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손과 vs 마술 (행 19:11-20)



(행 19:11, 개역)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행 19:12, 개역)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행 19:13, 개역)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행 19:14, 개역)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 19:15, 개역)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개역)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행 19:17, 개역)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 19:18, 개역)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행 19:19, 개역)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행 19:20, 개역)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복음은 이상하게도 인간이 원하는 바를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의 마음을 인간이 가졌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복음은 그 선한 의도 뒤에 있는 진짜 내막을 들추어내는데 능합니다.
즉 이 말은 주님께서 인간을 마귀에게 갇히도록 해 놓고서
다시 그 마귀의 손에서 끄집어내시는
자신의 영광에만 관심이 있지
인간이 개입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는 일체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단절이 될 뿐이며
실족케 되어서 등 돌리고 되돌아 가도록 하시겠다는 취지에
인간은 질려 버리게 됩니다.

그 어떤 접촉점이 없기에
예수님을 선한 의도로 접근해 왔던 자들도 다 등돌리겠끔
주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런 취지를 바로 소유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육의 소욕이냐? 아니면 성령의 소욕이냐를
그 차이성을 발견해야 왜 둘 지간이 원수지간인지를 알 것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차이점이 없다면 원수가 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원수성에 자신의 자작극을 펼칩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에게 친근함으로 다가가겠다는 취지는
그야말로 자살할려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왜 에베소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오늘 본문에 벌어진 사건을 통해서
두려워하며 주 예수 이름을 영광 돌리며
갑자기 변하게 되는 변이점을 격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원은 그야말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게 되는 겁니다.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왜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게 되는 구원입니까?

반대로 신나고 즐거움으로 이루는 구원은 안되는 겁니까?

즉 이 말씀은 인간의 마음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예수님 마음을 말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겁니다.
즉 인간의 방식의 육의 소욕의 구원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인 성령의 소욕과의 차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인 겁니다.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제목을 바울의 손과 마술이라고 했는데
바로 대립된 의미인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의 원수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의 손이 무슨 능력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런 의미라면 성경에서 계속해서 언급이 되어야 할 겁니다만

오늘 본문에만 언급이 되고 뭐 더 이상 계속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손에서 나타난 능력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육의 소욕들이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오히려 저들에게 육의 소욕을 유발케 하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니까 비로소 베드로는 물 위로 걷고 싶다는 마음이 속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도 나도 나도 걷고 싶어요 라고 하니
그래 걸어봐 라고 걷도록 하십니다.

문제는 물 위를 걷도록 해주셔놓고서는
확 물에 빠뜨려 버리는 겁니다.

또 빠뜨렸으면 아예 다시는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계속 머리를 눌러버리면 될 텐데
또 이번에는 이율배반적으로 다시 건져내는 겁니다.

왜 이러실까요?

들었돠 놨다 들었돠 놨다  요물 ~~~~?

이번에 지젝의 책 [예수는 괴물이다]는 책이 제목으로 나왔던데

그야말로 베드로를 들었돠 놨다 들었돠 놨다 하시는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라고 베드로가 새로운 예수님을 만남에 있어서
기존에 자신이 포작한 예수는 다 날라가 버리고
그 낯설음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되는 겁니다.


풍랑이 갑자기 일어나서
물위를 걷는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 기쁨을

한 순간에 빼앗아 가버린 풍랑도


이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순식간에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졌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진짜 두려움은 예수님이 그렇게 베드로를 확 빠뜨리는게 아니라
왜 건져주시느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구원하시기 위해서

들었돠 놨돠 들었다 놨다 하시느냐 말이지요.


그냥 앞엣것 모두 생략하고 처음부터 그냥 물에 빠뜨려 건지시면 되지?
아무 의미가 없도록 무색하게끔 물위를 괜히 왜 걷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소욕 곧 소유성 때문입니다.
너의 소유성 다 끄집어 내어봐라 라는 겁니다.


그 똥 떵 어 리 배설물을 다 끄집어 내어 보자 라는 겁니다.
감추지 말고 다 들통나게 해서 내가 그까이꺼 해결 못할 것 같으냐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소욕성이 있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 다가가는 사랑이 모조리 다 단절이 되고
주님 쪽에서 다가오시는, 넘어오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낯설어서 오히려 거부하게 되는 겁니다.


두 사랑을 비교해 보자 비교꺼리가 되느냐 말입니다.
내 사랑을 철수 당해도 백부당 만부당하다는 겁니다.
비교도 안되니까 말입니다.

그저 익숙한 내 사랑으로만 사랑하고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내 소유성입니다.
그 소유성을 흠집내지 말라는 겁니다.
그거 확 찢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확 물에 빠뜨려 버리는 겁니다.
뭐 7번 용서? 확 찢어버립니다. 무한대 용서 받아야 할 판국과 비교해 보라는 거죠.


너의 사랑 방금 이렇게 드러났제?
물 위를 걸음으로써 기분 째졌제?
주의 이름으로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나의 적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기분 대끼리였제?
그거 확 찢어버리겠다는 겁니다.


사탄이 왜 너의 적이냐?

내 적인데?

오늘 사도바울이 손에서 희한한 능력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조차도 저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율법을 거쳐서 율법 외에 한 의를 아직도 못 본 겁니다.

율법 외에 한 의를 만난 후에

저렇게 했던 그 과거의 모습을 넘어선 겁니다.
그럼 착해진겁니까? 아닙니다.


율법의 외설성 보다 더 나은 외설성인 십자가에 들어간 겁니다.
그렇다면 자신 쪽에서 다가가는 사랑을 펼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랑을 찢어버리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과거에 펼쳤던 율법에 대한 열심을
아직도 유대인들이 자신의 과거 모습에 여전히 있기에
그거 확 찢어버리고자
유대인을 베드로를 물에 빠뜨렸던 예수님처럼
유대인들을 물에 확 빠뜨리는 식으로 펼치는 기적을 보이는 겁니다.

즉 동기유발인거죠.
물 위로 예수님이 걸으니까 갑자기 베드로가 나도 나도 걷고 싶어요 하고 동질화 합일이 되고픈 겁니다.

동기유발시켰듯이
이것이 십자가의 자작극입니다.


소위 타인의 욕망이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마술하는 사람이 상대적인 소욕성으로써, 육의 소욕이지요
그런 입장에서 대비되어 나타나는 겁니다.

즉 바울이 희한한 능력을 받아

악귀들린 자를 쫏아내고
바울 몸을 통해 손수건이나 옷을 대는 병든자는 병도 고치고 병마도 나가게 되고

악귀나 나가게 되니까

그것을 본 사람들은 졸지에 부러움과 그 동기유발이 되는듯한 모습에 의해

따라하기 열풍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나도 함 해 봐?

그렇다면 바울이 받은 능력은 바로 그런 취지에서

단절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바울이 아닌 성령이 주체인데  말입니다.

바울은 그저 성령의 꼬챙이 일 뿐이듯이 말입니다.


동기유발을 바울이 한 것처럼 보여줘놓고

그래서 따라하기 열풍이 생기게 되어 놓고

그게 아니다고 확 찢어버리듯이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를 물에 확 빠뜨리는 예수님처럼
성령의 소욕이 베드로 꼬챙이를 통해서 동일하게 나타는 겁니다.


그러니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그것을 따라하는 겁니다.

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물러가라 라고 하면 되는 구나

바로 이것이 유대인의 전체 사상과 사실상 동일한 겁니다.

즉 용어입니다.

문자로 최면 거는 것이즉 주문하는 것이 마술이 아닙니까?


인간의 신학 철학 학문 종교 교리 모조리 다 최면입니다. 문자 기호로 하는 속임수 트릭입니다.
그러니 종교는 마약 입니다. 마술입니다. 

본색을 드러내듯이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마술을 행하는 겁니다.

사실상 오늘날 모든 목사들이 이 짖을 하는 겁니다.
베드로도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짖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 한테 들통난 것이 오히려 다행인 겁니다.
남들이 지적 받지 못한 것을 지적 받는 것이 사랑이듯이 말입니다.


다윗은 딴 나라 왕들이 다 해도 무방한 아무도 지적하지 않지만
주님은 다윗을 지적하지 않습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사생아에게 없는 자녀에게만 대는 매.

그래서 고맙게도 외부에서 확 찢어주는 자가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의 소욕인 단절입니다.


다들 열풍이 일어나듯이 개방이 판 치는 판국에, 곧 마술이지요.

다들 물 위로 걷게 되는 기적이 판치는 판국에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쫏아내고
마귀도 물리쳤나이다 가 판치는 판국에

베드로 혼자 뒤로 빠진 겁니다. 빼돌리신 겁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바로 성령의 소욕은 이런 밉상 받는 단절을 해야한 하도록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콧 방귀를 끼는 겁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뭔데 나를 주 예수 이름으로 물리친다고 하냐? 

뭐 너가 나를 적으로 삼겠다고? 푸하하하하
이미 내 밥풀떼기가 된지가 언젠데?

참나 마귀생활 수천년 만에 별 꼴을 다 보겠네라고 마귀가 비웃죠.

그것도 제사장 아들들 아닙니까?
사실은 마술이 종교입니다. 마약입니다.


종교가 하는 짖은 결국 인정받고 싶어하는 육의 소욕 짖입니다.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인정받고픈 술수입니다.

그러니 누구 보다 그 기술을, 그 능력을 가장 먼저 받고픈 자가
제사장 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죠.


목사 괜히 된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빼내는 방식이 바로

다윗처럼

왕 자리에서 뒤로 빼내는 방식이


닭이 세 번 울어야 하듯
세 번의 타인의 죽음이 덮쳐져야 하는 겁니다. 희생안타죠.
곧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다윗은 살해 하기 싫어도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기여이 다윗을 살리기 위해 다윗의 손에 죽으시겠다는 겁니다.
그 선물이 바로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입니다. 꾜끼오 꼬끼오 꼬끼오죠.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더 할려고 죄를 더 지을수 있습니까?
그 죄는 인간이 다루는 죄니? 죄가 됩니까?

죄는 인간에게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그것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뭔데? 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행 19:15, 개역)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개역)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마귀가 한 말이 얼마나 성경적입니까? ㅋㅋㅋㅋ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물리쳤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집디다

나 너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썩 물렀거라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마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귀나 죄나 인간에 의해 다루어지질 않습니다.
인간이 도리어 마귀나 죄에 다루어지는 겁니다.

어떻게마귀를 이겼다고 착각하도록 하는 마귀의 속임수에 놀아나도록 말입니다.

죄를 짖지 않고 또 해결했다고 하는 순간 도리어 죄가 더 깊어지도록 하는 겁니다.

그냥 막 사세요.
적으로 생각해 본들 마귀가, 또는 죄가 우리를 적으로 취급도 안해 주는 겁니다.


적을 둘 자격이 없습니다.

마귀와 죄가 의식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그러니 마술로 귀신 쫏아내고 병을 고쳐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나간척 하면서 더 많이 들어오는 겁니다.

괜히 쫏아내서 일곱 귀신이 더 들어오는 겁니다.


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오직 예수님의 적이지 우리의 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강박관념이 생깁니다.

이기고 싶어서 말입니다.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나 같은 적도 주님이 건져 주십니까? 라고
갇힌 입장에서 구원자를 바라봐야 할 판국인 겁니다.
환자가 아닌데 어떻게 의사를 간절히 바라겠습니까?


성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

또 다른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주 아주 놀랍게도 바리새인은 세리를 적으로 본 겁니다.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적으로 봤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나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적이 아닌 이유를 나열합니다.

십의 이조를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등등등


다른 말로 하면 나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물리고 병도 고치고 사탄을 물리쳤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자들에게 무슨 구원자가 필요하겠습니까?

구원자가 필요할때는 귀신 쫏아낼 때 기름 충전하듯이 고때만 필요하겠지요.
자기가 구원자인데 예수님의 피가 왜 귀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 때려죽어도 죄인일수가 없는 겁니다. 왜 자신의 적이 마귀이니까
곧 나는 때려죽어도 하나님 편이다 라는 거죠.


그런데 세리는 반대입니다.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누가 봐도 매국노입니다. 적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적입니다.

마귀나 죄에서 빠져나올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적으로써
하나님의 원수로써 성전에 온 겁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러니 십의 이조
교회 충성 봉사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차원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결국 자신의 행동 유무에만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 지키느냐 못 지켰느냐? 죄를 이겼느냐? 못 이겼느냐?
마귀의 유혹을 뿌리쳤느냐 ? 못 뿌리쳤느냐? 의 유무만을 따져서
그 성과물을 성전에서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러니까 내 편이 될 수 밖에 없겠지요? 할 말 없지요?

당신의 법의 지켰으니 당신도 할 말 없제?

이런 판국이니 시선 자체가? 관점 자체가 틀린 겁니다.



그러니 세리의 차원은 아예 마귀에서 죄에서 한 발 쪽도 못 벗어남만 뿐이니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말의 시선은 세리 밖에 없는 겁니다.


두려움과 떨림은 세리만의 시선이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심판 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라고 그 심판이 주님 밖에 없음을 아는 겁니다.
자신의 행동 유무의 변화로 그 심판이 달라질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 그럼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은 결국 오늘날 우리처럼

그저 마술을 바라는 심뽀와 같은 겁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철학 신학 교회의 모든 교리 사상 종교들 모조리 다 마술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다 마술입니다.

신기루 안개입니다.


모호하고 의문덩어리 나중에 딴소리 하며 보따리 내놔라 식의 의문덩어리입니다. 명료한게 없습니다.

의미도 없는 것들입니다.

물 위를 세 발짝 걸어다니는 그 환상 곧 마술만을 추구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대표성입니다.
마술입니다. 트릭입니다. 마약입니다.


여기에 육의 소욕에 대비되는 성령의 소욕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 라는 단절성이 들이대면서 확 찢어버립니다.

확 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확 탈탈탈 털어서 빈털터리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빈 털털이로 만들면 비로소 현실이 보입니다.

베드로가 비로소 현실을 봤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를 제대로 확실히 죽이시는 당신 도대체 누구세요? 케보이!

물에 빠져서 건져주시는 예수님이 보통 낯설기 짝이 없는 겁니다.

내가 알던 예수님 아닌데?
누구세요?
예수님 맞아요?

이름이 뭐예요? 왓 츄어 네임 왓 왓 왓 이름이 뭐예요 ! 뭐 뭐 뭐 예요

전혀 개방적이지 않고 단절적이다는 겁니다.
왜 내 같은 놈 건지십니까? 건짐 받을 자격이 없는데 말입니다.

왜? 주님이 빠뜨렸으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율배반적으로 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변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변한 겁니다.

죽였다가 살리시는 당신은 누구세요?

이름이 뭐예요? 왓 츄어 네임 포미닛이 부르듯이 말입니다.

자 현실이 보이니까 비로소 이 사건을 보고 두려워 떨면서

모든 마술책을 태워 버립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것들 다 태우는 겁니다.

마술책이 나빠서? 아닙니다.

주님이 무서워서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림이 닥쳐 왔으면

마술책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심판의 기쁨이 넘쳐흐르길래
필요가 없어서 태우는 겁니다.

그 유일한 생계유지의 수단들인 기술책인 마술책이 태워지는 겁니다.
더 큰 두려움과 떨림이 왔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바울이 회당에 기도하러 토론하러 갈때마다 따라다니면서그 귀신들린 무당이

나 당신 알아요?
예수님의 주 되심을 외치는 선지자 맞지요 라고 자꾸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해서

확 뜯어 고치니까


정작 실상은 귀신들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귀신들린 여자를 통해서 점치고 그 점치는 것으로 장사하는 그 유익을 얻게 되었는데

더 이상 점을 칠수가 없어서 바울을 고소하는 사건 말입니다.

착고에 채워지는 바울 (행 16: 6-26)


진짜 내막을 들추어내었다는 것에 인간들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즉 귀신과 돈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로 소유욕의 출처를 보여주는 겁니다.


귀신을 다루게 되면 정작 돈이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또는 오늘날 목사들이 능력 받겠다고 별 희한한 짖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진짜 귀신들린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귀신이 콧 방귀 끼는 겁니다.


지금 바울 앞만 아니면 너거 한테 속아주는 척 하겠지만
바울 앞이라 에이 내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네
뭐 니가 뭐 귀신을 쫏아내? 뭐 나를 쫏아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

에라이 더 들어가라 라고

귀신이 덮쳐져서 그 사람을 억제하는 겁니다.

귀신 쫏아낼려다가 더 귀신이 몇배나 더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시선이 틀렸다는 것은
역시나 마귀에 대한 시선도 틀렸다는 겁니다.

마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바울처럼 주의 이름을 주문 외운다고?
십자가 모양을 손가락으로 모양짖는다고 드라큐라를 쫏아낼수 있다고?

그거 흉내내고 같은 주문 외운다고 됩니까?
마귀가 웃죠 마귀가?

그냥 세리처럼 두려워 떨면서 불쌓이 여겨달라고

자신이 마귀이다 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판국이

종말의 사랑이
사랑의 단절성이
그 세리에게만 왔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심판이
먼저 세리에게 내렸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곧 십자가의 저주를 받은 그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는

성령의 외침을 그 탄식을
세리의 귀에만 들렸던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그 단절의 심판성 종말성이
세리에만 덮쳐져서
불쌍히 여김 받음으로 인해
세리에게만 들리고
세리에게만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불쌍했으면 불쌍히 여겨주셨겠습니까?
십자가의 숙제입니다.
내 숙제가 아닙니다.


내 적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적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보기를 원하나이다.

저는 소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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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달린 큰 물고기 뱃속 - 요나의 표적- 영화 롤러코스트



요나, 베드로, 들었돠 놨다 들었다 놨다


요나를 건지기 위해 요나를 빠뜨려야만 하는 그 기적 ㅋㅋㅋㅋ


그 3초의 기적을 위해


그 속내들을 다 탙탈 털어서

빈털털이로 만드는 표적


주여! 저는 쥐 뿔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뚝딱 뚝딱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뚝딱 뚝딱

나 혼자 노랠 하고, 뚝딱 뚝딱


몽땅 빼앗기는 기적 - 그 처음자리 외에는 보여줄게 없는 기적


진정한 자유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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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밥을 먹고, 뚝딱 뚝딱 - 감독의 시선


http://www.youtube.com/watch?v=E-_acAs7DFc



















우발적(종말 속)으로 나타나는 새이스라엘 (행 19: 1-10)

2013/10/26 13:32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우발적(종말 속)으로 나타나는 새이스라엘 (행 19: 1-10)



(행 19:1, 개역)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 19:2, 개역)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3, 개역)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행 19:4, 개역)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 19:5, 개역)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행 19:6, 개역)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7, 개역)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행 19:8, 개역)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행 19:9, 개역)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행 19:10, 개역)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구약의 이스라엘이 우발적으로 나타나 탄생한 것은 

바로 약속 때문입니다.

우발적이란 종말적이다는 겁니다. 즉 전쟁이 목적인 겁니다.

약속 혼자만이 벌리는 전쟁입니다.

여호와께만 속한 전쟁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약속이 중요한 겁니다.


그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은 탄생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땅꽁 껍데기요 그 속의 알맹이는 약속이기 떄문입니다.


약속 때문에 땅꽁 껍데기가 임시적으로 나타났다가 누락될 뿐입니다.

약속만 있으면 족한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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