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머니께서 저녁식사때 물으셨다.

이 말씀이 너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 사실은 너무 너무 쉬운 말입니다.

말을 조금 바꿀께요

 

너희가 마귀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들어간다.

얼마나 당연한 말입니까? 마귀가 천국 갈 리가 없잖아요

쉽죠?

그렇네 너무 너무 쉽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렵게 말씀하시지?

 

그것은요 우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마귀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거칠줄 모르거든요

 

마귀가 보여야 마귀 거쳐서 생각을 하던가 하지?

 

주님은 우리를 상대 안하시고

마귀만을 상대 하세요

 

자 그럼 이제부터 조금 어렵게 해 볼께요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라고 했을 때 어렵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을 저들 바리새인 코 앞에서 말씀하시면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쉽지

 

그렇죠 자기 이야기 하니까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말해 놓고

다시 같은 말로 같은 의미로 다시 해 볼께요

 

마귀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 들어간다

라고 하면

 

어머니께서 아까는 어려웠는데 지금은 쉽잖아요

 

그런데 아까는 바리새인들은 쉬웠는데

 

마귀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 들어간다고 바리새인 코 앞에서 하니

 

바리새인에게는 어렵게 됩니까? 쉽게 됩니까?.

 

어렵게 되겠네??

 

마귀를 이겨야 하니까 말입니다.

 

마귀 보다 더 나아야 하니까 말이죠

 

다들 바리새인을 닮고 싶어서 본이 되는 자를

또 그들 바리새인 자신들도 본보기가 되고자 했던 자를

 

오늘날로 치면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그런 자를 마귀라고 규정하는 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마귀라고 그들을 취급할 수가 있는가?

그들이 마귀이면 우리 또한 마귀인 셈이지요.

그래서 마귀 속에 갇혀있다는 전제성을 깔고 빼내시고자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는 그 말씀이 마귀를 거칠줄 모르니까

자꾸 지킬려고 하는 겁니다.

내 숙제로 보는 거죠


예수님의 숙제로 보는 시선은

갇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마귀에서 못 벗어난 포로된 상태이다는 겁니다.

 

이웃사랑실천도 지킬려고 하는 조건갖추기가 된 거죠

조건 갖추라는 말이 아니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를 발휘)

그 반대로 아무 조건을 갖출수 없는 무능의 상태이다는 지적입니다.
넌 갇혔어 !!

 

무화과 나무가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내 놔라 했는데 못 내어 놓으니까

예수님 말씀 스스로가 본인 입으로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저주를 해버리고 곧 말라버리니

베드로가 얼마나 당황했으면 왜 저렇게 되었냐고 묻는 겁니다.

 

그것은 끝을 미리 댕겨 와서 보면

원래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말라 죽여버림으로써 믿음을 곧 종말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저주 속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잔치집이 졸지에 초상집이 된 것이 지혜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 인간의 모든 끝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끝을 미리 앞당겨서 보게 되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 말씀지킨다는 것 모조리 다 마귀짖이다는 겁니다.

순엉터리를 붙잡고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계급을 나누고 있는 겁니다. 성화론은 결국 카스트 제도인거죠.

 

그래서 끝을 미리 앞당겨서 믿음을 보여주니까

순 엉터리 믿음으로 믿는다고 우겼던 것이 들통내시니까

당황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남이야기가 아니고, 무화과 이야기가 아니고
내 문제가 되어버리는 그 다음 니 차례다 라는 식입니다.

 

얼마나 제대로 지적해주시는 사랑이요 섬김이냐는 거죠

 

비로소 우리 속에 있는 가짜 믿음이 툭 하고 튀어나오고 우리 속의 마귀가 발악을 하는 겁니다.

 

(21:19, 개역)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믿음은 나의 끝 곧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그 완료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보고 기뻐해야 함은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라고

춤을 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내 믿음의 성공을 드러내는게 아니라

오히려 내 믿음이 순 엉터리임을 드러내는 주님의 살아계심만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종말 곧 끝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버리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내 믿음은 주님의 살아있음을 미래완료로 본게 아니라

내가 천국 가냐 못가냐로 보니까

덜컥 겁이난 겁니다.

 

무화과 나무가 걱정이 되어서?

아니지요 내가 걱정이 되는 겁니다. 나를 챙기고파서~~~

 

그런데 내 믿음으로도 도저히 버틸수가 없다는 것이 들통난 겁니다.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이라고 하니까 덜컥 겁이나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 보다 낫지 못하면 그것은 겁이 나는게 아주 당연한 말을

 

하나 마나 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성경말씀의 특징이 하나 마나 하는 소리를 하는 당연한 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 당위가 바로 거룩인데

그 당위가 사이의 간격을 빈공백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리새인 입장에서 볼 때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이라고 했을때는 아주 쉽게 듣겼는데

마귀 보다 낫지 못하면 이라고 하면

마귀를 무슨 수로 이기냐 라고 바리새인은 졸지에 어렵게 되는 겁니다.

 

즉 바리새인이 마귀다 라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인간 곧 인간의 대표 바리새인과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도 마귀를 본 적이 없는 가운데 바리새인 그것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다들 바리새인 따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입장에서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이라고 운을 띄워버리면

안 걸려들 인간이 없고 말려들지 않을 인간이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판대기 구조입니다.

주님은 지금 판대기를 건드리는 것이지

인간 개인 구원이나 개인을 미워하는 심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한꺼번에 판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결국 우리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마귀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 유명한 성화론의 대가도 바리새인 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조건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불안하거든요

그 불안이 졸지에 믿음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 그러는 사기가 없습니다.

 

모두가 불안을 신앙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숙제는 바로 그 불안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손으로 조작된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다 마귀입니다.

 

거봐 거봐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잖아 바리새인 보다 나으라고?

우리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속에 마귀가 심은

자아 라는 마귀 보고 하는 소리인 겁니다.

 

바리새인 들으랍시고 하는 소리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상대안하시고 마귀만을 상대하시니까

말려드는 것은 마귀일 뿐입니다.

 

세간은 주인을 결박한 후의 노략물인 전리품일 뿐이지

주인을 소외 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리품만이 소외될 뿐입니다.

 

그저 결과물일 뿐이거든요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예수님은 마귀를 상대하는 입장에서 우리(세간)는 처음부터 소외된 입장입니다.

 

그러니 말씀에 끼여들수가 없는 거죠. 말씀 지켜도 아무리 끼여들어도

철저한 배제일 뿐입니다.

 

상대 안 합니다.

 

그럼 끝을 미리 앞당겨 보면

우리는 세간으로써 이미 전리품으로써 예수님의 소유물이 되는 겁니다.

 

그럼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이라고 할 때

우리가 마귀라는 주인 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귀 보고 마귀 보다 낫지 못하면 이렇게 되니까

 

마귀가 그 말을 듣고 어려워서

 

그 말씀을 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도록 작용이 되는 겁니다.

 

바래시인 곧 마귀들이 예수님을 마귀로 몰아서 이겨버렸듯이

말려 든 거죠

 

예수님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라고 하심이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은 나를 죽일수 밖에 없어 라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질투의 사랑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예수님은 제대로 마귀의 성질을 건드린 겁니다.

 

같은 원리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어린아이에게는 쉽지만

 

어른에게는 무지 어려워서

오죽하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라고 되묻습니다.

그럼 그게 말이 될까요? 물론 말이 안되지만

 

오죽하면 어려워서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들어갔다 나오면 어린아이가 됩니까?

라고 묻는 거죠.

 

얼마나 다급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실은 우리를 대표해서 니고데모가 우리의 엉터리 신앙을 대변해 준 겁니다.

 

그 정도로 단절된 영을 육이 자꾸 접근 시도 개방시도 가능성으로 탈바꿈 할려는

그런 엉터리 신앙을 들통나는 식으로 맞물려서 드러내시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어린아이니까 쉬우니까 그냥 넘어가버리지만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설사 어린아이보고 너희가 어른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어린아이에게 말씀하신다 해도 어린아이는 내일 되면 다 까먹기에 의식하지 않습니다.

 

어른들만 의식을 하기 때문에 말려들라고 그래서 불안을 믿음이라고 포장된

그 엉터리를 들통나서 미끄러지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른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툭 하고 걸려 버리는 겁니다.

육은 백날 해도 천국에 못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썩으니까 말입니다.

썩는 것을 왜 집어넣을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러나 영은 날로 새로운 겁니다.

그러니 당연한 겁니다.

결국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에게는 툭 하고 걸려 넘어져 실족 당할 판국입니다.

도통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의 입장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문제처럼 되어서 툭 하고 걸려서 당황하게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못하면 우짜지?

 

이걸 또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요 참 나 ㅋㅋㅋㅋ

 

쉽게 말해서 마귀는 천국 못 간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쉬워요 아주 아주 당연한 겁니다.

어린아이도 다 알아 먹습니다.

그런데 어른은 왜 못 알아먹나?

 

거듭나야 한다는 소리가

육은 천국 못간다입니다.

얼마나 쉬워요

영만이 천국 간다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단절이기 때문에

육으로 시도했던 그 버릇이

제대로 걸려넘어진 겁니다.

 

썩는 것을 천국에 왜 집어 넣냐 말이죠

아주 쉬운 당연한 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유대인에게 보편화 된 입장에서

썩은 것들을 잔뜩 모아서 가능하다 가능하다 개방이다 개방이다 라는

그 속임수에 넘어갔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넌 이스라엘 선생인데 왜 모르냐 라는 거죠

즉 니고데모가 불가능성을 알려준게 아니라

모조리 다 가능성으로 알려줬기에

반드시 니고데모라는 이스라엘 선생은 엉터리를 알려줬고

그 내막이 이렇게 이 말씀 하나로 왕창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진 거죠

 

바울 보세요 모조리 다 배설물이였다고 취급합니다.

그러면 배설물로 취급해 버리면 얼마나 쉽냐 말이죠

 

육은 썩은 배설물

영은 새로움

 

육은 천국 못가고

영만 천국간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천국에 못간다.

 

이것이 육만을 실천에 옮기던 버릇 때문에

영 조차도 뭔가 행하고 실천하면 되는 줄 알아서

하다 하다 못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면 되느냐고

본인도 말도 안되는 소리인줄 알면서도

너무 너무 어렵기에 오죽하면 답답아서 그렇게 라도 하면 되냐고 묻는 겁니다.

 

그 정도로 보통 단절이 아니다는 실상 곧 믿음이다는 겁니다.

 

믿음은 불가능인데 모조리 다 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진짜 믿음 앞에서는 툭 하고 걸려 넘어져서 그 거리끼는 불편함에

맥을 못 추는 단절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하시는 주님이 고맙고 만나서 감사한 거죠

맨날 조건 갖추면 된다고 본 시선이 다 날라갈 판국이니

뭔가 잘못 되었다는 인식을 할수 있도록 하신 배려와 섬김이니까 말이죠

 

그럼 어쩌란 말이냐?

마귀를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을 만나는게 아니라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차이성을 알게 되는데

그 마귀가 우리가 믿고 믿었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는 예수님을 마귀로 몰아버렸고 말이죠

왜 그 하나님을 깨뜨릴려고 예수님이 활동하시고 모든 말씀을

그것도 하나 마나 한 당연한 당위의 말씀을 하시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당위 곧 기능으로써 말씀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무슨 수로 마귀를 거치냐 말이죠

우리는 마귀 때문에 존재 밖에 못보고

기능을 볼 수 없는 입장인데 말이죠

 

그러니 주님 숙제 밖에 없는 겁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그 기능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없는 기능 무능한 자 밖에 안 됨을 고백할 뿐입니다.

 

바리새인 보다 더 낫다 보다 더 어려운 어린아이 같이 되라

무슨 수로 될래요?

또 거듭나라? 불가능한 어린아이 되기 보다 더 어려운 다시 태어나라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라?

갈수록 태산입니다. 더 더 더 더 불가능 단절 뿐입니다.

 

무순수로 하실래요?

 

간단합니다. 나에게는 기능이 없습니다. 무능합니다 라고 하시면 됩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성전은 곧 심판대입니다.

곧 하나님의 목전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집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그 심판대 앞에서 주여 나는 뭐 했고 뭐했고

십의 이조를 이레에 했고 두 번 금식 했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심판대 앞에서 감히 할 소리 입니까?

7번 남을 용서했고

7명 이웃사랑실천을 했고

490번 가난한자에게 전재산을 바쳤고

 

이게 감히 심판대에서 할 소리이냐 말이죠

심판대를 모독 하는 겁니다.

 

심판대는 조건을 내세우는 곳이 아니라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주여 기능을 요청하는 곳입니다.

바로 자신이 무능한 존재 이기 때문입니다.

존재 보다 앞선 기능을 요청해야 할 판국에

 

뭐 조건 갖춘 존재가 되었다고?????

 

어린아이와 같이 된 존재 조건 갖추라는 말입니까?

새사람은 무슨수로 될래요?

 

어린아이에게는 무지 무지 너무 너무 쉽습니다

새사람이란 저 새사람 아닙니다 주님만이 새사람일 뿐입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조건으로 보는 인간은 새사람이라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새사람 곧 거룩한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천국갈자와 지옥갈자가 나뉘어지는데

그런 사람이 될려구요?

당신 때문에 지옥 갈사람이 졸지에 생기는데

과연 감당할수 있겠어요?

 

그것도 못하면서 왜 새사람 될려고 합니까?

 

새사람이란 그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예수님 만으로 충분합니다.

 

새사람이다 라고 자신을 주장하는 놈 나타나면 그 사람 마귀로 보시면 됩니다.

 

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된 사람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 나타나면 그 사람 마귀로 보면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된 사람은 주여 난 도저히 어린아이 같이 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기능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같이 될려고

순수함을 연습하고

ㅋㅋㅋㅋ

심지어 무능함도 연습하고

 

도대체 성령은 뭣하러 있남?

자기들이 다 하고

만약 배터리 떨어지면 그때 충전할 때 성령이 필요하다?

한계에 부딧혔을 때?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이 이스라엘 선생으로써 가르쳐 다 잠식이 되다 보니

 

이건 미신이지 믿음이 아닌데

자꾸 믿음이라고 하니 그 옹고집이 그만 믿음이라고 인간들끼리 약속이 되어버린 겁니다.

 

끝을 미리 앞당겨서 보는 시선이 없습니다.

종말 시선 곧 성령의 시선 말입니다.

 

마땅히 멸망받아야 할 자임을 모르기에

자신이 마귀이다는 것을 모르게에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암선고 받아 1개월 뒤에 죽는다고 했는데

돌파리라고 취급해 모든 유명 병원 유명 의사에게 다시 받아도

역시나 암선고요 1개월 뿐일 때

막상 1개월 지나도 안죽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죽었다 라고 선언 되고 난 뒤에

끝을 미리 앞당겨서 삶을 살게 되면

이것은 시간위로 걷는 느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묵시 위를 걷는 느낌처럼

모조리 다 공짜요 은혜요 안기쁘고는 못배기는

덤으로 사는 겁니다.

 

존재 넘어의 기능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종말 속을 걷는 삶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종말일까요?

자 그러면 무화과 나무 저주 다시 돌아가 보면

끝에서 소급해서 댕겨서 보게 되면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저렇게 당연한 저주로 당연히 말라야 되는데

이렇게 살아서 저것을 보여주시니

이것이 주님의 믿음이군요

즉 종말잔치이군요

 

잔치집이 아닌 초상집에 가라는 지혜를 보여주심이군요

? 사람의 끝은 다 이러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나무에 열매 없어도

또 시편 136편 해를 주신이 감사하라

? 그 해가 어떤 기능

애굽을 멸망시킨 기능

그런 해가 나에게도 비추었다

어떤 가능? 없는 나를 해체 시켜 주니

 

없는데 구지 없는 것을 다시 해체 시켜주시니

하나 마나 한 당연한 소리인데

그 당연한 당위의 말씀을 다시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본래의 주님의 주 되심(기능) 살아계심만이 보여주니

안 기쁘고는 못배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아 말라 비틀어 져도 해는 여전히 뜨고 달도 여전히 뜨고

 

이스라엘이 쫄딱 망해도 해는 여전히 뜨고 달도 여전히 뜨고

 

분명 나는 사라졌는데 해는 여전히 뜨고 달도 여전히 뜨고

 

그 애굽을 멸망시킨 해요 달이요 바다 요 별이면

 

주님만 살아 계심만 남기겠다는 끝을 미리 앞당겨 보여 주심의 취지이기에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앗싸디용 ~~~~

 

해체로써 종말로써 비로소 보여주는 실상 곧 믿음이다는 겁니다.

 

천년 만년 살아 본들 믿음 한번 못 만나보고 죽는데

세상에나 강도짖해서 사형받아 마땅히 죽는 그 순간에 만날줄이야

원인 없는 결과로써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주세요 라고

기능을 제대로 본 겁니다.

존재를 싹 다 잊어버린 거죠.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은게 말이죠

우리가 단 한번이라고 무화과가 걱정 되어서 덜컥 겁먹는게 아니라

사실은 자기 믿음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무화과저주를 보고 놀라는 겁니다.

 

그런데 무화과가 대신 죽음으로써

정작 무화과 이전에 내가 당장 말라죽어야 하는데

 

우리는 종말의 예수님의 기능을 비로소 보게 된 겁니다.

 

마귀만을 상대하심을

그리고 마귀를 이겨서 전리품으로써 우리를 건지신다는 것을

 

그러니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초상집이 되어야 지혜를 만나는 겁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이라는 바리케이트를 쳐서

내가 바리새인을 넘는게 아니라 (조건이 아니라 그런 존재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겠다는 거죠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이다는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라는 겁니다.

 

베드로는 괜히 바리새인을 넘어서는 바람에

사탄아 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주님이 대신 닭의 울음을 미리 먼저 보여주셔서

주님 쪽에서 바리케이트를 넘어오심을 보고서는

베드로는 싹 다 삭제되고 전리품으로써 새주인을 맞는

어린아이 곧 영이 된 겁니다.

 

육을 주장하는 썩을 것을 거쳐서 보니

사탄 맞거든요

 

그러니 괜히 마귀 이겨 보겠다고 바리새인 보다 더 낫고자 할 필요가 없이

주여 제가 마귀입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저를 고쳐주소서 라고 하면

주님 쪽에서 알아서 넘어와서

고치시는 겁니다.

 

결국 모든 말씀은 마귀를 겨냥한 말씀이기에

단 하나도 지킬 것이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만을 드러내는 말씀이지

 

내가 말씀을 잡아버리면

자꾸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육의 자랑으로 빠져버리기에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경쟁자 삼는 거죠.

 

그러나 종말을 곧 끝을 미리 앞당겨 땡겨오면

정작 내가 무화과나무 저주받아 마땅한 꼴인 것을 보여주시는 섬김이 귀하게 보이는 겁니다.

 

뱀이 두더지인가? 오소리인가? 너구리인가? 하여튼 잡아 먹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뱀이 몸이 터지면서 잡혀먹힌 그 어미의 새끼들이

뱀의 갈라진 몸에서 튀어나오는 거지요. 뱀이 아닌 구렁이 였던가? 하여튼.

 

그럼 뱀이 잡아먹은겁니까? 잡혀먹힌 겁니까?

 

성도는 그저 미끼일 뿐 세간일뿐

전쟁은 예수님 손에 달린 것 뿐입니다.

그러니 마귀만 상대하시는 거죠.

 

우리보고 지키라는 소리가 아니라

마귀가 걸려들기를 올무를 놓는 것이 성경전체의 말씀입니다.

 

아주 쉬운 하나 마나 한 소리는 왜 하시는가?

마귀 들으라고

마귀 보란 듯이 ~~~~~

 

얼마나 쉬워요???

 

마귀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당연하죠 마귀가 천국에 갈 리가 없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가

바리새인들이 들었을 때 그렇게도 기분이 좋더니만

마귀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고 하니

 

부자청년처럼 예수님께 등돌리고 근심하면서 돌아서게 되는

너무 너무 어려운 짐을 뒤짚워 씌우는 겁니다.

 

조건 갖출려고 하니 도저히 못갖추겠다는 겁니다.

 

마귀를 이기지 못하면 바리새인들은 그야 말로 천국 못가는 겁니다.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바리새인 들으라고 한 소리이지

우리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닙니다.

 

아예!! 바리새인을 넘어설 생각 조차 마시길

 

주님이 바리새인을 넘어서 오시겠다는 [당위=기능=사랑=끝까지 섬기심]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대화를 나누니 10시가 되어버렸다. ㅋㅋㅋ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우짜지????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넘어서 오시면 끝 ~~~~~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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