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 내가 옳기에, 내가 정당하기에, 예수님의 긍휼의 피는 무용지물.

긍휼히 여기시는 이가 왜 필요하겠는가? 예수 믿는 내가 정당한데? 예수님의 옳으심이 무슨 소용있나?



거짓선생이 많은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선생 되심을 위해

거짓선생들을 깔아 놓으신 것이다.

 

그들을 선생 삼아서 왜 거짓인가를 보고

그 차이를 발견하면 된다.

 

왜 저들을 비언약에 충실케 하시는지를

알게 하시는 방식이다.

 

거짓선지자도 스스로 거짓선지자가 될수 없듯이

예수님 때문에 갈라지는 참선생과 거짓선생의 차이를 보는 기쁨을 누리면 된다.

 

아 저 선생은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거짓을 할 수 밖에 없구나 라고 말이다.

 

현대철학자들 지젝이나 바디우 또는 들뢰즈 니체 스피노자 촘스키 라캉 프로이드 등등등

 

그리고 유명 신학자들이나, 유명 목사들 등등

 

왜 이들이 거짓영을 받아서 저런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지를 말이다.

 

저거들끼리 아무리 싸워도 끝까지 나오지 않는 소리는

십자가의 피 다.

 

십자가의 피를 위해 동원되지 않는 소모품들은

 

본인들이 말하는 그 말이 진리인냥 빠져 살 뿐이다.

 

유대인의 반복이라 보면 된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자신들이 믿기에

 

자기 믿음에 빠져 살 뿐이다.

 

이런 악마성에 벗어날자 누가 있겠는가?

 

모든 인간의 대표성이 유대인인데~~~~

 

오죽 하면 이것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님은 직결 시키시는 것일까?

 

베드로는 사탄이라는 소리 까지 들을 수 밖에 없었으니,
우리는 오죽한가 말이다.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만으로만 만족할 수 없기에

그 몸 십자가에 못 박고자

예수님만의 신실하신 숙제로서만 성령(단절)이 일하시는 것이다.

 

안그렇다 나는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며 살 것이다
딴 사람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
딴 사람은 다 만족못한다 해도, 나 만은 절대로 만족 할수 있다
라고 우기는 믿음과

 

넌 바로 그런 몸을 폐기처분 당해야 해 라고 못박고자
끝까지 섬기시는 예수님 믿음과의 충돌이

 

십자가 사건의 무한 반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넌 거짓이야, 라고 들통당하는

 

그 섬김만이, 그 피 흘리심만이,

미래와 현재를, 심지어 이미 지나가버린 불가능한 과거까지,
허다한 허물을 흰 눈 같이 덮어버린다.

 

마음껏 이 흰 눈 밭을 뛰어다니며 기쁨을 누리자.

 

제발 예수 믿지 말자, 믿지 않을 정도로 믿음이 덮어버렸기에.

제발 예수님 사랑하지 말자. 내가 사랑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끝까지 예수님은 사랑하기에,

제발 예수님 말씀 지키지 말자. 지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씀대로만 되어가기에 ...

 

그런것들 각기 제 갈 길로 간, 양 같았던 12제자들이 다 했던 것이다.

 

(23:8, 개역)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23:9, 개역)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23:10, 개역)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23:11, 개역)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3:12, 개역)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4, 개역) (없음)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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