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귀찮게 하는 여자의 후손(예수님) (18: 1- 8)

 

(18:1, 개역)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18:2, 개역)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개역)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개역)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6, 개역)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란 간격에서 나온 징후입니다.

어떤 간격입니까?

 

세 가지 물증을 잡은 그 간격 속에서 나오는 징후입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밧세바 강간 우리아 장군 계획적으로 죽이기 이름 없는 아기 꺽으신 뼈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런 삼 일 이라는 간격을 의도적으로 누락 시킬려고 하는 것을

반드시 강제적으로 포함시킬려는 어리석은 십자가가 바로 히스테리 라는 겁니다.

 

히스테리란 진실을 말한다 라는 겁니다.

즉 어떤 사건의 진실이 신체를 강탈하니까

그 증거 그 징후로써 나오는 증상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나라가 신체를 강탈하니까
비로소 나오는 징후가 바로 주여 인자의 심판이 어디서 발생합니까? 라고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언제 임하느냐처럼 묻는 질문처럼

그 엉터리 질문에

하나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나라가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뭐뭐 아니요 뭐뭐 아니요 라는 방식으로써
그 뭐뭐 아니요 와의 차이성을 곧 간격을 벌리면서

그 아니요인 아닌 것을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니까 때와 장소가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 때와 장소를 거치니까

노아의 때 그리고 장소인 방주

또 롯의 때 그리고 소돔이라는 것을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자꾸 반칙으로 누락 시키고 빼먹고자 하는 사고방식을

곧 단절을 빼먹고

자꾸 단절을 취소하고 개방으로 가능성으로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것과 차이를 두시는 겁니다.

 

즉 심판의 때와 심판의 장소를 빼먹고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서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함을 알수 있냐 말이죠.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괴물로써 작용케 되면

심판의 때인 노아의 때 롯의 때가

과거의 그 때가 아닌 지금 이 때가 되는 것이고

심판의 장소가 노아의 방주가 아니라

롯의 소돔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그 장소가 심판의 장소가 된다는 겁니다.

 

그 심판의 때와 심판의 장소를 원하느냐 말이죠?

그것이 임하기를 원하느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그 심판의 날과 장소에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갑자기 하나님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라는 질문에

동문서답하시듯이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답변을 하시는 겁니다.

 

선문우답인 겁니다.

인간들의 천재적인 질문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지혜의 답변입니다.

 

그리고 우문선답으로 팔을 어긋맞게 바꿔버리시는 겁니다.

쓸모없다고 건축전문가들이 버린 그 돌이

그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을 버린 그 언약이

머릿돌 모퉁이 돌이 되는

십자가의 언약으로써 주춧돌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나를 강탈함으로써

나는 십자가의 징후로써

십자가라는 심판과 저주 곧 인자의 날을 발설하는 증상으로 작용케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를 숙주로 삼았다는 겁니다.

 

감기라는 바이러스가 신체를 장악하면

그 감기의 증상으로써 나오듯이 말입니다.

 

외부로 둘출되는 아주 티를 팍팍내는 나 감기 걸렸어요라고 자수를 하듯이

아무리 숨길려고 해도 숨길수 없는 증상이다는 겁니다.

 

히스테리(십자가라는 불륜)란 그래서 진실을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처녀가 애를 낳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겁니다.

 

말하는 것은 바로 나, 진실입니다 (C'est moi, la verite, qui parle)”

 

오히려 이제는 그 징후를 즐기고 누리고 있는 겁니다.

이게 가능성입니까? 불가능성입니까?

불가능성의 단절을 즐기고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도 변화산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 징후를 즐기고 있습니다.

주여 언제 별세 하십니까? 주여 어디서 별세 하실겁니까?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만난 7천명이요

하나 마나 한 소리 인 세미한 음성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왜 누락 시키느냐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국가 공무원이 있듯이

하늘나라의 공무원이 있는데 부패한 공무원입니다.

 

바로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시람도 무시한다고 전제를 깔아놓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시아버지 유다로 구약의 사건을 떠올립니다.

자신이 지닌 즉 소유한 과거의 육으로부터 온 약속의 혈통 외에는

아무것도 안 믿는

자신이 소유 획득한 구원의 보증 약속을 꽉 쥐고 있습니다.
마치 요나처럼 니느웨백성 빨리 망했뿌라 라고 삼일이 아닌 하루만에 뺑뼁이 도는

그 증상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은 두려워 하지 않는

그래서 당연히 사람도 무시하는 부패한 공무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니느웨 백성까지도 아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무시하는 겁니다.

급성장 시켜서 박넝쿨로 모자로 만드시는 그 박넝쿨도 아끼시는

베드로를 가로막고서 울어야 만 하는 닭의 세 번의 울음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무시하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을 무시하기에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하나님나라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요기에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는

며느리 다말이

 

요나의 표적만 보여줄게 없다는 식으로

 

법을 추구하는 재판관 시아버지 유다에게

시형제 결혼법에 의하면 아들을 주도록 되어 있으니 달라고 합니다.

 

잊을만 하면 찾아와 밤새도록 달라고 시위하고 귀찮게 하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때려죽어도 개같은 이방 여자에게 아들을 줄 수가 없다고 맞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방며느리에게 자식의 허물과 자신의 허물까지

모두다 뒤짚어 씌워서 두고보자 라는 식으로 벼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악하고 나쁜 모습에 더 더 더 나쁜 모습으로

아예 죽을려고 환장한 것을

파 놓은 함정에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성질을 자꾸 끓어 대어서 벼르고 벼르고 벼르고 있는데

알아서 올무에 기어 들어와 주는 것처럼

 

자꾸 자꾸 귀찮게 막내 아들 달라 막내 아들 내놔라 라고

마치 전설의 고향의 남편의 병을 살리고자

무덤에서 죽은 사람 다리를 끊어와 갈려는데

뒤에서 내 다리 내놔라 내 다리 내놔라 라고 외치는

괴물처럼

그것이 인삼 다리였다는 거죠.

 

자꾸 괴물로써 막내 아들 내놔라 약속 지켜라 약속 지켜라 라고

알 수 없는 괴물에 간격 속에서 올라와서 내 다리 내놔라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하니님나라의 징후 곧 히스테리 괴물성입니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귀찮게 합니다.

내 놔라 내 놔라 내 다리 내 놔라 ~~~~

 

한 쪽 발로 깨금발 뛰면서 펄쩍 펄쩍

죽어라고 달려 멀리 도망치면 언제 또 성큼 다가와서

깨금발로 펄쩍 펄쩍 따라오는 겁니다.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내가 하나님도 안 두려워 하고

사람도 무시하는데

도저히 귀찮게 하는 그 괴롭힘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니

그의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 더 이상 안귀찮게 될 것이다 라고

불의한 재판관이 그의 원한을 들어주는 겁니다.

 

즉 이 비유의 내용을

하나님을 귀찮게 하면

실망하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귀찮아서라도 주님은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 라고 설교하는

악마의 영이 씌여서 말하는 목사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실 이런 식은 모든 종교가 다 그런 식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본문은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곧 예수님나라가 우리를 귀찮게 하고

우리는 정작 불의한 공무원처럼

시아버지 유다처럼 약속의 혈통이라는 육만 붙잡고 있을 뿐이지

지금 벌리는 사건이 벌리는 그 간격

그 믿음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무시하기 까지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즉 어떻게 해서든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를 언약을 빼먹을려고 누락시킬려고 발악을 한다는 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는 귀찮게 한다는 겁니다.

성령의 기도가 우리를 귀찮게 해서

왜 누락 시키노

왜 빼 먹노

왜 자꾸 십자가의 간격을 무시해서

개방이라고 사기를 치노

왜 가능성이라고 사기를 치노 라고

예수님 자신의 간절함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의 탄식을

반드시 성령을 포함시키시고자 일하신다는 겁니다.

즉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성령은 충성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만 충성하는데

불의한 것에 의미없는 것에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충성치 않는데

어떻게 바른것에 충성할 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견고하게 밀고나가심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취소시키고자 하는

그 십자가라는 삼일의 간격을 끝까지 개입 시키고자 한다는 의미의

비유이다는 겁니다.

 

문주란 가수의 노래를 거꾸로 하면 복음이 됩니다. ㅋㅋㅋ

 

여자는 남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라는 둥

남자의 징후라는 둥

 

처녀가 애를 낳으니 할 말이 있다는 겁니다.

 

남자는 외부에 돌출이 된 성기로 인해서

몸을 씻어버리면 자신의 죄악을 숨길수가 있습니다.

흔적이 사라져 버리니까

언제든지 죄를 정당화 할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자의 신체는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죄악도 아닌 남의 죄악까지 졸지에 자신의 신체에 흔적으로 남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히스테리로써의 십자가 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 꼬기오 세 번을 들이대십니다.

우리가 빼먹을려고 하는 아니 요나 당사자도 빼먹을려고 했던

삼일이라는 간격을 들이대는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요나도 자발적으로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무시한 닭 울음이

오히려 베드로를 살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히스테리처럼 집요하게 십자가는 우리를 귀찮게 합니다.

 

남자들이 곧 뱀의 후손들이 무시하고자 하는 내용을

반드시 말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되어 있기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겁니다.

 

남자는 그래서 자꾸 모세에게 이혼 증서를 요구하는 겁니다.

자신의 죄악의 흔적을 없애버렸다고 자신만만하기 때문입니다.

 

찾을테면 찾아보라는 겁니다. 그 흔적을 말입니다.

없거든요 맞습니다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그 흔적이 나타나는 겁니다.

 

십자가신학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죄악의 흔적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다시는 죄 죄 죄 카지 말라고 합니다.

 

십자가라는 신학이 더 이상 죄악의 흔적을 떠오르지 못하도록 했기에

이제는 오로지 성화 개방 가능성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놓고 돈과 명예 권력을 소유하고자 발악합니다.

항상 좋은 의미를 말한다는 것은 반대로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뭐 친환경 기업이라는 둥 이런 용어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오히려 뭔가를 더더욱 감춘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가 말을 합니다.

죄악의 흔적을 없애기는커녕

그 흔적을 고스란히 다 담아서 증거물로 잡고 있다는 사실을

그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귀찮게 하는 한 과부로써 등장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까지도 누락 시키고 좋은것만 골라서 믿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래서 사람도 무시하는 그저 7번 용서 했다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한다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하는

그 불의한 공무원 불의한 재판관과 같다는 겁니다.

 

누가 불의한 나를 귀찮게 할까요?

 

나에게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획득했다고

이 물건의 간격 곧 믿음이

이 뱃속 아기의 애 아빠라고 귀찮게 귀찮게 들이대고 있는 것일까요?

 

누가?

기여이 없던 죄까지 만들어가 가면서 [하지도] [있지도] 않은 것을

 

했다고 뒤짚어 씌우고, 있다고 뒤짚어 씌우니까
졸지에 내 손에, 꿈에도 상상못한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손에 덩그라니 쥐여져 있는 겁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는 내 자신의 손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쥑인 그 못과 망치가 내 손에 덩그라니 쥐여져 있는 겁니다.

 

누가 도대체 이 일을 벌린 것이냐 말이죠.

 

바로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왜 예수님의 족보는 더럽냐고 이 설명을 듣고 느닷없이 묻습니다.

맞습니다.

그 더러운 이유로 아무도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오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단절

 

더러워도 너무 더러워

 

즉 상대적으로 나는 깨끗하다는 겁니다.

대조적으로

 

저렇게 까지야 심하지 않다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시아버지 유다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예수님의 더러움이 우리의 더러움보다 몇백배나 몇천배나

깨끗하다는 겁니다.

 

그가 나 보다 옳도다

(38:11, 개역)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38:12, 개역)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깍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38:13, 개역)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38:14, 개역)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38:15, 개역)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38:16, 개역)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 오려느냐

(38:17, 개역)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38:18, 개역)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38:19, 개역)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38:20, 개역)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38:21, 개역)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38:22, 개역)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38:23, 개역)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38:24, 개역)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 내어 불사르라

(38:25, 개역)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38:26, 개역)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38:27, 개역)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나 아니요 예수님이 옳았습니다.

 

무조건

이유없이 말입니다.

 

즉 나는 무조건

이유없이 지옥가야만 하고 무조건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시선이 이미 마귀에게 장악을 당했기 때문에

위선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언제 옵니까

또 지옥간 부자처럼 선지자를 보내주소서

또 베드로처럼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자꾸 좋은 의미의 말로 자신을 감추는 겁니다.

 

사탄이 우리를 이미 장악한 상태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늘 본문으로 그렇게 비유하시듯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 자이다.

 

나는 지금 물증 곧 세 가지 간격을 너희들이 자꾸 누락시키고자 하길래

반드시 포함시키고자 하는데

 

마귀에게 장악을 당하니

그것을 반드시 누락 시키고자

그 간격을 빼버리고자 자꾸 좋은소리만을 외친다는 겁니다.

 

그것이 악마에게 장악당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증 잡고자

꼬끼오 닭 울음 세 번을 넘어보라고 하십니다.

 

도저히 못 넘어서는 겁니다. 불가능성입니다. 단절입니다.


내 손에 때려 죽어도 그런 세 번 부인하는 일

내 손에 못과 망치와 십자가를 쥐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일이

 

그만 벌어졌다는 겁니다.

 

누락 취소 빼먹기는커녕

더더욱 확증이 되어서

부인 못할 정도로 명료하게 확증되어서

히스테리 증상으로 아예 내 안에 자리를 잡아버립니다.

 

이것이 종말의 때요 장소입니다.

 

남자로써 여인에게 음욕을 품어서 남의 아내를 범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

아니 상상 조차도 한 적이 없는데

그런일이 그만 벌어졌다는 겁니다.

아무리 감출려고 감출려고 해도

히스테리가 말을 합니다

사물이 말을 해요

괴물이 말을 해요

내 다리 내 놔라

 

그래서 귀찮게 합니다.

 

실망하는 기색은커녕

더욱더 신나는 냥 마냥 마냥 즐기듯이

귀찮게 합니다.

내 다리 내 놔라

내 피 내 놔라

이 도장 도장끈 지팡이의 주인이 누꼬 라고 자꾸 자꾸 귀찮게 찾아와서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자꾸 귀찮게 찾아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꾸 찾아오는 겁니다.

어딜 벗어날려고

 

벗어날려고 몸부림 치면 칠수록 더더욱 옥죄여 오는 것이 하나님나라라고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히스테리 이거든요. 도통 귀찮게 하는게 아니거든요.

이 세 가지 곧 간격에서 나오는 사물을 누락 시키고 빼먹고

어딜 감히 하나님나라 언제 오냐고 묻냐 말이죠

 

모세가 변화산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기껏 하는 말이

주여 언제 별세 하실겁니까? 어디서 별세 하실겁니까?

별세에 곧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돌아가버립니다.

무슨 엑스트라 찬조출연인지

까메오처럼 나타났다가 참 아무 의미 없다 마이너스 천점처럼

갑자기 그 말 한 마디 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이 세명이 모여서 별세 곧 간격을 벌리고자 그 간격

세 가지 물증을 어떻게 하면 획득하지?

어떻게 포착하지

베드로로부터 세 번의 부정을 어떻게 잡지? 라는

의논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정작 들을 수 없고 깨닫지도 못하고

소외 당한 입장이라서

그 간격을 볼수가 없어서

기껏 종교의 대 영웅을 만났다는 그 자체로 뿅 가서

그 간격을 그 결핍된 소외를 채우는 것들이

초막 셋을 짓겠다는 생각 뿐이지

그 간격을 누릴수가 없는 겁니다.

당신의 간격을 징후를 즐겨라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간격을 마련하시겠다는 겁니다.

곧 죽음 심판 저주를 마련하시겠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겠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게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베드로를 건지는 유일한 단 하나의 방법이다는 겁니다.

 

그가 나보다 옳도다

 

아니 좀 전까지만 해도 나쁜 나 보다 더 더 더 나쁜

귀찮게 하는 며느리였잖습니까?

그래서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이레에 십의 이조를 내는 나 보다

더 더 더 나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해서

더 더 더 나쁜 저 귀찮게 하는 여자를

불태워 죽이라 라고 했는데

 

졸지에 물증 괴물 세가지를 잡히는 바람에

졸지에 실패한 거세가 되어버려서

목소리를 상실 당하게 됩니다.

 

허걱 ~~~

 

아뿔사 그가 나 보다 옳도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인 어리석디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 지혜입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한 참 의미 없다 참 가치없다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쓸모 없어 버려버린 그 돌에

주님은 온 목숨을 걸어서 충성하신 겁니다.

그 불의한 재물에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오히려 불의한 것에 충성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훨씬 나보다 더 옳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무능의 기도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은 우리가 기도하는 옆에서

야가 야가 야가 지금 순 엉터리로 기도합니다 주여

라고 내 기도를 자꾸 초를 치는 겁니다.

무의미 하게 만드는 겁니다.

무능하게 아무 의미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 정도가 심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무익한 종 만들기처럼

귀찮케 초를 칩니다.

 

그리고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리는 구하는게 불가능한데

성령께서는 너희는 못하나 나는 할 수 있다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는 겁니다.

즉 내 안에 추호도 있고도 싶지 않은

그 하나님 나라라는 괴물과 인자의 의를

그 괴물을 내 안에 심겠다는 겁니다.

 

그가 나 보다 옳았다 라고 한 그 옳았다는 것

 

우리는 자꾸 엉뚱한 소유물 즉 가치 있는 것들을 원하는데

그래야 나도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내 안에 내 속에 있으면

나 또한 무가치하게 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것들을 온 동네 방네 떠들고 다니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자의 날이 노아의 때와 방주라는 장소

롯의 때와 소돔이라는 장소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때요 지금 이 장소로 돌변하는 상황임을 직시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기도는 본능상 의미 없는 기도가 없습니다.

반드시 기도는 의미를 담도록 되어 있는데

그 의미로 인해 나 자신이 어떻게든 이유없이 가치있는

쓸모 있는 인간이 되도록한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놀라운 탄식은 그런 나의 기도에 초를 치면서 귀찮게 귀찮게

그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 무의미한 것에 충성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나에게서 그 세 가지 물증을 확보케 해서

획득해서

 

주님의 넘어오심을 보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인간이 주님께 넘어가는게 아니라 말이죠.

 

인간이 주님께 타넘어 갈려는 의도는

자꾸 이 세가지 물증을 빼먹고 갈려는 것이고

주님이 그 세가지 물증을 가지고 넘어 오시겠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막내 아들을 장성케 해서 다말에게로 데려다 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말은 막내 아들 아니요 바로 너야 너

시아버지 유다 너!! 곧 유다에게로 넘어오시겠다는 겁니다.

뭘 가지고?

물증 사물 괴물 세가지를 획득해 가지고 넘어오시겠다는 겁니다.

 

그 간격 속에서 나를 낳겠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난 자는 다 이렇다는 겁니다.

십자가 라는 간격이 나를 낳게 되는 것이지

새롭게 태어나는 새피조물이지

 

세 가지 물증 취소하고 빼먹고 누락시켜서 태어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7장과 8장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순적인 간격만 덩그라니 남아있지

메꾸어 넣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그 빈자리 그대로 남겨 둡니다. 계속적으로 잉여로 반복이 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 없는 결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간격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이 간격 사이에 그 어떤 원인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선지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기를 안고 축복인지 저주인지 도통 모를 소리를 합니다.

 

이 아기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흥함과 패함이 좌우되는 그 중간 간격에 서있는 기준이 된다고

 

왕따당하는 표적이 된다고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고

 

(2:28, 개역)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29, 개역)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2:30, 개역)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2:31, 개역)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2:32, 개역)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2:33, 개역)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2:34, 개역)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2:35, 개역)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축복이냐 저주이냐 라는 것은 축복 받냐 저주 받냐 라는 기준으로

선지자가 예언이라는 것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 반대로 축복을 퍼붓고 저주를 퍼붓는

축복과 저주의 주관자가 된다는 겁니다.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축복의 주인 저주의 주인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방받는 표적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가히 어리석은 표현입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십자가 적인 언어표현 곧 방언입니다. 언어로써 해석이 안됩니다.

 

축복과 저주의 주관자인데

정작 본인 당사자가 비방받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 마나 한 아무 의미 없는

참 의미 없는 소리 아닙니까?

 

보통 예언자는 축복이냐 저주이냐 라고 예언을 하는데

소위 선불교에서 말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손가락에게 따지지 말라는 겁니다.

따지고 싶으면 달에게 가서 따져라 라는 겁니다.

 

손가락은 화살표 이정표처럼 기호처럼 방향만 제시하듯이

기분 나쁘다고 죽여버린다고 해서 화살표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여도 또 다른 손가락이 나타날 뿐인

유령과 같다는 거죠.

 

그런 나쁜 유령과 같은 손가락인데

이제는 아예 나쁜 손가락 보다 더 더 더 나쁜

나쁨의 그 실체 달이 와 버린다면

 

축복과 저주를 만들어 내는 그 실상 곧 믿음 그 자체인

손가락이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닌 달 그 자체가 와 버린다면

안식의 주인 그 자체가 와 버린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안식의 주인을 맞이하고 영접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지켰다는 이유로

안식의 주인을 죽인다는

이 알수 없는 현상

 

성전을 사모했는데 그 성전을 사모한 이유로

성전 그 자체가 되신 주를 삼킨다는

알수 없는 내 속의 병들을 들추어낸다는

그 주관자 당사자 본인이

달 본인이 안식의 주인 본인이

성전 되신 그 본인이

 

비방받는 표적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또 역시나 같은 의미로 마리아의 기도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기능을 알고서는 비로소 기도를 하는데
이것이 태교로 참 좋은 의미일까요? 그렇다고 따라 할수 있는 가능성의 기도입니까?
철저한 무능의 기도 입니다.

아기를 통해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는 겁니다.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켜 달라고 세상에나 전쟁을 천국 전쟁을 벌려 달라고 기도 합니다.

이것이 비천한 자를 돌아보심

억울하게 포로된바 갇힌바 억눌린바를
이 아기가 해결한다는 원수 갚는다는 겁니다.
아기에게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누가 억눌렸고 갇혔고 포로되었단 말입니까?

아무도 아닌데
왜 혼자 오바를 할까요?
성령이 임해서 그런 기도를 하는 겁니다.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원수 갚아 달라고
세상에나 세상에나 내가 왜 이러지????

(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지난 시간에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는다고

본인 인자가 말함으로써

괜히 말해서 본인이 말한 고난을 본인이 유발케 해놓고 본인이 당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그 말을 든는 언제 하나님나라가 임합니까 라고 묻는 바리새인은

 

본인들은 해당사항이 되지 않는구나 예외구나 열외이구나 라고 안심 푹 놓아야 하는데

 

오히려 전혀 무관했던 인자의 고난에

 

바리새인이 철저하게 말려드는 자들로써 배치된다는 겁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이 결과를 무슨 원인으로 밝혀내실겁니까?

그냥 나타난 원인 없는 결과로

즉 히스테리 그 자체로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그가 나 보다 옳았습니다 라고 오히려 남자인 시아버지 유다가

 

히스테리로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그를 싫어했고 미워했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는 나의 허물을 그에게 담당했다고

 

즉 누가 이것을 믿겠냐 말입니다.

아무도 못 믿더라 말이죠

 

믿고 싶어서 안달이 난 오늘날 기독교인들

믿고 싶어 미쳐있는데

 

그들의 믿고자 하는 구석을 요리 조리 다 피해가버리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제발 믿지 마세요 제발 예수님을 믿지 말라 말입니다.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래놓고 내가 제일 싫어해서 죽여 놓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거리낌이 되어야 하는데

더 뻔뻔스럽게 되더라 말이죠.

 

이것이 성령으로 난 사람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고개를 돌려버렸는데

그가 나를 도리어 싸매어주고 고쳐주더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뻔뻔스럽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마귀 보는 앞에서 마귀에게 잡혔는데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 그 세가지 물증이 잡혀서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그 세가지 물증을 보라고 해 놓고서는

예수님이 묻는 겁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지금 예수님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 죄책감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마귀가 조금만 톡 하고 건드리면 가룟유다보다 더 심하게 자살하고도 남을 상황인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베드로야 이 세가지 물증 보이제?

 

봤제?

 

보라카이?

 

자 잘 들으레이?

자 잘 들으세요 어머니!!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면서 눈으로 과잉 제스쳐로 이 세가지 물증을 보라는 겁니다.

 

형사 마귀에게 이 물증이 갔으면 넌 끝났지만

내가 이 세가지 물증 빼돌렸잖아

결제 서류는 나에게 있어 봐? 무시험 합격이야?

보라카이 라고 눈으로 과잉 제스쳐의 신호를 날리는 겁니다.

 

베드로는 어리둥절 죄책감에 고개도 못들고

울기만 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코메디 만화 같은 동작에

! 와카시지? 뭐지? 그에게서 낯선 가족오락관 퀴즈가 보여?

손짖 발짖으로 그 수수께끼 비밀을 맞추라는 겁니다.

눈으로 자꾸 이것을 보라고 신호를 보내며

눈으로 보낸 신호를 따라가 보니

내가 예수님을 부인한 세 가지 물증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있는 겁니다.

 

아 그런데 이것을 보시지 않겠다고 자신의 피로 흰눈보다 더 희게 덮었다는 겁니다.

 

깨오잔 삽게명 두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다 원망한 증거물입니다.

그것을 흘려버리고 잊어버리고 삭제해버려 내버려 둔게 아니라

얼마나 가카는 꼼꼼하신지

그것 하나 하나 모아서 박스 안에

너희 안에 너희 가운데

이 원망들을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다 담아서

그 위에 뚜껑을 덮어서 피를 바르신다는

그 내용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거 하나 하나 안 모았다면

그 흔적들을 안 모았다면

마귀가 다 일일이 추궁할 것인데

밀까부듯이 다 조사해서 말이죠.

예수님이 대신 그것을 흘리지 않고 담아서

그 흔적을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그 간격 속에서 나를 새롭게 잉태해서 묻는 겁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내 양을 치라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아따 주님 입 아플정도로 와카십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지예

참말로 날 귀찮게 하시네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만 맺은 관계

약속으로만

피로만 맺은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이 관계에 마귀는 방해하는 자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고

방해하면 할수록

이 피로 맺어진 관계는 더더욱 견고하다 라는 겁니다.

 

왜 핍박이라는 인자의 심판날을 설정하신 겁니까?

그리고 실망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고 견고케 하시는 오늘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하시는 겁니까?

 

십자가가 주체가 되어 맺어진 관계를 말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남이 아닌 예수님이 나의 허물을 획득해야만

우리는 마귀로부터 벗어납니다.

내가 내 허물을 처리하거나 책임지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뻔뻔스럽게

예수님이 나의 허물을 획득하게 잡았다는 것에

감사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귀 한테 잡혔으면 큰일 날뻔 한 겁니다.

 

그렇게 귀찮게 정말로 정말로 귀찮게 하는 예수님의 나의 허물 획득이

나 속에서 나의 안에서 벌어진 그 사건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써

우리의 허물이 획득 잡힘으로써

 

십자가는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나의 허물을 잡았다고

그 증거가 이거다 라고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십자가는 온 동네 방네 떠들고 다니는데

거리끼고 걸림돌이 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만

 

오히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로써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우리는 물증 잡힌 것에 감사하면서

맞습니다 제가 주님을 죽일려다가 그 물증을 보고

그가 옳았음을 비로소 안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겁니다.

 

여자는 남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






 

 

 

 

 

 

 

 

히스테리 하나님 나라

 

(17:20,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개역)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17:23, 개역)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17:24, 개역) 번개가 하늘 아래 이 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 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17:25, 개역)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17:26, 개역)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17:27, 개역)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17:28, 개역)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17:29, 개역)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17:30, 개역)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17:31, 개역)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17:32, 개역) 롯의 처를 생각하라

(17:33, 개역)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17:3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17:35, 개역)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17:36, 개역) (없음)

(17:37,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이 기가막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천재적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관심사를 대변합니다.

이 천재성이 곧 악마성입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했습니다.(고전 1:22)

이것은 곧 그들의 관심사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최종 관심사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모두 천국을 위한 것들이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고 모든 천재적인 철학자들도 그러한데 그것을 아예 신과 결부시켜버린 것이 바로 바리새인이다는 겁니다.

곧 그들이 펼치고 있는 운동 곧 행함과 연관된 겁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아닌 행함이라는 나쁜 것에, 이 악마적인 것에

그 나쁜 질문에, 그 악마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더 더 더 나쁜 답변을 하십니다. 더 더 더 악마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17:20,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개역)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나라가 시간적인 것도 아니요 시각적인 것도 아니요

공간적인 것도 아닌

 

그럼 도대체 뭐냐 라는 거죠.

 

바로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희 가운데 있다 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내부 공간으로부터의 사물 또는 괴물과 같다 라는 겁니다.

 

너희 가운데 너희 안에 괴물로써의 하나님나라이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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