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을 수 없는 빚 뒤짚어 씌우는 불의한 청지기 (눅 16: 1- 9)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뒤짚어 씌우는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

 

 

(16:1, 개역)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16:2, 개역)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16:3, 개역)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16:4, 개역)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16:5, 개역)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16:6, 개역)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16:7, 개역)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16: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2:17, 개역)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개역)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실은 제목이 잘못 되었습니다. 빚의 전이 전치 이동 변이 이렇게 해야 하는데

경제학적인 용어를 제가 정확히 몰라서 이고

 

또 빚지우기 즉 빚의 초과잉적인 빚의 의미를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얼마전에 쉰들러 리스트 라는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뭐 볼 때 마다 그 영화는 불의한 청지기가 생각이 날 정도였는데

 

오늘 이 본문을 보니 로마서 악을 선으로 갚아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자체가 주체가 되도록 하는 의미로 보이는 겁니다.

 

분명 청지기는 잘못이 들통났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고 조치가 떨어진 겁니다.

 

문제는 여기까지는 우리가 다 이해할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부터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가 됩니다.

 

해고 조치가 된 불의한 청지기의 최후 행동이 말입니다.

 

그의 행동이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입장이기에

다시는 더 이상 소유를 허비치 못하기 위한 조치로써 해고가 떨어졌는데

불의한 청지기는 그때에 비로소 그의 최후의 행동

곧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일을 하지니 이미 몸이 젊을때와는 다르고

그래서 생각한 지혜가 바로

 

주님에게 빚진 사람들을 탕감해주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내가 짤렸을때에

그들이 나를 영접해 줄 것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전환 시키는 겁니다. 빚진자 만들기는 그런 희년의 완성의 의미입니다.
내 죽을테니 넌 살아라 라는 겁니다.
이것을 대제사장은 가르침과 실천으로 분리시켜서 행합니다. 그리고 예수 하나 죽이고 바나바를 대신 살려서
예수 이단 하나 죽이고 유대인 전체 살려서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내 하나 죽을테니 너희는 살아라 라고 예수님 자신이 곧 신이다는 것을 죽음으로써 표현한 겁니다.
그 자체가 이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죽는 신이란 인간에게서 특히 유대인에게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기 때문에 신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가르침 플러스 실천이 아니라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는 택도 없는 소리임을

우리 현실감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혜라고 했고

빛의 아들들 보다 더 나은 지혜라고 과시 자랑할 정도로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지혜라는 말은 초과잉적 현실적이다는 겁니다.
현실 보다 더 현실적인 더 나은 초과잉 현실성말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칭찬할 만한 것일까요?

주인의 마음에 매우 흡족할 정도로 들었다 라는 겁니다.

 

곧 주인의 마음 또한 이런 마음이다는 겁니다.

 

분명 주인이 자기 소유를 허비해서 짜를려고 했는데

주인이 다시 자기에게 빚진자를 이 불의한 청지기가 더욱더 자기 소유를 허비하는 식으로 행동했다면 이것은 칭찬할 꺼리가 아니라 오히려 처음보다 더 심한 것이니

형벌을 더욱더 가해야 할 것 아닙니까?

 

사실은 이것이 오늘날의 시선이기 때문에

이런 불의한 청지기를 고지곳대로 따라하시면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하니 그것을 고지곳대로 따라한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닌거죠

얼마전까지 부활절기만 되면 필리핀 카톨릭에서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아 못을 박는

고난주간을 흉내내는 자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금기했는가 보던데

 

왜냐하면 그것 한번 유행타면 다 따라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는 그 어떤 것도 따라할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이웃사랑 실천도 제발 좀 따라 하지 마세요.

 

오늘 본문처럼 불가능성 단절의 의미이지 우리보고 행하라 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웃사랑실천하겠다는 놈을 올무쳐서 잡겠다는 마귀 잡기 위한 겁니다.

 

그 어떤 성경도 따라 할수 있는 것이 결코 없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은 바로 종말의 행동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흉내낸다고 종말의 행동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종말은 가르는 취지입니다. 거룩이다는 겁니다.

 

곧 주인의 마음은 종말적이며 유일한 지혜이다는 겁니다.

이 주인의 선함(종말, 지혜)을 이 불의한 청지기는 불의한 행동으로써 주인의 선을 이룬 겁니다.

 

이 불의함이 뭐냐?

 

이것 때문에 몇주간 좀 고민 했는데요

 

설명을 잘 못하더라도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무슨 말인줄 아실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극이라고 합니다.

 

즉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비극인데

인간들은 이것을 비극이 아닌 선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극을 뒤짚는 것이 바로 은혜의 나무입니다.

이 생명의 나무를 따먹을려 접근하자 단절시켜 버립니다.

비극인 주제에 생명의 나무까지 따먹어 버리면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비극인 겁니다.

이미 비극의 최극치인데 셍명의 나무까지 손댈려고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비극적인 실제상황에 처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란 은혜 쪽에서 넘어와야 비극이 희극으로 바꾸어지는 겁니다.

전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숙제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결단코 못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즉 비극의 상황을 제대로 각인시켜 주십니다.

너희들 비극적 상황이야

그러면 바리새인 보다 나으면 희극적이냐?

안 그렇습니다. 비극적인 상황을 직시하냐 라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 보다 나을 인간도 없을뿐더러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을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물론 해도 안 되지만 말입니다.

단절의 직시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 보다 나을 방법은 없나요?

이런 오이디푸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뫼비우스의 띠를 짜르는 방법

곧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면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가 예수님 의 뿐이기에

모든 것이 한 방에 해결 되는 겁니다.

 

이것을 지난 주부터 계속해서 어머니랑 나눈 대화 주제였는데

바로 선물입니다.

 

믿음은 선물인데 이 선물을 순 엉터리로 이야기 하는 자들이 얼마전 까지도 많아서

어머니께 그것이 아니다 라고 했지요

 

선물이란 바로 배신 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치면 불의함 이다고 했습니다.

 

왜 믿음이 선물이냐?

왜 지혜가 어리석음이요 불의함(거리낌) 이냐?

 

반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마귀만을 상대로 하십니다.

마귀가 가만히 있는데 주님께서 마귀에게 다가가 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욥에게 물어보도 않고 마귀랑 일방적으로 내기를 하죠

그리고 마귀가 말려들려면 마귀가 깊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을 내기 걸어야 말려들지

시시한 것 내어 놓으면 내기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잠식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잠식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대한 실천입니다.

이것이 마귀에게 빠진 인간들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요?

 

그러니 마귀를 거칠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인간을 예수님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양상이 달라진 겁니다.

 

말씀을 실천할수 없다는 것을 마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그 내기에 자신만만하게 나서는 겁니다.

 

아무도 말씀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조건을 걸죠

하나님이 봐주기 없기

오냐 생명만 빼고 다 쳐도 된다

옳지 그러면 더더욱 하나님을 배신하지 안 배신하겠는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이 마귀에게 더 유리하도록 조건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생명 빼고는 다 쳐도 된다고 말이죠.

그러니 욥의 마누라가 너를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저주 하고 죽었뿌라 라고 할 정도이니

틀린 말이 아닌 겁니다. 마귀가 얼마나 정확한 말만 골라서 하는지 말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과연 욥의 믿음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고 여겨서

그렇게 마귀까지 끌어들여서 내기를 걸고 마귀가 자신이 불리한 조건을 다 좋은조건으로 다 바꾸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넉넉하게 승리할 것을 알고 먼저 내기를 건 것일까요?

 

아닙니다.

욥을 본게 아닙니다.

 

욥을 보게 되면 그의 실천할 수 있는 육의 건강을 치면 곤란해 지는 겁니다.

 

마귀는 육의 건간만 쳐 버리면 실천은 물건너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욥을 본게 아니라 욥 속에 있는 그리스도 곧 약속을 본 겁니다.

 

이것을 선물이라고 하고 이 선물은 마귀가 모든 권력을 다 쥐었을때에만 작동하는

배신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배신이야 말로 최고의 사랑이다는 거죠.

 

오늘 본문으로 치면 불의함이야 말로 최고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뭐에 자신만만했는고 하니

말씀이라는 가르침이 있고 그 가르침에 대한 화답이 바로 인간의 실천이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행함이라고 합니다. 곧 비극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사함을 받은 자의 행복이라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용서 받았다고 희극을 펼칩니다.

 

비극이란 말씀을 오독한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럼 희극이란 말씀을 제대로 정독한 결과인 겁니다.

 

처음에는 비극, 그 다음에는 희극

 

욥의 세 친구는 다 같은 비극적인 차원에서 행함 문제로

뭔가 잘못한게 있기 때문에 너는 그런 저주를 받았다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 또한 비극적인 차원에서 즉 행함차원에서

그 어떤 잘못한게 없는데 너희들은 자꾸 나를 몰고 간다고 합니다.

 

욥을 오독하는 세친구의 주장에 욥은 너희들은 오독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정독은 욥 본인 조차도 정독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했기에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행함의 문제로 시비를 거니 행함의 차원에서만 반박할 뿐이지

도리어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 뿐이지 뭔가 시원한 답이 속시원하게 나오질 않습니다.

 

즉 행함의 세계에서는 답이 없어서 정죄 밖에 없습니다.

자기도 못 지키면서 남을 정죄하는 모호하고 의문만 남는 오독의 반복이며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버린 셈입니다.

이것이 미완료입니다.

 

가르침이 따로 있고 거기에 부합해야할 실천이 따로 있어서

언제 일치할지 모르는 상황인 겁니다.

 

엘리야도 850 1 로 싸워 이겼고

주님이 시키는대로 다 했는데 왜 나만 남았냐고 내 열심히 특심이 아니였냐고 자살시위를 합니다.

 

가르침이 따로 있었고 그 가르침 대로 실천을 하는 내가 따로 있어서

그 가르침에 맞게 실천을 했는데 왜 이런 결과를 주냐고 따지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 오기 전의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관입니다.

 

이것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 비극입니다.

 

그럼 은혜 곧 선물은 뭐냐 그런 하나님을 배신 때리는 겁니다.

결국 인간 자신들이 굳게 믿고 있는 하나님을 배신 때리는 겁니다.

 

자신과 일치 시킨 하나님

 

곧 자신이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배신 때리는 것이 바로 선물 곧 믿음이라는 겁니다.

결국 행함을 거부하는 겁니다.

 

가르침이 있고 실천이 있고 이 둘의 합일을 추구하는 하나님 개념을

마귀가 심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곧 믿음이 온 이후에는 그 하나님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모호한 하나님이요 비극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극을 넘어서는 방식이 바로

내가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비극이고

 

예수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 오시는 것이 바로 희극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이미 희극인 셈입니다.

 

배우는 대본이 따로 있고 즉 가르침이 따로 있고 그 가르침에 실천이 따로 있듯이

대본에 맞는 연기를 따로 해여 할 입장이라서 비극이지만

 

희극인은 대본과 연기가 따로 필요가 없는 희극인 그 자체가 희극이다는 겁니다.

 

 

비극인인 배우는 연기를 잘해야 칭찬받고 못하면 욕먹지만

희극인은 뭘해도 다 죄요 뭘해도 다 용서뿐이다는 희극 그 자체인 겁니다.

 

이 희극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심지어 기독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땅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자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비극입니다.

 

그런데 정작 희극은 거꾸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러와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와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모습이 희극이다는 겁니다.

웃끼는 코메디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경멸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세요

 

모든 인간들은 신의 나라에 들어갈려고 애를 쓸려고 신의 가르침을 실천할려고 하는데

이것이 비극이요 마귀가 인간을 장악한 모습인데

 

정작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와서 인간들로부터 마귀취급받아 죽는 것이

바로 희극, 즉 비극이 아닌 오독이 아닌 정독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오독을 해서 연기를 합니다.

이것이 추상적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르침이 있고 즉 대본이 있고

그 가르침에 걸맞는 실천 즉 대본에 따른 연기를 해야

이것이 제대로 된 삶이다 라고 비극을 반복합니다만

 

이것이 추상적이다는 겁니다. 모호하다는 겁니다. 의문의 증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 자체는 구체적 보편성을 이룬 겁니다.

 

십자가라는 용서를 명료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행함으로 빠지는 자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할 정도로

십자가 라는 불의함을 그들은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실천했고 그런데 나만 남았으니 이것은 비극이다 라고 외칠때에

7천명 남겨 놨다고 하니 갑자기 코메디가 되는 겁니다.

 

채널돌리기가 바로 희극인데

자꾸 추상적인 행함을 행했다고 우기는 겁니다.

행함을 따지고 보면 행한 것도 아닙니다.

 

행할려면 온도 습도 환경 공기 날씨 태양조명 다 있어야 합니다.

태양을 비춰주지도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가 행했다고 우기니까 웃끼는 소리죠

 

그래서 7천명 남겨 놨다고 하니까

 

방금한맗 취소 취소 취소 라고 하는 겁니다.

 

욥도 취소 취소

자살시위 하는 요나도 취소 취소 취소

 

이 취소가 바로 희극 코메디 요소로써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곧 원인 없는 결과인데

자꾸 원인 있는 결과다 행함이다 라고 우기니까

행함 그 아름다움이여 라고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원수 짖을 하는 거죠.

모호함 속에 다시 들어가 버린 겁니다.

 

베드로가 7번 용서 했다는 것이 얼마나 모호하며 추상적인지

그런데 그것이 다들 부러워 할 정도이니

얼마나 마귀에게 잠식 당한 상태인가 말이죠

 

이 행함을 뿌리채 뽑아버리는 것이 구체적 보편성

미완료가 없는 완료로 명료하고 확정적인 완성으로써 770 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7천명 이다는 거죠.

 

희극입니다. 넌 오독한 거야 제대로 정독하렴 내가 보여줄게 770번 용서해

 

그제서야 자기 용서를 포기하는 겁니다.

도리어 용서 받아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희극입니다.

 

어떻게 7번 용서 하기에서, 770번 용서 받기로 채널돌릴수가, 가로지르기가 될 수 있나요?

 

이것이 설명이 안됩니다. 그냥입니다. 무조건 일방적이다는 겁니다.

즉 원인 없는 결과이지

도저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도 안되는 웃끼는 소리 맞습니다 맞고요

그 웃끼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만약 말 되는 소리가 되어 버리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기쁜소식이 아니라 비극 슬픈소식입니다.

희년인데 망년이 되는 겁니다.

은혜의 해가 되어야 하는데 선악의 해가 되는 겁니다.

 

오늘 불의한 청지기가 왜 지혜로우냐?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즉 종말적이다는 겁니다.

끝을 미리 끌어당겨서

주인의 선함을 불의한 청지기가 이왕 끝난 판국에 대신 펼쳤다는 것입니다.

즉 주인의 선함이란 원인 없는 결과로써 무조건적인 희극이다는 겁니다.

코메디 요소 7번 용서 실천이 아닌 770번 빚진자 만들기 였다는 겁니다.

 

이것이 희극적 요소로써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한 행동인 참지혜이다는 겁니다.

 

종말적이다는 말은 거룩을 원인 없이 결과로써 뒤짚어 씌우는 의미로써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개역)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2:31,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거룩한 영을 그냥 부어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이라는 가르침을 실천해서 붓는게 아니라

말씀을 단 한 개라도 지킨 적이 없어도 거룩한 영을 때려부어서 거룩하게 했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요 구체적 보편성인데

 

만약 내가 말씀을 단 한 개라도 지켜서 거룩해졌다면 그것은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는 또 모호한 미완료 속에 들어가는 비극이 되는 겁니다.

 

거짓선지자의 역할이 이 비극 속에서 못 벗어나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나 희극은 무조건적인 이유없는 용서입니다. 무조건 예 뿐이지 아니요 함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감사 뿐입니다.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은 보편성 즉 집단성 속에서 어느 개인 하나가 가르침을 실천 못해서

보편성을 못 이루어 취소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무조건적인 집단적 거룩 앞에서

개인의 거룩실천 따위를 취소 취소 해 버리는 겁니다.

7번 용서 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 취소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습니다를 취소 취소 취소 해 버리는 것이고

밤새도록 피부병 때문에 벽돌로 끍어댄 것 낫게해달라고 한 것 거룩을 봐버리니까 취소 취소 취소 재를 뿌리고 땅에 얼굴을 쳐박고 생일을 저주하면서 취소 취소 취소 해버리는 것이고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 안 버리겠다고 한 것 취소 취소 취소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개인적인 신앙의 거룩성들을 일괄 취소 시킴으로써

구체적 보편성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감히 쨉도 안되는 거룩을 흉내내었다고

다시는 그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앞에서

믿는 척 행하는 척 충성하는 척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구체적 보편성 앞에서 자기 행함 포기인 겁니다.

 

가르침 플러스 실천 앞에 그 행함세계 앞에

믿음은 가르침 따로 실천 따로가 아닌

그 자체로써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믿을 필요 없이 저절로 믿게 되는 관계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관계가 저절로 맺어진 겁니다.

 

관계는 오히려 배신 모순 선물 로써 증거 하하십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는 불의함(배신, 모순)으로 증거하십니다.

 

부모가 자신들이 자녀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자녀 보는 앞에서 어겼을때에

모순된 행동을 했을때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녀도 개의치 않으면 그것은 관계입니다.

오히려 웃을 수 있다. 7천명 남겨 놨지롱 짜잔

더욱더 사이가 돈독해 집니다.

 

분명 비웃었는데 웃음이라고 이삭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보는 앞에서 자신들의 가르침에 모순된 행동을 보였을때에

난 이제 너희들 부모 노릇을 못하겠구나 라는 부모도 가짜요

부모가 모순된 행동을 보이니 나는 자녀가 안 될랍니다 라는 자녀도 가짜입니다.

여기서는 비극 밖에 없습니다.

뭘 해도 모호함 속에 들어갈 뿐입니다.

 

아내와 가정부의 차이도 이런 식입니다.

 

결국 거룩(불의함, 모순, 배신, 선물) 만이 가른다. 차이가 나는 간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탕자는 희극이요 맏아들은 비극입니다.

 

탕자는 이유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요, 맏아들은 자꾸 원인을 따집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은 바로 종말의 행동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흉내낸다고 종말의 행동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종말은 가르는 취지입니다. 거룩이다는 겁니다.

 

가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가 의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종말의 의식이 될 수 없고

그 다음 문제는 갈랐을때에 양쪽으로 분열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입장에서 그 양쪽을 내가 설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독자적으로 한 행동 자체가 종말과 무관한 겁니다.

 

이웃사랑 실천 자체가 독자적인 행동으로 자기 하기 나름이다는 식이 안된다는 거죠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의 종말의 세가지 비유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25:31, 개역)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25:32, 개역)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25:33, 개역)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25:34, 개역)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내 스스로 한 행동으로써 오른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 기준의 오른쪽 왼쪽을 설정할수 없듯이

이웃을 감기 건방지게 내가 설정 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주님쪽에서의 오른쪽 왼쪽 기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수시로 바뀌어버릴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기준으로써 예수님은 이동해 버리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청지기는 정결한 청기지인데

칭찬도 그냥 칭찬이 아닌 특급 칭찬이야 라고

누구와 비교하듯이 갈라버리듯 구분 구별 차이로써

저쪽 빛의 아들과 이 쪽 불의한 청지기로써 가르는 겁니다.

 

문제는 그 결과의 입장에서는 빛의 청지기이고

저쪽은 불의한 아들이어야 하는데

 

왜 구지

 

구지 꼭

 

반드시 불의한 청지기 라는 부정성을 의도적으로 달아버리느냐 하는 점에

 

우리의 시선을 차단하는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곧 종말입니다.

 

종말의 시선은 곧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보는 겁니다.

 

십자가의 근처에서 보는게 아니다.

근접에서 보는게 아니라

 

아예 그 심판의 불 속에 들어가서 보게 되니

 

의로운 빛의 청지기와 불의한 아들들의 갈라짐이 아니라

 

반드시 표현 자체가 불의한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 보다 더 훨씬 지혜롭다 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우리가 말고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그렇게 외치는 표현이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부정성, 불의함, 배신, 모순성으로써의 희극이다는 겁니다.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분명 그는 찔렸는데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고

분명 그는 질고를 당했는데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더라 말입니다.

 

희극이다는 겁니다. 희년.

 

그러니 우리는 흉내 차원을 훨씬 떠나버린 입장이기에

그냥 무능함을 인정하시면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못합니다.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단절성을 직시했거든요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합니다. 택도 안됩니다. 번데기 앞에 주름 잡기입니다.

 

또 이래 말하니 무능함을 인정하면 그러면 구원 받냐 라고

무능함을 인정하는 행함을 하면 되느냐 라고 우깁니다.

무능은 이미 벌써 차단된 입장이니

포기하면 구원된다가 아니라

그 구원 조차도 포기하라 라는 겁니다.

일체 내 쪽에서는 모든 것이 다 단절된 입장이다는 겁니다.

 

개인구원을 시도하기는데 집단구원 즉 구체적보편성입니다.

 

그러면 해결 방법은 모든 것이 저쪽에 달린 겁니다.

나 외에 다른 내 바깥에 의해서 좌우되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내 손에서 떠난 문제인 겁니다.

 

바깥 조차도 두 개를 반드시 갈라서 그 사이의 틈 빈공백에서 긍휼이 나오느냐

진노가 나오느냐에 달린 문제이니

 

이것은 그 어떤 기대치도 가질수 없는 0 프로입니다. 0% 속에서 빈공백에서 나오는 것이 거룩이거든요.

 

희극은 바로 빈공백에서 나오는 겁니다. 7천명을 아무리 봐도 나올수 없거든요

과연 엘리야가 숫자를 헤알렸을까요?

나만 남았는데 어떻게 7천에 생기겠습니까? 헤아리면 저절로 모호해집니다.

기쁨을 스스로 발로 차는 식입니다.

그냥 저절로 믿겨져서 희극 기쁨을 누렸을까요?

원인 없는 결과이거든요.

 

어딜 감히 거룩에 조금이라도 접근해 볼려고

거룩을 흉내내고 어떻게 해서든 내 쪽에서 뭔가를 해 보겠다는 것 자체가

허용이 안된다는 겁니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아주 재미있는 역설을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독일인들이 나치를 중심으로 해서 유대인 말살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끝난 겁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냥 죽어 마땅한 당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한 명의 이스라엘이 죽었다면 이미 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공동 운명체 가 이스라엘의 특이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땅한 죽음 속에

마땅히 독일인 손에 달린 죽음인데

 

그 독일인 손에서 구원이 벌어지는 겁니다. 불가능입니다.

 

뭐가 이 영화에서 특이했는고 하니

 

더 많이 살려낼수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통곡을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차고 있는 금이면 두 명 더 살릴수가 있었는데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상하잖아요

통곡은 누가 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아닙니까?

 

그런데 구원시킨 자가 더 살려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지옥을 누가 더 직시를 하고 있는고 하니

 

지옥에 갈 자가 아니라

지옥에서 꺼내고 있는 자가 더 직시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지옥에서 건져낼려고 얼마나 불의한 짖

곧 지옥의 짖만 골라서 했습니까?

 

다른 독일인에게 아부 하고

뇌물을 먹이고

어떻게 해서든 한 명이라도 빼돌릴려고 온 갖 더러운 짖을 골라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이 그 환경이 더러운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의미는 기생라합의 거짓말이 그와 그의 가정을 구원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부 뇌물이라는 불의한 짖이 구원을 한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인거죠.

 

그래서 나치 보다 더 심하게 지금 현재 육적 이스라엘 국가가 가자지구 곧 팔레스타인 주거지역을 공습한다고 그들이 나치이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은 말하겠지요 그래도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그거 아직 배가 덜 고파서 그런 말을 배불러서 하는 겁니다.

과연 배 고프면 그런 소리 나올까요?

 

관계란 행함에서는 도저히 안 나옵니다.

오로지 믿음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쉰들러 라는 구원자 조차도 지옥 속에서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사사기도 생각이 나네요 어중이 떠중이로 구원자를 삼았으니 말입니다.

 

그런 쉰들러 행동에 독일장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의로움 정의를 실현 하는 것이 사실은 독일인 관념론의 이상 표본인 겁니다.

그것에 방해되는 이스라엘을 제거하는 겁니다.

 

그런 독일의 관념에 쉰들러가 자신들 보다 더 그런 표상에 가깝게 행동을 하고 있으니

그들의 정신을 자극하면서도 지금은 그러면 안되다고 비웃는 겁니다.

 

그 비웃음이 바로 자신들에게 뇌물을 먹이면서까지 부정한 짖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스라엘 이라는 자신들의 원수에게 그 목마름을 해소시키는 물을 뿌리는 겁니다.

 

독일인의 이상 곧 숭고하고 아름다움을

 

누가 더 숭고하게 펼치는 겁니까?

 

진정한 숭고함을 불쾌하기 짝이 없거든요

 

부끄럽게 머리에 숯불을 얹인 듯이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진짜 거룩이다 말입니다.

웃음 곧 희극이 되게 하니까 말입니다.

 

비웃음이 웃음으로 되게 하는 것은 행함이 아닌 믿음 그 자체 되신 예수님 뿐입니다.

인간의 믿음 조차도 행함 밖에 안되는 겁니다.

 

원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거든요

 

이웃사랑 실천하지 마세요

불편한 이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이웃은 예수님 뿐입니다.

 

자신들의 원수를 먹이고 마시고 배불리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싹쓸이한 재산으로 인해 빵도 마실 것도 살수가 없어서 얼마나 주리고 목말라

자신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으냐 말이죠

 

이런 배신의 구조를 뺑뺑이 돌리듯이

큰 액수의 알바비를 지급해서 한 쪽은 경찰복 교도관 다른 한 쪽은 죄수복 죄인을 입혔더니

이유없이 조 패고 이유 없이 또 그냥 맞고 반항도 안해

 

그런데 일주일 뒤에 역할을 뒤 바꾸니

역시나 이유 없이 조 패고 아무런 죄책감 양심없이 나쁜놈은 내가 잡아야 된다고 족치고

다른 한 쪽은 이유 없이 나는 죄인이니까 맞아야 한다고 반항 조차도 안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런 실험이 시도 되었는데 짐바르도 실험, 스탠 포드 감옥 실험 이라고 합니다.

 

너무 그 역할에 집중 몰입해서 과도한 사태로 중지시키기도 했다는데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거리 두기, 간격 벌리기를 시도 한다면

 

그것을 거룩을 위한 거룩을 사수하고자 하는 취지였다고 핑계를 대면

 

예수님은 그런 말도 안되는 외설에 더 심한 외설로써 거리를 두시는데 있어서

바로 불의한 청지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래 되면 인간의 간격은 좁힐수가 있는 겁니다.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구약에 그런 원인들이 있습니다.

이방인과 가까이 하지 말라부터 해서 역사 속에서 점점 앙금이 쌓이도록 하는

그러니 쌓인 것들이 환경이 바뀌게 되자 확 터트리게 되는 겁니다.

괜히 성전 안에서 두 사람이 아닌 겁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원수지간이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누가 뭐라해도 원수인 세리와의 차별성 간격을 반드시 두는 것이

신앙인 겁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자꾸 구별되어야 하지 같으면 안된다고

심지에 세상사람들도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고 있으니

반드시 그 간격을 형성하는 것이 신앙인 이다는 겁니다.

믿음 자체가 신앙 자체가 차이 곧 간격인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원인이 없이 간격을 벌려 버리면 이것은

그야 말로 종말의 입장 완전 끝장난 입장인 제일 끝을 미리 확 끌어당겨 버리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더 외설적으로 간격을 벌려 버리면

믿음이고 뭐고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바리새인을 넘어설 재간이 있는 자는 없도록 하신 겁니다.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외설이 그렇게 바리케이트를 친 겁니다.

 

제발 좀 믿지 말라고

그것도 간격이라고 들이대냐 라고 비웃는 겁니다.

간격 다운 간격 좀 내어놓으시지?

 

7번 용서?

아이쿠 많아라

 

나치 쉰들러는 천명인데?

 

폴란드에서의 유대인은 800명인데

쉰들러 혼자 천명 어딜 감히 7명을 들이대????

 

쉰들러 후손이라고 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 한명 한명의 이름을 다 떠올려서 기록하는 겁니다.

 

우리는 점점 주변의 사람 이름 조차도 기억 못합니다.

저는 더 심합니다. 이름을 제일 기억 못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안면인식 장애가 있어 얼굴도 까먹어 버립니다.

 

그런데 겨우 일곱명??????????

 

그것도 간격이냐 말이죠?

 

간격을 벌릴려면 좀 제대로 벌리던가?

 

천명을 그 빈공백의 틈에 안착시켜놓고도

펑펑 웁니다.

금가락지로 두 명 더 빼낼수도 있었는데

차를 팔아서 3-4-5 명이라도 빼낼수 있었는데

 

요즘 교회 목사들 정신이 팔려 있어서 이런 의식을 가진자 없습니다.

또 있다고 해도 그런 목사로 안보시면 됩니다.

어차피 목사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채울려고 정신이 없지

지옥가는자를 빼낼려고 지옥으로 뛰어드는 불의한 목사는 없거든요

 

오히려 지옥을 만들려고 교회라는 강도의 아지트를 세우기 바쁜거죠

강도의 소굴 채우기 위해 바빠도 너무 바빠

 

오히려 쉰들러 로부터 빼내임을 당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제발 목사를 제발 좀 때려 쳤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물론 생계직업이 아예 안되면 괜히 때려치울 필요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다른 길이 있다고 여기면 빨리 때려치워라 말이죠

 

예수님 혼자 목사 되어도 충분하거든요

 

불의한 청지기는 그야말로 불의한 것 맞습니다.

문제는 그 불의함이 우리를 살린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단 맞아요 그런데 그 이단성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악마 마귀의 대 마왕 바알세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악마성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이것이 희극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게 맞아요 맞습니다 맞고요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으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받은 겁니다.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것이 다말 이야기 그대로입니다.

 

결국 왜 불의해 질 수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을 쳐다 보라는 취지이지 우리보고 불의한 청지기 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이 그 불의한 청지기 이다는 겁니다.

 

소위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운 불의한 청지기 말입니다.

시아버지 유다 보다 더 옳은 며느리 다말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다말이 불의함에 왜 충성했는가? 시아버지를 지옥에서 건져낼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다말을 불에 태워 버릴려고 했잖습니까?

유대인이 예수님을 그렇게 했고

우리 또한 현재에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런 원수인 우리에게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이기시더라 말입니다. 그런 지혜를 불의한 청지기로써 표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불의함을 다 뒤짚어 쓰신 겁니까?

 

도저히 빚 갚을수 없도록 더더욱 빚을 뒤짚어 씌우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간격을 벌리는 진짜 사랑입니다.

 

어설프게 사랑하는 7번 용서가 아닙니다.

천명을 살리는 쉰들러는 유대인이 만든 영화로까지 제작이 되었는데

정작 그 유대인은 오늘날 천명을 살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더더욱 세계의 자본을 좌지우지하고 있을까요?

역시나 히틀러 이전의 유럽상황과 똑같은 자본가를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는 기대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특징은 도저히 불의한 청지기를 만들어 낼수 없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발적으로 하십니다.

 

그 본을 예수님으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로써 원수가 목마를 때 마실 것

원수가 주릴때에 먹을 것을 주신 겁니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가 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반대편에 서서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원수됨을 직시하고

예수님의 불의한 행동 때문에 지옥 마땅히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빚을 탕감당하는 죄를 피로써 씻김당하는 위치에 놓여져 있다는 겁니다.

 

즉 원수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그런 예수님을 도리어 심판했습니다.

 

불의한 자라고 불 속에 떠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는 물증 세가지를 잡힘으로써

구원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아니 외칠수가 없습니다.

 

나의 의로움 보다 더 나은 불의함이기 때문입니다.

 

곧 십자가라는 종말 때에만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나의 죄악을 담당할 줄 모르는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은적 없는

그런 것들 율법이나 성전이나 하나님이나 제사장이나

그런 외설적인 것 보다 더 외설적인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 만이

 

나의 모든 허물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다른 것은 나의 허물을 정죄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못합니다.

진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십자가의 피 흘림 뿐이니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심에 감당치 못함

 

 

(15:11, 개역)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5:12, 개역)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5:13, 개역)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5:14, 개역)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15, 개역)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5:16, 개역)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17, 개역)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5:18, 개역)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5:19, 개역)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15:25, 개역)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15:26, 개역)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15:27, 개역)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15:31, 개역)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15:32, 개역)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열매로 알리라 라는 말씀으로 자신들의 열매를 자랑하는 성화론자들은

그 열매를 자신들의 의로운 삶과 성공한 모습

자기 스스로가 아닌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 부터의 존경 등등으로

 

소위 열매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열매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듯이

 

그 나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가 그런 입장이면

열매 또한 죽었다가 살아나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간다.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간다

 

다 같은 말로써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불에 태워버린다라는 의미로

 

사실은 불가능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될수 없는 무능한 자임을 고백하면 되고

무슨 수로 바리새인보다 나을수 있습니까 라는 단절성으로써

절대 무능함을 고백하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