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14:12-24)

 

 

(14:12, 개역)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4:13, 개역)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14, 개역)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4:15, 개역)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4:16, 개역)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4:17, 개역)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4:18, 개역)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4:19, 개역)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4:20, 개역)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14:21, 개역)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14:22, 개역)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14:23, 개역)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14: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보통 잔치를 벌리면 그것도 잔치 중의 잔치인 혼인잔치를 벌리면

그 잔치에 초대되는 사람들은

이 혼인잔치를 더더욱 돋보이게 할려고 동원이 되는 손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평상시 서로 돕고 도운 지인들

친구들 이웃들 먼친지들도 오랜만에 볼수 있는

잉여성을 더욱더 크게 하기 위한 목적이 되는 겁니다.

 

만약 잔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자라면

애초부터 초대를 하지 않는 거죠

 

그런데 이 잔치가 보통 잔치가 아니라

국가의 왕이 베푸는 잔치 보다 더 나은 잔치인

하늘나라 잔치입니다.

천국 잔치입니다.

 

땅의 임금들도 이런 잔치라면 평상시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 거지들도

이날 만큼은 배불리 먹을수가 있고

또 범죄자도 특별사면 같은 특별용서가 베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슬픈 요소가 없도록

기쁨의 과잉성이 넘치는 날이 땅의 임금들도 할 수 있는 잔치인데

 

천국잔치는 그것보다 더 깊게 들어갑니다.

 

지난 시간에 천국이 이유없이 공격을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그 이유가 낮추기 위함입니다.

 

낮추겠다는 것은 일체 인간 쪽에서는 자발적으로 낮출수 있는 재간이 아예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는 겁니다.

 

즉 남자의 평생 병인 강박증은 결국 상좌입니다.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

좋은자리 차지입니다.

 

아파트를 구입해 살려고 할 때

남자는 이 아파트의 위치가 어떻게 자신을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로 작용하는가?

라는 분석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여자는 그 아파트 안의 인테리어가 어떤가 그런 미적인 상태가 어떻게 주변과 함께 작용하는가를 본다고 합니다.

 

물건을 구입해도

집을 구해도

또 심지어 배우자를 선택해도

손님을 초대해도

누구를 만나도

 

뭐하나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막무가내로 찬밥더운밥 가리지 않겠지만

조금만 배부르면 어느새 그런 것을 따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강박증인 남자에게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성공 여부

좋게 되는 긍정인가? 나쁘게 되는 부정인가에 대한 강박

 

여성은 그것이 어떻게 나를 아름답게 해주느냐?

추하게 하느냐? 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력으로 낮아진다? 낮춘다?

 

오히려 그런 자는 위선자입니다.

 

그냥 생긴대로 살면 됩니다.

 

괜히 낮출려다가 낮추고자 하는 자신을 높이는 결과가 되는 겁니다.

 

며칠전에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한 게 나타났다고? 그것이 이방인 며느리 룻이라고?

 

야야 너희들 고향으로 떠나라 너희는 살고 봐야제?

나는 쫄딱 망했구나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아니 니가 내가 당한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니?

 

아이고 하나님 보다 더한게 나타났네

 

네 어머니! 맞아요 하나님 보다 더한게 나타났어요
어머니가 말한 하나님 보다 더한게 나타났다고 한 그 하나님은 가짜였어요

그런데 어머니를 쫄딱 망하게 한 제가 본 하나님인 어무이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였어요

 

아니 가짜라는 말이가? 진짜 라는 말이가?

말 좀 헷갈리게 하지 마라 !!!

 

어머니 말 귀 좀 한번에 알아먹으세요 제발

 

어머니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당께요

 

아까는 가짜라메?

 

네 가짜 맞아요

 

저봐 저봐 가짜라 해놓고 어머니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어머니가 말하는 하나님은 시아버지 이름 속의 엘리멜렉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그 뜻이 가짜 하나님인 겁니다.

 

(1:1, 개역)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1:2, 개역)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아니 그러면 하나님은 왕이 아니다 말이가?

 

아뇨 하나님은 왕이 맞지요 왕이 맞으니까 어머니를 쫄딱 망하게 하신거죠

 

어머니는 하나님이 왕이다 해놓고서는

남자들 쪽을 다 죽여버리니까?

 

하나님이 더 이상 왕이 아니니까 저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는 소리 아닙니까?

 

야 워 이런 되바라진 며느리 봤나?

에라이 모르겠다 머리 아프다 너희 멋대로 해라

 

동네 사람들 동네사람들 나 나오미가 돌와왔어요

 

맞네 맞네 나오미 아이가???? 아이고 나오미야 얼굴이 와이리 많이 상했노??

 

나를 나오미를 하지 마세요 나를 기쁜자라 하지 마세요

나를 마라 라 하세요 나는 쫄딱 망해서 돌아왔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전능자를 만났어요.

 

거보세요 어머니 제 말이 맞잖아요

어머니 입으로 전능자 하나님이 어머니를 괴롭게 하셨잖아요

그 하나님이 어무이 하나님이고 내 하나님이랑께요?

 

어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말했뿟네??

 

 

이것이 오늘 본문 혼인잔치에 초대된 손님과 연관된 내용입니다.

 

 

하나님 보다 더한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즉 강퍅케 한 애굽왕 바로왕 보다 더한 왕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애굽 왕을 강퍅케 만들고서는 애굽에서 구원한 줄 알았는데

더 심한 광야로 내몰아 버리시는 겁니다. 거기서 낮추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커녕 단 한 사람도 안 남기고 다 탈락 당하는 겁니다.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는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가 결국 탇락 당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 라는 기능은 더더욱 빛납니다.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 라는 존재는 사라져 버렸고

탕감이라는 왕의 용서는 기리 기리 빛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존재 보다 먼저 앞서 있었던 기능을 무시하니

용서를 무시하니

 

용서가 사라지는게 아니라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기능을 무시했던 존재가 도리어 사라지는 겁니다.

(하만이 존재로써 괜히 에스더의 기능을 건드린 겁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기능이 튀어나올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역으로 기능은 영원히 남고 존재는 사라져 하만은 기능을 죽일려다가 본인이 도리어 죽임을 당한 겁니다.)

 

오히려 존재가 용서를 없애버리고도 남아야 하는데

거꾸로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용서의 가치는 더더욱 빛나는 겁니다.

 

괜히 건드린 겁니다. 말려든 거죠.

 

마치 향유를 깨뜨린 여인의 기능은 기리기리 빛나고

분노를 내며 그 여인을 꾸짖는 제자들의 존재성은 예수님으로부터 거부당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끝까지 섬기심의 기능이 아니였다면 제자들 우찌 될 뻔 했나요?

 

그러니 구원이 광야에서 다 탈락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이라는 기능은 오히려 빛나고 빛나고 기리 기리 빛나는 겁니다.

 

딸랑 한 명 갈렙만이 요단강을 건너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바지를 붙잡아 갈렙에게 딸려 들어간 것이고

이 한 명이 누룩처럼, 부풀어 올랐고(하나님나라 비유), 겨자씨만한 씨앗 한 알이 큰 나무가 되어 쉼을 주었다 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없는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천국비유가

 

바로 이런 구약의 사건을 염두하고서 증거되는 겁니다.

 

즉 기능은 전혀 전혀 취소됨이 없고

 

오히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만을 의식하는데 그 존재는 모조리 다 누락될 뿐이다는 겁니다.

 

결국 존재 보다 앞서 있는 기능 때문에

기능만 남고 존재는 누락 되는

존재는 누락 됨으로써 기능만을 남기겠다는 취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결국 잔치는 기능입니다. 국가의 잔치 보다 더 심한 하늘나라의 잔치는

기능을 발휘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능이 발휘된다면 뭐는 누락 된다?

존재는 누락 됨으로써 기능이 빛나는데 있어서 들러리로 작용이 되는 겁니다.

 

즉 천국은 존재로 파악하는 인간의 시선을

 

진짜 천국 본인 스스로는 기능으로 작용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누구처럼?

 

룻의 시어미니 나오미처럼

 

제가 그냥 나오미 라고 안하고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 라고 한 이유는

 

나오미는 존재로써의 하나님을 주장하는데

이방 여자 며느리 룻은 존재로써의 하나님을 깨뜨리는 기능의 하나님을 봤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머니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고 말해도

나오미는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참나 별나네 나를 쫄딱 망하게 한 하나님이당께????

 

천국이 존재가 된 것이 인간의 천국입니다.

존재하니까 천국을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존재의 인간이 자기투사시킨 것이 존재의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성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존재의 자기투사입니다.

믿겠다는 겁니다. 행하겠다는 겁니다. 자기한테 회귀 하기 때문입니다.

성화론자 개혁주의 다 존재로써의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배경을 깔고서 진짜천국은 존재가 아닌

존재를 깨뜨리는 기능의 천국이니까

천국을 침략하는 겁니다.

가짜 하나님을 깨뜨리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최고의 충돌자는 바리새인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성화론자의 대표성이지요 유대인의 대표성이지요

하나님 신앙의 대표성이지요 대표성 아닌게 없을 정도로 모든 것에 대표성입니다.

 

그러니 가장 많이 충돌 해야

 

그 차이로써의 존재 보다 앞선 기능의 천국이 차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기능의 천국은

초대하는 손님 조차도 다릅니다.

 

마치 초대 자체가 탈락케 하기 위한 의미로서 천국의 기능을 발휘하는 겁니다.

그것이 당위입니다.

 

 

만약 존재로써의 천국이라면 홍해를 건넌 자면 단 한명도 탈락함이 없이 요단강까지도 다 건너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중간에서 탈락하게 된다면 천국 자체가 모순점을 보여주는 뉘앙스가 의도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에 그것을 뺄 겁니다.
빼야 존재의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기능의 천국은 전혀 반대입니다. 오히려 더욱더 부각 시킵니다.
그런 모순, 부조리를 의도적인 배신으로 더더욱 부각시키는 겁니다.


1차 초대 손님들은 다 탈락 대상입니다.

(눅 14:17, 개역)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눅 14:18, 개역)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19, 개역)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20, 개역)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이 다 죽기까지 다 탈락 당할때 까지 기다립니다.


2차 초대 손님들은 그 빈자리를 채우는 식입니다.

(눅 14:21, 개역)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눅 14:22, 개역)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눅 14:23, 개역)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새로운 세대로 교체 된 이후가 되니 비로소 젖과 꿀의 기능에 부합되도록 합니다.

이로써 전 후가 갈라집니다.

전초대 손님과 그들의 사양거부로 인한 후초대손님

그래서 마치 이 잔치가 뭔지 모른다는 취지로 다시는 잔치 맛을 못 보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2차 손님들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눅 14: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무슨 꼬장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잔치 벌리는 사람 맞나요?

사람? 거 보세요 우리는 모두 존재라는 시선 뿐입니다.
잔치 주인은 기능 시선입니다.

마태복음은 아예 폭력성이 더 부각이 됩니다. 2차 손님도 잔치집에서 제공한 옷을 입지 않았다고 탈락 시킵니다.
젖과 꿀이라는 기능을 왜 무시하느냐 라는 거죠.

(마 22:11, 개역)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개역)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개역)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결국 잔치의 기능은 종말성입니다. 종말이야 말로 최고의 잔치 중의 잔치인 혼인잔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말이라는 두려움인가? 아니면 기생라합처럼 우리 민족 우리들 인간들의 신들, 인간의 국가를 멸절시키는 기쁜 종말인가?
그런 기능이 바로 잔치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존재이기에 저 마다 자기의 할 일들이 개인적인 사적인 일들이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잔치 주인은 잔치라는 기능을 발휘케 할려는 목적인 겁니다. 종말이거든요.

제대로 걸려든 거죠. 기능을 존재와의 차이로써 이렇게 잘 표현한 비유는 없습니다.
사실상 모든 하나님나라 비유가 이러합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도 그렇구요
 

존재라는 도덕 보다 기능(당위)라는 윤리가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법 보다 안식의 주인이라는 사랑(긍휼히 여기심)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일부러 노골적으로 안식일날 일부러 고치시는 겁니다.

 

도덕이 전부 분노하면서 다 일어나도록

정의가 전부 분노하면서 다 일어나도록 말입니다.

 

제자들이 그래서 분노하면서 고함치며

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기며 미리 장사 치른 일에 격분하면서

가난한자에게 주지 않았다고 정죄하는 겁니다.

 

그러나 법은 가난한자나 죽은자나 정작 살리지 못합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마땅히 당연한 당위) 죽은자까지도 살립니다.

더더욱 죄인 중의 괴수 마저도 말입니다.

 

법으로써는 도저히 용서 못하는 자를

사랑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도 죄를 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행함이 아닌 믿음이다는 겁니다.

또 인간은 믿음 조차도 기능이 아닌 존재로 보기에

기능의 믿음으로써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한 겁니다.

그 행함이 바로 아브라함의 이삭이라는 자식은 인신제사 드리는 부조리

기생라합의 거짓말이라는 부조리입니다.

 

이것이 기능이다는 겁니다. 존재 보다 앞선 먼저 있던 기능

 

그러니 존재 속에서 끄집어냄을 당한 적이 없는 자는

행함이 있는 믿음 조차도 존재인 자신이 그 말씀을 자꾸 지킬려고 하고

어떻게 해서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따라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턱 하고 막히는 겁니다. 존재인 유대인에게는 십자가가 걸림돌이요

거리끼게 한다고 합니다.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임이지만

 

왜 거리끼냐? 법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조리는 유대인은 못 넘어서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무리 아무리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진리를 위해 부딧히기도 하고

때로는 경쟁도

때로는 역적으로 몰기도 하는 그 열심들이

다 존재에서 나오기 때문에

 

기능 곧 영의 영역 사랑의 영역을

법을 사수하고자 하는 자들에게서는 따라 할 수가 없는 거리끼게 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사도바울을 주님께서 빼내시는 이유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사도바울이) 빼내시는 기능(사랑)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울을 알고서

하나님의 저주인 나무 십자가가 예수님에게 저주로 부어졌는데

어떻게 그 예수가 나에게 나타났지????

 

그래서 3년간 단절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3일 이라는 그 간격이 뭔가를 보게 되는 겁니다.

 

아 이거다

사실은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그 허물을 그에게 감당 시켰다.

이것이 기능 곧 사랑이였다는 겁니다.

그 기능에 우리가 말려들었고

주님은 그런 존재들 마저도 넉넉히 이기셨다 라는 겁니다.

 

그 이후로 바울은 존재와 싸우는 기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보다 더 한게 나타난 겁니다.

 

더 심하게 공격합니다.

 

베드로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 한테도 막 나무랩니다.

 

? 존재가 아닌 기능이기에

도덕 안 따집니다. 오로지 당위(윤리)만을 따질 뿐입니다.

그러니 도덕 보다 더 도덕적인 도덕의 과잉인 윤리(사랑)이기에

존재나 도덕이 이 사랑을 이겨낼수가 없는 겁니다.

 

빌라도가 오히려 손 씻고 피해버릴려고 하듯이

괜히 잘못 건드려서 도로 손해 볼 판국이라

어찌하든지 피하고플 뿐인 겁니다.

 

어리석은 논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 걸림돌을 제거해야만 하는 겁니다.

끝가지 덤빕니다. 존재는 정치적이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이 십자가가 그들의 신앙 보다 더 나은 신앙으로써 작용하게 되니

거리끼는 걸림돌로써 작용을 하면서도

잘못 까딱 했다가는 자신들이 도로 된통 당할까봐

심사숙고 하면서 덤비는 겁니다.

 

꼭 누구 생각나네 얼마나 재고 재서 철저한 확신 속에서 덤볐는지

그 정도로 거리끼게 하는 거북스러운 불쾌한 숭고이다는 겁니다. 거룩이지요.

 

자신들 보다 더 거룩한데 법을 어기면서 법 보다 더 법을 과잉적으로 이루면서

사랑을 펼치니

 

전혀 감을 못 잡는 겁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런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기능이 나타났다면

죽었다 복창 해야 할 판국입니다.

 

오죽하면 전능자라고 할까요?

지대로 밟혔다 라는 거죠.

우리는 존재 존재 찾다가

기능에 지대로 밟혀야 합니다.

 

전능자 라는 말이 기능을 만났다 라는 뜻입니다.

 

그때는 하나님 안 캅니다.

 

하나님의 기능이 설마 이런 기능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라는 겁니다.

 

오죽하면 존재로써 우리는 잔치 좀 맛 볼 줄 알았는데

 

약속의 땅의 젖과 꿀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분명 잔치 맞기는 맞는데

 

젖과 꿀을 맞 한 번 못보고 탈락 당하는 겁니다.

 

그 젖과 꿀이 존재를 위한 젖과 꿀이 아니였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보다 더 도덕적인 도덕의 과잉으로써의 윤리 곧 사랑이기에

기능이기에

 

젖과 꿀 분명히 맞긴 맞는데 맞 한 번 못 봄으로써

 

젖과 꿀의 기능의 가치를 더더욱 높이고 있더라 라는 겁니다.

 

얼마나 천국 다운지

천국의 기능이 흘러 흘러 넘치는지

 

지옥에 간 부자가 천국을 보면서 물 한 빵울 그 한 빵울을 자존심 다 구기고

거지나사로에게 구걸 하고 있는 겁니다.

 

부자가 말입니다.

거지에게 구걸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거지에게 구걸

 

얼마나 천국의 기능 답냐 말입니다. 거지가 부자에게 구걸하는게 아니라

부자가 거지에게 구걸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천국기능은

 

부자가 다 탈락 당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지 부장자 떠돌이가 그 잔치에 참예되고

천국을 맛보게 된다는 겁니다.

 

?

부자, 가치가 있는 자들, 존재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자들,

좋은 자리를 앉고자 하는 자들, 상좌에 앉고자 지금도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는 자들

 

이런 존재들이 기능을 천국의 기능을 무시함으로써

 

천국의 맛을 못 봄으로써

 

천국의 맛봄의 가치가 높아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 기능을 비유로써 설명하시고 있는 겁니다.

 

존재의 시점에서는 말로 안되는 모순덩어리의 천국잔치입니다.

 

그러나 기능의 시점에서는 도리어 존재가 지금 탈락 당할 판국에

지금 부조리라는 둥 모순이라는 둥 따질 입장이 전혀 못됨의 당위가 오히려 더더욱 드러남으로써

 

존재는 덤비면 덤빌수록 더더욱 손해 볼 짖만 반복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존재가 기능에게 구걸해야 할 판국입니다.

 

누가 봐도 기능이 존재에게 그 동안 구걸했는데

 

거꾸로 살려주세요 라고 할 판국인 겁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죽여 버렸는데

 

이제는 예수님에게 도로 구걸 해야 할 판국인

살려주세요 라고 할 입장인 겁니다.

 

한 쪽의 강도는 바로 그런 주 되심 이라는 기능이 덮쳐져서

살려 주세요 라고 외쳤습니다.

 

도저히 죽어가는 판국에 나도 죽고 예수님도 죽는데

살려달라니???

 

다른 한 쪽 강도가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야야 야들아 존재가 사라지는데 살려달라고 해서 살려줄 자가 누가 있니?

 

기능이 안 보이는 겁니다.

 

아니 그 사람 예수도 죽는데?

 

죽는 존재로만 보일 뿐이지

끝까지 섬기시는 기능이 안 보입니다.

옆의 강도를 구원하시는 기능이 안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당신도 그러는거 아닙니다.

아니 죽어가는 판국에 살려달라고 아니 그래 그 농담을 받아주면 됩니까?

오냐 살려줄게?

 

당신이나 좀 살아보세요 ~~~~ 너 나 잘 하세요 ~~~~~

 

아무리 봐도 기능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끝까지 존재로 보입니다.

자기투사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자신이 존재였다 라는 것을 외치는 것이 인간의 평생 헛짖입니다.

 

이것이 선악에 빠진 인간인 겁니다.

 

기능이라면 은혜!! 아무조건도 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볼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의 우는 기능 때문에 건짐 당했습니다.

바로 예수님 쪽에서 넘어오는 무조건 용서의 사랑입니다.

 

존재는 죄책감에 빠져 자살 할 것 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닭의 기능이 베드로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겁니다.

이 기능이 덮쳐진 이상

 

베드로는 존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자살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기능 곧 사랑이 예수님 쪽에서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뻔뻔스럽게 내가 주님을 억수로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참나 왜 자꾸 물으십니까? 더 잘 알면서 ~~~~

 

 

내 사랑이 명료함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이 명료함을 봐버렸기 때문입니다.

 

존재로써의 베드로 사랑은 모호했습니다.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내 자신의 다짐, 내 자신의 믿음에 속지 맙시다.

 

예수님의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내 자신의 믿음은 천국잔치의 맛 못 봅니다.

베드로도 못했다면 우리도 못하는 겁니다.

 

빨리 포기 하십니다.

 

젖과 꿀이 왜 흘러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맛 한번 못 봅니까?

 

젖과 꿀의 기능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 다루시는 예수님의 기능

천국의 기능을 기뻐합시다.

 

나의 가짜 천국

하나님이라는 존재

 

나 라는 존재를 깨뜨리고

공격하고

 

탈락시키고 하시는 것이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이라는 사실을

 

그 기능을 벌리시는 것에 감사합시다.

 

아무것도 아니였던 존재들이

오히려 천국의 맛을 보게 됩니다.

 

창녀와 세리와 강도가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합니다.

? 기능 때문에

 

존재를 누락시키다 보니

 

떨거지들이 남아버렸다는 겁니다.

 

유대인은 탈락 당하고

이방인이 그 빈자리를 채우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의 기능입니다. 맛 못 보게 하는 기능으로서

천국은 증거 되는 겁니다.

 

그 기능에 우리는 동원이 되는 겁니다.

존재만 주장하던 우리들이 감히 감히 건방지게 이 기능에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 보다 더 심한 믿음의 과잉인 행함이 있는 믿음은

이 기능을 일부러 창녀로써 세리로써 강도로써 동원이 됨으로써

 

기생 라합처럼 거짓말로써 법 즉 존재와 맞물리는 거리낌으로써 행함이 있는 믿음을 기능으로써 펼치고 즉 성령으로써 펼치고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제물로써 바치는 거리낌으로써 숭고인 거룩의 기능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는 겁니다.

 

다 한결 같이 따라하기가 불가능 하니 따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불쾌한 숭고함이

존재의 아름다움 보다 더 아름다운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한 거룩입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가 뭐냐고 묻는데

 

예를들면 미학 오딧세이에서 본 내용인데

 

분명 인체를 그린 그림이나 조각상이

몇 대 몇 으로 정확하게 한치 오차 없이 그린 또는 조각한 인체가 너무 너무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 보다 넘어서는 아름다움이 뭔고 하니

그 비율을 일부러 약간 삐뚤게 함으로써 미끄러지는 느낌을 주니까

 

오히려 그 정확한 질서를 깨뜨린 비질서의 비율이 생동감을 주어서 살아있는 듯이 보이더라 라는 겁니다.

 

분명 그림이요 조각상인데 딱딱함고 우와 아름답다 라고 하고 뒤돌아서면 끝나는

얼마나 편안하고 안정감이 있는데

 

괜히 삐딱한 비율로 만들어 버리니까

그림이 그림으로써 끝나는게 아니라 도화지 종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불쾌함이 생길정도로 생동감이 있어 더더욱 아름답고

 

조각상이 살아있는 듯 괜히 불편해지고 움직여서 위협할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하는데

오히려 그 쾌감이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불쾌감으로써의 쾌락을 주는 역설을 주더라 라는 겁니다.

 

누가 더 나은 제사냐 말이죠???

 

 

인간 보다 더 인간적 이다는 말은

인간은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니나 나나 똑같다 라는 겁니다.

니가 선을 행하면 나도 선을 할 줄 알고

니가 악을 행하면 나도 실수로 악을 행하는 고만 고만 만만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 보다 더 인간적이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게 쌍둥이 권법

 

이게 그 유명한 전래동화 자기를 도둑맞은 사람

아마 이 제목 맞을겁니다만 어릴적 봤던 거랑 달라서

그거 찾는다고 좀 헤맸는데

 

아무튼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동네에 아주 아주 못땐 부잣집 도령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여지 없이 장난을 심하게 치면서 못땐 짖을 하는데

(과거라서 그렇지 요즘으로 치면 전혀 못땐 짖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런 못땐 부잣집 도령에게 똑같이 생긴 자가 나타나더니

 

잠시 그 못땐 부잣집 도령이 며칠 동안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이 쌍둥이가 아닌 똑같이 생긴 도령이 그 동안 집에 들어가

아주 아주 착한 짖만 하게 되니

 

그 도령이 돌아오니까

 

다들 자기를 모르는채 하는 겁니다.

 

모르는채 하니까 소송을 걸었는데

 

하인들이나 누구 누구나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못땐 자신을 진짜라고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고

 

새로 나타나 착한 짖만 하는 나랑 똑같이 생긴 도령이 결국 가짜 임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판명이 되고

 

 

진짜인 자신은 쫏겨나게 되더라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여러버전으로 만들어 보면 한번씩은 다 접해본 이야기 일 겁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결론은 뭡니까?

 

부자가 거지에게 구걸하는 기능이 바로 천국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천국은 창녀 세리 강도를 먼저 들어가도록 하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분명 바리새인은 창녀가 더럽고

자신들은 깨끗하다고 한 겁니다.

 

이것이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되고자 얼마나 노력한 줄 모릅니다.

 

그런데 천국의 기능은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사랑을 말하기 위해

 

잔치의 맛을 못보게 할려고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겁니다.

 

자신이 깨끗하다고 여긴 자들이 얼마나 더러운 자였는지가 들통나고

상대적으로 더럽다고 정죄했던 자들이

하필이면 내 코 앞에서 꺠끗함을 입게 됨이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지에게 부자인 우리는 구걸해야 할 판국입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님에게 그를 하나님의 법으로 집행한 판사인 우리가 살려달라고

마치 사형당할자처럼 구걸해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이런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천국이지

 

존재의 천국은 이런 기능이 그저 거추장스럽고 거북스럽고 불쾌할 뿐이고

무례하고 어리석고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 기능이기에

존재는 그 걸림돌을 제거해야 존재가 확장 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천국으로써

무너져 봐야 정신차리는 겁니다.

 

그래서 젖과 꿀을 맛 보게 하는 것이 진짜 천국의 기능인 겁니다.

 

다윗에게 기능이 덮치니

비로소 내 존재는 모친의 죄중에 태어난 아무것도 아니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기능 속에서 보게 되니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조차도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게 됩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기능이 완료됨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가 갈라지게 됩니다.

 

불쾌한 참선지자

 

편안한 거짓선지자

 

진짜는 가짜 노릇을 일부로 하고 있고

 

가짜는 진짜 노릇을 열정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져야만 할까요?

 

잔치를 맛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젖과 꿀을 맛볼수가 없기 때문에 약속의 땅인 겁니다.

천국은 이런 단절의 단절이라는 기능으로써 증거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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