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살리심에 감당치 못함 (눅 15:11-32)

 

 

(15:11, 개역)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5:12, 개역)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5:13, 개역)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5:14, 개역)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15, 개역)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5:16, 개역)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17, 개역)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5:18, 개역)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5:19, 개역)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15:25, 개역)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15:26, 개역)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15:27, 개역)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15:31, 개역)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15:32, 개역)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열매로 알리라 라는 말씀으로 자신들의 열매를 자랑하는 성화론자들은

그 열매를 자신들의 의로운 삶과 성공한 모습

자기 스스로가 아닌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 부터의 존경 등등으로

 

소위 열매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열매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듯이

 

그 나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가 그런 입장이면

열매 또한 죽었다가 살아나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간다.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간다

 

다 같은 말로써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불에 태워버린다라는 의미로

 

사실은 불가능한 내용입니다.


이 불가능성을 그냥 그대로 불가능으로 보면 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가능성으로 바꾸고자 하는 데 있어서 거짓선지자의 역할을 그들은 감당할수 밖에 없는 겁니다.

단절을 희망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이거든요.
 

그렇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될수 없는 무능한 자임을 고백하면 되고

무슨 수로 바리새인보다 나을수 있습니까 라는 단절성으로써

절대 무능함을 고백하면 됩니다.

단절 그대로 수용하시면 됩니다. 내 숙제는 없거든요.
주님 숙제 뿐이다고 뻔뻔스럽게 떠넘기는 겁니다.

 

즉 죽은자요 잃어버린 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 존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기능에

뻔뻔스럽게 기대어 빌이붙는 겁니다.

 

?

죽었다가 살아난 분은 예수님 뿐이며

그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는 분 또한 예수님 뿐이며

그 불가능한 말씀을 이루신 분도 예수님 뿐임을

 

그 분 앞에서 무능함을 항복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그런 예수님께 항복하겠습니까?

 

그러니 불가능의 연속이요 반복인 겁니다.

 

그래서 그 불가능함이라는 기능을 발휘하시는(당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뭔고 하니

 

탕자만들기 죄인만들기 죽은자 만들기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존재들이 배치 되어야 그들의 기능이 차이가 나는 거죠

 

바로 맏아들입니다.

 

즉 탕자만 만들기를 하시는게 아니라

맏아들 또한 만들기를 하시는 겁니다.

 

어머니께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머니 참선지자만 영을 받은게 아니라

반드시 거짓선지자도 영을 받아야 합니다.

 

왜 라고 힐문할수 는 없는 입장이기에

이유 없는 결과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이유를 도저히 알수 없습니다.

 

거짓선지자가 악한 짖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악한 영을 집어 넣었기 때문에

아무리 착해도 반드시 거짓선지자 노릇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 차이로 참선지자는 참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을 집어 넣었기 때문에

아무리 악해도 반드시 참선지자 노릇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뒤짚어 씌움 당하는 덮어쓰임 당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원인 없습니다. 예수님 마음대로입니다.

그 원리 백날 찾아도 소용없습니다.

뒤 바꿔 버립니다.

 

기능은 절대로 존재에게 종속 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존재가 기능에 의해 쫄딱 미끄러짐을 당하는 겁니다.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것이 기능을 아주 제대로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즉 거룩이지요

 

거룩이라는 숭고함 곧 기능은

 

내 혼자만 말씀 지켜서 나오는게 아니라

반드시 상대적인 원수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네 원수 너 이 너 ~~~~~~ 원수

 

너가 있고 원수도 있고

 

그 둘 사이에서 거룩이 그 간격에서 피어나오는데 바로 성령이다는 겁니다.

그 성령이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고 하니

 

한 쪽은 원수가 목마르면 마실 것 주고 배고파 굶주리고 있으면 먹을 것을 준다는 겁니다.

 

또 다른 한쪽은 그 머리에 숯불을 얻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 화끈 거리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양쪽 상황을 다 명료하게 보이는 것이 거룩이지

자기 혼자 말씀을 독단적으로 지켜서 신앙생활 잘해서 나오는 것은 전혀 거룩이 아닌 겁니다.

 

자 그렇다면 탕자는 어떤 위치에 있는 겁니까?

 

바로 그겁니다. 원수의 자리입니다.

 

탕자가 구원받았다고 하니 의인으로 보시는데

정작 성경을 보면 전혀 의인 근처도 못가는

어린아이 근처도 못가는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근처도 못가는

그야말로 원수입니다.

 

웬 수 ~~~~~~~~~

 

자 이렇게 되니 설교하기가 복음을 증거가하기가 곤란해지니까

 

꼼수를 부려서 숭고함을 제거할려고 하는 겁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즉 거짓선지자들이 괜히 그런 짖을 하는게 아니라

악령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짖을 해야만 합니다.

본문의 맏아들과 얼마나 똑같은지 착한 짖을 했다고 우깁니다.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기능과 안 맞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짓선지자가 아무리 제대로 말씀을 지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 이미 악령을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선에서 떠난 문제인데

자꾸 인간 쪽에서의 원인을 찾을려고 하니

맏아들처럼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놀랍게도 탕자가 될까요?

 

탕자가 되어버리면 오히려 더 꼬투리 잡힐까봐 더더욱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리끼는 걸림돌이 툭 하고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못넘어서는 바리케이트가 쳐저 있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맏아들 또한 탕자 쪽으로 넘어갈수 없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기능

어떤 기능 바로 위에서 탕자는 맏아들로 넘어갈수 없고

맏아들은 탕자 쪽으로 넘어갈수 없는

그 기능에 의해서

툭 하고 걸려 넘어지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탕자도 마찬가지고

맏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이 아벨 쪽으로 못 넘어갑니다.

자기 같은 놈이 아벨처럼 죽임을 당하듯이 죽여버릴텐데

과연 넘어갈수 있을까요?

 

아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인 쪽으로 넘어갈수가 없습니다.

살인을 할 수가 없거든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선취하기 위해서 눈을 뗄수 가 없는 운명입니다.

 

이것을 미래완료가 이미 덮쳤다는 겁니다.

 

이 덮친상황이 바로 거룩이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 양쪽 상태를 다 주님쪽에서 마련하시고

어떤 양 쪽 상태

 

가인은 아벨을 죽여야만 하고

아벨은 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해야만 하고

 

이 두 상태에서

그 양쪽의 사이의 간격에서 즉 차이죠 그 차이 속에서

거룩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한 쪽만의 아벨의 죽음만이 거룩이 아닙니다.

 

그러면 간극이라는 그 사이의 공백이 없잖아요

두 쪽이 있어야 그 사이 간극과 차이라는 것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화론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억지로 자기 보다 못한 자를 끌여들여서 그 간극과 차이를 보여줄려고 합니다만

 

그것은 전혀 숭고 곧 불쾌하고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거룩이 아니다는 겁니다.

 

거룩은 양쪽다 세우는 겁니다.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 되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 되었다는

이 양쪽을 다 세우는 것이

바로 걸림돌 거리끼는 지혜요 거치는 반석이다는 겁니다.

 

그 사이에서 거룩이 나오니까

건방지게 사랑받기로 작정되었다고 야곱이 거룩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도리어 거룩을 반납해야 할 판국인

자기부인만이 덮치는 겁니다.

 

감당이 불감당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주님께서 한 쪽은 지독한 미움을 뒤짚어 씌우고

다른 한 쪽은 지독한 편애를 뒤짚어 씌움으로써

나타난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 원인 없는 결과로 인해서

반드시 표출시킬 수밖에 없는 기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이 감히 그 성전이 심판의 장소인줄 모르고

종말을 나타내는 장소인줄 모르고

 

오히려 지독한 미움 받은 놈은 자신이 사랑받았다고 우기고 있고

반대로 지독한 편애를 받은자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는 주님의 원수일 뿐입니다 라고 하는

 

정반대의 양상이 벌어짐으로서

그 차이 곧 간격 속에서 거룩 곧 예수님의 기능, 일하심이 나타나는 겁니다.

 

문제는 아무리 나타나도 현대의 목사들이 이 부분을 해석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엉터리인가 라는 점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일로 바꿔버리는 짖을 함으로써

아주 매를 벌고 있다는 겁니다. 매를 벌어요 매를

 

분명 지독한 편애를 오히려 주님의 원수임을 고백하고

지독한 미움은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았는가를 외치고 있으니

 

무엇이 사람의 일에 속하겠습니까?

자신이 축복받았고 사랑받았다 라는 것을 선언하는 쪽을

복음인냥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불쾌한 숭고를 다 제거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 보다 더 잘믿는 기가막힌 인간의 믿음입니다.

 

고도의 트릭으로 다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저마다 인간을 구원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낫어요 안달

 

그러니 교회장사는 망할 리가 없는 거죠

 

 

죽은자를 찾습니다 라는 정신병자도 결국 교회장사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악령이 씌이는 것을 봐 버렸거든요

 

맞아요 저 보다 수준 높고 똑똑하고 뭐 하나 우월하지 않은 것이 없는 우위에 있는데

이미 봐 버렸거든요

 

놀랍게도 그 사람에게 다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아 주님이 하시는 일이 무섭구나

아무도 모르는 구나

 

뭐 봤다고 제가 그럼 옳으냐?

저야 저 사람보다 백배나 나쁜놈이기에

벌써 망해도 싼 거죠

 

아니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에게 넘어가는 판국에

나야 백번 만번 지옥에 벌써 떨어지고도 남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 어떤 누구에게도 덕이 된 적도 없는 비윤리적인 놈이 저인데

아니 윤리적인 자도 저런 판국에

감히 말이죠.

 

탕자를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생각한 탕자로 볼게 아니라

탕자를 어떻게 새롭게 주님이 만드시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탕자가 탕자 스스로 탕자가 될 수 있었겠냐 말이죠

 

이것이 신비입니다. 즉 원인이 없이 그냥 결과가 뒤짚어 씌움당한 겁니다.

아무리 봐도 탕자가 탕자 스스로 탕자가 안된다는 점입니다.

 

똑같이 맏아들 또한 신비입니다. 맏아들이 맏아들 스스로 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이 없이 살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탕자든 맏아들이든 존재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철저한 기능입니다.

 

거짓선지자 참선지자에 대해서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 접근해서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 놀라는 겁니다.

겁이 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꾸 거짓선지자는 나쁜놈으로 보고 있는데

전혀 아니올시다.

 

참선지자는 좋은 놈으로 보고 있는데 아니거든요

 

오히려 양상은 거꾸로인 겁니다.

 

자 그렇게 말하니 또 참선지자가 쉽겠네? 좋은 놈 되는 것 보다 나쁜놈 되는게 훨씬 쉬우니까 말이죠

 

그런데 어머니께서 참선지자를 보니 보통 짖밟혀도 이렇게 짖밣힐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를 괴롭히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아예 지근 지근 밟혀서 벌레 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니까

어머니께서 제대로 본 겁니다.

 

그러니 참선지자도 사실상 다들 되기 싫은 겁니다.

 

그러니 원인이라는 조건을 맞출수가 아예 단절이 된 불가능성의 반복인 겁니다.

거짓선지자도 마찬가지고

참선지자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존재 보다 앞선 기능이 그들에게 덮쳐졌기에

악하든 선하든 아무 상관 없이

그 기능만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탕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탕자를 타락시키고자

격동시켜서 재산달라고 때를 쓰도록 하게 하고

자신의 분량을 미리 앞당겨서 재산을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심을 제발 좀 합시다.

진정으로 아버지 맞다면

재산을 주면 됩니까 안 됩니까?

두 아들의 속성을 누구 보다 더 잘 아는 아버지 이지 않습니까?

 

허랑방탕하게 쓸 것 뻔하다는 것을 알면 아버지는 주면 되겠나요?

 

이것을 성경을 보고 실천하는 자칭 그리스도인 본 적이 있나요?

없잖아요

 

그래 놓고 왜 사기를 치는지 원 ㅋㅋㅋ

 

자 그러면 맏아들을 봅시다.

이 놈은 그 어떤 아버지라도 재산을 줘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자 그러면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하나 마나한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차이 곧 거룩이 나올 리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 속에 엉터리 거룩이 미리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 마나한 소리를 하시는게 아니라

우리 속의 엉터리 거룩을 비틀어서 시비걸 듯이 이야기 하시는 비유입니다.

 

즉 탕자를 누가 타락 시켰느냐 하는 점입니다.

 

누가 탕자를 원수로 죄인으로 만들고 있느냐 말입니다.

 

아버지 책임 아닙니까?

 

그러면 아버지가 책임을 져야하는데

우리가 아버지에게 책임을 한번 지워봅시다.

 

그런데 책임을 분명히 지웠는데

결과는 그 반대가 되는 겁니다.

 

그 결과를 통해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아버지가 보통 아버지와 다른 차이성이 발견이 되는 겁니다.

 

일반적인 아버지가 아닌 거죠

 

아버지는 자신의 사랑을 피력시키고자

한 쪽 아들은 타락시켰고

다른 한 쪽 아들은 절대로 타락시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놓고 탕자를 타락시켰는데

누가 자신을 배신때렸다고 반발합니까?

 

바로 맏아들입니다.

 

이 맏아들의 역할로써 아버지의 차이성 곧 숭고한 거룩이 기능으로써 발휘됩니다.

 

마치 맏아들 들으랍시고 살진 고기 금가락지 고급턱시도를 입혀버리니

눈 앞에서 펼쳐지는 모습에 그 어떤 누구인들 돌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탕자를 미워하다가

때린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버리는 겁니다.

 

분명 시어머니가 실질적인 가해자인데

전혀 무관하던 시누이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미운 시어머니를 싹 잊어버릴정도로

극도의 미움이 시누이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더 미워죽는 겁니다.

 

왜일까요? 저도 어느정도 나이를 먹다 보니

시누이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적에는 본적이 없어서

시누이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길래 저럴까 했는데 말입니다.

 

시누이 역할이 무조건 원인도 없이 이유없이 편을 들고 있다는 겁니다.

 

분명 시어머니는 이유가 있고 원인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아무것도 본적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몇 년 만에 처음 나타나서 마치 그 동안의 일들을 다 본 것 같이

일방적인 편파적인 판결을 그 어떤 원인을 따지지도 않은채

껌을 짝짝 씹어가면서 한 마디만을 던졌을 뿐인데

그 말 한마디에

놀랍게도 참고 참고 참았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뜨릴 정도로

아주 아주 필연적인 시어머니 보다 우연 우발적인 시누이가

비로소 나의 살인의지를 제대로 폭발시켜 버린다는 겁니다.

 

바로 탕자의 아버지가 놀랍게도 이 시누이 역할의 기능을 제대로 깨작 깨작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탕자는 나쁜놈이다는 원인을 다 말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탕자를 감싸돌고 있는 탕자의 아버지는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간따나 미운 놈인데 더 감싸 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이고 나발이고 뭐고 그냥 폭발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기능입니다.

 

 

놀랍게도 어떤 철학자는 이 아버지의 기능을 이런 의미로 표현합니다.

 

오이디푸스를 20년 전에 벗어났고

아버지도 죽고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모든 인간은 다시 20년 전의 아버지 기능

곧 오이디푸스에 다시 갇혀버린다고 합니다.

 

이유 없이

원인 없이 말이죠.

 

아무리 사회 조직에서 숙련 단련하고

어른들 상관들 그 부조리를 모조리 다 격고

인정하고 수긍하고

오이디푸스를 잘 넘겨서

그 속에서 익숙하게 자신을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순간에 우연히 아주 우발적인 단 하나의 사건

마치 시누이의 단 한 마디의 말 하나로

와르르 미끄러져서

 

20년 전의 3040년 전의 그 아버지의 부조리 속에

오이디푸스 속에 다시 들어가는 상황을 격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죽어도 소용이 없어요

아버지의 부재가 어느 어디든 무소부재로 유비쿼터로 와이파이로

팡팡 광대역으로 터지니까 말입니다.

 

한 발짝도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자 이렇다면 누가 탕자를 타락 시킨 겁니까?

 

아버지입니다.

 

탕자는 이 오이디푸스를 그럼 벗어날까요?

택도 없습니다.

 

그러면 맏아들은 이 오이디 푸스를 벗아날수가 있을까요?

이건 더 심해요 택도 어림반품어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순종했다고 우기니 더 심한 상태인 겁니다.

 

그럼 아버지 손에 달려있는 겁니다.

아버지 마음대로입니다. 아버지의 처분에 달린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종말때에 종말의 시선에서만 볼수 있는 사랑입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심판에 달렸다는 것을 보는 시선말입니다.

무조건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을 무조건 이유 없이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겁니다.

다시 살리는 것은 주님 손에 달린 겁니다.

다시 살리는 것을 선물이라고 하는데 마귀 보는 앞에서 선물(반칙)이 벌어지는 겁니다.

 

탕자는 그것을 비로소 알고

못벗어남에 대해서 아들이 아닌 노예로 삼아달라고 합니다.

심판을 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맏아들은 졸지에 더 심하게 걸려들고 말려들어서

꾹꾹 참고 견뎠던 것을 터트리면서 이제야 독자선언을 하는 겁니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겁니다.

 

나 아버지와 인연 끊을래요 라고 말이지요

 

이것이 아버지의 기능이

즉 사랑이 이 둘의 속성을 들추어내는 기능인 겁니다.

 

애초부터 탕자는 아무리 타락해도 아버지의 자식이였고

애초부터 맏아들은 아무리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어도

단 한번도 타락한 적이 없어도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는 마귀자식이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것을 축약한 겁니다.

 

사울왕과 다윗을 대조해도 그렇고

가인과 아벨도 그렇고

애굽왕 바로왕과 모세의 대조도 그렇고

 

그 어느 하나

탕자의 비유가 아닌 성경이 없을 정도로

전체 성경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결국 이 기능입니다.

 

아버지 자신의 사랑을 피력코자 그 기능을 발휘코자

다윗을 타락시키는 겁니다.

 

타락 시켜야 맏아들로 돌변하는 사울왕 같은 자들이

사울이 죽었다고 취소되고 끝나는게 아니라

 

다윗 빼고 모든 이스라엘이 이 사울왕처럼 돌변하는

맏아들의 기능을 맡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며느리 다말과 시아버지 유다의 이야기도 결국 탕자의 비유와 같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는 기능인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기능이 지금 현시대 현재에

 

이미 성경이 완료되었고

성령의 시대가 되어서 모조리 다 개방이다 라고 외치는 마당에

저런 과거의 이야기가 구닥다리처럼 취급받는 상황에

과연 유효하냐 말입니다.

 

유효 무효 정도가 아닐정도로 맹렬하게 더 초과잉적으로 퍼부어지고 있는 것이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이것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이미 끝을 앞당겨서 그 완료를 명료함을 또렷함을 앞당겨서 펼쳐지고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이 안 벌어진다?

 

나를 타락 시키는 아버지의 사랑의 기능이 전혀 안 보인다.

 

그것은 주변의 환경이 이미 잠식이 된 상황인 겁니다.

 

아버지는 이런 사태를 벌려서라서도 자신의 사랑으로 빼내시겠다는 열심으로 일관하십니다.

 

이런 불편한 불쾌한 거룩 숭고 복음이 아닌 곳은

 

이미 편안함 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불현 듯 우발적인 맏아들 뒤짚어 씌우기로 인해

영원히 갈라서게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내 얼굴을 화끈 화끈 거리게 하는 일들을 벌리신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당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이 우리를 제발 타락시켜

타락이 목적이 아닌

막살기가 목적이 아닌

그 뒤에 나타나는 거룩의 기능

숭고의 기능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

맏아들을 타 넘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무조건 용서하시겠다고

살진소 금가락지 좋은 옷이라는

 

3가지 간격으로 인해 긍휼이 지독한 편애와 지독한 미움을 가른다는 사실을

 

이것이 놀라운 지혜였음을

나 보다 항상 옳았다는 것에서 감사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을 고백케 하시는 겁니다.

 

나는 뭘 해도 죄 뿐이고

예수님은 뭘해도 다 사랑 뿐이였음을

 

나를 타락시킨 예수님이 옳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죄 목은

 

바로 나를 타락시켰다는 것이

 

마귀들이 예수님께 뒤짚어 씌운 죄목이였기에 ~~~~~~~~

 

 

죽은자를 타락한 자를 용서했다 다시 살렸다는 감당치 못할 죄목이였던 겁니다.






--


편파 승

 

어제 오전 10:05 · 수정됨 · 

 

- 되기

 

들뢰즈의 되기 개념이 오히려 들뢰즈를 넘어서고자 하는 지젝의 강박증에서는 더 깊게 나타난다.

기도할 필요 없이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들뢰즈 보다 지젝은 오히려 더 깊게 - 되기를 표현한다.


즉 되기 할 필요 조차도 없이 그냥 존재 그 자체로써 말이다
.


단 여기서 존재는 희생하는 존재이다
.(기능은 존재 속에서만 표출하기에)


즉 희생은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


지젝은 부정의 존재 로써 표현하는 셈이다
. (부정의 존재 - 기능(비존재))


부처는 부처쟁이가 되어야 하는
-되기 이지만
예수는 예수 쟁이가 될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 자기 스스로 버리는 희생 때문이다.


폴란드인이 백날 유대인으로 부터 돈 버는 방법을 알려고 해도

돈을 못 버는 이유는 유대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가만히 있어도 돈을 갖다 바치는 (폴란드인)자들에 의해서

돈 벌기 싫어도 돈을 벌 수 밖에 없다.


유대인 자체가 금 이기 때문이다
.


방금 어머니께서 이 설명을 들으시고 전혀 다른 질문을 하신다
.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순종과 제사를
= 동일성으로 보는 것이 종교인이다. 부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사 아니요 순종이 옳았습니다 라고

제사가 반드시 등장해 줘야 순종이 뒤에 나타난다
.


제사는 이 순종을 미워 죽이고파 환장하기 때문이다
.


맏아들은 평생을 제사를 지키는데 미쳐 있지만

단 한번도 순종 할 수 없다.


반면에 탕자는 단 한번도 제사를 지킬수 없지만

평생을 순종하며 산다.


이것이 부처와 예수님의 차이 이다
.

하나는 제사로 태어났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순종으로 태어났기에


그럴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 예정을 뛰어넘는 예정이다.


예정을 지키는 놈이 부처요


예정을 뛰어넘는 분이 예수님이기에
~~~~~

 

 

최일규 역으로 탕자가 순종을 하고자 한다면 그 순종은 제사겠죠

 

김대식 아닙니다.

탕자는 뭘 해도 다 죄요

뭘 해도 순종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입니다.

사랑은 이유 없는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식 반대로 맏아들은 뭘 해도 제사 입니다.

뭘 해도 의가 되는 겁니다.

그것 또한 원인 없는 결과인 거죠.

아버지를 거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어긴 적이 없이 말이죠.

 

최일규 그래서 맏아들은 탕자를 죽일 수 밖에 없어요

 

김대식 그렇죠 탕자가 순종하냐 가 중요한게 아니라
맏아들이 순종할 수 없고 제사만 지킨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그 사이 간격에서 자신의 운명을 이들의 배치 속에서 표현한다는 자체가

종교를 넘어서는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모든 사고방식의 단절인 거죠

탕자 흉내낸다고 될 일이 아닌 거죠

나쁜남자 되라고 유도하니까 멍청하게 나쁜남자 따라하기 하다가
도로 시킨다고 하냐 라고 물먹게 되니

말려든 거죠 , 누구는 자수하고 광명찾고

때린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 짐으로써

미움이 비로소 형성이 되니

이 간격이 비로소 기능을 하는 거죠

 

 

김대식 24시간 마귀만 생각한다는 푸코 보다 더 깊게 들어가는 지젝은

예수님 자체가 마귀로만 인식할 수 밖에 없도록 자꾸 부추긴다는 거죠

그런데 도로 마귀로 인간들이 말려드는 셈인 거죠

 

최일규 그래서 모두 착각하는 겁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하니 순종만 하니 그게 순종도 제사도 아닌 게 되어버리죠
결국 야곱과 에서, 이삭 가족 전체가 착각했다는

지젝은 잘 모르니 뭐라 말 못하겠는데 누구 배에서 태어나는 게 누구의 선택도 아닌 것처럼 그 사람도 어쩔 수 없다는 거겠죠.

 

 

김대식 그렇죠 원인 없는 결과로 반드시 부조리 해야 합니다.

그 부조리를 자꾸 손대겠다는 인간의 성화론은 자꾸 말려드는 거죠

인간의 접촉을 다 차단을 함으로써 인간의 성화도 결국 부조리인 것을

더 나은 부조리가 밝혀냄으로써

회개가 나타나는 겁니다.

성령의 일이지요 자기반성이 아니라

자기 희생인 겁니다.

손 때라

이것은 유대인은 유대인 스스로가 유대인 되기로써 형성 되는게 아니라

이미 날때 부터 유대인으로써 응시물이 됨으로써 맏아들과 맞물리는 식인데

본인들이 맏아들이 되는 바람에 유대인의 기능이 예수님이라는 유대인의
응시물로써 작용케 되니

예수라는 탕자 이단자 마귀를 처단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주님의 희생은 바로 그런 인간의 악마성에서 건져내는 방법 뿐입니다.

십자가가 그래서 거리끼는 걸림돌인 불쾌한 숭고 곧 거룩인 거죠

인간은 자꾸 제사용의 십자가로 바꿀려고 하겠지만

 

 

김대식 제물(희생물)이 되어야 할 유대인들이 자꾸 반대로 희생제물을 만드는 방식이

유대인의 기능을 스스로 거부하는 방식인 거죠

응시물이 안될려고 거꾸로 예수님을 응시물로 취급해 버리는 맏아들처럼

예수님이 더 부추긴다니깐 ㅋㅋㅋ 죽을려고 자꾸 들이대 ~~~~

 

최일규 탕자를 탕자로 규정하는 것은 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탕자'란 결과 있는 원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탕자를 탕자로 규정할 그 탕자는 결과인데 결과도 원인도 없어야 위의 말인 성립이 되는 것 같은데

 

최일규 자긴을 탕자로 생각한다는 자체가 제사인 것 같네요

 

 

김대식 원인 없는 결과인데 자신을 탕자로 놓든 맏아들로 놓든

아무리 원인있음으로 만들려고 해도 안되는 이유는

믿음이란 원인이 없기에

일부러 모세를 40년 단절

또 모세는 바위를 두번 쳐서 자신이 탕자라는 주인공을 만들려고 해도

역시나 탈락

모세는 죽어도 개 버릇 남 못주듯이 우리도 똑같음

변화산에서 비로소 시공간을 훌쩍 넘어서

주여 제발 죽어주시옵소서
나의 죄를 씻겨주옵소서 할 판국이니

유대인의 모세교는 다 날라갈 판국인 거죠

 

 

김대식 탕자 본인은 순종이 아닌 거죠

뭘 해도 죄 이니까

순종 자체를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고

일방적으로 예수님 쪽에서 순종이라고 일방적으로 붙이는 것임

마치 모세가 바로왕이 두려워 도망쳤는데
분명 구약이 그렇게 기록하는데
신약에서 배신을 때리고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일방적으로 편파기록을 함으로써

순종이 된 것이지

탕자에게서는 아무리 따져도 순종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음

주님 쪽에서 넘어와서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붙이는 의미이지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음으로 넘어오심)

탕자는 아무리 자기 꼬라지를 봐도

멍멍이 개 인데 뭘 ~~~

 

최일규 편파적 승~

 

김대식 그래서 지젝은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라고

미래완료를 소급해서 완료 속에서 사는 삶을

구체적 보편성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보는 듯

간극 사이에는 오로지 죽음(부정성)만이 있기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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