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맞아? (눅 7:36-50)



단언컨데!!  이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죄인 입니다.


(눅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개역)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의 특징은 어떻게 하면 소통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바리새인은 소통의 달인이며, 사귐의 달인이며, 이웃사랑의 달인들 입니다.


이런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단절이 생겼다면

그것은 아무리 아무리 소통을 할려고 다가가도
도저히 용납못하는 금기의 영역을 이미 넘어서버린 자에게서는
더 이상의 소통이 안되어버리는 선언이 되기에 그런 겁니다.
자신들 경계선 보다 훨씬 더 넘어서는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기에
그 부정성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에게서의 인간관계는 그야말로 가장 존중되는 입장을 형성하고 있는 겁니다.
즉 철저한 객관적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조심에 조심을 하겠지요.

남들이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바리새인은 몇 번의 시도를 한다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7번 정도로 다가가면, 바리새인은 49번 늘 이자들은 곱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더 외설적이게도 예수님은 49번에 490번 곱 입니다. 즉 무한대 입니다.


적어도 사두개인? 제사장들? 이들의 융통성 없는 정치적인 성향에 비해서는 완화된

유순한 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쩌면 예수님께 가장 근접하게 다가가, 그의 주변을 가장 활발하게 살펴보고 있고

당연히 실천가들이며, 상대방의 장점 단점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려고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 그 당시에서는 가장 개혁적인 인물들이다는 겁니다.

정치적인 편협에 빠져버린 자들 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의 모든 개혁적인 사람들 다 이렇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가장 개혁적인 열심이 가장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다는 겁니다.


이런 입장들을 통해서 볼 때 바리새인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결국 말씀실천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대표성으로써 이런 바리새인을 내세우시는 겁니다.
곧 우리를 내세우는 겁니다.


성전과 관련된 자들(성전종사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간다 라고 하실 정도입니다.


즉 유대인에게 있어서 여러 수많은 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대표성으로써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꼽았다는 겁니다.


말씀실천에 있어서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을 활용하는 것일까요?
아니 오히려 기가막힌 재료가 되는 겁니다.
말씀실천하는 인간 바리새인 vs 예수님 자기자신이 대립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오히려 가장 좋은 재료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너무 명료하게 차이가 날 테니까 말입니다.

더군다나 가장 존경받는 자들이니 말입니다. 

왜?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는 파 이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 초청함으로써 인해 사건이 발생함에 있어서

말씀 스스로가 이 사건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실천하는 자들 답게,  바리새인!!  얼마나 우호적입니까?

그런데 졸지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또 부딧힘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또 다시 시비를 걸어 실족케 하는 복음을 드러내시는 것일까요?


마주침 곧 부딧힘은 상당히 불쾌할수 있는 입장이 될지 모르나

오히려 전혀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전혀 낯선, 전혀 새로운 의미를 봐 버리면

기존의 것들이 얼마나 엉터리였던 가를 알수 있는

바로 회개의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케 하시는 복음을 직접 전하시는 겁니다.

회개? 완전 전복이 된다는 겁니다.

완전 딴판의 해석을 통해서 자신의 기존의 개념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회개는 백날 해도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 밖에 되지 않지만

다가오는 회개는 완전 딴판의 세계를 열어주심으로 인해

누리는 것 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지키는 회개는 없게 되는 겁니다.

누리기 바쁘니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누리지 못하기에 회개할려고 하는 겁니다.


회개가 넘어오는데

자신이 회개를 양산시킬려고 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즐겁겠습니까?

회개가 다가옴으로써 졸지에 지킬게 하나도 없으니 누리는 놀이가 되는 겁니다.


이 놀이가 되는 회개가

졸지에 지키는 회개를 하는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회개가 되는 겁니다.


믿기하는자가 믿는자를 죽이듯

회개하는 자가 회개자를 죽이게 되는 방식


이것이 오늘 본문 그대로 나옵니다.


단언컨대 이 회개가 다가오면 졸지에 회개자가 저절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우발적입니다.

왜? 사귐이라는 짝꿍이기 때문입니다. 공명이요 정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자, 회개를 지키는 자, 믿기를 애쓰는자, 말씀을 지킬려고 무단히 실천하는 자는


독자적입니다. 혼자서도 잘 해요 라는 식입니다. 구지 짝꿍이 지금 오시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하다 하다 안되면 배터리 충전하듯이 잠깐 보충해 주면 되고

그 나머지는 자신이 충전받은대로 또 다시 홀로서 애쓰고 힘쓰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이 왜 너무 너무 중요한고 하니


이 짝꿍이 왜 회개가 넘어오니까 저절로 우발적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도 전혀 회개한적도 없는 자가 짝꿍으로써 넘어오는 회개 땜에 마치 새롭게 창조된냥
불쑥 불쑥 나타나니 아무도 이 짝꿍을 해석할 길이 없게 되는 겁니다. 수수께끼 입니다.


왜 죽을려고 환장하듯이 아예 정죄받을려고 불쑥 불쑥 창조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사도행전의 특징인 

주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던 자에게

왜 갑자기 주의 이름 때문에 그들이 불쑥 불쑥 짝꿍으로써 등장하게 되고


기존의 유대인들은 도리어 찬밥신세가 되어버리는지

도리어 이 유대인들이 이들 이방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시기와 핍박으로 비로소 적대감을 표출하는지를


왜 이런 구조로써 복음이 증거되는지를

실족케 하는 방식이 아니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회개라는 주체 때문입니다.


회개가 다가오면 이 회개가 지 혼자 떠들고 가버리는게 아니라

반드시 회개 자신의 대상물인 짝꿍을 형성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반드시 자신의 신부가 자신의 피조물이 있다는 것은

숨어있는 마귀를 드러내는 도출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결국 성경말씀은 말씀을 실천하라 라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이 말씀 스스로가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있다는 겁니다.

마귀를 걸러내지 않는데 무슨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심은 이 마귀를 통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번에 설명했듯이


우리는 마귀를 이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마귀 이겨서 뭐하게요?

이미 마귀 밥인데!! 무슨 숙주가 자기주인을 쫏아내겠습니까?

그저 도둑놈이 나타나주길 바래야 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를 바라볼 뿐입니다.

말씀 실천 할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막 사세요

상대적인 의미로써 막살아라 라는 겁니다.

마귀를 의식하지 않는 막살기가 아닙니다.

마귀를 의식하기 때문에 막산다는 의미가

복음의 취지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기만 하면 걸러내는 작업을 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국수채에 국수를 건지듯이

그 물을 빼버리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밑에서 저절로 물이 빠져나감으로써 구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번에 건진다는 의미보다

빠져나가는 의미로써 강조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상대적인 의미이다는 것으로써 구원입니다.

혼자 구원 받는 식은 없습니다.


하나가 지옥가는 방식이 되어야

또 다른 하나가 천국가게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부조리합니까?


결국 인간의 믿음지키기

회개지키기

놀이로써의 회개가 아닌,

사귐의 짝꿍으로써의 회개가 아닌,

독자적인 회개 믿음의 개념에서는

이런 부조리를 다 없애는 방식이 되기에

막산다 라는 말에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짝꿍이 안 알려주니까 자기방식의 기존 개념으로 언어를 풀이할테니 말입니다.


하여튼 복음은 기분나쁜 소리만 골라 골라 하거든요


오늘 본문 보세요

바리새인이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기준 잡쳐버리게 만드십니다.

왜 그런 선한 의도 조차 반드시 적개심으로 변모 시키시는 것일까요?


그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대표성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적받은 것에 감사하면 됩니다.

회개가 넘어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쁩니까?

이제 회개 안 해도 되잖습니까? 안 그래요?

이제 다시는 물 길러 다시는 오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싸가지 없는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짝꿍문제에 시비를 겁니다.

니 남편 데리고 온나 라고 말입니다.


없슴더


맞다 니 말이 맞다 지금 있는 남자도 남편 아니제?


어머나? 우찌 알았습니까?


우찌 알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 달라매?


즉 이 말은 이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반드시 여성성은 빈공터로써 작용하는 그 의미에

가장 적격인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그 여자는 필요했던 겁니다.


딴 남자는 다 가짜 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인은 이것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당신 유대인들은 야곱의 우물에서 예배 드리지 않지 않습니까?


(요 4:11,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2, 개역)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8, 개역)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개역)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장소가 틀린데 어떻게 구원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옳치 너 말 참 잘했다.

장소를 인간이 구비해서 예루살렘을 만들었다 치자


예배라는 주체가 너를 신부 삼아 짝꿍으로 사귀고자 하는데

너거들이 만든 장소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는 겁니다.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곧 사귐이 벌어지는데

아버지께서 찾으심으로써 발생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유대인이라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너는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유대인 곧 잃어버린 이스라엘 자기양이라는 겁니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눅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정작 유대인의 탈을 쓴자는 유대인이 없었습니다.너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라고 비유대인 취급 받았지?

내가 유대인으로써 넌 내 짝꿍이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완전 생뚱맞은 해석이 되어버리고

둘이랑 니캉 내캉 우리끼리만 알제 라는 비밀언어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런 일들을 바리새인이라는 유대인이 알 길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지요

사마리아 구역에 절대로 안 들어가잖아요 삥 둘러서 가잖아요


그러니 이 본문이 저런 내용을 이제 바리새인 구역에서

사마리아 구역이 아닌

때가 시간을 말하고 공간을 말하는게 아니라

인물을 말하는 때 로써

우물가의 여인의 사건을 이제

바리새인 유대인의 집이라는 공간과 시간으로써

이동해 봅시다.


누구 라는 인물이 드러나는 회개인지?

짝꿍은 바로 이 회개라는 인물을 드러내는데 불쑥 뛰어들어옵니다.


그것도 감히 죄인으로써

위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치면


감히 사마리아인으로써 유대인 구역에 뛰어드는 셈입니다.


마치 누구처럼?

짝꿍처럼 유대인으로써 감히 사마리아 구역에 뛰어드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의도들이 초장부터 잡치게 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예수 라는 이 인물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자신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겁니다.


늘 바리새인들은 차이점을 발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조심스러우면 속으로 하는 말을 예수님은 다 드러내시면서 공개해 버리는 겁니다.

진짜 개방할 것은 우리의 시커먼 속내이지

자신들의 선한 의도들을 개방하면 안됩니다.

시커먼 속내를 단절시키지 말고 끊임없이 개방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졸지에 우발적으로 생기니까

정작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이 우발과 필연의 우리는 대조를 해 봐야 합니다.


차이와 동일의 대립에서 있어서

우리의 동일성 곧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의 마음을 늘 수시로 드러내 개방시켜야

우발적인 창조자의 작업에 의해 와르르 무너지는 단절 속의 구원을 받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고침을 받을텐데

소경아니다 하니, 건강한자 이다 하니, 죄인 아니다 의인이다 하니

고침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럼 말라꼬 예수라는 인물이 필요하겠습니까?


의원은 죄인만을 부르러 왔을 뿐인데!!!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갑자기 여인이 불쑥 우발적으로 뛰어 바리새인 집에 들어옵니다.

한 인물 때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저를 고쳐주옵소서

라는 식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가 나타나

율법의 대표자인데 율법 지키세요 라고 하는게 아니라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별세를 이야기 합니다.


즉 자신은 죄인이다는 겁니다. 모세가 죽었다가 살아나서인지?

아니면 우발적으로 그냥 불쑥 나타난것인지 몰라도

모세 마저도 예수님의 죽음을 언급하여야만 한다는 겁니다.


왜 안전빵에 이미 천국 간거나 마찬가지 인 모세가

왜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는 겁니까?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도 못 봤던 자가 그냥 불마차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렸지 않았잖습니까?

그럼 안전 빵이요 제대 했으면 됐잖아요

그런데 왜 이들이 불쑥 나타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겁니까?

마치 팀플레이 야구 중에 감독 예수님 투수 모세 포수 엘리야가

경기도중에 갑자기 작전타임 걸어서 이 3명이 모여서 의논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모세라는 투수가 공을 던집니다.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감히 건방진 발언을 날립니다.


향유부은 여인이 아무런 말도 없이 어떤 행동으로써 투수처럼 공을 던집니다.

예수님 죽으러 오셨군요 제가 미리 장사치러 드릴께요 라고 말입니다.


우와 이 무슨 도발적인 행동들입니까?


모세든, 엘리야든, 이 향유 부은 여인이든, 우물가의 여인이든,

내 죄를 대신해서 죽어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바리새인과의 차이점입니다.


(마 26:6, 개역)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 26:7, 개역)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 26:8, 개역)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마 26:9, 개역)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 26:10,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 26:11, 개역)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 26:12, 개역)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 26:1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과 이 여인과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막 14:1, 개역)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막 14:2, 개역)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막 14:3, 개역)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4, 개역)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막 14:5, 개역)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7, 개역)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 14:8, 개역)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9,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는 어떤 이들이라고 해서 아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과의 대조를 띤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 12:1, 개역)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요 12:2, 개역)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요 12:3, 개역)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4, 개역)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5, 개역)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6, 개역)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요 12: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요 12:8, 개역)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 12:9, 개역)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러라』

(요 12:10, 개역)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 12:11, 개역)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요한복음에서는 가룟유다와 대조를 시킵니다.



결국 이 여인은 복음서에서 언급이 될 때 이사람 저사람에게 이리 저리 발로 차이는 공처럼

철저하게 미끼로 사용되는데 오히려 복음이 증거되는곳 마다 기념이 되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왜 미끼요 동시에 왜 기념이 됩니까?  

이리저리 발로 짖밟히는 미끼임과 동시에 복음증거의 기념으로써 사용되는

그 기준이 뭘까요?


바로 예수님을 장사 치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냥 비싼 향유를 부어 자신의 머리로 발 씻는게 아니구요?


지금 다들 이 여인을 욕하는 이유가 향유가 비싸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비싸다 라는 가치성을 먼저 가지고 있기에

가난한자를 생각해 주는 척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미끼로 삼아서 저들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들켜야 합니다.

우리의 진짜 속내인 시커먼 마음을 들통나듯이 매번 수시로 매일 들통이 나야 합니다.


뭐 가난한자를 생각 한다굽쇼?

순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비싸게 보이는 거죠.

세상이 매겨버린 그 가치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주인이 매겨버린 그 가치로써

숙주가 된 인간은 아깝다 아까워 저 비싼 것을

그러니 화내고 분이 나는 겁니다. 즉 분노 강퍅입니다.

지켜야 하는데, 가난한 자 한테 줘야 하는데, 아깝네 아까워!!



그럼 신나는 놀이는 뭘까요?

바로 죽음놀이 종말놀이 십자가놀이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예행연습하듯이

미리 앞당겨 보여 주는 겁니다.


뭐 가난한자에게 줘야 한다굽쇼?


이 얼마나 가치 있는 놀이 아닙니까?


제가 놀이라고 하니까 기분 나쁘죠

그러나 이 놀이라는 말이

마치 막살아라 라는 말처럼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사귐이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막산다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비로소 나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말씀지키기를 늘 독자적으로 해 온 자들에게는

반드시 분노가 일어나야만 하는

그래서 오히려 사귐의 의미로써 더 잘 이것보다 더 기가막힌 표현이 없는 듯

막산다 라는 의미가 가장 적시에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인물이라는 겁니다. 장소도 아니요 때도 아니요, 시간 공간이 아닌,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뻔뻔스럽고 시건방지게 이 인물 때문에

금기라는 외설보다 더 더 더 금기의 외설적인 영역을 마구 마구 넘나드는 겁니다.
팔루스보다 더 팔루스적인 히스테리 입니다.


그러니 막산다는 말은 반드시 누구를 격노케 하는 방식으로써 상대적으로써 외쳐지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막살면 예수님 죽으시러 오셨죠?

제가 장사 치러 드릴께요 라는 겁니다.


이거 뭐 살아있는 사람을 매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 시건방진 뻔뻔한 행동을 짝꿍만이 한다는 겁니다.

모세처럼 말입니다.


도통 말씀을 지키고 실천할 의도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안식일도 지킬 의향도 없고

예배를 예루살렘에서 드릴 의향도 없고

막살지 않겠다는 모습이 전혀 전혀 전혀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 여자는 오로지 예수님 장사 치르는 일에 올인해 버립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싸가지 없게 자기 귀찮다고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다시는 목 마르지 않도록 해 주옵소서 라고

그냥 우발적으로 자신의 신세 탓 하며

우연히 내뱉은 말인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말에 짝꿍을 삼아버립니다.

오냐 내가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영생수를 주겠다 라고 말입니다.


(요 4:9, 개역)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 4:1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1,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2, 개역)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실은 예수님이 그렇게 유도를 하신 겁니다.

진짜로 마실 물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물이다 라는 겁니다.
국어문법으로 시비거는 자들은 이것도 따지겠지요.
복음이 제대로 건드렸다는 증거죠.


만약 이 여인이 죽어서 더 이상 육체가 아닌 육체를 벗어버린 상태라면

마실 물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국어문법이 말라꼬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독자적으로 믿을려고 애를 쓰니까 화딱지를 내를 거죠.


예수님은 지키라고 한 적 없습니다.

내가 너의 남편이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이것 뿐입니다.

어디에 말씀 지키라고 있습니까?

문자로 보인다는 자체가 자기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것이니

지 보고 싶은대로 보면 되는 거죠.



사람은 자기가 풀수 있는 문제만 본다고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이해 되는 것만 이해한다고 합니다.


즉 이 말은 알려주시는 짝꿍이 없는

독자적인 삶이다는 거죠.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벌써부터 자기 사랑을 자기가 쟁취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얼마나 피곤한지 아이들이 생존경쟁에 벌써 눈을 떠

딱딱한 인간이 되어버린 겁니다.


말랑 말랑 아이들의 피부가

딱딱한 껍질로써 거북등껍질이 되는 겁니다.


바로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인 겁니다.


(마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겉은 아이인데(아름다운) 속은 어른(딱딱한 생존경쟁)입니다.



누가복음에서의 향유부은 여인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을 죄인으로써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죄인이 어떻게 감히 이 영역에 불쑥 불쑥 들어오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라는 인물은 과연 이 죄가 많은 여인을 왜 받아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도저히 바리새인에게서는 금기의 영역을
불쑥 불쑥 넘나드는 모습처럼 보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수용하는 예수라면 과연 선지자가 맞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게 바리새인 스스로가 짝꿍을 대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인은 수용못하고 있지만

정작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모습이

즉 막살기처럼


오히려 우와 선지자 맞아? 진짜 막사네?

둘이 사귀는거야?

원랴 짝꿍이였어?


라는 식으로 오히려 바리새인이 보증이 되어 주는 식이라는 점입니다.


하여튼 마귀가 없으면 일이 안됩니다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저들이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아래서 펼쳐줘야

정작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이 되는

독생자를 저희들의 죄를 대신해서 단번에 죄값을 치르시는

믿음을 펼치시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한

더 나은 제사로써 말입니다.

얼마나 엽기적입니까? 더 더 더 모순되는 외설적인 사랑 아닙니까?

그야말로 막살기의 극치입니다.


너희가 날 사랑함이 아니요 (예수라는 이단자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말씀지키기)

내가 너희를 사랑함으로 화목제물을 주었다. (사랑의 완료, 단번에 제사 드림으로 다시는 제사 드릴 필요가 다 사라지는 휘장을 찢고 막힌담을 허물어 버린 사랑이 쏟아지는 겁니다.)


회개의 달인들은 이 회개가 쏟아짐에 앞에서 무너져야 할 판국에 놓여졌습니다.

회개 하면 회개 할수록 막힌 담은 더욱더 높아집니다.


그러나 막살면 막살수록 막힌 담은 허물어 집니다.


이 말이 죄인에게 걸림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의인에게 걸림이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답이 나옵니다.


이 여인의 죄를 보세요

더 죄 짖고 난리입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감히 죄인 주제에 지금 의인의 영역에 침범해서

자신의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향유를 부어 씻질 않나

눈물로써 발에 입을 맞추질 않나


누가복음에서는 비싸다는 향유 개념이 나오지 않아서

가난한자에게 줘야한다는 둥의 시비는 없습니다만

예수님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 듯이 바리새인이 속으로 하는 말을 끄집어 내면서 하십니다.


그리고서는 베드로에게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더 사랑하겠니?

100만원 빚진자와 1000만원 빚진자

아니 백데나리온 빚진자와 일만달란트 빚진자

아니 오십데나리온 빚진자와 오백데나리온 빚진자

둘다 갚을 길이 없어 둘다 다 탕감해줘 버렸다

누가 더 사랑하겠니?


(목소리 쭈욱 낮게 깔면서 ~~~ 무게감있게 그러면서 신나고 즐겁게)

단언컨대!! 많이 탕감 받은자요~~~~~~ !!!

빙고


많이 사랑(용서) 받은자가 많이 사랑하느니라


단언컨대 ! 십자가의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언 놈이 꾀더냐? 언 놈이 마약 먹고 사기를 치느냐 말이죠.


뭐 말씀 지키기? 이웃 사랑하기? 원수 사랑하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마귀들 바리새인 보란 듯이 따집니다.

베드로 너, 내가 들어 올 때 물로 내 발을 씻겨니?

아니요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내 발을 씻었단다. (누구보란 듯이 !!!!!)


베드로 너, 내가 들어 올 때  내게 입맞추었니?

아니요

이 여인은 내가 들어올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멈추지 않았단다. (누구 들으랍시고 !!!)

베드로 너, 내가 들어올 때 내 머리에 감람유 부엇니?
아니요

이 여인은 내가 들어올때에 내 발에 향유를 부었단다. (누구를 콕 찝어서 강조의 강조를 하십니다.)

이로소 이 죄 많은 여인은 죄가 많기에 많이 탕감하시고
많이 용서하심으로써  많이 사랑하시는 사귐이 찐하게 펼쳐졌지만


사함 받을게 없는, 적게 사함받는 자는, 사귀는 건지 안사귀는 건지 알수 없는 시큰둥 만둥 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단언컨대 여인아 너는 죄 사람 얻었느니라”


이에 제발 막살아라 라는 겁니다.

인간 눈치를 볼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말입니다.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개역)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역시나 인간은 또 따집니다.

감히 저 사람이 왜 막말을 하느냐 라고 말이지요.


감히 지가 뭔데 죄가 사했다 라고

아예 단언을 하느냐 말이지요.


막말입니다 막말


지가 뭔데?


지가 하나님이냐 말이지요.


빙고 네 맞습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내가 그 로라

(요 4:25, 개역)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 4:27, 개역)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 4:28, 개역)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개역)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30, 개역)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우물가의 여인은 물동이를 내동이치고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동네사람들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사귐을 가지게 됩니다.

느닷없이 불쑥 찾아온 사귐이 들어온 겁니다.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은 선지자 맞아?

저게 무슨 선지자야?

막 말이나 하고

막사는 인간들이랑 어울리지 않나?


선지자 아닌데 라는 의문만이 계속 맴 돌 뿐입니다.

잘 됐지요 뭐 계속 주님께서 그렇게 뺑뺑이 돌리는 겁니다.



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줄 이제 아시겠습니까?

회개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회개 범하기

회개는 하는게 아니라

회개가 오심으로써 회개랑 사귀면 됩니다.


억지로 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이미 항상 죄인이게 예수님이 왔다는 그 소식에 저절로 눈물이 나서

발에 입맞추고 머리털로 발을 씻을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사귐입니다.

내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실 분인데


아니 입 맞추고 배기겠습니까?


주여 죽어 주옵소서 라고 모세가 말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감히 건방지게 막말 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왜냐? 단언컨데 십자가의 용서 보다 가장 완벽한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죄사함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회개하기? 금식하기? 예배드리기? 헌금하기? 주일성수하기? 십일조 드리기?
충성봉사하기? 이웃사랑하기?

다 거짓말입니다.

회개는 딴데서 오는 겁니다.
그 분이 선지자 입니다.
죄사하는 분입니다.




예수님!

예수님도 빌라도 손에 막 죽으시러 오셨듯이

저희들도 빌라도 손에 막 죽여 주옵소서.

그리고 그 십자가의 저주 의 불 심판 속에서 함께 춤추게 하옵소서.

그 신나는 종말의 놀이, 십자가의 죽음 놀이 페스티발의 춤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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