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16:10-18)

 


(
16:10, 개역)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6:12, 개역)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6:14, 개역)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6:1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16, 개역)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6:17, 개역)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16:18, 개역)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지난 시간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어렵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심을 증거하면 당연히 그 자녀도 선하게 된다는 것이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 않고

아버지 자신의 선하심을 증거하면 도리어 그 증거자는 악으로 취급받도록 지혜를 펼쳐 놓으면
과연 악함을 자발적으로 실행할 자가 과연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

악함에 뛰어들 자가 과연 누가 있겠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분명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악을 선으로 갚으면 저가 도리어 머리에 숯불을 얹은 것처럼 부끄 부끄 부끄 할꺼다 말이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당사자 자신은 얼마나 뿌듯해 할것 아니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외치는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즉 아버지를 문자로만 접근한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란 문자 그 뒤에도 상재해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없는데도 부재 곧 그 [없음]이 오히려 지나치게 과잉된 존재로써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열처녀 비유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랑이란?
분명히 지금 신랑이 없습니다
.

없는데

부재인데
그 사랑이 더 더 더 애뜻하게 불타오르더라 말이죠
.

 

아니 없는데 어떻게 사랑이 불타오릅니까?

 

상대방이 있어야 사랑이 불타오르죠

 

이것을 아주 쉬운 표현으로 뭐라고 하느냐? [미쳤다] 라고 합니다.
또는 [더 나쁘다] 라고 합니다. 나쁜 것 보다 더 나쁜,

외설 보다 [더 외설적]인 의미로써 말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그 부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불타오를수 없다는 겁니다.
비정상이죠. 정상 보다 더 나은 정상의 초과잉성

 

즉 지난 시간에도 그랬지만 오늘 본문 또한 미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본문입니다.

아니 사실상 성경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그럼 그 반대는 뭐냐?

아주 간단합니다.

미치지 않고 안 미친채로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냥 정상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 받지 않고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것은 곧 문자로 보면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지극히 정상적입니까?


문자로 보면 가르침이 있고 곧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보고 실천하는 내가 있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사랑이란 

내가 없습니다. 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자아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말씀 자체인 예수님도 지금 이 순간에 없습니다. 부재 상태입니다.
신랑이 타국에 멀리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랑되신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더더욱 불타오른다는 겁니다.

 

나도 삭제 당하고 예수님도 [없음]인데

오히려 다른 신랑 신부 보다 더더욱 사랑이 넘쳐나는 잉꼬부부라고 소문이 퍼지는 겁니다.

아니 둘 다 [없음] 인데 ~~~~~~~

 

이것이 미련한 다섯처녀가 신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신랑이 있는냥 더 비존재의 과잉성으로써 신랑과의 함께함의 관계성을 누리더라 말입니다.

그러니 준비할 것도 없이 그냥 함께 있는 [그 자체] 인 겁니다.

 

오히려 똑똑한 다섯처녀는 신랑이 지금 없으니까

그때가서 준비하면 그때오는 신랑을 영접하면 되는 겁니다.

신랑 따로 준비 따로,

신랑이 구지 내 눈에 보이도록 등장하면 그때서야 준비해도 늦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내가 아닌 가정부이다는 겁니다.

가정부는 계약만 지키면 되니까 말이죠

계약서와 실천이 따로 존재 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내는 계약서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 자체입니다.

 

아니 사랑에 무슨 계약서가 필요 합니까?

실천 못했다고 계약 파기입니까?
아니면 신랑이 계약서 대로 안했다고 신랑 되심이 취소 됩니까?

 

그래서 의문의 증서인 율법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여기에 이 계약서 라는 문자를 찢어버린 것에 누가 발악하겠습니까?

마귀죠.

바리새인이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 전체죠

그러니 안 죽이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계약서를 찢어버리면 가정부는 그제서야 발악합니다.
엘리야의 자살시위는 아내가 아닌 가정부 시위인 겁니다.

결국 미련한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가 되고
똑똑한 처녀는 미련한 처녀가 되는 팔이 어긋맞게 되는 거죠.
 

아버지가 모순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아버지 취소가 되는게 아닌데 저들은 발악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계약서 자체도 나쁘지만 왜? 신부로 취급안하겠다는 겁니다. 사랑관계로 안 보겠다는 겁니다.
무조건 가정부로만 취급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계약서도 나빠 죽겠는데 그 계약서를 찢어버리는 예수님은 더 나쁜 겁니다.
빌라도 악마도 나빠 죽겠는데 그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는 예수님은 더 나쁜 겁니다.
믄 말을 못 하도록 가로막아 버려서 말이 말이 아니게 말인지 말이 아닌지 의미없게 만들어 버리니까 말입니다.

차라리 그럴빠에 빌라도 손에 죽지 말고 내 손에나 죽어라 라는 식입니다.

(눅 13:1, 개역)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 13: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 개역)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맏아들(탕자의 형)은 그래서 아버지를 거부할 수 밖에 없도록 태어난 겁니다.

 

자 그래서 나쁜 것에 충성치 못하는데 어떻게 옳은 것에 충성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빌라도 손에 죽고자 하는, 죽음을 재촉하는 일 = 나쁜 일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엘리야를 예로 들면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옳으신 주님의 뜻에 충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냐!! 그랬니? 그랬었었구낭!!

 

그럼 나의 모순에도 충성해 보렴 이라고

이세벨을 격동시켜서 선지자들을 다 죽여버리게 하고

그것으로 피해 도망치는 신세로 만드시는 주님의 모순에 과연 충성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하십니다.

 

분명 선지자들이 다 죽임당한 것은

엘리야 자신이 갈멜산에서 한 행동들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그로 인한 원인으로 이세벨을 선지자들을 다 죽입니다. 이미 계속적으로 죽여왔습니다.

 

그런데 죄책감이 원한으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왜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무능하시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제가 시키는대로 한 적이 없었느냐 라고 반문하는 거죠.

850 대 1 로 싸워 이긴 것은 뭐가 되냐 말이죠.
의미 없게 되는 하나 마나 한 일이 되어버렸지 않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바로 7천명과 세미한 음성입니다.

7천명과 세미한 음성은 상대적인 엘리야의 원망과 맞물려야 하는 단절성입니다.

분명 끊어진 전혀 상관이 없는 정반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단절을 넘어서

주어지는 희락이요 기쁜소식이요 감사입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원망에 7천명은 너무 초과잉적인 숫자입니다.

즉 말도 안되는 숫자이다는 겁니다.

과연 7천명을 남겨놨을까요?

아니 이스라엘에 무슨 7천명의 선지자가 있겠습니까?


오바댜가
100명을 겨우 숨겨놨고 다 죽었는데

그럼 7천은 무슨수로 남겨지냐 말이죠.

여기에 더 희한하게 웃기는 것은

이 말도 안되는 초 과잉 숫자에

엘리야가 반발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수용을 한다는 점입니다.

숫자를 세지 않더라 말이죠.

분명 이스라엘 전체를 탈탈 털어봐도 7천명의 선지자가 생길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안 따집니다.

이상하잖아요

분명 따지고 따지고 따졌었던 엘리야 이잖아요

그런데 왜 자신의 행동에 모순되게 이것은 왜 안 따지냐 말이죠.

 

이것은 숫자를 따지는 문제에서 떠난 문제이다는 것을 엘리야가 알았다는 겁니다.
문자를 따지고 계약서 대로 했다고 따지고 숫자를 세어보니 나만 남았다고 따졌던
그런 표상적인 문제를 떠나버린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의 문제이다는 것을 안 겁니다.

마치 7번 용서 하면 될까요? 라고 베드로가 숫자를 따져서 물었는데

7에 70 번이라는 초과잉적 숫자 곧 7번 용서 괜히 했어, 하나 마나 한 짖을 따졌다는 것을 들통내기 때문에

7에 70이 어느 정도의 가치이며 어느 정도의 의미인지를 더 이상 안 따지는 겁니다.

그냥 헉 ~~~~ 거리며  자극 중에 자극 그냥 엎드려 죽여주시옵소서 마마 ~~~ 라고 해야할 판국 뿐입니다.
그렇게 잘 따지고 숫자에 의미를 두는 자들이 말입니다.
하나 마나 한 것을 뻔데기 앞에 주름 잡은 거죠.

7천의 상대적인 나 홀로 남았다는 것은

 
흐지부지한 모호한 나를 삭제 시키기 위한 의미이지

미완료인 의문의 존재인 자기자신이 
7천명을 감히 진짜로 남겨놨는지 따져보겠다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도리어 나 홀로만 남았습니다 라고 한
그 [나 혼자] 라는 [나] 조차도 지금 당장 삭제조치 당해야 할 판국임을 보여주신다는 의미이기에

감히 7천을 세고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을 직시하는 겁니다.

도리어 화로다 화로다 내가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구나
나는 죽어 마땅하구나 해야 할 판국인 거죠.


여기서 이스라엘 중에가 왜 중요할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즉 안전빵이였거든요

그런데 그 안전빵도 무용지물 하나마나한 의미 없었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거한다는 보호막 조차도 홀라다 다 타버릴 정도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이란

큰 지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도 아니요

큰 태풍 큰 풍랑 큰 화염 등등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거 다 가짜 살아계심이란거 아시죠


(왕상 19:10,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1,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개역)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3, 개역)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14,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5, 개역)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왕상 19:16, 개역)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왕상 19:17, 개역)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왕상 19:18, 개역)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듣낄랑 말랑 하는 소리

곧 하나 마나 한 소리

소리이면 소리이던가? 소리 아니면 소리 아니던가?
마치 중간에 낑긴, 목에 걸려서 안 나오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의 소리] 속에 주님이 있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을 [더 나쁘다] 라고 표현합니다.
목에서 걸려 나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들어가지도 않는 애매한 경계선에 낑긴 간질이 바울처럼 말이죠.

 

마치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나쁘다 인 것처럼

 

주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갈멜산 제단 싸움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엘리야가 한 보탬을 했기에 나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다고 자부하는데

그것으로 살아계심을 증거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께서

내가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러치니까 하늘에서 사탄이 떨어집디다 라고 것과 같네 라고 하셨는데

정확했습니다
.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어머니께서 사단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고 기뻐하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서 언급하신 겁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데 성공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살아계심을 그렇게 증거되는게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 마나 한 소리 곧 세미한 음성으로 오십니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닌

죽으시는 하나님으로 증거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세미한 음성입니다.

죽는 하나님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이것은 죽은것도 아니여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요

고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쉭 쉭 ~~~

답을 다 알려고주고 치는 시험과 같다는 겁니다. 하나 마나 한 시험
그런데 저들에게는 절대로 안 알려주는
이런 반칙도 없습니다. 더 나쁘죠.
이 반칙이 너를 살려내는 살아있음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엘리야가 알리가 있었나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예외 죠 예외!!
그 예외인 예상 밖의 모습이 사실상 전체 전부이다는 겁니다.
진리는 항상 예외 적이다는 겁니다. 반칙 중의 반칙인 거죠.
 

이것을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긴다고 했습니다.

숨은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 말해서 증거해야 의미가 되고 뭔가 생산적인 것들이 나타날 것 아니냐 말이죠
바로 이것이 확장력 팽창력이 뛰어난 방식인데 오히려 이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가짜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

 

그런데 어린아이에게 나타내면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은 하나 마나 한 소리가 된다는 겁니다.

뭔가 더 이상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확장 팽창 무한반복은 커녕 무능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아예 포기 곧 기대치 않듯이 말입니다.

멀쩡히 슬기롭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어른들 다 놔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면 얼마나 그것이 나쁜 짖이냐 말이죠.
여태껏 해 오던 모든 일들이 하나 마나 한 헛짖이 되니까 말이죠.

그래서 성령은 인간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러니 세미한 음성입니다.

듣기는둥 마는 둥 하는 소리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죽은 소리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안들리는 소리는 소리 맞습니까 소리입니까?

소리 아니잖아요
그런데 귀머거리
눈봉사 소경
벙어리를 통해서 복음을 외치겠다는 겁니다.
아니 벙어리가 어떻게??
수화 배워서??????
 

분명 죽은자 같으나 산자 그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 조차 말이 안되는 거죠 불가능성이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그렇듯 너희는 안 되지만 나는 능히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못하는 우리에게 왜 그런 말을 하냐 말이죠 하나 마나 이잖아요
못할꺼 뻔히 알면서 왜 시키냐 말이죠.

 

성경 전체가 하나 마나 한 소리 뿐이다는 겁니다.
특히 예수님의 비유는 더 심합니다. 더 나빠요.

그런데 인간은 그러면 안됩니다 반드시 의미있는 소리가 되셔야 합니다.

실천 가능한 소리를 하셔야 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라고 우기는데

 

여기에 엘리야가 우리를 대표해서 주님께 따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살아계심은 정반대입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자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실천해도 소용없고 실천 안해도 소용없는

하나 마나 한 소리 속에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그 간격 속에
그 빈공백 속에 주님의 약속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더 나쁘다는 겁니다. 시어머니보다 더 나쁜 시누이이다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니까 말입니다.
 

이런 불의함 곧 더 나쁜 것에 충성치 않는데 어떻게 옳고 거룩하고 정결한 것에 충성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무능한 어린아이, 세리 강도 창녀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 사망에 주저 앉은 흑암의 지옥 백성들을 통해서

예수님 나라의 증폭성을 초과잉적으로 증거하신다는 겁니다. 살아계심이죠. 이것이 세미한 음성의 의미입니다.

 

이런 보잘 것 없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치 않는데 어떻게 크고 의미 있는 일에 충성할 수 있느냐 하는 거죠.

 

창세전에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되는 것으로 기뻐하라 라는 소리는

하나 마나 한 붕 뜨는 소리입니다.

 

누가 과연 그것을 기뻐하겠습니까? 누가 그것에 충성하겠습니까? 하나 마나 한 소리인데?
귀신 쫏아내는 일은 유대사회에서는 기대하던 고대하던 바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기대치가 있기에 좋아라 합니다. 물론 이방인에게는 미친소리이겠고 현대과학에서는 안 통하죠.
그러나 유대 사회 속에서 조차도 미친 소리는 창세전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이 되었다는 소리가 
바로 예수님으로 부터 나온 소리이다는 겁니다. 이 소리에 충성하겠습니까?
유대사회에서 이단 중의 이단인 예수님의 소리인데???

지금 당장 자신의 입으로 외친 소리로 인해 사탄이 우르를 떨어지는 것에 뿅가서

그것으로 기뻐서 그 감격을 감출수가 없는 판국에
이것으로 예수님의 이단 누명을 벗길수 있는 절호의 찬스요 오해를 풀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악하다는 겁니다. 주님은 누명을 더더욱 쓰실려고 오신 것인데 ~~~

 

그러니 마치 그거 의미 없거든~~~

이라고 찬물 끼언 듯이

너가 태어나가도 전인 창세전의 생명책 기록으로 기뻐하라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냐 말이죠.

 

바로 거기에 의미가 있지

너가 의미를 두는 곳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7천명이 의미가 있지 너 하나 남았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기에 삭제 당해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채널돌리기 곧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잉여 곧 은혜이다는 겁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은 이 세미한 음성 속에 있지

인간이 의미두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것은 삭제 당해도 싼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나쁘게

더 못땟게 나서줘야 그 의미두는 상황이 쭐꾸덕 미끄러져서
아무 의미가 없는

아무런 심각할게 없는 것임을 들추어내주는

더 나쁜 시누이 역할이

바로 진짜 주님의 살아계심 곧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이며 명료하고 또렷한 모습입니까?

처음부터 준비해 놓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주님 스스로가 증거하시는 겁니다.
절대 인간의 손에 안 맡기겠다는 겁니다.

 

인간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이 얼마나 순 엉터리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그 인간을 삭제시켜버리면서

주님 자신의 살아계심을 삭제하는 방식으로써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시기 때문에

더 나쁘다는 모습 즉 불의함에 충성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인 겁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원수인 불의한 나를 위해 아무런 댓가나 조건 없이 무조건 용서하시고자

십자가에 대신 달려 죽으시냐 말이죠.

바로 그 죽음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기에

나의 죄를 대신 해서 죽은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해 심각할 것 없고
아무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나 자신 마저도 ...

(갈 1:4, 개역)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 1:5, 개역)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 1:6, 개역)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7, 개역)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8, 개역)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개역)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 정과 욕심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니까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따나 옳다고 한 것들 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서

 

하나 마나 한 헛짖을 했음을 들통나게 하시는 겁니다.

의미를 두었는데

그것 조차도 뭘 해도 다 죄 밖에 안되었다 실토케 만드시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말합니다.

아 그럼 그런 일을 다시는 안 하면 되겠네요

 

아니죠

그런 일이 바로 덜 나빠서 그렇다는 겁니다.

더 나쁜 짖을 해야만, 더 나쁜 짖을 아니하고는 못 배긴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나빳다는 것을 세미한 음성을 통해 또는 7천명을 통해 알았기에

이제는 그런 나쁜 곧 잘못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안나쁜 짖, 안잘못된 짖을 하겠다가 아니라. 좋은 일, 옳은 일이 아니라

 

그 잘못된 그 나쁜 일을 제대로 나쁘지 않았기에

덜 나쁜 일이었기에 더 더 더 나쁜 일을 하라는 취지이다는 겁니다.

 

참 어렵지요?

 

유대인이 빌라도의 폭력으로 인해 죽임을 당해 유대인이 드리는 제사 제물에 유대인의 피가 묻게 되었으니
이 일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바로 잡아 달라고

당신 구원자 라메? 빨리 우리를 이 악마로부터 건져달라고 예수님께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이 덜 잘못 되었고 덜 나쁜 일이다 라고 하십니다.
더 나빠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때리는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나쁜것처럼 못땟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 라고

제대로 더 나쁜 일이 벌어지도록 할려고 오셨고

이것은 뭔가 제대로 더 잘못된 일이야 라고 한탄할 일을 벌리러 오셨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을 하는 예수님이 더 미운 겁니다.

더 나빠요

우리 사장이 나빠요 우리 예수님은 더 더 더 나빠요

이렇게 되는 거죠.

 

?

갈멜산 제단에서의 주님의 살아계심은

저들 바알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이는 그런 살인적인 것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는게 아니라

 

내 열심이 특심이다고,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쫏아내고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집디다 라고 하는 그 상황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나를 배신 때리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나를 단절시키고

죽는 하나님
쫄딱 죽어버리는 하나님
쫄딱 망해버리는 하나님
쫄딱 십자가에 매달려 저주 받아 버려 죽는 하나님

이렇게 되어 버리면 주님의 살아계심을 외치고 있는 내가 뭐 되냐 말이죠

요즘 말로 호구 되죠 시체 되죠 시체

있으나 마나
하나 마나
이렇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일이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더 나쁜], 수수께끼요, 비밀이다는 겁니다.

그 하나 마나 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더 나쁜 일을 할 수 있느냐?
불의한 재물에 충성할 수 있느냐?
보잘것 없고 지극히 작은 일
가치 없는 일에 충성 할 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목숨까지 걸어 볼래?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아니고서는 못 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나타내도 뭐라하고 ~~ 참 의미 없다.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해도 의미없고 ~~ 참 의미 없다.

 

엘리야가 외칩니다.

여호와 하나님 마이나스 100!!

 

아이고 아쉬워라 ~~~~

땡 탈락!!

 

유후 ~~~~~~~~

 

주님은 오히려 더 신났습니다. 7천명이 있거든요

엘리야 상대 안 합니다. 피해 갑니다.

 

뭐가 아쉬워서 딸랑 한 명

나만 남았나이다 에게 매달리겠습니까?

 

지만 손해지

 

나쁜 하나님이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일

나쁜남자 되시는 성령입니다.
즉 사람의 일에 반대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

(마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탄아 ~~~


얼마나 나쁜 예수님입니까!!!
베드로에게 너무 심한것 아닙니까??? ㅋㅋㅋㅋ
 

영의 일이란 육의 일에게서 더 나쁜남자로 취급받는 겁니다.

 

? 모조리 의미 없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래야 세미한 음성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다는 겁니다.

살아계심이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해서 살아 있도록

살아계심을 또렷하게 나타내도록 증거함으로써 살아계시는게 아니라

그것처럼 모호한게 어디있겠습니까? 구약 이스라엘 역사 다시 두번 반복해야 하나요? 해봐도 똑같은 결과인데?
그런 식은 모호할 뿐입니다. 의문만 더 할 뿐입니다.

 

정반대로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전혀 감 잡을 수 없는

죽은자 같으나 살아있고

산자 같으나 죽어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의미 없는 것 속에

불의하다고 여긴 것 속에

쓸모 없다고 버린 건축자들이 버린 돌 취급한 그 속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

하나 마나 한 그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을 주님 스스가 드러내고 있을때만

 

인간이 전하는 가짜살아계신하나님과 차이나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실지로 그 이후에 참선지자의 모습들은 하나 같이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그야말로 무의미 속에서 하나 마나 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그런 더 나쁜 일에 충성 합니다. 하나 마나 한데 말이죠.

하나 마나 하니까 더더더 충성합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까지 다 걸어버린 상태 입니다.

 

반면에 거짓선지자들의 모습은 하나 같이 생생합니다.

성전도 있고 국가도 있고 하나님도 살아계시고

뭐 하나 부족한게 뭐가 있겠습니까? 선지자라는 존재 자신들도 있고

 

그러니 전혀 망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망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뭐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주님이 설마 자신의 살아계심을 깨뜨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진짜가 되어버리고 성전이 무너지니까

거짓선지자들의 존재들 마저도 다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빈 공백의 역사가 생기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죠

들리는 소리도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살아계심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차이와 똑같습니다.

 

참 신기하죠?

이스라엘 국가 백성 다 사라지고

끊어져 버린 단절의 역사 한 500년 이였던가요? 400년 정도네요
광야죠 광야가 오히려 도시 보다 더 초과잉적으로 삶의 활력소가 넘치더라 말이죠.
우리는 광야에서 원망만 할 뿐인데 ~~~

그 들리지도 않는 그 소리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생생하게 들리고 있으니

거짓선지자들의 주장을 다 뒤엎어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썩 물러가라 라고 호통을 치시는 겁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얼마나 모독했으면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얼렁뚱땅 넘겨버릴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딜 속일려고 ~~~~

(마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는 아무리 봐도 어디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노? 라고 합니다만
죽음의 땅과 같고, 광야 같은데 말이죠.

바로 그 속에서

죽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망해 버린 이스라엘 속에서

참된 이스라엘 예수님이 등장하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빈공백

있으나 마나 한

하나 마나 한

들낄랑 말랑 한 그 속에서

 

예수님이 등장해서

역시나 하나님 나라 비유가 대부분

하나 마나 한 소리로 일관되게 외칠때에

 

그 빈공백의 역사를 참지 못하고

그 대안으로 묵시운동을 펼쳐서 바리새인들이 장악한 그 유대사회에

의미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얼마나 나쁜 남자 취급 받을 수 밖에 없습니까?

 

그 당시 최고의 신앙인 바리새인을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취급해 버리니

그들의 주장이 더 헛소리로 취급해 버리니

나만 남았나이다.

다른 지파 다 사라지고 유다 지파만 남았나이다 라고 하니

예수님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12제자로 12지파 새이스라엘을 형성 하니까

눈꼴스럽기 짝이 없게 보이는 겁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마귀 짖이다 라고 나쁜 짖이다 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그럼 덜 나쁜 짖을 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은 더 더 더 나쁜 짖으로써

심지어 자신이 하시는 일 조차도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여기에 제자들도 반발하고 당황하는 겁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 되어있기에

마귀 이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미 넉넉한 승리를 누릴 뿐이지

지키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지키는 자들의 시선에서 얼마나 더 나쁜 짖인지

 

지금 막 귀신을 항복시키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창세전 생명책 기록 됨을 더 기뻐하라고 하시니

붕뜨는 소리죠

 

얼마나 심각하게 빌라도가 우리를 죽일려고 합니다.

이세벨이 이스라엘 선지자들 다 죽이고 나만 남았습니다

 

라고 이렇게 심각하게 외치고 있는 판국에

 

나도 빌라도 손에 이세벨 손에 죽으러 왔거든~~~~

 

아니 죽어버리면 이 모든 것이 하나 마나 한, 아무 의미 없는 짖이잖습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그 속에

그 아무 의미 없는 것 속에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는

무능하기 짝이 없고

아무것도 아닌 아린아이에게만 나타내는 그 속에 주님의 살아계신 약속이 있거든

 

그래서 나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지금까지 한 일들이 다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그 일

곧 죽으러 왔다

 

그 죽음 속에서 살아있는 약속을 피울 거야 라고 하니까

 

모든 인간의 믿음이 차단이 되는 겁니다.

엘리야도 차단 되고

남들은 다 버려고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베드로도 차단 됩니다.

이미 차단 당했던 모세 조차도 주여 제발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오히려 죽으심을 달성하소서 라고 합니다.
왜? 모세 자신도 안 통하기 때문인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만 통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 만이 살길이다는 뻔뻔스러움 나쁜짖인 거죠.

 

오직 살아계심은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길 밖에 없지

인간 쪽에서 다가갈 길은 모조리 끊어버리는

 

그래서 모조리 의미 없도록 만드시는 그 일

 

그 불의함에 충성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더 나쁜 일에 충성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들은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가 하는 짖, 더 나쁜 짖,

불의한 일만 골라서 하게 되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들은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을 망하지 않도록 하는 일만 골라서 하더라 말이죠.

 

제가 또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성령 받은척 행동하는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니던데

흉내낸들 정작 본인은 안 망할려고 하니까 어차피 거짓이니 따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천x 같은 이단이나 구원파 같은 이단들이 이런 짖을 할리는 없겠죠
안산x 하나x교회 집단도 마찬가지
더 심각한 것은 성화론자들이죠. 바리새인이죠.

자기 조직을 더욱더 단단케 할려고 하지 누가 해체 할려고 하겠습니까?

신천x는 남의 조직은 해체하는데 교육받아 달인들이 되었지만

정작 자신들 조직은 해체를 못하는 겁니다.

남의 조직 해체 시키는 이유가 자기들 조직 단단케 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락방도 같은 원리 아닙니까 요즘도 다락방 인기 끄는지 모르겠는데 !!

 

그러니 한국 교회 전체가 신천x나 구원x와 다를바가 없는 겁니다.

유병언이 시체처럼 부패되어 해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이들처럼 이단이 되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이단 중의 이단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덜 이단이다는 겁니다. 더 나쁜 이단을 아직까지 본적이 없어요.

그러니 다 가짜인 겁니다.

더 나쁜 이단 중의 이단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가짜인 겁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두 주인을 못 섬긴다고 했습니다.

즉 엘리야의 갈멜산 제단 싸움이다는 겁니다.
바알이 살아있는 하나님이냐? 여호와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냐 라는 싸움입니다.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이 싸움 뿐이다는 겁니다.

영적 전쟁인 거죠

그런데 이 영적 전쟁에 우리가 한 보탬하겠다고

귀신을 주의 이름으로 항복케 하는 것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전쟁이 아니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님 스스로가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전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그 속에서 한 보탬을 하는게 아니라 말이죠. 내 숙제 없고 예수님 숙제 뿐입니다.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를 미워하면 저를 사랑하도록 되어 있고

이를 중히 여기면 저를 경박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소욕 싸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섬길수 없다고 두 주인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갈멜산 싸움에서 소욕 싸움에서 엘리야가 승리하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제대로 증거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정작 주님은 쪽팔리는 겁니다.

왜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앉혀 놓고 그런 일을 벌렸거든요

 

자기 자식을 앉혀 놓고

두 아빠 곧 전의 아빠 여호와

새 아빠 바알

 

이 둘의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전의 아빠 여호와가 이겼습니다.

 

과연 기쁠까요?

 

전혀 아니올시다.

 

엘리야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다고 좋아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배신 때립니다.

 

전혀 기뻐할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아니 하나 마나 한 당연한 일인데

기뻐하다뇨

 

그럼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를 통해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를 받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그 뒤에 과연 계속적으로 믿었을까요

 

1초도 못 넘깁니다. 작심 3일도 못 되는 거죠.

 

이세벨의 권력 곧 아합의 총 칼

그리고 주변 나라의 권력

 

그런 것들 속에 뺑뺑뺑 둘려 쌓여 있어서 숨을 쉬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갇혀버리도록 하시는 겁니다.

 

엘리야 본인이 그렇게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입니다. 죽음 속에서 나타내시겠다는 취지입니다.

 

그 죽음이 얼마나 나쁜 것입니까?. 더 나빠요 더 나빠.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사건으로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는게 아니라
죽으심을 증거하는 사건으로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세미한 음성이요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걸림돌 중에 걸림돌]인 거리끼고 실족케 하는 더 나쁜 것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비밀이요 수수께끼 입니다.

 

얼마나 나쁘면 이스라엘 백성은 다 압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저주 라는 것을.

그래서 거리끼는 것이고 거치는 것이고, 실족케 하는 것이며,

걸림돌이라는 것을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속에서만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겠다는 세미한 음성

곧 하나 마나한

아무것도 아닌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싫어버린바 된 그 속에

 

죽은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그 십자가 속에서

그 불의한 3가지 물증인 도장(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도장끈(만나를 담았던 항아리) 지팡이(아론의 싹난 지팡이) 라는
불의하고 부정한 재물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는 말입니다.

 

큰 기적 큰 지진 큰 태풍 큰 화염으로 오시면 인간이 안 믿고는 못 배기겠죠

그런데 그런 믿음들은 다 가짜라는 겁니다.

 

오로지 세미한 음성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 그 속에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다는 겁니다.

 

역시나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소리 곧 음성이란 남근 곧 상징계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 합니다.

권력인 거죠. 주인기표죠.

 

그런데 2년 전 영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2011년 작품에서 '시저' 라는 원숭이가 소리 곧 음성을 소유하게 되니까 비로소 권력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안돼 ~~ 라는 소리 노 no ~~~~

 

그렇게 되니 그 원숭이 시저는 인간과 맞짱뜨는 자리의 권력에 놓여지는 겁니다.

남근을 획득하게 되는 거죠,

 

그런 태풍의 권력

지진의 권력
화염의 권력 그 속에서 살아계심을 드러나는 것은 바알이라는 주인일 뿐입니다
.

곧 인간의 우상 돈입니다.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신은 돈 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종교체제입니다. 돈으로만 소통된다는 겁니다.
그 신이 돈 아래에 교회도 모든 종교도 다 있는 겁니다. 벗어날 자들이 없습니다.

 

그 속에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그 속에 살아계심을 외쳤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 속에 살아있기는커녕 없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돈이라는 입장에서 전혀 돈과 무관한 무능의 자리에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곳에 살아계심이 초과잉적으로 있다는 겁니다.

아니 죽었는데 살았다니요????

아니 없는데 있다니요????

아니 [없음] 인데 [있음] 이다니요??

 

죽은자 같으나 산 자 라니요?

 

그래서 바리새인이 비웃습니다. 주인을 곧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권력과 연관시켜야 살아계심이 증거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저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 라고 일방적으로 바알선지자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차이로 예수님 자신을

 

(16:1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16, 개역)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6:17, 개역)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16:18, 개역)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침략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하십니다.

오죽하면 율법의 한 획이 절대로 떨어짐이 없도록

 

때리는 시어머니 율법 보다 더 나쁜 말리는 시누이 역할로써
더 나쁜

율법 보다 더 율법적인 십자가 라는 세미한 음성에 충성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불의한 재물에 충성 말입니다.

 

이것이 더 나쁜 더 불의한 모습으로써

얼마나 나빳으면 그 어떤 인간도 모조리 다 단절되는 차단의 거룩

단절의 거룩

갈라지게 만들어 등돌리게 하는 거룩을 이루시는데 일점일획이라도 안 떨어지게 하겠다는 겁니다.

 

 

더 나쁜 시누이죠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하시는 모습인 겁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시저는 소리 곧 음성을 얻게 되어 권력을 쥐게 되지만

엘리야도 그렇게 권력을 쥘려고 하다가 거세 당하는,
그러나 주님의 삭제 시키는 섬김 때문에 빠져나오지만

반대로 시저는 권력을 쥐게 되지만

남자들처럼 말이죠.

 

그런 남자에 비해 여성은 거세된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거세된 여성은 남자라는 피조물 보다 더 피조물 답죠
더 나쁘죠 더 불쌍히 여김을 받는 거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세된 여성 마저에게서 조차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외침으로써

모든 남녀노소로부터 짤려버린 진정한 피조물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결국 엘리야는 바로 그렇게 거세 당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된 예수님을 봐야할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너 자꾸 엉뚱한 것 쳐다볼래?
창세전을 못 쳐다 보니 !!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을 왜 못 보니 !!!

 

이것만이 비극의 매듭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래서 7천명과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지

다른 것을 거부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소식 희년 복음입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입니다.
희극인 겁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이유입니다.
 

돈이라는 권력의 주인이 아니다는 겁니다.

 

무능한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바 되는 무능한 세미한 음성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히려 초과잉의 살아계심으로써 율법이라는 거룩이 일점일획이라도 안 떨어지도록 다 이루시겠다는 주님의 불의한 재물 십자가에 대한 충성입니다.

수태치 못한 자가 오히려 더 많은 자녀를 가지게 된다는 종말
곧 더 나쁜 종말 때의 상황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많은 자녀를 가졌던 여자들은 자녀가 다 죽어버리는 상황이니
얼마나 종말때가 나쁜 때냐 말이죠. 성령의 시대에 말입니다.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합니다.

 

이런 기적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에 즉 비웃는 바리새인의 시선에서
더 더 더 악하고 더 나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습니다
.

 

이것이 유일한 은혜의 방식이요

살아계심을 드러내시는 방식입니다.

오직 이런 예수님께만 충성하시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도 심지어 눈에 보이는 자기자신도 충성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어떤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진짜 주인은 예수님 뿐입니다.


왜? 나 보다 먼저 있었던 비존재로써의 예수님 이기 때문입니다. 


비존재 곧 있으나 마나 한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오히려 모퉁이 돌 머릿돌 주춧돌이 존재 보다 더 나은 초과잉적 존재가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불의한 내가 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에

죄인 중의 괴수인 내 죄를 위해 피흘리기까지 복종하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십자가 곧 하나님의 아주 아주 나쁜 저주 입니다.


그 더 나쁜 하나님의 저주에 내 대신 복종 충성 하신 겁니다.


즉 내 대신 죽으신 분만이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입니다.

다른 것은 다 허구 요 우상입니다.


그래서 유일한 실상 유일한 현실은 이 아주 아주 나쁜, 하나님의 나쁜저주인 십자가 입니다.

이 불의한 십자가에 충성하신 이유 입니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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