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종말 속)으로 나타나는 새이스라엘 (행 19: 1-10)


(행 19:1, 개역)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 19:2, 개역)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3, 개역)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행 19:4, 개역)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 19:5, 개역)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행 19:6, 개역)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7, 개역)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행 19:8, 개역)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행 19:9, 개역)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행 19:10, 개역)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구약의 이스라엘이 우발적으로 나타나 탄생한 것은
바로 약속 때문입니다.
우발적이란 종말적이다는 겁니다. 즉 전쟁이 목적인 겁니다.
약속 혼자만이 벌리는 전쟁입니다.
여호와께만 속한 전쟁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약속이 중요한 겁니다.


그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은 탄생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땅꽁 껍데기요 그 속의 알맹이는 약속이기 떄문입니다.

약속 때문에 땅꽁 껍데기가 임시적으로 나타났다가 누락될 뿐입니다.
약속만 있으면 족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탄생이 육의 탄생이 아니다는 것이 문제이다는 겁니다.

왜 그게 문제가 되느냐?

바로 이질적인 것이다는 겁니다. 다르다 라는 겁니다.
이단적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육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법칙을 깨뜨리고 육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뭐 그럴수도 있지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차이가 난다는 것은 곧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사건이 된다는 것은 곧 충돌 즉 전쟁이 된다는 겁니다.
펼연성(아브라함 자손) 이라는 당연함을 깨뜨리는 우발성(돌삐-잉여-선물)
곧 도대제 제네들 누구야 라고 해석불가가 되는 겁니다.
전쟁이 된다는 것은 곧 종말성 즉 갈라지는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약속이 누구를?
이스라엘을 탄생케 한 겁니다.


그것도 육의 방식이 아닌
소위 영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영의 방식이라고 하니까 종교적으로 생각하는데
아주 쉽게 말해
육의 생식기를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는 영의 방식들 또한 다 육의 생식기를 통한 방식입니다.
즉 할례가 아닌 방식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아주 특이한 방식인 할례라는 방식이
약속 때문에 주어지게 됩니다. 단절성입니다.
즉 십자가 방식으로만 태어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역시나 문제는, 그게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육의 방식에서 태어났는데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은 아예 외계인으로 분류해야지만 이해가 되지
겉은 완전히 인간의 껍데기와 똑같은데
정작 태생은 외계인으로 분류해 버리면

인간은 자기의 눈을 본대로 들은대로 믿어버리는 매트릭스 구조 통제법칙이 무용지물 되니까 말입니다.
눈으로 본대로 귀로 들은대로의 법칙이 다 와르르 무너지게 될 판국에 놓여지게 되니까 말입니다.
눈도 소용없게 만들어 보는게 의미 없어지고, 귀로 들은 것이 다 아무런 가치가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바로 그겁니다. 인간은 자기의 눈으로 본대로 들은대로의 방식만 주장하는 그 법칙에,

그 육의 법칙에,
낯설은 이단의 법칙인 십자가 영의 법칙에 의해
졸지에 침범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 버리면

전쟁 곧 종말성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싫어버린바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전쟁에 참예되어 동원이 되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진짜 제대로 영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서
약간의 트릭으로 (구약적인 그림자 방식으로)

유대인을 유럽 사회에 주님께서 배치시켜 놓아 보니

난리도 아닙니다.

정작 유대인은 영의 방식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본게 있다고 그 방식을 고집하는데 있어서
정작 이런 유대인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은 그야말로 싫어버린바 된 겁니다.

단순히 수건하나 걸쳤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이질감으로 유럽인에게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겁니다.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개역)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개역)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개역)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개역)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모세가 쓴 수건을 만약 벗기라도 했으면 우짤뻔 했을까요?

유럽인들 전체가 모세 죽일려고 일제히 진격의 용사가 되어 다 죽일려고 달려들지 않을까요?
유럽인 뿐이겠습니까? 우리인들 별반 다를까 말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을 죽이는 우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다행히도 이미 훨씬 그 이전에 다 보여줬습니다.
정작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모습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라고 유럽인들이 이데올로기를 형성했듯이 말입니다.


자 이렇듯 얼굴 즉 껍데기 가면 하나 바꿧을 뿐인데
인간에게서는 이상하리 만큼 그 악마성이 슬슬 그 깊은데서 기어나오기 시작합니다.
수건 벗은 얼굴을 보기 싫다 라는 겁니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없는 개념을
약속이라는 보이지 않는 믿음에 관한 문제를
주님께서 심어서 역사속에서 돌출시켜 보니까
역사가 이 이스라엘 하나 어떻게 잡아먹어 볼려고 생발악을 다하는 광기를 보여줬듯이
역시나 그 이스라엘 조차도 약속하나 잡아먹어 볼려고 생발악을 다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광기를 보여준 겁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이 이스라엘의 의미를 못 잡은 겁니다.

이데올로기를 없애는게 아니라 더 깊게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밉상을 받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서 예수님이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이스라엘을 거부하는
참 이스라엘 되신 예수님을, 그 예수님의 얼굴을 그들 이스라엘은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껍데기를 백날 이스라엘로 해 본들

소용이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약속한 그 성령을 담은 이스라엘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신약에서의 새 이스라엘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완성하신
새마음 곧 성령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그 성령을 담은 새이스라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난시간 앞에서 살펴본, 성령으로 태어난 새이스라엘의 이질성에 대해서 언급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주 되심 곧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 라고
그 하나만 들고 수셔대기 시작하니까
유대인들이 가장 반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볼로가 이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도들이 이 성령을 언급하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언급했듯
예수님이 다시 성령을 언급하면서 성령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에
이들 아볼로 일행에게 성령을 소개하는 겁니다.


그 성령 주시겠다는 약속에 동참시키는 겁니다.
자 그럼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아볼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지난시간처럼, 뭐 부족한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세례요한처럼 아예 죽을려고 작정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왜 구지 성령을 받아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 이전과 성령 받은 이후의 차이점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행 19:6, 개역)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 19:7, 개역)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성령을 받게 된 후의 차이점이
그 이전에는 방언도 예언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하게 되었더라?

그런 차이점일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순복음 쪽에서 이 방언과 예언에 사활 거는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니지요.

방언은 울랄라 ~~~ 하는게 방언이 아닙니다.
예언은 미래일을 점쟁이처럼 점치는게 예언이 아닙니다.

방언도 예언도 종말적이다 라는 겁니다. 즉 성령적이다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아볼로는 이 종말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고도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요한의 죽을각오로 하는 증거처럼 외칠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하듯이
또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품으로써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음을 봐야할 판국에 세례요한이 목격해야 하듯이

아볼로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베풀줄 알았지
정작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할 판국에 놓여진 상황이라는 겁니다.

즉 이 말은 그 어떤 것으로 연결을 시도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단절적이다는 겁니다.
그 이전의 것으로부터 새마음으로 말입니다.
세례 자체가 단절성 할례의 의미입니다.
뚝뚝 끊어져야만 하는 그 단절성을 거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연합이라는 한 몸을 이루겠습니까?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0, 개역)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 1:31, 개역)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 1:32, 개역)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3, 개역)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요 1:34, 개역)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세례요한하고는 연합 된 자가 어떻게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말이 안되잖습니까?
정작 세례요한은 예수님과 합한 자인데?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의 세례 곧 그 단절성에

다시 단절의 단절을 추구하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연합에 들어가기 위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또 열 둘 이라는 새이스라엘의 의미가 아볼로에게 베풀어지는 겁니다.
즉 새약속인 겁니다.

새약속 때문에 아볼로는 새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방언 즉 종말의 언어 즉 십자가 언어로
또 예언 즉 종말의 주, 예수님의 주 됨을 증거하는 자로써
새약속 때문에 새이스라엘로써
이 이전의 것은 지나가고
세례요한의 세례가 아닌성령의 세례로써 그는 다시 태어나 새약속을 증거케 되는 겁니다.

아볼로는 세례요한의 운명에 들어가야 할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운명 속에 들어가야 할 자 입니다.

이것은 사실 세례요한의 외침 속에서도 나타난 바입니다.
자꾸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실 이가 주가 된다 라고 외칩니다.


이 표현은 너무 너무 의미 심장한 내용입니다. 즉 그 말 자체가 단절적이기에

아무도 그 말을 개방 시킬수가 없습니다.


[내 뒤에 오실 이] 라고 자신을 반드시 기입 시키고
그 자신을 기입시킨 가운데 자신을 누락 시키면서
뒤에 오실 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 이것도 감당하기가 불감당입니다.


뒤에 오실 이를 감당할수가 없다고 세례요한이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눅 3:16, 개역)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눅 3:17,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런데 그 단절성에 더 단절적으로 이중 겹치기를 합니다. 이중단절입니다.
단절의 단절입니다.

내 뒤에 오실 이가 나 보다 앞선 이다 라고
시간이 졸지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외치고 있는 묵시운동(특히 바리새인의 하나님나라운동) 종말운동은
다 거짓으로 밝혀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묵시운동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에게
어떻게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다윗의 주라고 할수 있느냐 라고 물으시니까
저들이 아무런 답을 못하는 겁니다.


제대로 간격을 벌려버린 겁니다. 충분한 단절성입니다. 어설픈 단절성 종말성이 아니라 말입니다.
저들은 유대인을 포기하는 유대인이 되지 못한 겁니다. 즉 단한번도 유대인이었던 적이 없으면서
오로지 자신만이 유대인이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유대인보다 더 아브라함 자손인 돌삐에 의해 부정당해 버리는 겁니다.
즉 충분히 부정 당해 본적이 없기에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이라고 우길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아니! 성경박사들이 답을 못합니다.
성경지식으로 남을 정죄하고 남을 가르치고 했으면서 말입니다.
유대인 티를 그렇게 팍팍 내었는데도 말이죠.


남을 세웠다 넘어뜨렸다 하는 자신들이 마치 기준이 된냥 했던 자들이 유구무언입니다.
시공간을 그렇게 꽉꽉 채웠으면서 왜 답을 못할까요?
시공간성은 바로 육입니다.
그 육이 무너지지 않고, 단절 되지도 않은채
어떻게 묵시운동을 한다면서 양다리를 걸칠수가 있습니까?

참 재주도 좋지요? 이들만 그러고 있는게 아니라, 우리도 여전히 지금도 똑같다 라는 겁니다.
(누가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물었는데
사실은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은 더 간격을 벌리지 못한 점입니다.
어설프게 간격벌려 놓고서는 간격벌렸잖아 라고 도리어 육의 자랑이 되고만 겁니다.
육의 자랑 조차도 못되도록 간격을 확 벌려야 했습니다. 자기부인.
그래서 그들의 이단성에 더 이단적인 존재, 차이나는 존재. 다른 존재가 나타나니
그들의 간격벌리기는 어설프기 짝이 없게 된 겁니다.
확실하게 제대로 명료하게 벌린 분이 나타나니까 그래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 라는 간격이 나타나 버리니까
간격(사랑)이라고 입에 꺼낼수가 없었던 겁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자랑했던 거죠. 세례요한 앞에서 손할례 자랑하듯...)


저들은 말합니다.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개방적이다고?
손할례를 했으니 당연히 묵시운동을 할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육의 한계는 결국 종말적운동을 할수 있어도 종말의 종말은 추구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묵시 운동은 할수 있어도 묵시의 묵시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손할례는 할 수 있어도 마음판의 할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단절의 단절입니다. 성령의 영역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들 앞에 졸지에 이단이 나타난 겁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일명 도끼맨?

뭐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이질적인 특이한 존재라고? 그래서 묵시운동을 한다고?

에라이 돌삐로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돌삐가 더 이질적이고, 닭의 세 번 울음이 더 이질적이다는 겁니다.

저들이 우기는 처음자리 보다 더 나은 처음자리로써 닭고 돌들이
아브라함 이라는 믿음의 처음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더 나은 처음자리로써 이스라엘로 등장합니다. 닭과 돌삐라는 유물이 말입니다.

도끼가 나무에 놓여있으니 열매 맺지 못한 나무마다 불에 태워지리라
단절 보다 더 단절적인, 충분한 단절성입니다.

(눅 3:7, 개역)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9,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 3:10, 개역)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눅 3:11,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눅 3:12, 개역)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눅 3:13, 개역)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눅 3:14, 개역)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 3:15, 개역)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눅 3:16, 개역)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눅 3:17,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한마디로 묵시운동, 하나님나라 운동하고 있는 그 자체를 회개하라고 하는 겁니다.

종말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스스로 분리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그 자체를 회개하라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구원을 염두하고서 외치는 세례를 베푼적이 없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내 뒤에 지금 불덩어리가 온단다
지금 나는 그 불덩어리에 앞서 온 광야의 소리 즉 스피커일 뿐이다.
나도 그 불덩어리에 태워짐을 마땅히 당해야할 자 일 뿐이다.
너희들이 나를 백날 없앴단다고 그 불덩어리가 사라질 리가 없잖아

선불교에서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니까 그 손가락을 없애버려 짤라버린다고 해서 달이 없어지냐 말이죠


진짜 종말은 그 불덩어리 앞에서 내가 안태워질 방도가 없다라는 사실

백부당 만부당 지옥에 마땅히 가야한다는 사실

얼마나 그 불덩어리를 무시했으면 그 불덩이에서 피할 방도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미 멸망받아 마땅하다는 사실
그것을 회개하지 않기에

묵시운동 종말운동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피할 구실을 자꾸 찾아내고야 한다는 사실이


바로 미쁘신 불덩이를 거부하고 무시하면서


시험에들 종말운동 하나님나라운동 묵시운동을 펼치고 있으니
세례요한을 도리어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겁니다.


왜 저런 모호한 묵시운동 종말운동 하나님나라 운동을 한다고 피할수 있느냐 말이지요?
도끼가 나무에 놓여졌는데?

정말로 또렷한 것은 심판의 불덩이입니다.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지요?

너무 너무 명료하고 또렷하고 명확한 확정적인 완료가 있는데
정작 자신들은 뒤로 빼돌리면서 종말운동을 펼치면서
그 운동을 했으니
자신들은 구원이다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모호하냐 말입니다.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사탄도 물리쳤습니다. 얼마나 모호한 겁니까?)

진짜 명료하다면 자신들 마저도 다 불태우는 찍어버리는 도끼요 불덩어리가 아닌가 말이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실 그 이가 나 보다 앞선 분으로써
내가 감당이 불감당이다 라고

나 세례요한 조차도 그 불에 태워짐이 마땅하다는 것을
그래서 융통성 없이 그저 개죽음될 것 뻔히 알면서 헤롯의 손에 죽임 당했고
그것을 본 아볼로도 그 영향을 받고
아예 죽음을 각오를 하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융통성 없이 고지곳대로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우리도 아볼로 영향을 받아서 아예 죽을 각오를 하면서 융통성 없이 고지곳대로 외치기만 하면 될까요?
그러니 그런 눈에 보이는 것은 장담 못하는 것들인 겁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령이 더 모호하지 않습니까?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더 모호하지 않나요?
오히려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닌 것이 더 명료하지 않겠습니까?)

그것 조차도 심판의 영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도 다 따라할수 있는 가능성일 뿐인 겁니다.

유행이란 따라할수 있는 겁니다. 최신 유행은 언제든지 따라할수 있는
최근에 본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을 날려버려 보세요
과연 따라할수 있는지?
누가 본보기로 눈에 보여주면 누구든지 따라할수 있습니다.
문제는 안보여주면 그 목적인 의미가 없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예수안에 즉 새마음인 예수님의 마음인 성령안에 집어넣었다 빼내는 겁니다.
물에 빠뜨렸다가 올라오듯이
죽였다가 살려내보는 겁니다.

베드로의 그 장담을 물에 빠뜨렸다가 건져내는 겁니다. 본인도 건짐받아야 할 판국임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 손에 죽어봐야 정신차리지?
잠시만요! 베드로 오빠 물에 빠뜨렸다 건져내고 가실게요!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처럼 시간을 뒤죽박죽 시공간이 의미가 없도록 해 버리는 겁니다.
자신이 취득한 믿음 좋아 보이는 것 물에 빠뜨렸다가 건져보는 겁니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다 삭제 시켜 보는 겁니다.
행함을 다 지워버리고
다시 아기로 태어나게 하듯,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지를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운명과 같은 운명인지를 말입니다.

아볼로를 물에 빠뜨려 보고(세례)
불에 빠뜨려 보고
성령에 빠뜨려 보는 겁니다.

이미 성령에 빠뜨렸다가 올라오게 했다는 자체가 더 이상의 육이 통하지 않도록 하는 단절이듯
과거의 모든 것을 다 지워 버리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 피조물이 되었도다 라고

그는 세례요한의 운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에 참예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음의 죽음입니다. 이중죽음입니다. 이중종말입니다.

성령세례를 베품으로서 지난 모든 역사 과거 시공간을 다 지워버리고
오로지 십자가의 피흘리신 예수님의 주 되심이라는 종말만을 외치도록 태어나게 한 겁니다.

새로 품었다가 잉태시켜 해산의 고통으로 낳은 겁니다.
세례요한의 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태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시대가 예수님의 시대로 바뀌었거든요.


다 커 버린 어른을 다시 잉태하여 해산의 고통으로 낳아 회개할 필요가 없이 회개자로 태어나게 한,
이 새언약(0)의 단절성을 외치는 새이스라엘(열 둘 = 1 =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아볼로라는 새이스라엘은
손으로 세례를 받은 옛이스라엘과의 충돌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겁니다.
여기에 헌 술 헌 부대는 반발하는 겁니다.
그림자들이 실상을 거부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들이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나?

엘리야가 살아났나?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나? 라고

비로소 반응이 나타나는 겁니다.


결국 새언약은 구약에도 없던 지옥을 가시화 시키면서
천국을 드러냅니다.

지옥을 가시화 시키지 못하는 천국은 가짜이니까 말입니다.

그 지옥이란 주의 이름으로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들이 자기들 동료 몇몇 떨어졌다고 벌벌 떨지 않습니다.

진짜 마귀들이 의식하는 것은?


뭐?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어?

뭐라구?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구?

뭐? 말도안돼? 그럴리가 없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라고 에수님의 주 되심에만 반응하지

다른 것은 콧방귀를 뀐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언약 곧 복음은
애굽 속에 이스라엘을 탁란시켜 그 애굽에서 탈주하는 것이고
다시 이스라엘 속에 남은자를 탁란 시켜 그 이스라엘에서 탈주하는 것이고
다시 그 남은자 속에 예수님을 탁란시켜 그 남은자에서 탈주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12지파 다 사라지고 유다지파만 남았다고 남은자라고 우기고 있는 유대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예수님의 주 되심만을 바라보면서 유대인에게서 빠져나오는 겁니다.


닭의 울음 세번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12로 태어납니다.
딸랑 하나 지파 남았다고 남은자 라고 우기는 유대인 코 앞에서
유대인 보란 듯이 말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돌삐 하나에서 다시 12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다시 그 많은 이방인 중에 문둥병자
다시 그 많은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다시 그 많은 이방인 중에 과부
다시 그 많은 과부등 중에 한 과부

이렇게 종말의 종말로써의 처음자리인 이스라엘인 겁니다
그 3일이라는 간격 속에서만 태어난 자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다 같은 인간인데

왜 이질적인 존재가 같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느냐 라는 거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죄입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왔다는 죄

바로 이런 예수님의 세계에 아볼로를 참예 시킵니다.

예수님이 의사로써 환자타기
예수님이 구원자로써 죄 타기를 하심으로써
부메랑에 올라타게 됨을 당한자들인 겁니다.

성령으로 인해 세례 받음으로써 이전 것은 지나간 새피조물로써

세례요한의 운명이 아닌, 물론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운명으로 흡수되었듯이
이제는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받음으로써 예수님의 운명이 된 겁니다.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같은 운명인 열둘 새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삐져나온 새이스라엘
곧 출이스라엘한 새이스라엘 입예수 예수안으로 들어가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아났다고
자신들의 입에서만 외치는게 아니라

또 마귀를 이겼다고 마귀 떨어뜨리는 능력을 목표로 보여주는게 아니라
정작 진짜 마귀들이 벌벌 떠는 것은
자신들이 세례요한 예수님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살인이라는 무기가 전혀 무용지물이 되는
다시 살아남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들의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죽여도 안 죽으니 말입니다.


소용이 없는 겁니다.

이 다시 사심만을 위해서
이스라엘 속에서 탁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자신이 누락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원래 피조물은 창조주의 다시 사심만을 위해서 죽어도 상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 불가능한 영역이 바로 행함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 되는 겁니다.


새피조물이 된 아볼로 조차도 무슨 수로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려낼수가 있겠습니까?
본인도 지금 세례요한처럼 감당이 불감당이라 심판 받아 마땅함을 고백해야할 판국인데?
그러니 사귐의 숙제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몫입니다.


그것도 남이 아닌 내가 죽인 예수님이 도리어 너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참으로 믿음이 아니고서야 그런 물음을 던질수가 없습니다.

그 믿음에 믿음으로만 답해야할 판국에 놓여진 것이
얼굴과 얼굴로써 대면하는 사귐인 사랑입니다.

예언도 방언도 다 일시적인 겁니다.

장담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명료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또렷한 겁니다.
그런 자에게만 회개의 영인 새마음이 오는 겁니다.

사탄을 주의 이름을 떨어뜨리고 세례요한처럼 개죽음을 당하는 순교를 펼친다고 해도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자들아 썩 물렀거라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십니다.

아볼로는 그런 세계에서 도리어 건짐받아야 할 판국인 겁니다.

정작 명료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이 원수된 자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 흘렸다는 사실을 아는
그 알게하시는 사귐만이
그 사랑만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믿음인 겁니다.


믿음이 아닌 것은 다뭐 믿음이 다시 살아났다고 라고
자신의 숨겨진 행함책에 기록된 본성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새이스라엘은 이런 복음 때문에
없는데서 태어나야만 했던 겁니다.

십자가라는 죽은 태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새언약이라는 주인공을 위해서 말입니다.









유대인의 말을 이긴 복음 (행 18:18-28)

2013/10/06 09:0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유대인의 말을 이긴 복음 (행 18:18-28)



(행 18:18, 개역)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행 18:19, 개역)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행 18:20, 개역)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행 18:21, 개역)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행 18:22, 개역)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행 18:23, 개역)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행 18:24, 개역)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행 18:25, 개역)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

(행 18:26, 개역)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행 18:27, 개역)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행 18:28, 개역)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아덴에서 소피스트와 충돌한 바울은 할 말 다 하고 냅따 고린도로 갑니다.

고린도에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냅따 수셔대면서 할 말 다 하고 갑니다.


자극을 받은 고린도 유대인들이 끝까지 따라오면서 훼방을 놓지만

전혀 요동이 없이 바울은 할 말 다 하고, 할 일 다 하고

먼지 털고 갑니다.


이런 바울의 일방적인 행동은

바로 희년완성인 다 이루었다라는 주의 주 되심을 위해

이 땅이 악마의 세상임을 수셔대면서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이방인구원) 약을 바짝 올리듯이

유대인들을 자극하면서 그 소욕을 과시하는 듯 대립시키면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주체가 아니라

성령이 주체로써 바울은 꼬챙이에 불과한 겁니다.


쇠파리로 사용하시면서 여기 저기 수셔대면서 성령 자신의 소유욕을 드러내시는 성령의 활동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볼로가 그 꼬챙이 역할을 합니다.


아볼로가 성령의 꼬챙이로써 활동하게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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