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테리 하나님 나라 (눅 17:20-37)

 


(
17:20,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개역)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17:23, 개역)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17:24, 개역) 번개가 하늘 아래 이 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 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17:25, 개역)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17:26, 개역)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17:27, 개역)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17:28, 개역)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17:29, 개역)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17:30, 개역)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17:31, 개역)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17:32, 개역) 롯의 처를 생각하라

(17:33, 개역)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17:3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17:35, 개역)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17:36, 개역) (없음)

(17:37,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이 기가막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천재적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관심사를 대변합니다.

이 천재성이 곧 악마성입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했습니다.(고전 1:22)

이것은 곧 그들의 관심사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최종 관심사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모두 천국을 위한 것들이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고 모든 천재적인 철학자들도 그러한데 그것을 아예 신과 결부시켜버린 것이 바로 바리새인이다는 겁니다.

곧 그들이 펼치고 있는 운동 곧 행함과 연관된 겁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아닌 행함이라는 나쁜 것에, 이 악마적인 것에

그 나쁜 질문에, 그 악마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더 더 더 나쁜 답변을 하십니다. 더 더 더 악마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바리새인아? 네! 하나님나라 들어갈려구? 네!  아니 왜!!!!

니가!! 하나님 나라 들어갈려구!!! 왜 !!!

니가 !!!  왜 !!!!!

 

(17:20,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개역)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나라가 시간적인 것도 아니요 시각적인 것도 아니요

공간적인 것도 아닌

 

그럼 도대체 뭐냐 라는 거죠.

 

바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희 가운데 있다 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내부 공간으로부터의 사물 또는 괴물과 같다 라는 겁니다.

 

너희 가운데 너희 안에 괴물로써의 하나님나라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내부 공간으로부터의 사물이 하나님나라이면

그 하나님나라의 종 그것도 무익한 종이 바로 너희이어야 하고

너희는 하나님나라가 보낸 사물이 되어야 하는데(하나님나라의 대상물로써 종, 손가락)

 

도리어 하나님 나라를 대상물로 삼는 천국운동가이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핍박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1:5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즉 천국에 대한 지식과 천국에 대한 것에 천재적인 표현을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너희 본인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한 남들 또한 못들어가게 막고

삥이나 뜯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천재와 사도와의 차이점이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의 차이점

 

자아와 무자아와의 차이이다는 겁니다.

 

왜냐 인자를 핍박하고 있다는 겁니다.

 

갑자기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라는 시간적인 문제의 질문이

도리어 한 인물에 대한 핍박 사건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근접하고자, 동일시, 일치화 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도리어 하나님 나라를 핍박하고 거부하는 모습으로써 사건

 

그 사건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사건으로써의 하나님나라를 말입니다.

 

그리고 후차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인물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 운운하면서 때와 장소와 인물을 주장하지만

그 인물이 때와 장소를 운운하는 자기자신 자아를 주장하지만

 

정작 하나님나라 운운하는 너희들이 누락시키는 시간 곧 노아의 때가 인자의 때도 그러할 것이며

 

그리고 공간 곧 노아의 방주 사건을 누락시켰듯이 이제는 인자의 날도 그러할 것이며

 

그리고 롯의 때와 소둠에서 벌어진 사건을 누락 시켰듯이 인자의 날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 라고 합니다. 뒤 돌아 볼 자기 목숨이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하나님 나라를 운운했던 이유가

그만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함의 연장선상에서 천국을 운운한 것이

그만 들통나 버리게 됩니다.

 

? 인자를 누락 시키니까 말입니다.

그런 가짜 하나님나라가 인자를 장대 높이 달리게 하는 십자가사건에 말려드는

그 상황을 자꾸 누락시키니까 말입니다.

 

걸림돌을 제시하는게 아니라 걸림돌을 자꾸 빼버리니까

도리어 더더더 거리끼게 된다는 겁니다.

뺄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박히더라 말이죠.

 

노아 사건 롯의 사건을 무시하고 그 간격이라는 사건을 무시하고

바로 뛰어넘어서 하나님나라 운운하고 있으니

그 간격을 제시하니까

하나님 나라는 곧 인자이다는 겁니다.

그 인자가 너희 안의 괴물 곧 사물 곧 얼룩으로써

작용하는데

 

한 쪽은 진노의 그릇으로써 9명의 문둥병자 유대인

또 다른 한 쪽은 긍흉의 그릇으로써 사마리아인 문둥병자 한 명 이다는 겁니다.

하필이면 원수 같은 한명의 사마리아인입니다.

희년은 이스라엘 수많은 과부 냅뚜고 이방의 많은 과부 냅뚜고 한 이방 과부 사렙다 여인에게

이스라엘 수많은 문둥병자 냅뚜고 이방의 많은 문둥병자 냅뚜고 한 이방 문둥병자 나아만에게만 갔다는 겁니다.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단절의 단절의 단절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의 불가능성만 골라 골라 하신다는 겁니다.

너희는 못하나 나는 한다 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약올리면서 말입니다.

오죽하면 그 말을 듣고, 희년이라는 기쁜소식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앗싸 성공

 

즉 이 얼룩이라는 거룩이 이 두 패로 나눈다는 겁니다.

 

얼룩 중의 얼룩 중의 얼룩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분노가 가득한 쪽이 졸지에 새롭게 발생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인자는 왔다는 겁니다. 하나님나라 사건으로써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나라를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함에 대한 보상으로써 자아의 연장선을 꿈꾸는 겁니다.

소멸이 아닌 영원불멸로써 말이죠.

그런 입장에서 부활도 믿는 겁니다.

이것이 천재에게서 나오는 발상입니다.

즉 악마들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이렇게 어머니께 두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 제목이 가짜입니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어떤 가난한 농부와 여인을 부자답게 고급스럽게 옷을 입혀서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니 예술가는 [가짜] 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 대중에게 보이도록 했는데

 

그만 대중들은 이것이 제목이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진짜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반대로 진짜 부자와 여인을 그들의 고풍스러움을 가득 담아서 그림을 그렸고

제목을 [진짜]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전시하니까 대중들은 제목이 또 잘못되었다고 누가봐도 가짜라는 겁니다.

 

누가 봐도 손님 가짜 예요 ~~~~~ 아이고 무안하여라

 

또 한 예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께 자주 했던 이야기인데 좀 더 각색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사진이 있는데 하필이면 보일락 말락한 얼룩이 그 그림에 묻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시선이 자꾸 아름다운 그림 전체로 가는게 아니라

그 얼룩이라는 작은 부분에만 가니까 신경이 쓰여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쳐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지 도대체 전체의 아름다운 그림이 눈에 들어오질 않고

그 괴물 같은 얼룩이 그림 전체를 장악한 듯이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얼룩인 이스라엘이라고

 

그래서 제가 평상시 이야기 했던 이 이야기를 각색해서

예수님을 그린 아름다운 초상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전에 나온 영화 천국에 다녀온 소년 이라는 6살 꼬마가 예수님을 만난 내용을 영화화 했는데 그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어린 소녀 이야기인 같은 경험을 한 소녀도 있는데

지금은 고등학생 쯤 되었는데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이 바로 예수님의 얼굴인데 소년 6살 꼬마가 봤던 그 인물과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본 예수님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 그림이 몇억씩 한다고 하더군요

그림 쪽으로 작품을 남기다 보니 그 그림의 가격이 그렇게 책정이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그림에

예수님 당사자는 정작 새까맣게 구멍을 뻥 뚫어서

도통 예수님의 전체 얼굴을 못 보도록 예수님 당사자가 그렇게 그림에 흠집

얼룩 구멍을 뻥 뚫어버리는 겁니다.

 

지금 바리새인이 아름다운 하나님나라를 언급하는데

예수님은 그 아름다운 하나님나라에 구멍을 뻥 뚫어서 그 구멍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심령천국이라는 그 따위 거짓말로 속이는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얼굴에다 구멍을 뻥 뚫어서 그 구멍 가운데에 예수님이 있다는 겁니다.

정작 구멍 속을 들여다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남는 것은 남는 잉여는

아름다운 예수님 얼굴 전체를 망쳐놓는 얼룩이라는 것 밖에

참 무안하여라

아무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더더욱 얼룩을 뒤짚어 씌워서

이제는 불쾌한 심판을 그 그림 속에 얼룩으로써 집어넣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이 졸지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니

 

아름다운 구석을 찾아 볼래야 찾아 볼수가 없게 됩니다.

 

졸지에 방금 전에 봤던 아름다움과 이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숭고

그 간격만이 덩그라니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뻥 뚫혀서

잔재로만 남아버리는 겁니다.

 

총 맞을 것처럼 ~~~~~~~~~~

 

 

그들의 악마성에 더 더 더 악마적인 더 나쁜 소리를 하니까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림이요 하나님나라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심판으로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들의 이단성 보다 더 더 더 이단 중의 이단으로써의 하나님나라의 이단성을 말하니

분노가 가득하게 되고

결국 인자는 핍박당하는 것은 당연시 되는 것이고

 

이 거룩이 벌리는 사건에 그들은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천재성이고 뭐고, 아름다움이고 뭐고 다 날라가 버리는 셈인 거죠.

 

인물 곧 노아를 거부하는 모습처럼 인자마저도 너희들은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누락했고 빠드렸고 무시했던 사건이

 

중간에 개입해 돌출하게 되니까

 

인자를 죽이는 사건에 말려들게 되니

이 사건이 바로 너희 가운데 너희 안에 있는 괴물로써의 하나님나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크게 착각한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이 어디 한 둘이가 아니잖습니까

그들은 가희 천재적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천국의 열쇠를 쥐고서 안들어가고

남들도 못 들어가겠끔 막는 짖만 골라서 한다는 겁니다.

 

아니 그들은 꿈에도 자신들이 지금 천국에 들어가도록 평생을 걸고서 모든 것을 걸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고서 천국운동을 펼치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에서는 그들은 정반대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보이는 모습에 악 속는 겁니다.

누락 시킨 그 사건 노아의 사건과 롯의 때를 거쳐서 보니

저들이 누락시키고 무시했던 그 사건을 거쳐서 보니

그들은 이 간격을 무시했던 겁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주장했던 것처럼

그들의 주장이 어쩌면 똑같은지

오늘날 하나님나라 운동 성화운동을 펼치는 자들과 어쩌면 똑같은지

 

다들 안보이는 그 간격을 볼수가 없습니다.

 

백날 너희 안에 있고, 너희 가운데 있다고 이야기 해도 무슨소리인줄 모르고

천국의 지식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자기도 남도 못들어가게 막는 짖만 골라 하는 겁니다.

 

천국은 당신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하니

내 마음의 천국이라고 심령천국이라고 또 헛소리로 장난을 치는 겁니다. 언어로 최면거는 거죠.

 

아니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라는 질문 하나 했을 뿐인데

왜 이런 무시 무시한 공포적인 폭력적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갑을 관계의 갑의 횡포 입니다.

 

그리고 그 폭력성은 결국 주님이 유발케 해놓고서는

주님께서 결국 당하시는

본인이 언급해 놓고 본인이 당하는

딴 사람은 전혀 그런 의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주님이 펼쳐놓고서는

주님이 그 폭력을 당하신다는

 

이건 뭐 하나 마나 한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니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실하시겠다고 하고
(천재는 이 어리석음에 충실할수 없습니다. 천재와 십자가와의 차이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합니다.)

그 사건에 너희들이 말려들 수 밖에 없도록 하시겠다고 하니

 

바리새인이 말하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즉 두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천지차이로써 간격이 벌어지는 겁니다.

 

너희 안에 있는 그 괴물로써의 천국에 충실하겠다는 겁니다.

 

일종의 바리새인은 천재들로써 인생의 고달픔의 해소로 창조적인 하나님나라를 언급하는 반면에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천재 또는 성화된자 의인들의 보상 장소가 아닌

심판을 구체화 하는 지금 이 순간 이 땅에 내려온 구체적인 인물, 사물, 괴물로써

인자의 날로써의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에게는 정반대의 하나님나라이니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는 셈입니다.

 

연자맷돌에 대해서 문둥병자 10명 이야기 바로 위애서 언급했는데

바리새인이 주장하는 천국은

즉 오늘날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 마저도 외치고 있는 하나님나라운동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자맷돌을 씌우고 있는 지옥보내기운동이다는 겁니다.

 

이 구조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는 구조 속에서

심지어 예수님으로부터 문둥병 고침을 받는 것 조차도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간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지옥에 빨리 재촉해 가는 것으로써

문둥병을 고침 받았다는 겁니다.

문둥병이 뭡니까? 저주 아닙니까?

 

저주 속에서 벗어나 건강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고침받은게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저주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는 겁니다.

 

건강한 자 세계로 들어간게 아니라 그들 건강한 자들이 악마의 세계인데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거죠.

그 동안에 소외 당했는데 이제는 소외 당하지 않게 되었다.

왕따 안 당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이제는 왕따 시키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이 주장하는 하나님나라이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용서의 세계입니까? 마귀나라이지.

베드로가 7번 용서 하겠다는 것은 사실은 왕따 시키는 위치에 서고 싶은 겁니다.

겨우 3번 용서 5번 용서 한 사람을 기죽이는 세계에 들어가고픈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리어 770번 왕따나 당해라 라고 용서받는 위치에 서라고 하시고자

걸림돌이라는 괴물 곧 닭의 울음 세 번을 걸림돌로써 간격을 두시는 겁니다.

도저히 못 넘어서는 겁니다.

8번째 용서로 넘어가는 판국에 괜히 닭을 만난 겁니다.

이 잉여가 이 공백이 이 괴물이 이 간격이 베드로를 살리는 겁니다.

쭐꾸덕 미끄러져 버린 겁니다.

 

자아를 상실 당하게 된 겁니다.

난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어 라는 그 흐리멍텅한 모호한 자아를 또렷하게 삭제 당하는 겁니다.

 

거지나사로는 천국에 가서 도리어 자기목소리를 상실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옥간 부자를 상대하지

거지나사로는 일체 상대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실패한 거세이다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입니다.

계속적인 잉여라는 공백으로써만 남는 겁니다. 거룩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는 겁니다.

 

그런데 지옥 간 부자는

간따나 없는데 그 없는 것을 빼앗기는 겁니다.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4:23, 개역)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4:26, 개역)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그래서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계속적으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겁니다.

 

즉 하나님나라의 비유는 죄사함 얻지 못하도록

깨닫지 못하도록

듣지 못하도록 보아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의 응하심이다는 겁니다.

 

주님은 말씀대로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기록된 말씀대로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구절을 뽑아서

믿고픈대로 믿어서 행함을 펼쳐놓은 트릭이다는 겁니다.

 

그 트릭에 예수님은 트릭의 트릭을 쓰신 겁니다.

그 나쁜 것에 나쁜 것 보다 더 나쁜

그들의 악마성에 악마성 보더 더 악마적인

그들의 이단성에 이단 보다 더 이단 중의 이단적인

 

바로 얼룩으로써 빈공백으로써 무시받는 싫어버린바 됨으로써 다가가신 겁니다.

 

결국 하나님나라는 두 패로 가르는 겁니다.

가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그 두 패로 갈라진 그 사이의 간격이 바로 믿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행함의 시선에서는 도저히 안 보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간격입니다.

그 간격을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무슨 수로 듣고 보고 깨닫게 됩니까?

예수님의 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들의 세계에서 빼내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실수 곧 믿음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에게 피 흘리시는 용서 밖에 없습니다.

그 피 발림 밖에 없는 겁니다.

 

그 피 발림 때문에

문둥병자 10명 중에 한 명인 사마리아인이 눈을 뜨고서

그 간격을 좀 전 까지도 못 봤는데

보여주시니까 안 보고는 못배겨서

그 간격을 외치는 겁니다.

 

그러니 못 외치도록 죽여버리는 거죠.

그 죽음이 사실은 예수님 곧 인자의 죽음으로써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예수님의 손가락 역할

곧 무익한 종 역할로써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졸지에 하나님 나라는 우리 내부 속의 내 안에 있는 괴물로써 출현한 겁니다.

 

이 괴물인 하나님나라를 바리새인이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로 바뀌게 됩니다.

 

인간들이 천재들이 어떻게 이 하나님나라를 다루느냐

무슨 수로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나라를 톡 하고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우리가 잊어버리고 무시해 버리고 먼 옛날의 일로 취급해 버렸던 사건

노아의 사건 롯의 때의 소돔사건이

졸지에 와르르 하고 무너져 확 쏟아지는 겁니다.

온 천지사방 불철주야 그 사건들이 수시로 터지면서

노아의 때가 지금 이 때가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 속에서 무슨 수로 살아남을수 있겠습니까?

 

뭐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요? 완전 배부른 소리로 질문하는 겁니다.

 

그래? 그럼 노아의 때를 먼저 격어보라는 겁니다.

롯의 처가 남의 이야기인지를 한번 격어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나라 라는 보따리는 그 사건을

우리가 무시해버린 그 사건을 한아름 한보따리로 가득 담아서

우리에게 터트리고자 벼르고 벼른 입장에서 우리는 놓여졌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 가운데 그 보따리를 풀어해치겠다는 겁니다.

 

노아 심판 한번 격어 보실래요? 뿌잉뿌잉

노아 심판 보다 더 심한 인자의 날 한번 격어 보실래요? 뿌잉뿌잉

롯의 때처럼 소돔의 심판 보다 더 심한 인자의 때를 격어 보실래요? 뿌잉뿌잉

 

이건 뭐 완전 놀려 먹어도 보통 놀려먹는게 아닙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나라를 삐딱하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사실은 우리가 삐딱하게 엉터리로 하나님나라를 감상하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제발 마약에서 깨어나라 라는 겁니다.

아니 제발 마약에서 깨어나지 말고

너가 자기도취시킨 그 가짜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말고 지옥이나 가라 라는 식입니다.

 

오늘날 목사들도 여기에 동원이 된 겁니다.

 

그들은 지옥 보내기 위해서 주님이 보낸 악한 영이 씌여진 자들입니다.

 

그럼 안 그런 목사 찾으면 된다고 인간들은 희망을 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 그런 목사는 더 심합니다.

아예 노골적으로 지옥 보내겠다고 선언까지 해 버리는 겁니다.

 

저들은 사기를 치는데 있어서 절대로 지옥 보내지 않겠습니다 라고 사기를 치는데

안그런 목사는 나는 아예 너희들을 지옥 보낼려고 목사 하고 있다 라고

사기에 사기를 쳐 버리니까

 

어디를 가도 인간이 듣고픈 하나님나라를 없게 되는 겁니다.

 

그 없는 하나님나라

그 히스테리 얼룩인 하나님나라는

오직 예수님의 심판 속에서만 보이는 겁니다.

 

한 명의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무슨 수로 그 간격을 보게 된 겁니까?

 

병고쳐 줘서 고마워서? 아닙니다.

 

고침 받을 자격이 없는데 고침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심판 주로 보게 된 겁니다.

 

돌아와서 그는 왜 저 같은 놈을 고치십니까? 전 고침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니 그런말 할 것 같으면 자기가 주님 떠나면 되잖아요?

죄인이라메? 더럽다메? 더러우면 깨끗한 예수님을 곁을 떠나서

멀리서 그런 말을 하던가?

 

바로 이것이 얼룩 곧 손가락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성령의 일입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얼마나 히스테리적인 증상입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할게 아니라

본인이 멀리 주님을 떠나서 하면 될 것을

꼭 주님 앞에서 나를 떠나소러 라고 지가 안 움직이고 주님을 움직이게 할려고 합니다.

사실상 주님을 움직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증상으로써 히스테리

주님이 한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을 장악해서 나오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자기 목소리를 상실한채

내부 공간으로부터 나오는 괴물의 소리가 자기에게서 나온 겁니다.

 

주님이 그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는 국가를 대변하는 비개인적 비인간적인 괴물이듯이

 

한 명의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은 주님을 대변하는 비개인적 비인간적인 괴물의 소리를 발현한 것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바로 누가 기록하여 적었든 간에 성령의 목소리이다는 겁니다.

 

얼마전에 최고의 공포 영화 엑소시스트를 다시 봤는데

어릴적에 보고 그 다음 두 번째로 봤는데

지금 보니 뭐야? 뭐 이렇게 시시해 라고

억수로 쫄면서 봤는데 실망이 보통 실망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어릴적에는 왜 그렇게 공포스러워 했는데

그때의 기분으로써 봤는데, 억수로 쫄면서 말이죠.

 

또 올해 초 공포의 서스팬스의 대명사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를 봤는데

보는내내 답답해 미치겠더군요

속도감 때문이였습니다.

 

몇 년전만 해도 안그랬는데

요즘 들어서 고전영화를 보면

완전 답답해 미치겠더군요

성질급한 내 입장에서는 느려도 보통 느린 속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뭔가 영화철학 공부 중에 접하다보니 뭔가 얻고자 봤는데

속터질정도로 느려서 도통 재미가 나지 않는 겁니다.

 

괜히 과거의 기억 때문에 쫄면서 보다가

실망만 하고 말이죠.

 

그럼 지금 현재의 나의 공포는 뭔가?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볼 때 마다 허걱 거릴 정도입니다.

 

그럼 성경 말씀 안 보면 되지

 

맞아요 안 보면 됩니다.

 

그런데 나의 내부 공간의 괴물로써 자리잡아 버리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멀리 떠나고 성경말씀을 안 보면서 그런말 하면 될 것인데

주님에게 다가가서 그 소리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하고

성경말씀에 두려워 떨면서 말씀 속에서 못벗어나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느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소리는

베드로를 장악한 성령이라는 괴물의 소리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는 바리새인과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님의

 

차이나는 하나님나라이다는 겁니다.

 

하나는 악마가 장악한 소리이고

하나는 성령이 장악한 소리이다는 겁니다.

 

누가 더 현실적이고 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소리 입니까?

바리새인입니다.

 

누가 더 비현실적이고 더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동문서답의 소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완전 폭력의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리고서는

 

(17:3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17:35, 개역)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간격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두 남자가 한 자리에서 누워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이로소 하나님 나라는 간격을 벌리면서

그 간격속에서 이런 성령의 일

아주 아주 나쁜 일들을 벌림으로써

그 증상으로써 그 히스테리로 나타나는 것이

너희 안에서 벌어진다는 겁니다.

사건으로써 너희 가운데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증상이다는 겁니다.

 

히스테리란 진실을 말한다 라는 의미로써

즉 진실이 신체를 박탈함으로써 나오게 되는 증상인 겁니다.

사도와 천재의 차이에서 사도가 비개인적이고 비인간적인 이유가

신체를 박탈당했기에 개인적인 사적 세계는 이제는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간격이 없던 한 자리에서 함께 누워 있고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데

 

갑자기 찢겨지는 간격이 벌어짐으로써

한 사람은 데려감을 또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함으로써

 

진실이 나타나는 공백으로써

안나타나고는 못배기는 증상이다는 겁니다.

 

몸에 감기가 걸리면 그 감기의 증상으로써 코에 콧물이 주루룩 흐른다든지

아니면 기침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몸 안에 감기가 침입했다는 증거요 증상이다는 겁니다.

 

감기를 찾아가겠다는 멍청이는 없습니다.

마치 바리새인은 천재들처럼 감기를 찾아서 감기에 대한 지식을 다 가졌다고 우깁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는 아예 감기에 걸려 버려서

감기로부터 장악을 당하니까

감기의 증상인 콧물 기침 가래 등이 나타나는 겁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출현한다는 거죠.

 

이것을 누락한채 감기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고 우겨본들 소용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식이다는 겁니다.

우리를 장악하는

그래서 우리 내부에서 나타나는 괴물이지

 

우리가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또는 천재들은 하나님나라를 다가갈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버릇입니다. 베드로도 자꾸 다가갈려다가 사탄아 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가 또 이렇게 반문하겠지요

의사들이 감기를 정복하기 위해 감기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면 감기는 낫게 된다고

맞습니다 그것이 천재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천재가 아니라 증상이요 정복당한자이기에 비개인 비인간적입니다.


인자의 날이라고 했을때에 인자를 성령이라는 심판성 대립성으로 언급합니다.

 

즉 감기가 완전히 정복이 되어버리면 성공한 할례가 되기에

마음판의 할례 곧 실패한 할례가 필요가 없고

구지 예수님까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고

지금 바리새인이 주장하는 하나님나라로 충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감기가 정복되었다고 끝나는게 아니라

반드시 미끄러져서 에볼라가 다시 피어오르고

또 다시 정복할 수 없는 병이 새롭게 나타남으로써

계속적인 잉여로 남게 된다는 겁니다.
실패한 거세 입니다.

 

그렇다고 감기약을 개발하지 말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포기하라고 해도 포기할 인간이 아닙니다.

 

자기 식구가 죽어가는데 가만히 있을 인간이 없듯이 본능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그러나 미끄러져 계속적으로 잉여로 남는 쪽은 잉여 대로

 

두 패로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한 패거리였는데 말입니다.

 

그 가르는 기준이 바로 간격이요

 

그 간격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간격 속에서 우리가 그 동안 무시했고

잊어버렸고 누락시켰고

은근슬쩍 빼먹었고

기억에서 삭제 했고

눈이 어두워서 못봤고

귀가 들리지 않아서 못들었고

병이 들어서 찾지 못했고

사고를 당해서 깨닫지 못했던

 

그 노아의 때 롯의 사건 등등의 약속의 사건을

이 간격 속에서 다시 재현 시킨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취지인 겁니다.

 

이제야 비로서 제대로 질문을 합니다.

 

박탕당하고 장악당해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다가가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나의 안에, 우리 가운에 괴물로 자리잡아서

비로소 가능성을 요구하는 지옥간 부자처럼이 아닌

중간에 간격을 상기시키는 아브라함의 시각처럼

 

이제 시선이 바뀌어서 이 시차라는 간격을 보고

비로소 제대로 된 질문을 합니다.

가능의 가능이 아닌 단절의 단절의 질문입니다.

 

(17:36, 개역) (없음)

(17:37,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17:36, 공동) 『㉠(없음) / 어떤 사본에는 다음과 같이 있다. "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17:37, 공동)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주님,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는 바리새인의 질문과 정반대로

 

심판의 날 곧 인자의 날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두 패로 갈라지는 그 일이 어디서 벌어지나요? 라고 하나님나라에 장악 당해서

진실을 내 뱉을 수밖에 없는 신체 곧 히스테리로 말할 수 밖에 없게 된 대답을 하는 겁니다.

 

너희 가운데 있다는 하나님나라가 장악해서 나온 증상 곧 히스테리로 나오는 질문입니다.

 

옳지 그렇게 질문을 해야지

 

라고 저들의 질문과 차이를 벌려 버리는 겁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당연히 독수리가 모여들죠.

하나 마나 한 답변입니다.

 

즉 심판 속에서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불가능한 단절의 단절을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저들은 가능한 하나님나라를 언급하는데 그 차이로

불가능한 단절의 단절 속에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즉 심판의 날에 심판 속에서는 갈라지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패로 말입니다.

그 간격 속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바쳤는데 그 제물 몸뚱아리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는데

여호와의 횃불이 그 좌우 사이의 간격을 위아래로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독수리들이 이 제물의 시체에 달려들까봐 아브라함이 지켜서서 독수리를 쫏아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다시보니 솔개 네요

 

(15:5, 개역)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5:6, 개역)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5:7, 개역)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15:8, 개역)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15:9, 개역)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5:10, 개역)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5:11, 개역)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5:12, 개역)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5:13, 개역)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5:14, 개역)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15, 개역)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5:16, 개역)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5:17, 개역)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5:18, 개역)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5:19, 개역)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15:20, 개역)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15:21, 개역)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언약 곧 약속을 하시는데 죽음으로 하는 겁니다. 죽음 곧 심판이 임했다는 증거가

솔개 독수리가 떳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처럼 지옥간 부자처럼 가능성만을 추구하는 하나님나라 선지자가 아니라

 

불가능성 곧 단절로써

 

심판을 반드시 통한 갈라짐이요 하나님나라이다는 겁니다.

이 갈라짐의 간격 벌리기가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자의 날이 심판의 날로써 하나님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결국 심판의 시선을 누락하는 바리새인과 차이를 내심이

심판이 임하니까 바로 그런 제대로 된 질문

인자의 날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라고

 

빼먹을려고 누락시켜버릴려고 하는 것을 반드시 삽입시켜서 질문케 만드시는 겁니다.

마치 한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이 볼 수 없는 그 불가능한 단절의 간격을 보고서

 

예수님께 되돌아 온 것처럼

 

성령으로 돌아와서 그 간격을 보고 질문하게 되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가 누락 시킨 것을

못보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저히 구원은커녕 지옥 갈 조건 밖에 없는 자에게

 

원인 없는 결과로서

이유 없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참 의미없다 라는 소리를

 

고백케 함으로써

 

안보이는 그 간격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이 간격에 예수님이 충실했다는 것을

 

즉 우리 믿음이 아닌

 

예수님 자신의 믿음이 이 간격(히스테리) 속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14:36, 개역)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15:34, 개역)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나의 원대로 하라는 건지? 아버지의 원대로 하라는 건지?

나를 버렸다고 원망하는 건지? 나의 하나님이 맞다는 건지?

나를 떠나소서 라는 건지? 떠나지 말라는 건지?

 

이 간격 속에서 사건의 보따리로써 하나님나라라는 괴물이

보따리를 풀어해치는 겁니다.

 

우리가 누락시키고 무시했던 십자가라는 심판 사건을 말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ULdC3zkSsE




 

 

 

 

 

 

 

 

 

 

 

 

 

 

 

 

 

 

 

 

 

 

 

 

 

예수님의 실수와 간극(믿음) (17:11-19)


2014/08/09 21:07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예수님의 실수와 간극(믿음) (17:11-19)


무익한 극소차이를 벌리는 희년(은혜의 날)


(17: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지난 시간에 무익한 종이란 하나마나 한 것을 원하는 자 라고 했습니다.


즉 실패로 돌아가자 사도에게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실패해야 시선이 바뀌는 겁니다.

실패가 곧 성령이다는 뜻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다른노선을 보자 라는 겁니다.


그 다른노선인 차이나는 노선이 바로 세미한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자신을 나타낼 때 큰 지진 큰 폭풍 큰 위로에 함께 하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 곧 듣기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한 소리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극소차이 곧 차이나는 간격이라는 겁니다.

실패를 통해서 그 실패 속에서 피어나는 차이성을 발견하는 겁니다.

전혀 다른 노선이 있었다는 겁니다.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큰 지진 큰 폭풍 속에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노선이 바뀌어

전혀 다른 세미한 음성 속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유대인 전체의 사고방식을 사실상 뒤짚어 엎는 겁니다.

마귀가 장악한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사고방식은 바로

큰 지진 큰 폭풍 큰 기적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이고

주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표적인 요나의 표적이라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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