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되심과 고난의 관계 (눅 9:20-28)



(눅 9:20,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눅 9:21, 개역)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눅 9:22, 개역)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 9:23, 개역)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4,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5,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눅 9:26, 개역)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27,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눅 9:28, 개역)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오늘 본문의 단어들을 살펴보면 왠지 경고적인 의미인 듯 보이겠지만
상당히 부정적인 단어로 가득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즉 긍정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그 말은 상대적인 뭔가를 의식해서 나온 단어들이다는 겁니다.

앞의 시간에서 살펴본
오병이어의 기적들처럼 긍정적인 의미만 가득하면 좋은데
오히려 그거 하나 보여줘 놓고서는
온갖 잔소리는 몇배나 더 강조하듯이 상당히 부정적이다는 겁니다.
(신명기의 율법처럼, 또는 산상수훈 처럼 율법을 더 강화 하시는 것 처럼?)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죽음이라는 의미로써 축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인간에게서 이 죽음은 사실상 동떨어진 의미입니다.
죽으면 그 죽음 자체로 인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기에
생각할 필요 조차도 없게 됩니다.

사회나 인간조직 심지어 동물과 곤충의 세계에서도
죽음 곧 시체는 빨랑 빨랑 치워버림으로써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살사람은 살아야지
죽은 사람 생각해서 뭐하냐 라는 식으로
빨랑 묻어버리고
빨랑 치워버리고
빨랑 태워버려서
삶이라는 바퀴를 빨리 빨리 다시 돌려야
빨리 빨리 잊어버릴수가 있습니다.
시체 껴안고 살아서 뭐하냐 말입니다.
그 정도로 죽음은 허무한 겁니다.
무기력 하게 만들어 버리기에 빨랑 치워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정적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인문학이 유행을 하면
철학에서는 이 죽음을 달리 생각해 보자 라고 나옵니다.

죽음이야 말로 삶의 원동력이 될수 있다고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볼게 아니라
긍정적으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에 대한 애착을 더욱더 가질수 있도록 하는
잘 살고
좀 더 제대로 살고
좀 더 의미 있게 살수 있도록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사유를 줄수 있고
삶을 더욱더 풍성케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고
죽음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자체가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왜 죽음을 부정적으로 볼려고 하느냐?
뭐가 두려워서?
하루만 살다 죽을 수 밖에 없다면

그 하루 라는 시간이 얼마나 그 사람을 값지게 할수 있는
의미를 주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죽음을 뒤짚어 보는
오히려 삶보다 더욱더 생생한 삶으로 풍성케 해 준다고
새로운 시선으로 자각하는
의미로써 인문학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마치 유대의 묵시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과 시대적인 분위기와 비슷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죽음을 언급하는게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풍성한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서
죽음을 자꾸 예수님은 제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풍성한 선물로써의 죽음과 삼 일 ] 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식입니다.
전혀 죽음과 전혀 무관한 상황에서
생뚱맞게 예수님은 죽음을 들이대시고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해

다들 긍정적인 의미에서
선지자!
엘리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려 왔던 인물 아닙니까? 유대인의 입맛에 딱 떨어졌고
자신들의 신앙에 딱 맞는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이 맞기에 쉿 쉿 경계시키시면서
너희랑 내랑 우리끼리만 알기로 하자 라고 하시고서는
여기서부터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으러 가야 한다고
자꾸 죽음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아니 기다려왔다는데 죽어버리시겠다고?

즉 오병이어의 출처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라고 지난시간에 언급했습니다.

결국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제대로 못 본다는 겁니다.

죽음이 마치 너랑 나랑 둘 만 아는 하나의 싸인처럼 작용이 되어서

비밀 패쓰워드를 걸게 되는
아무도 접근 못하는 경계성 즉 단절성이 되는 겁니다.
에수님 혼자 바쁩니다. 아무도 왜 저러시는지 이유를 알 턱이 없습니다.

그리고서는 오늘 본문에
너희가 나를 따라 올려면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고
역시나 죽음을 거쳐서
예수님과 제자 곧 예수님을 따르는 자이다 라는
관계성을 언급하는 겁니다.

죽음이 그 관계성을 담게 되는 겁니다.
자 또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아 그럼 죽으면 되겠구나?라고 죽음을 실행하고 행함으로 실천해 버리면
그 관계성이 성취되는 겁니까?


안 됩니다.
죽음은 절대로 인간에게서 정의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죽음이 인간을 다루고 있는 판국인데
어찌 인간이 죽음을 구체화 할 수 있습니까?

결국 죽음 조차도 예수님이 규정해 주셔야 하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실천도 순교실천도 거부당하는 단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배신감을 느낀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필연성을 우기는 유대인에게서는 철저한 우연성인 겁니다.

전혀 죽어 본적이 없는 인간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새로운 죽음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전에 누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죄가 뭐냐고?
죄란 인간에 의해서 규정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를 규정해 주실 인물이 와야 하는 겁니다.

그 분에 의해서 죄는 새롭게 정의 됩니다.

그런데 반드시 역고 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서 십자가의 살인으로 몰아가도록 된다는 사실을
역어가야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긍정하겠다는 것도 결국 오늘날의 거짓선지자들의 트릭인 겁니다.

또 노래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결국 노래란 인물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부르는 노래는
노래 축에서 끼이지 못함을

진짜 새노래가 오심으로써 노래가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그분의 노래를 들어보지 못한다면 자꾸 내 노래 다듬기에 평생을 소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인물이 된다는 겁니다.

말이 안되죠? 어법에도 안 맞구요?

노래는 인물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처럼 죽음은 누구인가 로 질문이 바뀌는 겁니다.
십일조가 몇분의 몇이라는 숫자 개념이 아니라 십일조가 누구냐 라는 인물 개념처럼 ...

예수님만이 죽음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이전의 죽음은 죽음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제대로 저주 받고 버림받은 분은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앞에서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 되는 겁니다.
그 뻔데기가 되어 달라고
다음 본문에 모세가 변화산에서 나타나서 주여 별세해 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죽음 축에도 끼이지도 못하는 것들이

저주 받았다는 둥! 억울하게 죽었다는 둥! 이 모든 것을
일소에 함구 시키는 진짜 죽음을 제대로 보여달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 자신도 가나안에서 탈락 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겁니다.

진짜 버림이 뭔가를 제대로 보여달라는 요청인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죽음도 아닌 것들이
죽었다고

죽임을 당했다고
피해자라고 우기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시고 하는 모든 것은

결국 죽음 뿐입니다.

이 죽음을 베드로는 제대로 인식을 했기에 막고자 열심을 다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기적도 표적도 수 많은 말씀도
결국 죽음을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낯설기 짝이 없습니까?

베드로가 안 막고 베기겠습니까?

막아야죠


당연히 막아야죠
사탄아 욕 먹든 말든 막아야 하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반대이다 라는 겁니다.


즉 그 죽음이 맞다 라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죽음이 맞습니까?


다들 살려고 믿고
천국 갈려고 신앙하고 있지

지옥 갈꺼면

죽을려고 신앙할꺼면
말라꼬 믿냐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찾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구체화 함으로써의 관계성을

새롭게 정의내림으로써 십자가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동, 생각, 하는 일,

또는 학문적 사상, 종교적 교리, 신앙, 실천, 이웃사랑, 제사드리기 등등으로는

이 기준을 통과할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오직 상한심령인 십자가 뿐이다는 겁니다.
유일한 단절성이요 검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쳤습니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 라는 저주의 형벌을
예수님에게 다 뒤짚어 씌우는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은 앉아버리는 것인가 하는 점을
예수님은 반드시 거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죽음이 자기를 향하지 않고
왜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우리는 행동할 수밖에 없는 가를
이 십자가의 죽음 곧하나님의 일을
그 모순적인 일을 격어보라는 취지인 겁니다.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결국 이 사건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사건이 덮치게 되는 겁니다.


그 사건이 덮칠때에

비로소 그 삼일이라는 간격성을 실감케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 낯설음에서 그 간격을 제자들의 대표성으로써 격게 됩니다.
어제 까지 알던 예수님이 아니였던 겁니다.

왜 이런 간격을 두시느냐 말입니다.

제자들이 접근이 안되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주시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이 이중적으로 중첩이 되어서

십자가는 제자들 조차도 예외로 두지 않고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을 거쳐오라고
성령까지 주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성령론으로 사활을 거는 기독교의 악마성은

예수님께서 약속한 성령과는 무관합니다.


개방이 아닌데 때려죽어도 개방을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눈에 보이는 교회로 먹고사는 문제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인 겁니다.

모두다 멸망해도 교회만큼은 멸망치 않는다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단절을 해소하는 개방이 아니라

단절의 단절로써

더 간격성을 벌려버리는 단절, 이중단절로써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언제든지 죽일수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언제든지!!!


성령을 받았기에

제자들이 단절 되었다가
이제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과 접촉이 되어 개방이 되었다가 아니라
이게 요즘 모든 기독교의 사기성이지요

개방이 아닌
성령받은 너를 통해 더욱더 단절을 또 구체화 시키는
블랙홀 구멍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
언제든지 죽여도 상관이 없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성령강림의 오순절 사건으로 첫 사례자 스데반 집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절대로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한 참 뒤에 늙어서? 또는 병들어서 죽을 사람이지

성령 받았기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죽이셔도 상관이 없는 그런 인물이 된
성령받은 증거로써 죽음이 구체화 된 것이 스데반 집사이다는 겁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왔다는 그 증거로써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방언 터지는게 성령이 왔다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럼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막 죽어 나간다는 겁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 자이다는 겁니다.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히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3, 개역)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 11:14, 개역)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것이 세례 곧 단절의 의미인 할례라는 십자가의 의미이다는 겁니다.

죽은자는 예수님이 규정하시는데
인간이 왜 죽은자를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죽은자로 만들어 본들
예수님에게는 안 먹혀 드는 겁니다.

죽은자가 누굽니까? 

성화된자입니까?

십자가를 잘 믿는 자입니까?

어떤 자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그 조건을 갖출려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이 규정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을 반드시 비켜가는 식으로 규정하시는 예수님의 규정이 있기에
아예 시도 조차 할 생각 말라는 겁니다.


그냥 막 살아라 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를 보면 

스데반 본인이 만들어내고
간직한 것을 표현하고

알고있는 지식을 방출한게 아닙니다.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조건성으로 갖추어서 발언을 했다면
절대로 죽음을 당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겁니다.


죽음이 바로 올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죽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성령 받은자의 표본으로써 계속 살려 둬서
성령의 역사를 보여줘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죽여버려서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삭제 시켜 버립니다.

졸지에 보이지 않도록 해 버리는 겁니다.


오직 성령의 증거로써만 스데반이 언급될 뿐이지

그 외의 이야기나 스토리텔링은 없는 겁니다.


귀신씌이듯이 성령에 씌여버렸기에
인간들은 스데반 집사를 죽일수 밖에 없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기에 죽여버린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귀신이 씌여있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보호자 싸움이다는 겁니다. 두 소욕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괜히 설교 잘해서 죽음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반대로
스데반 집사를 죽이지 않는 방향으로 보는 이야기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래야 스데반처럼 본받자 라고 사기를 쳐서 또 삥 뜯는 겁니다.


그래야 본이 되도록 해서보이는 것들을 운영케 하는 에너지 원으로 삼는 동력으로 삼는 겁니다.


죽어버리면 허무 하잖아요
아무것도 아닌게 되잖아요


바로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없음]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제사 한번 잘 드려 허무하게 죽어 버린 가인의 동생 아벨처럼 말입니다.


이 허무를 구체화 하는 겁니다.


이 땅의 보이는 세계에서는 허무를 구체화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에는 알이 꽉꽉차도록 촘촘하게 채워가시는 겁니다.
목베인 영혼으로써 꽉꽉 채우시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제자들의 목숨을 잃어버림과
천국 곧 하나님나라의 관계성을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침 재미있는 영화를 봤습니다.

2012년 까지의 지구종말에 대한 영화가 대부분 공포적인 분위기에서 소수의 살아남은자로써 희망을 그대로 펼친다는 의미로써 공포 장사로 몰아가는 분위기임을
제가 몇편의 영화를 보고 느낀 점입니다. 스피노자의 내재성처럼 사과나무 심자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2012년이 지난 이후의 지구 종말 영화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최근 영화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멜랑꼴리아 라는 영화가 그렇구요.


즉 마치 잔칫날 

신나는 종말
즐거운 종말로써 왜 바라볼수 없는가 라는 식으로
제 개인적으로 그 영화를 보게 됩니다.

종말 너무 겁먹지 말고 신나게 즐겨 보자 라는 겁니다.


즉 죽음을 왜 자꾸 겁만먹고 두려워 하느냐? 라는
인문학 철학의 사유와 닮은 듯이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처럼 성경말씀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나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하지도 않고

언급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겁니다.

왜? 죽음이 아니거든요!!


인간 죽음에도는 관심도 없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딴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의 관심사는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에만 관심 쏠려 있습니다.
너무 너무 일방적이요 배타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도
새이스라엘의 처음자리도
그 출처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죽음이 예수님이라는 인물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고 기뻐했던 겁니다.
아벨의 허무한 죽음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샘플로 보여준 겁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죽음 조차도 역시나 개인 인간으로써
개인의 죽음으로 성경에 언급된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는 죽음으로써 성경말씀에 기록이 된 겁니다.


아벨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내 죽음도 죽음 축에 끼이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죽어도 소용없는 겁니다.


죽어도 죽은게 아니니까 말이지요.
즉 예수님의 죽음에 끼일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을 약속으로 받은 자에게만 예수님의 죽음에 끼일수 있는 겁니다.

아벨의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 끼인 겁니다.
그러니 죽었더라 족보이지요.
아무나 죽는게 아닙니다.

성령 받은자만 죽는 겁니다.


에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참예 되는 겁니다. 세례입니다.

백날 자살해 보세요

이 죽음에 끼일수 있는가?
세례 곧 연합이 되지 않는 겁니다.


육의 단절이 되기는커녕
단절이 되지 않습니다.
손할례로 백날 끊어보세요
안 끊어집니다.
오히려 육이 더 꿈틀 꿈틀 거리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는 마치 약올리듯이
불가능한 그 불가능성에 더 불가능한 이중불가능성으로
더 단절의 단절로써 강화하는
약올라 바짝 약오른 판국에 더 약올리는 듯이 언급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결국
오병이어 기적의 출처
12바구니처럼 잉여인 이스라엘의 출처
이들 처음자리의 출처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이 죽음에 연합되는 것은 아무나 될 수 없다는

단절성으로써 즉 부정성으로써 오늘 본문에 표현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그 어떤 누구도 끼여들 수 없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족보에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것
불가능하다고 해놓고서는
누가 들어가는가? 라고 약올리듯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 이러한 자는 들어간다고 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는자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 등등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 때문에 발생해야지

예수님과 무관하게 발생하면 그것은 성령받은게 아닙니다.


자기를 평상에 자기애로 가득차 있는 자인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졸지에 자기가 왠지 미워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자기를 미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갑자기 낯설기 짝이 없이 자기가 미워지는 겁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자기를 미워했겠습니까?


닭이 울어버리는 바람에 말입니다.

닭이 안 울었으면

베드로는 자신을 미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즉 성령이 와야 비로소 자기를 미워하는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않고 자기를 미워해 버리면
가룟유다처럼 자기가 자신을 심판해 버리겠지요.

심판할 권리도 없으면서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그런 자신이 미워서 자신도 예수님을 심판했듯이 자신을 심판해 버리는
마귀의 검열(비역질:계간;밀까부듯 초정밀 조사)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베드로 라고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끝까지 기도하시는 겁니다.
마귀의 끝없는 밀까부듯 초정밀 검열로 인한 송사청구서에
절대로 결제싸인을 쓰지 않는 겁니다.
기도하시면서 탄식합니다.

이것이 성령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십자가를 왜 이루시겠다고 한 겁니까?


베드로가 이런 하나님의 일을 몰라서
십자가 절대로 지면 안된다고 막았는데
십자가 지셔야

즉 죽으셔야만 베드로를 붙잡을수 있는 겁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을 권리가 없습니다.


거꾸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잡고자 십자가로 돌진하신 겁니다.

마귀가 검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건질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건져야 하기에 목숨을 버리시는 겁니다.
되찾는 것은 베드로였던 겁니다.


죄인 베드로입니다.


의인 베드로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의인 베드로처럼 사람을 자꾸 의인으로 만들려고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집단입니다.


죄인 베드로를 찾는 복음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죽음에 끼여드는 기독교 복음이 없는 겁니다.

모조리 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운영존속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에
두 주인을 못 섬기는 겁니다.


교회 존속은 복음과 무관합니다.
성령이 알아서 하는데 왜 끼어들까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성령 받지 않아서입니다.
예수님이 붙잡지 않아서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접붙이지 않아서입니다.


십자가를 외치는 것도

결국 교회 존속 때문이기에

예수님의 죽음과 무관합니다.


왜 예수님은 오늘날 교회에서 외치지도 않는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저 충성 봉사가 헤이해지면 자극하고 각성케 하기 위한 용도

곧 교회 존속의 목적으로써 이 본문을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그런자들은 언제든지 죽여버려도 상관없는 그 성령을 원치 않는 겁니다.


성령도 결국 인간의 손에 놀아나는 성령론을 추구하기에

교회 존속을 위한 성령론 뿐입니다
교리도 교회의 시다발이요
복음도 교회의 시다발이요
십자가도 교회의 시다발이가 되는 거죠.


곧 자기를 위한 시다바리인 겁니다.

그거 깰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인데 말입니다.


다 가로막을려고 하는 겁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원수가 되는 거죠.

그래서 다윗을 성전에서 구출해 해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구출해 내시는 겁니다.

우상에게서 구출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울 왕 노선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는 다 이 노선입니다.

우리는 다른 숨어 있는 노선을 봐야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윗은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습니다.


빼내는 방법은 딱 하나


죽음 뿐입니다.

의인의 죽음입니다.


모세가 변화산에서 왜 이 죽음만 외쳤을까요?

그 의인의 죽음으로 인해

의인의 피가


죄인 다윗

하나님의 원수 다윗에게 피 발려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기도하셔야
마귀의 검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인 겁니다.


자기를 구원코자 했던 이스라엘에게서 벗어나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자는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겁니다.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풍성한 선물로써의 죽음과 삼 일 (눅 9:12-22)

2013/10/29 11:13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풍성한 선물로써의 죽음과 삼 일 (눅 9:12-22)


열 두 바구니와 삼 일 만에 살아남



(눅 9:12, 개역)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눅 9:1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눅 9:14, 개역)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눅 9:15, 개역)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눅 9:16, 개역)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눅 9:17, 개역)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눅 9:18, 개역)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눅 9:1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눅 9:20,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눅 9:21, 개역)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눅 9:22, 개역)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잉여세계 곧 은혜의 선물을 베풀실때에는 반드시

그 반대의 세계의 단절성을 거쳐서 누리게 하십니다.


그 반대의 세계는 바로 은혜의 반대인 행함의 세계 곧 선악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력으로 그 선악의 세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