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무익한 것을 원하기 (17: 1-10)

 

실패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17:1,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17:2, 개역)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17:3, 개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17:4, 개역)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17:5, 개역)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17:6,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17:7, 개역)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17:8, 개역)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17:9, 개역)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7:10,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17:1, 공동)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악의 유혹이 없을 수 없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17:2, 공동)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17:3, 공동)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17:4, 공동)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17:5, 공동)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니까

(17:6, 공동)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7:7, 공동)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하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7:8, 공동)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17:9, 공동)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17:10, 공동)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이제 그 다음 이야기가 오히려 제가 더 궁금해 질 정도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꿈을 꿧는데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그것은 거지나사로가 무시 받았다는 겁니다.

 

개가 상처부위를 혀로 햩을 정도로 무시 받았다

 

그런데 아침에 어머니랑 식사를 하면서

그럼 개에게 개 혓바닥으로 상처부위를 혓바닥 햩음받음 당하면 다 고난이요 무시받음 일까요?

 

물론 아닌 거죠.

고난이란 원인 없는 결과로 일방적인 편파해석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스스로가 자신의 기록의 모순됨을 부각 시키면서 믿음을 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구약에는 애굽왕 바로왕이 무서워 도망쳤다고 기록하고서는

신약 히브리서에서는 바로왕을 무서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맞섰다고 합니다.

노골적인 거짓말이요 모순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간격을 좁힐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부각 시키는 겁니다.

 

고난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어려운 말로 실패한 거세 라고 합니다.

거세가 완벽해져 버리면

사회라는 것이 또는 조직 제도 라는 것이 형성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뭔가 형식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갖추고자

이 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의 모습을 표출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마치 남자가 거세를 완벽하게 성공해 여자로 변신할 수가 있는가?없고 실패한다는 겁니다. 만약 성공해 버리면 사회 자체가 형성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패하기 때문에 사회가 형성이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남자가 여자를 완벽하게 정복해 버리면

더 이상의 관계가 있을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남자가 여자를 완벽하게 정복해 버려도

절대로 정복할 수 없는 빈공백의 여백이 여자에게는 항상 있는데 이것이

남자를 더더욱 애달케 만들어 버려서 사랑으로 이끈다는 겁니다.

 

그 여백을 잉여 라고 합니다. 실패한 거세 라고도 합니다.

 

즉 사랑은 둘에서 하나가 되는 동일성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에서 둘이 되는 차이성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간격이요

지난 시간에 말한

있으나 없으나 한

하나 마나 한

필요 없어 보이는 무능한 소리 곧 세미한 음성

7천 명이요 770번의 용서받기이다는 겁니다.

770번 용서하기가 아니라 그 반대인 용서받기

 

즉 고난이란 내가 고난 받는구나 라는 인식 자체를 한다는 자체가

고난과 거리가 먼 것이다는 겁니다.

 

의식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을 용서하는 나이구나 라는 의식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붙어있는데 어떻게 모르게 하느냐 말이죠,

그런데도 그런 불가능성은 의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 마나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간격이 벌어진

이런 일이 바로 자기부인이라는 회개 속에서 성령으로 돌아가자라는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자기 의식이 없다는 거죠, 잊어버리는 거죠.

회개도 결국 하나 마나 한 일이다는 겁니다.

자기부인도 하나 마나 한 세미한 음성이요 7천명이지 내가 자기부인할꺼다 라고 의식 한다는 자체가 자기부인이 아닌 겁니다.

 

그렇다면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것이 실패 해야 하고

그 실패를 아무것도 아닌 것인 7천명이 선물로 원인없는 결과 주어질 때

이 두 양면성을 그대로 안고서 간격이라는 주체가 이런 사건을 벌리는 믿음을 펼치는 겁니다.

 

엘리야처럼 실패하기를 우리는 당하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의식 못하듯이 그저 실패만 할 뿐입니다.

 

결국 고난이란 아주 당연한 것이다는 겁니다.

당연한 것인데 고난받는다 라는 의식을 가져 버리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하는데

 

자꾸 원인 있는 결과가 되어

또 하나의 구원의 조건이 되어버리는 가능성이 되어 버리면

간격이 아니라 자꾸 좁힐려고 하는 지옥간 부자의 모습과 같다는 겁니다.

부자청년도 그런 식입니다.

 

결국 실패한 거세 곧 할례를 몸에 장착하는 손할례가 아닌, 구원의 징표가 아닌,

할례를 실패한 것이 바로 마음판의 할례이다는 겁니다.

남이 아닌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가해자 살인자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써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혀 다른 양상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와 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계속 해서 하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 한

마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처럼

하나 마나 한 소리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모습처럼 보이는 겁니다.

 

목숨이 귀합니까?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것이 귀합니까?

그런데 왜 귀한 목숨을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것에 걸어라는 거죠?

마치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라는 식입니다.

 

불의한 것이 하나 마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의한 것에 충성치도 않는데 정의로운 것에 충성하겠느냐 라는 겁니다.

 

사람이란 바로 불의함을 누락 시켜버리고 바로 정의로움에 충성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은 곧 정의로움이 귀해서가 아닌 정의로움에 충성하는 자신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지옥간 부자의 가능성에 의미를 두는 모습이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럼 가능성에 의미를 두지

불가능성에 의미를 두는 자가 누가 있겠냐 라는 거죠.

 

문제는 주인 곧 주체 때문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면 주인은 종에게 어서 와서 앉아서 먹어라 라고 하는 주인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주인은 종에게

어서 너의 주인인 나의 밥상을 차려라 라고 명령을 하고

종인 너는 주인이 식사를 할 동안 수종을 들고서

주인이 식사를 다 한 뒤에 너의 식사를 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것인 당위 곧 기능이지 종의 기능이지

명령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저는 보잘 것 없는 아무것도 아닌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의 답입니다.

 

믿음이 더해지기는커녕 더 단절되는 더 나쁜 상황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간따나 믿음이 없는 나쁜상황인데 더 더 믿음이 없는 더 나쁜상황으로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 말이죠.

 

첫 번째 답변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겨질 것이다 라고 외치면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만 있다면

 

문제는 그런 믿음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믿음이란 서로의 유익이 되어야 하는데 괜히 쓸데 없는 믿음으로 인해있으나 마나 한 믿음으로 인해

뽕나무 뽑아서 바다에 심겨지면 그럼 그 뽕나무 살겠나요? 죽겠나요?

바닷물이 짜운 소금끼로 인해 과연 뽕나무 살릴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믿음을 과시하기 위한 그런 차원인가요? 과연 무엇인가요?

 

이 얼마나 어려운 해석불가의 말씀 아닙니까?

 

하나 마나 한 소리 아닙니까?

 

꼭 산골 깊숙한 기도원 여전도사들이 이런 소리 잘 하잖아요

믿음만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겨지라고 하면 그대로 된다고

믿음이 없어서 못하는 거지 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런 거짓여선지자들 본인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라고 하면

그때부터 음성이 높아지는 거죠.

 

다 거짓말인데 오히려 더 잘먹혀 들고 있으니

종교성을 자극하는 용어로 최면을 걸어버리는 겁니다.

무식한 사람들만 먹혀들고 좀 배운 학생들에게는 안 통하는 거죠.

 

그럼 이 말씀의 의미는 도대채 뭐냐 말이죠.

 

지금 오늘 본문을 제일 밑에서 출발해서 거꾸로 올라가서 봤는데

이젠 좀 더 위로 올라가 보죠

 

사도들이 왜 믿음을 우리에게 더하게 해 주소서 라고 요청해야만 하는 판국인고 하니

바로 위의 이야기를 듣고서입니다.

즉 질문 동기 부여가 된 이야기가 바로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는 화로다

그 자가 작은자 중에 하나를 실족시켜 버리는 것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달아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범죄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 이라도 네게 죄를 짖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한다 라고 하면 너는 용서 하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과연 벌어지기나 할까요?

가능한 일일까요?

일어 날수나 있는 일일까요?

만약 정신병자를 만나면 충분히 일어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는 너무 너무 불가능한 좀처럼 일어날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당연히 아주 마땅히 일어날것있냥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마치 곧 닥친다는 겁니다. 곧 심판의 상황 종말의 상황처럼 말입니다.

 

문장 자체가 앞 뒤에 벌어진 사건들이 말이 안되는데 역겨져 있다는 겁니다.

 

먼저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다면 그 사람은 화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 화가 되는 저주성은 바로

 

작은자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면

오히려 목에 맷돌 바위를 얹어서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쉬운

그 정도로 악행 중의 악행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라는 겁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그런 악행 중의 악행을 행하고

다시 돌아와 일곱 번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라는 겁니다.

 

이건 뭐 하나 마나 한 소리 아닙니까?

가능성의 말이 아니다는 겁니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겁니다.

또 상대방인 그런 나쁜 놈도 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나쁜 놈과 나쁜일이 생길 일이 잘 없다는 겁니다.

 

비보편적인 붕 뜨는 비현실적인 이야기 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아주 현실적으로

그것도 보편화 시켜버리는 식으로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보편화 수시로 시도때도 없이 발생하는 일로써 아주 당연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니 사도들이 믿음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 이런 사태가 닥치면 아니 마땅히 닥칠 수밖에 없으니

내 선에서 해결 할 수가 없으니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성경은 말이 안되는 것만 골라 골라 모았습니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죠.

얼마나 다급하면 믿음을 요청 합니다.

즉 내 선에서 끝난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도리어 누락 되어야 할 판국이다는 거죠.

그리고 그 정도로 다급하다는 겁니다. 믿음까지 요청할 정도면 말입니다.

 

바로 7천명을 요구하고 있고

770번의 용서를 바라고 있는 식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대한 답변 보다 오히려 무익한 종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하라 라는 식으로 답변이 끝납니다.

 

전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서로 맞는 이야기가 단 하나 없이

각자 개별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전체화 되어 있는 겁니다.

 

완전 개별적인 것이 풀에 의해 강제적으로 접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무슨 수로 이런 이야기를 풀수 있겠습니까

그냥 포기하면 됩니다.

 

해석자도 없으니 전문가에게도 맡길 필요도 없고요

 

그럼 이 이야기의 의미는 뭐냐?

 

시차 라는 겁니다. 시각적인 차이 이다는 겁니다. 곧 간격 이지요

 

지난 시간의 용어로 하면

세미한 음성

7천명 남겨진자

770번 용서받음

7번 씻는 문둥병자 나아만의 몸 씻기

한 과부 사렙다 여인 딸랑 한 명에게만 보내심바 되기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이라고 했습니다.

 

즉 상대적인 의미와 대비를 이룬 의미에서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간격이라고 합니다. 시차 라고 합니다.

 

시차를 꼭 시간적인 의미라고 볼게 아니라

시공간 전체를 다 종합한 시선의 차이, 간격

즉 차이성이라고 쉽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했을때에

 

7천명의 남은자가 있다는 것을

 

나만 남았나이다를 주장함에 있어서 절대로 7천명을 의식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의식한다면 그런 주장 자체도 불구하고

숫자를 세었다는 자체가 숫자 안세기가 불가 하다는 겁니다.

 

즉 엘리야는 가능성의 세계를 의식하지

불가능성의 세계를 말 할 수 조차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것대로 분명히 해주고

이와 그 어떤 접촉점도 없이

대조적인 7천명의 의미가 나오는 겁니다.

 

맞습니다. 지옥간 부자가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를 호출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나서서 언급하면서 설명합니다.

중간에 큰 구렁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의 소통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은 지옥대로만의 지옥을 표출만 하도록 되어 있고

천국은 천국대로만의 천국을 표출하도록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분명한 선 긋기가

바로 시차 라는 겁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설명해 주고자 함이 아니라

시차를 분명히 더 또렷하게 선긋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너는 헛소리 해라 그러나 나는 분명히 또렷하게 말한다 라는 거죠.

 

시차는 간격이 그어졌기에 둘 간의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시선이 각각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과 천국 사이의 소통이 없다는 뜻에서 천국이요 지옥이다는 겁니다.

만약 소통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 경계선이 사라진다면

지옥을 지옥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천국을 천국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러니 간격도 없고

시각의 차이도 없는 거죠.

 

그럼 이 땅에서의 연장선에 불가 하다는 겁니다.

 

또 그렇게 되면 죽음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죽음이란 분명한 생명의 간격을 말하는데

이 죽음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는 거죠.

 

그래서 시차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을 실패한 거세 라고 했습니다.

즉 실패로 돌아가자

사도바울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경계선으로 돌아가자 라는 겁니다.

간격으로 돌아가자

간극으로 돌아가자 라는 겁니다.

 

명량이라는 영화가 이순신 전기로 흥행하고 있는데

사실 영화란 이 간극을 잘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이순신이 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현실의 한국 사회에 이순신이 나타나기를 아무도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화 스크린을 보면서 그 경계선을 이순신이 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스크린 밖으로 못넘어온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불편해 할 필요가 없이 재미나게 영화로 인식하면서 보는 겁니다.

 

전혀 숭고하지 않기 때문에 흥행하는 겁니다.

 

즉 허구인 것을 아니까 영웅취급해 주고 이런 영웅은 재미와 흥행 요소가 되는 돈되는 겁니다.

 

영웅 취급해 주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경계선의 간격이 있기에

절대로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 그래 너 주인공 맞다 라고

돈내고 눈 요기 하면 끝입니다.

 

만약 진짜 이순신이 스크린을 찢고서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그 경계선을 넘어서 나에게 다가와 버린다면

 

그렇게 되면 숭고함에 직면하게 되는 겁니다.

 

그냥 아름답다 라고 외치고 끝내면 되는데 졸지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숭고함과 조우하게 되면 감당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일 뿐 따라하지 말자

그런 것이 바로 영화라는 욕망하는 스크린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다릅니다.

스크린을 찢고서

십자가라는 밝히 보이는 것을 현실화 하여서

그 경계선을 넘어서 막 쳐들어 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도화 할려고 의도화 한게 아니라

실패한 거세처럼 잉여로 남아버리니까

분명히 없는데도 불구하고 있게 되는 겁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 자이다 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제거하고 산자라는 의미만 남겨 버리면

교회라는 것이 실패한 거세가 아닌 완벽한 거세로 인해서

더 이상의 교회의 기능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지금의 눈에 보이는 교회들이 다 이런식이기 때문에 이미 교회가 아닌 거지요

 

요즘 책 중에 카톨릭에서 이런 책을 냈답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당신은 성인입니다]. 성인군자다 라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우찌 설명할래여?

세계의 삼대 뒷담화 꾼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라는 것

예수님 믿기 전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의 사도바울이 그렇다는 겁니다.

 

바그너, 소크라테스 그리고 사도바울

니체는 바그너에 포함 시키면 되고 말이죠.

 

 

카톨릭 사제들은 결국 사기꾼 들이지요

 

분명 구약에서 모세는 바로왕이 무서워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무서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경계선이 분명합니다. 앞뒤의 모순이 분명하고 이 모순을 수정할 의도가

성경말씀 스스로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두 경계선을 분명히 합니다.

이거는 이것대로 분명하고

저거는 저것대로 분명합니다.

 

이것은 또 성경의 유명한 부분에도 나옵니다.

7장 마지막 부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그리고 롬8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이 경계선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각각 고치거나 수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모순 임에도 불구하고 합니다.

 

보통 둘에서 하나로 이행한다고 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 반대이다는 겁니다.

사랑은 하나에서 둘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위의 이 모순을 그냥 그대로 가는 것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사랑이란 육적인 곤고한 바울과

정죄함이 없는 예수안의 바울과 나누었다는 겁니다.

 

두 개의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개를 합칠 의향이 전혀 없이 그냥 그대로 끝까지 간다는 겁니다.

 

베드로 보세요

세번 부인한 베드로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두 개로 나누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한 일이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두 개의 베드로로써 차이를 말해야

간극이 있는 것이고 이 간극을 통해서

의사가 나는 베드로를 이렇게 둘 로 나누었다고 자신의 의술을 자랑할 것 아닙니까

 

 

병원 광고에 특히 성형수술 광고에 비포 before & 에프터 after로 한 사람을 두 개의 사진으로 올려서

한 사람을 둘 로 나누었다고 자랑 하는 겁니다.

 

바로 이 시차 이 시선의 차이가 바로

실패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겁니다.

 

성형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돌아가자 입니다.

 

인간은 절대 비포에서 에프터로 넘어갈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냥 비포에 머물고자 하고

그 속에서 적응하면서 살기 바쁩니다.

 

그런데 그것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포는 안 죽었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하는 짖이 바로

할례 하면 된다는 겁니다.

지옥간 부자의 가능성 주장이 바로 그런 주장입니다.

성화론자들 다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에프터로 넘어갈려면 큰 구렁이라는 간격을 넘어서야 하는데

무슨 수로 말이죠.

 

그것을 친절한 아브라함씨가 설명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포의 사고방식으로 건널수 있다고 가능성을 여는 겁니다.

 

이 보세요 이것이 바로 간격 답지요

지옥의 사고방식은 지옥의 사고방식 답게 그렇게 생각을 해 주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절대 지옥 아닌 다른 사고방식을 하시면 안된다는 의미에서

 

간격이요 시차 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럼요 그럼요 그렇게 계속 생각해 주세요 라고 절대로 깨닫거나 고침을 받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면서

그런 지옥의 사고방식의 반대인

 

불가능성의 세계인 천국에 대해 그리고 선지자에 대해

그 차이를 간격적으로 말씀에 언급해 놓고서는

 

다시 등돌려서 지옥간 부자에게는 그래 그래 그런 사고방식에서 너는 절대로 벗어나지 말렴

이라고 모순적인 행동을 취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아주 약을 바짝 올리는 거죠.

 

분명 불가능성이란다 라고 알려줘도

그러니까 부자는 가능케 해달라고 계속 가능성을 붙잡도록 유도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부자가 고집이 센 것일까요?

아니면 부자가 말려드는 것일 까요?

 

누가 봐도 부자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장을 한다고 보이겠지만

부자는 천국이 왜 나빠도 더 나쁜 곳인가를 보여주는

비포의 사진으로써 홍보하고 있다는 겁니다.

 

비포 와 에프터

 

수술 전 과 수술 후

 

아브라함은 수술 후 만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듣는 부자는 비포만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니 사진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경계선입니다.

 

이 둘의 성격을 확실히 제대로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치 여자는 백날 죽었다 깨어나도 스스로 남자를 흉내내고 남자의 성격을 따라하고

본능까지도 남자화 한다고 해도 또 언어의 세계 조차도 남자화 해도

 

이 남자의 경계선을 넘어서 남자로 들어갈수가 없다는 겁니다.

본인이 남자라 우겨도 남자들이 인정 안해주듯이 말이죠.

 

남자와 여자의 경계선이 있다는 겁니다. 간극이지요.

이것이 시차입니다.

 

백날 해도 여자로써 태어난 여자의 시선이 있고

남자는 남자의 시선이 있는 겁니다.

본인이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거세를 해서 호르몬 주사까지 백날 백날 다 100프로 바꾸어도 안되는 겁니다.

 

이것이 실패한 거세

사회 자체가 그래서 있는 겁니다.

완벽한 거세가 불가능하기에 사회라는 것이 있는 겁니다.

본인이 남자에서 여자로 100프로 옮겨도 사회의 벽은 못 넘어서는 겁니다.

상징계라는 무의식을 어찌 개인이 모든 인간의 공동분모를 다 교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구조에 갇힌 겁니다.

 

그런 구조에 갇혀 있는 나쁜 상태에

천국과 지옥이라는 간격의 구조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죽으면 이 천국과 지옥의 구조가 나쁜데 더 나쁜 상태로써

 

여자로 못 태어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죽어서는 여자는커녕 그렇다고 원래 성이였던 남자이기는커녕

여자 남자도 없는 세계에서 이제는

지옥과 천국을 말하는 구조에 의해 배치되어야만 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인 거지요.

 

결국 인간은 사나 죽으나 이 간극을 말하기 위한 존재이다는 겁니다.

왜 이 사이의 간극이 바로 주체 이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거지나사로는 간극이라는 주체를 말하기 위해서

땅에서는 땅 대로

죽어서는 죽은대로

간극이라는 주체를 말하기 위해서 이리 저리 배치될 뿐이다는 겁니다.

 

이 간극을 인간 스스로가 말할수 없으면

간극 스스로가 인간을 구별시키는 배치로써

자신의 주체됨을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차원에서

팔다리 다 짤려도 충분하고 넉넉하게 증거되도록 활용이 되는 겁니다.

행동이 없어도 행동했다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을 붙여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의 모세 신약의 모세 달라도

모순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주체는 결국 간극이지

모세는 이 간극을 말하기 위해 동원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실패 했어었어야만 했었고

모세 또한 실패 했었어어만 했다는 겁니다.

 

베드로 역시 자신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그 실패를 반드시 했었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그래야 비포 에프터가 서로가 서로를 넘나들면서 소통할수 없는 분명한 그 경계선에서

이제 성령의 개입 즉 예수님 쪽에서 넘어오심이 이 한 명의 베드로를 둘로 갈라버리는 겁니다.

 

모순은커녕 배신은커녕

오히려 이 시차의 간극으로 인해

성령이 알아서 처리하지

아브라함이 알아서 처리하지

거지 나사로 본인이 스스로를 변호할 필요 없이

그저 목소리를 거세 당한 것처럼 하나 마나 한 목소리 세미한 음성처럼

있으나 마나 한 무익한 종처럼

성령이 그를 다루게 되는 겁니다.

 

? 이유없이 무조건 원인 없는 결과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7천명 남은자는 이유 없는 거지

이유가 있게 되면 또 숫자 나만 남았다고 일 1 하나를 외칠 겁니다.

그 하나를 둘로 분명 무한이중화로 잘개 잘개 가르게 되면 7천이 되겠지요.

즉 숫자 셀 권리가 엘리야 너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 7번 셀 권리가 너에게 없다는 겁니다.

문둥병자 나아만 7번 숫자 셀 권리가 너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나빠도 너무 나쁘죠

 

그러나 지옥간 부자는 물 한 방울을 세고 있습니다.

세고 있어서 선지자도 세고 있고

없으면 선지자를 보내어서 숫자가 되게 되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여전히 자신에게는 숫자를 셀 권리가 있다는 것을

끝까지 외치고 있지

아브라함이 하는 소리가 뭔지 도통 모르는 겁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17:1,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17:2, 개역)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이것 조차 말이 안되는 겁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죠.

모순 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라고 전제를 깔아버리면

모순을 까는 겁니다.

 

실족케 하지 맙시다 로 시작하면 모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없을 수 없으나 로 말해버리면 실족케 하는 것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인정해 놓고서는 그 사람은 화로다 라는 겁니다.

 

즉 가해자가 가해를 가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

가해자는 가해를 가하면 화로다 라고

오히려 이중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결국 모순을 더더더 모순되게 말하는 겁니다.

나쁜데 더 나쁜 상황으로 말이지요.

 

즉 쉽게 말하면 피해자는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가해자이다는 겁니다.

설사 순수피해자가 생겨도 가해자로부터 가해를 당해 피해를 입게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에 대해서 저번에 언급했지요

한 쪽은 경찰교도관 다른 한 쪽은 죄수

이유없이 때리니까 이유없이 그냥 맞더라 말이죠

역할을 바꾸니까 역시나 한 쪽은 이유 없이 때리고

다른 한 쪽은 반항도 없이 이유없이 맞더라 말이죠.

 

결국 인간은 기계일 뿐이다는 겁니다.

배치물일 뿐인 겁니다.

 

모든 인간은 가해자일 뿐이며

그런 가해자로써 이런 세계에서 한 발치도 못벗어나는 갇힌 존재이다는 겁니다.

마치 가해자로써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는 것이

차라리 어린아이 목에 연자맷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더 쉬운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지옥간 부자처럼

지옥에 빠뜨리는 것처럼

그 어떤 다른 행동이 나오질 않는 서로가 서로를 실족케 하는 가해자의 삶이 전부이다는 겁니다.

 

그런 세계에서 너희는 조심하라는 겁니다.

네 형제가 만약 그런 짖 지옥에 빠뜨리는 가해자의 삶을 살면 경계하고

그런 지옥의 모습을 회개하면 용서하라 라는 겁니다.

 

(17:3, 개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17:4, 개역)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즉 이 말은 이 말씀을 실천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성으로써 너희는 못하나 주님은 하신다 왜? 간격 때문이다는 겁니다.

즉 너는 지옥에 빠져있고 또 빠진다는 겁니다.

빼내도 역시나 다시 빠진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연자맷돌에 매달고 있기 때문이기에

 

그런 갇혀버린 현실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갇힌 것 조차도 모르니까 말이죠.

 

그래서 탈출 빼내시는 작업을 주님이 지금 알려주심으로써 하시는데

그런 주님이 일하심에 너희는 대상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믿음이 아니면 벌어질수 없다는 것을

사도들은 알고 믿음을 더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럼 믿음은 무슨 일을 하느냐?

 

믿음이 주체이지

예수님을 믿는 인간이 주체가 아닌 것을 아는 거죠.

 

결국 믿음은 무익한 종으로 돌아가라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 한

하나 마나 한 그것을 원하는 자가 되어라 라는 겁니다.

 

즉 경계선의 인간이 되어라

간극의 인간이 되어라 라는 거죠.

되어라 라고 하니가 명령어로 오해하지 말고

마땅한 당위로써의 존재 보다 앞선 기능이다는 겁니다.

 

 

즉 간극이라는 주체를 말하는데 동원이 되는 종이다는 겁니다.

주인이 이분이며 이런 분입니다 라고 말하는 종

그것도 가치 있는 유익의 종이 아닌 무가치한 무익의 종

있으나 마나 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마땅히 종으로써 해야만 일을 했을 뿐인 아무것도 아닌 종이 되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잉여입니다.

 

잉여이기에 더더욱 매력적인 겁니다.

 

매력에 이끌려서 환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무엇이?

간극이 말입니다.

 

절대로 채워지지 않기에

그래서 늘 실패하기에

7천이라는 치명적인 매력 앞에서 나만 남았다는 숫자 1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겁니다.

즉 진짜 7천이라는 초과잉의 숫자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외치고 있으니까

나만 남았다는 1은 괜히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다가 웃싸꺼리가 되어 웃음 곧 전복이 되어

채널돌리기라는 심각한 드라마나 뉴스의 사건사고가

채널돌리기로 웃끼는 개그콘서트가 되어서

아무리 초상난 집에서도 개그콘서트 보면 빵하고 터지는 겁니다.

이것이 간극입니다. 채널돌리기 전과 후 의 간극

 

치명적인 매력에 뿅가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즉 성령으로 돌아가라

사도바울로 돌아가라 라는 의미인 겁니다.

 

 

믿음이란 앞에 무슨 실패를 해도

무슨 나쁜 상태가 되어도

아무리 지옥 할배 속에 갇혀 있어도

 

넌 믿음이라는 주체에 의해

간극에 의해

빼내임을 당함으로써 비포와 에프터가 생기게 된

모순의 이중인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두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보여줘야만 하도록 되어 있는

 

주체인 성형외과 의사를 자랑

성령을 자랑

십자가를 자랑 할 수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 간극에는 자꾸 관심이 없고

한 개의 베드로에서 두 개로 분열이 되는 이중분열케 하는 주체인 간극에는 관심없고

그 반대로 두 개로 된 것을 하나의 베드로로 만들고자

그런 가능성을 지옥간 부자처럼 추구하고자

 

7번 가해를 해도 뉘우쳐 일곱 번 용서를 빌면 용서하라 라고 하니까

 

이 말씀이 시간적차이로 먼저였는지 아니면

187번 용서했는데 몇 번 더 할까요가 먼저인지를 중요치 않지만

 

하여튼 베드로는 두 개를 하나의 베드로로 만들고자

자꾸 자기자신에게 손을 대는데

7번 용서 했다

그당시 율법은 평생 3번 용서가 최고란다.

그런데 예수님은 7번 언급했으니

완벽한 용서겠지

자신있게 몇 번 부족합니까 라고 겸손하게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자발적인 칭찬을 유도케 했는데

어라 오히려 아예 접근 불가능한 숫자를 못 세알리도록

770번을 외쳐 버리니

이것은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무익한 것 밖에 안되어버리는 무가치 한 것으로 취급당함이 마땅함이

 

오히려 숫자를 세고 있는 지옥의 세계에 빠지지 않는 잉여라는 믿음이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은 불가능한 것만 골라서 하고

행함은 어떻게 하든지 믿음을 흉내낼려고 가능한 것만 자꾸 제시할려는 지옥버릇을 멈추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는 이런 버릇을 스스로 해결치 못하는 곤고한 사람일 뿐입니다.

고칠 생각 아예 하지 마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하는데 못 고치는데

이런 심각한 지옥에 이르는 병을 못 고치는데

 

주님은 어떻게 이 지옥에 빠진 나를 건지시는지를 하나 하나 목격하는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간격의 갭이 얼마나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더욱더 확인하면서

 

믿음이라는 주체가 왜 간극을 벌리지 않고서는

나를 실패케 만들지 않고서는 왜 못 배기나?

 

그것은 더 좋은 성령을 주시고자 하심 이다는 겁니다.

 

(11:9, 개역)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1:10, 개역)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11, 개역)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1:12, 개역)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마땅히 빌바를 구하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감히 불가능성의 간격을 구하게 하시는 겁니다.

 

즉 실패를 구하시는 겁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우기는 기도에

성령의 기도는 아닙니다 7천명 남았나이다 라고 구하고

 

7번 용서 했습니다 라고 우기는 기도에

성령의 기도는 실패케 만들어 770번 용서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겁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저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는 기도에

성령의 기도는 닭 울기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케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연자맷돌에 묶어서 지옥에 빠뜨리는 짖을 막고자 하시는

주님의 일하심 곧 간격벌리기입니다.

 

자살방지부메랑 곧 손때게 하시는 무익하게 만드는 실패케 만드시는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성공하면 자살하기에 실패케 함으로써 잉여의 존재가 되게 함으로써

선물을 받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성령은 늘 선물을 날립니다. 그 선물의 내용은 바로 믿음 곧 간격입니다.

넌 종이고 난 주인이야

넌 신부이고 난 신랑이야 라는 간격만을 누리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종의 기쁨이요 신부의 기쁨입니다.

독자적일수 없다는 겁니다.

관계망입니다.

 

그런데 가능성을 추구하는 지옥간 부자는 이 간격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이

땅의 버릇 대로 자기를 위한 주인과 선지자와 주변의 모든 배치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죽어서도 지옥에 가서도 정신 못차리고 주장하는 겁니다.

 

? 간격의 배치물이기에 이쪽의 불가능성의 세계를 말할수 없는 단절의 단절을 못 누리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본인이 나서서 목소리를 외쳐야만 하는 것일까요?

 

거지 나사로는 그냥 아브라함 품에 있을 뿐이지

그 어떤 주장도 할 필요성과 권리가 없는

있으나 마나

하나 마나

아무것도 아닌

무익한 자로써 있을 뿐이고

 

아브라함이 다 알아서 처리하면서 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주장하는

지옥간 부자를 상대하고 있는 겁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천국을 차단하는

단절의 단절로써 활동하듯이

 

예수님의 오늘 본문의 말씀은

너희는 못하나 주님은 하신다는 취지에서

이 불가능한 지옥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고

그 간격벌리기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저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무익한 자로써

이 무익한 것을 원하는

실패를 누릴 뿐이며

성령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음을 목격하는 목격자로써

죽으나 사나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만 목격하며 누릴 뿐입니다.

 

지옥의 바다에 빠져 살지 못하도록

 

원인 없는 결과로써

용서의 바다에 빠져 살게 하고자

 

지옥과의 시차인 예수님의 용서에 빠져 살도록 말이죠.

 

 

 

 

 

 

 

 

 

 

 

 

 

 

 

 

 

 

 

 

 

 

 

 

 

 

 

 

 

 

 

 

나쁜 것 보다 더 나쁜 단절의 단절(거지 나사로 비유) (16:19-31)

2014/08/03 10:27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나쁜 것 보다 더 나쁜 단절의 단절 (16:19-31)

 

김대식

729

 

(16:19, 개역)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16:20, 개역)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16:21, 개역)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16:22, 개역)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3, 개역)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4, 개역)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16:25,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16:26, 개역)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16:27, 개역)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8, 개역)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9,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30, 개역)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1, 개역)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 되지 말고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 그러면 바리새인 되고 거지나사로 되지 말자?

 

그것도 아니지요.

 

거지나사로는 정작 뒤로 빠집니다.

빠지고

아브라함과 지옥간 부자와의 논쟁이 이야기의 전체를 말해 줍니다.

 

즉 바리새인 되지 말고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는 주장 자체가 이미 가능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결국 지옥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요청하는 것 자체가 가능성을 계속해서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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