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로써의 죽음(별세) (눅 9:28-36)


(눅 9:28, 개역)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개역)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개역)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개역)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9:32, 개역)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개역)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4, 개역)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개역)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살아있다는 것은 전혀 비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데 뭘 감추일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역사에서의 항상 주인공인 인간은

늘 살아있을때의 공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거기에서 지혜를 찾고
문제해결을 찾고

에너지 원, 뭔가 유익이 될만한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에서 찾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살아있을때의 공적입니다.


죽음 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 죽음을 헤메고 검색하고 그 죽음 속에서 정보를 캐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없는 [없음]인 겁니다.


죽음이 없는

없어져 버리는 것인데

없어져 버리는 것에서 있음을 찾을려고 하니

말이 안되는 거죠.


죽음의 비밀을 풀려고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없듯이 말입니다.

철저한 빈터입니다. 백지상태입니다. 삭제요 단절입니다. 누락입니다.


죽음 속에서 나 황금보물을 찾았다 라고 외치면

너 미친놈이구나 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또 그것은 전혀 살아있는 자들에게 유익이 되질 않습니다.

물론 살아있다는 전제도 순 엉터리이겠지만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 있는 상태임을 십자가가 밝혔기에 살아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여튼 죽음 속에서 에너지 원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어리석음 속에서 지혜를 찾겠다는 것과 같고

미련함 속에서 슬기로움을 찾겠다는 것과 같고

허무함 속에서 신실함을 찾겠다는 것과 같고

죽음 속에서 참생명을 찾겠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즉 말도 안된다는 거죠.

사실 언어도 알고보면 남성적인 언어라서

남성 속에서 여자를 찾겠다는 것과 같은 거죠.


누가 할례한 자인가? 마음판의 할례한 자인가?.

남자 속에서 임신하는 자를 찾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설사 찾으면 그거 어떻게 할까요?

당장 죽을려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단이요 이질적인 존재인데? 돌연변이인데? 
당장 거리두기를 해야겠지요.


즉 비밀이 되는 것은, 감추어진 것은

허용 못하겠다는 겁니다.

움푹파이고 홈페이는 것들과 
짤리고 배여지고 
매끈하게 미끄러지는 것은
저주의 지역이요 부정스럽기 짝이 없는
금지구역이 되는 겁니다.

돌출이 되어서 드러내겠다는 것이

인간 세계에서의 법칙입니다.
선악적인 법입니다.
돌출이 된 하나님과 같이 된 우상적인 개념입니다.


즉 그 어떤 이유라도 비밀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인간세상 곧 마귀세상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복음은 더욱더 감추고 있는 비밀로써의 복음입니다.


감추고

숨어있고

속이고

피해버리고
은폐된


이런 부정적인 의미가

비밀이라는 이유로써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패쓰워드 걸린

아무나

어떤 누구에게도 공개하지도 않는

누구든지 접할 수 없는

감추어진 비밀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비유는 분명 공개된 의미로써

또 그 당시 가장 잘 아는 속담 덕담 지혜의 이야기를 가지고서

변형시켜서 도저히 알수 없는

분명 다 아는 이야기인데

졸지에 패쓰워드 걸려버리니까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는 수수께끼로 만들어버리는 비밀언어가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의 특징입니다.


전혀 수수께끼가 아닌 이야기가 졸지에 수수께끼로 변형이 되니

아무도 풀이할 수 있는 자가 없게 되는 단절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 단절성이 개방적인 구원개념을 깨뜨리면서

철저하게 비밀화 시키는 겁니다.

개방인데 졸지에 단절이 되어버렸으니

더욱더 비밀이 되기에

진짜 아무도 도통 믄 소리인지 알 길이 없게 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지난시간까지

예수님은 인간의 눈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기적

곧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구원자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따라다닙니다.

즉 개방을 예수님 쪽에서 유도했고

그 개방으로 그 공개됨으로 인해

예수님을 구원자로 눈치채고

예수님을 따라 다닐수 있도록

예수님의 의도에 맞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브레이크를 걸어버립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아무나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따르고 있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갑자기 물 위를 잘 걷고 있는 베드로를 물에 확 빠뜨려 버리니까

그 동안 베드로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정보수집자료가 다 날라가 버려서

삭제 당해 버리고, 물에 빠져서 정보가 다 망쳐져 버리게 되어버리니,

그 동안 알고 있던 예수님이 아니였던 겁니다.

도통 알수가 없어서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 누구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요?


케보이!


곧 나에게 도대체 뭘 원하는 거요?


라고 단절의 예수님

빼앗는 예수님

나의 목숨을 위협하는 예수님

그래놓고 건져주니 도대체 뭘 원하는건지 알수가 없는?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알면 알수록 더더욱 모르겠는

비밀이라는

접근 불가 라는 단절성을 더욱더 크게 느끼게 되는 겁니다.


해석불가인 비밀입니다.


자 그렇다면 저나 오늘날 목사들이나

성경말씀을 보는 이들이나 듣는 이들은

이 해석불가인 비밀성을 풀려고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단절성인 해석불가성을 더욱더 불가성으로 단절성으로 증거해야 겠습니까?



니체는 남자들의 우둔함? 아 미숙함이라고 표현했네요 미숙함을

진리를 소유할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진리는 여자로써 여자를 소유하고파 하듯이
진리를 소유할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유 될 수 있는 진리라면 그게 진리입니까?

풀이가 되면 그것이 수수께끼이겠습니까?

해석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이 비밀이겠습니까?
비밀은 비밀로써 더욱더 단절감 거리감을 두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그 거리감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펼쳐야 할 단절성, 비밀성, 해석불가를

오히려 유대인들은 그것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선택성을 더욱더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즉 소유했다는 거죠.

그러니 예수님은 손할례가 아니라 마음판의 할례개념으로써 십자가를 언급하니까

더욱더 그들에게 걸림돌인 거리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참 신기하지요?


부딧히는 돌이 부딧힌 겁니다.

제대로 깨어져 박살이 나아했던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예수님의 처형에 가장 앞장섰던 사도바울이


그 부딧히는 돌 속에서 태어난 겁니다.

그러니 그가 외치는 복음은 그야말로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너도 나처럼 박살나렴 라고
막장드라마로 막 돌진해 들어오는 불도져(십자가)를 밀어 붙이는 겁니다.


그 근거

그 이유

그 원인이 오늘 본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사도행전이 특히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이 이방지역에서 거주한 곳에 의도적으로 가장 먼저 수셔대는

충돌성을 펼칩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지혜가 가장 활발한 곳에 가면 소동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주변인들이 이 죽음의 구멍을 메꾸어 넣을려고 달려들도록 되어 있고

또 바울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특히 유대인들의 선민 선택성 구원성을
구멍을 뻥뻥 뚫어버리는데 적극적입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왜 복음 쪽에서 먼저 이런 이해할수 없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일까요?

비밀 때문에 그런 겁니다.

비밀을 더욱더 비밀 답게 하기 위해

도통 알수 없는 일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바로 소유성 때문입니다.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원수성 때문입니다.

이 소유성이 바로 우상과 연관되어 있고
우상이라는 허상은 결국 참된 형상이 자신의 영광성을 펼치기 위해 깔아놓은
카페트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처럼

자신의 죽음을 그 카페트 위에 깔고자 별세에 대해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변론하시는 겁니다.


간따나 죽음이 싫어서 선택설 구원설로써 중무장해

온 몸에 칭칭감아서 그 저주와의 거리감을 형성했고

그런 더러운 세리같은 인간들과의 거리두리를 추구했는데


그 죽음에 더더욱 중첩적인 죽음의 죽음으로서

종말의 종말로써

단절의 단절로써

부정의 부정으로써

겹겹이 단절의 거리두기를 형성하는 것은

인간들(대표성인 유대인)의 단절성 거리두기 선택설 구원설을 다 깨드리기 위한 겁니다.

진짜배기가 아니다는 거죠.


이런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복음은

선민인 유대인들 마저도, 유대인 이데올로기 조차도 통하지 않는 단절의 복음인 겁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의 영웅인 모세 엘리야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접목시키는 겁니다.

왜 살아 있을 적의 세례요한이나
아니면 조금 뒤의 미래의 사도바울이나

이런 사람을 변화산에 끌어들이지 않고


왜 이미 죽은 모세와 이 땅에 없는 엘리야를 변화산에 불러들이는 겁니까?


단순히 율법의 대표자? 선지자 대표자? 왕으로써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까?


중요한 것은 죽은 모세든

승천한 엘리야든

율법의 대표자로써든

선지자의 대표자이든


예수님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 의미 없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벌어졌어야 했던 사건이였듯이(선취)

이제야 비로소 그 그림자의 실상이 믿음으로써 펼쳐지는 겁니다.


믿음이란 소위 불신의 반대말로서 종교적인 신념이나

믿음이 없었는데 믿음이 생겨서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 신뢰하게 되었다 라는

마음의 상태나 신뢰감 등의 불신에서 믿는 상태로 옮겨졌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뭐가 됩니까? 그것의 달인인데

끝까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예수님의 유혹을 이긴자들인데? 얼마나 믿음이 좋냐 말입니다.


그런게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란 구체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행동 하니까 자꾸 내 쪽에서의 변한 행동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써 나는 그를 죽이고자 했고 죽였고 그것을 정당화 하는데

대중성으로써 성공을 했고 아무도 의의를 달지를 않는데

나에게 죽임을 당한 그 분이 나를 용서함으로써 그 정당성의 더 나은 정당성으로써

자신의 불의한 십자가를 높여 버렸다는 겁니다.


불의한 나의 구체적인 행위에 그 위에 또 다른 더 나은 불의함의 행위가 믿음이라는 겁니다.

곧 사랑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상의 두 강도의 삶은 인간의 두 부류를 축약적으로 보여줍니다.

가인과 아벨도 동일하고

에서와 야곱도 동일합니다.


인간은 딱 이 두 부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땡기는 자인가?

아니면 지옥이 땡기는 자인가?


성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의로운 자가 지옥에서 땡기는 자요

세리라는 말씀에게 불쌍히 여겨달라는 불의한 자가  예수님 나라에서 땡기는 자라고


인간은 이 두 인생 뿐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인생이 중요한게 아니라

지옥과 천국이 자신들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들의 지옥 천국 자신들의 소유성으로써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세리가 자신의 행위를 드러낼 이유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행함은 바리새인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죠.


예수님의 죽음과 결부된 자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맏아들이냐? 아니면 탕자냐


탕자라는 망나니처럼 살면 구원 되는 겁니까?

한쪽 강도가 비웃잖아요?


그 어떤 조건도 갖출수 가 없기에 세리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이고

바리새인은 그야말로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조건을 갖추었기에 당당한 겁니다.


그런데 천국이

즉 예수님이 천국백성인 자신의 자녀를 애굽 속에 감추이었듯디

이스라엘 속에 감추이었듯이

남은자 속에 감추이었듯이

세리라는 매국노 속에, 그 불의함 속에 감추이였던 겁니다.


끊임없이 분절 분절 분절

마치 단백질 접힘 현상처럼

접힘이 되어서 변형이 변이가 되는 겁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풀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라는 저주 속에 감추인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선택론 구원론 특히 유대인의 선민사상

모조리 다 깨어지는 겁니다.

깨어질 뿐이겠습니까? 그것이 우상의 실상임을 제대로 보여주게 된 겁니다.


그럼 우상 아닌 것이 뭔데 라고 따지게 되니


그 우상이 아닌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가 비밀이였던 겁니다.


아무도 십자가가 비밀인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이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데 정신팔렸지

자신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들을 사수하기 위해
그것을 무너뜨리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정신없지
그 십자가가 옳았구나를 우찌 알겠습니까?

지금 자신이 분명 살아있다고 우길 수밖에 없는

난 절대로 죽은 자가 아닙니다 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짖겠다고 할 뿐입니다.

이 비밀을 보고 겨우 겨우 나올 수밖에 없는
최고의 해석으로써의 인간 한계점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이 한계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구체화 하기 위해서

행동 하나 하나

행위 하나 하나 펼치시는데 있어서

죽었던 모세를 끌어들이고

승천해서 이 땅에서 없어진 사라진 엘리야를 끌여들여서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밑의 사람은 모르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 죽음의 비밀을 알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을뿐더러

도통 무슨 의미인지 모르도록 단절 시키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비밀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자만 이 십자가의 의미 때문에

더욱더 해석불가의 이상한 행동들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개방할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약올리듯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세리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강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죄인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불의한 자에게만 그 비밀을

아무 조건 없이

공짜로 알려주시겠다는 겁니다.

일부러 말입니다.


약을 바짝 올릴려고 말입니다.


그러니 비밀이지요.

맞물리도록 해야만 비밀인 겁니다.

맞물리지 않으면 비밀이 되지 않습니다.


모세도 알던 유대인

엘리야도 알던 유대인


그런데 예수님이 졸지에 패쓰워드 걸려 비밀번호를 아무리 입력해도

통과가 되지 못하니까


모세도 결국 엉터리로 알게 된 것이고(율법)

엘리야도 결국 엉터리로 알고 있었음이(선지자) 들통이 난 겁니다.


선지자를 죽이지 않겠다는 행동과 다짐들이 더욱더 선지자를 죽이도록
장로의 유전을 따른셈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것을 염두하고서

그 틈사이로 복음은 파고들었던 겁니다.

얼마나 얄밉냐 말이지요

다른 것은 다 대비를 하고 준비를 해서

피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도저히 피할수 없는 그길로

그 틈사이로만 쳐들어온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결국 나의 어리석음을 파고들어오는 어리석음이요

나의 미련함을 파고들어오는 미련한 지혜였던 겁니다.


유대인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똑같이 그렇게 오시겠다는 겁니다.


자 이런 판국인데도 피할수 있다고 보겠습니까?



(눅 9:34, 개역)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개역)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구름 조차도 이 비밀성에 한 몫을 단단히 합니다.

마치 닭처럼 그 울음소리가 베드로의 귀를 빵빵빵 못질을 하듯이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라고 말입니다.


즉 딴 사람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목사 말 들을 필요가 없고

교회 말 들을 필요가 없고

성경해석가들 말 들을 필요가 없고

어른 말 들을 필요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을 인용해서 누가 말 하더라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만 직접 들으시면 된다는 겁니다.이 얼마나 배타적인 외골수 입니까?


괜히 성령 줬습니까?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고 준 겁니다.


직접 듣지 못하는 자는 그 매개자가 예수님을 가리우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걸치니까 대가리 치워라 예수님 좀 보자 라고 직접 대면하라는 겁니다.


저의 말만 들어라


어떤 유명한 철학자 이야기가 있죠?

햇빛을 가리우니까 머리 좀 치워 달라고?


비키라 말이죠.


왜 중간에서 알짱 알짱 거리냐 말이죠.

뭐 중보자 라고? 매개자 라고?


다 거짓입니다. 사기꾼들입니다.


예수님과의 독대가 아닌 이상

다 거짓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로 남기는 것들도

읽지 마세요

말라고 읽습니까?


잠깐 참고하고 휴지통에 버리세요

다 배설물일 뿐입니다.


예수만 보여야지

인간은 자꾸 자기를 보이고자 혈안 눈에 불을 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 예수님만 남기시고자 펼치시는 비밀인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


예수님만 남기고자 예수님을 죽이시는 비밀


누가 이 수수께끼를 풀겠습니까?































그리스도 되심과 고난의 관계 (눅 9:20-28)

2013/11/10 12:0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그리스도 되심과 고난의 관계 (눅 9:20-28)



(눅 9:20,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눅 9:21, 개역)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눅 9:22, 개역)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 9:23, 개역)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4,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5,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눅 9:26, 개역)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27,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눅 9:28, 개역)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오늘 본문의 단어들을 살펴보면 왠지 경고적인 의미인 듯 보이겠지만

상당히 부정적인 단어로 가득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즉 긍정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그 말은 상대적인 뭔가를 의식해서 나온 단어들이다는 겁니다.

앞의 시간에서 살펴본

오병이어의 기적들처럼 긍정적인 의미만 가득하면 좋은데

오히려 그거 하나 보여줘 놓고서는

온갖 잔소리는 몇배나 더 강조하듯이 상당히 부정적이다는 겁니다.

(신명기의 율법처럼, 또는 산상수훈 처럼 율법을 더 강화 하시는 것 처럼?)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죽음이라는 의미로써 축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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