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나라 (18:15-17)

 

(18:15,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8:16, 개역)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 아이는 무능한 기능으로써 하나님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앞에서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라고 질문이

나중에는 인자의 심판 날이 어디서 임하느냐 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바리새인의 하나님 나라는 간격을 누락 시킵니다.

그 간격은 철저한 무능이라고 했습니다.

세미한 음성

즉 하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무능으로써의 간격이다는 겁니다. 간극

 

즉 상대적인 인간들의 하나님나라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자신의 능력으로써의 간격벌리기로 저 세리와의 비교간극인 겁니다.

 

그래서 무 라는 개념이 [무능] [없음] 이라는 개념이 불교의 [무] 개념과 다르다는 겁니다.

 

무는 그 자체인데

불교의 무는 교리가 되고

실천이 되어하는 입장에 놓인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성경말씀을 말씀이 따로 있고 그에 따른 실천이 따로 있어서

그것을 합치는 것이 불교 즉 최고의 종교의 인간이 만들어낸 의미입니다.

즉 불교가 인간 자체를 배제하는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곧 인간 개입이다는 겁니다.
무는 그 자체로써 인간 배제인데
불교의 무는 인간이 개입해서 실천해야할 인간숙제가 되는 겁니다.
니체 계열이 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주님 쪽에서 들이대시는 무능은

바로 그런 교리로써의 무 교리로써의 하나님나라와의 간격이 되는 겁니다.

즉 반대를 위한 반대인 것입니다.

 

인간이 내미는 것 족족 무조건 이유없이 반대이다는 겁니다.
인간 개입의 반대인 인간 누락입니다.

 

그리고서는 그 반대의 이유를

심판을 거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심판이라는 죽음이 뭐냐?
심판 속에서 즉 그 간극 속에서 인간을 보니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 곧 인자이다는 겁니다.

 

대신 죽으심으로써 오는 긍휼이다는 겁니다.

결국 어린아이란 오로지 긍휼로써만 존재하는 비존재로써의 존재 초과잉적 존재이다는 겁니다.

긍휼의 증상으로서의 발생하는 비존재(초과잉존재)

나타나는 존재가 어린아이이다는 겁니다. 결국 존재 보다 앞선 당위라는 기능으로서의 무능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결국 심판 날에서만 나타나는 아주 낯선 존재는 어린아이 뿐이다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유일한 것이 바로 긍휼이고 그 긍휼만을 원하는 자는 어린아이 뿐이다는 겁니다.

즉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자는 긍휼을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심판 속에서의 시선이 없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성령의 시선이 덮쳐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도 없고
심판도 없기에 긍휼을 원치 않고
그래서 질문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는 질문이 되는 겁니다.

천재적입니다. 그 하나님나라를 위한 실천을 발휘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는 바리새인입니다. 실천을 발휘하기 위한 만반의 자세가 넘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으로 인한 인자의 날 심판의 날에 대해 듣고서는
그 질문이 바뀌어서
제자들은 어디서 그 인자의 날이 심판의 날이 어디에 임합니까? 라고 바뀌게 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고 하십니다.

상가집에 가라 죽음을 통해서 다른 시선 낯선 시선을 본다는 겁니다.

(전 7:1, 공동) 『명예가 값진 기름보다 좋고,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좋다.』

(전 7:2, 공동)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다. 산 사람은 모름지기 죽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전 7:3, 공동) 『웃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잡힌다.』

(전 7:4, 공동)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 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치 집에 있다.』

(전 7:5, 공동) 『어리석은 사람에게 찬양을 받는 것보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이 좋다.』

어린아이의 무능이 전혀 다른 시선을 곧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는 겁니다.
극소차이 라는 바닥에 금이 간 전조현상을 말입니다. 세미한 음성이요 7천명의 남은자 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너희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라는 간격 속에서 무능이 나옵니다.

무능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결국 심판의 날에서 예수님은 그 가운데에 뛰어들어서

그 심판 속의 간격에서 긍휼을 받는

오로지 불쌍히 여겨주심 밖에 안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린아이와 같은 자만이 그 긍휼을 받아서 나온다는 겁니다.

즉 만져주심만으로만 살수 있는 어린아이 입니다.
돌아봐주심으로만 살수 있는 성령받은자 말입니다.

성령을 인간이 소유하는게 아니라.
성령이 인간을 소유하는 그 정도로 [돌아봐 주심] [만져주심] 만이 긍휼만이 그 간격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이 어린아이를 무시한 겁니다.

어린아이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내세우는 겁니다.

이런것 이런것 획득 했다는 겁니다. 그 성취감으로써 저 세리와 비교하여 승리했다는 겁니다.
이겼다는 겁니다. 복수심이지요.

무능한 자에게는 복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을 이기느냐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엘라야가 갈멜산에서 승리했을때
반드시 그 승리의 원천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상기시키는 겁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승리는 커녕, 귀신이 항복하더이다 라는 기쁨은 커녕
철저한 실패를 누려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리고서는 철저한 무능 곧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그 긍휼 곧 세미한 음성
무능한 하나 마나한, 아무것도 아닌 그 7천명이라는 죽음 속에서만 피어나는 새로운 개념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승리 했을때 그 근원자리로 승리가 어디서왔는지를 봐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엘리야선지자를 섬기는 모습입니다.
심판 속에서만 남겨진 7천명이지
심판이 없는 곳에서는 7천명이 남겨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란 심판 속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 간격 속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인 겁니다.
긍휼 = 곧 못난이 중에 못난이. 죄인 중의 괴수, 무능 중에 무능한
인간이 아닌 비인간, 실패한 인간, 미숙아, 아직 인간이 되기에는 한참 멀고도 먼,
실패적 인간, 잉여 인간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그 자체 이다는 겁니다.

 

반대로 비인간이 아닌 인간은 교리 플러스 실천 이라는 이유로 무능의 긍휼을 원치 않은 겁니다.

당연하죠

교리 플러스 실천이기에

십의 이조 드린 실천을 말해야만 하고

막살지 않은 증거를 말해야만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한 것을 말해야만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다 가짜인 이유가

역시나 바리새인과 같은 이런 것들을 강요하고 그런 것들을 내어놓는데 정신팔려 있습니다.

아니 절대로 못 벗어나도록 하는 겁니다.

 

성령 곧 행함의 반대인 성령이 임해야만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행함으로써 어린아이와 같이 될려고 한다면 이미 물 건너간 겁니다.

 

어린아이란 불가능성입니다.

 

무능 무능 하니까

마치 무능을 실천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많은데

무능 자체가 가능성이 아니라 단절입니다.

 

무능 그냥 그 자체입니다.

오로지 땅바닥에 지진의 전조

심판의 전조인 바닥의 금이 간 그 극소차이가 본 자

아니 보임을 당한다. 그 극소차이가 덮쳐진자에게는

예수님을 1년 믿었던 10년 믿었던, 100년 믿었던,

심지어 아예 믿지 않았던 무관하게 원인 없는 결과로

이유 없니 덮치면 저절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겁니다.

 

된다고 하니 자꾸 용어가 가능성의 의미로 들리는데 그 반대입니다.

안된다는 말입니다. 단절의 단절입니다.

 

오죽하면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 밤 중에 몰래 찾아와 어떻게 하면 구원 받냐라고 하니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니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면 되냐?

자꾸 되냐 라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안된다는 뜻인데 말입니다.

즉 언어학을 제가 잘 모릅니다만

상대방이 방금 쓴 용어를 되받아서 표현했다는 겁니다.

 

아 그럼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면 되네?

그 된다는 가능성의 표현 행함의 표현을

되받아서 그래? 과연 될까? 될수 있다고 여기고 있구나?

 

오히려 예수님의 표현이 하나 마나 한 표현이 되는 겁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고 하니

인간의 용어를 쓰더라도 가능성 외에는 없습니다.

언어 자체가 불가능성의 용어를 말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용어 표현은 가능의 용어를 되받아서

그 용어를 다시 되받아 치는데

가능성으로 왔던 용어가 졸지에 불가능성이 되니까

 

모든 성령의 말씀은 하나 마나 한

참 의미 없다

즉 나에게는 육에게는 전혀 의미 없는 말만 골라서 적혀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명 성화론자 목사들을 보면은

은근슬쩍 능구렁이같이 그 용어들을 어떻게 해서든 가능성의 용어로 만들어 버리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가 생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도의 소굴이 탄생케 되는 거죠.

강도의 소굴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이죠.

 

우와 이 뻔한 사기 스토리 아닙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무능한 교회가 우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교회를 인간의 손으로 떡 하니 세워 버리니까

이 무능함이 다 사라져 버리고

곧 행함만이 채워지는 겁니다.

그러니 강도의 소굴이 될 수 밖에요

 

바리새인처럼 그 소굴을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막살지 않음 등등을 가득 채우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무능함 곧 상대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인 무능함이

그런 소굴을 깨 버리겠다고 하니

 

바리새인이 안 죽이고 배기겠나요?

 

당연히 죽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을 보이는

그 심판성 저주성을 보여주는 너희 가운데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침략해 있다는 겁니다.

 

무능이 있음 보다 더 초과잉적으로 자리잡아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심판의 날을 이 인자의 날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인자의 날이 없는 하나님나라 흉내가 되어버린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증상으로써 인자의 날도 없고

두 패로 갈라져 하나는 데려감을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그 간극이 벌어지는 사건이 없는 교회로써

그저 행함만이 가득차 버린 교회로써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즉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없다는 겁니다.

긍휼만 바라고 긍휼만 얻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긍휼은 무시하고

오로지 행함만이 가득차 버린 장소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가짜들이 깔려야 그 속에서 간격으로 갈라짐이 벌어지는 겁니다.

 

주님은 그래서 죽으러 오신 겁니다.

이 무능에

이 간격에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 긍휼에

이 불의한 재물에만 충성하신 겁니다.

 

히든싱어를 지금 보고 있는데

주님을 누가 누가 더 많이 닮았고

누가 더 모창을 잘하고

누가 더 주님처럼 살고

누가 더 주님처럼 실천하는가로

 

주인공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가능성이지만

 

주님 쪽에서 다가오시는 긍휼은

바로 이것을 모든 인간들이 무시하는 의미인데요

주님 쪽에서 다가오시는 긍휼은

1초도 주님을 닮은 적도 없고

모창은커녕 음치고

에수님의 얼굴과는 아예 정반대의 얼굴이고

예수님의 행동과는 단 하나도 일치하는 것도 없고

예수님의 믿음과도 단 하나도 맞는 것이 없는

 

그런 자가 바로 예수님 쪽에서 찾아온 어린아이와 같은 자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포기하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될려고 하지 말아라 라는 겁니다.

 

누가봐도 손님은 취했어요 ~~~~

어린아이 되기 안됩니다. 불가능한 어린아이 되기입니다.

술 먹고 종교마약 먹고 어린아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해요

심령천국으로 사기치고 사기 당했듯이

심령아이 마음은 어린아이로 사기치고 사기 당하는

그 뻔한 거짓말에 다 속아 넘어가는 것 보다

정말 정말 주님이 참 제대로 일 잘하심을 느낍니다.

 

무능을 흉내낼려고 해요 세상에나

 

마치 사랑을 법으로 규정하고 문서화 할려는 짖과 같잖아요

용서가

긍휼이

피가

십자가가

요나의 표적이

교리가 되던가요?

 

교리로 만들어서 재미본 사기꾼들이 한 둘이가 아니죠.

 

그렇게 속고도

그렇게 뜯기고도

평생 밭풀떼기 앵벌이로 살아도 몰라요 몰라

그야말로 어두운 눈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심판을 전제로 하고

어두운 눈인 소경임을 전제로 하고 눈뜨게 한다고 하니

 

소경임을 아는 자만이 예수님이 의미가 있지

본다고 하는 자에게 무슨 예수님이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는 곧 성령이 임해서 자신의 무능을 직시하게 된 자입니다.

성령이 임해서 비로소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되었다는

성화론자들과 정반대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비로소 불가능서이요 단절임을 보게 된 겁니다.

 

그런데 우찌 성령이 임하면 개방이 된다고 하는지?

 

이것이 물과 기름의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오신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이다는 겁니다.

개방이라는 화평?

검이라는 칼 이라는 불화를 주러 왔다는 겁니다.

 

이것을 종교장사할려면 부정적인 용어를 쓰면 안되기에

불화를 주러 왔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반대의 용어를 또 찾아내는 거죠.

 

이게 무슨 믿음입니까?

 

다 장난 치는 거죠.

 

바리새인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완벽한교리로 예수님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 만큼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 실천 해 봤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 플러스 실천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 , 말씀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을 실천해서 다 이루신게 아니라

스스로 말씀 이시기에 다 이루신 겁니다.

이룰 필요도 없이 이루심을 누리신 겁니다.

 

다 이루었다.

 

이 용어를 자꾸 행함으로 보고 있는 차이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즉 행함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따라하겠다고

몇 년전 필리핀의 천주교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는 페스티발 축제를 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 놓고 치료받으러 병원에 가면

그게 무슨 따라한 겁니까?

그게 페스티발이 됩니까?

고난 주간이라는 종교용어로 종교행사를 펼쳐서

부활 주간 직전에 벌리던 행사 얼마전 까지 벌렸잖아요

 

그것도 혐오스럽다고 취소하게 된 이유겠죠

 

다 이루었다는 실천할려고 하지 마세요 제발

 

오늘날 목사들과 반대되는 표현을 제가 하겠습니다.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다 행함입니다.

믿음 아닙니다.

 

믿음이면 그 간격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믿는다고 말하는자 치고

간격을 보는자 단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땅에 금이 가서 자기 혼자만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국가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이 심판을 봐버렸구나?

 

이런 전조현상의 증상 즉 히스테리를 외치는 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믿는다고 자꾸 사기치지 말자 말이죠

 

자 이래 되면 빈 공백이 텅 비어 있으니

미치는 겁니다.

그 빈터를 볼때마다 뭔가를 자꾸 채울려고 환장하는 겁니다.

 

채워 넣어야 불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무서워 사망의 종 노릇하듯이

불안 때문에 예수님을 믿겠다는 둥

말씀을 실천하겠다는 둥 설치는 겁니다.

 

히스테리인 여성성이 예수님이라는 감기를 찾겠다는 겁니다.

우울증 때문에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서

 

이것이 종교 곧 불교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 곧 유대교죠

오늘날 교회 곧 기독교도 다 이렇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히스테리가 예수님을 찾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히스테리를 발생케 하는 겁니다.

 

여성성으로 표현했는데 무능하니까 말이죠.

 

여전히 말귀를 못알아 먹기에

더 더 더 나쁜

더 더 더 단절의 단절이 된 의미인

어린아이로 표현하면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찾아내는게 아니라

 

에수님이 어린아이라는 무능한 자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양같은 자로 발생케 하시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무슨 수로 예수님을 찾아냅니까?

어른도 못 찾아내는 예수님을?

 

100프로 어린아이는 미아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길을 잃어버려도 결국 찾아내는 능력을 이미 갖춘 겁니다.

 

그러니 독자적이고 인간적입니다.

 

어린아이는 여성 보다

여성 도 비인간적인데 즉 히스테리인데

그 여성 보다 더 더 더 비인간적인 존재가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지극이 무능할 뿐입니다.

 

어린아이는 인간이 아니무이다 ~~~~~~

 

비인간이무이다.

 

하나님나라의 증상이 어린아이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저들의 것이다는 겁니다.

 

감기는 콧물을 흘리는 증상인 자의 것이다는 겁니다.

콧물 흘리는 어린아이라는 증상이 감기라는 하나님나라를 소유했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용어를 빨아들여서 되받아 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좌우로 나누어지고 두 패로 남게 되는 배경이 되는 구조가 되죠

그런 입장에서 콧물 흘리는 어린아이는 감기가 그들을 장악했기에 증상으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숙주이다는 거죠.

 

그러니 누가 행하겠다고 누가 실천하겠다고 우깁니까?

 

종교꾼들은 절대로 포기 안합니다.

악령이 씌였기 때문입니다.

 

천재들이 다 이런 식입니다.

 

행함과 실천으로 인해 하면 할수록 분절이 되어서

교리와 실천에 관한 내용들이 더 더 더 많이 기록이 되고

노하우가 되고 마일리지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괜히 하나님께 감사한게 아닙니다.

되더라 말이죠.

안해서 그렇지 하면 되더라 말이죠.

 

바리새인만 그렇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화론자들이 하는 말과 다 똑같습니다.

안해서 그렇지 되더라 말이죠.

하면 된다 말이죠.

안해서 단절이지 하면 개방이 되더라 말이죠.

가능성이 되더라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되받아치시는 방식이

저들이 행하는 것 다 하시고서 단절 시켜 버리니까

 

이것이 그만 가짜로 판명이 되는 겁니다.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라는 좋은 예가

안식의 주인이 안식을 지키는 자들과 충돌 하는 겁니다.

안식일 안 지키는 자는 안식의 주인과 하등 충돌이 발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드시 안식일 지키는 자가

채플린 따라 하기 대회에 참석한 자만이

진짜 채플린과 경쟁하고 떨어뜨리는 겁니다.

 

채플린 흉내 낼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자는 충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지요.

안식의 주인이 다 이룬 것을 그냥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받아 먹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죠.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럼 이 무능 곧 어린아이와 같은 이 무능은 어디서 오냐 말이죠.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긍휼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앞과 뒤가 모순된 간격 속에서 왔다는 겁니다.

 

일도 안했는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것이 불의한데

 

의롭다 라고 한, 의롭다고 하시는 믿음에서 왔다는 겁니다.

 

? 그 믿음이 불의한 자의 허물을 획득해서

그 세가지 물증을 획득해서

증거궤 언약궤 법궤 라는 약속의 박스에

인자의 신체라는 박스에 담아서

허물을 일체 보시지 않겠다고 피 흘려서

주홍같은 죄를

진홍같은 붉은 죄를

흰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하겠다는 겁니다.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어떻게 검은색이 붉은색이

하얗게 희게 될까요?

 

그 간격이 생길까요?

믿음 곧 우리의 믿음은 때려죽어도 못 만드는데

그 모순의 간격을 예수님의 믿음은 만들어내더라 라는 겁니다.

 

우리의 히스테리는 가짜 자궁

곧 육만 임신하고 육만 잉태하여 육만 낳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진짜 자궁은

영만 임신하고 영의 사람만 잉태하고 영을 낳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존재의 간격을 벌리겠다는 겁니다.

 

땅에서는 극소차이였는데

이스마엘이나 이삭이나 같은 인간인데

그것도 쌍둥이 에서와 야곱은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이들이 존재하는게 아니라

같았던 극소차이의 두 인간이

 

하나는 데려감을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천국과 지옥의 간격을 말하는

천국의 증상으로써 야곱이고

 

지옥의 증상으로써 에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천국의 숙주요

지옥의 숙주인 거죠.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 되었다는 겁니다.

 

사랑의 숙주요 진노의 숙주이다는 겁니다.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20년전만 해도 예정론을 가지고 교회가 유지가 되었습니다.

그 교리 만으로도 장사가 되더라 말이죠.

 

시대가 흐르고 그것도 많이도 아니고 20년 밖에 흐르지 않아도

세상이 급변하게 빠르게 지나다 보니

예정론으로는 도저히 장사가 되지 않고

도리어 빼앗기는 교인을 지켜낼수 있는 방법으로써의 교리도 되지가 않는겁니다.

 

이미 교회라는 건물 세우기는 한계가 있으니 교인들 구미에 맞는

오락성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로 교인 빼앗기 교인 지켜내기가

오늘날의 교회의 화두가 된 겁니다.

 

성경공부도 그런 구실 속에서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특정 교단 특정 교파가 이단이 아니라

 

교회에 덕이 안 되는 자는 모조리 다 이단이 되는 셈입니다.

교회에 돈이 안되는 자도 이단입니다.

 

저의 친구 중에 장애인이 있는데 헌금을 내지 못하니까

교회에서 쫏겨나다 싶이 됐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사랑으로 장애인을 더더욱 따뜻하게 대하자 라고 나왔는데

장애인 핑계되면서 돈이 안나오는데

어떻게 장애인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줄 수 있으냐 라고 하니

듣는 장애인이 그 심뽀를 간파 한 겁니다.

돈을 뜯을려는데 왜 장애인 운운하냐 말이죠.

 

그러니 돈이 안되면 다 이단입니다.

돈 되면 안식x인이였든 뭐뭐 안산x 하나x의 교회가 되었던

신천x이였던 돈 되면 다 받아줍니다.

 

그들조차도 돈 안되는 가난뱅이이면 두 말 할 것도 없구요.

 

교회에서는 식충이만 걸러내면 되는 겁니다.

 

아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절대 그렇지 않다 라고 하는데

가난한 교회도 부자 교회되면 다 그렇게 됩니다.

원래 있는 사람이 더 한 법 이다는 겁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는 법처럼 말입니다.

 

제가 말하는 취지는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 중심이 아니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세요

돈 중심 뿐입니다.

돈이 중심이다는 겁니다. 돈이 이단을 규정하는 겁니다.

안 그런 사람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돈을 괜히 주님께서 세상의 주인으로 만든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을 갇히도록 한 겁니다. 가두기 위함입니다.

 

그런 단절성 그런 심판성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 속에서

 

바닥에 금이 가니까

그 간격 속에서 낯선 어린아이라는 무능한 존재가 태어나는 겁니다.

 

돈을 초월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돈을 너무 너무 사랑하고 돈을 좋아하찌만서도

돈 없는 자를 이단으로 규정해 놓고서도(사도바울이 사울 적에 그랬지요)

 

그랬던 그가 이 간격 속에서 태어나니까

돈을 역시나 또 초월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본인이 돈이 너무 너무 많아도 도리어 이단으로 규정당하는

이단 중의 이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단이 안되었가 아니라

또는 갑자기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개털되어 빈털터리가 되니

이단이 되어버렸다가 아니라

 

이단 중의 이단

뭘해도 이단

돈이 없어도 이단 왜? 세상이나 교회에서나 어디를 가도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이기에 독수리를 몰고 오니까 말이죠.

이단시 취급되니까

돈이 없어도 이단

 

돈이 억수로 많아도 역시나 이단

? 바리새인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이단과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데 거리두기를 상실당해 버렸으니

 

실패한 거세

거리 벌리기를 행할 수 없도록 팔 다리 다 짤려버린

그것을 거지 나사로 곧 목소리를 상실 당한자 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아브라함이 다 대변하는 겁니다.

목소리가 없으니 말이죠.

 

오히려 지옥간 부자가 더 주장을 잘 합니다.

목소리가 나와요 세상에 ~~~

얼마나 믿음이 충만한지 선지자를 보내달래요 ~~~~

목소리가 있으니

 

거지나사로는 졸지에 천국에 가도 없음

 

이단 중의 이단 일 뿐임

 

이단에게도 왕따 당하고

이단 아니다고 정통파에서도 왕따 당하는

 

중간에 낑긴 존재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야말로 헬라인에게서도 어리석다 미련하다 그러니 이단 왕따 마이너스 천점

유대인에게서도 거리낀다 불쾌하다 그러니 이단 왕따 마이너스 천점

 

이 참 의미 없다에 충성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 라는 겁니다.

 

목에 탁 걸려서 삼켜지지도 않고

내 뱉어지지도 않는

중간에 낑겨버린 그런 존재

 

이단 중의 이단

 

이런 존재가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 이다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안 받아주고

교회에서도 안 받아주는

 

이게 진짜 하나님나라의 증상 징후로써의 어린아이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어린아이를 내어쫏는 겁니다.

그 행동이 반드시 나와주고

그 상대적인 의미로써 어린아이를 예수님께서 주장하시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하나님나라 확장 운동을 하는 어른에게는 가치 없습니다.

물론 교육을 시켜서 어른이 되면 그 때 가치가 된다고 미리 교육시킨다고 하겠지요.

 

바로 그것이 내어쫏는 지금 당장은 필요없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가치가 있으니가? 미리 교육시키는

잠재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어린아이를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바로 그런 어른들의 하나님나라를 치고자

거부하시고자

저들의 하나님나라 따라하기 대회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라는

강도의 소굴을 엎어버리고자

 

나중에 어른이 되는 어린아이가 아닌

 

지금 이 순간 하나님나라의 징후 그 자체로써

하나님 나라를 배울 필요도 없고

교육 받을 필요도 없고

그냥 하나님 나라가 덮쳤기 때문에 무능한 그 자체로써 증상인 어린아이를 가지고서

 

어른들의 하나님나라를 깨버리는 겁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숨겨진바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직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나는 하나님나라이다는 겁니다.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10:13,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0:14,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숨겨져서 안보이는 겁니다.

어 그런데 실수로 보이게 된 자들이 발생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금이간 극소차이의 틈새의 간극이 발생했기에 그 증상으로 나타는 겁니다.

 

즉 바로 심판입니다. 땅의 지진 땅의 심판날의 갈라짐 말입니다.

 

어린아이란 만져주지 않으면 죽는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만져주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겁니다.

그래서 눈을 늘 마주치며 끊임없이 바라보면 만져주고 끊임없이 제공해 주지 않으면

죽어버립니다.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죽음이 전제로 깔려 있다는 겁니다.

독자적이면 죽은 겁니다.

 

그래서 만져 줘야만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차단합니다.

 

단절을 엉뚱한데 쓰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만져주면 죽은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막았다는 것은

어린아이를 자신들처럼 독자적인 존재로 보는 겁니다.

죽은존재 죽은자로 못 보는 겁니다.

 

간격을 끊임없이 말하는 존재로 안보이는 겁니다.

목소리를 상실한 거지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이 모두다 대변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 안 보고

 

지옥에 간 부자처럼 독자적인 존재로 본 겁니다.

 

즉 비인간으로 안 보고, 인간으로 봤다는 겁니다.

 

시므온 선지자가 아기 에수님을 보고서는

하늘나라에서 파견되어 나온 두패로 가르는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고

 

아기 한테 무슨 그리 심한 말을 하는 예언을 말하느냐 말이죠

 

인간으로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간격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사이 사이에 기어들어

중간에 개입하여서

화평이 아닌 불화를 일으키는

간격을 벌리는자가 아기 예수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그 자체로 보인 겁니다.

아기로 보인게 아니라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닌

천국 그 자체가 덜커덩 내려 앉았다는 겁니다.

 

땅은 이제 초토화 되는 거죠 뭐

 

어린아이란 바로 그런 하나님나라 라는 간격을 발산하는 징후 증상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린아이가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니까

하나님 나라가 덜커덩 내려앉아서 자신이 지금 도리어 이 간격에 의해 심판받아야 마땅한 그래서 긍휼을 바래야 하는 그런 입장을 못 보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심판 속에서 건져주세요 라고 긍휼을 원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간절히 원하는 자로서

 

만져주심을 원하고 있는데

 

그 만져주심을 제자들은 시덥지 않게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구지 안 만져도 니 엄마 아빠가 만져준다는 거죠.

 

그냥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아주 사소한 것이 크게 보이지 않듯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듯이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실수로 믿음이 떨어져야만

어린아이가 목소리를 상실한채 외치는 그 기능이 보일텐데

안보이니까

 

무시하고 누락 시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무시하지 않고

누락시키지 않고 상기 시켜주시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는 모든 인간은 무능합니다.

그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선취로써 어린아이는 지금 제자들의 사고방식과

충돌하는 존재로써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만져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정도로 무능합니다.

 

어린아이는 예수님이 만져 주지 않으면 다 지옥으로 바로 떨어집니다.

그 정도로 심판 속에서 가장 가장 취약한 존재들입니다.

 

그 모습을 어린아이로써 보여주는 겁니다.

 

제자들을 예수님이 만져주지 않는다고 제자들이 죽습니까?

안죽습니다.

제자들 본인도 안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져주냐 안만져주냐도 의미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바로 만져주냐 안만져주냐입니다.

만져주면 살고 안만져주면 죽는

그런 다급함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취약하지도 않습니다.

 

지극히 약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간격을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본인이 어린아이처럼 무능하지도

취약하지도

심판 속에서 가장 먼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예수님이 잠시라도 만져주지 않으면

죽는 너무 너무 나약한 존재이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의 징후라는 겁니다.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이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간격입니까?

 

심판 속에서는 그렇게 나약하고 취약한데

천국에서는 강한게 아니라 아예 목소리가 없이도 살아가는 더더더 나약한 초과잉적 나약함 그 자체로써 천국에서 산다는 겁니다.

 

천국에서 강할 필요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혼자 강하면 됐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옥간 부자 보세요

목소리를 상실하기는커녕 더더욱 주장합니다.

 

도대체 부자가 지옥 간 것 맞나요?

 

도리어 천국에서 마저도 자기 목소리를 상실한 그 자체로 있다면

거지나사로가 간 천국은 천국이 아닌 지옥이 아닐까요?

 

떵떵거리는 지옥간 부자가 도리어 천국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목소리도 상실 당하지 않어

물 한 방울이 지금 없어서 그게 문제이지만

 

거지 나사로를 보니 천국 간 것 같지도 않아보여?

자아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애

 

어린아이처럼 그저 아브라함 품에서만

철저하게 보호만 받는

오로지 어린아이를 만져주는 손길만 있는

시시한 천국

별로 가고 싶은 마음도 없는 천국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 한 천국

너무 너무 재미 없는 천국

 

오히려 지옥이 더 재미있는 곳 같은

 

왜 천국 갈려고 하느냐 말이죠.

저렇게 재미도 없는데

 

어른들만 가는 천국이라야 재미있지

어린아이만 가는 천국은 그게 차라지 지옥 아니냐 말이죠.

 

독자적인 것이 하나도 없어

곧 자유가 없다는 거지 뭐

 

어린아이와 같이 무능함 뿐이야

이게 무슨 천국이냐 말이죠.

 

그러니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즉 안 보이고 재미 없고 따분하고 참 의미 없고

가고픈 나라도 아니며

지옥같이 따분하다는 겁니다.

 

오로지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완전히 놀리는 투죠

 

결국 천국 가 봤자

어차피 견디질 못해서 지옥에 보내달라고 외칠꺼다 말이죠.

 

그래서 그럴 줄 알고 지옥에 보내고자 선지자를 깔아놓았다는 겁니다.

 

괜히 지옥에 보내는게 아닙니다.

지옥에서 태어났기에

진노에서 태어났기에 지옥에 보내는 겁니다.

천국에 보내 봤자

몸이 좀이 수셔서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물론 몸은 없지요 제 말은 안맞다고 본인이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나 지옥으로 돌아갈래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박하사탕이다는 겁니다.

안 맞거든요

 

어차피 시위 대모할 것 뻔하니까 지옥 보내는 겁니다.

 

천국가는 자는 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보낸들 지옥이 자꾸 내 뱉습니다.

왜 자꾸 남의 집에 왔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 말은 어린아이와 제자 라는 대척점

천국 갈자와 지옥 갈자 라는 대척점은

 

어린아이 제자 천국인 지옥인 이라는 인간 관점이 아니라

 

그 반대로 기능적인 비인간적인 천국과 지옥의 징후이다는 겁니다.

천국인 사람 인간은 의미 없다는 겁니다.

천국이 의미 있다는 겁니다.

 

천국인 천국사람 천국인간이 왜 의미가 없느냐

그 사람이 천국에 가본들 천국이 싫어서 지옥에 가고 싶다고 외칠께 뻔하다는 겁니다.

 

결국 이 땅에서 천국의 징후로써 살고

이 땅에서 지옥의 징후로써 사는 겁니다.

극소차이니까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 간격은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플러스 실천을 통해서 천국 가본들 소용없다는 겁니다.

 

이미 그 자체가 지옥에서 땡기는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이거는 뭐 백날 캐도 말귀 못 알아먹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보고 들음으로써 복이 있도다 라고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만 볼 수 있는 그 간격을 보여줍니다

즉 무지 무지 봐 주신겁니다.

어린아이로 만들어서 보여주신 겁니다.

 

너희들 제자는 어린아이가 만져달라고 다가오는 것을 가로막았지만

나 예수가 어린아이를 봐서 참아서 용서해서

너희를 어린아이 만져주듯이

너희들을 돌아봐주어서

못 보도록 숨겨놓은 그 간격을

안들리도록 감춰놓은 그 세미한 음성을

애들을 봐서라도 보여주고 들려주겠다는 겁니다

 

보고 싶어도 듣고 싶어도 못 보고 못 들은 믾은 선지자와 임금도 있는데

 

애들 땜에 넌 산 줄 알아라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즉 때려죽어도 이 어린아이의 무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간극 속에서 나타난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3가지를 획득하는데 절대로 포기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무능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쫏는 헬라인에게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그 십자가 라는 무능함이 나를 살리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 거리끼고 불쾌한 십자가 라는 걸림돌이 나를 살리듯이

 

지금 무능해서 예수님이 만져주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 어린아이를 통해서

 

도리어 제자들은 듣게 되고 보게 되는

 

돌아보심 만져주심을 누리게 된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예수님이 도저히 누구인지 모르도록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줬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봐주고 봐주고 또 봐주셨으면

너무 너무 불쌍해서

 

용서하신 겁니다.

 

꿀밤 770~~~~~

 

 

 

 

 

 

 

 

 

 

 

 

 

 

 

 

 

 

 

 

 

 

 

 

 

 

 

 

 

 

 

 

 

 

 

 

 

 

 

복수심과 갈라서게 하는 간격(극소차이)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니까

우리 내부의 공간으로부터의 괴물로써 자리잡게 되니까

이런 갈라짐의 현상이 히스테리로 나타나는 겁니다.

 

두 사람이 맷돌 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하나는 버려둠을 말입니다.

십자가에 두 강도 사이에

그 간격의 중간에 예수님이 가운데 있으니까

두 강도 사이에 갈라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너희 가운데 있다 라는 말씀을 듣고

심령천국은 순엉터리라고 하니까

이 두 강도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한 사람은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이 말도 안되는 아무 의미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고 있고

 

다른 한 쪽 강도는 알기는 아냐? 죽는 마당에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해서 뭐하게?

어라 둘이 아주 기가막히는 소리에 맞장구치고 있구나

예수 너는 적어도 저런 헛소리를 받아주면 안되잖아 라고

 

간따나 죽는 판국에 더 열받아 죽게 만드는 그 꼬라지에 씩씩 거리는 겁니다.

 

나빠도 너~~~무 나쁜 당신의 나라 라는 겁니다.

그것도 꼭 중앙 가운데서 더 열받도록 말이죠.

 

지난 시간도 마찬가지

갈라지는 현상으로써 기도라는 겁니다.

기도란 무능함을 원하는 겁니다.

아니 누가 기도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능함이겠지요

무능함을 원하는 것

이것을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종교인들의 기도와는 완전 정반대의 대척점입니다.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기도하실때의 기도내용이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26:39, 개역)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두 기도의 내용은 결국 하나 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겁니다.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늘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없음 이라고 합니다.

없음을 원하는 겁니다.

 

기도란 이 없음을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처럼 무를 원하는게 아닙니다.

없음이란 상대적인 있음의 반대이니

반대를 위한 반대인 셈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척점이라고 했습니다.

간격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불교의 무는 간격 자체도 없는 거죠

이것이 부처와 예수님의 차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는 실천과 교리가 따로 있어서

무 라는 사상이 있어야 하고 즉 교리죠

그 무를 실천하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둘의 결합 곧 동일성이

그들의 무 사상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한다 라는 말은

즉 기도를 해도 아무 것도 아닌 무능을 원한다는 것은

이미 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라는 겁니다.

 

즉 교리 따로 있고 행함의 실천이 따로 있어서 기도를 실천하면

무능함이 된다 라는 성화론이 사실상 유대교요 불교이다는 겁니다.

 

복음은 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느냐 왜 그 무능을 기도하느냐?

실천 개념이 아니라 너가 원래 그렇게 태어났었어 라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 하는 자와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남과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실천하는 자와 기도의 사람으로 이미 태어났음 말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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