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파기 복음



(눅 9:1,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눅 9:2, 개역)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눅 9:3, 개역)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눅 9:4, 개역)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눅 9:5,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눅 9:6, 개역)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눅 9:7, 개역)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눅 9:8, 개역)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눅 9:9, 개역)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눅 9:10, 개역)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눅 9:11, 개역)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복음 증거는 교세확장이나?
한 사람이라도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전하는 소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이란 오히려 숨겨진 상태인 나쁜 소식을 더욱더 또렷하게 들추어내는 겁니다.
나쁜 소식과의 차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기쁜소식이란 없습니다.

즉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복이, 복음이 전해지는 법이 없는 겁니다.


반드시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 어둠을 통해서 빛이 등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어두움을 거치지 않고, 마귀를 거치지 않고, 나쁜소식을 거치지 않고서

빛이 증거되면


여기에 인간이 그 빛을 자신이 영접했다고 그 행동 행위를 자꾸 정당화 입법화 한다는 겁니다.
육의 자랑입니다.

물에 빠진 놈 건져 보세요. 자기가 뭔가 의미가 있으니 건짐받았구나 라고 착각해서
나중에 도리어 보따리 내 놔라 할께 뻔한 겁니다.


칸트가 인간은 행동에 나서는 순간 곧바로 입법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곧 입법자가 된다는 것은 곧 법이라는 외설성에 빠져서

동시적으로 그 법을 어기는 범법자가 된다는 겁니다.
나 법 지켰다 라고 외치는 순간 나 법 어겼다 가 되는 겁니다. 미끄러져 지는 거죠.


괜히 행위를 했던 겁니다. 그 행함이, 그 노동이 [법]이 될 줄이야?


그래서 지젝은 자살방지기술로 부메랑 기술을 언급합니다.
법을 지키는 순간 법 어기게 되니까 말입니다.
하라 하지말라를 지키는 순간 어기는 겁니다.

그래서 자살방지기술은 부메랑을 잘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잘 피하는 기술을 말하는 겁니다.
무시험합격과 같은 원인 없는 결과와 같은 겁니다.


잘 피하기만 하면 저절로 잘 받도록 하는 겁니다.
법을 지켰으니 잘 피한게 아니라 잘 받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아무도 잘 받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잘 피할 재간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해야 안식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보게 되지
안식일을 지켜 버리면 자살방지기술이 아니라
그 자살로 내몰아 버리는 율법에 의해
제대로 걸려 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애초부터 못 지키기에 [누구] 라는 인물을 쳐다보라고 준 몽학선생인 겁니다.

몇번 용서할까요? 에라이 꿀밤 한대 !! 용서 누구로 부터 받을까요? 라고 도리어 용서받아라
490번이나요? 에라이 또 꿀밤 한대 !! 또 셈을 하느냐? 무한대로 용서 받아라

바로 율법은 그 누구 라는 인물로 안내하는 가이드 화살표입니다. 이 분입니다. 라고

율법이 [율법을 다 완성한 분이 이 분 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기능이요

그 외의 인물은 모조리 배제시키는 겁니다. 죄 아래 가두어. 자살이든. 저주든. 다 죽도록 하는 역할인 겁니다. 

올무죠.



안식일을 범해야 안식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보게 된다고 하니까

일부러 범할려고 하는데 그것도 지키는 행위겠죠.
안식일 자체가 지킬수 없도록 주어진 겁니다. 왜? 가이드 몽학선생이니까!

괜히 지키겠다고 나서는 놈만 올무(율법)에 걸려든 거죠.


그래서 부메랑을 받는게 아닌 잘 피하도록
대신 그 저주를 받으신 분이 누구인가를 쳐다보도록 한다는 겁니다.

피하는 기술입니다.
바로 못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받으면 죽어요 죽어!!
피하라고 화살표(율법)를 쐇는데 지켜서 받아버리면 화살에 맞아 죽지 살겠습니까?
피할 기술도 없기는 마찬가지이구요.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가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반대로 복음은 마귀만을 상대로 한다는 겁니다.

그 율법 외에 한 의가, 그 한 의만이 마귀만을 상대하니까 말입니다.


즉 복음은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겁니다.

이런 일방적인 편파성은

지독한 편파적 미움을 통해서 지독한 편애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은 마귀만 상대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이 끼어들 구석이 없습니다.모든 인간이 마귀인데요 뭘!!


오늘 본문에 이 복음이 12제자라는 사도들을 하나의 장기알로써 배치물로 투입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 12제자들이 앞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상대할 때
정작 귀신들린 자는 고치시지만


귀신들리지 않았다고 오히려 귀신들린 청년들을 피해다니던 정상인이라고 우기는 자들에게

쫏겨나는 예수님을 본으로써 보여줬듯이


12제자들도 바로 이런 숨어있는 마귀의 정체를 보여주시는데 동원이 됩니다.


그러니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기뻐할 것이 아니지요?

왜? 그 마귀가 남이 아닌 자기자신이요

내가 진작 예수님으로부터 쫏겨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동행해 주시니(내가 동행한게 아니라)

주님의 경고처럼 귀신이 쫏겨남을 기뻐할게 아니라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주님은 마귀만을 의식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자들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예 처음부터 없습니다.

마귀가 듣기 좋은 소리 즉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치니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지나이다.라고 예수님이 기뻐하실줄 알았데 기뻐하시기는커녕

히려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십니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썩 물렀거라

왜일까요?
마귀만을 의식하시는 분은 예수님이기에 넌 지금 마귀가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는 겁니다.

아니 마귀를 물리쳤다니깐요?
제가 제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으로 말입니다. 물리쳤다니깐요.

제가 언제 마귀가 가장 듣기 좋아라 하는 소리를 했습니까?

그러면 제가 마귀가 가장 듣기 좋으라고 마귀를 쫏아낸 겁니까? 말이 안되잖아요?
분명히 마귀가 떨어졌는데.



(마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귀를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마귀만을 의식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는 결국 모르는 겁니다.

마귀도 모른데 우찌 예수님을 알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마귀를 알 재간도 없으니 말입니다.

죄를 자꾸 인간이 짖냐 안짖냐로 의식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죄 아래 갇힌 겁니다.
그런 인간이 마귀를 물리친다? 자기 눈에 마귀가 막 떨어지니까 마귀를 물리칠줄 알게 된 것이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게 이미 마귀에게 넘어간 겁니다.

마귀는 인간의 손에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마귀가 인간을 다룹니다.

방금 누구이름도 아닌 바로 예수 이름으로 외치니까 마귀가 하늘에서 우수수 막 떨어지는 것을 분명히 목격한 그 눈을 믿도록 하는 것
바로 원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났으니 이것 보다 더 명료하고 뚜렷한 것이 없다고 믿는 것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 보다 더 흐릿하고 미완료적이며 모호하고 의문적인 것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명료하고 또렷한 것을 제시해 주시면서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너의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정반대가 되는 겁니다.

네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라는 말 보다 더 모호한 소리가 어디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붕 떠는 소리죠.

오히려 명료한 것은 전에는 택도 없는 일이 지금에는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진 겁니다.

기적입니다. 기적이 눈 앞에서 펼쳐진 겁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기적을 좋아라 합니까?

마귀를 이길수도 없었고 마귀의 존재를 알수가 없었는데

자기 눈 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외치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하니 막 떨어지는 것 보고

이것 보다 더 현실적인게 어디있냐 말이지요.
얼마나 명료하고 또렷합니까?


그야말로 뿅 가죠 뿅가


그런데 주님은 모호하다는 겁니다. 과연 그것이 언제까지 가느냐 말이지요?
3초인데?



자 그래서 라캉의 L 도식처럼

마귀만을 상대로한 함정파기의 복음이 전파되는 겁니다.

마치 형사가 함정수사 하듯이 미끼를 던지는 겁니다.


도둑맞은(잃어버린) 편지라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무능하게 있는 임금과 (솔로몬, 아하수에르 왕, 십자가 상의 예수님, 등등)

편지를 감추고 있다가 잃어버린 왕비와 (진짜 아기 엄마 기생, 에스더,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는 강도)

그 왕비의 비밀을 캐겠다고 덤벼드는 장관과 (송사한 기생, 하만, 비웃는 한 쪽 강도)


삼각형의 구조를 이루면서 사건이 진행이 됩니다.





이 세 명이 꼭지점을 이루면서 정작 꼭지점이 중요한게 아니라
삼각형의 면, 세 변으로써 배치되는 관계가 사건의 흐름을 형성하는 겁니다.
사건은 이 관계성(세 변)을 따지는 겁니다. 관계(레비스트로스)


이것이 또 다른 사건으로 전이되면서 사건의 인물이 새로운 인물로써 배치가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척 하는 임금도 주인공이 아니라 (경찰관)
중요한 것은 편지를 잃어버린 왕비가 주인공이 아니라 (장관)
또 그 왕비의 불륜성처럼 의심되는 것을 캐갰다는 장관도 주인공이 아니라 (뒤팽)


정작 주인공은 절대로 공개되지도 않는 잃어버린 도둑맞은 편지가 주인공으로써
이들 인물을 배치시키는 겁니다.
종이인 편지가(문자, 기호)가 관계적인 인물(장기알)을 배치시키는 겁니다.

유물(잉여)라는 아무것도 아닌 편지가, 닭이 베드로를 새롭게 배치시키는 바꿔치기를 하는 겁니다.
주인공은 닭인 겁니다. 편지요. 모세가 아닌 모세의 지팡이 입니다.
기드온이 제시한 에봇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말귀 못알아먹는 백성은 아 그럼 이 제사장옷 에봇을 섬기자 라고 우상숭배하는 겁니다.

이것이 다시 다른 새로운 인물로써 전이가 되면서
주인공처럼 보이는 인물로 주인공을 자꾸 자꾸 뺑뺑이를 돌려서로의 입장이 다 바뀌게 되는 겁니다.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자기가 왕인줄 알았는데자기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겠다는 왕다움을 펼칠려고 하다가

그 범인이 결국 자기인줄 알고 눈을 뽑아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코메디 소재의 웃음 공식에서는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내 칼을 받아라! 했는데 뒤에 나타난 인물이 또 그 사람을 향해서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내 칼을 받아라! 라고 또 뒤에 나타난 인물이 덤벼들어 죽입니다. 어 그런데 또 뒤에서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내 칼을 받아라! 라고 계속 꼬리의 꼬리를 물며 나타나니


졸지에 이 심각한 채널이 갑자기 전복이 되어서 웃끼디 웃낀 코메디 채널이 되는 겁니다.

결국은 한바퀴 뺑도는 원점으로 되돌아 오는 겁니다.

결국은 원수는 없고
괜히 죽은 겁니다. 죽였으니 죽은 겁니다.
괜히 죽인 겁니다.

원수는 없는채 ~~~~~~~~~~~~
뺑뺑이를 돌아서 원점으로 되돌아 온 겁니다.


얼마나 웃낍니까?


주체는 없는 겁니다. 빗금친 자아인 겁니다.

결국 없는 것을 기여이 의미로 만들어서 우상숭배하는 겁니다,. 의미화 한다는 겁니다.
[없음] 인데, 십자가 마저도 우상숭배하는 겁니다. 왜 나를 구원해 주니까?
그것을 회개 하라는 겁니다.

피해자는 결국 단 한명도 없었어요
모조리 가해자인데
나는 억울하다. 나는 피해자다. 날 구원해 달라. 내가 직접 구원에 나서겠다.
원수 갚겠다고 나섰다는 자체가
의심스럽고 수상한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너무나 미쁘신지, 얼마나 당당합니까 예수님은?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 우짤래 우짤래! 뭐 뭐 뭐 뭐가 심각한데?

그 원수가 누구냐 라고 
피가 원수를 찾고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찾고
목자가 99마리 양 냅뚜고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는 겁니다.
구원자에게 의인은 필요없고 죄인만 부르러 왔듯이
소금에게는 향기나는것은 필요 없고 비린내나는 악취나는 썩고 부패한 것을 찾는 겁니다.
빛은 어두움을 찾습니다. 흑암의 백성들, 사망에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들, 개같은 이방인을 찾습니다.
용서의 희년은 7번 용서할까요 라는 자를 찾지 않고, 490번이 아닌 무한대로 용서당해야할 자를 찾는 겁니다.
원수를 찾는 겁니다.

인간이 화내고 강퍅하고 인상 찡그리면서 원수 갚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소위 시험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미쁘심이 찾아주지 않기에 늘 시험에 빠져사는 겁니다.

의심이라는 의문과 모호함과 미완료적인 것에 빠진 겁니다.

예수님 얼마나 미쁘십니까? 난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찌롱 !!!!!

지금 당장 그 원수가 죽은 것에 기뻐 좋아라 하죠?
지금 당장 예수 이름으로 사단을 물리치니까 하늘에서 우수수수 떨어지는 것이 기뻐 좋아라 죽죠.

그런데 그것이 강퍅함이다는 겁니다.

마귀가 내 손에 죽을 리가 있겠습니까?

죄가 나의 손에 의해 안 지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애초부터 그런 것은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죄와 마귀에 농락 당한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썩 물렀거라

썃다 마우스

이 썃다 마우스에 대해서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성경 하박국에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잠잠할 지어다 라고 하니까

교회라는 사기꾼 집단들이
이 성경 하박국 구절을 설교 강대상 양쪽 옆에 그 문구를 걸어놓는 겁니다.


(합 2:20, 개역)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즉 교회에 덤비거나 까불면 다친다 라는 소리입니다.

교회가 무슨 짖을 하더라도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 라는 거죠.

소위 집단의 중요 직책에 놓여진 사람들이 다 이런 식으로 빠져 버리는 겁니다.

괜히 장로 되가 지옥가고, 괜히 목사 되는 바람에 지옥가는 거죠.



왜이래 나 이래뵈도 이대 나온 여자야 ! 마귀도 주의 이름으로 물리친 사람이야 왜 이래?

내가 괜히 장로 목사 된 줄 알아?
그러나 성경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성전에 있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께 라는 소리입니다.
이것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이거 절대로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있어라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라고 해놓고서는

정작 가장 큰 거인 골리앗과 (애굽)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소년과 싸움의 충돌을 시켜버리는 겁니다.(이스라엘)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 곧 종말의 전쟁의 특징입니다. 곧 이름 전쟁입니다.

그럼 마귀가 이스라엘을 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강퍅케 했으니까
누가? 여호와가


결국 마귀라는 애굽은 자기가 이스라엘을 뒤에서 쾅 박아 놓고서는
적반하장으로 왜 운전 똑바로 안하냐고 라고 협박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미끼를 덮썩 물어버린 애굽을
너 내 이름 모른다 캤지? 내가 제대로 알려주마 기다려봐 ~~~ 라고 톡톡히 각인시키기 위해
애굽을 아작내 버리는 겁니다.


결국 애굽 보다 더 한 깡패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렇게 건짐 받은 이스라엘이 다시 애굽을 섬기겠다고
광야에서 나 돌아갈래 라고 하는 겁니다.

사라져 버린 애굽을 왜죠?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 놔라는 식이 된 겁니다.

이게 마귀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출애굽 광야 사건은 결국 섬김에 대한 문제였던 겁니다.
없는 애굽을 섬기겠다고 하니
정작 이스라엘을 섬기는 여호와의 도착성을 싫어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보다 더 못난 이스라엘로 예수님이 오니까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결국 나 애굽으로부터 피해당했습니다.
나 그 애굽으로부터 건져주신 여호와로 부터 피해 당했습니다. 라는 소리가 

입이 쑥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정작 그렇게 외쳤던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라캉의 L 도식 곧 욕망의 변증법입니다.

마귀한테 핑계를 댄 겁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욥은 입을 가리우고 머리를 쳐 박고 재를 뿌리면서 내가 원수입니다.
남이 아닌 내가 가짜입니다 라고 비로소 외치게 된 겁니다.

마귀한테 핑계를 대는 이 육체의 밤새도록 긁고 끍어대는 그 거짓을
참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자
이것도 배부른 소리였음을 보게 된 겁니다.

자 그러니 예수님이
빌라도의 만행에 의해 힘들어 죽겠다 나 좀 도와주세요 라는 소리에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라 왔거든 이라고 말해 버리면

믄 말을 못하도록, 입도 못 띠게 하니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라고 새롭게 물어봐야할 판국이 되는 겁니다.

즉 빌라도 손에 죽어나가는 현실보다
그것은 심각한 수준에 들지 못한다는 겁니다.


더 심각한 것은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라는 이 심각성에 부딧힌 겁니다.

온 천하는 잠잠할 지어다 라고 말하는 당신 도대체 누구요?

내가 다 알아서 할께!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할께 라고 외치는 당신 도대체 누구야?
누군데 이 심각성을 한 낯 웃음꺼리로 만들어 버리고
진짜 아무것도 아닌 무능한 빈터인 당신이
졸지에 보통 심각한게 아닌 너무 너무 심각한 심각성으로 물을 수밖에 없는
당신 도대체 뭐야?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난 봤뿠네 졸지에 봤뿟네 난 죽어 마땅하구나


케 보이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게 뭔데?

왜 날 죽이려 하지? 라고 되 묻게 되는 겁니다.



마귀가 심각한게 아닙니다.

마귀는 하나도 심각한게 아니게 됩니다.

마귀가 이 소리 들으면 얼마나 섭섭해 할까요?
진짜 심각한 것은 예수님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라는 물음에 꽝 하고 부딧히게 되었다는 겁니다.

말세에 마귀가 심각하다고 마귀 쫏아내는 기적과 병고치는 기적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 것과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쫏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이 모든 능력을 행사했다고

나서는 인물들이 한 둘이가 아닐 정도로 등장하게 됩니다.

마귀 이겨서 뭐하게요? 그 얼마나 모호한 짖이며, 의문의 짖입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입니다.
이런 나의 원수됨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신 그 피가 얼마나 시시했으면
마귀 이겼다고 그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것을 내세운다는 자체가 우상(약속없음)에 빠진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빠진 겁니다.


얼마나 마귀가 심각했으면 그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그 문제를 해결한 냥

저렇게 외치고 있습니까?

마귀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마귀 자신이 이렇게 심각한 중요인물이라는 것을 저들이 보여주고 있으니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무슨 심각한 거냐 라고 합니다.

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판국에 그거 백날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냐 라는 겁니다.


진짜 심각한 것은 저런 것들로 인해서 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는 겁니다.


생명책이 아니라 행함책에만 기록될 것만 잔뜩 모으고 있다는 겁니다.
모호한 의문의 것들을 기록할려고 말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될 것은
바로 그 따위로 예수님의 이름을 역시나 애굽왕 바로왕처럼 무시하는 그 강퍅함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주의 이름을 무시하는 나의 이름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간다고 하시는
그 명료하고 또렷한 것만 생명책에 기록하시는 겁니다.


(눅 9:5,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물에 빠진 사람 건질려고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구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먼지 털기 위함이 복음의 목적입니다.

나 분명히 말했다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라는 증거를 또렷이 남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의 구원이 목적이고

물에 빠진 사람 건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마귀가 매우 매우 좋아라 합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짖이 마귀를 쫏아내는 짖입니다. 말 되나요?

귀신들린 청년에게서 귀신을 쫏아내니까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예수님은 정산인이라고 우기는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쫏아내는
이것이 복음의 목적입니다.

마귀를 쫏아내는게 아니라
마귀로부터 쫏겨나는 것이 목적입니다.

빌라도 손에서 건짐 받는게 복음의 목적이 아니라
빌라도 손에 죽으러 온 것이 복음의 목적인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마귀 세계가 발칵 뒤짚어 지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 아니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나?
선지자가 또 살아났냐? 다 죽였는데!1 어 ! 분명히 죽였는데?

(눅 9:7, 개역)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눅 9:8, 개역)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눅 9:9, 개역)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마귀만을 의식하는 예수님만이 마귀의 세계를 건드릴수가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사단을 물리치니까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집니다. 라는 소리에
마귀는 전혀 벌벌 떨지 않습니다.

왜 마귀가 던지는 미끼를 덮썩 무느냐 말이지요.


이런 마귀의 응시로부터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마귀를 다룰수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말려든 겁니다.
그런 모호한 것들을, 의문의 것들을, 흐릿하고 의심이 되는 것들은 믿을 구석이 못됩니다.


생명책에 기록 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분명 쫏아내었는데 일곱 귀신이 들어봐 보세요

괜히 쫏아냈어 괜히 쫏아냈어 라고 후회 할 겁니까?

(마 12:37, 개역)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8, 개역)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2:3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40, 개역)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1, 개역)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마 12:42, 개역)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43, 개역)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마 12:44, 개역)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마 12:45, 개역)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귀신들린 청년 보다정상인이라고 우기는 일곱귀신들이 들어간 거라사 땅 사람들이예수님을 쫏아내는 겁니다.


(눅 8:35, 개역)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눅 8:36, 개역)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눅 8:37, 개역)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이것이 복음을 목적입니다.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쫏겨나는 것이 목적인 복음

쫏겨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심판을 퍼트리는 겁니다. 나 먼지 분명히 털었다 라고 말입니다.

교회에서 쫏겨나는 것 즉 심판이라는 단절성이 복음의 목적이듯이
교회에서 구원을 베푸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한 참된 교회의 목적은 바로 이 심판성이라는 종말성입니다.


온 천하는 잠잠할 지어다 왜? 여호와가 성전에 계시니까 말입니다.
먼지 털어 증거 잡는 겁니다. 함정수사 입니다.
단절성이기 때문입니다.

싸가지 없는 마리아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곧 심판성이라는 단절성입니다.
종말성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고
말씀은 살아 움직여서 꿈뜰 꿈뜰 거리면서 활동하십니다.
이 땅 전체를 쥐락 펴락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 요물 ~~~~~ 처럼


땅 전체를 수시고 돌아다닙니다.


이 땅 보고 어서 니가 맡은 일을 어서 해야지 라고
교회도 수시고,
절간도 수시고,
국가도 수시고,
민족도 수시고,
하나님도 수시고,
예수님도 수시고,
이스라엘도 수시고,
부처도 수시고,
귀신도 수시고,
마귀도 수시고,
인간도 수시고,
알라신도 수시고,
십자가도 수시고,
모세도 수시고,
아브라함도 수시고,
다윗도 수시고,

성역 없이 안 건드리는 것이 없이 다 수시고 다닙니다.

잠시만요! 사도 바울 오빠 검문검색하고 가실께요!!

제자? 사도? 들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과연 생명책에 기록 된게 맞기는 맞는 건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자 먼지 털기 위한 복음증거! 함정수사를 펼치는 복음!

뭐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오로지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직행하는 하나님나라 복음!


뭐그리 당당하고 뻔뻔한지!!
원인 없이 결과는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확정 되었다고

냅따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달음박질 하는 복음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딴소리 하기 없기다 ~~~~~~~~~~






















비어있는 보좌와 [진리는 공백이다]. (눅 8:40-56)

2013/10/01 20:15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비어있는 보좌와 [진리는 공백이다]. (눅 8:40-56)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눅 8:40, 개역)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눅 8:41, 개역)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눅 8:42, 개역)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눅 8:43, 개역)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눅 8:44, 개역)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눅 8:4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눅 8: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눅 8:47, 개역)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눅 8:4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눅 8:49, 개역)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눅 8:50,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눅 8:51, 개역)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눅 8:52, 개역)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눅 8:53, 개역)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눅 8:54, 개역)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눅 8:55, 개역)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눅 8:56, 개역)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마귀가 들린 청년이 소리칩니다.

왜 아직 시간도 안되었는데 왜 벌써 왔느냐?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우리를 괴롭히느냐?

라고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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