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선물로써의 죽음과 삼 일 (눅 9:12-22)


열 두 바구니와 삼 일 만에 살아남



(눅 9:12, 개역)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눅 9:1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눅 9:14, 개역)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눅 9:15, 개역)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눅 9:16, 개역)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눅 9:17, 개역)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눅 9:18, 개역)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눅 9:1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눅 9:20,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눅 9:21, 개역)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눅 9:22, 개역)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잉여세계 곧 은혜의 선물을 베풀실때에는 반드시
그 반대의 세계의 단절성을 거쳐서 누리게 하십니다.

그 반대의 세계는 바로 은혜의 반대인 행함의 세계 곧 선악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력으로 그 선악의 세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또 아무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수 있도록 건져주는 이도 없습니다.
손을 내밀기는커녕 도리어 그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가도록 떠밀어 밀쳐 버리고 있습니다.
생존 세계이니 어쩔수 없는 겁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율법 마저도 확인사살을 하듯이 도저히 빠져나올수 없도록 죄 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자 선악에서 빠져나올수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죽음에서 빠져나올수 있겠습니까?

죽음 생각하지 말고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 곧 삶을 살자고 주장합니다만
그 삶이 사실은 남을 죽여서 그 시체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곧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겁니다. 이 법칙이 선악의 세계라는 겁니다.
행함의 세계라는 겁니다.
남이 안 죽으면 내가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뭐그리 극단적으로 생각하냐?
그럴 일이 닥치는 경우는 아주 아주 극미하다.

설사 닥치면 그때 되어봐야 하고
설사 죽더라도 자기 명이 다해서 그런 것이고, 자기 복이 그런 것이니
어쩔수 없는 것 아니냐?

어쩔수 없는 것을 뭐 그리 예민하게 생각하느냐?


그런데 삶이라는 인생을 너무 여유롭게 볼게 아니라
한번 압축파일처럼 쫙 쪼라서 축소시켜 압축해 보자 말입니다.
역사를 되돌아 보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압축파일을 다시 해제해 풀어서 다시 살펴보자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든지 늘 수시로 부딧힐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누가 길거리 골목길을 가다가 아주 아주 우연히 차에 치여 죽게 된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목격한 것 뿐인데그 영향력이 트라우마처럼 계속 작용하는 겁니다.

남의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 치여 죽은 사람이 나랑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관하지 않게 마치 관련있는냥 작용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말이죠

왜 무관치 않고 상호작용하는 겁니까?

그래서 사건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쓰나미처럼

지구 반대편 바다 속에서 떼구르르 구르는 바다화산의 돌맹이의 떨어지는 그 물 파장이
그 미묘하고 세밀한 작은 떨어짐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쓰나미로 작용해
원전도 파괴하고

모조리 싹쓸이하는
수십년동안의 상처를 계속적으로 입히게 되는 작용이 되니
지구 반대편의 바다 속의 돌맹이 하나 떨어지는 것이
무관하게 작용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나비가 곧 나비가 펄럭 거리는 그 바람이
또는 바다 속 화산 폭발로 떼굴 떼굴 굴러 떨어지는 그 돌맹이들이 일으키는 물 파장이
지구 반대편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를 하나의 네트워크 무소부재로 연결하고 있는 WI-FI 와이파이 연결망을 형성하는 겁니다.
곧 심판입니다.
구약에 갑자기 태양이 멈춘 사건처럼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2000년 전의 사건으로만 끝나버리는게 아니라
지금도 벌어지고 있듯이 말입니다.

결국 모든 피조물의 움직임 하나 하나

시 공간의 모든 배치들
심지어 우주의 별까지도

모두다 바로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움직이는 하나의 네트워크 연결망으로 묶여져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마귀도 여기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의 영광에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성 즉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두를 길게
열두 바구니가 남은 것과 3일만에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가 살아남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 연관된 일이다는 겁니다.

먼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병이어로
인간의 시선에서는 이 오병이어로는 오천명을 먹일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무리 유대인이라고 해도
말로만 아브라함 자손이요 모세의 제자라고 해도
지금 광야 이스라엘의 만나사건과 똑같은 사건이 반복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가 백날 있어도
인간은 결국 별개의 문제이다는 겁니다.
따로 믿고 따로 종교의 제사나 형식과 종교교리의 공부를 통해서

따로 해야될 문제이지
그 별개의 문제가 지금과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서
아무것도 심은 것도 없이 하늘에서 먹은 양식을
지금 예수님은 재현하실려고 합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게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봤자 떡 먹는 것은 마찬가지 잖아요?

그러니 결국 별개의 문제 맞잖아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개 이게 떡이지 말씀입니까?


그래서 그런 시선을 단절 시켜야 하는 겁니다.

종말로 밀어붙여서 싹 다 삭제시켜야 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숙제를 예수님께서 하시는지 봐야할 판국입니다.

결국 신앙 아니 구약의 종말역사를 재현하는 것도
예수님의 몫이지
인간이 신앙훈련으로 그 상황을 다시 재현하겠다고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겁니다.
제자 훈련 그거 다 사기라는 겁니다.

지 좋아라 하는 것만 골라서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예 불가능한 것을 한번 재현해 보라 말이지요.


그래서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 단절성을 격게 되는 겁니다.

말도 안된다는 거죠.

철저한 단절의 단절입니다.

결핍의 결핍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의 개입이 발생해 버립니다.그리고 그 만나사건처럼 재현 합니다.

자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광야에서의 모세와

연결시킬수 있는 하나의 힌트로써 자신들에게 얼마나 유리한 입장의

기적의 환경이 주어졌냐 말이지요.


그런데 단순히 구약의 그 사건을 재현만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더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단절성의 충실함이라고 합니다.

마치 율법 보다 더 율법적으로 율법을 강화한 산상수훈처럼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에
더 깊게 더 들어가 요나의 표적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모세때에 만나를 먹은 것으로
지금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연결시킬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그 사건과 무관합니까?

그렇다고 무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참 기가막히죠. 이것은 하나 마나한 말이지요.

그런데 한번 따지고 봅시다.
유대인들이 그런 만나사건을 듣고 교육받아 오면서

정작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 사건이 다시 재현될것이라고 바란적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 쪽에서 단절보다
이미 인간 쪽에서 육의 한계성으로 이미 끊어진 단절성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뭔가 의미를 부여하면 그때는 또 갑자기 유행처럼 확 몰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만회를 하듯이 다시 그 단절성을 개방성으로 확 바꿔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어차피 이랬다 저랬다 하기에 애초부터 믿음은 없는 겁니다.


믿음되신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인간을 다루시는가를 봐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도 안되는 땅에서 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만나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땅에서 나지 않은 음식은 이 지구상에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뭔지 알 길이 없어서 그 이름이 [뭐지?] 라는 뜻에서 만나 인 겁니다.
즉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 모름이라는 단절성에
모르는데 더 모르게 하는 이중비밀의 잠금 패쓰워드로 단절성이 바로
오늘 오병이어이다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이게 도대체 뭐냐 하는 겁니다.
비밀이다는 겁니다. 출처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즉 과잉잉여입니다.

12 바구니가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

그 찌끄래기가 12 바구니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또 마태복음에서는 15장의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서

(마 16:1, 개역)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 16: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마 16:3, 개역)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 16:4, 개역)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마 16:5, 개역)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마 16: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16:7, 개역)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마 16:8,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마 16:9, 개역)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마 16:10, 개역)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마 16:11, 개역)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12, 개역)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 16:13, 개역)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개역)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 16:15, 개역)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일곱 광주리 남기면서 사천명을 먹인 사건까지 첨가하고 있습니다.
참 안식 참 양식이 누구이더냐 라는 되물음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기존의 안식과 기존의 이스라엘은 날라갈 판국엔 놓여지는 겁니다.
단절성입니다.

연결이 안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쪽에서는 그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벌어졌던 그 사건을 재반복합니다.
그래서 말도 안되게 오천명을 다 먹이고
12 바구니 식이나 까지 남아돌았지만
그저 떡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더 깊게 들어갑니다.

기적의 기적, 앞의 기적을 날려버리는 새로운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 라는 물음입니다.
무리들이 나를 누구로 보고 있으며
제자들 너희는 나를 누구로 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베드로가 그 대표성으로써 답변을 합니다.
아니 예수님이 콕 찍어서 베드로 너는 나를 누구로 보니? 라고 묻습니다.

다들 선지자다 또는 엘리야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이십니다 라고

차이나는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즉 단절적인 답변입니다.

성령께서 알려준 답변이기에
자기도 모르게 그 답변이 나온 겁니다.
딴 사람들은 유대인이라면 다 말할수 있는 그런 답을 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 만큼은 다른 답을 하도록 성령이 임하게 한 겁니다.
모르면서 그 모르는 답변을 했으니
그럼 이제는 알게 된 것일까요?
여전히 더 더 더 모릅니다.
이 얼마나 도착적입니까?
나 잡아 봐라 라고 숨바꼭질 하듯이 사랑놀이가 사건으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 답변 때문에
비로소 비로소 비밀을 하나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 고백 때문에
나는 이제 죽으러 가겠다 라는 겁니다.


(마 16:16,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개역)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20, 개역)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 16:21, 개역)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개역)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에 그 유명한 베드로가 아니됩니다 라고 가로막자
사탄아 라고 욕먹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자 12 바구니 라는 잉여
그것도 과잉잉여
풍성하게 선물로써 다가온 그 잉여의 출처는 과연 어디인가 라는 겁니다.
출처는 무엇인가? 출처는 누구인가? 뭐지 뭐지? 케 보이!!!!

한마디로 12 이스라엘의 출처인 그 처음자리가 어디냐 라는 문제입니다. 누구냐 말이지요!
예수님은 그 자리를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의 사건을 재현하시면서도
동시에 그 사건을 날려버리고 새로운 사건으로써 이중사건을 펼치시는 겁니다.
마치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된 주를 언급하시면서 그 앞의 주를 날려버리고
뒤의 주를 새로 언급하면서 주를 앞장세우는 겁니다.
주께서 주를 치시고 새로운 주로써 등장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잉여의 참된 의미입니다.

잉여란
어제 만난 예수로 오늘의 예수를 연결할수 없다 라는 겁니다.
잉여 곧 사랑이란
어제 만난 예수와 사랑하는게 아니라
오늘까지 연결해서 사랑하는게 아니라
오늘의 예수는 또 새로운 예수님으로써 새롭게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을 SNS에서 누가 어떤 문장으로 표현했는데요


똑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

즉 흐름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배치도 달라진 겁니다.
그러니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니영원히 변하는 움직이는 흐름이다는 겁니다.

어제의 예수님과 오늘의 예수님은 다릅니다.
전혀 다르게 오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의 것으로 예수님을 맞이 할 수 없습니다.

모르게 됩니다.


오늘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하는 겁니다.

사랑이란 익숙하게 길들일수 없습니다.
항상 낯설은 겁니다. 익숙함이 통하지 않습니다.

주여 저 알죠 저!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주의 이름으로 사탄을 물리치고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게 하신 주님 때문에 벌어진 그런 일을 벌린 저 아시지요?

나 너 모르는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썩 꺼져라!!!

어떤 철학자는 그 습관적인 익숙함이 악마적이다 라는 말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그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를 말한 한나 아렌트의 말인데요
악의 평범성이 우리의 습관적으로 당연하다는 것으로
아무런 비판과 아무런 생각없음으로 이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무조건 전복 가로지르기 판대기 엎어버리기를 무한반복으로 펼치시니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만나사건을 재현하지만 동시에 그 판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그런 취지를 모르는 자가 있기에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후에 예수님께서 도망치십니다.

그러니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잡을려고 뒤 쫏는 자가 있습니다.

또 도망치십니다.

또 따라잡습니다.

또 도망치십니다.

기여이 따라 잡아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 6:13, 개역)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요 6:14, 개역)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6, 개역)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요 6:17, 개역)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요 6:18, 개역)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요 6:22, 개역)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요 6:23, 개역)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요 6:24, 개역)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 6:25, 개역)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37, 개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왜 도망치세요


너가 나를 임금삼을려고 해서

아니 임금 삼는게 뭐가 나쁩니까?

비로소 제대로 된 구원자를 만났는데 임금 삼아도 되지 않습니까?

너는 기적을 보고 나를 임금 삼고자 함이 아니라
먹고 배불러 터져서 나를 임금 삼고자 한다.


한마디로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는 겁니다.


새로운 예수 라는 우상을 발견한 겁니다.

그 예수를 임금 삼으면 내 배는 이제 배고픔의 경제 문제는
떡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라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는 우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날려 버립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예수를 날려 버립니다.

주가 주를 날려 버립니다.

예수님을 위한 유물 곧 닭과 같은 무능한 잉여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아볼로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 잉여를 날려 버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수님 자신을 날려 버립니다.
그러니 포착 할 수가 없습니다.

어제 까지 알던 예수님을 쫌 안다고 얘기하면
남이 아닌 예수님이 도리어 그거 사기다 라고 공개적으로 망신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고발해 버립니다.

그런 고발하는 오늘의 예수님의 새로 만나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요나가 오해한 그 여호와
요나가 원했던 그 여호와로 안 만나주겠다는 겁니다.
배신 때리기입니다.

그럼 어떤 여호와요?
나를 원수 삼는 여호와로 만나겠다는 겁니다.

아니 요나를 구원했던 여호와가 다시 요나를 원수삼는 여호와로 오늘 다가온다는 겁니다.

심판을 전해야 할 요나가
도리어 니느웨의 심판이 아닌 요나 자신이 심판받아야할 원수 니느웨이다는 겁니다.

정작 진짜 니느웨는 회개해서 용서 받고 있으니

요나가 자신이 알던 여호와가 아니라

전혀 낯설은 여호와

자신이랑 전혀 맞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호와로 인해
자해소동이 벌어지는 겁니다.

자기분열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 상태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중분열입니다.
요나를 숙주로 삼은 그 가짜여호와를 오늘의 여호와가 치는 겁니다. 폭력성입니다.

그 여호와가 우상인줄 모르고
우상이 안 되어준다고 삐져서 자살할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 여호와 짤라내는 겁니다.
우상이 짤리면 요나도 같이 짤리는 겁니다.
숙주일 뿐이고 그 주인을 날려 버리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

주님이 주님을 치시니
그 광경을 보고 요나가 욥처럼 다윗처럼 입을 막고 재를 뿌리며 머리를 쳐박고
그 단절이 옳았습니다 라고 외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십자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내어주심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괜히 믿음의 조상이 된게 아닙니다.
처음으로 이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죄값을 치르는 그 엽기적인 사건을 그림자로 먼저 샘플로 보여준 겁니다.

실상이 결국 십자가였던 겁니다.

그 단절이 사랑인데
사생아에게는 없는 그 매 말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사탄아 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겁니다. 뭐? 개방? 

개방이면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성령으로 한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저들이 말하는 성령이 개방이면 이 말 하면 안되죠!!

베드로도 저런 판국인데 우리는 그 단절성의 거리두기에
천부당 만부당 당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어제 까지 알던 예수님 맞어? 왜 날 죽이려 들지?
베드로는 도저히 낯설어서 감당이 불감당입니다.


베드로는 졸지에 낯설어서 도저히 다가갈수가 없습니다.

성령 때문에 비로소 남들과 차이나는 답변을 했는데
그것이 가까이 더 근접하게 된 것이 아니라

더더욱 알수 없는

도통 모르겠는

예수님 도대체 누구세요 라고

더더욱 알수가 없는 겁니다.

만약 남녀가 결혼해서 상대방을 알아가는 그 모습을 통해서 결혼이 더욱더 돈독하게 되는데
매일 매일 낯설게 되면 이것은 결혼이 아니라 그 간격이 벌어지는 겁니다.

바로 이런 육의 소욕에서는 이것이 결혼인데, 영의 소욕에서는 이것이 이혼인 겁니다.

떨어뜨려야 애닮게 하는 겁니다. 거의 도착적이지요.

육의 소욕에서의 이혼이, 영의 소욕에서는 결혼인 겁니다.

전남편 율법과의 이혼이, 새 남편과의 결혼이다는 겁니다.

기적과의 이혼이, 요나의 표적과의 결혼인 겁니다.
곧 십자가와의 결혼입니다. 율법과의 이혼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라고

베드로를 훨씬 떨어뜨려 버리는 겁니다.
도저히 근접 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인간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인 겁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낯설까요?
그 간격과 멀어짐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가까이 다가가고 좁혀가는게 사랑이 아니라 (동일성, 일치성)
그 간격을 제대로 실감해서 낯설음에 뼈저리게 실감하는 것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쩝니까?

인간 쪽에서는 이제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흐름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을 하는게 아니라

사랑이 나에게 다가와야 하는 겁니다.

사랑이 날 불러주고
사랑이 나에게 물음이 되고
사랑이 나에게 사귐으로써 다가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피 타기 입니다. 십자가 타기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단절을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이 단절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역겨운 제물 타는 냄새가
하나님에게서는 죄가 타는 향기로운 향기 입니다.

그 역겨운 십자가의 피 비린내 냄새가
그리스도의 향기나는 향기로운 최고급 향수 입니다.

그 간격이 바로 3일 이라는 죽음이라는 간격입니다.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처음자리를 마련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출처 곧 모태를 새롭게 형성하는 겁니다. 처소 입니다.

자 그럼 12 바구니 라는 잉여 곧 선물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로써

그 출처가 바로 3일 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간격이 바로 이스라엘의 출처이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죽은 태죠
죽은 태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절대로 안됩니다 라고 가로막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태이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죽은태인 수태치 못한 여자가 많은 자식으로 기쁨이 되고
도리어 많은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을 다 잃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성 즉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성령의 안목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엽기적입니까? 낯설죠.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수태치 못한 태와 먹이지 못한 젖이 저주가 아니라 복으로 바뀌는 것이 바로 종말의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곧 처음자리요 이스라엘의 출처요
바로 이 자리를 만들려고 예수님을 죽으시러 간다는 겁니다.

그 자리가 삼일이라는 간격입니다.


그 틈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이 처소를 예비하시고자 

불임태로 저주태로 수태치 못한 태가 되고자 죽으시러 오신 겁니다.
죽은태가 될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종말에서는 그 죽은태 곧 십자가라는 자리가
그 삼일이라는 자리가 바로 이스라엘의 자리요
12 바구니 의 출처이다는 겁니다.


죽은 태에서 어떻게 생명이 태어나냐 말입니다.
낯설음이라는 단절성이 믿음으로써 그 십자가에서 독생자 아들을 내어준 것도 말이 안되는데
또 거기에다가 죽은태가 되어서 그 속에서 생명이 태어나다니?

이 두 간격을 무슨 수로 좁힐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도 이 태에서 다시 태어나기 까지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아볼로도 새로 성령 받아야 하는 이유 입니다.

참생명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없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떡은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상관이 없다고 하니까
그렇게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보고 따라왔던 자들이
비로소 다 떠나갑니다.

한 술 더 떠
제자들에게도 너희들도 가지 왜?
왜 남았느냐?

내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에

비로소 드디어 등 돌리고 돌아가 버리도록 유도하십니다.
얼마나 낯설음 입니까?


이런 예수님을 내가 쫌 알지?
소크라테스는 말 합니다. 인간은 쥐뿔도 아는게 전혀 없다고
그래서 등에 즉 수셔대고 다니는 겁니다. 깨어라 라고!

인간이 예수님께 다가갈때는 절대로 낯설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사랑은 다 거짓입니다.
쵸코파이 정이면 다 통하는 소통이 되는 세상입니다. 악마의 세상이지요.

기적 한 방이면 다 통할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네트워크 와이파이 연결망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도 거짓이요 행함도 거짓이며
다 거짓입니다. 즉 악의 평범함이요 진부함입니다.


낯설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통하고 싶어서 그런 짖을 하는 겁니다.

그런 소통(개방)이 그럼 과연 예수님에게 통하냐 말이지요?
성령을 무시해도 개무시 한 겁니다.

성령은 융통성이 없습니다. 오로지 피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소욕이 아닌,
육의 소욕은 다 소통이 되는 것을 가지고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낯설음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다가갈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다 떨어져 나갑니다.


십자가는 다 떨어뜨리는 겁니다.

기적을 봤으니 비로소 낯설지 않고 다가갈수 있는 빌미를 주님께서 제공해 주셔서 다가갔는데

내 살과 피를 먹으라 라는 소리에

졸지에 낯설어서 다시는 따라다닐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만나를 먹은 자는 썩어 죽었어도
내가 곧 생명의 떡으로써 나를 먹고 나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오죽 잉여적인 말씀이면 다들 비웃습니다.
너무 너무 무능하기 짝이 없는
누구든지 무시해 버릴 수 밖에 없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시니 말입니다.

잉여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없음입니다.
기적 한 방이면 다 통하는데
잉여는 통하기는 커녕 도리어 실족케 되는 겁니다.
다 떨어져 나갑니다. 왜 너가 가지!! 왜 남았느냐?
등 돌리고 다 되돌아 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요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37, 개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8, 개역)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개역)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개역)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1, 개역)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2, 개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맞습니다. 무시하라고 비웃으라고 한 소리입니다.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없음] 이기 떄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입니다.

자! 이 3일이라는 간격이 우리의 처음자리요 출처입니다.

죽은태요
십자가라는 저주의 태입니다.

그런데 이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거리감을 주는 이 낯설은 태가

종말에서는 진짜 심판이라는 단절 속에서는 생명의 자리일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자리 처소를 마련하시고자
우리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유일한 생명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일로만 보고 있지
하나님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풍성한 선물로써 주어진 열 두 바구니 라는 잉여
곧 이스라엘 자리의 출처가 어디에서 나왔는줄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 입니다.

쓴 나물이요 쓴 고난의 잔입니다.

바로 이 땅에 없는 태
이 땅에 없는 생명의 떡은

우리에게 무시당하고 고난받고 버린바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삼 일 만에 다시 사신
그 자리,
그 간격의 자리에서 나온 겁니다.

12 바구니가 말입니다.

남이 아닌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불에 태워 죽일려고 했던 그 자리
그 세 가지 물증인 도장 도색끈 지팡이를 내 세우면서 다가오는 그 낯설음에서 나온 겁니다.


나를 원수 삼는 피 인 겁니다.

그 자리를 이스라엘은 처음자리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겁니다.

나 이런 원수였는데

이런 나도 예수님의 자신의 살과 피로 먹여 살리신다.

나 내 며느리 이렇게 불태워 죽일려고 했는데

그 불 속에서 나를 도리어 건져낸 내 며느리가 나의 참 사랑하는 아내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가 옳았다는 겁니다.

이 내용으로 요셉의 심판을 패쓰하는 겁니다.
다른 내용으로는 요셉의 얼굴을 볼 방법이 없습니다.

나 죄수복 입고서 피로 특별사면이라고 그 피 묻은 죄수복을 입고서
피를 자랑하는 겁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 단절의 심판성을 패쓰 할수 없습니다.

얼마나 그 피가 풍성하면 그럴까요?

피가 불러줘서
비로소 피가 태워주니
피 타기를 하는 겁니다.

자신이 직접 피를 탈려고 애쓴다면
피에 얻어터져서 자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남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는

비웃음거리요 백번만번 무시당해도 싼
뻔한 웃음꺼리를 너무 너무 뻔뻔하고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매 맞는게 아버지가 있다는 소리이니까?


그러나 저들에게는 그 매라는 진짜 낯설음이 없는 겁니다.

아버지가 없으니 간섭받고 있고 

지적 받고 있고

무시 받고 있는 것이

도리어 저들에게 비유로 비밀로 작동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무시해도 마땅한 무시받는 그 잉여에 걸려들어서
자살로 마무리 하는 겁니다.

자살 방지 기술을 예수님이 처소로써 마련 한것을 무시해서 입니다.

도저히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잉여를 무시했으니까 말입니다.
잉여(무능한 무시꺼리)

무시꺼리를 무시했으니까 말입니다. 걸려든 겁니다.

십자가를 무시해서, 에수님의 살과 피를 무시해서
다 되돌아가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올무 보다 더 심각하고 더 충실하고 더 충만한
이중 올무로써의 복음
실족케 하는 십자가의 복음
3일이라는 간격 강화인 함정으로써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눅 9:22, 개역)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 9:23, 개역)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4,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5,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눅 9:26, 개역)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27,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함정파기 복음 (눅 9: 1-11)

2013/10/15 11:56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함정파기 복음



(눅 9:1,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눅 9:2, 개역)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눅 9:3, 개역)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눅 9:4, 개역)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눅 9:5,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눅 9:6, 개역)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눅 9:7, 개역)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눅 9:8, 개역)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눅 9:9, 개역)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눅 9:10, 개역)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눅 9:11, 개역)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복음 증거는 교세확장이나? 

한 사람이라도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전하는 소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이란 오히려 숨겨진 상태인 나쁜 소식을 더욱더 또렷하게 들추어내는 겁니다.

나쁜 소식과의 차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기쁜소식이란 없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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