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 보다 더 나쁜 단절의 단절 (16:19-31)

 

김대식

7월 29


(16:19, 개역)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16:20, 개역)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16:21, 개역)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16:22, 개역)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3, 개역)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4, 개역)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16:25,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16:26, 개역)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7, 개역)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8, 개역)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9,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30, 개역)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1, 개역)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 되지 말고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 그러면 바리새인 되고 거지나사로 되지 말자?

 

그것도 아니지요.

 

거지나사로는 정작 뒤로 빠집니다.

빠지고

아브라함과 지옥간 부자와의 논쟁이 이야기의 전체를 말해 줍니다.

 

즉 바리새인 되지 말고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는 주장 자체가 이미 가능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결국 지옥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요청하는 것 자체가 가능성을 계속해서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너 지금 제정신이니? 지옥 가도 정신 못차리는 구나!!!

이게 지금 가능성의 이야기로 보이니?

불가능성의 연속이요 불가능성의 무한 반복인 단절의 단절이야

 

부자는 지옥에 온 자신의 상태를 지금 나쁜 상태로 인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나쁜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선지자를 내 형제들에게 보내서 나쁜 지옥에 오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쁜 상태가 좋은 상태로 된다는 겁니다. 이런 가능성을 부여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요청한다고 되냐 하는 문제입니다
.

단절의 상황을 여전히 직시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쁘다는 단절의 상황에 더 나쁜 상황임을 직시 못하기 때문에

형제들 역시나 자신의 지옥행처럼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아니 복음 전해 달라고 하는 요청인데 왜 거절 단절 당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육적이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의 형제만 따로 챙겨야 합니까?

 

육이 단절 될려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해야 되지 않나요?

왜 구지 자기가족인 육의 혈통만 챙기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 가지고 있는 의식을 지금 지옥간 부자에게 빗대어서 지적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현재의 우리 모든 인간들의 생각을 이 지옥간 부자가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럼 바꿔 고쳐서 모든 이에게 복음 전할 수 있도록 선지자를 보내 주소서 라고 요청해야겠지요?

그러나 이미 선지자가 깔려 있는데 뭘 요청하나요? 별 걱정을 다 하는 거죠.

이미 수시로 선지자가 끊임없이 깔리고 있다는 겁니다.
왜? 가능성을 부여하고자? 아닙니다. 단절의 단절을 구체화 하고자 말입니다.

그러니 선지자가 어떤 존재인지 조차도 모르는 겁니다.

즉 거지나사로 조차도 선지자로 못 보는 겁니다.
본인이 그렇게 취급했듯이 여전히 말이죠.

 

즉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계속적으로 주장하는 점에서

오늘날 성화론자의 사고방식과도 똑같습니다.

 

즉 나쁜 것에 더 나쁜 것을 요청하지 못하고

자꾸 이 나쁜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좋은 것을 요청한다는 점입니다.

단절이 되니까 나쁜 상황이 되니까

내 형제들에게는 더 단절이 아닌 소통의 좋은 상황이 되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물 한 방울이 단절이 되니까 제발 이 상황을 격지 않도록 선지자를 보내달라는 겁니다.

소통을 원하는 겁니다. 개방이지요.
제발 내 형제들에게는 물 한 방울이 소통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런데 선지자를 소통의 가능성으로 본다는 자체가 부자나 바리새인이나

어떤 목사의 바리새인 되지 말고 거지나사로 되자 라는 주장이나

 

다들 한결 같이 성화론자들처럼 개방과 가능성의 소통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죠. 자본주의라는 종교 또한 마찬가지이구요.
끼리끼리는 소통하자는 거죠.

그래서 나쁜 상황에서 좋은 상황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 저들의 복음이다는 거죠.

 

그 반대입니다. 나쁜 상황에 더 나쁜 것을 요구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쫏아내고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집디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을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즉 귀신이 장악한 이 세상에서 귀신이 항복하게 되니까

이 얼마나 희망이요 가능성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현실이 아니라

진짜 현실은 가장 비현실적인

창세전에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이 현실 보다 더 현실적인

비현실로써의 복음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기뻐할 것이다는 겁니다.

(눅 13:1, 개역)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 13: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 개역)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빌라도 손에서 건져내 달라고 구원자로 오신 주여 라고 요청하니

오냐 빌라도 손에 건져 주마 라는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단절되고 더 나쁜 상황이 되도록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지롱

이라고 단절의 단절이 기쁜 소식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데요 와 기쁘다 라고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진짜 복음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나쁜데 더 나쁜 상태 가 바로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죽는데 더 죽는 상태 죽으면 죽으리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일체 접근 단절이 되는 거지요.

 

내가 구원받아야 하고 내 기도와 요청으로 형제들이 구원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기쁜 소식인 복음이어야 하는데

 

하나도 안 기쁜

전혀 안 기쁜

 

빌라도 손에 예수님이 죽으러 왔다는 것이 기쁜소식이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이건 뭐 입도 못 띠도록 한다는 거죠.

헉 !!!!

 

막혀 버리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소통은커녕 불통의 불통입니다.

 

안 통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죽기전의 땅의 모습은

부자는 좋은 것으로 상대적인 거지나사로는 고난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말이 고난이지 거지 치고 고난 안받는 거지 있습니까?

모든 거지는 그럼 천국 갑니까?

이런 주장을 펼칠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상대적인 대조이기 때문입니다.

부자 와 상대적인 거지나사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지나사로의 상대적인 좋은 것에 대조되는 고난이란

고난이란

사실상 뒤에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편파적으로 붙여 버린 겁니다.


편파적인 해석을 붙여버린 겁니다.
 

즉 우리가 객관적인 판단에서 고난이 아니여도 고난 일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께서 일방적인 해석을 했다는 겁니다.

 

지난 주에 말했지요

7천명

 

아무리 이스라엘 탈탈 털어도 7천명 안 나옵니다.

그렇다고 단 한 명 나만 남았나이다 처럼
숫자를 셀수 있는 위치나 입장에 있느냐
?

 

바로 그겁니다.

없다는 의미에서 7천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단절의 단절

나쁜 것 보다 더 나쁜 의미에서 7천이지

나쁜 것을 뒤짚어 엎은 좋은 의미의 7천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이 희년 기쁜 소식 은혜입니다.

숫자 세고 있는 손가락 뿌렸뜨렸기 때문에 기쁜 소식인 겁니다.

 

즉 편파 복음이라고 하는데


거지나사로가 고난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편파 주장입니다
.


왜냐 하면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


일방적으로 거룩을 뒤짚어 씌었다는 겁니다
.

그런 의미에서 거룩은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우연입니다
. 그 원인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찾아다니는 발 손 다 뿌렸뜨리기 때문입니다.

나빠도 너~~~~~~무 나쁘죠.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거룩 또는 성화는 결국 손가락으로 세겠다는 심뽀를 굽히지 않고 주장하는 겁니다.
손가락 발가락 다 짤라도 그들은 결코 포기할수 없는 것이 거룩과 성화를 숫자 세듯이 셀수 있다는 위치와 입장이다는 거죠.
꼭 바리새인이지요. 우리들 심뽀가 그런 겁니다.

그러니 마음판의 할례가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들은 진짜로 마음판을 할례할려고 칼을 들려고 할 겁니다.
어찌하던간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야 하니까 말이죠. 이것이 종교 곧 우상이라는 겁니다.
 
기여이 원인 있는 결과로 만들겠다는 거죠.

성경은 그 반대입니다.

모세가 구약에서는 분명 애굽왕 바로가 겁나서 도망쳤는데

신약에서는 겁먹지 않고 믿음으로 당당히 맞섰다고 합니다.

거짓말이죠.

그럼 거짓말 티가 안나게 구약과 신약을 동일하게 기록해야 하는데

나 거짓말 했지롱 이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들킬려고 작정하듯이

봐라 봐라 봐라 구약이랑 신약이랑 안 맞제 라고

누가 더 떠벌리고 다니냐 하면 성경말씀 스스로가 더 떠들고 다니는 겁니다.

 

오히려 더 자랑질 합니다.

참 뻔뻔스럽죠.

아예 모순되게 기록을 하지 말던가

그런데 더 모순을 더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해석가들이 해석하겠다고 달려들다가

안 맞으니까 다 손놓아 버리는 겁니다.

순엉터리 라고

 

문제는 해석가들이 이런 모순적인 성경으로부터 해석 당해야 할 판국이니

과연 해석당할려고 성경 보는 자가 있겠냐 말이죠.

박사 학위 무슨 학위 학위 따기 바쁜 판국에

성경도 책일 뿐인데 학문적으로만 다루어질 대상물인데

설마 주체의 자리인 인간의 자리를 과연 내어주지도 않는 판국에 빼앗을려고 하겠냐 말이죠.

책이 무슨 팔 다리가 있어서 자리를 빼앗겠습니까?

 

철저하게 책은 수동적이고 그 책을 다루는 인간만이 그 책장 한 장 한 장을 넘겨가면서

또는 기록해 가면서 능독적이고 주체적이지

 

절대로 이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뒤바뀌어진다는 점에서

나빠도 너무 나쁘다 라는 겁니다.

단절의 이중성인 무한반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처럼 율법사 서기관 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 기록하다가 오바하면서 여호와 라는 단어가 나오면

목욕하고 깨끗하게 몸을 씻어서 다시 기록한다는 그것이 과연

말씀을 주체로 보는 것일까요?

 

그 반대죠 그것 역시나 말씀을 모욕하는 짖입니다.

말씀을 능동적인 주체의 자리에 놓고

자신을 스스로 수동적인 종의 자리에 놓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주체의 자리를 포기했는가?

그게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바리새인은 결국 이래나 저래나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주고자

불철주야 ~~~

 

예수님에게는 뭔가 허전하게 빠져있다는 겁니다.

? 배달(소통)이 빠졌으니까요

유대인 바리새인 민족이라면 달랐겠죠.

 

풀밭 위의 식사에 손씻기가 빠질 리가 없고

십의 이조는 벌써 하나님게 바쳐졌겠지요

이레에 한 번 기도보다 두 번 기도하는 민족

이레에 곱빼기 금식으로 나라를 구한 민족

 

사시사철

천지사방

불철주야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곱빼기 민족 아닙니까?

 

~~~ 뭔가 허전하니까 뭔가를 자꾸 채울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야 소통이 더 LTE 팔로우 급으로 소통이 된다는 거죠.

 

누가 초고속망 유비쿼터 시대에 느려터지는 심심하면 뚝뚝 끊기고 단절이 되는

나빠도 더 나쁜 그런 느린 것을 따르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런 스마트폰이면 당장 망하죠 하나도 안 팔리는 겁니다.

 

그것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ㅋㅋㅋㅋ

단절된 상태

단절만 아니라 단절의 단절된 상태

 

고난 이라고 하니까 뭔가 얼굴 오만상 찡그리고 그런 것으로 상상하시는데

그 반대입니다.

 

고난이란 저쪽과 무조건 반대인 상태를 고난인 겁니다.


저쪽 지옥간 부자가 물 한 방울이 없이 상태에 대조된 물의 생명이 넘치는 상태가 고난입니다. 주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저쪽 지옥간 부자가 형제들이 많고 선지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할때에, 대조된 그저 아무 발언없이 목소리 자체를 거세당한 그 상태가 고난인 겁니다. 주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난이라고 말하는 고생은 고난이 아닙니다. 고생은 누구든지 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따로 따로 있는 개별적인 고난이란 없습니다.

반드시 맞물린 상태에서의 고난인 저쪽과의 무조건 반대의 상태이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반드시 원인 없는 결과인 겁니다.

 

희한하게 저쪽 반대쪽은 원인 있는 결과를 반드시 주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그러니 저들은 고난이 없습니다. 즉 주와 함께 함이 없습니다. 동행이 없이 독자적입니다.
 

왜 신비인고 하니! 답을 알려줘도 저들이 답이다고 아무리 수용해도

다른 것은 다 따라하고 그렇게도 잘 소통이 되어 개방이 되는데

 

이것만큼은 와이파이가 안 터져서 막혀버리는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기사 불러서 전봇대 선도 바꾸고 폰도 바꾸고 다 바꾸어도 안된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하기를 이것을 뭐하고 했냐 하면

나빠도 더 나쁜 상태

곧 세미한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

 

허걱

 

말이 목에서 나오든지 아니면 들어가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목에 탁 걸려서 소리 자체를 상실해 버린 상태

허걱

 

목에 가래가 걸려서 들어가 삼켜지지도 않고

확 내뱉어 지지도 않는

 

나빠도 너무 너무 나쁜 상태


목소리 자체가 거세 당한 상태
자기 주장 자체가 필요없어져 버린 상태
그래서 그냥 누릴 수 밖에 없는 상태
 

이 상태를 지금 단절의 단절로써 거룩이다 라고 하고 있는데

이런 아브라함의 설명을

 

지옥간 부자는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목소리를 상실한 거세된 상태인데

이 놈의 부자는 더더욱 거시기를 주장하더라 말이죠.

 

모든 언어 모든 소리를 결국 성적인 의미입니다.

프로이드가 말했지요.

 

거세된 입장을 회개 라고 하는데

 

저들에게 회개 할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세요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회개라는 마음판의 할례가 아니라


할례 자체를 오히려 구원의 가능성으로 주장한다는 자체가

거세되기는커녕 할례는커녕 더욱더 힘의 사고방식

지난 시간에 말한 바알을 주장한다는 겁니다.

 

바알이 남근 아닙니까? 모든 우상은 남근입니다.

모든 종교는 남근입니다. 심지어 기독교도 그렇습니다. 마귀집단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인데
교회가 두 손 두 발을 걷어서 음부의 권세를 주장하고 있는 판국이니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강도의 소굴과 같이 된 입장과 동일한 겁니다.
바알소굴이 기독교죠.

이단인데 더 나쁜 이단이 될 생각은 안하고
이단이면서 이단 되지 말자 우리는 거지나사로 되기로 하자 라고 하는 바알소굴
 

자본주의도 힘 곧 남근사상이니까 말이죠.

 

유대인이라고 달랐나요?

지금 대조로 상대적인 인물로 거론 되고 있는 부자나 바리새인 자체가

할례를 했기 때문에 구원 받아 마땅하다는
말도 안되는 남근사상을 주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

 

그러니 할례 보다 더 나쁜

나쁜 할례 보다 더 나쁜 할례가 바로 마음판의 할례인 겁니다.

회개의 달인 바리새인에게 회개 보다 더 나쁜 십자가를 주장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보다 더 인간적인 참인간이 십자가에 달린 증거로써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꼬시더냐 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회개 몇 번 금식 몇 번 이레에 두 번 십일조 드리는 것

이것 모두가 다 남근사상 곧 바알이라는 겁니다.

 

누구 목사 말 마따나 거지나사로 되어야 하고 바리새인 되지 말자 라는 것 조차도

결국은 바알 사상이요

 

특히 성화론자들 조차도 그들 말 하나 하나의 내용이 뭔고 하니 남근사상이다는 겁니다.
내가 이해 되고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되는 것만 믿겠다. 즉 믿고픈 것만 믿겠다는 거죠.

 

나쁜 거죠

 

그 나쁜 것에 더 더 더 더 나쁜 십자가를
지금 아브라함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


그러니 부자가 하는 말의 내용이 나타나줘야 그 대조로써


그 차이와 비교로써 그 반대급인 내용이 증거 됨으로써


갈라져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

 

그러니 둘이 반드시 대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처음부분에

복음이라는 희년 기쁜 소식이라는 은혜의 날이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쳐들어 가는고 하니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많은 이스라엘을 거부하고 이방인 나쁜 개같은 이방인 중에

이방인 많은 과부들 중에 한 과부 에게만 기쁜소식이 가는 겁니다.


딱 한 사람
 

나쁜 놈들 중에 더 나쁜 놈에게 기쁜소식이 일방적으로 쳐들어 간다는 겁니다.

 

또 많은 이스라엘을 거부하고 개같은 이방인 나쁜 놈들 중에

많은 문둥병자 나쁜 이방인중에 더 나쁜 한명의 문둥병자 나아만에게 기쁜소식이 간다는 겁니다.

똥물에 7번 몸을 씻으라고 말이죠.

 

그때 7번이 숫자입니까? 본인 당사자가 안 믿는 겁니다.

그 정도로 나쁘기 때문입니다.

6번째 까지 숫자를 세었습니다.

그런데 왜 7번 마지막은 세질 않을까요?

숫자를 셀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나쁜 놈 중에 더 나쁜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회개요 고난이 덮쳐진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못 받는다는 겁니다. 고난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 받는 겁니다.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기 떄문입니다. 신을 바랬고 구원자를 바랬는데 메시아는 커녕
자신들 인간보다(나쁜 상태) 더 나쁜 더 인간적인 예수님이라는 선지자가 고향 자기 백성에게 죽임 당하니까
이 얼마나 더 더 더 나쁜 상태인가 말이죠.

 

즉 회개나 고난이란 자발적으로 나타나는게 아닙니다.

외부에서 덮치는 개념입니다.

오죽 하면 회개의 달인들 코 앞에서 일부러 그렇게 하겠습니까?

얼마나 나빠요? 일부러 약올릴려고

 

회개의 달인 앞에서 진짜 회개를 보여주는 겁니다.

안식의 달인들 앞에서 진짜 안식이 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나쁜 안식 보다 더 나쁜 안식
가짜 안식 보다 더 더 더 가짜 안식

 

안식의 주인 당사자가 안식을 알려주니까

 

옛날 동화처럼

법을 지키는 자들이 서로가 법 지켰고 이것은 틀렸다고 서로 다투는데

법을 정한 당사자 주인이 나타나니까 오히려 가짜 취급 받더라고 말이죠.

 

요즘 현대에도 있죠

찰리 채플린 닮은대회에서 진짜 찰리채플린이 참가 했는데

땡 탈락! 마이나스 100~~ 유후 ~~~~

 

즉 가짜들 대회에서 누가 누가 더 많이 닮았나 대회에서

진짜가 나타나니까

 

가짜들이 가짜 보다 더 가짜라고 땡탈락이다는 겁니다.

 

나쁜데 더 나쁜 놈으로 찍혔다는 겁니다.

이것이 세미한 음성이요 7천명이라는 희극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웃끼는 코메디 입니까?

그 정도로 심각할 게 없다는 겁니다.

 

7번 용서 얼마나 심각합니까? 8번 까지 용서 할려면 얼마나 더 심각해져야만 할까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런 나쁜 놀이에

그런 거짓 놀이에


감히 그 앞에서 주름을 잡을수 없는 뻔데기가 나타난 겁니다
.

나빠도 너무 나빠

770번이 나타나니까 에라이 모르겠다 손떼자 라고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의 가짜 예배에 더 더 더 가짜 예배(십자가의 단 번에 피 흘리심)로 단번에 다 이루셨던 겁니다.
 

이것이 7천명이요 세미한 음성인 겁니다.

 

내가 숫자 세알릴려다가, 그 숫자를 주장할려다가 목에 탁 걸려서 더 이상 말이 안나오는 겁니다.


거지나사로 보세요 목소리를 상실했습니다.

하이카가 알아서 다 처리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알아서 다 처리하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변호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괜히 내 목소리를 가지는 바람에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거 목에 탁 걸려서

 

오로지 외마디 비명만 나와야 합니다.

 

~~~~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

 

~~

 

 

딴 말 필요가 없어요

 

목에 걸려서 안 튀어나더라 라는 뜻입니다.

 

지금 제가 여름감기에 걸려 목이 엄청아픕니다

가시 생선들이 목에 탁 걸려서 삼켜 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뱉어지지도 않고

목에 걸린 경계선에 놓여진 그 아픔을 실감하는 것처럼.

 

이것이 얼마나 나쁜지 모릅니다.


그것보다 더 더 더 나쁜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복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가시를 뺄려고 해도 안빠지고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바울에게 알려주니

이건 뭐

 

믄 말을 못하는 거죠.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목소리가 거세 당한 것처럼 상실 당해 버리는 겁니다
.

이것이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회개를 가능성의 연속으로 본 지옥간 부자와

 

아브라함의 친절한 설명 회개는 회개해서 소통케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철저하게 단절의 단절을 누리는 것임을 알려주는 회개로

 

둘의 회개에 대한 차이를 분명히 또렷히 하고 있는 겁니다.


즉 부자의 회개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수 없도록 중간에 큰 강이 가로막혀 단절되어 있듯이

역시 또한 아브라함이 말하는 회개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소통이 될 수 없도록 중간에 큰 구멍이 가로막혀 있다는 겁니다.

부자의 회개도 나쁜 상태 곧 단절인데
아브라함의 회개 조차도 더 나쁜 상태인 곧 단절의 단절이니

하나 마나 한 회개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회개, 하나 마나 한  고난을 받을 수 있느냐 라는 거죠.

인간은 호구가 아니니까 하나 마나 한 것을 왜 하냐 라는 것이
결국 부자의 가능성 추구인 겁니다.
불가능성을 추구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앞에서 수 없이 언급한 안식도 마찬가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안식과

안식지키기의 달인 바리새인의 안식은 천지차이입니다.

마치 둘 사이에 큰 강이 있어서 서로의 안식이 소통이 안되는 단절의 단절인 상태와 같다는 겁니다.

 

마치 가짜들의 채플린따라하기 대회 같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바리새인 되지 말고 거지나사로 되자?

그것 역시나 가짜들의 따라하기 대회일 뿐입니다.

 

그냥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뻔데기 앞에서 얼마나 스잘데기 없는 짖을 하는가를 직시하기 위해서

7천명 세미한 음성이 나타난 겁니다.

 

가짜들 보다 더 가짜

나쁜 것 보다 더 나쁜 으로써

 

단절의 단절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소식입니다.

 

그러니 간격을 말하고 있는데 그 간격을 부자는 여전히 모르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 간격을 상세히 설명해 줍니다.

차단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아주 차단 되었다는

단절의 단절입니다.

(눅 16:23, 개역)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4, 개역)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눅 16:25,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6:26, 개역)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 와중에도 지옥간 부자는 이 단절을 무시하고 은근슬쩍 누락시키는 반칙을 벌립니다.

 

선지자 보내주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와중에 더 더 더 나쁜 반칙을 아브라함을 펼칩니다.


그 지옥과 천국 사이의 간격을 누락시키는 반칙에

더 더 더 반칙을 어떻게 벌리는고 하니

 

선지자 있어도 못 듣도록 했다는 겁니다.

 

선지자 있으면 들을끼다 라는 가능성과

 

선지자에 대한 해석 자체가 넌 엉터리야 라고

선지자를 보내심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듣도록

일부러 못 듣도록 보냈다는 겁니다.

 

얼마나 더 나쁘고 더 반칙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기쁜소식입니다.

차단 되었다는 것


그러나 여태껏 우리는 선지자에 대해서 엉터리로 해석해 왔던 겁니다. 이 지옥간 부자처럼
선지자는 회개케 하기 위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 반대입니다. 회개 때려죽어도 못한다는 것을
오히려 회개 할 놈이 생길까봐 벌벌 떠는 존재라는 것을
즉 단절의 단절의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싸그리 죽임을 당해 없어져 삭제 다 당해 버리는 겁니다.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오히려 회개 할까봐 걱정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다 거짓선지자인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 단 한명이라도 구원해 주고파 안달이 난 자들이다는 거죠.
그래야 돈을 버니까, 구원시키는 학원인거죠. 자동차면허학원처럼

부자가 똑같은 심정으로 선지자 보내 달라는 이유인 거죠.
 

그러나 참선지자는 지옥과 천국 간의 간격이 단절의 단절 무한단절인 정도로 벌어졌다는 것

얼마니 기쁘냐 말이죠.

 

들을 귀 있는 자만 듣도록 되어 있다는 것

 

개방이 아닌 가능성이 아닌

차단과 단절의 단절인 불가능성으로써의 기쁜소식이다는 것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 라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베드로처럼

지옥간 부자처럼

 

7번 용서에서 조금 더 보충해서 가는 천국이라면 가짜천국에 갈 뻔 한 거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감사하게도 770을 알려줘서

아에 용서 따위를 할 생각 조차 못하도록

뻔데기를 들이대시므로써

도리어 평생 매일 매시간 매 초 마다 용서만 받아야만 할 정도로 (용서를 베풀 입장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

나쁜 놈 중의 더 나쁜놈 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에 감사 감사

 

허걱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를 알게 되는

외부에서 회개가

그 불가능한 회개가 왔다는 것이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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