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행 죽음행  어찌하던지 복음증거 (행 21-22장)


원수의 성문 열기 – 악마성을 여는 편애 받은자 (마귀 자녀들에게 지독히 미움받는자)



(창 24:59, 개역)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창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행 21:1, 개역)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행 21:2, 개역)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행 21:3, 개역)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행 21:4, 개역)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행 21:5, 개역)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행 21:6, 개역)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행 21:7, 개역)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행 21:8, 개역)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행 21:9, 개역)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행 21:10, 개역)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행 21:11, 개역)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행 21:12, 개역)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 21:13, 개역)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4, 개역)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 21:15, 개역)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행 21:16, 개역)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행 21:17, 개역)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행 21:18, 개역)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행 21:19, 개역)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행 21:20, 개역)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행 21:21, 개역)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행 21:22, 개역)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행 21:23, 개역)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행 21:24, 개역)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행 21:25, 개역)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행 21:26, 개역)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행 21:27, 개역)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행 21:28, 개역)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행 21:29, 개역)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행 21:30, 개역)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행 21:31, 개역)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행 21:32, 개역)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행 21:33, 개역)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행 21:34, 개역)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행 21:35, 개역)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행 21:36, 개역)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행 21:37, 개역)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말을 아느냐』

(행 21:38, 개역)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행 21:39, 개역)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행 21:40, 개역)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행 22:1, 개역)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행 22:2, 개역)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행 22:3, 개역)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 22:4, 개역)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 22:5, 개역)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행 22:6, 개역)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행 22:7, 개역)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22:8, 개역)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2:9, 개역)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행 22:10, 개역)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행 22:11, 개역)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행 22:12, 개역)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행 22:13, 개역)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행 22:14, 개역)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 22:15, 개역)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행 22:16, 개역)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 22:17, 개역)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22:18, 개역)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행 22:19, 개역)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행 22:20, 개역)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행 22:21, 개역)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 22:22, 개역)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 하여』

(행 22:23, 개역)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행 22:24, 개역)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행 22:25, 개역)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행 22:26, 개역)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

(행 22:27, 개역)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행 22:28, 개역)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행 22:29, 개역)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행 22:30, 개역)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오늘 아침에 뜬금없이 비몽사몽간에
마음판의 할례가 뭔가에 대해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을 하다가 잠이 깼습니다.


마음판의 할례란 기존의 할례 곧 손 할례, 육의 할례를 일단은 거부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나도 마음이 있고

너도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이라면 우리도 있다고 여기는데

그런 마음이 아니다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가난하냐 안가난하냐에 우리는 초점이 맞춰 지지만

정작 심령 자체가 없다면

가난하든 부하든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결국 심령 조차도 새로 심어야 하고 마음 조차도 새로받아야 하는데
누가 없다고 여기면서 이 말씀을 듣겠습니까?


즉 이 말들은 부정의 부정 곧 부정의 이중성이라는 겁니다.


마음이 없는 판국에 그 마음 조차도 할례를 한다면

없는데 없음을 추구하면 없음의 없음, 무의 무가 되는 겁니다.


없는것도 지금 불가능한 판국에 [없음의 없음], [불가능의 불가능]이 되는 겁니다.


불가능 자체가 우찌 손 댈수가 없는데 그런 판국에 그 불가능을 다시 이중적인 중첩으로 불가능이라고 하니?
이거 무슨 말 장난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말귀를 알아 먹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괜히 기적을 바라는게 아닙니다.

기적을 보여준 하나님 때문에 그들은 기적 기적 자꾸 기적이라고 나발을 불 수 밖에 없습니다.

보여준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불가능을 봤고 체험했고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고방식 자체가 아주 아주 다릅니다.


다른 민족의 기적은 기적 취급도 안해버립니다.


그들의 기적개념은 곧 구원관이요 선민관이요

그것도 애굽에서의 구원

지옥에서의 구원이기에

아주 아주 실질적입니다.


잡족이였던 히브리 곧 각국가 각각 민족의 포로된 노예들이
자기 민족과 자기 신들을 버리고
애굽신을 이긴 여호와를 그것도 믿기 싫어도 믿을 수 밖에 없도록 하신

그 기적을 베푸심에 의해서 믿게 된 자들에게서의 기적이기에
아주 아주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겁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심령입니다. 전혀 생각도 없던 마음이 생겨난 겁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현실적입니다.
반대로 애굽인의 눈에는 비현실적입니다. 아무리 애굽이 쫄딱 망해도 비현실이요 비인간적이기에 세월 지나면 다 잊고 삭제해 버리는 쓰잘데기 없는 겁니다. 왜 기여이 인간적인 것으로 채워서 복원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태양신 부활사상 불멸사상입니다. 모든 종교의 핵심교리, 심지어 기독교도 마귀집단인 이유입니다.)



그 어떤 기적도

땅에서 나는 양식으로 충만한 이방의 기적일 뿐이지(애굽 10 신들)
땅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을 주는 기적 곧 신은 여호와 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를 더욱더 부각시키기 위해
애굽의 10 신들을 치시고 주신 기적이기에 이 만나는 그야말로 구원의 상징입니다.


문제는 구지 신약에 넘어오지 않더라도

또 출애굽기에서 말라기 까지 넘어오지 않더라도

출애굽기 자체에서 이미 그 만나를 먹은 자들이 다 탈락 당합니다.


구지 그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세만을 봐도 그렇습니다.

구원자 대행업체 애굽지부 사장이였던 시내광야 지점장 모세 조차도

탈락할 판국인 겁니다.


본인이 주도했잖습니까?

그런데 본인이 탈락합니다.


두 번 바위를 쳐서요?

아닙니다. 두 번을 안쳤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탈락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신 겁니다.
왜냐? 모세탈락이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이 모세의 탈락이 되었어야만 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관한 사물 사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 바위 침도 결국 십자가가 소급해서 덮쳐진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벌린 겁니다.
이 시차적 간격을 좁힐 수 없습니다. 뒤로 무라서 물려서 다시 고칠수가 없습니다. 나비효과 영화처럼 안됩니다.


이 단절성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적이 연합성인줄 알았는데

연합은커녕 택도 없는

철저한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모세 조차도 일치 할 수가 없습니다.

동일성으로 가기는커녕 점점점 멀어지는 겁니다.


점 점 멀어지나봐 ~~~~~~~~


간격이 벌어지는 겁니다.

모세 조차도 자신의 원망의 증거물이 언약궤에 담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믿음? 택도 안됩니다. 차라리 담겨져서 그 위에 뿌려지는 피를 바래야 할 판국입니다.


도저히 못 좁힙니다.

모세도 안되는 판국에

백성? 택도 없어요 택도. 이스라엘 백성? 저들 욕할 입장이 전혀 못됩니다.


이것이 기적의 실제성입니다.
기적 자체가 단절성인데 졸지에 개방화 시키는 것이 인간의 믿음 곧 종교 아닙니까? 마약이죠.

기적이 얼마나 우연적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필연적이다. 구원적이다. 선민적이다 라고 오히려

그 철저한 우연성을 가리우고 있다는 겁니다.


기여이 돈으로 바꾸는 겁니다. 현실적인 요소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만나가 우연적이였음이

만나를 먹은 자들이 다 탈락 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 만나를 먹었다는 것이 필연화 되는 겁니다.

곧 만나를 주신 여호화를 정당화 해야하기에

그 정당성을 외치는 본인이 있어야 또 여호와가 정당화 되기에


이러니 여호와를 믿는 본인의 믿음이 자꾸 자꾸 정당화 되는 필연성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안그러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모세를 탈락 시킨 겁니다.

모세가 안되면 안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라고 예수님이 버림 받았다면 우리도 버림받음이 마땅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즉 불가능한 일이요

우연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우연을 어떻게 필연화 시킬수가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 우연을 우연 그대로 남겨두면 안되느냐 말이지요.


자 여기에 그 만나를 치는 예수님의 살과 피 라는 새로운 양식이 있듯이


우연을 자꾸 필연으로 만드는 버릇

어쩔수 없는 그 버릇 조차도

깨뜨리는 우연의 우연이 있기에


우연 그 자체로 내버려두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발 예수님을 제발 믿지말자.

제발 예수님을 사랑하지 말자.

제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자 말자


왜? 안지켜도 말씀대로 이루어지니까

안믿어도 믿어지니까

사랑안해도 사랑이 넘어오니까 말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요소에 비인간적인 요소의 간격이라고 합니다.

시차의 이중성인데


부활이 불가능하면서도 모든 인간은 이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즉 인간적인 요소입니다.


여기에 십자가라는 죽음은 모든 인간들이 싫어버린바 되는 거부의 의미입니다.
그 정도로 실제적인 보편적인 심판 저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실제적임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취급되고


부활은 반대로 가장 비현실적임에도 부룩하고 실제화 시키는 꿈이요 드림이요 갈망입니다.


십자가를 갈망하는 사람이 없듯이 말입니다.
즉 십자가는 이제 끝났으니 지나갔고 부활을 믿어야 한다 라고
오늘날 모든 목사들이 사기쳐서 장사하듯이
십자가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겁니다.
비인간적인요소인 겁니다.


그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3일이라는 간격

이 간격을 모세도 좁힌적도 없고

시도 조차 할수도 없을뿐더러

모세 본인도 그 간격 벌리기에 이용 당하는 소모품이 되어야 할 판국입니다.

탈락했는데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럼 맞은 겁니까? 자신들은 실로암소경에게 너 누구 제자야? 난 모세 제자야

어딜 감히 예수 제자가 모세 제자에게 까불어 라고

유대인들이 모세의 구원에 대해 확신한 것이 맞느냐 말입니다.


당연히 틀렸죠.

모세 조차도 구원해야 하실 분이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모세를 통해서 내린 만나로는 통하지 않기에

그 살과 피를 모세가 먹여달라고 변화산에서 말한 의미 아닙니까?


결국 세상 사람에 비교해서, 이방민족과 비교해서 그 차이 간격으로 구원일지 몰라도

정작 그 참된 의미에서는 유대인 조차도 이방인과 똑같이 중언부언 기도하듯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할례 기도 안식 율법 성전 등등을 몸에 칭칭 감았던 겁니다.


그래서 4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은 오히려 이방보다 그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화된

현실화된 인간적인화 된 그 안식 기도 성전 부활 할례 율법 등등의 의미 하나 하나를

조목 조목 다 따져가면서 다 깨뜨려 버립니다.


다 깨뜨려 버리니

정작 아무것도 믿은 것도, 믿은 적도 없으면서 믿었다고 칭칭 세뇌시켰고

정작 아무것도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 사랑한다고 칭칭 세뇌시켰고

정작 아무것도 말씀 지킨적도 없으면서 지켰다고 세뇌시킨 그 최면술 마약들을


조목 조목 다 따져가면서 다 깨뜨리시는 겁니다.


안식일 논쟁이 벌어지면 그들 유대인의 안식 개념을 다 끄집어 내어놓고는

다 깨뜨려 버리고 자신이 안식이라고 해 버리니까


인간적인 안식일 개념이 비인간적인 안식은 곧 나 다 라고 아주 아주 불가능한 의미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는 바리새인

또 하나는 세리


바리새인은 얼마나 현실적인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의 기도는 자꾸 비현실적으로 비겁하게 비인간적인 누구의 긍휼을 자꾸 요청하는 겁니다.


자기 기도인에 자기 기도를 해야지?

왜 반칙을 저지르는 남의 기도를 요청하느냐 말이지요?

얼마나 비현실적이냐 말이지요?
기도 조차도 남에게 떠 넘기고 있으니!


내 믿음은 내가 믿어야지?

믿음이 예수님이다 이래 말해버리면

국어문법의 비현실화가 되고

내 믿음을 어떤 누구도 인정해 줄수 없는 그 모든 의미들이 공중에 붕 떠버리는 우연성이 되기에


실컷 필연화 시킨 그 공로는 우찌 되냐 말이죠?
공중 폭파 되는 쓰레기 배설물 밖에 되지 않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예수님이다 라는 그 말이 더욱더 미운 겁니다.

이 말만 없으면


안식이 내다 라는 말만 없으면


부활을 믿어야 할 판국에

부활은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는게 아니라

내가 부활이다 라는 이 말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이 도리어 내가 부활이다를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제사 잘 드린 가인에게서 아벨의 제사는 졸지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미래에서 덮쳐져서


[아벨 돌삐 맞아 죽음(현재)  <----  십자가의 죽음(미래)]

미래에서 인물(묵시)이 소급해서 덮쳐짐

과 연결 될 줄


무슨 수로 가인이 그런 제사를 드리느냐 말이죠.
차라리 그런 비현실적 보다 현실적인 제사로 드리는게 자기만이라도 만족이 되는 거죠.
무슨 수로 몇천년 뒤의 미래의 제사를 앞당겨서 드리냐 말이죠.

예수님의 마음대로 개입한 예수님의 문제인데??? 비현실적인 불합리한 분의 숙제인데.

결국 예수님 마음대로인데저런 제사를 무슨 수로 드리냐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제사를 필연화 시키고자 우연으로 만들어 버린 그 아벨의 제사가


도리어 우연의 우연으로 더 나은 제사로써 예수님이라는 인물과 연결 될 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결국 제사는 처음부터 예수님이라는 인물과 연결된 것인데

자꾸 자기자신을 연결 시킬려고 하니


안식 기도 사랑 율법 병고치는 능력 기적 이 모든 것들이

도리어 예수님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차라리 유대인만이 가지고 있는 그 고유한 것들을 버렸다면

차라리 빛의 자녀가 애초부터 아니였다면

소경을 고쳐주실텐데

자꾸 본다고 하니 소경인 겁니다.


유대인의 특혜가 도리어

자기부인을 하기는커녕

자기를 부인하는 능력이 자신들 민족에게만 있다고

자신들만이 그런 믿음을 가졌다고 우기는 바람에

예수님의 믿음에 툭 하고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서문을 길게 해 놓고서

본문으로 들어가 바울을 봅시다.


바울이 왜 죽을 것 뻔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거기에 누가 있는줄 뻔히 압니다.


지난 시간과 오늘 본문에서도 다들 말립니다.

거기에 누가 있는줄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려도 소용이 없다 라는 것을

저들 또한 뻔히 압니다.


이것은 사적인 개인적인 감정이 우선이 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왜 저기에 가야하는 줄

성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막고 싶습니다. 또 막습니다.

비록 막아서고 있지만

안된다 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내줍니다.


아니 보내준다는 것이 말이 안되지요?

자기들이 무슨 막을 권한도 없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장 한 두 장을 거쳐서 이렇게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비현실적인 것이 인간적인 현실성을 깨뜨린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들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번에 고린도까지 아테네에서 쫏아와서 고소했던 그 분노케 된자들과 대비해서

위로를 받은 성도들은 유두고의 죽음을 통해서 얻음으로써


이 둘의 간격을 두심으로써 차이를 둔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현실성을 깨뜨리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성도들도 바울을 막아야 한다는 그 인간적인 현실성이 깨어져야 하는 겁니다.


저들 예루살렘의 유대인만 깨어져야 하는게 아니라

이들 성도들의 현실성도 깨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비현실적인 십자가 죽음이라는 진짜 현실성입니다.
우연을 더욱더 우연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인 예수님이 조목 조목 다 깨뜨렸던 의미처럼

성령은 바울을 가차없이 예루살렘으로 집어 넣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에 가니 역시나 그 동안 격었던 일들이 다시 반복해서 재현됩니다.

아시아 고린도 등등 여러 도시로 가면서

유대인들이 모인 회당을 수셔대었듯이

그리고서는 이방의 신들을 수셔대었듯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죽이든 말든 다짜고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 이유는 유일한 걸림돌은 십자가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저들의 인간적인 요소를 깨뜨리는 비인간적인 비현실적인 요소는 유일하게도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끈합니다.


고린도에서도 그랬고 아시아, 아테네도 그랬고

그 모든 인간적인 요소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끊어내는 단절성입니다.

끊어내지 않는데 어떻게 연합이라는 세례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왜?

할례를 했는데 왜 끊어내냐?

십자가를 거부하는 그 마음을 단절 시켜버리는 겁니다.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왜?

십자가는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해석을 해도 지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쓸모짝도 없다는 겁니다. 어떤 누가 약함과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자랑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인간적인 요소에 비인간적인 예수라는 약속은 뻔뻔스럽게도 자랑하더라 말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인과 유대인에게 외칩니다.

수셔대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듣기 싫을 까요?

걸림돌인데?

거리끼는 말인데?

이방인들게는 전혀 쓸모짝도 없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자기 목숨을 걸고 하니 말입니다.


왜 이런 쓸모짝도 없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에 목숨 걸고 전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십자가의 죽음을 자꾸 듣기 싫은데도 외치는 것일까요?


오늘날로 치면 예루살렘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뚜껑을 여는 겁니다.
자꾸 열받게 듣기 싫은 걸림돌의 말만 하는 겁니다.
로마인에게는 이 유대인들이 시장경제를 창출하는데 이용꺼리입니다.
세금만 쪽쪽 발아먹으면 됩니다.
그러니 저들의 치안을 담당해주고 돈 받아 먹으면 그만입니다.

소동이나 국가에 대한 도전만 없으면 되는 겁니다.

얼마나 상부상조의 이익관계입니까?


그런데 겁도 없이 사도바울이 거기에 끼여들어가

쓰잘데기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외칩니다.


이미 여러 도시에서 그 말만 하다가 쫏겨나고 도망치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고편이였습니다.


이 예루살렘이라는 본방 때문에 격은 일들입니다.

이 본격적인 본방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유대인의 아지트요

구원의 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에게서는 원수의 성문입니다.
지옥의 문이 열려야

그 악마성이 들통이 나야

십자가라는 의미가 적용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악마성이 드러나지 않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쳐다보겠습니까?


사도바울 본인도 그렇게 들통나서 십자가의 은혜를 쳐다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의도를 저들이 알겠습니까?

바울 본인도 몰랐었는데?


그러니 바울은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듣든지 말든지 어찌하든지 본인이 십자가로 인해 건짐을 받았듯이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게 아니라 – 그렇게 되면 또 임금 삼을려고 밤낮으로 쫏아오겠지요?

오히려 그 반대로 심판이라는 단절성

즉 비현실적인 비인간적인 요소인 약속을

만나 약속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약속을 그 땅에 박는 겁니다.

만나는 심판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다 만나 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임금 삼을려고 벼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줄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오히려 요나의 표적을 줘야 합니다.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너는 백번 만번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버리시는 그 단호한 단절성

죄를 싫어하시는 그 거룩성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았다는 겁니다.

너가 달려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을 대신 박았다는 겁니다.

아니 아무런 잘못 없는데 왜죠?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쓸모 없다는 겁니다.


왜? 유대인은 자꾸 필연화 하는 겁니다. 인간적화 하는 겁니다.

구원도 성전도 율법도 안식일도 할례도 기도도 헌금도 봉사도 다 인간적화 하는 겁니다.

우연의 의미를 교묘하게 필연화 시키는 인간적화하는 요소애

거기에  우연의 우연으로 예수님이 더 나은 의미로
구원 안식 성전 율법 기적의 의미를 더 잘 외치니까 졸지에 미워 죽는 겁니다.
그래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우연성을 깨뜨려야 필연화만이 남게 되니, 아벨을 죽여야 가인의 제사만 남게되니

졸지에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에 말려들어서

더욱더 우연의 우연이 되고 말아버린 겁니다.

없애기는커녕 더욱더 공포로써 제거할수 조차도 없는 마음판의 할례로 꼿혀버리게 되는 겁니다.
우연의 우연으로 자기들이 만들어 버렸으니 평생 걸림돌입니다.


동시에 이방인에게는 왜 남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냐 말이지요?

쓰잘데기 없습니다. 그런다고 인간이 달라지냐 말이지요. 택도 없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현실적인 요소에

비인간적인 비현실인 십자가는 기여이 자신의 믿음을 달성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보내셔서 죽이실려고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다들 바울을 막을려다가 성령의 뜻을 듣고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고자 하시는 성령의 뜻에 동의를 합니다.
죽을 것 뻔한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악한세대가 원하는 기적은
바로 죽음을 멀리하고
복받고 사랑받고 생명이 넘쳐흐르는 것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멀리 멀리 간격 띄우기입니다.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그 반대로 요나의 표적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가까이 함으로써 나의 죽음을 늘 마땅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은 나의 생명을 멀리 머리 간격 띄우기입니다. 얼마나 비현실적입니까?


여기에 오늘 바울이 동원이 되어서

똑같이 그 십자가 사건을 재현 합니다.
요나의 표적 무한 반복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또 들먹입니다.


물론 온동네 다 수셔대놓고 얍삽하게 주님께서는 바울을 뒤로 빼돌립니다.


그리고서는 로마에서 죽이십니다.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바울은 죽어마땅하다는 겁니다.
왜? 죄로 당연히 죽는 거지만진짜 생명은 예수님만 살아 있으면 된 거다 라는 겁니다.



자 결론을 맺겠습니다.


로마에서 결국 죽이신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일들이 이방인이 보기에 어리석은 짖 아닙니까?


왜 이런 쓸데없는 짖을 할까요?

원수의 성문 열어서 뭐하게요?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칭찬받을려고?

그까짓 칭찬받는 것 때문에

사람 목숨 완전 파리 목숨 아닙니까?


더 이상한 것은 그렇다고 수셔댄다고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발끈하는 이유는 또 뭘까요?


왜 이런식으로 갈라놓는 일들을 펼치는 이유는 또 뭡니까?


십자가? 그까짓거 믿어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런 소동들은 다 잠잠해지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일들을 벌리는 것입니까?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한 똑똑 하는 유대인들도 지금 다 말려들어간 상태입니다.


바울 하나 들어가니 다 벌때까지 달려듭니다.

왜 이렇게 예민할까요?

그렇게 똑똑한 유대인들이 왜 이 바울 하나에 다 넘어지는 겁니까?
딸랑 한 명인데?
필연도 아닌 우연인데!

진짜 제대로 걸림돌에 걸려 다 넘어지는 겁니다.


그동안 그렇게 자랑하던 인간적인 요소인 유대인들의 믿음체계들이

이 바울 하나에 본색이 다 들통나 버리는 겁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본인들이 응시물로써 이스라엘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도바울이라는 응시물에 다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정말 정말 이해가 안되죠?


그래서 유일한 답은 십자가입니다.


너는 무조건 틀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겁니다.


유대인들도 거리껴하는 이 십자가를 감사할수 있겠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은 바로 이런 십자가를 남이 아닌 나에게 들이대는 겁니다.


이방인의 시선처럼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를 들이대는 겁니다.

과연 이 지혜가 참으로 옳다고 자랑하며 즐거워 하며 기쁘게 외칠수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의 가면들을 벗겨낼수가 없다고 합니다.


종교라는 마약

강하고 힘센 지혜롭다는 최면의 세계에서


우리는 그 꾀임에서 벗어날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건져달라고 해야 할 판국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건져달라고 하는 자 조차도 없는 세대임을


이 예루살렘 행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건져달라는 구원이 아니라

그 반대로 복된 기적을 추구하는 유대인에게

저주의 저주인 십자가라는 반대방향을 곧 하나님의 저주 심판을 증거하고


지혜로움을 추구하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라는 반대방향을즉 전혀 인간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없는

철저하게 비인간적인 비현실적인 아무도 찾지도 않는 그 요소를


그것도 간격을 좁힐수 조차도 없도록 더욱더 벌려버리는 그 십자가를 외치는 겁니다.


구원은커녕 버림 받아야 

죽어 마땅함을 누가 봐도 저 놈 죽어 마땅해 라는 자를

이 십자가의 긍휼로 용서하는 예수님 자신의 피를 높이는 증거삼는 겁니다.
그러니 더욱더 우연의 우연, 부정의 부정이니 보기만 해도 죽이고픈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그 자가 바로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구원받은자로써 외치는 포교활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순교할려고 예루살렘에 가는게 아닙니다.

제발 순교하지 마세요.

이미 죽었는데 뭘 또 죽어요? 종교영웅 되어서 뭐하게!!

내 때문에 심판받은, 내가 심판한 그 분의 심판을 증거하는 겁니다.
심판의 심판입니다.

우연의 우연입니다.

그리고서는 기쁨으로 나 봐라 나 제대로 심판 받은자 이다 라고 합니다.

이런 나를 제대로 심판 하신 분의 그 심판을 함께 받자 라고 말입니다.

참 뻔뻔하죠? 스데반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고 다 죽여놓고
이제는 같이 죽자 라고 그 심판을 받으라고 하니?
심판을 철회하는게 아니라

더욱더 그 심판의 저주를 확장 확대 증폭 시키는 겁니다.
그 심판이 옳았다고!!

그 세가지 물증이 옳았다고!!

내가 예수 믿기에 이렇게 정당한데 어떻게 죽어야 함이 마땅할수 있다는 겁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옳으심이다면 아무연고 없이 심판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는 믿기에 내가 옳으면 예수님이 옳을수 있겠습니까?
그냥 이유없이 무조건 죽어 마땅함은 바로 예수님의 옳으심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루살렘에 깔아버리는 겁니다.
바울 자기는 죽든 말든 아예 신경도 안씁니다.


믿으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심판 받아라


죽어 마땅한 자 여기 여기 붙어라 라고 말입니다.

왜?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자요 심판받은 상태인 겁니다.

유일하게 안 죽은 분

아무리 심판해서 죽여도 안죽고 살아 있는 분

유일하게 산 자, 예수님만 있으면 됐다는 겁니다.


그 살아 있는 분을 외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이미 죽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분을 외치는 겁니다.

분명 죽었는데 살아있다고 외치고 있고 (비현실적이지요 !!)


그러니 거리낌이지요.


분명 우리는 살아 있는데 자꾸 죽었다고 취급해 버리는
그러니 쓰잘데기 없는 소리인 거죠.


그 십자가만을 유일한 현실이라고 예루살렘에서 외치는 겁니다.


이 뚜껑이 확 열리면

우리의 실상 즉 살았다고 우기는 것들이나
나 아직 안 죽었는데? 라는 것들이


실상은 죽어있는 모습들이 다 들통나고


또 반대로


죽은자 같은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은 죽은자 같으나 믿음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이 비현실성을


바울은 간격을 쫙 쫙 늘려놓는 겁니다.


이 간격 좁힐자 있으면 나와보라 라는 식으로

너무 너무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자신이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죽일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 예수님을 자기가 죽여놓고 살았다고 외치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때는 언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비로소 그 간격을 이제는 넉넉하게 늘리면서

당당히 외치듯이 말입니다.

이 간격을 저들에게 외치는 겁니다.

늘 마지막 유언장처럼 ....




















 

















유언장 같은 복음 (행 20:13-38)

2013/12/11 11:5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유언장 같은 복음 (행 20:13-38)


매일 매일이 항상 마지막인 기쁜 소식 (하루살이 복음)



(행 20:13, 개역)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행 20:14, 개역)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행 20:15, 개역)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행 20:16, 개역)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행 20:17, 개역)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행 20:18, 개역)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행 20:19, 개역)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행 20:20, 개역)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행 20:21, 개역)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 20:22, 개역)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 20:23, 개역)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4, 개역)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5, 개역)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행 20:26, 개역)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 20:27, 개역)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8, 개역)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9, 개역)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 20:30, 개역)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 20: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32, 개역)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3, 개역)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행 20:34, 개역)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행 20:35, 개역)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6, 개역)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행 20:37, 개역)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행 20:38, 개역)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람이 미래에 대해서 불확실할때에는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일들과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를 한번 미리 당겨 봅시다.

무슨 수로 미리 당겨 보느냐고요?바로 그겁니다.

그것이 우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미리 당겨 보는 것 조차도 시도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의 내용이 심판에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분노케 된 유대인과의 대비에서 온 구조 판대기 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이 벌리신 거룩 사건이

저들과의 차이 차별을 두기 위해서

분노한 자들과 대비해서 상대적으로 차이를 두는 방식이

죽음으로 인한 위로 라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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