개념입니다.

어느 국가 편에 설래?


니 나라냐 내 나라냐 라는 전쟁입니다.


물 하나를 놓고 싸울때도 그냥 안 싸웁니다.

국가이름과 민족이름과 신의 이름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유익이라는 경계에 그 신경선을 건드리는 것은

소욕이라는 관계성 만이 유일한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겁니다.


하늘의 세계가 침략하면 이유없이 그냥 초토화 당함이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살 수 있는 길은 뭡니까?


주인 교체 밖에 없습니다. 국가 나라 교체당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누구 생각 납니까? 맞습니다. 기생라합 입니다. 민족과 국가의 배신자 입니다.
세리 입니다. 매국노 세리는 유대인의 배신자 입니다.

(행 16:27, 개역)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 16:28, 개역)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 16:29, 개역)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개역)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개역)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2, 개역)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이들 창기와 세리가 먼저 하늘 나라에 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들어가게 됩니다. 도대체 뭘 믿고? 믿음 되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무조건.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그런데 웃기는 것은 국가와 나라와 민족이 교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가 전나라 전민족 전주인 전남편을 연민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전쟁의 맛을 제대로 못봐서 그런 겁니다.


바울 보세요 까불다가 나 이렇게 조 터졌다

빨랑 항복하라고

죄수 복을 입고서 특별사면 당했다고 외치는 겁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마치 바울은 빨갱이(북한) 옷을 그대로 입은채로

여러분 간나 동무들 나도 항복해서 광명 찾았시오

빨랑 자수하라우 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 옷을 갈아 입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있다가 저리로 넘어간 사람인지 어떻게 아느냐 말입니다.


여기서 옷이란 육체입니다.

육체 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붙어있는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다는 겁니다.


가시떨기 나무는 보잘 것 없는 겁니다.

그런데 죄수복을 벗어버리고 바로 자신이 불꽃이라는 의인이 되어버리면

누가 수셔댈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무기가 아니라 무기를 조종할려는 주체가 되는 식이니 말입니다.


거룩이 휘감긴 기계가 되어야 하는데

지는 거룩이 되고 남을 기계로 만들겠다고 하는 심뽀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자꾸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기계로 삼아

예수님을 떠보면서 시험하는 겁니다.

즉 자신이 거룩이다는 거죠


그런데 떠봤는데 너무 잘못 떠봤어

진짜 거룩을 건드렸으니 

다 도망치고 한 놈도 남아 있지 않는 겁니다.

유사 복음 유사 거룩을 흉내 내다가 들켜 버려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보다 더 더한 더러움이 들통날까 싶어서

다 도망치고 달아나는 겁니다.


그런 유대인 회당이, 즉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 교회 예배당이 여전히 있는 겁니다.

바울을 기계로 삼은 거룩이

곧 성령이 그거 가만히 두겠습니까?


수셔대야지요


요즘 아니 10년 넘었지요

신천x 이단들이 전도하는 방식이 이런 방식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목적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누락되어야 함이 아니라

교세 확장을 위해

땅따먹기 광개토왕 노릇을 하는 식인 겁니다.
광 광 광개토왕 우리나라 제일의 땅따먹기 일인자!!!


그러니 기존의 교단이 했던 짖을 반복하는 겁니다.

긴장을 늦추면 빼앗기는 거죠.

신천x가 노마디즘 축에도 안들지만 전쟁개념으로 나와버리면

요즘 어떤 교회가 전쟁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그러니 빈틈에 무너지는 거죠.

무너지면 감사하면 될 것을

아깝다 아깝다 돈 빼앗겼네 라고 한탄하니

빼앗겨도 싼 겁니다.


빼앗은 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자신 마저도 누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았다는 이유로 더더욱 하나님이 자기편이고

거룩이 자기편일줄 알고 활개를 치고 있으니


시간이 좀더 지나면 자기들 보다 더한 놈들 나타나면 똑같은 식으로 역시나 빼앗기고

또 배앗겨도 돈 빼앗겼다고 울부짖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몽둥이 역할을 한 앗시라가 교만하여 다시 바벨론에게 먹히고
또 강국 페르시아가 나타나 또 먹이고

이렇게 먹이사슬 즉 관계성에 놓여지게 된 것이

그것은 애초부터 복음과 상관없는

복음을 빙자한 교세확장에만 눈이 먼 겁니다.

아니 복음이 그렇게 저들을 배치한 겁니다.

기존의 장자교단이라고 우기는 권력교단들에게 당했던 서러움을

그런식으로 풀어서 복수하는 심뽀인 겁니다.

그러니 더 성경적으로 하겠다고

말씀 하나 하나를 더 잘 지킬려고 하는 것이지요.


복음은 하나도 지킬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기쁜소식인데

아예 무거운 짐을 더 지고 앉은 겁니다.


저의 신학교 친구도 군대 갔다 오더니만

애가 그렇게 순하던 애가

갑자기 변해가 후배들 군기 잡으면서

신천x를 퍼트리고 있길래

뭐 20년 조금 덜 된 때였는데

이미 신학교에 다 퍼질정도로 많이들 넘어갔으니 뭐

세력이 장난이 아니다는 거죠

요새 부랴 부랴 기존교단들이 교인 고객 회원 빼앗길까 싶어서

그동안 안주하다가 부랴 부랴 교육 시킨다고 난리인데

같은 놈들끼리 빼앗기든 빼앗든 제자리 뛰기일 뿐입니다.


뭐 우리교회에서도 그곳에 빠질뻔 하다가

옆길로 센 분이 몇분 있어 다행히도 여기로 왔던데


유행이란 결국 힘 개념이니

힘 빠질 때 라야 비로소 진위가 나타나지

한 참 마약 복용 상태에서는

그런가 싶어서 같이 말려가기 마련입니다.
가면 유지가 결국 돈 때문이니
주님께서 배치시킨 마귀이기에 마귀 값을 톡톡히 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미 힘 곧 마약을 먹었다는 자체가

보이지 않는 분을 쫏은게 아니라

보이는 것을 쫏은 겁니다.


다음 시간에 다룰 아테네에서의 바울의 논쟁이

바로 소피스트 즉 요즘으로 치면 니체 계열의 들뢰즈(차이철학)나,


인간의 지혜 곧 헬라철학인 플라톤(보편철학),

위 둘을 조합한 헤겔의 정신(개별철학, 전지적 가카 시점)


이들 모든 몸 철학이

십자가의 몸과는 전혀 안맞는 겁니다.


나름대로 있음에서 있음으로 창조력을 발휘하고자

창조적 역행이라는 "- 되기" 등등을 백날 추구해도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미 그 쪽 세계에서 다 해봤다 라고 해서 나온 결과가


곤고함이다는 겁니다.


그냥 솔직하게 바울처럼 말하면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하랴


캬 이것이 정답입니다.

사망의 몸 이라는 겁니다.


사망의 몸에서 나온 발상들이

저런 획기적인 천재들의 지혜입니다.

헬라인이 찾고 찾는 지혜입니다.


유대인은 답을 이미 찾았어도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으로 넘어가질 못합니다.

툭 걸려 걸림돌에 막혀 버린 겁니다.

며느리 다말을 넘어설수가 없는 겁니다.

우찌 하나님이 예수님이냐 라는 것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백날 해도 안되기에
(그래서 처소를 예비하시고자 했던 예수님 입니다.)

모든 신앙 모든 경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은 신이고 예수님은 인간 요셉의 아들

백날 머리 짜내고 해도 안되는 겁니다
.

그러니 지우개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지우개를 여전히 찾고 있는

그러니 전남편, 전국가, 전민족, 전나라, 전하나님을 지워버리는 수가 없는 겁니다.

유일하게 지울수 있는 지우개 인데 말입니다.
삭제 단절은 커녕 개방, 접촉을 하고 있으니 바벨탑인 것이죠.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속죄제물인데 말입니다.

(롬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도바울이 그 속에 다 있어 봐서 압니다.

결론은 곤고함입니다. 사망의 몸에서 백날 해봐라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아니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에 정통한 자가 말합니다.

지켜도 소용없다고 말을 합니다.

오히려 지키면 지킬수록 열심만 더해져서

모호한 의문의 증서에 빠져 헤어나올수가 없다는 겁니다.
올무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답이냐?

왜 율법이라는 더더욱 죄를 더하게 더하게 만드는, 갇히도록 하는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답이냐?


율법책을 찢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파우스트 처럼, 또는 데스노트를 찢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또 또 또 무율법주의자 라고 공격하겠지요.


예수님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율법을 수호하겠다고 나서는 열심자들이 등장하겠지만


(마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 이룬다는 말씀에 포인트가 있는 겁니다.

즉 율법은 어떻게 찢어지느냐? 어떻게 도말되느냐?

율법의 말씀을 다 성취하심으로써 이루어지고 찢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십자가입니다.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 다 이룹니다.


그런데 무율법주의자를 처단하겠다고 나서는 그 자들은 율법에 의해 정죄당하는 죄인이 아니라


율법을 수호하고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칠 수밖에 없는 돌삐든 거룩자이기 때문에


문제는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괜히 율법 수호할려고 하니

고침을 못 받는 겁니다.


차라리 소경이면 고침 받을텐데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완성이라는 사랑의 관계성

즉 소유성에 놓여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엉뚱하게 율법의 대상물이 된 소유성이 되기에

전남편에서 못 벗어난 거죠.


두 주인을 못 섬깁니다.


전남편과 이혼하지 않고서는 새남편과 양다리 걸칠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율법 지켰냐 라는 말을 새남편이 묻지 않기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정죄를 나는 안한다고 하신 겁니다.


또 이 부분을 무식하게 양탈무리는 그래도 다시는 죄 짖지 말라고 했잖아 라고

갑자기 자기들도 비판하는 문자주의로 빠지면서 공격하고파 난리 인 겁니다.

관계성에 아예 관심이 없고


즉 관계성이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입장에서

과연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를

자신을 쳐다볼 필요도 없고

돌삐 든 자를 쳐다볼 필요도 없는

오로지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를 목격해야 할 입장이

바로 관계성인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느냐에 주목하는게 아니라

내가 또 어떻게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잘 유지하느냐?

옳지 그래 예수님 말 대로 다시는 죄 짖지 않도록 해야지 라고 나오니

이것은 자기 숙제이지

예수님의 숙제를 쳐다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돌삐든 자들과 뭐가 다릅니까?


왜 그 순간에 하필이면 중간에 낑긴 자로써 사건이 발발 했는지 조차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무식하게 이단감별자로 자꾸 나대는 겁니다.

본인이 늘 예수님에게 이단 취급 당해야 마땅한 누락 되어야 할 자임을 모르고 말입니다.


사도바울 보세요

이단감별사로 나선적 있습니까?

그 반대죠

이단 감별사는 돈이 되고

인간을 유익케 만들고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써

원치 않아도 돈이 들어오게 됩니다.


바울은 이단감별사 노릇을 한게 아니라

본인이 아예 이단이 되어서

그 속에 십자가 폭탄을 설치하고서는

본인은 얍샵하게 휙 빠져 버립니다.


마치 마리아가 임신을 하고서는

엘리사벳이 하는 고백을 보고서

갑자기 기도를 하면서

두 세계를 전쟁 붙여달라고 싸움 붙이고서는

얍삽하게 자기는 빠져버리는 식처럼 말입니다.

내 숙제 아니고

주님의 숙제가 터져라 라고

자신도 누락됨을 당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기도 아닙니까


바울도 지금 오늘 본문에서 그런 식입니다.


본인은 그저 예수님의 숙제로 인한 결과물을

그 원인 없는 결과물을 만나처럼 주서 먹기 바쁜 겁니다.


매일 매일 떨어지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기 바쁜데

무슨 숙제를 합니까?


숙제 할것이 없다는 것이 바로 복음인데


막먹고 막마시고 막춤추고


오죽하면 마귀들에게 이런 별명을 얻느냐 말이지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마귀들에게 이런 별명 못 얻으면 그거 가짜죠.


마귀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겁니다.



왜? 마귀는 할게 너무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는게 없는 싸가지 없는 마리아

예수님의 다리를 무릎 벼게 삼아서

싸가지 없이 놀기만 하는 그 마리아를


가만히 두고 보겠습니까?


반드시 한 소리를 하지요.


너무 너무 막사니까

자신과 대조가 되니

마귀가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이단 감별사로 마귀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못 넘어오는 겁니다.


그 단절성을 사도바울이 직접 마귀가 되어서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수가 없어서 

스데반 집사를 죽였잖습니까

본인이 다 격은 겁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겁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 본인이 스데반처럼 깨작 깨작 구약의 모든 인간 해석을 다 뒤엎어버리고


청년 사울(사도바울) 같은 자들의 심기를

지금 사도바울이 깨작 깨작 건드리면서

지금 유대인 회당만 골라 골라 가고 있습니다.


신천x 흉내내는 것일까요?

신천x는 그 교회를 접수 할지 모르나

물론 두 깡패들이 서로의 영역을 접수하겠다고 설치겠지만


근본적인 사고방식 구조를 판 뒤짚지는 못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판 뒤짚기입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사고방식을 뒤짚는 겁니다.


산자를 보고 죽은자 취급하고

죽은자를 산자로 취급해 버리는 시선이라면

모든 것은 전도되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 보이는대로 행동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인들은 보고 있기에

판 뒤짚기가 목적이지

이 쪽 편에 서서 저쪽을 빼앗아, 이 쪽을 이롭게 하는게 없습니다.

결국 신천x에 신천x 본인들이 이용당할 뿐이지요

누구처럼 기존의 모든 교단처럼


자기 숙제가 없기에 그 딴 짖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 복음입니다.

아니 누구 좋으라고 누구 배 채워줄려고 그런 미친 짖을 하는 지 원 ㅋㅋㅋㅋ


아직 배가 덜 고파서 그런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지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뜯어 먹기 바쁜 판국에

교단 영역 땅 따먹기?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느냐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 빈 공백을 자기가 뭘 하느냐로 채우는 겁니다.


전도 해야 하고

밭도 갈아야 하고

시집도 가야 하고

장가도 가야 하고


아직 종말이 안 보여서 그런 겁니다.

노아의 때와 같은 겁니다.


종말은 주님의 숙제인

모든 것을 불 속에 집어 넣어서

안 녹는 것만 끄집어 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말한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부조리 중의 부조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부조리를 뽑아내는 것이 종말입니다.


씨앗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물 불을 두려워 않고 뛰어드는 용기와 

어떤 시련에도 상처받지 않는 강인함, 

차갑지만 약한자를 감싸앉는 따뜻함을 가졌을 겁니다. 

단언컨데 씨앗은 가장 완벽한 부조리입니다.


생명이라고는 찾아 볼수 없는 십자가 나무라는 하나님의 저주가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 무슨 모순이며 부조리 입니까?


예수님을 이단 삼아 이단감별자로써 가장 열심히던 자가

이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

목숨을 아예 내 던졌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개인의 사생활이 아예 없고

성령은 그를 혹독하게 쇠사슬만 몸에 채울 뿐입니다.


이 관계성 외에는 되도않는 것 들이대지 말라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는 의미 없다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겁니다.

모든 것을 소멸 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는다는 둥

내가 행했다는 둥 그런 것

십자가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내보자 말이죠

과연 나올수 있는지?

녹아져 사라져 버리는지?


죽었다가 살아난 분은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면 예수안에 있는 자는 무조건 사는 자입니다.

(고전 15:16, 개역)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 15: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8, 개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전 15:19, 개역)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 15:20, 개역)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즉 새로운 기준이 떳다는 겁니다.

죽고 사는 인간의 숙제로써의 기준이 된 것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기준


그 기준을 들고 사도바울은 수셔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대표 곧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의 회당만 있는 곳만 골라 골라서 수셔대는 겁니다.

신천x가 교회만 골라 골라 수셔대듯 하는게 아니라

그런 신천x도 십자가는 수셔대는 겁니다.



부활이란 새 기준입니다.

그러면 옛기준은 그 새기준으로 인해 무너져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옛기준에서의 부활개념을 습득한 인간이라

자꾸 자기의 부활을 꿈꾸는 겁니다.

그거 새기준이 무너뜨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만 있으면 족하다 라는 것이

새기준인 부활입니다.

그러니 거꾸로인거죠,

옛기준의 시선에서의 부활로

천국까지 넘보고 연장 시킬려고 했는데

정작 그것을 새기준인 부활이 짖밟아버리는 겁니다.


부활이란 생명이 죽었다가 사는게 아닙니다.

영생불멸이 아닙니다.

부활이란 주의 주 되심이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되지 않는 자는 이미 지옥의 사람 답게만 굴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의 주 되심이 부활입니다.

그냥 주가 아니라

주가 주를 치시면서 늘 새로운 주님으로써 자리잡는 주입니다.

나의 주로써만 만족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나의 주로써의 주가

그런 내가 주님을 섬기는 그런 주로써 자리잡고만 있는게 아니라

나를 지옥 보내시는 주로써의 섬기는 주까지도 자리잡고자 하시는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분 앞에서

그런 주의 주 되심 앞에서

내가 건방지게 나를 내가 심판한다든지

내가 나를 움직여서 말씀 지키고자 한다는 그런 시건방을 떤다든지

내가 잘 믿고자 마음을 새롭게 고쳐 먹고자 하는 그런 짖을 하는 그 자체를

악마성으로 고정하시는 기여이 주가 되시겠다는 주로써 주의 주 되심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도착적인지 스토커입니다.

때려죽어도 못 벗어나가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널 사랑해서

화목제물 곧 사람 하나 죽였다 라는 겁니다.


이거 좋은 의미 아닙니다.

엽기적인 의미입니다.

내가 널 너무 너무 사랑해서

사람 하나 죽였다는 겁니다.

나의 가장 아끼는 독생자를 죽였다는 겁니다.


거의 스토커 도착적 아닙니까?


율법은 팔루스적입니다.

남근적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돌삐 드는 상황이 드라마화 됩니다.


바울도 청년사울때에 스데반 죽이는 상황이 그랬었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팔루스의 외설성 보다 더 더 더 외설적입니다.

즉 히스테리입니다.

히스테리 찬양 히스테리 찬양 히스테리 찬양 합시다 할렐 루야 ~~~~

율법 보다 더 더 더 빼도박도 못하는 스캔달 입니다.
강이아빠 말마따나 잉여는 스캔달입니다. 우발적이며, 원인 없는 결과로써 불쑥 튀어나온
그야말로 불가능성 중의 불가능성입니다.


아니 사도바울 죽이기를 해서 간수를 살리는 엽기적인 외설성

사도바울 버려버리고서는, 야손 또는 간수를 선택하시는 겁니다.

버림받아야 되찾는 겁니다.
영화제목 "죽어야 사는 여자" 라는 제목 처럼


마치 지신밟기 하듯이 스으윽 지나가면서 흔적을 남기듯 선을 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깡패들로 돌변한 자들은 이 바울과 실라를 놓쳐버립니다.


열국의 어무이 사래가 애굽을 지신밟기 하듯이 선발대처럼 쓰윽 애굽족장 집안을 지나갑니다.

못 잡고 놓쳐버리고 풀어주게 됩니다.


나중에 그 애굽이 이제 본격적으로 심판 받는 알리바이 구실을 형성하듯이

사도바울은 뭔가 선을 그으면서 지나가기 바쁩니다.
도주선, 탈주선을 긋는 것이 마치 생명선 종말선을 긋듯.


그러니 누락성이야 말로

사도바울의 버림받음이야 말로

지나면서 하나 건지는 셈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바울의 매 맞음이 간수 하나 건지듯이

오늘은 야손을 살리는 겁니다.

아니 야손이 바울 살리는 것 아닙니까?

거꾸로 보신 것 아니예요?

성령이 야손을 바울이라는 끌채로 국수건지듯이 건집니다.


바울은 무기일 뿐입니다. 도구 장비일 뿐입니다.

장비를 감옥에 가두고 족쇄를 채우고 쇠사슬에 묶어둘려고 했던 자들이

오히려 뻘쭘해 진 겁니다.


이것이 저번에 부메랑 곧 자살방지 기술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한 부메랑 도구인데 (회귀기술, 계류기술)


졸지에 그만 안식일 지키기 바빠서 그리스도라는 실재를 놓쳐버리는 겁니다.

안식일이 왜 있나요?

예수님과의 사귐의 날 아닙니까? 매일 매일의 사귐.


그런데 지켜버리니까

매일 매일의 사귐이,
특정한 날에만 사귄다는 것이 말이 안되듯

정작 알맹이 사귐의 관계성은 날라가버리고

껍데기로써 도토리 키재기 하듯이, 왜 안식일 지키니? 안지키니? 라고 서로 정죄하고 있으니


기가차는 겁니다.


목사야 안식을 지켜줘야 밥벌이가 되니까 당연히 요구하고 있지만 그거 들어주면 안되는 겁니다.
남을 그렇게 정죄했으니 자기가 정작 우발적으로 어기게 된 상황에 갑자기 놓여졌을 때
인간은 와르르 무너지면서 자살을 하는 겁니다.

절대성은 무너지기 쉽습니다. 왜? 어설픈 외설성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외설성 곧 스캔달을 봐야 그까잇꺼 대충 시덥지 않는 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방지 기술로써 부메랑을 기가막히게 잘 잡는 분 때문에

그 부메랑의 주인이 부메랑이라는 안식을 날려서 휙휙휙 돌면서 되돌아 올 때

안식일을 지키는 자를 태우고 돌아오는게 아니라

반대로 안식일을 때려죽어도 못 지키는 자만을 태우고 돌아와서

기가막히게 잘 받아냄으로써 말미암아

즉 피하면서 받는 기술, 자살 방지 기술 , 얍삽하게 빠지는 기술로

안식일에 걸려 넘어지는 자는 다 죽고

반대로 안식의 주인이 안식일을 때려죽어도 못지키는 자를 너무 너무 잘 섬겨서

즉 도착적으로 화목제물까지 드리면서 엽기적으로 사랑한 그 사람에게만

안식의 혜택을 누리도록, 펑펑 부어 넘치도록 하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그 나머지는 강퍅하기 싫어도 강퍅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한 쪽이 이유없이 사랑받게 되니까, 다른 한 쪽은 이유없이 미움받게 되는 겁니다.

어쩌면 사도바울의 최고의 험담꾼인 이유가 이런 겁니다.


어차피 까발려질 것을 대신 고맙게도 까발려 줌으로서

들통날 것, 들킬 것 다 속시원하게 드러내 줌으로써

빨리 빨리 짐을 덜어주게 해주는 겁니다.


니가 못 끄집어 내는 것 내가 대신 끄집어 내 줄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섬김이요 사랑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에게 짐을 가볍게 해주는 섬김입니다.


즉 수셔대기입니다.


이것이 아! 시원하다!! 뚫어 뻥처럼 막힌 담을 뚫혔다고
더부룩 답답할때 까스활명수처럼 시원하고 감사하고 기쁜게 아니라


왜 내 허락도 없이 막 들이 수셔대느냐 라고 화를 낸다면


바로 오늘 본문처럼 깡패들을 만들어내어서

야손의 집에 쳐들어가


바울! 내 놔라 바울 내놔 라고 데모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 내놔!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꿍짜리 짝짝


안 내어놓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자 이 상황을 한번 보세요

왜 이런 상황이 반드시 벌어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가만히 있는 사람 속을 끍어대어서

왜 부스럼을 만드느냐 말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정답입니다.

부스럼 챙기기 위해서입니다.

부스럼이 가치 없다. 의미 없다 라고 여기는

그 무가치한 부스럼을 챙기고자 함입니다.

야손 일병 구하기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수셔대는 이유 입니다.

왜 바울 본인도 바울일병 구하기를 섬김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왜 죽이십니까?

성령은 왜 바울 죽이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겁니까?
숨도 쉴 틈도 없이 또 다시 다른 유대회당으로 가고 또 다른 회당에 가고 또 또 또.

왜 가만이 있는 멀쩡한 도시 사람들의 

속을 박 박 끍어대서 부스럼 소동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딩동댕

소동을 챙기기 위함입니다.

범죄란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교환 즉 주기 위함이다. 증여입니다.


가만히 점잖게 온순하게 있는 것이 멀쩡하게 보이겠지만

악마가 주인으로 자리잡은 인간이기에

긁어 수셔대는 겁니다.

긁으면 누구나 버럭 거립니다.
뭐 바울은 안 그럴까요? 바울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과 안식일의 주인이 부메랑 기술로 바울을 빼돌린다는 것이 문제 입니다.
죽을려고 환장 한 듯이 먼저 수셔대고 먼저 소동을 일으켜서
자살방지기술인 부메랑처럼 낙아채니까
다들 놓쳐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강퍅 하지 않고 싶어도 강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느낌아니까? 열받으니까 말입니다.

애굽 왕 멀쩡하게 자기 나라 국민을 위해 열심히 공사하고 피라미드 짖기 바쁜데

자꾸 자꾸 모세는 깨작 깨작 긁어 대는 겁니다.

가장 필요한 순간의 노예들을

하필이면 꼭 이 때, 피라미드 지을때

내 놔라 내 놔라 내끼다 내끼다

왜 니꺼처럼 니멋대로 하노

내끼다 돌려도 라고

깨작 깨작 염장을 수셔대는 겁니다.


얼마나 얄밉나요?

사도바울이 지금 유대인 회당만 골라 골라 수셔대듯

십자가의 복음은 지금 교회만 골라 골라 수셔대는 겁니다.


내 백성 내 놔라 내 놔라
내낀데 왜 니가 가지고 있노?


목사가 줄 리가 없지요, 내 돈 내 돈 때려죽어도 못 내놓습니다.


구약은 광야라는 장소 공간이라도 있지

사실상 광야가 "무" 라는 없음의 의미이지만

신약은 더 더 더 외설적으로 더 심합니다.

주의 주 되심을 위한 것이니

보이기를 하나
주도 보이지 않는 없음인데
없음의 없음, 주의 주 라고 하니
믿어도 안돼 울어도 안돼 그 어떤 방법도 접촉할 방도가 없습니다.

단절의 단절이니 말입니다.


시공간도 없어

주의 주 되심 때문에

내 백성 내놔라 안내놓으면 쳐들어간다 꿍짜리 짝짝 얻어터질줄 알아라

이러니

바로왕의 강퍅함보다 더 심한 강퍅함이 여기저기서 수시로 터져나오는 겁니다.


지금 이 두 소욕의 싸움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귐 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이익관계 속에 침략하는 복음 (행 16:22-40)

2013/09/04 10:5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이익관계 속에 침략하는 복음 (행 16:22-40)


성령의 바울 죽이기 속에 간수 살리기



(행 16:22, 개역)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 16:23, 개역)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개역)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 16:25, 개역)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6, 개역)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7, 개역)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 16:28, 개역)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 16:29, 개역)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개역)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개역)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2, 개역)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 16:33, 개역)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침례를 받은 후』

(행 16:34, 개역)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행 16:35, 개역)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행 16:36, 개역)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행 16:37, 개역)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행 16:38, 개역)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행 16:39, 개역)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행 16:40, 개역)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인간의 모든 관계성은 이익관계입니다. 즉 잉여성입니다.

누가 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느냐 하는 관계성만을 따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목사가 복음을 증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복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이익관계 때문에 복음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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