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장 같은 복음 (행 20:13-38)

매일 매일이 항상 마지막인 기쁜 소식 (하루살이 복음)



(행 20:13, 개역)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행 20:14, 개역)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행 20:15, 개역)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행 20:16, 개역)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행 20:17, 개역)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행 20:18, 개역)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행 20:19, 개역)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 20:20, 개역)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 20:21, 개역)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 20:22, 개역)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 20:23, 개역)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4, 개역)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5, 개역)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 20:26, 개역)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 20:27, 개역)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8, 개역)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9, 개역)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 20:30, 개역)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 20: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32, 개역)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3, 개역)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행 20:34, 개역)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행 20:35, 개역)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6, 개역)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행 20:37, 개역)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행 20:38, 개역)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람이 미래에 대해서 불확실할때에는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일들과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를 한번 미리 당겨 봅시다.

무슨 수로 미리 당겨 보느냐고요?바로 그겁니다.
그것이 우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미리 당겨 보는 것 조차도 시도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의 내용이 심판에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분노케 된 유대인과의 대비에서 온 구조 판대기 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이 벌리신 거룩 사건이

저들과의 차이 차별을 두기 위해서
분노한 자들과 대비해서 상대적으로 차이를 두는 방식이

죽음으로 인한 위로 라는 겁니다.

어차피 살릴 것 말라꼬 죽이느냐 말이죠.

그러나 살린다는 것이 의미가 될 려면 그 차이로 죽음이 벌어져야 하는 겁니다.


곧 심판입니다. 징계입니다. 간섭입니다.


저들은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이 쪽은 매로 때려서라도 차이를 두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뭔 잘못을 해야 맞고 때린다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저 분노한 자들과 차이내기 위해서

아무런 잘못을 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때립니다.
매 맞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생아와 양자의 차이점입니다.


작년 이였던가?

기독 포털 사이트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에 대한 해석의 글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을 못하는 것을 봤습니다.


겨우 결론이 억지로 풀지 말자 라는 겁니다.
억지로 풀다간 이단 된다는 겁니다.
이단 되기 싫으면 풀지마 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대충 흐지부지 넘어가버리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며칠 동안의 긴 글들이 나열이 되고 했는데

아무런 결론도 없이 모호하게 끝나버린 것을 보고
코메디 쇼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데
이 의미가 그냥 방치되어 버렸다는 것에서

도대체 그럼 그동안 기독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였습니다.


저의 결론은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는 유대인의 간계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또 지난 시간으로 치면 분노케 된 유대인 이라는 의미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즉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인간의 분노로만, 간계로만 가득채워져 있을 뿐이지

그 처음자리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로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구원 장사인 돈으로만 채워졌다는 겁니다.

유대인이 그랬거든요.

믿음이 돈이 되었으니까요.
종교가 그래서 유지되는 겁니다.
돈만 쏙 빼버리면 다 허물어지는 모래성일 뿐입니다.
돈이 없으면 유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 바닥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가 없다는 겁니다.
그 기초돌 주춧돌 모퉁이돌은
예수님의 버림 받으심이 아니라

돈으로만 채워져 있었던 겁니다.

왜! 버리는 줄 모른다는 겁니다.

골치아프기만 한 문제꺼리일 뿐인 거죠.

얼마나 불쾌하고 불편한 복음입니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복음입니까?


거리낌이요 걸림돌 이요 어리석고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버리니까 말입니다.


왜 버림 받냐 말이죠, 바보 같이.

다 지금 선택 받을려고 

구원 받을려고 하는 판국에 ....

그런데 이것이 바로 아름답다 라고 했습니다.


갈라지는 의미라서 아름다운 겁니다.

미쁘심입니다.

얼마나 든든함 입니까?


사생아와 자녀를 차이두는 방식이 바로

매입니다.


치심 입니다.


버림 입니다.

곧 죽음 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유언장 같은 의미로써 오늘 본문이 마지막설교처럼 전해지는 겁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그 상황에서는 곧 죽는것과 같으니까 말입니다.


즉 유두고를 죽였다 살렸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헤이
요물 ~~  요물 ~~ 처럼


바울의 복음증거로 인해서 분리사건,
차이내기 사건이 벌어진 것이
심판으로 인해 위로 받음

죽음으로 인해 위로 받음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유두고가 아닌 바울 본인이 이제 그 죽음의 자리에 놓여질 것 같다 라고 하니까


성도들이 울면서 바울이 가는 길을 염려해주고 있는 겁니다.


마치 오늘 본문이바울이 예수님과 비슷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의 길을 가는 것처럼

그런 버림받는 분위기에서 서로 서로가 위로를 해 주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얼마전에 어머니랑 했던 대화가

깡패 산적 입다가 이름없는 딸을 제물로 바침에 있어서
(인신제사로 보니까 해석이 안됨, 이삭이 제물되는 것이 어떻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가 하는 점도 동일하게 인신제사라는 부정성이 확 꼿혀버림)
입다를 빼내시는 방식이 바로 이름없는 딸의 죽음입니다.
이름이 없기에 일부러 누락시켰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빼낼 방식이 없습니다.
저들과 차이두기위한 거룩이 개입한 사건이요
거룩의 자작극입니다.

입다 자신의 제사 드림에 있는 것이 아니요
입다의 전쟁 승리가 아닌 겁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간계와의 차이두기는
처음부터 준비된 이름 없는 딸의 죽음이였던 겁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오늘 귀히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럼으로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 내용이 바로 입다의 딸과 연관 시켜서 어머니랑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 곧 아름다움 곧 미쁘심 이라는 분리작업입니다.


차별화 차이두기 인 겁니다.


저들과 곧

입다를 이스라엘 장로들과 차이두기 위해서
주님은 입다의 딸 곧 이름없는 그 딸을 죽음 곧 심판 속으로 종말 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입다를 구별시키는 아름다운 작업을 하신 겁니다.


(삿 11:1, 개역)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삿 11:2, 개역)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삿 11:3, 개역)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삿 11:4, 개역)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삿 11:5, 개역)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 오려고 돕 땅에 가서』

(삿 11:6, 개역)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삿 11:7, 개역)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삿 11:8, 개역) 『길르앗 장로들이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게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삿 11:9, 개역)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삿 11:10, 개역)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반드시 행하리이다』

(삿 11:11, 개역)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분명 기생의 자식이라고 쫏아내어 놓고서는

더럽다 이거죠

그런데 암몬 군대가 쳐들어 오니까
비기싫은 저 깡패두목 입다의 힘을 이스라엘 곧 길르앗 장로들이 이용을 할려고 합니다.

사사 라는 이 어중이 떠중이를
이용을 할 수 밖에 없도록 조치를 한 겁니다.

그 장로들의 간계에
넙쭉 사사 입다는 걸려듭니다.

자 주님께서 이 입다를 이스라엘의 간계 곧 마귀의 간계로부터 건져내시는 방법이 뭘까요?

맞습니다. 미쁘심 곧 거룩을 입히심입니다.

그것이 저들 이스라엘로부터 빼내시는 방식입니다.

곧 버림, 치심, 죽음, 심판, 매 맞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아야 하는가?

인간들이 믿어대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고 구름 속에서 외친 그 하나님의 음성은
이 독생자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이

바로 인간들이 믿어대는 그 가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차이내는 거룩이라는 아름다운 분리 작업이다는 겁니다.


왜? 귀하기에


이스라엘의 간계는? 천하기에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그 천한 인간들의 믿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예수님을 줄수 없다는 의미인 겁니다.


그래서 주시죠. 


줄 수 없다고 해 놓고서는 주신다?


바로 분리작업 때문입니다.

대신 매 맞음입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은 그 가짜하나님을 찢고서 빠져나오시는 겁니다.


유두고처럼 죽었다가 살아나는 분리작업 곧 거룩을 당하시는 겁니다.


아니 스스로 거룩 되심을 드러내시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버렸다가 스스로 취하시는 겁니다.


(요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요 10:20, 개역)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가짜 목자 삯꾼과의 차이로써 말입니다.

(요 10:7,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8, 개역)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9, 개역)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10, 개역)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개역)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왜 욥을 마귀와의 내기에 응하셔서

알수 없는 그 고통 곧 심판 속에 집어넣으시는 것일까요?


바로 가짜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입니다.

엘로힘에서 여호와로 빼내시는 작업입니다.
가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남, 빼내기, 탈출, 분리작업이 바로 거룩이라는 아름다움입니다.


알랑바디우는 진리란 바로 [벗어남] 이라고 합니다.

모든 기존의 법칙에서 포착되지 않고 벗어나는 것이 진리라고 합니다.
먼저 있던 법칙에 적용받지 않는 것이 새로움 이라는 진리입니다.

그 어떤 법칙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즉 그 말은 내가 오늘 예수님를 알았는데

어 내일 되면 이 예수님이 내가 알던 예수님이 아니더라 라는 겁니다.

즉 이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랑은 그 어떤 법칙에서도 해석 되지도 않고 포착되지도 않고

가까이 다가갔다고 여겼는데 어느새 멀리 떨어져 간격이라는 갭이 생기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0과 1 사이의 간격을 사건이라고 본 겁니다.
즉 존재 0 이라는 부재에서, [없음]에서 1이라는 사건을 생산하는데
그 존재와 사건 사이에 사랑(주체)이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 늘 초과 과잉 벌어지는 거죠. 늘 잉여를 치는(충실성,검열) 잉여로써 초과하는 겁니다.

주께서 내 주께
주가 주를 치심으로써 초과과잉을 이루시는 겁니다.
십자가 말입니다.

들뢰즈는 잠행자 또는 탈주 식별불가능하게 되기 로 표현했고 (긍정의 철학)
바디우는 [벗어남] 이라고 했고 (부정의 철학)
지젝은  숭고한 히스테리 찬양 이라고 한 겁니다. (변증법, 부정의 부정 철학)

그래서 아름다움인 거룩 곧 미쁘심이란

버림입니다.


버려야

죽여야

매로 치셔야
심판하셔야

아궁이에 던져야



되찾고
살리고
어루만지며
축복하시는
귀히 입히심 이다는 겁니다.


여기서 갈라지는 겁니다.

아름다운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거룩 현상입니다.

사생아와 자녀가 갈라지는 겁니다.
천희 쓸 그릇과 귀히 쓸 그릇으로 분리 되는 겁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 되었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 된 것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욥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내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동안 완전 거꾸로 된 해석만 좋아라 했고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앞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를 자꾸 손대시고 간섭하시고 매를 대시겠다는 겁니다.

이유없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입니다.


뒤로 빼돌리기를 벌리시는 겁니다.


이 관계를 주님 쪽에서 고래 고래 외치시고자

우리를 죽음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아름다운 거룩 현상인 겁니다.


미쁘심입니다.


미쁘심의 반대말은 시험듬 인데


시험은 오히려 매 맞는 현상이 없는 상황이 시험든 겁니다.


그러니까

미쁘심이든 시험이든

우리의 심리적인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원인이 우리 인간 쪽에 없다는 겁니다.


그냥 한꺼번데 다 죄인 취급해서

한 쪽은 간섭하시고

다른 한 쪽은 내어버려 두심 뿐입니다.


그러니 뭘 잘못 행동 해서 매를 대시는게 아니라

또 무슨 행동을 참 잘 해서 매를 대지 않고 내어버려 두시는게 아니라


일방적인 주님 쪽의 사랑 때문에

그냥 훅 하고 쳐들어와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잉태시켜놓고 훅 떠나가 버리는 식입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이 사랑의 십자가 흔적으로 인해
졸지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미움 대상이 되는 응시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마치 마리아가 임신을 하지 않으면

돌삐 맞아 죽게 되는 율법에 적용 받을 이유도 없고

약혼자로부터 종용히 끊쳐질 이유도 없고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건의 흔적이 생김으로써
졸지에 악마의 세계까지
이 여인의 행동 하나 하나를 응시하게 되는 겁니다.


이 얼룩을 제거할려고

모든 율법과 이방인 세계와 유대인들이의 권력자들이 다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벗어나도록 거룩은 작동이 되는 겁니다.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애굽으로 빼돌리시듯이
헤롯을 바짝 약올려 놓듯이

(마 2:12, 개역)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마 2:13, 개역)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마 2:14, 개역)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마 2:15, 개역)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2:16, 개역)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또는 벗어나지 못하고 십자가에 그 어린양은 죽게 되지만

그 자체가 이미 벗어남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그 어떤 법칙으로도 잡을 수 없기에

죽음이라는 법칙도 결국 무용지물이 되도록

스스로 다시 되찾는

양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거룩 곧 성령이 임하여서

사도바울은 매일 매일이 유언장 같은 설교로써

복음을 증거합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곧 죽으러 가는 것과 같은 겁니다.

유대인의 간계가 가득한 그 본부로 가는 것입니다.


물론 반전 드라마처럼 성령으로 인해 가도록 마음 줘 놓고서는

또 성령의 감동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죠.


그러나 이 자체가 이미 아름다움이라는 거룩으로써 분리작업인 겁니다.

어차피 예루살렘에 가나
방향을 틀어서 로마로 가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즉 분리하고 차이내고 차별화 시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과 로마가
바로 그 차이내는 거룩의 상대적인 위치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로마든 예루살렘이든 심지어 땅 끝이든


유대인의 간계처럼

마귀의 간계로 가득차 있는 곳이다면

언제든지 성도들은

성령의 사람들은

이 장소에 투입이 되는 겁니다.


매일 매일이 바로 마지막 하루인 겁니다.


이것이 일상입니다.


바울처럼

이것 보다 더 명료하고 확실한 미래가 어디있겠습니까?


이 확정된 미래가 쳐들어 온 것이 바로 오늘인 겁니다.


오늘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솔로몬의 영광도 이 백합화 보다 못했듯이


우리의 미래는 바로 오늘로써

귀하게 여김 받았다는 것을


바로 천하게 여김받는 내어버려 두는 사생아와의 차이두기로써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왔다는 것을
십자가의 피가 미래로부터 왔다 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 죽어도 상관 없기에

이것이 아름답다 라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심판 속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시는 겁니다.





































심판에 위로 받다. (행 20: 1-12)

2013/11/29 12:51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심판에 위로 받다. (행 20: 1-12)


부정함에 위로를 받음



(행 20:1, 개역)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행 20:2, 개역)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행 20:3, 개역)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행 20:4, 개역)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오와 드로비모라』

(행 20:5, 개역)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행 20:6, 개역)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행 20:7, 개역)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 20:8, 개역)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행 20:9, 개역)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행 20:10, 개역)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행 20:11, 개역)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행 20:12, 개역)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복음은 무지 무지 바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추상적(형이상학)입니까?


추상적이다는 말은 진위를 가릴 능력이 인간 쪽에서는 없다 라는 겁니다.


소크라테스 말처럼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에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 이라고 할 때

사랑 자체가 얼마나 추상적인 단어인지 모릅니다.


여기에 반드시 숨어있는 동사 곧 [~ 하다] 가 숨어있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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