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공치 못하는 건축을 비웃다

 


(
14:25, 개역)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14:27, 개역)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28, 개역)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14:29, 개역)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14:30,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14:32, 개역)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1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34, 개역)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35, 개역)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임금이 잔치를 그것도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라고 마태복음에서는 기록되어있지만

누가복음은 그냥 잔치입니다.

 

차이점은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상대로 했기에 그 아들을 위한 잔치에

정작 하나님의 자녀 곧 아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잔치에 참여치도 않고 잔치에 초대했음에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그 잔치의 잉여성 즉 즐거움이 취소되는가?

 

오히려 더욱더 신나는 잔치인데

그것이 바로 초상집처럼 된 잔치인데

 

오히려 잔치집 보다 더 즐거운 비초상집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뭐에서 빠져나온 분리 차별 구별된 무리이거든요

그 구별성이 이스라엘의 특징인에

도리어 이스라엘로부터 이스라엘을 또 구별이 되니

이 쪽 이스라엘은 초상집이 되었으니(애굽처럼)

그 이스라엘로부터 출애굽 출이스라엘 받은 새로운 이스라엘은 잔치집

 

더 큰 기쁨의 잔치 보다 더 즐거운 잔치집으로써의 초상집만들어서 뽑아내어

잔치집의 기능을 발휘해서 잔치의 과잉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유월절 패스티발처럼 말입니다. 뭐를 넘어서 빠져나온

에덴 동산 같은 천국같은 애굽을 빠져나와 애굽 잔치집을 넘어선 애굽을 초상집 만든

유월절 어린양 패스티발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윗구절에서 언급한 낮추심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증거했기에

낮추시는데 있어서 잔치집을 설명하는데 어떻게 낮추심의 하나님나라 잔치인고 하니

 

(14:5, 개역)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14:6, 개역)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14:7, 개역)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14:8, 개역)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14:9, 개역)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4:10, 개역)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4:11, 개역)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4:12, 개역)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이웃을 청할때에 편안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불편한 이웃을 청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초대 받아 자리에 앉을때에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는 겁니다.

 

제가 저번에 말했지요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는가 싶어 사람들이 일부러 말석을 다 앉아버리니까

제일 늦게 온 제가 졸지에 상석을 앉게 되었는데

저는 상석인줄도 모르고 그냥 앉았는데

다들 그게 상석이다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에게 말씀을 어기는 놈이라고 뒤짚어 씌우는 식의 장난을

이상하게 가는 교회마다 다 그런식을 펼치는데

 

사실은 성경을 거꾸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물론 그 조그마한 균열이 결국 목사와 이별하는 계기가 될 줄 몰랐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자기말 안들으면 태어나지도 앉았더라면 이라고 가룟유다의 저주를 외치던데

제가 말했죠 그것을 이제 알았냐고 ㅋㅋㅋ

 

즉 상석 말석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불편하냐 편하냐 라는 겁니다.

불편한 자리가 말석이고

편한 자리면 결국은 상좌입니다.

 

거꾸로 적용해 놓고서는 말려들었다는둥 자랑을 하고 있으니

자기들이 미리 편안자리 마련하고서

불편한 자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상석에 앉았다고 성경을 어긴 놈이라고 말이죠

 

별희한한 종교꾼들이 한둘이가 아닙니다. 정신병자들이지요.

목사라는 놈들이 그런 장난을 아예 유도를 해 유도를 ㅋㅋㅋㅋ

 

뒤짚어 씌울려며는 좀 제대로 뒤짚어 씌우려든가?

하여튼 코메디 ~~~~

그래놓고서는 벌벌벌 떨고 말이죠 ~~~

 

결국 누가복음에서의 오늘 본문의 혼인잔치라는 하나님나라의 기능은

낮추시는 하나님나라잔치인데

 

그 낮추심이 겸손떨어라 라는 것이 아니라

 

기능으로써 인간이 자력으로 낮출수가 없기에 낮추시는 기능이 바로

겸손이 아닌

불편함 이다는 겁니다.

 

이 불편하고 불쾌하고 당황스럽게 하는 기능이 바로 거룩 곧 낮추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분명 잔치집인데

초상집 보다 더 심한 상황으로써 천국잔치의 과잉성으로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마태복음은 아예 폭력성 아예 살육이 벌어지죠

그게 잔치집입니까? 초상집입니까?

 

그런데 두 복음의 결과는 오히려 잔치집보다 더 기쁜 잔치집의 과잉성을 보여주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 낮추었기에 (누가복음)

? 갈라서게 했기에 (마태복음의 혼인잔치)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기능인 겁니다.

그러니 존재로 접근하면 다 졸딱 망하는 겁니다.

 

가능성으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이것이 기능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기능을 맞물려서 하나님나라의 기능을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기능을 맞물리게 해서 하나님나라의 낮추심을 말이죠.

 

그러니 누가복음의 이웃개념은 편안한 이웃이 아닌

도저히 내가 설정할수 없는 불가능한 이웃을 복음이 설정해 주는데 있어서

그 이웃은 불편한 이웃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으로부터 불리워진 별명이

세리와 강도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입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면서 세리강도죄인의 친구가 되면

 

어지간히 잘도 하나님나라 잘도 확장되겠구나 라는 비아냥이 썩인 어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처음이 바로 개같은 이방인 잡족 히브리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아닙니까

그러니 졸지에 자기 스스로 자신의 처음자리를 발로 차버리는

처음사랑을 져 버림으로써

불편함을 제거해 버린 겁니다.

 

불편함을 제거해 버리니까 기능은 사라져 버리고

존재만 되어버렸기에

예수님을 비아냥 거립니다.

 

존재 즉 조건에 안 맞다는 겁니다. 조건

 

아이구 그래가지고 어지간히 하나님나라가 잘도 확장 되겠구려? 잘도 세워지겠구나!!

 

이것을 유도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기능이 존재 보다 먼저 앞서서 있게 되면

졸지에 이 세리 강도 창녀가 졸지에 기능으로써 하나님나라에 부합됨에 있어서

정작 이스라엘이 존재 보다 앞선 기능이였는데

이스라엘은 존재가 되어버렸고

거꾸로 아무리 봐도 더러운 불편한 기능의 존재인 세리 강도 창녀가

예수님의 섬기심의 기능으로 그들도 기능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이스라엘 존재보다 앞선 기능이 되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기능이

도리어

예수님이라는 제사장 기능 때문에 팔이 어긋맞게 되어

첫째아들은 기능을 먼저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라 하라 하니 알겠다 알겠다 하고서는 안하고

둘째아들은 나중에 기능을 부여받아서 하라고 하니 처음엔 안하겠다고 못하겠다 못한다 하더니

돌아서 뉘우쳐서는 이제는 알겠다 하고 하더라 말입니다.

 

(21:23,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21: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32, 개역)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기능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파격적입니까?

구약이 졸지에 완전히 엉터리가 되어버리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이 엉터리가 된게 아니라

그 대상이 엉터리가 된것인데

구약까지 싸잡아서 이스라엘이 핑계를 대니까

구약의 기능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버리니

저들이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마태복음의 유대인을 겨냥한 폭력성 보다 (사랑의 섬김 지적하심)

오히려 누가복음의 낮추심이 저들에 대한 폭력성 보다 더 넓은 보편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얼마나 살벌하고 불편한 말씀입니까?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라는 말씀이 말이죠.

 

이것이 바로 불편한 거룩

바로 기능으로써의 하나님나라인 겁니다.

 

존재는요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요

오히려 편안합니다.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평강입니다.

 

그런데 기능은 불편하기 짝이 없어요

며느리 다말은 불편합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약속을 쟁취 했겠다 뭐가 아쉬운게 있습니까?

 

졸지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개같은 이방여자 다말 때문에 불편하기 짝이 없어진 겁니다.

자꾸 막내아들 내놓으라고 귀찮게 합니다.

 

이것을 숭고한 히스테리 라고 합니다.

 

분명 남자의 존재가 먼저인데

그 남자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여성의 히스테리가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도 고추 짤라버려서(육의 할례가 아닌 마음판의 할례) 여자로 만들어서

 

이 히스테리의 기능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잔치를 맛보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지 남자의 후손이 아닌 겁니다.

즉 거룩한 분이지 남자의 후손인 육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귀찮고 불편하게 자꾸 수시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막내아들 내놓으라고 막수십니다. 얼마나 불편한지

 

유다를 타락 시키는 자입니다.

유대인을 타락 시키는 자 불편한 예수님입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처럼

유대인을 이단 예수로부터 건겨내어야 한다는 사명이 바로 사도바울이였는데

그랬던 그가 도리어 이단 예수님을 영접하여서 이단 예수를 도로 퍼트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도바울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단되게 만들어 버리니까 말이죠.

 

그러니 누가복음의 혼인잔치는 마태복음의 임금이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 곧 살벌한 초상집처럼 살육의 현장을 보여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편함은 더욱더 가중되는 식으로써

 

불편한 안식일(14: 1- ) 편안한 안식일 지키기로 때우는데 졸지에 불편하고 거부감인 불쾌한 안식의 실상이 졸지에 나타나 버린 겁니다.

 

불편한 말석 (14: 7- ) 편안한 상석을 거부하고 불쾌한 말석을 앉으라굽쇼~~~~

 

불편한 낮추심 (14: 11- ) 광야에서 1차 탈락 2차 탈락 자꾸 탈락 불편한 탈락 밖에 없습니다.

 

불편한 이웃 (14: 12- ) 도저히 은헤를 갚을 수 없는 자를 청해 이웃으로 대접하라? 누가 손해볼 장사를 하겠습니까? 이웃사랑도 모두다 처세술이 된 입장인데!!

 

불편한 잔치 (14: 13- ) 꼭 바쁜 틈을 노려서 다들 할 일을 손에 못놓을 날만 골라서 하는 잔치이니 불편하지???

 

불편한 초대 (14: 16- ) 다들 못 간다고 죄송하다고 하는 결과적으로 초대받아도 아무도 가지 않는 잔치

 

불편한 자기목숨 미워하기 (14: 26- ) 부모 형제 자매 처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잘라 더더욱 불가능한 자기목숨을 미워한다?

 

불편한 십자가 (14: 27- ) 그냥 예수님을 쫏는게 아닌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 쫏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판국에? 무슨수로?

 

불편한 망대 건축물 세우기 (14: 28- ) 넉넉한 비용으로도 과연 망대를 제대로 건축할수 있는가? 만약 못 세우면 그 비웃음을 어떻게 무슨수로 감당할려고? 도로 빚질게 뻔한데?

 

불편한 이만 군사 (14: 31- ) 일만의 군사로 어떻게 이만 군사를 이길수 있는가? 불편한 화친을 청해야 할 판국

 

불편한 자기 모든 소유 버리기 (14: 33- ) 소유가 자기를 말하는데 모든 소유를 버리면 자기는 없어지는데?

 

불편한 짠 맛의 소금 (14: 34- ) 짜다라는 맛을 잃는 것은 불편한 기능을 잃어버린 것 남에게 짜게 작용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썩지 앉는데? 불편한 기능을 제거해 버리면 무슨수로 짠 맛을 내는가?

 

으로써 거룩성(숭고)을 하나님나라와 결부시켜 증거하시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대칭으로써의 불편함입니다.

전에는 존재와 존재끼리의 만남에서는 전혀 불편함이 없다가

갑자기 존재보다 앞선 기능이 불현 듯 등장해 돌출하게 되면

상대적인 충돌로써 불편함과 맞딱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천국의 침노입니다. 뭔가가 존재를 향해서 무조건적인 이유없는 공격을 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기능과 결부시키는 겁니다.

 

?

그것이 편안함 보다 3060100배의 초과과잉성으로써의 더 나은 평강으로써의 하나님나라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흘러 넘쳤으면 세리 강도 죄인도 천국잔치에 참여하느냐 말이죠

모든 허물을 다 덮는겁니다.

그 결과의 과잉성을 미리 앞당겨 베푸는데

이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이다는 겁니다.

 

이미 결과인데 그 결과를 거부하는 놈이니 웃기는 거죠.

 

오히려 저들이 더 이런 잔치를 영접해야 할 판국인데 거꾸로 되었다는 불편함

그래서 오늘 본문은 서서히 그 강도를 더욱더 쪼여오는 식으로 불편함이 몰려옵니다.

 

어느 정도로 무례한 천국인고 하니

이 완료성으로써 미리 앞당겨 이루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미완료이고 미흡하고 모호한 것들은

완료가 떳다 하면 일손을 모조리 다 멈춰버려야 합니다.

 

기능이 떳다 하면 존재는 멈춰야 합니다.

 

자아라는 존재는 없는 겁니다.

기능 앞에서는 존재는 사라져야 합니다.

 

? 존재는 모호하고 미흡하지만

 

기능은 완료된 넉넉한 승리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일만 군사를 지니고 있는데

상대방이 이만 군사를 지니고 왔다면 내 존재를 멈추고

이만의 기능에 복속 시키라 라는 겁니다.

 

더 완료적이고 더 나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능을 제대로 본 시선이다는 겁니다.

 

존재로 본 이만 숫자가 아니라 말이죠.

기능으로써의 이만 이라는 기능이니

존재는 항복 투항하라 라는 겁니다.

 

천국의 공격 천국의 침노에 버텨본들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모호한 존재는 누락되어야 마땅합니다.

 

완료가 왔는데 뭐가 아쉽냐 말이죠.

 

그리고 건축 공사에 대한 기능입니다.

 

처음에는 다 지을 계획으로써 건축물 짖기를 시작하지 누가 중간에 멈출 건물을 짖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과연 다 완성할수 있을지 의문 속에서 하루 하루 우연 속에서 사는 겁니다.

 

오죽하면 성화론을 붙잡겠습니까? 혹시나 이런 종교이론이

신학이론이 나를 완료 속에 이끌어 줄지 싶어서 붙잡는 것 아닙니까?

 

이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화론 이라는 론 곧 이론이 존재해 버리니까

인간들의 불안은 그 이론에 달라붙어서 불안을 해소할 줄 알았는데

 

더 불안이 가중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십자가를 이론으로 접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기능입니다.

과연 십자가 라는 기능을 감당해 낼 수 있냐 말이죠

절대로 대상물이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내가 십자가의 대상물이 될 판국으로써의 기능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그 어떤 이유로도 결과적으로 완성치 못하고

중간에 멈춰버린 중단사태가 벌어졌다면

우리는 빨리 완공할수 있는 분에게 뻔뻔스럽게 떠맡겨야 합니다.

 

그 분은 완료 뿐만이 아니라

그 집에서 잉여적으로 살수 있도록

집세 전기세 살림자금 모든 것을 충족하게 주신다는 겁니다.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건축물 짖다가 중단 멈춰버리면 비웃음을 당할껀데

이 천국의 기능 때문에 비웃음이 아닌 넉넉한 과잉성을 누린다면

얼른 당장 그 분에게 이 건축물을 맞겨야 할 것 아닙니까?

 

이 건축물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바로 성전입니다.

인간의 손에 맡겨진 성전은 없습니다.

백날 해도 못 세웁니다.

오히려 주님이 세우라 해놓고서는 주님이 부서버립니다.

뭐 이랬다 저랬다 하냐 말이죠.

우리가 완공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실패해야 머릿돌을 볼게 아닙니까?

 

설사 세워서 완공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3일 이라는 간격이 없는 건물이기에

풍랑 지진 용암 심판이 한번 휩쓸어 버리면

그냥 휭 하니 날라가 버리고 녹아져 버리기 때문에

결국 미흡하기 짝이 없는 건축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들통납니다

역시나 비웃음의 대상인 겁니다.

 

음부의 권세를 당해낼 기능이 전혀 없는 존재로써의 성전이 무슨 성전이냐 말이죠.

 

그런 성전을 주님이 애초부터 지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잘못 들은 겁니다. 오청입니다. 오발탄입니다.

 

이런 실패를 거쳐서 주님의 손으로 직접 짖는 성전을 보니

 

희한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질 못하는 겁니다.

분명 우리가 보기에 곧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인데 말입니다.

 

흠모할 모양도 없고

아름다운 풍채도 없이

 

누가 거기서 풍요로움을 누릴수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드는

 

다 헐어빠진 싫어버린바 된 건축물(예수님 자신)인데

 

거기서 죽은자 조차도 넉넉히 살리고도 남는

기능이 발산되는데 멈추지 않고 무한반복이 되더라 말이죠.

 

그런 건물 한번 손으로 지어 보실래요?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못 짖죠? 불가능하죠? 그럼 손 때라 말입니다.

 

기능이 나타났으면 오히려 신나는 종말의 건출물이 나타났다고 기뻐하시면 됩니다.

 

나의 되도 않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모호한 건축물

과연 풍랑을 견딜까?

지진도 이겨낼까?

 

아니 그것보다 지금 부도 맞아서 건축물 재료도 못 구할 판국이고

인부들이 삯을 주지 않는다고 짖다말고 다른데로 갈 판국인데

 

어쩌나? 어쩌지 ~~~

 

이런 판국에

그런 모호한 건축물 세워서 뭐하게요?

 

과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풍랑을 피하고 지진도 피할수 있는 그런 넉넉한 풍요의 건축물일수 있냐 말이죠?

 

없으면 기능이 없음을 시인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 하나 구원시킬려고 혈안이 되어있지

진짜 믿음이라면 도저히 용서받을수 없는 저런 자도 넉넉히 구원하고도 남아야 하는데

의리 의리를 외치는 비신앙인보다도 더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제발 믿지마세요

 

남도 구원 못시키는 믿음이라면 가짜입니다.

 

모호한 믿음

 

결국은 자기도 자기 믿음에 회의가 들어서

풍랑 전에는

지진 전에는 백날 확고한 확신에 찬 믿음이라는 둥

 

주변에서 백날 칭찬해도

막상 주님이 욥처럼 한번 치니까

졸지에 와르르 무너지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의문의 건물임이 들통이 난 겁니다.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보고 깜짝 놀라버리는 겁니다.

풍랑을 일으키시는 주님의 기능에 깜짝 놀래 와르르 믿음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니 모호하고 의문으로 세운 믿음 포기하세요

 

바리새인도 못 넘는 판국의 믿음이면 어차피 가짜입니다.

가짜 믿음을 소유해서 뭐하게요?

나의 존재만을 부각 시킬 뿐입니다.

 

주님이 찾는 자는 기능입니다.

주님의 기능을 봐야할 판국입니다.

 

빨리 내 믿음의 바닥을 치는 것이 낫습니다.

 

잃어버린 양 유대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잃어버렸다 라는 기능을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도저히 내 믿음은 가짜라서 믿을수 없어요 주님 제발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외치는 자가

잃어버린 양인데

 

정작 유대인이 그렇게 외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폭로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 찾기 비유입니다.

 

 

왜 없냐 말이죠? 다들 그렇게도 믿음이 있다고 억수로 많은 인간들이 예수님 앞에서 과시하는데

왜 예수님은 단 한 놈도 없다고 하시냐 말이죠

 

결국 엉뚱한데서 자기의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겁니다.

 

99마리 양 냅뚜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의 천국의 기능은 바로 이 잃어버렸다는 부재성으로써

천국의 기능을 설명하시는 겁니다.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안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넉넉한 완료를 잃어버렸기에

 

자기 자신 하나도 미워할 줄 모르는 겁니다. 그 미완료를 왜 미워할줄 모를까요?

 

(14:27, 개역)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기능을 잃어버린 겁니다. 존재의 십자가를 지고 있으니

 

기능은 잃어버린채 존재라는 껍떼기만을 씌우고 있으니

잃어버린 것이 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왜 예수님께서 공격하시면서 삐딱하게 불편하고 불쾌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가 그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오히려 존재의 십자가를 지고 있으니 그런 십자가를 지고 있는 자신이 자랑스럽지 미울 리가 없습니다.

 

결국 쫏지 않는 겁니다. 미완료를 주장하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겁니다. 십자가만이 완료인데

 

그 불륜의 넉넉한 승리의 십자가의 기능(이유없는 무조건적인 용서)

 

미완료의 존재 십자가로써 자꾸 조건 있는 용서로 만드니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7번 용서 했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는 둥,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그것은 조건이지

 

심판대 앞에서의 정작 나타나야할 기능이 뭔지도 모르는 존재를 주장하는 겁니다. 나 존재

 

왜 자꾸 조건을 만들고 원인을 만드는 겁니까? 원인 없는 결과인데

 

원인 있는 결과로 만들어 버리니 졸지에 또 기능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는 십자가를

자기가 만들어서 조작한 십자가를 믿겠다는 겁니다.

 

(14:28, 개역)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14:29, 개역)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너는 못 짖는다는 겁니다. 지을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존재가 되었기에 백날 지어도 풍랑 앞에서 지진 앞에서 쓰러지는 건물만 지을 뿐이다는 겁니다.

 

완료를 지을 생각은 없고 그저 허덕 허덕 거리면서 경제공황 속에서 겨우 겨우 지었는데

더 큰 공황이 찾아오면 건물은 와르르 무너지더라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 건물을 제대로 짖는 반석 위에 짖는 분에게 맡겨라 라는 겁니다.

뻔뻔스럽잖나? 맞습니다. 뻔뻔스러워라 라는 겁니다.

 

내가 백날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붙잡아도 그것은 사탄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넘어와서 나를 사랑해 줘야만

그것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성전인 겁니다.

 

구약 보세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결국 성전 짖다가 볼일 다 봅니다.

제대로 못짖는 겁니다. 또 더욱더 모순 된게 지을라 치며는 주님이 방해꾼을 풀어서

못 짖도록 합니다.

 

손때라입니다. 주님이 짖는 것이나 보자입니다. 이것이 존재가 아닌 기능입니다.

신약의 주 라는 기능입니다. 주 되심

 

그러니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있을 이유가 없지요

 

괜히 들어가서 무너지면 같이 깔려죽자고?

 

물론 너무 비약적으로 말했지만

그만큼 되도 않는 건물을 지어놓고서는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머물도록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마귀적이다는 겁니다.

 

내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말입니다.

내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겠다? 모호할 뿐입니다.

 

내 신앙으로 예수님을 죽음이 닥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자체가 사탕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라는 겁니다.

 

사탕아 ~~~

 

얼마나 달콤하냐 말이죠 ~~~~~~

 

 

그럼 존재가 아닌 기능은 뭐냐

그 반대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짖겠다입니다.

너가 짖는 집은 빵깨이 집으로써 들어가면 둘 다 다 죽어

즉 미흡하고 모호하고 의문이다는 겁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음부의 권세를 이길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기능을 담아야 건축물이지

음부의 권세도 못 이기는 건축은 오히려 유령의 아지트인 거죠.

 

그래서 강도의 소굴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내 믿음이 아니라

도리어 세 번 부인하고 도망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믿음이

나를 영접해 주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주 라는 기능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라는 기능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사랑하사

 

(요일 4:9, 개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나는 도저히 못하는 화목제물을 주님이 준비하신 사랑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는 준비할게 없습니다. 또 준비할수도 없습니다.

 

주님 쪽에서 준비하신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준비하신것만 받겠다는 겁니다.

 

주님만이 화목제물을 준비하시기에 그 사랑의 기능이 완료적으로 넉넉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은 화목제물이 준비도 안될뿐더러

화목제물이 뭔지도 모르고 화목제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이미 더러운데요 뭘

뭘 해도 다 더럽습니다.

뭘 해도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에서 나오는 것은 다 죄이지

기능에서 나오는 영처럼 새로울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일을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마침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완공 못하면 비웃음꺼리일 뿐입니다.

 

그 마침을 미리 앞당겨 그 끝을 미리 앞당겨 보자 라는 겁니다.

과연 모호한 의문인지? 명료하고 또렷한 완료인지?

인간의 믿음은 의문 투성이 곧 모호함입니다.

끝을 미리 당겨서 믿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은 항상 끝을 미리 앞당겨서 펼치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풍랑을 일으키면 인간의 믿음은 가짜로 판명이 나지만

예수님의 믿음은 풍랑도 잠잠케 하시기에 다들 놀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누구기에 누구 라고 자꾸 기능 기능을 외치는 겁니다.

도대체 당신 누구요?

사람 아니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지 라고 하는 겁니다.

 

즉 차이를 곧 기능을 처음 봤다 라는 겁니다.

존재 이전의 존재를 처음 접해봐서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예수님 하고 같이 다닐때는 전혀 불편함이 없더니만

기능인 차이를 느끼면 졸지에 깜짝 놀라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존재가 기능을 감당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맨날 존재만 봤는데 존재들 끼리 고만 고만 도톨이 키 재기 하듯이

누가 누가 믿음 크냐 라는 것으로 서로 재고 있는 판국에

7번 용서냐 6번이냐 되도않는 것을 재고 있는데

 

갑자기 초과잉의 490번 사실은 무한대로 매일 매일의 칠에 70

 

베드로는 놀래 자빠지는 겁니다. 손 놓는 겁니다.

모호한 것을 비로소 명료한 또렷함을 만나고서는 손 놓는 겁니다.

 

다시는 남 용서 하겠다는 짖을 안하겠다고요

 

다윗이 다시는 회개 따위 금식 따위 기도 따위를 하지 않겠다고요

 

무능함을 인정하는 기능의 기도가 아니라

자꾸 내 존재를 지켜달라는 회개 금식 기도를 한 것이 들통나서

그것이 모호하기 짝이 없음을 직시한 겁니다.

 

도리어 내가 매일 매일 490번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대충 나이를 40대 후반 아니 50이라고 그냥 베드로 나이를 봅시다.

평생 50년 동안 살면서 겨우 7번 용서 했는데

 

도토리 키 재기 하니까 그것도 대단한 것이다 라고 착각한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 규례는 3? 얼마나 모호한 규례입니다. 그것도 꼴에 용서라고 ~~~

 

3번 기준에 베드로는 자랑할 만 한 것이죠 3배나 넘게 했으니?

그 착각은 진짜자극, 보통 자극이 아닌 쾌락을 넘어서는 향유를 만나게 되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격이 되는 겁니다.

 

50년 동안의 7번을 예수님은 하루에 490번 넘어서는 비490번 초과잉 490번 용서이니

 

도리어 예수님에게 주름 잡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할 판국입니다.

 

모호한 것 앞에 완료를 봐 버렸거든요

 

상대적인 모호함에 족히 비교도 안되는 완료를 봐버린 겁니다.

다 이루었도다를 봐 버린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완료와 모호함의 차이를 말하는 겁니다.

 

완료가 모호함을 몰아내고 공격하고 해체시키면 그것으로 감사하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낮추심입니다. 겸손 떨라가 아니라

 

천국의 기능이 어떻게 나를 공격하는가?

모호하고 의문의 것을 붙잡고 낑낑 거리면서 시지프스 신화처럼 아무 의미 없는 돌을 굴리는데

 

그 고리를 그 매듭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리는 천국이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명료하고 또렷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복음이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능인데

무능함이라는 잉여인데

 

존재는 항상 이 기능을 무시하도록 되어 있는 모호함이요

 

기능은 명료함으로 모호한 존재를 공격하고

 

존재는 자기들이 모호하지만 눈에 보인다고 존재한다고 오히려 눈에 안 보이는 기능을

곧 약속을 무시하는 겁니다.

 

이것이 물과 기름처럼 적대적인 관계로써

 

서로 원수지간입니다.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 배경을 깔고 오늘 본문을 명료한 것이 왔으니 모호한 것은 손때라 라는 겁니다.

과연 손 땔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손 때면 나는 완벽하지요 라고 나오면 그것은 과연 완료일까요?

 

내 쪽으로 끌어 당길수 있는 완료가 없습니다.

 

해 봤자 또 모호해 지거든요

주님의 일하심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가 주님의 일을 따라하고 흉내내면 완료가 되는가?

택도 없습니다.

 

백날 해도 완료 안 생겨요 ~~~~~

 

그냥 주는 것 받아 먹기만 하시면 됩니다.

 

기능이란 누리는 것이지 지키는게 아닙니다.

용서를 7번 미완료에서

하루에 490번 즉 무한대의 용서로 바꿔 따라하면

완료가 되느냐?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은 내가 지킬 말씀이 없습니다.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한 겁니다.

 

(14:30,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시작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문제는 끝입니다.

끝이 완료이면 모든게 완료입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그 끝을 그 완료를 미리 앞당기는 불가능성은 예수님의 기능 곧 십자가의 죽음 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비로소 그 기능이 뭔가를 오해에서 정독으로 비로소 바뀌게 되는 것이지

 

제발 좀 완료를 누려라 이지 그 완료를 지키라 라는 말이 아닙니다.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14:32, 개역)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그 다음 또 완료가 뭔고 하니

 

일만 군사인데 저 쪽이 이만 군사이면 빨리 화친을 청하라 이다는 겁니다.

천국은 완료적인 이만 군사로 쳐들어 오는데

인간은 되도 않는 미흡한 모호한 일만 군사로 버티겠다는 겁니다.

 

그냥 자수하여 광명을 찾자

 

그냥 투항하여 평화를 누리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즉 잃어버림은 모호하고 의문적이고 미완료적임을 인정하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또렷하고 명료하고 확실한 완료가 미리 준비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 존재를 포기하면 저절로 완료인 기능이 영접할려고 다가오는데

백날 눈 씻고 봐도 완료가 안 보이는 것은

아직 모호한 것을 포기 못해서

자기를 부인 하지 못해서인 겁니다.

 

(1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또 소유를 다 버리라 라고 합니다.

소유가 내 존재를 말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 그런 소유는 모호합니다.

 

왜냐 만약 소유가 없게 되면 나의 존재도 같이 없는자 취급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됨은 소유가 넉넉해서 그런 존재가 되어서

또는 너무 너무 잘 믿는 존재가 되어서 그런 믿음을 소유해서 제자가 되는게 아닙니다.

 

진짜로 소유를 다 버렸는데 그것을 지켰는데 기능이 안나오게 되면

그것은 소유를 다 버린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오히려 소유를 안 버릴 때 보다 더 못한 결과인 겁니다.

 

그러니 제발 소유 버리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부자청년이 못한 것을 나는 했다 라고 그런 존재 되지 마세요.

기능을 말씀하시는 취지로서

예수님 자신의 기능이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예수님 자신의 율법완성이지

우리보고 지키라는 소리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다 강탈 당해

탈탈탈 털려서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했을 때

 

이제는 모세처럼 자기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워가면서

남들은 다 버릴 지언정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그 다짐이

다 너덜 더널 개털이 되어서 쓰레기 배설물이 되었을 때

 

그 때

 

메시아의 시간 곧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 께서 더 잘 아신다고

 

아무것도 없어도

믿음도 없고

행함도 없고

그 어떤 일도 한 것이 없어도

 

그 어떤 조건 하나 갖춘 것 없어도 뻔뻔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한 것은

 

주님이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단지 그 기능 하나만으로 뻔뻔스럽게 대답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나의 용서 7번의 결과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결과인 490번 사실은 490번이 아니라

이레에 70번이라고 해서 7 곱하기 70이 아닌 완료 곱하기 희년? 희년은 50이지

뭐였더라? 하여튼 저는 성경 잘 모릅니다.

 

문제는 숫자에서 영원이라는, 숫자를 넘어서는 영원한 용서의 결과이다는 겁니다.

 

숫자 개념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인간을 무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완료도 모잘라서 곱하기 더 나은 완료를 퍼부어야 그 정도로 존재에 빠져있는

지독한 자기애로만 평생을 살아갈 뿐이기에

용서를 팍팍 소금을 팍팍 쳐야만 할 정도로 썩고 썩어 썩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뻔뻔하기 싫어도 뻔뻔함을 누리는 겁니다.

영원한 용서의 바다에 풍덩 빠져버림 당해버렸거든요.

 

이것이 미리 준비된 완료의 화목제물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14:34, 개역)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14:35, 개역)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소금의 기능으로써 천국의 기능을 말씀하십니다.

제일 오해를 하는데

 

소금의 기능인 짠 맛을 잃어버리면 버린다는 겁니다.

왜냐? 짠 맛이 없으면 미완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짠 맛의 기능이 뭔가를 짠지 아닌지를 알려면

우리가 소금치임 당해야 합니다. 즉 너는 썩었어 썩은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과 마귀들은 반대로 우리가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소금 근처도 갈까요?

 

성령은 가능성을 부여했기에 전에는 못한 것을 성령을 통해서는 할수 있기에

소금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과연 명료한 소금이 될까요? 그것도 짠 맛을 제대로 내는?

그런데 다들 설탕만 되던데 우짜죠? 사탕아 물러가라 ~~~~

 

무한대의 770번의 영원한 용서 근처에 과연 갈수 있는 7번 용서 맞을까요?

 

우리는 백날 해도 소금맛 안 납니다.

 

도리어 감사하게도 너무 너무 감사하게도

썩은내만 풀풀 날 뿐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소금 근처는커녕 도리어 소금을 안 뿌리고는 못배기는 썩은냄새만 난다는 것

 

7번 용서 했다는 그 배설물 쓰레기 냄새가 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소금을 팍팍 치임 당함으로써

 

아 이것이 소금이네

 

내 손으로 만들 수 없는 지을수 없는 성전이듯이

내가 백날 해도 만들 수 없는 소금을

도리어 소금 치임 당하면서 맛보는 겁니다.

 

그러니 완료가 주님 쪽에서 오는 기능으로써 소금을 설명하시는 겁니다.

 

 

빛 되지 마세요

빛이신 예수님을

 

오히려 어둠의 자식임이 들통난 그 자리에서 빛을 보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소금 치임 당할 정도로 그 정도로 무능하고

소금 맛도 없고

모호한 맛을 내놓고서

오히려 달달한 설탕맛을 내놓고서는

그런 이웃을 청해 놓고서는

이웃 사랑 실천했다는 둥

불편한 소금을 불편한 이웃을 청하지 않는

아니 청할수도 없는

그런 소금을 쳐 달라고 할 수 없는

 

모호한 가짜 소금이면서 이 명료한 짠맛을 지닌 천국이라는 소금을

그 불편한 소금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 들통이 난다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의 기능입니다.

 

이런 불편한 기능이 바로 완료요

우리는 편한 것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미완료에 푹 빠져서

이런 불편한 천국의 기능들을 거부해 왔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주님의 불편한 섬김의 기능으로써

우리를 지적하시는 섬김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비웃을까요?

 

미완료된 또 허물어질 것 뻔한 건물일까요?


능히 짖지 못하는 것을 너끈히 짖고도 넉넉하고도 남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건물을 짖는

모든 자를 쉬도록 하는

 

죽은자도 살리는 완료된

건축자들이 버린 돌맹이 일까요?

 

우리는 미래완료의 완벽하게 완료된 건축물로부터 비웃음을 당함으로써

그 천국의 기능을

 

나의 존재와 왜 차이나는 가를 보여주시는 섬김을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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