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마리 양 보다 더 기쁜 잃어버린 한 마리 양

 

 

(15:1, 개역)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5:2, 개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5: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15:4, 개역)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15:5, 개역)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15:6, 개역)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5:8, 개역)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15:9, 개역)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지난 시간에 미완료는 완료 앞에서 비웃음꺼리가 되기 때문에

빨리 완료가 왔다면 화친을 청하고 미완료에서 손때라 라고 했습니다.

 

존재는 7번 용서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즉 그 어떤 존재들 보다도

더 많은 용서를 했다고 자부하는 식입니다.

딴 사람은 다 버려도 저는 예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베드로 라는 존재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존재 이전의 기능은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770이라는 기능 앞에서

존재는 와르르 무너질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존재와 존재와의 만남 곧 엘리야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을 성사 시킬려는 엘리야에게

존재를 배신 때리는 기능이 먼저 있었다는냥 나타나는 7천명 앞에서

엘리야는 이 모든 존재들 앞서서 있던 기능을 만나고 감히 내 열심히 특심이였다고 한 말을 취소 취소 합니다. 이런 부끄러움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오로지 예수님 자신을 위한 말씀만 전개하시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존재의 구원은 없습니다.

그 정도로 인간의 구원은 어차피 구원해 본들 모호합니다.

일만달란트 용서 해 본들 모호할 뿐입니다.

오로지 남는 것은 왕의 용서의 용서만 더 또렷하게 남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구원자 기능을 위한 복음에 참예 시킵니다.

어떻게?

 

바로 갈라짐이라는 사건의 거룩을 통해서 말입니다.

왜 꼭 그렇게 갈라야 하느냐입니다.

 

갈라지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갈라짐으로써 그 두 패의 간격의 사이에서 거룩이 나온다는 겁니다.

 

한번은 똑바로 누워서 몸을 쭈욱 기지개 펴듯이 하고 있는데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왜 오른쪽 왼쪽이 있어야만 하는가 라는 점입니다.

몸 자체가 살기 위한 조건을 갖춘 몸이 아니라

철저하게 종말을 말하기 위한 신체로써 구조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좌우 대칭적인 신체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께서 에스겔을 보다가 왜 선지자를 가만히 두지 않고

이렇게 짖밟고 저렇게 짖밟고

왼쪽으로 몇일 몇 년 오른 쪽으로 몇일 몇 년 왜 이러냐고 물으셨는데

 

선지자의 신체는 종말을 담아야 하는데

왼쪽 오른쪽 눕지 말고 그냥 한번에 똑바로 누워서 하면 안되는 이유는

그 사이의 간격이라는 공백을 통해서 그 공백에서 긍휼이 거룩이 나온다는 겁니다.

 

즉 일만달란트 용서가 한번에 탕감받는 사람으로 끝나면

구지 그 간격이 없이 용서 받았다 로 끝납니다.

 

그런데 일부러 백데라니온이라는 일만달란트와 상대적인 비대칭적 돈금액이 등장함으로써

졸지에 왼쪽과 오른편으로 갈라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현장으로 인해 간격이 생기고 그 사이의 공백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백데라니온은 이 일만달란트를 오히려 초과잉적으로 부풀리는데 동원이 되는 셈입니다.

 

인간 빼고 돈으로 이야기 하니 참 쉽죠잉

 

인간만 집어 넣으면 괜히 어렵게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긍휼이라는 용서는 어디서 나오느냐?

일만달란트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일만달란트를 오히려 증폭시키는 비대칭적인 백데나리온의 등장으로 인한

그 사이의 간격에서 나오기 때문에

용서가 취소가 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용서받은자는 삭제 당하고 누락되어도

그 용서는 초과잉적으로 증폭이 되더라 말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과잉성 즉 거룩의 과잉성이

그리심산 에발산 여섯지파씩 나누어서 갈라져 각각 산으로 올라갈 때

에발산(오른쪽)에 예수님께서 올라가셨음으로

우리도 에발산에 올라가면 거룩 곧 용서를 받는게 아니라

 

그 중앙 세겜에서 율법을 다 이룬 것이 사랑이다고 외치는 그 기준이

바로 두 산의 사이에 있는 그 간격에서 긍휼이 나옴으로써

에발산 저주산에 올라가면 구원된다는 식의 흉내는 통하지 않는 겁니다.

 

그 사이의 간격이 공백에 허물을 담김 당해야 할 판국이지

에발산(민둥산, 연약함, 미성숙)에 올라가면 공백을 무시한 결과인 거죠

구원의 조건을 갖추겠다는 심뽀입니다.

결국 허물은 그 공백의 빈터가 감당하는 겁니다.

 

거룩 곧 약속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깨끗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악하지 않고 선한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반대로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악함을 덮는 비대칭적인 구조로써의 거룩을 말하기 때문에

거룩은 자기 거룩 스스로, 악한자 죄인 강도 더러운자 병든자를 의도적으로 동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반대로

거룩이 동원하는 거룩의 대상물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거룩을 위해 조건을 갖추겠다는 식으로

선함과 깨끗함을 추구하다 보니(성화론=종교인)

 

오히려 거룩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렇다고 또 일부러 더러워지라는 말이 아니라

구지 새삼스럽게 막살 필요가 없이

이미 막살고 있기에 거룩은 이런 자를

자신의 거룩이라는 기능을 발휘하고자

사용하심으로써 저절로 참예가 되는 것이지

 

우리 인간의 구원 조건으로써 거룩은 전혀 아니올시다 라는 겁니다.

 

몇 년전인가? 좀 되었는데

 

제가 뮤지컬 영화를 좋아라 하는데

음악 영화 같은거 말이죠

 

레이 같은 영화를 무지 무지 좋아 합니다.

 

그 중에 전혀 뮤지컬영화인줄 모르고 봤는데 뿅 간 영화가 바로

 

시카고입니다. 다시 두 번째로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 보니 딱 그 영화가 생각이 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자 라는 기능 때문에

죄인을 부르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구원이라는 조건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껄끄럽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천재이고 머리 똑똑한 목사들도

이 부분에서는 한결같이 돌대가리 짖만 하는 겁니다.

왜냐? 결국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는 그것이 질서를 유지 못한다는 한결같은 주장입니다.

 

교회가 개판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목사 자리를 본인이 유지해보고자 하는 입장이기에

힘든 겁니다.

 

목사 본인도 개판인 죄인의 자리에 놓이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인들이 못 믿는 겁니다.

 

아무리 그런 상황이더라도 각자 가정교회로 돌아가면 전혀 문제가 되는게 없거든요

오히려 그런 모습을 감추고 교회에서는 가정에서 하는 버릇을 허용치 말자 라는 식으로

완벽한 포장을 하는 가운데 질서 질서를 외치고 있으니

과연 누구에게 보이고자 하는 모습인가 말입니다.

 

(1:11,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12, 개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13, 개역)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14, 개역)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15, 개역)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16, 개역)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17, 개역)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1:19, 개역)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1:20, 개역)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1:21, 개역)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1:22, 개역)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1:23, 개역)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교회란 늘 해체 당하는 겁니다.

해체한 그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이기에

항상 우발적이며 우연인데

 

이것은 필연적인 존재로 볼려고 하니

개판이 될까봐 두려워 불안한 겁니다.

이 불안이 인간의 믿음인 겁니다.

 

그러니 자원하는 심령은 없는채

보이고자 하는 성화라는 조건 갖추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놀랍게도

한국 교회 유명 목사 소위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그런 목사들 말고

조용하게 개혁적이며 양적이지 않고 질적인 목사로

소리소문 없이 유명한 목사들을 살펴보면

소위 진정한 개혁주의자들 말이죠

그런자를 살펴 보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불안함을 믿음으로 기가막히게 포장이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위선적입니다.

저 타락한 목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결국 유대인의 신앙은 불안이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하나님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 불안으로 뭉쳐진 하나님 제거 작전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불안으로 포장된 믿음인 예언을 그 필연적인 예언을

 

예수님은 모조리 우연으로 돌려버리는 겁니다.

 

필연적인 예언이 불안 속에서 믿음을 자리 잡고 있을때에

참고 참아서 기다리는 가운데

 

그렇게 참고 참아버린 것이 무색해져 버릴 정도로

흠모할 모양이 전혀 없는 싫어버린바 된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아주 우연히 나타나 버리니

얼마나 허탈하겠느냐 말입니다.

 

필연화 시킨다는 자체가 이미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교리죠 법이죠 규례 절기 행사 등등입니다.

전혀 불편함이 없는 숭고함이 없는 거룩함이 없는 편안한 편리성입니다.

 

그래서 상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그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인간의 신앙이 더더욱 불안으로 똘똘똘 뭉쳐져서

예수님의 방금 실현된 예언을 취소 시키고자 갑자기 열심을 일심으로 한 덩어리가 된 일심동체가 되어서

 

취소 시키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 오래 오래 참고 참아 기다린 만큼

가치가 있을려면 자신들의 그런 믿음을 담아서 귀하게 나타나야 너무 너무 믿을만하고

편안함과 가치가 있는데

 

너무 너무 우발적으로 우연찮게 아무런 기다림도 없이 아주 가볍게 마치 촐랑 거린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뻔뻔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냥 나타나서 보여줄 것 다 보여주고 가버리니까

 

얼마나 허탈하냐 말이죠

 

마치 이겁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인데

어머니에게 각인이 되었는지

오히려 저에게 알려주시겠다고 도로 저에게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뭔고 하니

 

분명 성경에 기록된 예언대로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셔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바리새인도 절대로 반대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이유없는 복종과

주님이 시키는 것 다 할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러 못믿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그 어떤 믿음도 다 피해서 오신 겁니다.

 

그러니 도저히 믿을 구석 하나 없도록 하시는 일만 골라 골라서 하시니

아무도 믿을수가 없는 겁니다.

 

제자도 안 되는 겁니다.

 

도저히 안되기에

약속을 하십니다.

 

약속한 성령을 주시겠다고

 

성령을 받으면 그때서야 모든 것이 저절로 술술 믿겨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개방인가?

 

그 반대죠

분명 못 믿도록 하는 방식만 골라 골라서 도저히 못 믿도록 한다고

 

그렇기에 성령 받으면 이 성령받은 사람은

납득이 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게 아니라

도저히 못 믿는 소리만 골라 골라 하더라 말이죠

 

성화론자들은 결국 다 사기를 치는 겁니다.

개혁주의도 마찬가지

그냥 아무도 없다고 여기시는게 낫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으니 상심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납득이 되는 소리가 될려면 기다리고 참고 참은 만큼 기다린 만큼 거기에 부합되게

구름타고 오시면 다들 믿고도 남을 테고 의심할자가 아무도 없을텐데

 

일부러 못 믿는 방식으로만 골라 골라서 오게 되니

 

사도 바울 본인도 그 단절을 격고서

본인은 단절 당한채

성령을 받으니 비로소 그 이전의 모든 것이 배설물이였음을 알고

개방을 외치는게 아니라 도리어 단절을 외치니까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모두다 믿는게 아니라

갈리지는 현상 때문에 두 패로 갈려서 싸움과 소동만 일삼게 되더라 말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기능 곧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으로 인한

 

존재인 육과 기능인 영과의 소욕 다툼인 서로 원수지간임이 오히려 더 부각되는 식인

 

성령의 자기 기능을 부각하기 위해서

의인들을 부르는게 아니라 죄인을 부른다는 점에서

 

소동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본바
이상하게 사도바울은 복음으로 인한 소동을 통해서 경제적인 손실을 입게 됨으로써 쫏겨나거나 추방되거나 또는 끝까지 따라와서 살인할려고 하는 위협에 놓이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복음을 전하는데 오히려 명료함을 누리는 겁니다.

 

결국 성화론은 납득이 되는 돈입니다. 돈이 된다는 것은 소통이 된다는 것이고

소통이 안되는 불통이다는 것은 돈이 안된다는 겁니다.

왜 개방을 외치느냐 ?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을 거부하느냐? 경제를 손실을 입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을 부르면 소동이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배신을 때렸기에

기다리고 참고 참았던 그 기다림을 배신을 때렸기 때문에

 

갈라짐의 현상이 더욱더 부각이 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 서커스? 아니지 뭐더라 시카고 이 영화를 좋아하는고 하니

 

최고의 변호사가 자신의 변호라는 기능을 자랑하기 위해

 

가장 악날한 고멜과 같은 여자를 변호함으로써 재판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

 

바로 이거다 했습니다.

 

자신의 변호기능을 자랑하는데 있어서

도저히 불가능한 죄인을 맡아 변호해야 그 기능이 발휘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목사들이 엉터리인고 하니 곧 거짓선지자인고 하니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구원받은 강도의 그 구원을 아주 아주 깍아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강도가 아닌 예수님의 구원을 모독하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아니 피 흘려서 구원시켜 놓으니 부끄러운 구원이라뇨?

 

결국 목사들이 믿음이 없는 티를 노골적으로 들통낸 겁니다.

불안하다는 증거죠

그런 구원은 교회 망친다 라는 겁니다.

 

교회가 그 정도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정도로 탐스럽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얼쑤 그런데 교인들도 이 속임수에 놀아나네요?

어쩌면 유유상종인지!!

 

이것이 보이는 교회의 한계점입니다.

 

우발성이 될 수가 없다는 것 자체가

교회가 아니다는 겁니다.

 

개판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모습이 가정에서도 이어지면

가장을 억지스럽게 개판 만들려고 할 이유가 없거든요

가정도 교회이니까 말이죠

 

가정에서는 아무 문제 없는데 따로 교회에 모이면 따로 교회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내니

결국 유대인과 같은 구름타고 오는 메시아만 믿겠다는 것이 결국 불안을 가시화 시키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늘 수시로 해체 시켜야 합니다.

 

해체 시켜서 다시 해쳐모여 라고 하면

우발적으로 떨어져 나간 자와 전혀 안맞는 인물이 새롭게 들어오게 됨으로써

수시로 재편성이 되는 겁니다.

 

전체 그림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교회를 다루시기 때문에

이리 저리 이동 시키는 것에 목사는 전혀 신경쓸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해서 미쳐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개입하는 겁니다.

 

자꾸 교회를 관리하고 싶어서 환장하는 거죠

 

복음만 생각하는 목사는 그렇게도 멀쩡하게 보이는데

교회를 생각했다가는 목사는 미쳐서 발작을 하듯이 짐승처럼 변하는 겁니다.

 

교회를 잊지를 못하는 거죠.

 

이것이 존재중독입니다. 인간중독처럼

자아중독처럼

존재중독 교회중독입니다.

 

기능은 바로 이런 인간의 엉터리 믿음의 군상을 바탕으로 깔고서

기능 곧 죄인만을 부르는 구원자의 기능

환자만을 부르는 의사만의 기능을 발휘하시는 겁니다.

 

그때 환자를 못 고치도록 하는 방해세력으로써 존재가 등장하는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방해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반드시 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는 구원자의 기능이 발휘되는 꼴을 못 보겠다는 자들이 나타나야만

더더욱 구원자의 빛의 기능은 그 어두움을 배경으로 빛을 발현하시는 겁니다.

 

참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유대인의 말씀에 대한 예언 사모함이

그렇게도 어렵고 어렵게 간직했는데

 

정작 예수님은 몇마디 말씀에 그런 내용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아무렇지도 않은냥 쉽게 말씀하시니

 

괘심하기 짝이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심정이 여기에도 나타납니다.

 

농장 주인이 일꾼들과 계약한 대로 일한 만큼 임금을 주기로 해 놓고서는

일을 정시 아침 8시부터 하고 있는데

직업없이 놀고 있는 백수를 불러서 일을 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9시에 부르고

10시에 또 발견하고 부르고

12

오후2345시 그리고 딸랑 30분 남겨놓고도 발견하고서는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농장 자신의 선함을 어떻게 과시하는 고 하니

반발 세력을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겁니다.

 

이것이 선한 기능입니다.

 

선하다 라고 했을 때 즉 거룩이라는 기능은

반발 세력이 없으면 설명이 안되는 겁니다.

즉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거룩 자체가 분리 구별 차별 차이인데 말입니다.

그 차이만이 반복이 되기에

 

반발 세력은 수시로 반복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기능에 동원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말하기 위해서는 육의 소욕이 고맙게도 동원이 되어 주어야만 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주인의 선함이 부각되는데 있어서 딸랑 30분 일만 사람이 정직원과 똑같은 일당을 받으니

 

정직원은 비정규직이 그렇게 받는 것을 보고 오해를 하고서는 자신들은 훨씬 일한 량이 많기 때문에 많이 받을줄 알았는데

 

그냥 그대로 받더라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악하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바로 선함이라는 거룩의 기능에 말려든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인간의 믿음을 일부러 피하는 식으로만 오시는 겁니까?

이것이 거룩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결국 성화론자들처럼 우리는 거룩 곧 성화를 엉터리로 해석한 겁니다.

사도바울 곧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래서 이단자로 만드는 예수를 핍박한 겁니다.

 

도저히 인간 쪽에서는 접속 자체가 불가능한 믿음이기에

약속한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된다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거리 벌리기입니다.

 

 

성령 곧 약속한 성령 자체가 간격 벌리기 인데

 

얼마나 엉터리인지 개방이라고 하니

백프로 교회를 장사하고픈 이유인 겁니다.

 

교인들은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믿음과 부합이 되거든요

 

자기 믿음을 피하는 예수님의 성령이 아니라

자기 믿음과 어쩌면 딱 맞아 떨어지는 믿음이기에

그런 교회 장사를 하는 목사와 죽이 더더욱 잘 맞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언제 정신 차리냐? 물론 정신 못 차리도록 주님이 손 쓰시지만

그들의 관계가 틀어질 때

바로 돈 문제 때문에 반드시 틀어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전혀 돈과 관련이 없던

전 재산 전 소유물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 속에서

결국 돈을 뒤짚어 씌우는 예수님의 기능 때문에

가룟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없다가 갑자기 생겨 버리니

오히려 더 잘 넘어가는 겁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처럼

돈 한 푼 없다가

그 결여성이 갑자기 채워지니까 말입니다.

그 돈 한 푼도 못 쓰고 말입니다.

 

 

자 너무 길게 서두를 했는데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예수님 자신이 기능에 부합되는 것은 99마리 양이 아니라

딱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 자신의 기능에 너무 너무 부합이 된다는 겁니다.

 

자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기능과 부합된 구원이라면

인간이 원하는 구원은 물 건너간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존재의 소욕을 배경으로 깝니다.

그것이 아흔아홉마리라는 존재입니다.

 

어떤 누가 아흔아홉을 버리고 한 마리 양을 원하겠습니까?

어떤 누가 동전 10원을 찾았다고 잔치로 몇십 몇백만원을 잔치로 소비하겠습니까?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 아닙니까? 기능이란 결국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의 기능인 겁니다.

존재는 이미 타인의 욕망과 함께 가기 때문에 그 흐름을 거슬릴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차이가 납니다.

 

둘 다 같은 돈이고 양이라는 존재인데 단지 한 쪽은 많고 다른 한 쪽은 적다

 

그래서 두 패로 갈라서 하나는 그리심산 다른 하나는 에발산

예수님은 소수 쪽으로 올라갔다?

이겁니까?

 

아닙니다. 이 두 패로 가르는 기준은 예수님의 자신의 기능에 부합되기 위한

 

잃어버림에 있다는 겁니다.

 

잃어버림이 도대체 뭔데 그러느냐?

그럼 우리도 며칠 가출했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잃어버림의 경험을 지닌 것인가?

 

에발산은 그리심산 빽빽한 나무보다 적어서 불에 탄 나무처럼 벌거숭이 산처럼 보이는데

한번 산에 불지르면 나무가 적게 되고 불에 타서 왠지 잃어버린 경험을 지니게 되는 것 아닌가?

 

조건을 갖추겠다는 것은 존재의 특징이지 기능은 아닙니다.

7번 용서 하면 될까요? 라는 베드로의 용서는 존재가 조건을 갖추고자 하는 것이지

사랑이 전혀 없다는 반증인 겁니다.

율법은 사랑의 완료를 말하는 것이지 조건갖추기가 아닌 거죠.

 

잃어버림은 주님 쪽에서 자신의 기능과 부합함에 있어서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불가능성이기에 실천하겠다는 오기와 신념은 손때시면 되고

 

도대체 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뭔가?

이 간격을 형성하고 간격을 벌리는 것이 바로

숭고 곧 불편하고 불쾌한 거룩이다는 겁니다.

그 사이에서 긍휼이 나타나는 겁니다.

곧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을 입을 자이지

거룩을 행할 자가 아닙니다.

이 거룩이 바로 약속한 성령이며 그 성령의 소욕이

이런 차이나는 구별의 사고방식인 존재 이전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 우연적이며 우발적인 겁니다.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림의 조건을 갖춘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게 아니라

잃어버렸기에 되찾는다는 기능을 말하는 겁니다.

 

그 되찾은 기쁨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쁨으로 표현하거나

죄인 하나가 돌아왔을 때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기뻐서 잔치를 벌린다는

 

이런 과잉체스쳐가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과잉적인 기능입니까?

 

여기에 반발한 것이 탕자의 형 맏아들 아닙니까?

 

아버지가 탕자를 이유없이 용서하시는고 이유없이 사랑하신다는 그 기능에

반발하는 존재성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나는요 나의 존재는 뭐가 됩니까?

나는 아버지의 말을 어긴적이 없는 존재인데

왜 이런 존재에게는 살진 소 좋은 옷 금가락지를 단 한번도 준적도 없지 않습니까?

 

존재는 결국 이유없이 정당하다는 부조리를

이유없는 사랑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그 부조리를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기능을 과시하는 차원이지

내 쪽에서 백날 예수님을 사랑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존재의 사랑이란 결국 자기투사요 자기소욕인 겁니다.

제발 예수 믿지 말라니깐요

제발 예수님을 사랑하지 마세요

다 육의 소유욕입니다.

 

믿음을 포기 하는 믿음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넘어서 오는 믿음입니다.

 

우리 쪽에서의 믿음을 포기케 만드시고 즉 단절

예수님 쪽에서 따로 넘어오시는 믿음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는 따로 준비된 사랑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경험이란 바로 이 단절성이라는 간격인 겁니다.

내가 왜 예수님을 믿을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지에 대한 단절성

곧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악이 그런 나 일수록 능히 이겨 사로잡아 죄의 법 아래 가둔다는 겁니다.

이 곤고함이라는 간격을 매울 재간이 없다는 겁니다.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아무리 동일성을 추구하고 싶어도

그 간격으로 인한 차이성

 

곧 잃어버림만이 실상이다는 겁니다.

 

간격에 대한 실제상황을 격게 되는 겁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니 그렇게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구름 속에서 다들 화들짝 놀라게 그렇게 몇 번이나 외칠때는 언제고

왜 버리느냐 말이죠.

 

더 놀라운 것은 이 부르짖음에 아무런 답이 없다는 겁니다.

침묵합니다.

 

왜 그때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왜 침묵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이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그렇게도 외치는데?

 

사실상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고 구름 속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을 통해서

도리어 본격적인 시기와 질투를 유발케 한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인간들의 시기심과 질투를

구름 속에서의 음성이 더욱더 촉발시킨다는 거죠.

 

그 시기와 질투가 이제 마무리 되었다는 것이

도리어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나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에

인간들은 말려들어야

그 기능이 뭔가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 기능을 보여주고 싶었으면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까?

 

존재라는 부조리와 말도 안되는 정당성 속에서

인간이 전혀 낯선 이 존재 이 전의 기능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입이 있어도 함구케 되는 지혜를 보게 됩니다.

 

왜 잃어버림인가?

그 속에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믿게 되었다는 소리를 못하도록 하는 기능이 주 의 주 되심이라는 기능입니다.

즉 단절이요 거룩인 겁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차단 당했었었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잃어버림 당했었었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신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는 겁니다.

 

그 잃어버림이 누구인가를 보라는 겁니다.

잃어버림 자체가 하나의 인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잃어버림이 완료된 거룩이냐 말이죠

건축자들이 필요없다고 버린 돌인데

그 돌이 오히려 완료된 건축을 몰고오는 겁니다.

 

거룩 포기 하세요 거룩해 본들 몇배나 더 더러워집니다. 미흡하기 짝이 없거든요.

 

아주 쉽게 단적으로 노골적으로 말하면

거룩 포기 하라는 겁니다.

 

모호한 건축물 짖겠다고 쓸모없다고 버린 그 돌이 완료된 건축을 명료하게 짖는다는 겁니다.

 

그 명료한 거룩을 보라는 겁니다.

 

나의 7번 용서를 포기해야

내가 도리어 770번 용서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남을 긍휼히 여길 것이 아니라 사랑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긍휼로부터 용서 받아야 할 대상이다는 겁니다.

일체 나의 대상물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려 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내가 믿겠다고 나서는 것은 지키겠다는 겁니다.

나의 믿음의 대상물이 졸지에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누려는 대상물 찾기가 아니다 도리어 대상물 되기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의사가 나를 고치는 겁니다.

환자는 이미 무능 상태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죽하면 의사가 무능으로 다가와야

우리가 그 의사 앞에서 온갖 수술칼을 손놓는 겁니다.

마치 인질범처럼 우리는 엉뚱한 나를 내 스스로 인질로 삼아서 다가오면 죽이겠다고

나를 손대지 말라고 협박 공갈하는 인질범처럼 말입니다.

 

나의 대상물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발 좀 막 사세요 라는 겁니다.

 

? 예수님의 기능에 부합 되는 것은 거룩 곧 죄인이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능입니다.

 

내가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상물일 뿐입니다.

 

죄인 죄인 카지 말라고 짜증내면서 화를 내는 목사들이 있는데

부활이후에는 죄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고 합니다.

 

죄인이라는 조건 갖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화를 조건으로 갖출려고 하듯이

죄인이라는 표현을 조건인냥 착각한 겁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죄인 되거든요.

 

똑똑해도 소용없는 목사입니다.

 

잃어버림 자체를 거부하고 싫어하고 불쾌하다고 짜증내는 겁니다.

3일이라는 간격이 필요하고

 

왜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왜 물증 잡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왜 깨어진 십게명 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왜 언약궤에 담겨야 하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우리의 허물을 저당잡고자 그렇게 의도적으로 원망할만한 곳만 골라다니시는데

원망하지 말자 라는 소리가 아니라

원망 할 수 밖에 없는가? 딴 것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10원 잃어버렸다고 오도방정 떨다가

다시 찾았다고 몇십 몇백만원 잔치 벌리는

그 허비성을, 그 초과잉 오바 액션을

합리적이지 못한 비합리적이다고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지

반발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차단입니다. 거룩입히기입니다.

우리 쪽에서의 접근 차단으로

예수님쪽에서 거룩 입히기 인데

그것이 숭고함인데 아름답기는커녕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겁니다.

마치 죄수복에 빨란 도장으로 특별사면이라고 꽝꽝꽝 찍고

그 피를 자랑케 하는 겁니다. 내 봐라 피도장 찍혔다고

 

그러나 다른 모든 이는 불쾌해 합니다.

저게 무슨 자랑꺼리냐고!!

 

성화론자들은 죄수복을 빨리 벗으라고 하지만

의인의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사기를 치면서 그 의인옷을 장사하며 돈 뜯어내지만

피도장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죄수복도 함께 있어야 설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반복이 되는 것은

이 불쾌하고 어리석은 숭고가 반복이 되는 겁니다.

 

이상하잖아요

다들 종교인이든 또는 세상사람이든

유대인이든 교회다니는 인간이든 비유대인이든

다들 이 잃어버림을 삭제시킬려고 달려드는데

이상하게 다들 사라져 없어져 버리고

정작 남아서 무한반복이 되는 것은 이 잃어버림이다는 겁니다.

존재는 사라져도 기능은 남아 무한반복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잃어버림이라는 이 간격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더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존재는 불편하다고 이 잃어버림을 어떻게든 삭제할려고 달려들다가

도리어 삭제당할 판국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의 자리 그 간격에서 이스라엘이 태어났는데

이스라엘이 이 잃어버림을 보니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거부할려고 하니

얼마나 껄끄럽겠느냐 말이죠.

그러니 맞물려도 아주 단단히 맞물린 겁니다.

 

죄인이라는 것이 거룩의 기능을 말하기 위한 것인데, 그런 기가막힌 재료가 되는데.

그들 스스로가 의인의 자리에 앉아버리니 정작 거룩이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아니 거룩을 본인들 스스로가 죽여버리는 겁니다.

 

아니 의사에게 건강한 자를 백날 줘보세요

건강한 자가 의사에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의사의 기능이 막혀 버리는데???

 

목자를 설명할려면

위에서 언급했지요

 

선하다 라는 주인의 선함을 부각 시킬려면

 

99마리의 양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관계란 존재와의 관계형성이 아닌

기능으로써의 관계인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으로써 자신의 목자됨을 증거하십니다.

이 이스라엘이 잃어버림을 거부함으로써

처음자리 처음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자도 거부하는 겁니다.

 

99마리의 양의 존재가 뭐가 좋다고???

어차피 다 사라지는 안개인데? 존재 백날 붙들어도 쓰르륵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안개를 잡는 허망한 것인데 말입니다.

 

선한 목자가 부각이 되지 않기에 99마리를 거부합니다.

선한 목자의 기능을 말할려면

기가막히게 딱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만이

 

선한 목자를 높이는데 기가막힌 겁니다.

기능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가장 무능하기에 가장 미약하기에 선택한 겁니다.

 

(7:6, 개역)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7,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기능을 가장 잘 나타낼수 있기에

마치 의사에게는 환자만이 자신의 기능을 드러낼수 있기 때문이듯이 말입니다.

바로 그 기능이 바로 거룩성이다는 겁니다.

거룩 곧 미흡함이 없이 완료된 명료하고 또렷한 숭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이라는 기능을

육적인 이스라엘 곧 존재로 자꾸 만들어 버리니까

존재 존재를 자꾸 우려먹는 겁니다.

그러니 기능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니 또 이방인을 죽이는

참 이것이 신비 아닙니까?

이제 거꾸로 교회 다닌적이 없는 자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불편하고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주 되심을 잘 드러내는 기능으로써의

거룩이다는 겁니다.

 

거룩이 이런 뜻입니다.

우리 좋으라고 쓰여진 단어가 아닙니다.

종교꾼들이 자신들을 포장하라고 주어진 단어가 아닌 거죠.

 

이것은 구약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신약 만의 충돌이 아닙니다.

 

분명히 부르짖음이라는 기능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들을 강퍅게 하시니까

 

비로소 그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합니다.

소위 기도 아닙니까?

 

기도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을려면

구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강퍅케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제 될 뿐입니다.

 

오로지 부르짖음이라는 기능을

기능 기능 카니까 자꾸 못 알아 먹길래 쉽게 은사 라고 합시다.

 

부르짖음이라는 기능이 사람에게 덮치지니까

그 사람은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왜냐? 애굽왕을 통해서 괴롭게 만드니까 말이죠

 

아니 때리는데 아야 하고 안 외칠 위인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니 부르짖음은 참고 참아서 기다린 결과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튀어나는 겁니다.

 

그래놓고 주님은 오냐 이제야 들었다고 합니다.

 

아니 모세가 그렇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을때는 안도와 주더니만

40년 이 지나서야 모세를 부르니

모세가 안 삐지고 배깁니까?

 

그런데 기능은 전체 그림에서 마귀가 배경으로 깔리기 전까지는 주님은 기다리시는데

모세는 자기 입장만 내세우니까 자꾸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 대 존재로 대하는 겁니다.

 

이것이 기능을 모르는 단절된 처지인 겁니다.

 

내가 억울하고 내가 부르짖을때에만 기도라는 기능이 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마귀를 동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존재이니까 말이죠.

 

기능은 존재 외부에 있습니다.

 

기능은 마귀가 숙성 될 때 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성령의 소욕은 마귀의 소욕이 무르익을 때 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귀가 등장하지 않는데 어떻게 인간의 부르짖음을 들어줄수가 있겠습니까?

 

왜 기도가 무능입니까? 상대적인 무능치 않다는 놈이 숙성 되었다는 증거인 겁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곧 만백성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 기도의 집에서

 

십의 이조를 하고 금식 두 번 회개 눈물기도 이런 것들이 무능치 않다는 것을 내세우는 짖이 된 겁니다.

 

그런데 상대적인 세리는 성전에서 전혀 고개를 못 들고 있으니

 

만백성이 기도하는 집 부르짖는 집이라는 그 부르짖음의 기능은

 

사실상 누구에게 덮친 겁니까?

 

덮치느냐의 문제이지

인간 쪽에서 하느냐의 문제가 전혀 아니올시다 라는 겁니다.

 

거룩이라는 기능은 이 둘의 분명하고 또렷한 경계선을 그어서

영원히 갈라놓는 그 간격의 벌어짐의 극대 와 극대의 차이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 사이에서 거룩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하니

자꾸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을려고 하니

 

기능이 덮쳐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더 나을려고 하는 존재만 부각이 되기에

육의 소욕과 원수가 되는 성령의 소욕은 전혀 전혀 덮치도록 하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거룩은 덮쳐지는 기능입니다. 영원히 갈라서도록 하는 간격을 벌렸기에 나타나는 겁니다.

양 쪽의 배치가 일어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명료한 선이 그어지겠습니까?

그 명료함 속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마땅히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할바를 전혀 모르기에

못한다고 도와달라고 외치는 기능이 덮쳐지는 겁니다.

 

그러니 덮쳐지는 자는 주여 저는 안 됩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덮쳐진 결과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간다 라고 하니까

 

자꾸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이 될려고 하는데

 

어린아이 같이 못 됨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된 겁니다.

어린아이는 무능하거든요

 

그래서 의지를 하잖아요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해서 도와달라고

 

저번에 말했죠

부자청년이 근심하지 않고 등돌리지 않을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지킬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존재만이 부각이 되거든요

예수님의 기능에 부합이 될려면

주여 제가 가난한 자입니다.

저는 부자 아닙니다.

이 재산 원래 주님꺼입니다.

저는 주님의 밥상에서 떨어진 꽁꼬물 떨어진 것을 받아먹는 개 일 뿐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줄도 모르고 내것인냥 부자로 소문 났다는 자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건방진 모습인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러면 된다 말입니다. 실제로 거룩이 입혀지면 그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고

 

상대적인 대립된 육의 소욕은 딴 사람이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주님이 이것을 인간의 숙제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숙제를 말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마귀가 배경으로 깔린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에 속수무책으로 인간은 마귀에게 잠식 당한 상태임을

예수님이 기능 곧 거룩에 의해 속속히 들통당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할 입장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딸랑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으로도 선한 목자의 기능이 전혀 손색이 없이 완벽하게

전혀 미흡한 구석이 없이도 또렷하고 명료하게 높이 높이 부각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번에 말했지요

겨자씨 한 개의 씨앗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능적으로 증거하고

누룩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다고

 

즉 전혀 안 보이는 아주 작고 작다는 겁니다.

 

1차 출애굽 백성 다 탈락 2차 딸랑 한 명 갈렙

 

이 갈렙 한 명 만으로도 약속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증거하는데 전혀 미흡함이 없이

완벽하게 넉넉한 완료로써 증거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들어갔어도 예복을 입지 않아서 3차 탈락이 진행이 되는 겁니다.

 

젖과 꿀을 맛 한 번 못보더라도 오히려 그 단절성으로 젖과 꿀의 초과잉성을 흘러 흘러 넘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일만달란트 용서 받은자는 탈락 당해서 그 용서의 기능은 오히려 탕감받은자 없이도
용서의 초과잉성이 흘러 흘러 넘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리 강도 창녀가 딱 인 겁니다.

얼마나 모든 허물을 덮을 정도이면 그런 자들조차도

곧 도저히 용서 못할 자를 용서하시느냐

그 용서의 과잉에 더 보탬이 되는 것은

 

간격의 갭으로써

오히려 의로운 의인, 성화된자. 평생을 성전에서 종사한 자들이 단절이 되니까

 

용서가 흠이 생기기는커녕 그들이 탈락 당함으로써 더더욱 초과잉성이 흘러넘치는 겁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1차 초대 손님 탈락 2차 거지 노숙자 백수들로 채워짐

여기서 마테복음은 3차 단절까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탈락

 

아니 생각해 보세요 탈락으로써 잔치가 망쳐지거나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가 결국 감옥행으로 간 것이 용서가 취소되기는커녕

더더욱 과잉적으로 증거 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모세 탈락이 전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과잉성을 막거나 미흡하거나 모호하게 하기는커녕

더더욱 과잉 되게 만든다는 겁니다.

 

모세마저도 말입니다.

모세도 예수님의 믿음으로 뒤로 빼돌림당해 합격한 것이지

모세 쪽에서 백날 출발해본들 택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멸망이 구원에 흡집을 내기는커녕

더더욱 구원의 풍요함을 흘러 넘치게 하는

이방인의 구원으로 더 초과과잉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고 남는 거죠

 

뭐든지 예가 되지 아니요 함이 없는 겁니다.

 

(고후 1:18, 개역)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 개역)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20, 개역)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는 뭘 해도 다 죄 밖에 안됩니다. 즉 예 밖에 안되는 겁니다.

미쁘심의 기능 때문입니다. 얼마나 든든한 숭고함입니까?

 

이것이 선한 목자의 기능인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찾기입니다.

 

모호하거나 부족하거나 모자라거나 미흡한 구석이 있나요?

 

완벽하지 않나요?

 

딸랑 한 마리 라는 것이 99마리에 비해 미흡한가요?

또 잃어버렸다는 것이 주님의 기능을 말하는데 부족한 겁니까?

죄인이라는 것이

뭘 해도 다 죄 밖에 안나온다는 죄인이라는 것이

주님의 기능에 흠집을 내는 것일까요?

아니면 의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기능에 맞지 않는 것일까요?

존재로 듣기면 백날 말해도 소용이 없고요

기능으로 보이면

즉 존재 이전의 기능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 라는 안개를 붙잡아 허망한 것을 쫏기 전에

기능이 먼저 있어서 닭이 세 번 울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입장에서 주님의 기능은

의인이 필요한 겁니까? 죄인을 찾는 겁니까?

 

마치 귀머리기의 춤추는 것이 노래 듣고 춤추는 자 보다 더 신나고 기쁘고

벙어리의 골방의 기도가 그 어떤 고성능 스피커의 소리보다 더 명료하게 하늘 나라 천사들에게 까지 다 울려 퍼진다는 겁니다.

 

말할수 없는 벙어리인데 말입니다.

볼수 없는 소경인데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인데

그들에게만의 희년이다는 겁니다.

단절된 자인데 말입니다.

 

오히려 소경이 천리안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명료하게 보고

눈뜬 자이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겁니다.

더더욱 모호한 소리만 한다고 투덜댈 뿐인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간파하셨습니다. 기능이기에

 

(15:1, 개역)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5:2, 개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 상황 자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짜증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말입니다.

 

마치 강도만난 자를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그냥 지나가버리듯이

그들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정한 시체 피를 만지면 안되기에 말입니다.

부정함을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거룩인 겁니다. 존재가 거룩을 지키겠다는 겁니다.

 

그런 거룩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거룩의 기능은 오히려 죽은자들 시체와 다름없는 자들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들로만

희년의 기능 즉 은혜 기쁨 즐거움이라는 기능을 발휘하시겠다고 하니

 

세리 강도 창녀 죄인들이 말씀을 듣는 그 상황이

유대인 곧 99마리의 양의 입장에서는 불쾌 하기 짝이 없는 숭고인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들으랍시고

즉 간따나 짜증내고 화난 입장인데

더더욱 짜증을 내라고 더더욱 화내라고

 

비유를 들어도 참 매맞아 죽을 소리만 골라하시는 겁니다.,

 

왜 당신은 이런 더러운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하느냐

 

그 이유 비유로 알려주마

 

어떤 목자가 있는데

 

참 비유란 암행어서 출도요 라는 징후 곧 하나님 나라의 징후라고 했습니다.

 

이 침노 침략에 항복 화친을 청하든지 아니면 죽어라입니다. 불편한 비유입니다.

불편한 징후죠

 

어떤 목자에게 백마리 양이 있는데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다면 그 양을 찾는게 마땅하지 않겠느냐? 당위죠 기능

 

안식의 기능이냐? 아니면 안식일을 지키는 존재이냐?

 

그래서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돌아다닐때

 

찾으면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은 것으로 잔치를 열 듯이

 

죄인 하나가 돌아와 회개를 하면

 

아흔 아홉의 회개할것이 없는 자들로 인한 기쁨 보다

 

죄인 하나 땜에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기뻐하는 더 큰 기쁨의 초과잉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춘향전의 이도령 마패의 징후가 99마리의 관료들을 벌벌벌 떨게 했던

시를 적어 올린 글 곧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다는 겁니다.

벌벌벌 떠는 거죠.

 

사랑이란 이렇게 죽음 속의 춘향이를 잃어버렸다가 되칮는데 있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엑스트라로 동원이 되고

이 둘의 사랑만을 과잉적으로 나타내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이 바지가 벗겨질정도로 우리의 허물을 담은 법궤가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이다는 겁니다.

 

향유를 깨뜨린 여인이 예수님을 미리 장사치르고자 뽀뽀 온 군데 뽀뽀를 하면서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육의 소욕 곧 거룩을 지키고자 하는 존재 존재 존재의 소욕은
곧 반발세력이 반드시 있어줌으로써 그 기쁨이 취소 되기는커녕

더 큰 초과잉성이 기쁨으로 넘치는 겁니다.

 

왕 꼬라지 보소 체통없이 바지나 벗겨지고

 

(삼하 6:16, 개역)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삼하 6:20, 개역)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3, 개역)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기생라합의 거짓말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흠집내기는커녕 더더욱 높이 자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한 마리 곧 상대적인 아흔 아홉 마리와의 차이성으로써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거짓말을 따라한다고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되느냐 말이죠

존재에서 나타나는 기능이 아니라

존재 이전에 있는 기능의 나타남이기에

존재를 도리어 자기부인되어야 할 판국일 뿐인 당위로써의 자기부정 회개인 겁니다.

 

분명히 비정결 분명히 비거룩인데 오히려 정결 보다 더 나은 초과잉 정결로써의 비정결이고 곧 부정이고

 

분명히 비거룩인데 오히려 거룩 보다 더 나은 초과잉의 거룩으로써의 비거룩이다는 겁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 오히려 아흔 아홉 보다 더 나은 초과잉으로써,

아흔 아홉의 기쁨보다 더 나은 기쁨으로써의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다는 겁니다.

 

말만 대따 어렵게 말해서 그렇지

 

쉽게 말해서 아름다움 보다 더 아름다운 고귀한 거룩인 숭고는

죽으면 죽으리라 이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것 보다 더 초과잉적으로 죽은 사람들까지도 다 살려내는 것이 숭고 곧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불편합니다. 불쾌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불쾌하다고 표출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불쾌케 못하는 거룩은 거룩이 아니무이다.

존재가 존재 하기 이전에 먼저 있었던 기능이 아니무이다.

 

이것이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만의 기능이지

 

목자가 아닌 자들은 99마리 양을 더 즐거워 한다는 증거인 겁니다.

편하거든요

전혀 불편한 것들이 없는 다 제거된 입장인 겁니다.

그것이 아릅답다 라고 하고 안정감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한목자는 이 불쾌한 숭고라는 기능을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도구로 삼아서 자신의 기능을 피력시키는 겁니다.

 

누가 더 또렷하고 완료적인가?

 

한 명의 죄인이 돌아와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기능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능 곧 거룩이 덮쳐진 자이고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하나님 나라의 기능과 맞지 않는 겁니다.

 

희년은 그래서 은혜라는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고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서 못하는 자를

일부러 그런 자만 찾아서 너끈히 아주 간단 명료하게 쉽게 너무 너무 쉽게 완벽하게

예수님 자신을 기능을 그들에게 덮어씌워서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믿지 마세요 제발

믿음을 포기하세요 그리고 믿음을 포기한 믿음을 보세요

주님 쪽에서 넘어오는 믿음은

존재들이 믿어댄다고 우기는 믿음 보더 훨씬 더 또렷하고 명료한 믿음입니다.

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밝히 보이심이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의 믿음은 내 죄를 대신해서 죽지도 않으면서

자꾸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는 식으로 존재를 과시합니다.

그거 다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예수님 저에게는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 불가능한 일을 당연히 마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전무한 일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단절만을 느낍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덮치면은 그런 기능이 덮치며는

주님은 마귀의 악이 무르익을 때 까지 기다리셔서

자신의 구원 기능을 발휘하시고자 사건을 터트리시는 겁니다.

 

그러니 무능함을 인정한다고 조건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손을 떠난 문제이니 그 이후는 주님 마음대로 이다는 겁니다.

사건을 통해서 주님이 어떻게 사태를 벌렸는가를 또 누릴 뿐인 겁니다.

 

우린 그저 죽었다고 복창할 뿐이지

아무리 봐도 내 쪽 구석에서는 사랑도 믿음도 아무것도 없음을

사건을 통해서 더더욱 드러나야 마땅함을 실감하면서 감사해야할 판국 뿐인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기능으로써

회개할것이 없는 아흔아홉마리를 기뻐하지 않는,

죄인 하나로 더 나은 기쁨 초과잉의 기쁨을 나타내는 희년입니다.

 

 

 

 

 

 

 

 

 

 

 

 

 

 

 

 

 

 

완공치 못하는 건축을 비웃다 (14:25-35)

 

2014/06/27 15:4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완공치 못하는 건축을 비웃다

 

(14:25, 개역)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14:27, 개역)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28, 개역)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14:29, 개역)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14:30,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14:32, 개역)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1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34, 개역)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35, 개역)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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