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머리 둘 곳 없는가?



(눅 9:49, 개역)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5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눅 9:51, 개역)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 9:52, 개역)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눅 9:53,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눅 9:54, 개역)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9:55, 개역)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눅 9:56, 개역)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눅 9:57, 개역)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 9: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눅 9:59, 개역)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 9:60, 개역)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61, 개역)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 9:6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제자들의 서로 누가 크냐 라는 논쟁에 무능한 어린아이를 중앙에 세워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어른 치고 어린아이를 영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도리어 거꾸로 어린아이가 어른을 영접해 줘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마치 누구하나 닭의 세 번 울음을 영접할 사람이 없듯이 말입니다.


너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자야 라고 나발을 불며

동네 떠들고 꼬꼬덱 하고 돌아다녀 보세요

그 닭을 영접하고픈 마음이 있나?


없습니다.


마치 내가 시아버지인데 며느리가 

마누라가 죽어서 적적해진 마음을 창녀로 마음을 달랬는데

그 값을 도장 도장끈 지팡이로 대신한 그 물증을 가지고

며느리가 임신해서 화형에 처할려고 하는데

도리어 그 물증을 증거물로 보여줬을때에

과연 그것을 인정하고 영접할 수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런 내용이 또 반복되어 나옵니다.


일단 누가복음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시는 예수님의 열심들이 나옵니다.

이방인에게 희년 곧 즐거운 기쁜 소식이 선포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유대인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방인에게 복음 곧 희년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벌써 그 자체가 이율배반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자신은 유대 외에 다른 곳에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런데 왜 예수님은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겁니까?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겁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죽고 싶어도 안되는 겁니다.
로마에서 죽어야 하는 겁니다.


거나 거기나 뭐가 다르다고?

문제는 이방인이라서가 아니라, 짐승이라서가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제가 더 마스터 2012 라는 영화를 봤는데
좀 어려워서 해설을 보고 참고를 했는데요

그 해설을 따라서
인간은 과연 짐승인가 라는 주제를 던져 놓고 보니까 좀 이해가 되더군요.


과연 인간은 짐승 맞습니까?


저는 아니다고 봅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은 짐승이 아닌데

진짜 문제는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짐승이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인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없어요 없어.

아기를 낳아보라구요? 인간이 생긴다고요?


인간! 안생겨요 안생겨 ~~~~


그 어떤 일을 해도 인간이 생기나?


안생겨요~~ 안생겨 ~~~~~

유대인이 이방인을 보는 시선은 짐승이라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이방인 며느리를 보는 시선은 짐승이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닭을 보는 시선은 짐승이라는 겁니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보는 시선은 짐승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맞습니다 맞고요 이방인 짐승 맞아요 그런데 유대인이 없어요

맞습니다 맞고요 시아버지 유다 말대로 며느리 다말은 임신한거 맞아요
그러니 짐승같이 불태워 죽여야 하는 것 맞습니다.
문제는 그 다말을 불태워 죽일 그 정당성이 

정작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렇게 주도를 하고 있는 시아버지 유다 조차도 말입니다. 더더욱 없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베드로에게는 닭이 전혀 필요치가 않습니다. 짐승이 왜 필요합니까?

지금 예수님이 죽으시러 가는 판국에
어떻게 하든지 말려야 하고 가로막기 바쁜 판국에?

나의 가치를 예수님에게 다 퍼부어버렸는데 주식쪽박 차면 안 되잖아요?
투자한 가치가 다 날라가는데? 막아야죠 고럼 막아야해 에효효효효
그런데 왜 자꾸 닭이 거걸치게 하냐 말이죠? 닭을 넘어서질 못할정도로 장벽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얼마나 귀찮케 하는지 가는 곳곳 마다 닭이 쪼아대면서 따라옵니다.
에이 이 못된 짐승!!


맞습니다 맞고요 어른에게서 어린아이는 그저 무능할 뿐입니다. 즉 잉여 찌끄래기일 뿐입니다.

그 어떤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거걸치고 방해만 되며 귀찮아서 애들은 가라 라고 쫏아내어야 하는 겁니다.


특히 힘을 추구하는 어른에게는 그야말로 역방향인 힘빼게 하는 그야말로 귀찮은 존재, 하찮은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본문에 우리가 투자한 예수님이라는 지적 고유 재산권을 남들도 이용하고 있더라 말이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쫏아내는 자들이 생기니까

제자들이 그들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일행에 함께 동행하고 동참하라고 하니

거부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주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쫏아내는 일들을 하고 있으니


이거 완전 표절 아닙니까? 지적재산권을 가로채서 하는 짝퉁 아닙니까?

사이비 유사 복음 아닙니까?

원조가 우리인데 우리 사업을 남들이 가로채서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제자들은 화가 났고, 불만이였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반대로 예수님은 놔두라 라고 합니다.

금지하지 말고 더욱더 확장토록 내버려두라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제자들에게도 유익이 된다는 겁니다.


(눅 9:49, 개역)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5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즉 제자들의 시선과 정반대입니다. 유익이 안된다고 여긴겁니다. 손해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유익에 대한 시선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그 다음 제기되는 문제도 동일한 입장입니다.
여전히 제자들의 시선은 예수님의 시선에 정반대입니다.
그것을 지적 당하는 관계가 예수님이 펼치시는 관계입니다.


자꾸 제자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입장을 도저히 놓지 않습니다.

즉 이 말은 그 반대로 이방인은 여전히 짐승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것이 없다니깐요

지금 이스라엘?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원조가 또 있습니다.


히브리 잡족입니다. 히브리 잡족의 원조가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허리입니다. 


아브라함의 허리도 그 원조가 있습니다.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는 멜기세덱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없음]이라는 자리가 유대인의 원조인데

자꾸 [있음]이라고 우기게 되니 [없음]의 처음자리가 의미로 발산되는게 아니라

자기들이 [있음]이라는 의미가 발산이 되니

유대인의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엉뚱한 가짜유대인이 발산되는 겁니다.


우연이 끝까지 우연이어야 하는데 우연이 필연이라고 우기니 우연의 우연으로 더욱더 간격이 벌려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역으로 뒤짚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누가복음의 이방인을 향한 복음증거에서

정작 오늘 본문은 이방인에게 복음증거하는게 아니라

제자들에게 복음증거 합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 했잖아요

그런데 또 누가복음에서까지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즉 제자들이 유대인이라고 자꾸 우기는데
정작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이방인의 자리에 앉혀서 복음증거하는 겁니다.
처음자리인 빈터에 앉혀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이방인으로써 이 예수님의 복음을 새롭게 들어야할 판국인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누가 그 짐승같은 개같은 자리로 가고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그런 취지를 모르고 자꾸 예수님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유대인의 특권을 발휘해야 하는냥

예수님께 보탬이 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것이 도리어 방해꺼리입니다.

그럼 방해꺼지 짖을 하지 말아야 겠구나?

아니지요.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두시면

이것 조차도 주님이 어떻게 감당하시는가를 봐야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래나 저래나 자기 멋대로 할 뿐이고

예수님은 예수님 뜻대로만 하실 뿐입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의미는 이스라엘 조차도
모세 조차도 엘리야 조차도 마련할 수 없습니다.
그 숙제는 끝까지 예수님 손에만 달린 문제임을 누려 누려 누려 ~~~~~~~~~


자 지난 시간처럼 예수님은 또 자신의 죽음을 사건 사건 마다 깔아버립니다.

죽음의 예루살렘행을 언급하십니다.


이 의미를 지난시간에도 살펴 봤지만 제자들은 자꾸 오해 합니다.

아 예루살렘행이 예수님의 최종목표이니까?

이 길을 가로막는 자는 다 망해야 해 라고

엘리야 사건을 떠올리면서


(눅 9:51, 개역)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 9:52, 개역)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눅 9:53,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눅 9:54, 개역)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저 사마리아를 불태워 버리자 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의 승천을 위해
보탬이 되자 라는 식입니다.

사실은 이것은 유대인의 사마리아에 대한 평상시의 감정을 표출한 것이지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였습니다.


바로 그것을 들켜야 하는 겁니다.

정작 예루살렘을 불태워 버리자 라고 하면

저들은 예수님을 오히려 죽일려고 할 겁니다.

누가? 제자들이 말입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모르지요.

알려주질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수시로 알려줬습니다.
문제는 들을 귀가 없기에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아무도 알아먹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런 행동을 할까요?

예수님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왜 이들에게서는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오히려 예수님께서 유도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그겁니다.

이미 예수님이 알려주기도 전에

이들에게 심겨진 해석들이 있는 겁니다.

엘리야 사건을 지금 끄집어 내어서 사마리아를 불태워 버리자 라고 했듯이


이미 이들에게는 심겨진 해석들이 있는 겁니다.

이것을 들켜야 하는 겁니다.

유대인 전체를 대표로 해서

제자들이 지금 들켜야 하는 겁니다.


정작 그 불태워져야 하는 존재는 제자들 자신이고

엘리야 이고

사마리아 라는 짐승의 땅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구원의 땅이어야 하는 겁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한 이유가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했던 이유가


요나의 표적에 부딧혀버렸기 떄문입니다.


요나 선지자 본인이 니느웨성이 빨리 무녀져 불타 없어져 버려라 라고
성질 급하게 3일 길을 하루만에 후딱 돌아버리니까


정작 니느웨를 불태워버리는게 아니라
대머리 요나 머리를 불태워 버리니까 살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롬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9, 공동)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 ㉠신명 32:35.』

(롬 12:20, 공동)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 ㉠잠언 25:21-22.』

(롬 12:21, 공동)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


(김효은 집사님이 이 본문으로 질문했을때가 생각나네요.
정작 몰랐으면서 안다고 했던 그 내용들이 지금 보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덕분에 이 말씀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늘 맴돌았는데)

자꾸 자신들이 선지자 이다 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에 예수님의 회개 곧 용서하심이 덮치니까
그 용서가 선지자로써 요나는 선지자됨을 버리고 도리어 선지자에게 추궁당해야할 판국인데
왜 날 선지자로 왜 세웠냐고 따집니다.
차라리 죽여라 라고 말이죠.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우깁니다.

자꾸 자신들은 유대인이다 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저들은 거짓선지자요 개같은 이방인이다고 하는 겁니다.
망해야 할 짐승이라고 우깁니다.


이것이 바로 부딧혀 깨어져야 하는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에 걸려 박살이 나야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너야 너 

너가 짐승이야

너가 불타야 돼

너가 망해야 해

라고 하는 겁니다.


남이 망하고 불탈려면

정작 자신은 안전빵에 놓여 있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모세가 왜 변화산에 나타났습니까?

엘리야가 왜 변화산에 왜 나타나야만 하느냐고요?

이 부딧히는 돌을 예루살렘에 두라고 요청하기 위함입니다.


어 그러면 제자들의 요청이 맞잖아요?

요 며칠전에 변화산에서 벌어진 사건을 봤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정작 그 변화산에서 단절성을 느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려와서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요청에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놓고서는 오늘 본문에 귀신들린자를 예수님 이름으로 물리치는 자들이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일을 못하도록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꾸 예수님 위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본인 위주의 시선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해석한다는 겁니다.


아 이거 우리가 어쩔수가 없습니다.

몸이 내가 한 일을 기억합니다.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지킬려고 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이런 지적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지적 속에 놓이고

같이 들통나야할 입장입니다.


내가 정당한데 어떻게 예수님이 옳겠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게 낫습니다.

제발 예수님 믿지 마세요.
제발 예수님 사랑하지 마세요
제발 말씀 지키기 마세요

왜?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못 믿는 겁니다.


내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요
고치시는 주님의 일을 못 보는 겁니다.

정작 실로암 소경은 예수님을 봤는데

눈뜬 우리는 예수님을 못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여기는 나의 정당성을 깨부수는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즉 믿음이란 내 믿음을 깨부수는 예수님이 믿음 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믿음이다는 것은 늘 나는 가짜 믿음으로 들통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 쪽팔리게 굴욕당하는 무시당함을 당하는 일 말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가 얼마나 니느웨 백성에게 무시당했습니까?


제대로 찔렀고 그 상처가 제대로 깊숙이 박혀 버렸기에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자살 할려고 땡깡 부리는 겁니다.


모세도 그랬고


특히 열심히 특심이니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우기는 엘리야도 그랬고


그렇게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우기는 7천명이 남겨지는 


이 상황이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뚜껑열어 승천하시고자 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악마성 엉터리믿음을 부딧히는 돌에 부딧혀야하는 그 사건

그 십자가라는 그 창에 찔려야 하는 겁니다.


상처는 그 찌른 창에 의해서만 치료되는 겁니다.

상처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겁니다.


우리는 병자입니다.


모세도 병자입니다.

모세 믿는 종교 세워서 뭐하게요? 모세 제자?

사람을 선생으로 두지 마세요! 모세도 탈락되는 판국입니다.


엘리야? 승천했지요?

그 그림자 지금 예수님께서 보여주시잖아요!


그런데 엘리야 승천사건을 얼마나 엉터리로 해석했는지


아니! 그림자 답게 제대로 그림자 해석을 했는지

실상 앞에서 들통나야만 하는 해석을 제대로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입니다.


불태워서 제자들은 엘리야처럼 승천하고픈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요나처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해석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는 안된다고

정작 사마리아가 아니라

예루살렘

곧 유대인

곧 제자들을 불태워 버리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방해하는 자는

엘리야의 승천을 방해하는 자는

바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엘리야는 없다니깐요

엘리야는 지금 제자들에게 무시 당하고 있습니다.


아니 언제요?

지금 제자들은 엘리야를 높이고 있잖아요?

높이고 있다면 왜 예수님을 무시할까요?

그 엘리야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러니까 예수님을 높이고 있다니깐요?

바로 그것이 베드로가 사탄아 라고 욕먹는 것처럼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은 꾸지람을 듣고 있는 겁니다.


이 간격을 제자나 모세나 엘리야가 좁힐수가 없습니다.


교회(예루살렘)와 십자가(요나의 표적)은 양립불가입니다.

오히려 그 간격을 뼈저리게 실감할 정도로 그 간격을 누려야 할 판국입니다.

돕는다는 것이 오히려 방해하니까 말입니다.

좋은 의도들이 크게 벌받는다는 겁니다.
의도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좋은 의도든 나쁜의도는 몸이 의도를 가지겠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몸 자체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의도를 담을수 있는 그릇인 몸을 아예 없애버리는 겁니다.

인간이란 없듯이, 유대인이란 없습니다. 의도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있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졸지에 저들 사마리아를 짐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자기는 안 망해야 하는가? 좋은 의도를 가진 제자들이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까?


니느웨가 망해야 한다굽쇼?

이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에게는 안 통하는 겁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이방인 품성을

짐승의 품성을


포로되었다고

갇혔다고

억눌렸다고


예수님께서 도리어 제자들을 이방인 만들어서

너 주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지?


너도 주의 이름을 부른적 없잖아
너도 믿은적 없잖아
너도 사랑한 적 없잖아
너도 말씀 지킨적 없잖아


그런 원수인 너를
그런 죄인인 너를
그런 환자인 너를
그런 짐승인 너를

그래 내가 부를 수밖에 없도록 해 주마 하고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 박살이 나는 거죠. 이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자기가 악한데 남보고 악하다고 한 그 마음을 부셔버리고 불태우시고자

예수님은 지금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 겁니다.

자기가 마귀인데
자기가 괴물인데

남보고 괴물이라고?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으로 꽉 차 있는 것은 정작 우리 자신들입니다.

얼마나 심각한지?

요나의 표적을 갈망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누가복음 10장으로 넘어가면

정작 예루살렘을 애굽의 장자로 취급해서

그 예루살렘 주변의 도시 하나 하나를
이 장자를 보호하는 보호막으로써 쳐진 10개의 보호막장치를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하나 하나씩 조목 조목 깨부셔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예루살렘이 당해야 하는 판국인 겁니다.

예루살렘 뺴놓고 나머지 불태워서 뭐하게요?

알맹이 빼놓고 껍데기 태워본들 소용없잖아요?


진짜 불태우는 심판은 예루살렘에서 입니다.
사마리아가 아니라

제자들 본인이 원수인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이 공간성은 마치 인간의 육체로써

마음판의 할례를 위해 그 마음의 주변인 팔 다리 하나 하나를 부수고 들어가는 식입니다.


즉 사마리아만 불태움 당해야 하는게 아니라

예루살렘도 불타야 한다는 겁니다.


제자들 본인들도 회개해야한다는 겁니다.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발리지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회개 되신 예수님이 덮쳐지지 않으면 안될 판국인 겁니다.(니느웨 백성처럼)

왜?
불타야 하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꾸 자신을 죽음을 자꾸 그 바탕배경으로 까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보는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인 부분에서 자꾸 자신감을 드러내더라 말이지요.

정작 할 줄 모르는 불가능한 부분에서는 쑥 들어가면서 말이지요.


이런 우리의 본성을 늘 지적 받는 그 관계가 있기에

우리는 막살지 않고 싶어도 막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막살지 않으면 또 나는 저들과 다르다 라고 자꾸 장담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정당한데 어떻게 예수님이 옳겠습니까?


3일이라는 간격을 자꾸 후다닥 하루만에 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단절성을 자꾸 개방성으로 바꿀려고 말입니다.
양립불가를 자꾸 양립가능으로 바꿀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꾸 죽음을 깔 듯이 인자는 죽어야 하느니라 라고 자꾸 말끝마다 하시는 이유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우리는 정당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의도 자체가 없기에, 즉 우연이기에, [없음]을, 불가능성을, 단절성을 
자꾸 있다고 [있음]으로, 가능성으로 바꾸는 순간 제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이스라엘 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의미를 정작 이스라엘 본인들이 단 하나도 이룬적이 없습니다.

모조리 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매 순간 순간을 이루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에게서는 이 이스라엘의 의미를 철저하게 단절성인 우연입니다.


그런데 그 우연을 자꾸 있다 라고 있음으로 바꾸는 순간

쭐꾸덕 미끄러지는 겁니다.

좋은 의도로 바꾸는 순간 크게 벌받는 겁니다.

그러면 매라고 우연으로써 감사하면 될 것인데


매가 비로소 사생아의 본색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감사라는 그 단절성이, 그 우연성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또다시 때릴 것 뻔한데 뭐가 감사하냐 라는 식이지요.

그래서 완악케 되는 겁니다.

아무리 완악하고 싶지 않아도 완악케 만드시는 분에 의해서 말입니다.


모조리 주님의 의도만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겁니다.

들통나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밑바탕으로 깔지 아니하면 안되는 겁니다.


예수님도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는데 뭐가 심각하냐? 라고 되묻게되면

우리들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심각한게 없게 되는 겁니다.

이 우연의 우연의 간격을 누릴 뿐인데


심각하게 되어버리면 자꾸 그 간격을 좁힐려는 완악함에 빠지고

시험에 들게 되는 겁니다.

회개도 주님이 이루셔야 하는 겁니다.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내가 이루면
또 회개한 내가 정당하게 되는 겁니다.

뭐든지 우연의 우연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행함으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겁니다.


미쁘심은 오히려 그 간격을 쭈~쭉 쭉 쭉  쭈 쭈 쭉 쭉쭉 늘어난다 늘어나.
그 간격의 단절성이 더욱더 선명하게 벌어지는 것을 누리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편에 섰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다 넘어져 버리고 (회개는 커녕 완악케 되고. 맏아들)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은 불 태움에 마땅한 자리에 놓여진 자는

니느웨 백성처럼 긍휼함을 입게 되는 겁니다. (회개가 덮쳐져 회개가 넘어오는 겁니다. 탕자)


제자들은 요나처럼 삐치던가? 자살소동을 벌리던가? 반항해 보세요!

아니 뭐 그리 새삼스럽게 반항을 새롭게 펼칩니까? 이제까지 늘 반항했는데?


그런다고? 3일 이라는 간격이 좁혀질까요?
양립불가가 양립가능이 될까요?

우연의 우연이 필연이 될까요?

누구 마음대로?


오히려 예수님의 이런 요나의 표적에 말려들기 작전에 걸려든 것을 감사해야 겠지요.

감사하지 말라고 말려도 너무 너무 기뻐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동네사람들아 ~~~ 내 죄를 아는 선지자가 떳다 라고 우물 바가지를 던져버리고

미친 듯이 춤추며 기뻐할 것입니다.


누가 말리겠습니까? 봐 버렸는데!!!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서 여호와의 영광을 봐 버렸뿟네


내 눈은 이제 타버려도 어쩔수가 없구나

내 몸뚱아리는 그 영광의 빛을 감당하지 못해 녹아버리니 어쩔수가 없네


얼씨구 지화자 좋네 얼씨구나 절씨구 ~~~~~


예수님이 왜 머리 둘 곳이 없으셔야만 할까요?


다들 안 망해야 한다는 정당성만 자꾸 들이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 둘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초막 셋을 지워주겠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머리를 두겠다는 그 정당성은
처음부터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마귀들이 다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머리 둘 곳 생기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따로 처소를 마련하십니다.


하도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이 땅은 다 불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예수님이 머리를 두실 수 있을까요?
아무리 깨끗하고 거룩하게 청소해도

예수님이 머리 두시기를 싫어하십니다.


그 정도로 자기 정당성만 추구하기에

주님이 직접 청소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폐역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폐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굽의 10개의 우상으로 보호막을 치면서

자기 정당화 하며 나의 장자 됨 나의 부활됨 나의 구원됨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거 하나 하나 무너뜨리시면서 고라 라는 팔을 짜르고

벳세다 라는 다리를 불태우고

소돔이라는 목을 치시고

두로라는 심장을 찌르시고

시돈이라는 창자를 밟아버리시면서


자신의 머리 둘 곳인 처소를 만들고자


나 라는 장자를 죽이고자 다가오시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만이 이 심판을 패쓰하듯이

예수님은 잃어버린 이스라엘 자기 양을 찾기 위해

자신의 피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땅 끝까지 깔아버리시는 겁니다.


비로소 우리는 그림자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이 요나의 표적이 안 기쁘고 배기겠습니까?


그 끝을 매일 매일 당겨서 사는 잉여의 초과과잉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과거를 기억하든 말든

이 몸을 애굽으로 삼아 쳐들어오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내가 내 스스로 보호하고자 했던 내 보호막인
나의 신앙(개구리 신) 나의 충성봉사(흑암 신) 나의 믿음(메뚜기 신) 등등이

도리어 올무가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살로 등 떠밀려고 하듯이 밀어붙일때에

이 심판에서 건져내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비로소 모세는 뻔뻔스럽게도 예수님이 죽어 주셔야만 합니다 라고


그 간격을 쫘악 벌리는 겁니다.


평생을 간격 좁힐려고 했던 그 엉터리 시선을


이제는 그 간격의 단절성이 옳았다고 외치는 겁니다.

머리 둘 곳이 있게 되면 안되기에 (교회도, 나도)

절대로 머리 두실 곳이 없도록 


이 땅에 심판을 까시는 그 놀라운 섬김을 우리는 그저 공짜로 누릴 뿐입니다.
































                 

 






무능함을 영접하라? (눅 9:40-48)

2013/12/15 11:31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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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함을 영접하라? (눅 9:40-48)



(눅 9:40, 개역)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눅 9:4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눅 9:42, 개역)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눅 9:43, 개역)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눅 9:44, 개역)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눅 9:45,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눅 9:46, 개역)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눅 9:47, 개역)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눅 9:48,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선물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기쁨이란 심적으로 볼 때 상승작용입니다.

반대로 슬픔은 심적으로 하락작용입니다.


기분이 업 되고 격양이 되면

기쁨이 되고 웃음이 되고 신나는 즐거움이 됩니다.

노래가 그런 식으로

아픔을 잊을 정도로 작용하는 고통을 싹 잊게 하며

즐거움이 되고 합니다.


아무리 주변 상황이 웃음이 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미소와 웃음이 나오도록 노래가 되며 즐거운 신나는 기쁨이 된다는 것은

그때의 환경의 전복

즉 기쁨의 요소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전혀 이 두 요소가 안 맞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이 그러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슬픔입니다.


죽는데 누가 기뻐해 보세요

누가 웃어 보세요

예의도 아니며 버릇없고 싸가지 없음이 되는

반대의 상황이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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