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관계 속에 침략하는 복음 (행 16:22-40)


성령의 바울 죽이기 속에 간수 살리기


(행 16:22, 개역)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 16:23, 개역)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개역)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 16:25, 개역)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6, 개역)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7, 개역)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행 16:28, 개역)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행 16:29, 개역)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개역)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개역)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2, 개역)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행 16:33, 개역)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침례를 받은 후』

(행 16:34, 개역)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행 16:35, 개역)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행 16:36, 개역)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행 16:37, 개역)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행 16:38, 개역)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행 16:39, 개역)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행 16:40, 개역)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인간의 모든 관계성은 이익관계입니다. 즉 잉여성입니다.

누가 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느냐 하는 관계성만을 따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목사가 복음을 증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복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이익관계 때문에 복음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정죄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누구든지 어쩔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복음이 그런 목사 마저도 복음으로 활용이 된다는 점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인간이 자기유익에 따라 관계를 하나님까지, 예수님까지, 심지어 십자가까지 다 활용을 해도

정작 자기유익에 따른 소욕은

도리어 정반대로 십자가로 인해 이용당할 뿐이다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귀신들인 점쟁이 곧 모든 사람은 이 귀신들린 점쟁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점쟁이만 귀신들린게 아니라, 나라의 정치를 하는 사람이든,

장사를 하는 사람이든, 

심지어 교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들이든,

집에서 고요히 아기를 키우는 아기엄마들이든,

저 시골 골짝인 젊은이들이 다 떠난 들에서 열심히 땀흘리면서 농사를 짖는 노인네들이든,
도시에서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꿈을 이루고자 힘들게 사는 젊은이들이든,

모든 인간들은,

모조리 다 귀신들린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이용꺼리가 되는 겁니다.


즉 철저한 소욕 싸움의 배치물이다는 겁니다.


그 귀신들린 점쟁이를 참다 참다 못해서 사도바울이 고쳐버리니까

사도바울에게는 유익이 되기는커녕 바로 송사를 당하는 겁니다.


실컷 매 맞고 감옥에 갇혀 버리지요.


아이구 괜히 고쳤구나 괜히 고쳤구나 그랬나요?

아닙니다.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행 16:22, 개역)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 16:23, 개역)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개역)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 16:25, 개역)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두들겨 맞는데 기쁘게 여기다뇨? 이것이 종말 의식이다는 겁니다.

종말의식은 역사의식과 반대되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막살기입니다. 독자적인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원인없는 결과의 종말의식이 마치 역사를 뒤바꿔치기한냥
시간과 공간이 뒤틀어져버리니까 해석할 길이 없는 겁니다.
시간적 배열과 공간적 배열의 순서가 뒤바뀌게 된 결과가 나타나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소유욕 싸움이라는 겁니다.

저들은 자기유익이 사라지게 되니 매로 때리는 식입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로만 촉구하게 되는 겁니다.
그 원인은 나의 유익을 해손했다는 결과로 소송의 법을 추구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매 맞게된 쪽이 더 기쁘게 되는 겁니다.


유익의 사라짐 -> 그래서 고소를 함  

이것이 마귀의식입니다. 성화론이지요.
성화되면 구원된다 라는 악마성말입니다.

그런데 그 악마성을 들추어낼려고 바울은 종말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본인 스스로가? 아니죠.
종말이 주체이지 바울은 대상물입니다. 종말에 등 떠밀려서 말입니다.

그렇게 되니 


고소 당함 -> 매맞음 -> 기쁘게 찬미함 -> 성령이 감옥을 지진으로 없애 버림, 허물어짐 ->

없어진 감옥으로 간수가 자살할려고 함 -> 바울은 도망치지 않고 도리어 간수에게 복음을 전함 ->

간수의 집에 구원이 임함 -> 바울이 로마시민인줄 알고 고위직들은 이 성을 떠나기를 요청함.


자 이렇게 시간적으로 배열이 되니 이것이 도저히 해석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철수시켜 버리고 차라리 관계성으로 해석을 하면

처음부터 간수라는 죽은자를 살리기 위해 바울이 잡혀왔었어야만 했다.

고소 당했었어야만 했다. 매맞고 착고에 차이고 쇠사슬에 매여야만 했다 라고 보시면

거꾸로 역으로 관계성을 따지고 들어가 보니 이것이 말이 안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간수와 나랑(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랑)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

손이익이 없으면 관계는 없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딴 관계가 있다니???


그런데 아무 상관도 없고, 얼굴도 본적도 없고, 사귀어 본적도 없는 그 간수의 이야기를 보고
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공감이 되면서 이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처럼 들려온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간수와 같습니다. 감옥을 지켜서 월급을 타먹고 살아가는 공무원이어도,

그 역시나 감옥에 갇혀 있는 인생일 뿐입니다.

감옥을 만드는 놈이나. 감옥에 갇히는 놈이나. 그 감옥을 지키는 놈이나.

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감옥, 악마의 숙주일 뿐인 겁니다.


그래서 그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를 깨뜨리니까 남는 것은

간수만 자살이 아니라, 요나도 자살할려고 했고, 

모든 인간은 자살 그 자체 뿐입니다.

마귀가 숙주로써 단물 다 빨아 먹고 난 뒤에는 그냥 물에 빠뜨려 자살시켜 버리듯이

뒤에서 등 떠밀어 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소유꺼리가 되지 않기에 말입니다.

이것이 종말 의식에서 보는 즉 상대적인 저들과의 차이성입니다.

곧 저들은 바로 이런 애굽의식, 육적 유대의식이라는 겁니다.
시공간 외에는 믿을 구석이 없습니다. 곧 몸입니다. 역사적이고 공간적인 몸.

바보 같이 시공간이 자기들을 숙주 삼은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시공간 바깥으로 나가버리면

자꾸 자살할려고 하는 겁니다.


쇼생크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면

제일 제일 응시되는 것 하나가

가석방이든 석방이든

형을 다 마치고 이제 자유의 몸이 되어버리니까

졸지에 감옥에서 길들여진 몸 때문에

견딜수가 없어서 자살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몸이라도 젊으면 좋겠지만

얼마나 아파버리는 다 늙어버린 몸뚱아리가 되어버렸는지


또 웃기는 것이 그것이 또 전염이 되네!!!!

이것이 역설적인 코메디입니다.

전염이 된다는 것

자살이 전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결국 모든 인생의 결과는 이것 뿐입니다.

전염된 인생이라는 겁니다.

길들여진 몸이라는 겁니다. 시공간에, 역사에, 마귀에의 숙주인 몸인 겁니다.


어제 월드 워 z 라는 영화와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중첩시켜보니

인간들이 조작해낸 신 또는 마귀들은

인간의 장벽 곧 몸(성전, 바벨탑)을 넘나들고 있다는 겁니다.

훨씬 예상밖의 높이로 들락날락 넘어서며 가로지르며 횡단하고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자본이라는 악마에 대항하는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겁니다.

그 속도의 강도와 그에 따른 두려움의 전염의 빠른 속도를 감당할 길이 없을 정도로
불가능속에 갇혀버리고 마는 겁니다.

즉 자기라는 장벽에 갇혀버린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간단합니다. 숙주를 없애버리면 되는 겁니다.
아니 자살하라는 말입니까? 아니죠. 

불가능하죠? 그럼 그 비슷한 방법이 뭘까요?

시공간이 삼아버리는 숙주인 몸을 없애는 비슷한 방법? 자살은 도리어 제대로된 숙주인 것이고,


뭐가 있을까요? 
역이용하는 겁니다.

역숙주 삼기입니다.

마귀보다 더 들락날락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그 분을 쳐다보는 겁니다.
아무 조건 없이 십자가의 용서를 펼치셨다면

이것은 손이익 관계로 따질 문제가 아닌 겁니다.

자기 목숨을 걸어도 그것이 대소롭지 않는 겁니다.

진짜 심각한 것은 십자가가 모든 허물의 장벽을 들락 날락 뛰어넘는다는 겁니다.
순식간에 확산되는 그 바이러스 보다 더 더 더 나은 바이러스로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불 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소멸하는 불,
곧 심판성으로써 말입니다.

자본잉여라는 외설 보다 더 외설적인 잉여 말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개입시키는 겁니다. 더 나은 제사를 아벨은 이 개입을 본 겁니다.

내 제사 아니요 주님의 제사인 십자가의 피 제사 말입니다.
십자가의 개입 곧 심판 종말 단절의 개입을 원했습니다.

(마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그래서 성령은 종말의 숙주로 간수를 뒤로 빼돌리는 겁니다.

간수가 공간이라는 감옥을 지키는게 아닙니다.

감옥이 간수를 숙주로 삼았습니다.

그것을 성령께서는 깨뜨리는 겁니다.

십자가로 수셔대기 입니다. 사랑으로 수셔대기 입니다.
더 나은 외설성인 죽음보다 강한 사랑 말입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자 그래서 이리속으로 늑대소굴로 보내시는 겁니다. 수셔댈려고. 그것이 사랑입니다.

간섭 보다 더 강한 사랑은 없습니다.


감사함이 나오는 자와 도리어 여전히 자신의 유익에 손상이 된 것에 대한 분노(자살)와의 대립


이것이 두 소욕을 드러내고자 하는 십자가 사건의 목적인 겁니다.


십자가의 숙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하시면 됩니다.

숙주인데, 자유의지 따위의 악마의식은 버리시면 됩니다.

저들 악마들이 보는 악마가 되시는 겁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죄인되기 를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항상 죄인이라는 십자가의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식은 시공간이라는 의식 곧 전 주인의 의식을

새 주인의 숙주물로써 사고전환하시는 겁니다.


그 대표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사도바울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시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

나의 개인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가 사라져 버리고

나의 가족의 역사, 뭐 김씨 역사

대한민국역사

나의 문자 언어 역사 즉 한글 역사

나의 지구의 역사가 사라져 버렸다. 삭제 당해 버렸다 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그런데 자유는커녕 숙주였던 티가 팍팍 날 정도로 자꾸 자살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비로소 날개 달린 천사가 되었거능

날개 달리면 뭐하겠노 저거들은 맨날 소고기 사 먹겠지! 이카고 있으니

우리는 소고기를 이제 먹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데

소고기 그 쨉도 안되는

좀먹고 벌레가 끼이는 것 못먹게 되었다고 자살할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애굽에서 출애굽하여서 실제로

광야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음식을 먹게 되는데

자꾸 애굽 음식을 타령하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의식을 걸러내겠다는 겁니다.


애굽의식을 스스로 걸러내겠다는 그 자체가 성화론인데 그것은 악마들이고

애굽의식을 걸러내는 관계성을 따지는 것이 종말의식입니다.


즉 늘 지적받는 관계

곧 사생자가 아니라 아들의 관계입니다.

더 이상 지적 받을 꺼리가 없도록 하겠다는 성화론은 사생자이고요,

늘 이미 늘 항상 늘 죄인은 바로 이 관계성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보세요

지적 받을 꺼리 다 없애버려서 구원이 되던가요?

오히려 그것을 노렸던 것은 거짓선지자였지요.

참선지자는 오히려 반대로 막살아라 라고 합니다.

왜? 관계성에 놓여졌다는 것만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들은 막사는 모습을

거짓선지자의 바르게 사는 모습과

반대로 보여줘도, 본으로 보여줘도

참선지자의 말을 무시했기에 다 망해버린 겁니다.

때려죽어도 애굽의 의식을 못 버리겠다는 겁니다.


나 이거 없으면 굶어 죽어요 라고 나 돌아갈래(박하사탕) 라고 했던 겁니다.

나 성화 못하면 죽어요 라고 외친 겁니다.


이것이 시공간 즉 몸(육)을 중심으로 하는 이익관계입니다.
이 이익관계인 시 공간을 뒤짚어 엎어버리는 겁니다.

(마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때려죽어도 다가오는 사귐 보다

자기가 찾아가는 사랑을 하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익 곧 떡으로만 살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육이라는 자기 신체인 그 공간을 때려죽어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 을 더 외설적인 공간으로 대립시키는 겁니다. 여기 라고 했습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간수는 이 숙주된 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들린 점쟁이는 숙주된 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나 나의 주인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럼 희년이 뭡니까?

바로 그런 자들에게 기가막힌 복음 아닙니까? 기쁜소식 아닙니까?

단순히 사도바울이 참아야지 그래서 기쁘게 찬미해야지 해서 찬미한게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달렸어 라고 해서 기쁘게 여긴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최면

긍정의 마인드 라는 역사운동일 뿐인 행함입니다.


성령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참는 마음, 인내, 또는 긍정의 마인드가 아니라

나도 숙주인데 내 주인은 다릅니다 라고
자신을 숙주 삼은 다른 주인을 보여주는 것이 찬미요 기쁨인 겁니다.
나는 다른 주인 있지롱입니다.

약올리는 것이지요.


너거 주인은 너를 숙주로 삼아 이용해 먹고 버리는 자살하게 만들어 버리지만

나의 주인은 나를 숙주로 삼아 이런 너희들에게 딴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하는 주인이라는 겁니다.


(고전 15:40, 개역)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 15:41, 개역)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2, 개역)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개역)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4, 개역)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살리는 영이라는 겁니다.

아담은 그저 숙주일 뿐이고, 산 영이라고, 살아있다고 우기지만 백날 우겨도 숙주일 뿐이고,

살리는 영인 예수님이 살린다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종말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즉 죽였다가 다시 살리심으로써

자꾸 마귀라는 숙주와 자신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바로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지혜로 펼치시고 있다는 겁니다.
처음엔 역사에서 태어났듯이 십자가에서 태어나지 아니하면 다 죽은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과 피를 먹어라 안 먹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요 1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 6:24, 개역)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 6:25, 개역)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37, 개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8, 개역)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개역)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개역)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1, 개역)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2, 개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 6:4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 6:44, 개역)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45, 개역)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 6:46, 개역)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 6:47,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9, 개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난 이미 살았는데요, 제가 좀비입니까? 살과 피를 먹게!! 라는 자들에게는 의미 없는 피요


난 이미 죽은놈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피를 드러내실려고 하시는 군요

잘 먹겠습니다 냡냡, 저는 좀비 맞습니다 맞고요 냠냠. 

이 피가 마귀를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종말을 드러냄 위함이군요.
감사합니다. 기쁘게 주를 찬미합니다. 이러면 살리는 영에 부합되는 겁니다.


좀비 되기 싫타굽쇼?

아니 좀비-되기 하랍딥까? 여전히 행함 문제로 보시는 군요.

좀비-되기가 아니라 

이미 항상 좀비입니다.


기도하기가 아니라

이미 항상 기도인 겁니다.


즉 관계성인데

새삼스럽게 좀비 될려고 하니 관계성은 커녕 행함문제로 보게 되는 겁니다.

이미 좀비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미 흡혈귀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미 죄인 중의 괴수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미 기도자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미 회개자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왜 새삼스럽게 회개할려고 합니까?

회개해서 뭐하게요? 회개하면 또 유익 계산을 따지는 겁니다.
원래 흡혈귀인데 새삼스럽게 흡혈귀 되어서 뭐하게요?

시공간을 계산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악마의 숙주라는 티를 내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흡혈귀 되는 이익을 따지는 겁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숙주는 자기 주인을 드러내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숙주는 바로 저런 악마들이 빠글빠글 끓고 있는 곳만 골라 골라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자신의 숙주를 차이성으로써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울 살리기가 아니라

바울 구원하기가 아니라


반대로 바울 죽이기만 골라 골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두 주인의 소욕을 드러냄으로써

숙주로 인한 두 주인의 다툼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일 밖에 안 합니다.

그러니 가는 곳 마다 말썽만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교회로 치면 시험들어 다 실족케 되는 그런 진짜 복음만 전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요즘 교회는 다 시험들게 되는 거죠.


광야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고

종말이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참고 참고 참을수록 더욱더 성령은 실족케 하니

참은게 다 헛수고가 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지금 바울 죽이기하고 있는 판국 참는다니? 말이 됩니까?


그냥 자기 본색 드러내면서 막사세요

그리고 저 원래 막사는 인간일 뿐입니다.

교회라는 장사 해서 미안합니다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성화라는 위선을 떨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다시는 안하겠다는 나의 장담 이런 것을 믿을게 아니라

막사는 인생, 이 말도 안되는 인생에게 찾아온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감히 피를 뿌려주시고 감히 긍휼을 베풀어주시다니요 왠 은혜인지

정말 정말 나는 죄인이 맞군요. 정말 정말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그 관계를 맺고자 십자가에 피 흘리신 분의 사랑에 그냥 뻑 가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성화 행함 안식 주일성수 십일조 충성봉사 전도 선교 순교 등등으로

왜 그딴 것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흐려놓냐 말이죠.


그거 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좀 더 좋아집디까? 살림살이 나아집디까?


그래서 관계성이 뭐냐 라는 것을 새롭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바울 죽이기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입이 쑥 들어갑니다.


욥처럼 입을 틀어막고 재를 뿌리며 얼굴을 바닥에 쳐 박아 버립니다.

감히 주님의 찔리심 앞에서 감이 되도않는 것들을 들이대다니 말입니다.


사랑이란 외설적이고 도착적입니다.

왜냐하면 되도않는 우리 인간쪽의 거짓사랑을 자꾸 들이댈 때 마다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하며 외설적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더 더럽고 더 추악하며 더 외설적인 십자가를

들이댑니다.


그러면 입이 쑥 들어가게 됩니다.


니 땜에 이렇게 되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뭘 자꾸 들이대냐 말이죠. 피해자가 되었다고 질질 짜고 말입니다.


정작 가해자는 너야 너 라고 십자가를 들이대셔야

시공간이 날라가 버리고

기억도 날라가 버리고

나의 사랑 나의 행함 나의 믿음도 다 날려버리는 겁니다.

더더더 충격적인 외설성이 아니면

입을 잠잠케 못하는 겁니다.


정작 가해자는 너인데 왜 피해자 라고 우기냐 말이지요.


이런 오이디푸스 보다 더 외설적인 안티오이디푸스가 아들의 형상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누가 너 보고 너는 피해자다 라고 우기게끔 하더냐?


너는 가해자야 왜 꼬임에 빠지느냐? 십자가가 밝히 안보이느냐?

인자가 또 달리렴?


빌라도가 자꾸 괴롭힌다고? 나 예수도 빌라도 손에 죽이러 왔는데!

너가 그 빌라도 아니냐?


왜 나를 괴롭게 하느냐? 너가 빌라도 인데 뭘!



이 사도바울 죽이기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애굽적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올길이 없습니다.


자기의 시공간이 무너진 판국에 자살하는 유일한 길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주인 때문에 주인에게 속아서입니다.


그래서 든든한 미쁘신 새주인이 오신 겁니다.

그런 시공간은 육의 시공간이다는 겁니다.

딴 몸의 묵시가 있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묻습니다.

종말의 몸에서는 그것들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거짓된 것을 붙들고 울고불고 했던 겁니다.



사도바울을 왜 아시아행으로 가는 것을 성령께서는 막으시고 예수의 영은 허락지 않았던 것입니까?


사도바울 죽이기를 아시아가 아닌 감옥에서 펼치기 위함입니다.

구원이 감옥 속에서 펼쳐지기 위해서입니다.


열국의 어머니 사래가 왜 딴 지역이 아니라 애굽 족장의 손에 팔려가야 합니까?

애굽족장의 순풍여인들의 태를 다 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어머니 죽이기가 사실은 애굽을 작살내기 위함인 겁니다.


이이고 형님! 형님을 몰라뵀습니다 라고 풀려나듯이

로마시민권을 가진 바울을 겁을 내게 됩니다.


즉 저들에게는 자신들보다 더 외설적인 로마로써 비추이게 함으로써 여전히 눈을 가리는 겁니다.
저들의 눈을 열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간수만 뒤로 빼돌리고자 했던 것이지

권세자들까지 다 챙기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렇게 복음은 사도바울이라는 가장 복음의 최고의 일꾼마저도

바울 죽이기를 통해서 저 천하디 천한 간수를 건지고자

그의 가정과 그를 건지고자 이렇게

철저하게 역사시스템을 다 건드리시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이들 숙주 시스템이 철저한 갇혀버린 

악마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구멍 뚫듯이 뻥뻥 뚫어서

오로지 관계성으로서만 빼돌리는 겁니다.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내 버림 받을께 너 구원받아라

내 대신 매맞을께 너 고침받아라


이것이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요

살과 피로서만 하시겠다는


마귀와의 대조적인 믿음이라는 주님의 섬김입니다.




예수님! 나의 섬김 나의 믿음 나의 사랑보다

그것들이 왜 다 거짓된 것인줄 알게 해 주시고,
다 삭제해 주시고 다 제명시켜주시고, 다 단절 시켜 주시고, 다 심판해 주시고,

오로지 주님의 섬김 주님의 믿음 주님의 사랑만

바라보도록 해 주옵소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되도 않는 덜 외설적인 것

시답지 않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행함, 믿음, 사랑 단절케 해 주시고


오직 주님의 사랑만 밝히 보여주옵소서

그 피만 바라보겠다는 막사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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