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에 위로 받다. (행 20: 1-12)

부정함에 위로를 받음



(행 20:1, 개역)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행 20:2, 개역)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행 20:3, 개역)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행 20:4, 개역)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오와 드로비모라』

(행 20:5, 개역)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행 20:6, 개역)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행 20:7, 개역)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 20:8, 개역)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행 20:9, 개역)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행 20:10, 개역)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행 20:11, 개역)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행 20:12, 개역)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복음은 무지 무지 바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추상적(형이상학)입니까?


추상적이다는 말은 진위를 가릴 능력이 인간 쪽에서는 없다 라는 겁니다.

소크라테스 말처럼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에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 이라고 할 때
사랑 자체가 얼마나 추상적인 단어인지 모릅니다.


여기에 반드시 숨어있는 동사 곧 [~ 하다] 가 숨어있습니다.


사랑 하다
사랑 받다

사랑 한다

사랑 이다.


그런데 이 기준이 없기에

어느 정도로 사랑해야 사랑인 것인지?


오죽 하면 용서 라는 추상적인 의미가 얼마나 애매모호했으면

베드로가 몇 번을 용서해야 용서이냐 라고
그 기준을 설정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합니다.

즉 그 기준을 없애는 것이 용서의 의미이다 라는 겁니다.

용서를 대상화 할수 없고

도리어 용서로부터 대상물이 되어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뭐 너가 용서를 해? 에라이 도리어 베드로 너가 용서를 제발 좀 받아라!!

즉 추상성을 없애는게 아니라
추상의 추상 즉 이중추상으로 더 중첩시켜버림으로써

인간 쪽에서의 추상성을 없애버리는 식으로

무의미해져 버리는 식으로 추구해 버립니다.
더 나은 추상성이 됩니다.

간따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더욱더 모르도록 이중반복으로 말입니다.


7에 70 곧 490번이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 하라는 겁니다.


즉 이 말은  ~~ 하라 라는 단어가 숨어있다가 비로소 등장해서

아 그럼 ~~ 하라 라는 단어로 ~~ 하면 되겠구나가 아니라
아예 할 생각 조차 하지 말라가 되는 겁니다.

용서 포기하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 조차도 또 포기하라 라고 또 [~ 하라] 가 또 붙으니
또 자꾸 할려고 하니 (명령어)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어쩔수가 없으니
용서를 포기하는 용서 라는 말로
더 추상화
더 이데올로기화 시켜버리는 말을 하는 겁니다.

남성적 언어에 미끄러지는 삑사리언어로 흠집을 내는 식입니다.



왜 복음이 무지 무지 바쁘냐? 라는 말 때문에 서두를 이렇게 말했는데

복음이 무지 무지 바쁜 이유는

인간은 하나도 바쁠수 조차 없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까지 복음은 여기 저기
확 그냥 막 그냥 여기 저기 막그냥 수셔대고 돌아다닙니다.


여기에 동원이 된 막대기가 사도바울이지

실제로 인간 쪽에서는 바쁠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역동적인 흐름은
보이지 않는 복음(추상적) 곧 성령의 활동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바울이 오히려 성령 보다 더 시각적입니다.


그럼 물어 봅시다.

바울이 죽고 없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성령의 활동은 멈춰지는 겁니까?

물론 아니지요.

성령의 활동이 시각적일때마다 하필이면 바울이라는 꼬챙이가 옆에 있어서 사용했던 것 뿐입니다.
일종의 당첨된 거죠.


지나가다가 옆에 있어서 성령에 의해 꼬챙이 역할을 한 겁니다.

즉 우연이라는 겁니다.

비자발적이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자발성이 인간 쪽에는 없기에

더욱더 우연의 우연으로 해 달라고
다윗이 기도를 합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얼마나 자원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그렇게 기도할까요?

모든 것을 우연으로 돌리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아름답다 라는 겁니다. 잉여성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무지 무지 바쁩니다. 즉 아름답다 라는 겁니다.

잉여적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의 계산도 다 비켜가는 우발성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비되는 반대는
바로 지난시간에 살펴본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 입니다.

저들이 분노케 된 원인입니다.

강퍅케 된 원인입니다.


자 그러면 복음은 이 강퍅성을 통해서 복음을 드러냅니다.

강퍅함이 없다면 복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빛은 정오 대낮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캄캄하고 어두움 속에서 드러내어야 자신의 영광을 받습니다.

자기 혼자 북치기 박치기를 통해 자기 자작극에 홀로 영광 받는다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반드시 애굽의 강퍅함이 동원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복음이 무지 무지 바쁘다면

동시에 마귀의 강퍅함도 무지 무지 바쁘게 돌아갑니다.


복음이 수셔대니 반드시 반응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강퍅함을 통해서만 영광받으시니 말입니다.


저들이 분노케 되었다는 것은

복음이 제대로 저들을 수셔대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을 통해서 자기자신에게 유익이 된 의미에서 살아있는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저들의 숨어있는 강퍅함이 드러났을때에 비로소 말씀이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게 됩니다.


왜? 나도 저들과 똑같은데

그 지옥에서 건져주시느냐 말입니다.


지옥가는 자들을 보고서 비로소 왜 나는 심판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감사가 넘쳐 넘쳐 흐르는 겁니다.


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싸가지 없음입니까?

지옥의 심각성, 지옥가는 자들의 처절함을 못보면
그 감사함은 자기가 잘 나서 구원된 것으로 여기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저절로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말라고 말려도 감사가 안 넘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 방법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감사도 항상 자기 유익으로 끌어당기는 법입니다.


저들의 강퍅함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신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그로인해 돈으로 유익으로 계산이 되어서 자신의 몸에 다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도바울을 고소합니다.

오죽하면 아테네에서까지 따라왔겠습니까?

그 정도로 복음이 그들을 먼지 털어 후다닥 가버려서 

약발을 바짝 올려놓았다는 증거이겠지요.


그런데 그 법적인 고소 조차도

그들의 소요 조차도

먹혀들지가 않는 겁니다.


(행 19:40, 개역)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행 19:41, 개역)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행 20:1, 개역)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을 건드렸다는 일

그래서 고소한 사건으로써의 소요 난동 소동 빵터진 사건 고소고발사건


바로 이런 무의미한 우상적인 일이 저들의 생계수단과 연관이 되었지만

정작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사건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사건과의 부딧힘 속에서


하나의 마디를 형성해 (분절, 접힘)

심판의 근거

지옥 보내는 알리바이를 형성할 뿐이지

저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어서

더 심하게 고소해 본들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손해 보기 때문에

소동이 저들의 손에서 그쳐지게 되는 겁니다.

주체는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주가 되셨다 이지
저들의 강퍅함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너희가 죽인 예수가 주가 되셨다에 동원이 되는 대상물, 배치물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래서 복음은 더욱더 바빠 진다는 겁니다.

저들은 손해 된다 싶으면 손 다 때버립니다.

바닥을 뜯어낼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다시 인물들을 새로 배치시켜서

이제는 새이스라엘인 교회 속에서
이 복음이 들어와서 흠집 접힘 분절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교회는 과연 이 심판을, 이 종말을 감당할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물론 감당 못합니다. 감당이 불감당입니다.

바로 유두고 사건입니다.


인물들이 새로 배치가 되고, 공간도 재배치, 시간도 재배열

이 십자가의 죽음은 새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옵니다.

저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퍅함으로 일관했고

유익이 없다 싶어서 더 이상 손해볼 짖을 그만두고
소동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소동이 이제 새이스라엘 내부로 들어옵니다.
새인물들 새공간 새시간의 배치는
사도바울도 배치를 당함으로써

더욱더 오랫동안 복음을 전할수 있도록 한 겁니다.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이 바울을 오랫동안 다루심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오랫동안이 그만 너무 너무 졸리도록 해서

3층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게 됩니다.


강의를 하루종일 밤새도록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 또한 소동(사건)입니다.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복음이기에

육체는 견딜수가 없어서 졸게 되었고
그 졸게 됨에 있어서 그만 떨어져 죽게된 그 상황을

복음은 하나의 재료로 삼아서

복음의 복음다움을 더욱더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은 막힘이 없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막힘이 없는게 아니라

복음이 바울을 다루는데 있어서 막힘이 없고

유두고를 다루는데 있어서 막힘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의 죽음도 복음을 방해할 수가 없고

그의 졸음도 복음을 소동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유두고의 죽음은 복음의 기가막힌 재료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부정함은 복음의 기가막힌 재료 가 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부정해 질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충분히 부정하니까 말입니다.


말씀 스스로 하시도록 그냥 냅뚜세요


그냥 원래대로 막살아 왔듯이 막사세요


유두고는 졸려서 그냥 막 졸다가 떨어져서 막 죽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재료로 삼아서
복음은 그를 살려버립니다.


살리는게 목적이 아니라
저들의 분노함과 차이를 두게 하시는 아름다운 복음 때문이다는 겁니다.

곧 육의 소욕성에 반대되는 성령의 소욕성으로 인한 구별케 하심, 거룩성입니다.

그러자 소동이 벌어집니다.


유두고의 죽음이 오히려 주님의 말씀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위로가 된 겁니다.


위로는 인간 개인에게 유익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위로는 저들과의 차이성, 구별성, 단절성, 간격벌리기, 거룩을 말하는 겁니다.


즉 이 말은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믿음에 대해 말하듯이

사실은 그들 인물들이 전혀 믿음이 있는 모습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애굽의 파라오 왕을 두려워해서 도망친 모세를 출애굽기에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반대로 히브리서에서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 말씀이 이랬다 저랬다 반칙을 벌리는 겁니다.

앞과 뒤가 틀리는 겁니까? 모순되는 거죠?

말씀 스스로가 기록해 놓고도

그 기록을 스스로 어기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물을 겨냥할게 아니라

말씀이 왜 이들을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믿음이라고 몰아붙이느냐?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는 겁니다.

저들을 전혀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반대를 가장 적나라하게 말씀 스스로가 기록해 놓고서는(까발리고 굴욕적으로 세세히)

말씀 스스로가 그 기록을 쳐서(부정해 버리고)

스스로 모순되게

의도적으로

노골적으로

뻔뻔스럽게 기록함음

바로 믿음이 그렇게 저런 사람들을 믿음으로 몰아붙여버린다는 겁니다.

즉!! 아예, 대 놓고 저들의 허물을 노골적으로 편파적으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덮을려면 허물이 더욱더 허물적이어야
누가 봐도 너무 너무 허물이 커야
그 덮는 것도 노골적이고 뻔뻔스럽게 펼쳐지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 곧 마귀보란듯이 펼쳐지는 소욕성입니다.

그러니 누가 반발 하겠습니까? 


그러니 안 믿고 싶어도

안믿음이 증명이 되는 기록된 말씀들을 끄집어 내어도

말씀 스스로가 그것을 배반하고 믿음으로 몰아붙여버렸기 때문에

여기에 힐문치 못하도록 믿음으로 밀어 붙였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결과가 이렇게 난 이상 토 달지 말라는 겁니다.

결과가 저들을 소급해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믿음이 밀어붙여버렸다는 겁니다. 일방적인 선언이다는 겁니다.


믿음이 일방적으로 선언했는데 누가 따질거냐 라고 노골적으로 따질테면 따져 보라 라는 겁니다.

즉 일방적이다는 말은

편파적이다는 말은

반드시 거기에 대항하는 반대적인 주장들인 힐문할 자들을 유도한다는 식입니다.
힐문 안하고 싶어도
아무리 봐도 배반이요 모순이요 속임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힐문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이런 일방적인 편애에 반발적인 세력을 거냥하듯 펼쳐지기에
원인에 따른 결과를 추구하는 선악의 세력은
믿음의 세계에 덤벼 들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말려든 거죠.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강퍅 곧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서

빛은 자기 스스로 자작극을 벌려

스스로 영광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19장의 분노한 자들과 대비된


복음 스스로가 분노한 자들을 유발케 하고


그 반대로 20장에는 위로를 받은자를
의도적으로 유두고를 죽였다 살림으로써


즉 일부러 3층에서 떨어뜨려(설교 무지 무지 오랫동안 하도록 해서 졸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해서 떨어져)
죽게 함으로써 다시 살림으로써


분노한 저들에게 없는 위로를 편파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겁니다.


분노한 저들은 살아있는 말씀을 거부해 버립니다.

더 이상 말려들기 싫어서

소동을 그쳐 버립니다.


고소해 봐야 유익이 안되고

남좋은일 하기 싫다는 겁니다.


돈 때문에

손해본 것 때문에

고소 했는데

돈들여 고소한 것

본전 못 찾으면

더 이상 소동을 원치 않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소동이

말씀의 살아 있음까지

바닥을 뜯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새이스라엘 내부로 들어와서

그 살아있음의 종말성을 드러냅니다.


유두고의 죽음이

떨어져 죽는 사건이


왜 위로가 됩니까?


저들이 원치 않는 말씀의 살아있음을

이들에게는 유두고의 죽음을 배치시킴으로써

위로가 되도록 하신 겁니다.


진짜 은혜란 뭡니까?


없는 것을 받았을때에 은혜가 아니라

결핍을 채웠을 때에 은혜가 되는게 아니라

믿음에 의해 밀어붙임을 당한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풍요한 자들이 지옥을 가는 그 생생한 장면을 봤을때에


왜 나는 저들과 같이 지옥에 안떨어지는 거지?
저들과 다를바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얼마나 나를 무시했으면

지옥 갈 자격 조차도 없다 라는 것이 은혜인 겁니다.

다들 지옥에 쓰나미에 휩쓸려 내려갈때에

구지 콕 찝어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지옥행 속에서

재수 없게 걸려든 것이 바로 복받은 은혜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무시받았으면 남들 다 가는 지옥에서 빠졌느냐 말이죠.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겁니다.

저들과 다를바 없다는 겁니다.


멋도 모르고 남들이 다 가는 그 큰 길의 흐름에서

홀로 접힘이 되었다는 것


바로 그 현상이 유두고의 죽음을 통해서 이들은 위로를 받은 겁니다.

그 위로가 접힘현상 즉 분리현상이다는 겁니다. 아름다운 거룩입니다.


오죽 못 났으면

얼마나 무시했으면

오죽이나 불쌍하기 짝이 없었으면


그 지옥행에서 건져냈겠씁니까?


위로는 남들이 다 하는 분노 속에서 건져내었고

남들이 다 토해내는 강퍅함 속에서 끄집어 내었고
남들이 다 가는 지옥행에서 콕 찝어 내임을 받았다는 것

현대의 교회들 조차도 이 큰 길에서 못 벗어나는 판국인데
무슨 수로 빠져나오겠습니까?

그 근거가 바로 십자가의 피 라는 것


그 무시무시한 지옥으로 향하는 사람들 속에서 라야

은혜가 은혜다운 겁니다.


십자가는 저들 분노가 가득한 자만 수셔대는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매일 수셔댑니다.

그것이 믿음이 우리를 밀어붙이는 방식입니다.

위로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 접힘이 바로 성령의 소욕입니다.


육의 소욕과 차이내고 구별케 하기 위한
성령의 매일 매일의 탄식입니다.

(눅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분노가 가득하게 된 원인 (행 19:21-41)

2013/11/16 20:46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분이 가득게 된 원인 (행 19:21-41)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

 

(행 19:21, 개역)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 19:22, 개역)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행 19:23, 개역)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행 19:24, 개역)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행 19:25, 개역)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행 19:26, 개역)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행 19:27, 개역)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행 19:28,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행 19:29, 개역)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행 19:30, 개역)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행 19:31, 개역)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행 19:32, 개역)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행 19:33, 개역)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행 19:34, 개역)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하더니』

(행 19:35, 개역)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행 19:36, 개역)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행 19:37, 개역)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왔으니』

(행 19:38, 개역)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행 19:39, 개역)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행 19:40, 개역)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행 19:41, 개역)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오능 본문에 사람들이 분노가 가득한 상태이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바울이 아테네 논쟁에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은 신이 아니다 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들이 매사에 종교성이 가득하니

바울이 한 말입니다.

 

그때의 그 말이 이제야 하나의 사건으로써 발달해서 뻥 터지게 됩니다.

먼지 후딱 털고 가버렸던 바울은

사람들의 분노에 부딧히게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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