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심과 갈라서게 하는 간격(극소차이(눅 18: 9-14)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니까

우리 내부의 공간으로부터의 괴물로써 자리잡게 되니까

이런 갈라짐의 현상이 히스테리로 나타나는 겁니다.

 

두 사람이 맷돌 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하나는 버려둠을 말입니다.

십자가에 두 강도 사이에

그 간격의 중간에 예수님이 가운데 있으니까

두 강도 사이에 갈라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너희 가운데 있다 라는 말씀을 듣고

심령천국은 순엉터리라고 하니까

이 두 강도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한 사람은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이 말도 안되는 아무 의미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고 있고

 

다른 한 쪽 강도는 알기는 아냐? 죽는 마당에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해서 뭐하게?

어라 둘이 아주 기가막히는 소리에 맞장구치고 있구나

예수 너는 적어도 저런 헛소리를 받아주면 안되잖아 라고

 

간따나 죽는 판국에 더 열받아 죽게 만드는 그 꼬라지에 씩씩 거리는 겁니다.

 

나빠도 너~~~무 나쁜 당신의 나라 라는 겁니다.

그것도 꼭 중앙 가운데서 더 열받도록 말이죠.

 

지난 시간도 마찬가지

갈라지는 현상으로써 기도라는 겁니다.

기도란 무능함을 원하는 겁니다.

아니 누가 기도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능함이겠지요

무능함을 원하는 것

이것을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종교인들의 기도와는 완전 정반대의 대척점입니다.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기도하실때의 기도내용이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26:39, 개역)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두 기도의 내용은 결국 하나 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겁니다.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늘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없음 이라고 합니다.

없음을 원하는 겁니다.

 

기도란 이 없음을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처럼 무를 원하는게 아닙니다.

없음이란 상대적인 있음의 반대이니

반대를 위한 반대인 셈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척점이라고 했습니다.

간격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불교의 무는 간격 자체도 없는 거죠

이것이 부처와 예수님의 차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는 실천과 교리가 따로 있어서

무 라는 사상이 있어야 하고 즉 교리죠

그 무를 실천하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둘의 결합 곧 동일성이

그들의 무 사상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한다 라는 말은

즉 기도를 해도 아무 것도 아닌 무능을 원한다는 것은

이미 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라는 겁니다.

 

즉 교리 따로 있고 행함의 실천이 따로 있어서 기도를 실천하면

무능함이 된다 라는 성화론이 사실상 유대교요 불교이다는 겁니다.

 

복음은 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느냐 왜 그 무능을 기도하느냐?

실천 개념이 아니라 너가 원래 그렇게 태어났었어 라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 하는 자와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남과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실천하는 자와 기도의 사람으로 이미 태어났음 말하는 겁니다.

 

늘 주장했듯이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치니까

마귀가 항복하더이다 라는 것이

 

실천과 말씀이라는 법의 결합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뚱맞게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창세전에 생명책이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즉 하나 마나 한 소리인 거죠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천사들도 기뻐한다는 겁니다.

죄인이 뭔데 말이죠?

죄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말입니다.

돌아온다 회개한다 라는 교리가 실천화 되었을 때 기뻐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피를 바르는 그 피만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가 의미 없게 만들려고 하는 피 이다는 겁니다.

용서요 십자가요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이미 생명책이 기록이 되었기에

지금 마귀를 항복시키는 그 실천은 기쁨 축에 끼이질 못한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미 아버지의 뜻이 나의 뜻 보다 먼저 선취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 라는 존재 보다 기능 즉 존재 가 있기도 전에 있는 기능이 먼저이다는 겁니다.

이 기능이 하나 마나 한 소리로만 들리는 것이 존재의 시선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도는 곧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말은

성령의 시선에서는 존재 보다 기도 라는 기능이 먼저 있기에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이 먼저 기능으로 있었지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 라는 존재가 먼저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 사건 바로 이전의 내용이

베드로 라는 존재 보다 닭의 울음의 기능이

베드로 너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 닭의 울음 기능이 무능입니다.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너를 생명책에 기록케 했다는 겁니다.

평상시 무시했던 닭이였는데

닭이 나를 건질줄이야?????????

그러니 제발 기도 하지 마세요

물론 저는 기도 라는 본능이 이미 있기에 제발 하지 말라고 뜯어 말려가면서 말해도

안 할 인간이 없습니다. 본능입니다.

 

제발 기도 하지 마시고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누리세요

그 사람은 자기의 기도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그 장소와 시간에

성령의 탄식

닭의 울음에만 관심을 둔다는 겁니다.

어차피 내 기도는 엉터리입니다.

하나 마나 합니다.

그런데 나 보다 더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취급받는

내가 무시하는 기도가 있다는 겁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입니다. 그 기도를 듣는 자가 바로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입니다.

 

닭의 세 번 울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 이다는 겁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리라는 말씀 플러스 실천이 아닌 거죠

모든 종교는 사기입니다.

 

복음은 신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성도 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됩시다가 아니라

이미 성도임을 아니 누리고는 못배긴다는 겁니다.

 

주의 자녀임을 누릴 수밖에 없는 자 이다는 겁니다.

 

성도가 됩시다 주의 자녀가 됩시다 라는 것을 실천하는 자는 반드시

주의 자녀임을 누리는 자를 반드시 무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극소차이라는 간극입니다.

 

성령의 탄식의 내용은 바로 이런 일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있는데

극소차이는 어떻게 벌어지는가

즉 미미할 정도의 차이로 보이는 조그마한 비일락 말락한 아주 미세한 틈새

간격 차이가 나중에는 극과 극의 초극대의 간격으로

즉 아브라함이 지옥간 부자에게 누누이 말한 너와 나 사이의 간극 좀 보라고 한 그 간격이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아주 미세한 차이였는데

죽어보니 그 간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는 자가 바로 히스테리 증상을 말하는

진실을 말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기도하기를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그 반대로 히스테리 증상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자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고개도 못 들고 성전 저 끝에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세리는 말합니다.

 

히스테리 증상입니다.

 

반대로 지키는 자는 교리와 실천력을 합쳐야 하기에

그 성과를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이겼다는 겁니다. 저 세리를 이기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겁니다.

복수심이지요

지옥간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아무리 그 극대의 간격 대척점을 말해도

부자의 눈에는 안 보이고 무시하는 이유는

그저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에게 졌다는 것 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두 사람 중 바리새인은 이겼다고 외치고

지옥간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보고 졌다고 외치는

이 두 양상이 사실상 결국은 복수심이였다는 겁니다.

 

행함이란 그런 의미에서 복수심입니다.

이겨도 져도 그 결핍성을 내가 내 손으로 내 숙제로 메우어 놓으리라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리라 라는 것이 원한 한풀이 복수심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 복수심입니다.

교회에서 충성 봉사 심지어 기도하기도 다 복수심입니다.

 

그런데 이미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기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이 기도의 사람으로 이미 태어난 자는

 

이미 그 자체로써

 

예수님이 예수쟁이가 될 필요가 없듯이 그 자체입니다.

즉 성도는 죄인이 될 필요가 없이 이미 그 자체로 죄인입니다.

 

어떤 무식한 자는 죄인 되기를 또 실천하겠다는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닙니다.

막살자 라고 하니까 막살기를 또 지킬려는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니듯 말입니다.

막 살자 라는 말은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표현입니다.

 

즉 제대로 사신 분을 만났기 때문에 그 분 앞에서 난 뭘 해도 막살아왔었고 막살 뿐이고 막살 수밖에 없는 자 라는 것을

 

제대로 사신 분을 만났기에 그 간격을 직시했다는 겁니다.

 

모세 보세요 구약에는 도망쳤는데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바로 왕 앞에 나아갔다고 합니다.

모세가 기록한게 아닙니다. 성령이 그렇게 기록한 겁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셈이 되는 기록입니다.

왜 이렇게 모순 되게 기록합니까? 왜 성경 스스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행함을 의도적으로 의식하시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이 간격을 좁힐 수가 없고

오히려 그 간격이 더더더 간격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실수 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백번 만번 지옥에 가도 마땅한 모세인데

예수님의 실수로 믿음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모세가 그 간격을 봐 버린 겁니다.

모세는 그 간격을 비로소 누립니다. 좁힐려고 하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자신의 모순된 행위 밖에 안 나왔던 것을

성경 말씀이 기록해 주신 것에 감사할 뿐인거죠.

 

지옥 갈 자인데 천국에 믿음으로 갔다.

?

몰라?

원인 없는 결과 라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산에 모세가 나타나 딱 한 마디만 하는 겁니다.

주님의 별세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가버리는 겁니다.

 

이 죽으심이 간격입니다. 주여 빨리 주어주시옵소서 라는 겁니다.

그래야 간격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믿음이 쏟아진다는 겁니다.

자기가 믿어서 믿음이 생기는 줄 알았는데

주님의 죽으심으로써

메시아 됨의 실패로써

실수로써

삑사리로써

그만 믿음이 쏟아져서

졸지에 떨어진 믿음을 모세가 받아 챙겼을 뿐이다는 겁니다.

 

문둥병자 10명의 비유가 그런 의미로 이야기 했습니다.

 

일부러 더 더 더 원수 같은 사마리아 문동병자 딱 한 사람만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9명은 부처가 부처쟁이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구원의 문으로 간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원수 중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 구원의 문에 갈 필요가 없이

실천하고 행할 필요가 없이

 

그냥 구원 그 자체가 되신 예수님을 만나버렸습니다.

주님의 찾아오심을 그 자체로 누렸을 뿐입니다.

 

교회갈 필요가 없이 예수님을 만나버렸다는 겁니다.

 

교회 다니기 할 필요가 없이

신랑 되신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신부가 되어버린 운명을 누려버렸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누가 신부냐? 성전 속의 두 사람 중

 

누가 신부냐 라는 겁니다.

 

누가 나의 사랑하는 자녀 탕자냐 라는 겁니다.

 

꼭 맏아들 같은 자가 성전을 꽉 채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극소차이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취급받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만이 나의 사랑하는 자녀 탕자이고

탕자만이 긍휼을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무것도 아닌 자를 원하고

탕자도 아무것도 아닌 긍휼을 바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세미한 음성, 칠천명, 770의 용서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꽉 채우고자 하는 바리새인 또는 유대인 9명 문둥병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게 아니라

7번 용서에 몇 번 더 용서 할까요?를 원하고 있고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호색하지 않고 등등의 막살지 않음을 자꾸 들이대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고 있는데

그런 배설물 똥 덩 어 리 쓰레기 냄새나는 것을 자꾸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들이대는 겁니다.

 

썩은 것을 말이죠.

 

기도하기라는 썩은 것을 바치고

말이죠.

 

교리말씀 플러스 행함 실천을 바치겠다는 겁니다.

 

좀처럼 주님이 주신 것 주님이 실수로 흘린 것 그것 내어놓아 봐라 라고 하니

유구무언입니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당장 물러가라 저 구덩이에서 이를 갈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오늘도 교리를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고 그 실천으로 소속된 조직에서 성도 또는 믿는자로 인정해 줄게 라는 것을 자기들 멋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막살면서 자신들은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고 교리를 지킨 것을 그 증거로 내세웁니다.

바로 오늘 본문 바리새인처럼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기도하고 회개하고 호색하지 않고 성경 몆장 읽었고

 

이것이 바로 주의 자녀가 아닌 증거이다는 겁니다.

 

주의 자녀는 주의 자녀됨을 인정받아야 할 그 증거물을 내 놓을게 없는 자입니다.

그냥 주의 자녀 그 자체 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녀 라고 해놓고서는 아빠 이름도 모릅니다.

 

주의 이름을 모르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바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아빠 라고 불러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왜 아빠인지를 그 원인을 알아서 찾아서 아빠라고 부른게 아닙니다.

더더욱 이방인인 한국인인 우리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아빠로 그냥 아빠 그 자체로 생겨 버린 겁니다.

마치 고아에게 고엘이

과부에게 남편이

떠돌이 객에게 임금이

아무 이유도 없이 원인 없이

 

졸지에 생겨버린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였는데 고아에서 아들이 되어버렸고

과부에서 남편이 생겨 아내가 되어버렸고

떠돌이 객에게 임금이 졸지에 생겨 백성이 되어버린 겁니다.

 

즉 아버지 남편 임금 그 자체가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계속 유지하더라 라는 겁니다.

 

철저한 무능을 원하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간격 지금은 극소차이이지만 이것이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간격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못때 빠졌는지 이 간격을 기여이 벌리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모조리 이 아무것도 아닌 보이지도 않는 간격을 자꾸 자꾹 벌리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지는 현상으로 저 쪽과 이 쪽이 나누어져서

그 사이의 간격을 주인공 또는 주체로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비유 백날 들따 봐도 그 간격이 보이질 않으니

우리는 그저 비유 속에서 교리를 뽑아내어서 실천하고자 하는 동일성 합일성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마약에만 빠져 있다는 겁니다.

믿음은 정작 그것만 크게 보여주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간격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낙심치 말고 구하라라는 내용으로 증거하시는 겁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인 거죠.

바로 예수님 본인이 낙심치 않고 반드시 귀찮게 해서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겁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이것을 반드시 나에게서 획득하겠다는 겁니다.

?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귀찮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침략 당하는 자일 뿐이고

예수님은 우리를 침략하는 천국으로써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겁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획득하겠다. 반드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을 획득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야 마귀가 항복하더이다에서 빼내어서 청세전 생명책 기록을 기뻐하니까 말이죠

기쁨은 여기 행함에 있지 않고 저기 믿음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간격이 침입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침략하시는 겁니다.

 

유다가 기껏 교리 플러스 실천으로 마귀가 항복하더이다.

베드로가 기껏 7번 용서 했습니다, 몇 번 더 용서할까요?에 빠져 있는

그 마귀에게 장악당함에서 빼내시는 방법은 오로지

 

오로지 요나의 표적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획득하겠다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심 밖에 없습니다.

남 용서 는 커녕 너는 나를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꺼다 라는 것으로

베드로를 빼내시는 겁니다.

주체가 마귀에서 예수님으로 바뀌는 방식은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다말처럼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심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불의함에 충성하시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너무 너무 아무것도 아닌 우리이기에 기대 하지를 않는 겁니다.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의 간격을 벌리는 것은

믿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간격을 사아버지 유다가 비로소 보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술술 믿겨지는지 그 다음 부터는 아예 쌍둥이가 태어나서 그 간격을 일부러 보여주는 겁니다. 믿음이 이런 사건들을 벌렸다는 겁니다.

 

(38:20, 개역)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38:21, 개역)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38:22, 개역)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38:23, 개역)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38:24, 개역)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 내어 불사르라

(38:25, 개역)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38:26, 개역)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38:27, 개역)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38:28, 개역)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38:29, 개역)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8:30, 개역)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아니 이게 뭔데 자꾸 구하시는 것일까요?

이게 뭔데 자꾸 획득할려고 달려드는 것일까요?

부끄러움일 뿐인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부끄러운 허물일 뿐인 것을

반드시 이 허물을 획득하겠다는 겁니다.

귀찮게 해서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누락시킨 것

곧 우리의 하나님의 원수됨을 반드시 획득하겠다는 겁니다.

원망한 3가지 증거물을 반드시 언약궤에 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위에 피 뿌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성전 안의 두 사람 중 누가 이 허물을 잡혔느냐 말이죠.

긍휼히 여겨 달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닌데

왜 자꾸 용서를 구하냐 말이죠?

그가 옳다 라고

나는 무조건 틀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개를 못 드는데

 

다른 한 사람은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호색하지도 않았고 강도짖도 안했고

저런 매국노 세리 와 같지 않음을 너무 너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의미있는 것 가치 있는 것 잔뜩 모아다가 주님께 들이대는 겁니다.

 

허물을 잡힌게 없으니까 ~~~

 

즉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서는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획득하는데 실패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리는 여전히 살아있고 또 실천력을 계속해서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맏아들의 하소연이 바로 그겁니다. 아버지 말씀 단 한번이라도 어긴적 있냐 말입니다. 아부지~~~~

 

그런데 탕자는 허물을 잡혀 버렸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사형깜입니다.

그런데 안 죽이십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사랑을 용서를 말하고자 하는 기가막힌 도구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의 피를 누구에게 바르냐로 결정하시는 겁니다.

이 피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에게는 필요가 없는데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만 발리는 겁니다.

오히려 그 피는 자신의 용서라는 기능을 자랑하기 위하여

반드시 의미있는 막살지 않고 호색하지 않고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이라는 말씀지키기 기도 지키기 십의 이조로 말씀을 남들 보다 더 꼽배기로 지키기 한 자에게 피가 발려야 하는데

정작 피는 그런 자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니 건강한 자에게 무슨 의사가 필요합니까?

의사는 오로지 병든 환자에게만 자신의 의술을 과시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요것을 기능적인 간격이라고 제 마음대로 표현한 겁니다.

기능 때문에 간격으로써 만남이 주선이 된다는 겁니다.

존재가 아닌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으로써 간격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구원자로 보일려면

먼저 그 간격이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즉 환자로써 말입니다. 죄인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니 세리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제발 날 좀 고쳐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죄 죄 죄 그만 카라 라는 겁니다.

? 교리말씀을 지킬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주님이 힘 줘서 이제 생겼다는 겁니다.

전형적인 성화론자들의 주장 아닙니까?

 

죄인 죄인 그만 카고

마이너스 100!! 참 의미 없다

의미 없는 것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것 그만 카고

 

의미 있는 의인의 삶

막살지 않는 삶을 살자 라는 겁니다.

제발 좀 삐딱하고 부정적이지 않게 죄인 좀 그만카라 라는 겁니다.

이제 구원받았으니 구원받은자로써의 의인의 삶을

구원 이후의 삶으로 살자 라는 겁니다.

 

사실 성경 전체는 이 두 주장의 간격 뿐입니다.

행함이냐 믿음이냐?

 

오늘 본문도 그런 취지입니다.

 

물과 기름과 같이 팽팽합니다.

아니 반드시 팽팽해야 합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아직까지 이 문제는 해결 할 수 없는

마치 좌우의 영원한 대립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도 제발 이 두 세력의 간격을 절대로 좁히지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이 두 대립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문제는 행함만 있는 곳 물론 그들이 말하는 믿음은 결국 행함이기에

행함이 있는 곳에는 절대로 이런 사건으로 갈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교회는 수시로 이 문제로 사건이 터져야 합니다.

늘 수시로 말이죠.

 

교회 전체가 행함 쪽에 다 넘어가도 말입니다.

어차피 성전이란 이 갈라짐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예배 지키기 주일성수하기 충성봉사하기 그 딴거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회는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의 간격만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은 지옥간 부자처럼 그 중간의 간격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닦달네어서 교인을 자꾸 행하도록 해서

친구 목사인지 누구인지 그 교회를 이겨야 하는 복수김에 불타 올라서

이기느냐 지느냐 라는 복수심만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지

 

믿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간격이 비이질 않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간격을 말합니다. 간격 곧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그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입니다. 천국에서의 말도 못할 지옥과의 간격입니다.

 

죄인과 의인의 간격은 결국 위에서의 천국과 지옥의 간격을 보여주는 겁니다.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간격입니다.

 

그래서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주님 쪽에서 준비한 것이 있다는데

 

이것을 또 엉터리로 의인 안부르고 죄인 부른다고 하니까

일부러 죄인이라는 조건을 자기 쪽에서 만들려고 하는 정신병자들이 있습니다.

 

저 보고 골프 치는 죄를 지을 줄 모른다는 겁니다.

우와 두 손 두발 들었습니다.

완전 미친놈입니다.

 

죄라는 조건 조차도 내 쪽에서 만들어 낼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란 새로운 개념이지

인간이 무슨 수로 죄를 만들어 냅니까?

 

교인들 전부 골프 치면 죄인 되겠네?

교회는 전부를 죄인 되게 하는게 목적이 아니라

이미 성전이라는 교회 속에서 죄인과 의인의 간격을 홀 구멍을 만드는 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바리새인 쪽이 수시로 생겨서 갈라져도 또 수시로 생기고 또 갈라지고 하는 현상이 사건으로써 무한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 자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무능함이지

교회 자체가 교인들 다 골프쳐서 죄인이 되어버리면 졸지에 이건 또 부처쟁이가 되는 거죠.

 

그 자체로써의 신부는 아니다는 겁니다.

 

골프를 쳐서 실천하여 죄인이 됨으로써 신부가 아닌 가정부로 만드는 교회조직일 뿐인 거죠.

 

 

즉 피와 결부된 의미로써의 죄입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죄가 아니라

내가 피와 결부시키고자 만드는 죄가 아니라

즉 예수님이 지금 준비한 피를 기준으로 하는 겁니다.

그것 무시하고 자기 쪽에서

피와 무관하게 죄를 준비하겠다는 심뽀는

역시나 바리새인처럼 구원의 조건을 갖추겠다는 것와 무엇이 다를까요?

 

하여튼 주님이 그런 자를 통해서 또 지옥 백성 만들려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아이고 이것도 말하면 안되는데 눈치 챌 텐데

그러나 절대 그가 맡은 일을 절대로 못 포기 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죄인이 말하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죄인을 위해 피 흘리신 분이 말하는 죄 만이 죄입니다.

 

나는 환자입니다 라고 내가 아무리 아파도 내가 판명하는게 아닙니다.

의사가 왜 있나요?

환자로 판명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의사가 할 숙제이지

내가 나를 환자로 백날 만들어 보세요

군의관이 꾀병 이라고 판명하면 아주 건강한 놈이다 라는 것이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이 말하는 의와 죄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와 죄와는 정 반대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차 그러면 바리새인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와 죄로 수정하면 되겠네?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이 또 바로 바꿔버립니다.

 

어디까지나 주체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 말은 우리는 늘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랑만이 움직이는게 아니라

죄도 의도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이 반칙을 못하도록 인간들은 교리를 만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고정화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어쩔수 없다는 겁니다.

 

웃끼고 있는 거죠.

 

교리를 교회를 위해 세운다는 명분이 이런식입니다. 사실상 악마죠

 

사랑을 교리화 하겠데 ~~~~~~

사랑을 문서화 하겠데 ~~~~~~

정작 사랑은 그 의문의 문서를 찢어버렸는데 ~~~~
다시 문서화 하겠데 ~~~~

법화 하겠데 ~~~~~

 

십자가를 교리화 하겠데 ~~~~~

 

교황이 인기 끌고 있는데 카톨릭이 다 이런 사상입니다.

다른 종교는 두 말 할 것도 없구요

그냥 속내는 돈 내놔라 라는 겁니다.

자기도 천국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도록 하는

그저 삥 뜯는 기술만 습득한 겁니다.

든든하게 교리를 세우면 이상하게 돈이 되요 돈 돼!!

그 고도의 기술의 핵심적인 최면술적 용어는 바로 하나님 이라는 단어입니다.

 

온갖 것에 하나님 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무조건 돈이 됩니다.

희한하죠 돈 되니까 박수무당이 또 마술사가 사도행전에 나오죠 나도 그 주문 좀 알려 달라

얼마면 되니 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면 돼????

 

기술로 보는 겁니다. 습득 가능한 지식으로 보는 겁니다.

교리는 지식이요 기술 맞지요

그러나 사랑은 습득이 아닌

관계성입니다.

 

의사가 안 찾아오면 허빵입니다.

그리고 의사는 도장 도장끈 지팡이 오로지 이 불의한 재물 곧 허물만 획득할 뿐입니다.

교리 지킨 것 획득 안합니다. 7번 용서, 기도지키기,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이런 것 획득 안합니다.

 

지금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 합니다 라고 한 이유가

돈이 들어 왔다는 겁니다. 입금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의 이조를 드리지 안그러면 십의 이조를 드릴 턱이 있겠습니까?

일종이 과시죠 과시

육의 자랑

나 이렇게 하나님이라는 용어로 돈 많이 생겼다는 겁니다.

 

참 잘 되었죠 그래야 지옥 가는 거죠.

주님이 지옥 보내는 방법입니다.

끝까지 간격을 못 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일부러 고침을 받을까봐 주님은 두려워 벌벌 떠신다고 했습니다.

못 보도록 막았는데 실수로 봐 버리면 안되니까 말이죠.

 

그러나 세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즉 긍휼입니다.

자신도 아무것도 아니요

바리새인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 긍휼을

 

정작 세리는 오로지 그 긍휼만을 원하고 원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죠.

건강한 자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세리는 원하는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 필요 없는 의사를

의사의 기능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고쳐 주세요 제발 고쳐주세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발 긍휼히 여겨주세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개같은 이방인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꽁꼬물

찌르레기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 부스레기를 원합니다. 그 잉여를 원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심을 원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안 될려면

바리새인처럼 남을 용서 하면 됩니다.

절대로 막살지 않으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안되고

의미가 있게 되는 7번 용서가 되고 8번 용서가 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7천명 남겨 놨다 라는 붕 뜨는 소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미한 음성입니다.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생명책이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는 붕뜨는 소리가 되는 겁니다.

 

아니 귀신이 내가 외친 주 예수 이름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소리로 귀신이 항복하는 것이 기쁘지

 

무슨 붕뜨는 뚱딴지 같은 창세전의 기록을 기뻐하라니 그것이 과연 와 닿느냐 말이죠?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 하나 마나 한 봉창 두들기는 소리이지

 

실질적인 현실적 이야기를 해야지 원 ~~~~

 

자기가 한 일에 대한 가치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한 일과 전혀 무관한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생명책 기록됨

나와 전혀 무관한 세미한 음성

나만 남았나이다가 내가 했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이기 때문에 의미있는데

내가 한 것이 전혀 티도 안나는 7천명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붕뜨는 소리인 겁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얼마나 붕뜨는 소리입니까?

지가 뭔데 한게 뭐가 있다고 그런 뻔뻔스러운 요청을 하느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긍휼을 바란다는 것은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겁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의 죄인인데

 

죄인이니까 가치있고 의미가 있다고

나는 죽은자 이니까 가치있다는 겁니다.

아니 죽은자가 되었다면 가치가 없어야지

오히려 죽은자라고 외치니 더더더 인기끌고 가치가 있게 되니

 

캬 주님의 기가막힌 일하심으로

절대로 자기공로 행적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시는 방법입니다.

 

유익한 종이라고 우기니

이건 뭐 말씀을 거꾸로 잡샷냐 말이죠.

 

예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니까

나 라는 신체가 두 갈래로 갈려져서

그 사이 간격에서 전혀 생뚱맞은 진실을 말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결국 주님이 심은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고아에게 갑자기 그 간격 속에서 아버지가 뿅하고 나타나고

7번 까지 장가들어 한 여인은 결국 과부가 되었는데 그 간격 속에서 진짜 신랑이 뿅하고 나타났고

(20:27, 개역)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0:28, 개역)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29, 개역)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러니까 부활이 없다 라는 겁니다. 부활을 존재의 가능성으로 본 겁니다. 그러니 그 존재가 부활이 되어서 여전히 가치가 있을려면 7명의 남자가 있는 여자가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천재적인 발상 아닙니까? 그런데 부활은 그런 존재를 부활하기 위한게 아닙니다. 결국 기존의 모든 부활 사상이 다 깨어지는 겁니다.

부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더더욱 증폭 확장 시키는 잉여 개념입니다. 즉 실패함으로써 여전히 잉여로 남김으로써 무한반복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가 오해 했도다 천국에는 남자 여자 시집 장가 그 딴거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꾸로 묻습니다. 다윗이라는 조상이 왜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느냐 라는 겁니다.

유구무언입니다. 부활이란 이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가치없고 의미없는 무능 곧 잉여를 더더욱 증폭 시키는 것이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 곧 아무도 원치 않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증폭 확장 무한반복케 하는 것이 부활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이제 끝났으니 부활만 성취하면 된다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십자가를 취소 시켜버리고자 하는

십자가의 결과만 딸랑 챙기고 이제는 부활만 챙기면 된다는 그 무시당하는 십자가를

더더욱 증폭 증가 무한반복의 잉여로써 계속적으로 발생케 하는 것이 부활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겁니다. 부활이 교리면 입으로 답을 할껀데

부활이 교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은 간격을 더더욱 벌리는 식인 겁니다.

십자가라는 3일이라는 간격을 더더욱 증폭적으로 확대적으로 갈라버리는 겁니다.

다윗이라는 조상이 어떻게 후손인 자에게 주여 라고 하느냐 말이죠.

순서상도 엉터리가 되고 윤리적으로도 엉터리가 되니까

그 얼터리 불의함에 충성할수 있느냐 말이죠?

그가 나 보다 옳도다 라고 할 수 있느냐 말이죠.

불의한데?

불의한게 부활이 되면 되느냐 말이죠?

그러니 사두개인이 얼마나 천재적입니까?

불의한데 부활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불의하니까 부활이 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불의하든 의롭든 나의 존재를 천국에까지 연장시키는 것이면 의롭다라고만 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간격은 사두개인 바리새인은 역시나 못 보는 겁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교리 플러스 실천행함 뿐입니다.

불가능한 실천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는 겁니다.

의롭기 때문에 비록 어려워도 실천가능한 것만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활이 있으면 규율위반이요 이율배반 이성의 간지가 되어버린다는 거죠.

그런데 당사자 다윗은 주께서 내 주께 라는 그 두 주가 이 간격에 충성한 것을 그만 봐버렸습니다. 그 간격에서 다윗의 자손인 주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주체가 말이죠.

다윗이 비록 조상이여도 그 다윗의 자손이 주께서 내 주께 라는 그 간격 사이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하는 겁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백날 말해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소리만 하는 것을 오히려 과거의 몇천년 전의 다윗이 고백하는 겁니다.

다윗 본인이 그 간격 중간에 낑여봤기 때문에 그 히스테리 증상으로써 표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 내가 주께만 범죄했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용서하셨다는 겁니다. 참으로 뻔뻔스럽지요. 이 버전이 오늘 본문 세리가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확장 확대 되는 겁니다.)

 

신랑 만들어 낼려고 과부가 한 행위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

자기자신은 어디까지나 주체가 아닌 오히려 그 주체의 대상물이기에

그 주체의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히스테리일 뿐이다는 겁니다.

떠돌이 객에게 그것도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에게 이런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주 곧 임금이 졸지에 그 간격 속에서 뿅하고 나타났다는 겁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두 패로 갈라져서

9명의 이스라엘 문둥병자와 1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로 갈라져서

그 사이 간격에서 주님이 심은 것이 표출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는 겁니다.

 

증상으로써 사마리아인은 외치는 겁니다. 히스테리로 말입니다.

의사가 나를 환자로 판명했습니다. 나는 무조건 환자입니다.

 

나 환자 라는 환자를 외치는게 아니라

그 말은 의사를 외치는 것 아닙니까?

즉 자동적으로 자기부인을 지킬 필요가 없이 저절로 자기부인 저절로 회개를 저절로 의식하지 않고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골프 치면 죄인 된다고 하니

 

이것은 주님이 의사입니다 라는 주장이 아니라

 

의사도 필요 없는 여전히 자신은 건강한 자다 왜? 조건 갖추었다는 주장인 겁니다.

 

아무리 눈치 줘도 이미 장악 당해 버렸기에

오히려 잘 됐다 싶었지요.

삼 세 번 눈치 주고 치웠죠 뭐.

 

그래놓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마치 예수님 본인이 다 해놓고서는

일부러 믿음을 실수로 떨어뜨려 놓고서는

사마리아인이 했다고 공로를 넘겨주시는 겁니다.

만화 형사 가제트가 하나도 사건을 해결하는 것 없이

그저 일만 다 망쳐놓고서는

자기 조카와 멍멍이가 다 해결해 놓고서는 그 공로는 넙쭉 뻔뻔스럽게 받는겁니다.

 

조카와 멍멍이가 공로를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즉 너는 환자 맞구나 내가 널 찾았다.

환자 찾기가 모래에 진주 찾기넹 ~~~~

 

이것을 상실한 거세

마치 천국에 간 거지나사로처럼 자기목소리를 상실한 채

아브라함이 다 알아서

하이카가 다 알아서 일괄처리하는 겁니다.

형사 가제트는 조카와 멍멍이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가제트는 숟가락만 얻었을 뿐입니다.

 

그 공로를 다시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은 주님께 돌리는 겁니다.

이것이 문서화 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법으로 규정 되지 않는 관계라고 합니다.

빈 터 라고 합니다.

빈 터를 맥우어서 그 공백을 가득채워 버리면 법으로 규정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빈터는 법이 설 자리가 없도록 미끄러져 버립니다.

그러니 항상 잉여적입니다. 즉 아무것도 아닌 무능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이러석은 지혜로써 미련함으로써 증거되는 걸림돌

거리끼게 하는 숭고함 즉 거룩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뻔뻔스럽게 주님이 다 혼자 처리하신 일에 숟가락만 얻을 뿐입니다.

 

그래서 긍휼만을 바라는 겁니다.

주님이 다 이루었기에 아무것도 한 것이 말입니다.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자꾸 피를 누락 시키고 십자가(간격)를 빼먹을려고 하고

세가지 간격을 무시하니까

아니 아예 안 보이니까

 

그 빈자리에 자꾸 자신이 한 일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막살지 않았다는 증거물을 자꾸 빈자리에 채워 넣는 겁니다.

의미 있다고

가치가 있으니 받아 달라고 바치겠다는 겁니다.

 

빈자리란

즉 간격이란

너는 뭘 해도 의미 없다

참 의미 없다

 

마이너스 천 점 땡 탈락 깜이다.

 

770번 용서 받아야 할 판국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건방지게 십자가를 무시하고

긍휼을 무시하고

세가지 간격을 무시하고

 

자꾸 7번까지 용서했는데 몇 번 더 할까요를 의미를 두겠다는 발상 자체가

마귀에게 잠식 당한 상태라는 겁니다.

 

너는 골프 못 치니까 죄인 아니고

나는 골프 치니까 죄인 맞다는 여기는 자체가

빈자리를 거꾸로 채웠다고 우기는 겁니다.

 

빈자리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 것이죠.

십자가를 무시해놓고서 십자가를 증거하겠다고 지금 자기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증거해야할 대상물로 삼았을까요?

십자가는 인간이 증거하는게 아닙니다.

인간의 대상물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십자가가 인간을 못 박는 겁니다.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내가 십자가라는 수술 도구로 나를 고치는게 아닙니다. 난 의사가 아닙니다.

남도 못 고치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를 환자 삼아서 수술하는 겁니다.

암덩어리 찢어내고 온 전신을 수술하는 겁니다.

 

나는 그저 십자가가 나를 때려 눕힌 그 수술대에서

으악 윽 퍽 허걱 이라고 외마디로

목소리를 상실당한채로

 

십자가가 나를 건드린 티를 내는 외마디만 외칠 뿐입니다.

 

누가 누구를 고쳐요? 의사는 예수님 뿐인데

평생 수술대에서 못 벗어날 뿐인데

 

그러니 그 반대입니다. 십자가 스스로가 증거하도록

나를 그냥 제발 냅뚜세요

 

자기 학대를 해서라도 응답을 받겠다는 심뽀가 바알제사 아닙니까?

 

아니 누구 마음대로 응답을 줍니까?

 

그러니 이단을 가려내는 이단척결자로 나서고

바른 신학을 정립하겠다고 나서고

온갖 일을 벌리는 겁니다.

 

아니 그거 해서 뭐하게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

이겨보겠다는 겁니다.

 

아니 이겨서 뭐하게요?

 

바리새인이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막살지 않았다는 것

호색하지 않고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은 것

다 결국은 복수심에 의한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겨보겠다는 겁니다.

 

이미 지옥에 간 부자 조차도 안포기 합니다. 천국간 거지 나사로를 이겨보겠다는 복수심만 불태우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간 티를 팍팍 내는 거죠.

 

이미 이 땅에서도 이런 갈라짐이 벌어지는 겁니다.

지옥에서 땡기는 자는 지옥 간 부자처럼 지옥의 사고방식의 티를 팍팍내고

구자 지옥에 안 가도 이 땅에서도 마땅히 지옥 간 티를 내는 겁니다.

 

반대로 거지나사로는 자기 목소리 상실 당한채로 아브라함이 다 알아서 처리하는 겁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자로만 취급 받을 뿐입니다. 천국 가도 말입니다.

천국이 땡기는 자는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연기해도 안 통합니다.

 

문제는 양쪽의 모습이 아닌 간격 이 둘 사이의 간격이 움직이면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갈라놓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바닥에 선이 끄어져 있는 겁니다.

 

서로 서로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화평을 준 줄로 아느냐 검을 주러 왔다.

친한 가족 형제자매 친구 그 사이 사이에 금을 그어서 분쟁케 하러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일에만 의미 두시겠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간격에만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12:52, 개역)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12:53, 개역)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12:54, 개역)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12:55, 개역)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12:56, 개역)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12:57, 개역)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12:58, 개역)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 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12:59, 개역)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얼마나 천재적인 인간들 아닙니까? 화평을 구하고

화평케 하고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캬 이 질문에 인간의 모든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얼마나 천재적입니까?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 얼마나 바르게 살겠다는 다짐 아닙니까?

 

난 반드시 승리하리라 이기리라 라고 말하는 이유인 겁니다.

 

 

그런데 세리는

그런데 사마리아인은(이스라엘의 원수)

 

그저 긍휼만을 바라는 겁니다.

 

즉 자신이 개 맞기에

원수 맞기에

그저 개도 주님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로만 먹고 산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에서 요나로부터 정죄받아 마땅한

개같은 이방 지옥 백성 니느웨 백성 맞기에

회개를 하는 겁니다.

 

오로지 긍휼만을 바라고 말입니다.

 

즉 주님이 아끼신바 되니까

 

요나가 삐져서 자살시위를 하는 겁니다.

 

바로 요런 상황

인간의 이런 내부 속에서의 괴물

 

니느웨백성의 배치

요나의 배치

박넝쿨의 배치

등등이 모조리 다 십자가 라는 불의한 재물

곧 내부 공간으로부터의 괴물로만 작용이 되지

이것이 간격이요 이것이 믿음이지

 

인간의 믿음 곧 믿음으로 포장된 행함은

쭐꾸덕 미끄러져 지는 겁니다.

 

여기에 어느 인간의 그 어떤 인간의 의로움도 가미가 되어 증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들통나는 겁니다. 의로움이 가미가 되기는커녕

바로 그것이 한꺼플 벗겨보니 하나님의 원수 다움이였다는 겁니다.

복수심이요 원한이요 이겨보겠다는 한풀이였던 겁니다.

그러니 들통나서 긍휼만을 바라는 회개를 해야 할 판국인데

 

어딜 자기 의로움을 들이댈 건더기가 어디 있냐 라는 겁니다.

 

지금 갈라져서 영원히 그 간격을 못 볼 정도로 큰 구렁이 큰 홀이 중간에 벌어질 판국인데

지금 당장의 극소차이로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가

한번 끝까지 붙어봐?

그 큰 구멍이 안보이니까 헛소리 허망한 것 우상에 빠지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라는 겁니다.

이겨서 뭐하게?

원수 갚아서 뭐하게?

이단척결자 돼서 뭐하게?

 

정작 그런 이단척결자 바울에게 나타나 그 간격에 예수님을 귀찮을 정도로 충성하신다는 겁니다.

 

누구십니까?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이단 예수다.

 

제발 이단 중의 이단이 됩시다. ㅋㅋㅋㅋ

 

지금 바리새인이 세리를 펀치로 때려서 이겨가고 있다고 좋아라 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얻어터져서 땅에 엎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 눈에 갑자기 땅이 갈라지는 지진의 전조를 봐 버렸습니다.

금이 지그재그로 갈라져서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쭈우욱 갈라져 금이 갑니다.

세미한 음성을 봐 버렸습니다.

 

그럼 세리는 이 권투 시합에서 이길수 있도록 주여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왜 일까요?

 

성전은 마치 성전 바닥에 두 갈래로 지진의 전조 현상인 갈라지는 그 간격을 보는 장소입니다.

 

그것을 누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자는 지금 성전 안에서 남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안나옵니다.

오히려 지금 벌벌 떱니다.

지구가 두 패로 갈라지는 경계선의 금을 봐버렸습니다.

땅이 꺼질 것이며 땅이 갈라져서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죽을 것이며

땅은 마치 지옥처럼 그들을 삼겨버릴 것입니다.

그 큰 것을 봐 버리면

지금 권투 시합은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나중에 제자들은 제대로 질문합니다.

주여 심판의 날 인자의 날 그 지진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주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나는 법이다 라고

 

간격을 봐버리니까 당연히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하나 마나한 내용이고

반대로 바리새인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라는 엉터리 질문입니다.

그 엉터리 질문이

제자들은 다리 사이로 금을 봐 버리니가

제대로 질문이 바뀌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권투 시합에서 이기고 있는 바리새인은 그 갈라지는 금이

전조현상으로써 나타나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지금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항복하는 것이 더 크게 보여 기쁘지

땅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안 보이고 무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그만 예수님의 실수로 봐버렸습니다.

봐버린 이상 이 사람은 개인적인 것은 다 날라가 버리고

비개인이 되고 비인간이 되어서

그 땅의 지진의 대사관처럼 메신져가 되는 겁니다.

땅이 갈라진다 라는 것만 외치듯이 말입니다.

그는 오히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외치는 국가 공무원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국가 그 자체를 대변할 뿐입니다.

손가락 백날 짤라도 소용없습니다. 달은 안 사라지거든요.

 

예수님 자체가 달로써 이 땅에 아예 임해버렸습니다.

그저 죽었구나 복창할 판국 뿐입니다.

 

그 증상으로써 세리가 먼저 외치는 겁니다.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국가 공무원 대사관으로써 외치는 겁니다.

 

오히려 그 말을 들은 바리새인은 더더더 무시하는 겁니다.

저런 세리처럼 안 되게 해 주신 것을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참 신비롭죠 이렇게 지혜롭게 가르시다니!!!!!

 

마찬가지로 주님의 심판을 봐 버렸기 때문에

주님의 긍휼만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주님

 

이것이 천재와 사도와의 차이입니다.

 

아니 지금 바리새인에게 얻어터져서 바리새인에게 빌어야 하고

살살 때리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그만 때리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바리새인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 금이 갈라지는 세미한 극소 금을 보고서

비일락 말락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금

건축가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

그 돌맹이 하나 나타났을 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보였을 뿐인데

 

오바를 하면서 주여 살려주세요 라고만 외치는 겁니다. 간격을 그만 봐버린 겁니다.

 

개인 구원을 바라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증상이다는 겁니다.

 

지진의 증상이다는 겁니다. 지진의 전조현상의 징후가 그만 세리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심판의 영이 임하니까

히스테리 증상으로

진실만을 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가르시는 겁니다.

 

간격은 곧 예수님의 실수인 믿음은

주체로써

믿음은 이 둘을 갈라버리는 겁니다.

 

지옥간 부자와 거지나사로 비유라는 지옥과 천국의 간격 버전이

고대로 지상에 내려오면 오늘 본문 버전이 되는 겁니다.

지상에 있는 성전에 두 사람이 있는데

천국 거지나사로와 지옥 부자 이야기의 버전이

지상에서는 고대로 하늘에서 내려와서

세리와 바리새인의 버전으로 증거되는 겁니다.

수 천년 전 아벨과 가인의 제사사건이 2천년 후에 성전의 두 사람 세리와 바리새인 버전으로 증거 됩니다.
지금 또 그 이후 2천년 후 오늘날 우리에게도 한발짝도 벗어남이 없이 수시로 터지는 사건으로써
이 말씀은 증거되고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어떤 자살한 목사처럼 거지 나사로 되자 라는 뻔한 해석으로 사기칠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역시나 교리 플러스 행함실천입니다. 부처쟁이가 되자는 식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거지 나사로가 될 필요가 없이 그 자체입니다.

성도는 거지 나사로가 되어야 한다가 될 필요가 없이 이미 성도는 거지나사로입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거지 나사로 됩시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기죠. 불교죠.

이것이 천재와 사도의 차이요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의 차이입니다.

 

그냥 거지 나사로는 그 간격 속에서 태어났을 뿐입니다.
무익할 뿐이요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그저 중간에 낑긴 목에 탁 걸려서 들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 뱉어지지 않는

그 자체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자체 입니다. 잉여 찌그래기 부스러기 무능 잔여물 그 자체 말입니다.
무익한 종일 뿐인 그 자체입니다. 무익함 그 자체.

복음이 벌린 사건라는 이 간격 속에서 믿음으로 인해 거지나사로가 그 자체로써 발생하는 겁니다.

 

보일락 말락 한 금이간 그 사이에서, 그 틈새에서 ...

 

 

 

 

 

 

 

 

 

정말로 귀찮게 하는 여자의 후손(예수님) (18: 1- 8)

 

(18:1, 개역)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18:2, 개역)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개역)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개역)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6, 개역)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란 간격에서 나온 징후입니다.

어떤 간격입니까?

 

세 가지 물증을 잡은 그 간격 속에서 나오는 징후입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밧세바 강간 우리아 장군 계획적으로 죽이기 이름 없는 아기 꺽으신 뼈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런 삼 일 이라는 간격을 의도적으로 누락 시킬려고 하는 것을

반드시 강제적으로 포함시킬려는 어리석은 십자가가 바로 히스테리 라는 겁니다.

 

히스테리란 진실을 말한다 라는 겁니다.

즉 어떤 사건의 진실이 신체를 강탈하니까

그 증거 그 징후로써 나오는 증상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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