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별세(죽음)를 소홀히 여김 (눅 9:35-45)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심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눅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개역)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눅 9:37, 개역)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눅 9:38, 개역)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 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눅 9:39, 개역)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눅 9:40, 개역)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눅 9:4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눅 9:42, 개역)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눅 9:43, 개역)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눅 9:44, 개역)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눅 9:45,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지난주와 이번주에 걸쳐서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가짜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의 차이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짜와 진짜가 있다니?
아마 마귀가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라고 보겠지만
아닙니다 라고 했습니다.


가짜 하나님을 만드는 원인자는 바로 예수님 곧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가짜는 아무나 가짜를 만들어 낼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언약적으로 가짜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유대인을 충분히 이해해야할 입장이어야 합니다.
즉, 도저히 예수님 쪽으로 넘어갈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막아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으로써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배반자요 세리처럼 되는 것이며
유대인의 시선에서는 이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가능해도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주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또 믿음도 하나님을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니기에

믿는다는 개념 조차도 완전 다른 개념이 되는 겁니다.

즉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런 가짜 믿음을 거쳐서
완전히 다른 의미의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그런 믿음을 믿는게 아니라


반대로 선물 받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울 쪽 곧 인간 쪽에서 다가갈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다 단절된 상태에서
오로지 주님 쪽에서만 다가오는 방식의 믿음
내가 믿는게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다가오심인 믿음이 오심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 예로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형 에서와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이 중간에서 그 사이를 비집고 오게 됩니다.


간택의 문제에 있어서
졸지에 형님먼저 아우먼저 하던 그런 좋은 시절은 휭날라가 버리고

이 장자권에 의해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극단적인 문제가 대두되게 됩니다.

니 죽고 내 살자 라는 식으로 ...


그런데 참으로 고맙게도

형 에서가 그 장자권은 결코 변동이 없는 고정적인 문제로 봤다는 점에서
그의 하나님관 믿음관 약속관 곧 구원관에 대해서

우리를 아주 아주 잘 대변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오늘날 우리들까지도 이런 사고방식은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동생 야곱입니다.

야곱은 그 장자권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여겼다는 점입니다.


먼저 태어난 순서 즉 시간적인 역사와
공간 적인 그 몸의 의미를
거부하고
뒤바꿔질수가 있다고 여길수 있는 것은 야곱
아니 이스라엘 뿐이다는 겁니다.

육의 사고방식의 거부 단절 차이 차별성이다는 겁니다.
육의 방식이 아닌 딴 방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뭔지 몰라서 일단 거부하는 겁니다.
결국 허리 환도뼈가 부러짐으로써 그 사이의 틈에서
이스라엘이 태어나지만
일단은 육의 거부입니다.
거부하겠다는 방식입니다.

마치 나 인간 안 할래
난 외계인 할꺼야 라고
지 혼자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자기부인 회개 라는 방식입니다.

여기에서 두 믿음이 충돌하게 되는 겁니다.

한 쪽은 고정적인 언약관
또 다른 한 쪽은 유동적인 언약관


뱃속에서부터 쌍둥이로 싸움을 벌렸던 이 두 사람은

소위 이 두 믿음을 말하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했 었었었 던

두 언약을 보여주는 사람 이었던 겁니다.


마치 이삭과 이스마엘처럼
또 두 아들의 어미인

사라와 하갈처럼 말입니다.

 

두 언약입니다.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은 결국 두 언약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누가복음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은 희년 곧 해방의 날 은혜의 해 곧 구원의 날을 말하는 겁니다.


가짜 구원과 진짜 구원

가짜 언약과 진짜 언약

가짜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

가짜 예수님과 진짜 예수님의 대비 충돌을 보게 되는 겁니다.


가짜 쪽도 선명하게 나타나야만 하고

진짜 쪽도 왜 이 가짜와 차이나는 진짜로써 선명하게 나타나야만 하는가를


이 둘의 대립으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항상 한 쪽은 소홀히 여겼다고 합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합니다.


즉 한 쪽이 왜 소홀히 여기는고 하니

빼앗길 리가 없다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은 그 고정적인 구원 곧 장자권이

소위 약속이 빼앗을 수 있는 유동적인 구원이다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 차이가 대립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빼앗을 수 있다고 해서 빼앗아 보면


도리어 야곱 본인도 그런 사고방식을 빼앗기게 되는
어떤 고정적인 사고방식이 있게 됨을

고발당하게 됩니다. 즉 빼앗기게 됩니다.


결국 빼앗음 이라는 의미가 주체가 되어서


두 사이를 갈라 놓아서


서로의 지간에 원수로 만들어 놓는


이 약속

이 구원이


과연 우리가 소홀히 여길 입장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소홀히 여겼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가미되어 있다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되었다거나

흠모할 모양이 없다거나

거부감을 주는 어떤 것들이

이 장자권과 같은 구원에서 발생했다면


그 구원이 결국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두 언약을 율법과 대조된 자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육체를 겨냥하고

약속은 자유를 보여주는 겁니다.


즉 자유자는 율법을 따라 태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약속에 따라 낳았다는 겁니다.

반대로 종은 약속에 따라 태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로지 율법에 따라 태어났기에 종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사이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좋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 지간으로 갈려져 있습니다.


그 정도로 극과 극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한 쪽은 절대로 변할 리가 없다는 불변성 고정성인데

다른 한 쪽은 바로 그런 생각에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일관하고 있는 겁니다.


변한다 라는 겁니다.


사람이란 불변적인 고정적인 든든함에 안착할려고 하지

또 그런 안정적인 것에 동일성을 추구하지


누가 수시로 변덕부리는 유동적인 것에 사활을 걸겠습니까?


[가능한 것]은 그 정도로 인간은 안정적으로 해석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가능하다는 것]은 도저히 해석을 해서 불안정적이다 라는 겁니다.

해석 해 본들 또 미끄러져 버리기 때문에 해석 자체가 불안정적입니다.


심지어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이 됩니다.
즉 유동적입니다.
얼굴이 변해져 버리면 그에 대해서
그에 대한 해석이 다 날라갈 판국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별명 붙이기를 변화산이라고 합니다.

수사로 막 변한다는 겁니다.
마치 구름 처럼
바람처럼 포착 불가요
임의로 부는 성령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 변형된 모습은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 속에서

별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구약의 두 사람을 본 베드로는 초막셋을 짖겟다고 합니다.

즉 이제 자신의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볼 것 다 봤으니, 뭐, 소원 이룬 겁니다.

이런 것은 유대인들의 소원과 다를바 없습니다.


여기에 자신도 합세를 해서
동일성을 추구하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써의 최고봉입니다.

성화론의 최고 수준입니다.

왜 성화 할려고 하겠습니까? 이거 달성 아닙니까?


그런데 구름이 덮쳐져서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납니다.


(눅 9:34, 개역)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개역)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라고 말입니다.


즉 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예수님의 말만 너희는 들어라 라고 하시면서


이 예수님이 마치 한 쪽은 장자권 곧 구원(약속)을 소홀히 여기는 자로 만들어 버리고
또 동시에 예수님은 그 빼앗은 장자권(구원)을 장자권이 주인공인냥 구원이 주인공인냥
구원이 구원 답게 이루어지도록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죽으시면서 까지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그 믿음을 표출하고 있다는 겁니다.

누가? 구원이가!

누가? 믿음이가!
여기에 인간은 소품으로 배치당할 뿐인 겁니다.
양쪽 진영의 소속 또는 소욕으로써 말입니다.

즉 인간은 끼일 구석이 없습니다. 오로지 누락 될 판국 뿐입니다.
이 두 진영의 소욕성을 보여주고 역사 뒤로 탈락할 따름 입니다.

그 대표성이 모세와 엘리야로써
또 잠시 들락날락 하듯이
그 기능을 보여주고 다시 누락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입니다.


어머니에게 마치 이 상황이

맏아들 장자 제사장 나라 유대인들 보는 앞에서
자꾸 예수님은 이방인 중에 이방인을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자꾸 깨작 깨작 저들 유대인들의 고정적인 믿음관 고정적인 선민관에 흠집을 내고 있듯이
저들 보랍시고 그들 코 앞에서 쌍둥이 언약이

졸지에 생겨버리는 두 언약이 생기고

졸지에 이 둘은 뱃속에서처럼 싸우게 되는 두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전부 이 모습뿐입니다.
역사를 뒤엎어버리고
순서를 뒤바꿔 버리겠다는 입장
곧 빼앗겠다는 입장에

유대인들은 마치 형 에서처럼 행동하고
또 예수님을 동생 야곱 취급해 버리듯이
바뀔리가 없다는 겁니다.

역사는 안 바뀐다는 겁니다. 이것이 역사 곧 육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인자는 바꿔버립니다. 묵시의 믿음입니다.

그것도 이방인 중의 이방인 즉 한 이방인입니다. 한 과부 한 문둥병자 입니다.
철저한 응시점 입니다.

누가 봐도 유대인들이 우세합니다.

믿음도 훨씬 좋습니다.

생활 속에서 뼛속 까지 실천해 온 겁니다.

그러니 변할 리가 없습니다.

철저한 고정된 의미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토끼는 누가 봐도 이깁니다. 아킬레스가 이깁니다.
그러나 구조상 토끼는 거북이를 이길수가 없는 것이 묵시 구조입니다.
역사 구조에서 통하는 것이 묵시구조에서는 안통하는 겁니다.

설마 하나님이 배신 때리기를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배신 때린다고 합니다.

곧 예수님 본인이 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보란 듯이

개같은 이방인을 마치 동생 야곱처럼 장자권을(약속) 빼앗아서


저들이 소홀히 여겼다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우시는 믿음을 펼쳐 버립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이런 불의함에 충성합니다.
즉 십자가라는 부정성에 충성합니다.

(눅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눅 16: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눅 16:10, 개역)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개역)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4, 개역)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 16:1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6, 개역)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 16:17, 개역)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행함은 반대로 십자가에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그 변형에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변용입니다.

그러나 행함은 오로지 고정적인 역사라야
칭찬받을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외쳐본들 자기유익을 위한 우상성만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고서

축적이 가능한 욕망(잉여)와
축적이 불가능한, 축적할 필요성이 전혀 없는 욕망(잉여)를 구분했다고 합니다.

자본을 그렇게 보고서
자본론에 언급해 적은 겁니다.

하나는 만나처럼 썩는 재물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따라다닐 필요가 전혀 없는,
오히려 섬기고자 오신 참양식이다는 겁니다.


내 살과 피를 먹어라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두 믿음, 두 언약, 두 하나님이 생겨버립니다. 갈라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섬김입니다.
곧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두 세력이 서로가 양보 못하겠다는 입장으로써

그 원수된 관계를 아예 노골적으로 과시하듯이

두 진영이 팽팽하게 자신의 소욕성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일방적으로 핍박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줄곧 죽음으로 직행합니다.


그 알리바이를 형성할려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아무리 살려줄려고 애를 써도

의도적으로 죽을려고 행동하는 그 행위가

졸지에 믿음으로써 대두 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자해공갈단처럼 예수님은 저들이 나를 미워했다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웁니다.


미움을 예수님 쪽에서 형성하고 있는 겁니다.
저들이 형성 할 수 조차 없습니다.

저들은 이런 불의함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이 불의함에 충성할 뿐입니다.
빼앗을려고 할 뿐입니다.

가짜 하나님을 빼앗을려고
빼앗고자 하는 분은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빼앗음에 충실하시는 분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십자가에 다 못 박아 죽이고자
십자가를 이루시는 겁니다.


싫어버린바를 예수님 쪽에서

흠모할 모양이 없음을 예수님 쪽에서 말입니다.


이루시는 겁니다.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복음입니까?

살벌하기 짝이 없는 복음입니다.


그럼 인간 쪽에서의 대응은

싫어버린바를 귀히 여겨야할 판국이고

흠모할 모양이 없음을 아름답게 봐야할 판국인데


과연 누가 그런 시선으로 보겠습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니체가 한 말 처럼
아는 것 만큼만 보이는 겁니다.

즉 보고 싶은 것만 볼려고 할 뿐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을려고 할 뿐이고
아는 것 만큼만 알려고 할 뿐이고

믿고픈 것만 믿을려고 할 뿐이고
가능한 것만 행할려고 할 뿐인 겁니다.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가듯이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대로 할 뿐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하나님 (절대로 막살면 안되는 종교)

선악의 하나님 (7번 남을 용서해야만 하는 의인되기)

고정적인 하나님 (내 구원을 위한 하나님, 천국 보험)

~~ 을 깨뜨리는


자유의 예수님 (막죽고 막살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은혜 곧 용서하기 위해 저주 받는 예수님 (남이 아닌 예수님을 죽인 내가 용서 받아야 할 판국, 죄인 만들기)
유동적인 구원(먼저 된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는 수시로 팔 어긋맞게 하는 소욕 = 질투의 사랑)



이 두 소욕이 분명해 지는 겁니다.

가시화 되는 겁니다. 숨어있음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비밀로써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불쾌하겠습니까?

불쾌한 쪽은 고정적으로 확보했다는 쪽이 불쾌해 지는 겁니다.
왜? 판이 바뀌어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또 반대로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막살았을 뿐인데 말입니다.


분명히 대조가 되고

물과 기름처럼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약속으로 난 성령의 사람은

이런 성경 속에서의 사건을 매일 매일 격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이 소욕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 갈라지는 현상을 직접 몸소 체험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어디를 가든심지어 죽어 있어도

자나 깨나 먹든지 마시든지

다 이 두 언약의 소욕을 보여주는 배치물인 장기알로써

장기판의 구조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구조는 곧 소욕이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자로 달음박질 함도 아니요

나 그 구조 인정 안할래 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의 긍휼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 우리는 부딧히는 돌에

거치는 반석에 부딧혀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죽음을 소홀히 여겼는가를 말입니다.



의로움을 쫏은 적도 없는 이방인이 의를 얻은 것은
둘째 아들 야곱이 잘나서가 아니라

믿음이 불쌍히 여겨준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 안된다고 내가 믿어야지

의로움을 쫏아야지

막살면 안되지 라고 했던

그 고정적인 시선을 가졌던 맏아들은


이 두 언약의 소욕성을 거부한 겁니다. 외면한 겁니다.

소홀히 여긴 겁니다.


믿을 구석은 자신의 종교 행위 뿐이였던 겁니다.

자기 믿음 밖에 없었던 겁니다.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으니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어떻게 막사냐 말이지요.

백날 천날 생각해 봐도

막살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은 올무에 걸려든 겁니다.


매일 매일 막 살아 와 놓고서는

막살면 안된다는 올무에 부딧힌 꼴인 겁니다.



빨리 넘어지고 박살이 나고 부딧혀 가루가 되었을때에


누가 손을 내미느냐 라는 점입니다.


믿음이 가짜인지 아닌지를 바닥쳐 보자 말입니다.

다 뜯어보자 말입니다.

과연 내가 있는지?

아니면 손을 내미는 긍휼을 베풀고자 죽어 피흘리는 분인지?


베드로는 허구헌날 부딧히고 박살이 납니다.

자신의 바닥을 뜯어주는 분 때문에 말입니다.


즉 제자들의 대표요

유대인들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자로써 말입니다.



그 밑바닥을 갈아엎고자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을

저들이 소홀히 여기지 못하도록

깔아놓는 작업을 하십니다.


이방인이 의를 쫏은 적이 없듯이

이들 제자들도 의를 쫏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놓지 않아서 따라다니게 된 것인데

자꾸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우기는

그 사고방식을 하나 하나 교체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의를 선물 받았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선물 받았다

바로 믿음에서 난 의이다 라고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마치 지금 눈 앞에서 자신들이 행한 마귀를 물리치는 그 확실함 보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는 

원인 없는 결과 라는 휭하고 붕뜬 것이

이들 제자들을 굳건히 잡아주고 있는 겁니다.


사실을 막 휘젖고 있는 거죠.

놀이동산에서 회전 롤러코스터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잡아 주고 있는 미쁘심이다는 겁니다.
제자들 믿음, 특히 베드로의 장담 등등 뭐든지 다 휘저음 당해야 하는 겁니다.

삭제 당하기 입니다.


반대로 의를 내가 쫏았으니까 당연히 의가 왔다는

믿기를 내가 믿었으니까 당연히 믿음이 왔다는


이 고정적인 사고방식은


저 막살기 라는 원인 없는 결과에 의해 

확 빼앗겨 버리는 사건을 당해 버리면

졸지에 걍퍅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가짜 하나님은 졸지에 진짜 하나님에 의해서만 드러나도록 되어 있지


우리 손으로 가짜 하나님을 분리해 낼 수가 없는 겁니다.

주께서 내 주께
주의 주 되심 은
주님을 주가 주를 치시는 겁니다.
회개죠.
자기부인이지요.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죽기까지 복종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죽음을 근거로 한 병고침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귀신들린 자의 아비가 당신의 제자들은 못고치더이다 라고 고자질하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혹독한 모욕감의 질책을 합니다.


밑바닥이 다르다 라는 겁니다.


왜 아직 까지도 자기의 믿음을 바닥으로 깔고 있고

나는 예수님의 수제자다

나만 예수님의 제자다

나는 12제자이다 라는

육의 소욕성을 드러내고 있느냐 라는 것을 지적 당하고 있습니다.


12제자이면 뭐하냐? 병도 못 고치는데!!

이런 지적과 간섭을 받지 아니하면

자꾸 아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구나

주님께 믿음 달라고 해야 하구나

믿음을 충전 받으면

예수님처럼 가능하겠구나 로 오인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 없다가 믿음이 생기면 된다고 착각하는 식입니다.

그런 가능성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없다" 라는 그 결핍에 채워넣어야 함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눅 9:40, 개역)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눅 9:4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눅 9:42, 개역)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눅 9:43, 개역)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눅 9:44, 개역)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눅 9:45,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비밀성을 말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이 죽음이 비밀이기에

무슨 말인줄 모른다 라는 겁니다.


즉 귀신 쫏아내는 능력을 받으면

그 비밀성을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왜 귀신 쫏아냄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야 하는 것이

연관 되어있느냐 라는 점입니다.

희년 완성은, 은혜의 날은, 곧 구원의 날인 자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된 겁니다.

하나님과 연관된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내 죽음도 아닌 예수님의 죽음만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줌이

귀신 쫏아냄과 연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백날 믿음을 배터리 충전하듯 충전 받아서

귀신 쫏아내어 본들 소용이 없다 라는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 울리는 꾕과리인 것처럼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디서나

사랑이 없이 다 행동 합니다.

맞습니다. 의를 쫏은 적이 없습니다.


예배 드리고

기도해도

찬양을 해도

충성 봉사를 해도

금식 회개를 해도


사랑 없이 하는 것은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다 죄만 발설하고 있을 뿐이며

막살고만 있을 뿐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사랑이 안 나옵니다.

할 생각 마세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 이렇게 말하면 사랑 하면 될 것 아니냐 라고 합니다.
칫 핏 흥 그게 무슨 비밀이냐 라고 합니다.

남의 죄악을 대신 감당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자는 더더욱 안됩니다.
포기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신 겁니다.

비밀을 언급하신 겁니다.


비밀을 언급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겁니다.


공개적이고 누구나다 다 알아먹는

아 그거 라고 다들 이해하는 소리는 비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반드시 소홀히 여기도록 만들줄 아는 것이 비밀이라는 주체입니다.
토끼처럼 말입니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비밀만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도저히 해석 할 수 없는 비밀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밑바닥에 깔고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책망하고 계시는 겁니다.








































비밀로써의 죽음(별세) (눅 9:28-36)

2013/11/24 10:51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비밀로써의 죽음(별세) (눅 9:28-36)



(눅 9:28, 개역)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개역)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개역)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개역)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9:32, 개역)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3, 개역)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4, 개역)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개역)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살아있다는 것은 전혀 비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데 뭘 감추일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역사에서의 항상 주인공인 인간은

늘 살아있을때의 공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거기에서 지혜를 찾고

문제해결을 찾고

에너지 원, 뭔가 유익이 될만한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에서 찾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살아있을때의 공적입니다.


죽음 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 죽음을 헤메고 검색하고 그 죽음 속에서 정보를 캐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없는 [없음]인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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