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간으로써]의 인자와 [인간으로써]의 부자청년의 근심 (18:18-27)

 

모든 인간을 거부하는 비인간

큰 부자
[인간] 청년 과 [비인간]으로써의 인자

 

사람이 아니무이다.

 

(18:18, 개역)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19,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20, 개역)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18:21, 개역)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18:22, 개역)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18:23, 개역)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18:24, 개역)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18: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오늘 본문은 인간과 비인간의 대립으로 보시면 됩니다.

 

부자 청년비유인데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18:18, 공동) 유다의 지도자 한 사람이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18:18, 현대어) [부자 청년;19:16-26,10:17-27] 한번은 유대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18:18, 가톨릭) 어떤 권력가가 예수님께, “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지도자 라고 권력가 라고 보시면 됩니다.

벼슬에 있으면서 나라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 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오는데

요즘으로 치면 공무원 고급공무원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즉 인간이라면 다들 부러워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심지어 자녀가 있다면 바로 저런 사람이 되어라고 모범으로 멘토로 삼는 자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부러워 하는 인간

인간 다운 인간

 

인간의 표본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권력가 라고 하면 바로 거룩한 사람과 동격인 셈입니다.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에 의하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젋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청년이라고 했고

심지어 큰 부자 라고 누가복음에서는 말하고 있으니

 

다들 부러워도 보통 부러워할 정도가 아닌 그야말로 표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겸손을 갖추어서 예수님께 어쭙고 있습니다.

 

즉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당신은 선한 분이 맞기 때문에

그리고 선생님이 맞기에 알려주실 수가 있습니다.

 

라고 역시나 인간 답게 인간 중의 최고의 인간 답게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생님의 답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고서

진정성을 담아서 묻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지도자로써 곧 모범으로써

백성을 대변해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의 부요함도 백성을 위한 것이고

그의 삶도 백성을 위한 삶이고

그가 어릴적부터 지켜왔다는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그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의 삶으로써

역시나 영생을 얻을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도

백성을 위한 백성과 더불어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세 이다는 겁니다.

 

안 부럽나요?

 

저는 억수로 부럽습니다.

 

이런 인간의 삶이 그야말로 표본 맞습니다. 맞고요

이런 표본의 인간이 되고픈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이것 조차도 강요된 선택입니다.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갖추어진 자아이기 때문에

결국 자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아로 갖추었고

거기에다가 가장 완벽한 율법까지

거룩까지

오늘날로 치면 성화까지 갖추는 바람에

그 강요된 선택이 즉 자유의지죠

가장 대중의 부러움을 사면서

아 저런 인간이 있기는 있구나 라고

본보기가 됨으로써 희망을 갖게 하는 겁니다.

 

명량이라는 영화가 바로 그런 취지입니다.

저런 이순신 같은 사람이 없으면 희망이라도 가지지 않을터인데

괜히 있는 바람에 헛바람이라도 불어서 희망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 희망을 대변하는 것이 이순신이고

오늘 본문의 표본적인 인간 부자청년입니다.

그것도 지도자 곧 백성을 섬기는 백성만 생각하는

리더십이 가장 뛰어난 인간으로써 최고인 젊은 부자청년입니다.

 

바로 이런 자를 배경으로써 깔고서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배치시키십니다.

꿈에도 몰랐지요

예수님을 드러내는 도구로써 부정적인 배치물이다는 겁니다.

이순신 조차도 부자청년 조차도 다 그러합니다.

악마도 그런 취지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이 부자청년과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부자청년의 겸손으로 다가오는 최대치의 예의를 거부합니다.

차단하고 단절시켜버립니다.

 

마치 그 어떤 물에도 묻지 않고자 하는 기름과 같습니다.

절대로 썩이는 법이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 간격이 분명하고 또렷해 집니다.

 

만약 부자청년이 들고오는 그 겸손이든 뭐든 그 어떤 것에도

조금이라도 물에 물탄 듯이 썩이는 것이 있다면

 

그 차이는 불명확해 지고 흐릿해지면

그 경계선도 모호해 집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물에 물 탄 듯 다 모호한 겁니다.

 

안그렇다면 그 차이는 그 경계선은 아주 명확하게 경계선이 명료하고 또렷한 겁니다.

 

복음이 어린아이도 다 알아먹을 정도로 쉬운 이유는

설명이 쉬워서가 아니라

 

경계선이 명확해서 쉬운 겁니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그 명료하게 갈라진 그 간격을 누리면서

복음을 누리기 때문에 아주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어른에게는 무지 무지 어려운 그야말로 수수께기입니다.

단절 그 자체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롭고 똑똑한 천재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심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저는 이것을 마치 이런 예와 같다고 봅니다.

 

어떤 영재에 대한 시사다큐를 봤습니다.

천재아이들인데

 

대학보다 더 수준 높은 수학 문제를 푸는 어린아이 천재인데

감당이 불감당이라서 대학에서도 가르칠 선생님이 교수님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책만을 선생님으로 삼아서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어린아이가 펑펑 우는 겁니다.

 

당황한 아이의 어머니가 왜 왜 왜그러니

한 참을 울고 있는 아이가 말을 합니다.

 

엄마 나는 바보인가봐요

 

아니 왜?

 

아주 아주 쉬운 미취학 아동들 곧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 들어가기 전에 배우는

그 덧셈을 자기는 지금 못 푼다는 겁니다.

 

대학교수들이 못 푸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자기는 푸는데

정작 미취학 아동들이 푸는 덧셈이라는 수학 문제를 못 풀어서 우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는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서 같이 웁니다.

 

1 더하기 1 2 라고 답을 알려줘도

2가 되는지를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엄마 나 바보인가 봐요 근심하고 등돌리고 돌아서는 부자청년입니다.

 

우리가 천재가 부럽고 자기자식을 그런 천재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영재교육도 시키는데

 

이것이 인간답다 인간 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요

본보기요 멘토요 모범답안지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슬기롭고 지혜롭고 똑똑한 스마트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럼 그런 인간과의 차이로써

천재 곧 인간 중의 최고의 인간 과의 차이로써

예수님은 더 더 더 인간적인 더 더 더 수준높은

더 더 더 나은 천재인줄 알았는데

 

그 정반대인 비인간이다는 겁니다.

아니 당연히 비인간 곧 신이지 인간일리가 없잖아?

신도 아닙니다. 비 신 입니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무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EqFW8teYhT8

인간의 신 개념은 무능이 아닌 모든 능력자 곧 전능자 입니다.
그 전능자가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그것도 신으로도 아니고 인간으로도 아닌
죄인으로 비인간으로 내려왔다는 겁니다.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거지나사로 [그 자체]이며

어린아이 [그 자체]이며

무능함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이 기도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십일조 십의 이조 드릴 필요 없이 십일조 [그 자체] 입니다.
안식일 지킬필요 없이 안식의 주인 곧 안식 [그 자체] 이다는 겁니다.

비인간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인간이 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어떤 자살한 목사가 [거지나사로가 되자!!] ? 바리새인 되면 지옥가니까 말이죠.

자살했다는 것을 문제삼는게 아닙니다.

공황장애는 절대로 자살 안합니다.

문제는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도록 되어있는데

우울증이란 너무 근접해서 자살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근접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죠.

거지나사로가 되고 싶어서 자살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우울증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생기는게 아니라

근접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살방지 기술로써 간격벌리기를 하는 겁니다.
거리두기를 하시는 겁니다.
자살 하지 말라는 배려요 섬김입니다.

자살을 늘 하는 인간이 모든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을 자살 못하도록 방지하는 방법이 간격벌리기입니다.

부자청년을 통해서 거리두기를 하시는 이유도 이런 이유 입니다.
자살 하지 말라고

너희는 할 수 없으니 나는 한다 그러니 나에게 맡겨라 라는 겁니다.

베드로를 자살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거리두기를 하신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데 해 버리면 자살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실패케 하시는 겁니다.
실패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의미가 이런 취지 입니다.
인간은 성공해 버리면 인간이 성공한게 아니라 육이 성공하게 되는 겁니다.
육이 성공하면 육은 소유욕의 자랑에 빠진 겁니다.
지금 부자청년은 육의 소유를 자랑질 하는 겁니다.
더 이상 자랑할게 없게 되면 인간은 자살합니다.
자랑할게 없기 직전에 자살을 하는 겁니다.
무능함은 때려 죽어도 싫은 겁니다. 
실패는 때려 죽어도 싫은 겁니다.
실패하지 않고 성공해 버리면 자살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요나 선지자 그래서 자살시위를 하는 겁니다
실패한 인간이 되기 싫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이스라엘의 쫄딱 망함이 때려죽어도 싫었던 겁니다.

망해도 상관없고, 누락 되어도 상관없는 것이 구원인데
육의 소욕, 육의 소유로써 구원까지 소유할려고 했던 겁니다.
십자가도 그런 식으로 소유할려는 겁니다.
십자가 자체가 실패인데 말입니다.
실패 그 자체가 넉넉한 승리 그 자체인 겁니다.

다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패를 상징한다고 본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사도바울이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본인이 실패 당해 보니까
그것이 아니였던 겁니다.
인간들의 실패를 대신 짊어진
자살할려는 인간들의 실패를 대신 짊어진 섬김이였던 겁니다.

그래서 저 세리와 같이 실패하지 않은 인간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그 다음 실패가 너 차례인데 우짜지를
대신 감당한 것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습니다.

주님의 배려로 7천명, 박넝쿨이라는 무능함이 그들을 자살 못하도록 섬겼던 겁니다.

 

그런데 괜히 근접하여서  인간 중에 가장 가까이서 맛본 인간들은

그 간격벌리기가 도로 자신이 당해버리니까 싫은 겁니다.

바리새인처럼 부자처럼 간격벌리는 맛으로 자신이 그 맛에 살아왔는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참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그런데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간격벌림을 당해 버리니까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그 간격을 누리지 못하고 그 실패를 누리지 못하고 그 섬김을 누리지 못하고

등돌리고 근심해 돌아서는 겁니다.
기여이 자살하고 말겠다고 돌아서는 겁니다.

 

실패는 무능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좀비나 마찬가지이니까 자신이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기여이 인간일때 죽겠다는 겁니다.

아니 언제는 인간 이였던 적이 있기나 했었나요? 인간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성경말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칼 과 방패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무능한 예수님 곧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 목숨에 손을 대는 겁니다. 

 

즉 때려죽어도 인간임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비인간이 싫다는 겁니다. 실패한 인간 싫어!!.

 

제발 포기 하세요

어린아이 그 자체요

부정한 과부 여인 그 자체요

인간 갖지도 않은 인간 곧 비인안 거지나사로처럼

 

목소리 상실 당한 그 자체

흠모한 모양이 전혀 없는
아름다움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는
모두가 다 고개를 돌려 버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은 인간임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수학천재임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1 더하기 1을 풀어보라고 하니까

못 풀어서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어릴적부터 다 지킨 율법이다면

너의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주어라 라고 하니까

 

1 더하기 1을 못 풀어서

2가 되는지를 도저히 알수가 없어서

등 돌리고 돌아서서
자기가 여전히 사수하는 우주의 비밀을 풀고

 

(16:1, 개역)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6: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개역)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16:4, 개역)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천기의 현상까지 다 분별하는 그 능력만을 주장하고 싶어서
그것은 할 줄을 알면서

1 더하기 1을 못 푸는 바보는 되기 싫어서

 

천기를 분별하는 능력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바보 때려 죽어도 하기 싫다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 때려죽어도 하기 싫다는 겁니다.

 

역으로 거지 나사로 되자 라는 것은 결국 천재 되기를 때려죽어도 못 포기하겠다는 마찬가지 모습인 거죠
성화론 즉 변증법 또한 역시나 육의 소욕에서 나온 겁니다.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니까 베드로는 자신은 전 재산을 다 버리고 그물도(생계수단) 버리고 따랐다고
버림 또한 육의 소욕으로 생각한 겁니다. 가능성이요 개방인 거죠.
버린다는 것은 단절을 말하는 겁니다. 불가능성입니다.

그 자체이기 때문에 자살할 필요 없이
자기 목숨을 버릴 줄 모르는 무능한 자입니다 라고 그냥 고백하면 되는데
(회개를 포기하세요 회개를 포기하는 회개를 누리시면 됩니다.)

자기 목숨은 정작 못 버리니까 자꾸 그 대신 가장 가까운 대처물을 버렸다는 증거로 자꾸 들이대는 겁니다.
이것이 우울증 증상입니다. 실패를 인정하기 싫은 증상입니다.

엘리야 신드롬이라고도 하는데
너무 근접한 겁니다, 나만 근접했다는 겁니다. 내 열심이 너무 너무 특심해서 나만 남아 버렸다는 겁니다.

너무 가까이 근접했다는 겁니다.
처방은 간단합니다. 거리두기 입니다. 채널돌리기
괜히 가가이 근접했넹 한 발짝 떨어져 보니 별심각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심각한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기적을 바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기적 따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기적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타임 머신이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이미 미래완료가 침노해서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겁니다.
완료로써 말이죠.
이미 지나간 과거의 치욕적인 굴욕을 고치거나 좀더 나은 나를 만들어 보겠다고
과거를 고치는 여행 [나비효과]라는 영화처럼 고치니까 도리어 그 파장이 더 뒤죽박죽 더 손댈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괜히 손댔어 손댔어
마찬가지로 지금의 현재의 나 자신도 괜히 손댈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꾸 나를 손대니까 내가 내 자신이 마음이 안들어서 손대는 거죠. 그래서 자살하거나 등 돌리고 근심해 돌아서는 겁니다.
 

거지나사로 될 필요가 없이 이미 거지나사로인데

왜 거지나사로가 되어야 합니까?

될 필요가 없이 이미 거지인데
자꾸 손대고 싶고, 포장하고 싶고, 미화화 시키고 싶은 겁니다.
의미 를 두고 의미를 기여이 담겠다는 겁니다.
[의미 없는 그 자체]를 때려죽어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어린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했는데 왜 홍시 맛이 나냐 라고 물으시면라고 말하는 명대사가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OGjYjo_rKE

 

이미 거지나사로인데 왜 거지나사로가 되어야 하느냐 라고 물으시면 어찌 대답해야 합니까? 라고 장금이가 물으면 어떻게 답하실래요?

1 더하기 1의 문제의 해답, 곧 기가막힌 답변입니다.

 

그 자살한 목사는 거지나사로를 인간의 참모형으로 봤던 겁니다.

그래서 그 거지나사로를 본보기로 삼아서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고 한 겁니다.

이것이 그가 잘못 생각한 해석입니다.
부자청년이 어릴적 부터 지켜왔다는 율법을 잘못 해석한 겁니다.

 

그러니 그의 삶도 잘못 해석한 길로 간 겁니다.

 

거지나사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결론으로 간 겁니다.

 

자꾸 멀어지면 안되기 때문에 요때 가장 비스무리하다 싶을 때 가장 가까우니까 말이죠.

 

이 불가능성의 거지나사로를 가장 가능성이 인생에서 제일 높을 때

가능성화 되었을 때 그것을 놓치지 말자 라는 식입니다.

내 열심이 가장 특심일 때 . 요 때 ~~~~

 

그래서 바리새인 되지말고 거지나사로 되자 라는 겁니다.

 

바리새인 안되는 것도 불가능성인줄도 모르고

거지나사로 되자 라는 것 조차도 불가능성인줄 역시나 몰랐던 겁니다.

 

둘 다 인간인데 두 인간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거지나사로를 선택하겠다는 거죠.

자신의 눈에는 거지나사로가 인간 참인간으로 보였던 겁니다.
비인간인데 자꾸 인간으로 보니 인간으로 보는 자신도 인간 맞잖아 라고 보는 겁니다.
단절로 못보고 개방으로 보는 시선이 다 이런 식입니다.

 

정작 예수님은 그 반대입니다.

거지나사로는 비인간이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니무이다.

 

사람이 아니무이다.

 

예수님 본인도 사람이 아니무이다.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반복해 보면

 

과부여인과 기도[불의한 재판관 비유]에서 기도는 무능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기도하기 싫어도 이미 기도이다는 겁니다. 기도의 사람이다는 겁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자 할 필요없이 말입니다.
이미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겁니다. 기도 할 필요 없이 말이죠.

무능이다는 겁니다.
그 자체 입니다.

 

여성을 남자에 대한 상대적인 [미성숙으로써의 인간]으로 해석한 철학에,

반대하는 해석이 여성은 오히려 남자 보다 더 인간적인 인간 즉 초과잉적 인간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수자 운동, 어린아이-되기 운동, 여성-되기 운동을 펼치는데
여자 조차도 여성 되기 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 이것 조차도 바리새인의 하나님나라 운동과 같은 원리인 겁니다.

자기들이 뭔데 타인과 간격벌리기를 합니까?

어린아이가 언제 그런 것을 의식합니까?

 

그냥 그 자체인데

 

지금 부자청년이 그런 운동을 펼치는 겁니다. -되기 운동

 

그것이 인간 보다 더 인간적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운동을 펼치는 인간 속에서

 

예수님은 비인간 그 자체로써 비인간으로 저들과 차이라는 간격을 벌리시는 겁니다.

 

간격도 누가 크냐 누가 더 작냐라는 그것도 졸지에 능력이라고 지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누가 더 무능하냐 라는 비교를 할 필요가 없이

그냥 그 자체로써의 무능입니다.

 

어린아이가 바로 이런자의 것이다 라고 하나님나라 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천기를 분별하는 인간이 왜 1 더하기 1은 못풀까요?

이래 말하니까 나는 1 더하기 12 인줄 나는 알지롱 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1 더히기 1은 2가 아닙니다.
물 한 방울에 물 한 방울 더하면 역시나 물 한 방울입니다. 1+1=1입니다.
남자 더하기 여자는 아기가 나옵니다. 너무 야하나요? 1+1=3 입니다.
즉 1 더히기 1은 무한변수 n 입니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나만 남았나이다 1인데 어떻게 7천명이 됩니까?
도통 알수가 없는 겁니다.

진짜로 부자청년이 전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지 못해서 못 푸는게 아닙니다.
부자 중에 아주 가끔 전재산 나누어주어 자신이 가난한자가 되는자 가끔 있습니다.
그럼 못 푸는 수수께기가 풀리는 셈 아닙니까?
그런 의미 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취지는 육이 영이 못 된다는 겁니다.

육으로 쌓은 [의미]는 영의 [아무 의미 없음 이라는 진리] 에 이행 할 수가 없다는 단절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시도할려는 부자들이 재산 버려가면서 까지 시행할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저도 직접 격었고요.
부자도 이런 판국에 일반인 더더욱 가난한자도 이런 시도를 무지 무지 할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성전의 두 사람 비유입니다.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자신은 육에서 영으로 이행 했다는 겁니다.
부자청년도 이행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는 겁니다.

상징계에 탁 걸려 버린 겁니다.
천재들은 오이디푸스에 걸려 본적이 없습니다. 앙티오이디푸스 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가버린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유 없이 오이디푸스에 탁 걸려 버리니까
그만 못 푸는 겁니다.

죽음이 이유없이 덮쳐와서 탁 걸려 버린 겁니다.

그래서 실패야 말로
잔치집이 아닌 초상집이야 말로 이 법을 넘길수가 있는 겁니다.

(어제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냐?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왜 금식하냐? 잔치집에서 누가 금식하냐? 그러나 내가 넘겨지는 날이 오면 그때야 금식하지 말라 해도 금식할꺼다 걱정 말아라!! 이 본문을 보시고는 금식이 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답을 하기를 음식을 끊는 겁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즉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성전의 두 사람 중 바리새인이 이레에 두 번 금식한다고 합니다.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일주일에 두번 한다고 합니다.

그게 금식 맞습니까? 나는 금식 하니까 날 건드리지 말라는 복수심이지요.

구약에서는 옷을 찢는 것이 회개요 금식이요 간구(기도)입니다. 즉 육체를 찢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육체는 정작 안 찢고 옷을 하도 많이 찢어버리니까
주님이 야야 야들아 옷 좀 그만 찢어라 왜 죄 없는 옷을 찢니? 너 자신이나 찢어버리지
찢기 싫다는 것으로서 옷을 대신 찢는 겁니다. 주님은 죄 없는 옷을 더 걱정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도 걱정 안 합니다.
사물이 이런 인간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데 동원되는 줄 모르고
옷을 찢었으니 나 회개 맞지요 금식 맞지요 어릴적 부터 율법 지켰으니 거룩한 사람 맞지요 라고 나오는 겁니다.
본인이 손에 든 찢어진 옷이 말을 합니다. 넌 가짜야 내가 그 증거야
십자가는 말을 합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는 말을 합니다. 넌 가짜야 라고 시아버지 유다에게 눈도 귀도 입도 없는 사물이 외칩니다.
이들의 외침이 회개입니다. 닭이 웁니다 꼬끼오 ~~~~~~~~~ 꼬끼오 ~~~~~~~~~ 꼬끼오 ~~~~~~~

그러니 누가 잔칫날에 옷을 찢냐 말이죠? 그것은 시위죠, 잔치를 망쳐보겠다는 심뽀죠. 복수심이죠.
그런데 예수님 본인이 찢겨질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때는 금식 하지 말라고 말려도 자동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이 걱정하냐 말이죠. 세례요한과 비교하면서 말이죠. 비교 자체가 복수심이지요.

그리고 어머니께 제가 오히려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제자들은 그럼 금식했을까요? 안했을까요?

우리 어머니 이제는 눈치 백단 입니다.
당연히 안했지 라고 답합니다.
아니 왜요? 도망치기 바쁘고 정신없는 판국에 금식할 여유가 어디있느냐 말이죠.
하하하 웃었습니다.
금식을 다 이루어버렸기 때문에 금식할 필요가 없이 이미 금식 그 자체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써 다 이루신 십자가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없는 죽음을
실패를 수용하는
그럼으로써 오이디푸스를 넘기는 겁니다.

그러니 1 더하기 1이 무슨 수가 나타나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뭘 해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뭘 해도 실패 이기 때문입니다.
즉 넉넉히 다 이룬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율법 외에 한 의로 다 완료되었기에 누락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것을 보라고 거리두기 간격벌리기 입니다.
이 간극 속에서 무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처음자리, 세미한 음성, 칠천명이 그 간극 사이에서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만의 사고방식인 처음자리인 무능의 자리 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삼손의 수수께기의 답입니다. 이스라엘만의 경험 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 어린아이 때 왜 쓸데없이 율법을 왜 지키냐 말이죠
강요된 선택인 거죠.

 

율법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인데

쓸데 없이 어린아이때부터 갇혀 버렸으니 원

 

그래놓고 [무능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나오는게 아니라

 

얼마나 어릴적부터 갇혔으니 그 갇힌 티를 팍팍 내면서

어릴적부터 지켰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 정말 어릴적부터 지켰니?
네!! 지켰습니다.

정말 정말 정말??
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요!!

그럼 과연 그런지 보자

 

1 더하기 1을 풀어 보아라

 

다윗이 왜 조상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는지 풀어 보아라

 

못 푸는 겁니다.

 

유구무언입니다.

아니 남편 7명이 있던 여자가 천국에서 누구의 아내인가? 그러니 부활이 없는게 당연하지 않는가 라는 
천기의 비밀을 풀줄 아는 자들이

왜 다윗이 자손에게 주여 라고 한 말은 못 푸냐 말이죠.

 

입이 왜 있냐 말이죠

 

있어도 소용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율법 지켜도 소용없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율법 위에 더 큰 율법을 더 큰 무거운 짐으로 올려 씌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오이디푸스라는 법에 더 큰 부조리를 뒤짚어 씌워버립니다.

혹부리 영감 동화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혹부리 혹 곧 남근이지요 남근을 때낼려다가 도로 두 개나 더 혹 붙이는 꼴입니다.
할례를 괜히 지키는 바람에 두 개의 혹이 더 생겨버린 겁니다.

어릴적 부터 두 개나 더 붙이는 꼴로 살아왔다고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실패한 거세가 되어야 하는데
마음판의 할례가 실패한 거세 입니다.
자신은 할례에 성공했다고
율법에 성공했다고 우기다가
도로 혹을 더 두 개나 붙이는 꼴이 된 겁니다.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나 만 남았다 라는 것이 어떻게 1이 어떻게 7천명이 될까요?
7번 용서 라는 7이 어떻게 무슨 수로 7에 70 490번이 될까요? 무한대가 될까요? 숫자 세알리기를 포기하라는 겁니다.
나는 곧 인간은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면

답은 아주 쉬워집니다.
숫자 세는 헛된 인생 자체를 맡겨버리면 숫자 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 자체] 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무능하기에 문제를 풀 필요가 없이 그냥 [그 자체]로써의 답입니다.

주여 저는 어릴적 부터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영생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어떻게 풀까요? 팁 좀 주세요?
주님은 [너는 문제 풀 자격이 없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문제 말라꼬 푸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어릴적 부터 문제 풀어 왔다고 우기니

문제 풀지 말라는 취지에서 아예 못 푸는 수수께끼를 던져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만이 푸는 문제를 던져 버리니
졸지에 경쟁자로 들통나서
못 푸니까
복수심을 펼칠수가 없으니까
복수심이 들통나니까
돌아서는 겁니다.

주님의 배려인데 거부하는 겁니다.

주님의 배려가 덮쳐오니까
저절로 자살 시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겁니다.
7천명요? 아이고 내가 헛 짚었네요 감사합니다. 괜히 웃음이 나는 겁니다. 채널돌리기.
[의미를 둔 나만 남았나이다] 를 푸는 방법은 [의미 없는 진리] 입니다. 7천명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배려가 없고 또는 거부하니까
자살 시위만이 남게 되어버린 겁니다.

 

왜!!! 안식일 백날 지켜도 안식의 주인이 왔으면 됐잖아요 그럼 됐으면 끝난 문제인데 왜 왜 왜


그런데 안식일 지킨 것을 못 포기하니까

안식의 주인이 와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반겨야 할 자들이

오히려 안식의 주인을 때려 죽입니다.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에 채플린이 오면 기뻐해야 하는데

떨어뜨려 땡 탈락 시키는 겁니다.

 

[거지나사로 되기 대회]에서 진짜 거지나사로가 나타나면

거지나사로 닮기 대회를 하는 참자가들이 그 진짜 거지나사로를 거지취급해서

쫏아낼 것이다 말이죠.

교회가 지금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하기 대회를 거들내야 하는데
교회를 이제 접어야 하는데

채플린 닮기 대회, 거지나사로 되기 대회,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채플린을 쫏아내고, 거지나사로를 쫏아내고, 참성전을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교회가 허물어 져야 하는데 말이죠.

부자청년의 비유는 배치물 인간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
인간은 정작 누락 되고
구조를 말하기 위한 겁니다. 둥지가 이런 일을 벌린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라는 구조가 이런 둥지를 말하기 위해서 인간은 배치물로 두었다는 겁니다.

머리가 없는 교회 입니다.
머리만을 말하는 교회이어야 하는데
머리는 없고 교회만을 말하는 교회가 되어버린 겁니다.
주객이 뒤 바뀐 겁니다.

몸을 몸 스스로가 말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필요 없이도 말이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머리를 말해야 하는 그 불가능성 속에서 외치는 것이 교회인데
머리가 안 보이니까 그것이 정당화 되어서
머리를 말 할 필요가 없이
그 대처물로 교회를 교회 스스로가 외치는 셈이 된 겁니다.

머리를 말하는 교회를 제가 본적이 없습니다.

다 자기 이야기들 뿐입니다. 교회 자랑 뿐입니다.
우리가 이 정도로 어두운 눈입니다. 고쳐달라고도 하지 않을정도로 만성화 되어 있습니다.
부자청년의 모습이 우리 모습입니다. 지독한 자기애 입니다. 자기자신에게 미쳐 중독되어 있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렸거든요 머리가 하도 바보라서 무능해서 버린 겁니다.

 

이것이 1 더하기 1의 답 입니다.

 

너의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라는 겁니다.

 

못 풀죠

 

절대 못 푸는 겁니다.

 

행함이란 한계에 부딧히라고 준 것인데
오이디푸스에 걸려 넘어지라고 준 것인데

율법은, 안식은, 계명은, 말씀은, 모조리 다 한계에 부딧히라고 준 것인데

힘 주시면 다시 하겠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포기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령도 똘마니로 이 가능성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개방이지 단절일리가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인간선수들이 열심히 경기를 뛰는데 동원되는 치어리더로 취급하는 겁니다. 응원단.

 

포기를 포기했으니까 행했으니까 나 포기 한 것 맞잖아 라고

또 역시나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믿음의 영역을 자꾸 행함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겁니다.

 

더 큰 행함을 요구하면 포기하면 되는데 말이죠.

 

이미 [그 자체]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어린아이 되기 운동을 할 필요가 없이 이미 그 자체로써 어린아이입니다.

 

거지 나사로 될 필요가 없이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이

기도를 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써 말이죠.

 

그것이 관계성입니다.

사랑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사랑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

주여 별세해 주옵소서

기껏 모세가 수천년 만에 나타나 하는 말이

주여 저 모세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변화산에서 말하는 겁니다.

 

그 명성 그 영웅성 그의 종교 지도자 다움

 

이거 다 아무것도 아니다는 겁니다.

 

주님의 피 흘리심이 아니면

요나의 표적이 아니면

말짱 도루묵 이다는 겁니다.

 

부자 청년은 모세도 아닌데 왜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다고 해 놓고서는 왜 못할까요?

 

모세 닮기 대회를 했던 겁니다.

 

모세가 비인간 인줄도 모르고 선지자인줄도 모르고

인간이라고 착각한 겁니다.

무능한 자인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말려든 겁니다.

 

천재로 봤던 겁니다.

율법의 대표자도 바보였습니다.

천재 아닙니다.

지는 단 하나도 지킨적도 없이 남들에게만 잔뜩 짐지운 연자맷돌 씌운자입니다.

그도 불쌍히 여겨달라고 바보 곧 비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천재라고 천재따라하기를 하는 것일까요?

그러니 부자청년이 제 2의 제 3의 인간 중의 인간으로 자꾸 자꾸 나타나는 겁니다.

2의 이순신 제 3의 이순신 되기를 펼치면서 말이죠.

 

실패하면 자살이나 해 버리고 말이죠.

 

실패해야 비로소 그 간격을 그 무능을 보는데

도리어 거꾸로 보는 겁니다.

 

한국이 자살 1위인 이유가 바로 이순신 같은 자들을 닮기 대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노무현 따라하기 대회가 벌어지고 있으니 웃기는 거죠.

 

그래서 주님께서 자살방지로 독재자를 세우는 겁니다.

 

이런 배려도 못 보고 더 원망이나 하고 있으니 원!!!

 

인간은 갇혀 있는 줄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행하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가능성이요 개방이다는 겁니다.

성령이 힘 주면 된다는 겁니다.

개방으로써 성령을 해석한 겁니다.

 

조금만 더 힘 주면 되는데 배터리 모자랄 때 성령이 배터리가 되어주더라 말이죠.

 

그게 바로 부자청년의 해석이요 바리새인의 하나님나라 해석이요

자살한 목사의 거지나사로 되기 해석입니다.

 

정반대입니다.

힘 있는 것 도로 왕창 빼앗아 버리는 겁니다.

천기까지 분별하는 수학풀이가 아닌

1 더하기 1을 해 보라는 겁니다.

거봐 못 풀잖아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을 다 나누어주라

 

거봐 근심하고 등돌려 돌아서잖아

 

못 푸는 주제에

 

천기를 분별하는 것 들이대겠다고?

 

무능한 주제에

 

그 무능이라는 처음자리를 상기시켜 주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무능이라는 간격에서 나와서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름없는 딸 아이의 죽음으로써

사사 입다는 드디어 서자라는 서러움 그리고 산적생활을 청산하고

이스라엘 장로들로부터 인정받는 인간 다운 삶을 살수 있겠구나 라는 가능성을

 

이름없이 딸아이의 죽음이 경계선으로써 작용하여서

그게 아니다 라고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대변해서 남이 아닌 너의 딸이 대신 죽어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1 더하기 1을 못 푸니까 대신 죽었다는 겁니다.

이 기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습니다.

 

다들 기대하고 고대했던 그 기적을 바라고 있는데

기분 다 잡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엉뚱한 기적이다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된 기적

아무도 원치 않는 기적

 

기적이 기적 다울려며는 나의 인간됨 나의 살아있음 나의 목숨붙어 있음과 연관이 됩니다.

 

그런데 요나의 표적은 정반대입니다.

나의 비인간됨, 나의 죽음, 나의 목숨을 잃어버림과 연관이 되게 나타나는 겁니다.

 

처음부터 내 목숨이 내 목숨이 아니라 주님 것이면

1 더히기 1은 너무 너무 쉽습니다 누리면 됩니다.

지킬 필요도 없고, 풀기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내 목숨이 주님 것이 아니라 내 목숨이였다면

어릴적부터 지켜온 것이 다 나의 소유라면

졸지에 이 1 더하기 1은 어려워서 못 푸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대학교수도 못 푸는 수학문제를 풀면서

정작 1 더하기 1은 못 푸는 겁니다.

근심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저번에 말했지요

돈 한 푼 가난한 자에게 줄 필요도 없이 이미 주님의 것입니다

저도 주님으로부터 가난한자처럼 받아야만 할 입장일 뿐입니다 라고 하면

근심할 것도 등 돌릴 필요도 전혀 없는데

자신이 지켜왔던 소유물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는 겁니다.

 

바보가 되면 되는데 아니 바보 그 자체를 누리면 되는데

천재가 되었던 것을 포기 할 수가 없으니

 

등 돌리고 돌아서야만 하는 거지요.

 

그리니 선한 분이시여 선생님이시여 라고 다가오는 것 자체가

연합 동질 일치 합일을 꾀하는

교리 플러스 실천에

 

예수님은 아예 딱 짤라 단절시키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썩이는 법이 없는

간격을 제시하는 겁니다.

 

너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다.

 

너는 이 간격을 보라 라는 겁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자꾸 그 간격을 무시하고

어떻게 하면 일치 합일 동질 연합할 수가 있으냐

 

영생은 어떤 일을 무슨 일을 하면 얻을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영생 곧 영원히 사는 천국에서 사는 구원 이 아닌

 

지금 너는 당장 죽게 되었다 라는 심판을 제시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는 질문에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심판을 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간극에서는 심판이 나오는 겁니다.

그 심판을 봤다면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세상에나 제가 지금까지 지켜온 것

불 속에 넣어보니

금으로 나오기는커녕 모조리 다 썩을 것 배설물 똥덩어리 였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어릴적부터 지켜왔다고 착각을 했으니 원

 

주여 저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전 안의 두 사람의 간격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이 둘은 인간이 아니무이다.

 

천국과 지옥의 징후 증상입니다.

 

그런데 자꾸 자꾸 인간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나 인간 맞 잖아요 라고 말이죠.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 본인도 인자 라고 표현했습니다.

인자?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무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인자를 꼬챙이 삼아 인간들을 수셔대니

인간의 탈을 한 마귀들이

인자 라는 사람이 아니무이다에 탁 걸려

걸림돌에 탁 걸려서 마귀로 들통나도록 인자를 가지고서 수셔대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 곧 뱀의 후손을 수셔대는 것들이 한둘이가 아니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남자를 수셔대는 여성이라는 비인간

남자를 수셔대기 위한 어린아이라는 비인간의 비인간

남자를 수셔대기 위한 죄인 중의 괴수(괴물)이라는 비인간의 비인간의 비인간 곧 인자 라는 겁니다.

 

이렇게 주님은 천국의 증상으로서 그리고 이 천국이라는 빛 곧 예수님 그 자체이시죠

예수님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상대적인 지옥의 증상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비교 당하는 부자청년으로써 배치되는 겁니다.

거지나사로 바로 되기 하지 마시고요

그 거지나사로와 대비되는 지옥간 부자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모습인지

그 간극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불쌍히 여겨주심 외에는 안 보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안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켜온 것들이

십자가를 못 보도록 꼬시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거지나사로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어린아이와 같이 무능하기를 원합니까

아무도 원치 않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 조차도 무능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보세요

그들의 처음자리인 처음사랑의 자리를 원치 않듯이

모든 인간은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우리의 자리에 떡 하니 자리잡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증거하십니다.

 

지키라고가 아닌 십자가가 너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안되기에 말이죠

 

물론 악한 영이 임하는 자에게는 부자청년처럼 되지 말자

가난한 자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자

물론 그런자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기쁘게 나눌자도 없습니다.

억지로 하라 라고 해도 안 합니다.

불가능성의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개방이다 가능성이다 라고 외치는 자들 본인들도

이 본문은 못 지키는 겁니다.

말씀 지켰다메? 그럼 목사 니부터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렴

못 합니다. 안됩니다.

 

안되기에 주님은 하시는 겁니다.

아니 안되는데 주님은 하신다고 하니 이것을 또 개방이다 가능성이다 라고

또 또 또, 사기를 치는데 또 사기를 치는데

성화론자들보다 더 나쁜놈들이지요

 

자살한 목사 계열이 다 이런 놈들입니다.

목사 목구멍이 포도청이거든요

복음은 다 핑계이구요

 

그냥 그런 사기 치지 말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제가 가난한 자입니다. 오늘도 돈 안 주시면 저는 죽습니다.

맞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언제 죽이실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콩꼬물을 먹지 않습니까? 라고

 

정작 무능함을 직시하고 간극을 직시해야 할 판국인데

 

오히려 설교나 성경해석이 자신의 능력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절대 절대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오히려 돈 벌이가 더 잘되고

십자가를 외치니 장사가 더 잘되니까

본인들이 말려든줄도 모르고

지금도 충실하게 지옥간 부자처럼 만들기를 하시는 줄도 모르고

부자청년 만들기를 하시는 줄도 모르고

말려드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주님은 이렇게 충성합니다.

간극에 충성 충성 충성

 

그러니 지옥간 부자처럼

지옥의 대변인 노릇만 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홀로 왼편에 서서 간극을 벌리시고

그 간극 속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하시는 겁니다.

 

매일 매일 돌아봐 주심

매일 매일 만져주심

매일 매일 건져주심이 아니면

 

우리는 간극도 못 보고

그저 일치 동일성 추구 했다고

봐라 어릴적부터 지켜 왔잖아 라고 이 육체가 자꾸 자꾸 나대는 겁니다.

 

그럴 때 감사하게도 못 지키는 전재산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라는

1 더하기 1 도 못 푸는 주제에

바보인데 천재라고 착각하는

무능한데 뭔가 행했다고 착각하는

 

그래서 처음자리를 상기시키는

 

나의 출처를 보여주시고자 하는 그 섬김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한 간섭과 지적으로써

 

주의 사랑의 놀라움을

만져주심에 무조건 이유없이 감사뿐임을 누리는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부자청년처럼 근심하고 매일 매일 돌아설 수 밖에 없는 자입니다.

주님이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그 어떤 누구도 돌아설 수 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아무것도 아닌 그 긍휼만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고자 하신 목적이였지

 

부자청년처럼 우리처럼 헛된 썩을 것에 충성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의 나라 (18:15-17)

2014/08/24 09:30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어린아이의 나라 (18:15-17)

 

(18:15,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8:16, 개역)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 아이는 무능한 기능으로써 하나님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앞에서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라고 질문이

나중에는 인자의 심판 날이 어디서 임하느냐 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바리새인의 하나님 나라는 간격을 누락 시킵니다.

그 간격은 철저한 무능이라고 했습니다.

세미한 음성

즉 하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무능으로써의 간격이다는 겁니다. 간극

 

즉 상대적인 인간들의 하나님나라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자신의 능력으로써의 간격벌리기로 저 세리와의 비교간극인 겁니다.

 

그래서 무 라는 개념이 [무능] [없음] 이라는 개념이 불교의 [] 개념과 다르다는 겁니다.

 

무는 그 자체인데

불교의 무는 교리가 되고

실천이 되어하는 입장에 놓인 겁니다.

 

마치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성경말씀을 말씀이 따로 있고 그에 따른 실천이 따로 있어서

그것을 합치는 것이 불교 즉 최고의 종교의 인간이 만들어낸 의미입니다.

 

즉 불교가 인간 자체를 배제하는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곧 인간 개입이다는 겁니다.

무는 그 자체로써 인간 배제인데

불교의 무는 인간이 개입해서 실천해야할 인간숙제가 되는 겁니다.

니체 계열이 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주님 쪽에서 들이대시는 무능은

바로 그런 교리로써의 무 교리로써의 하나님나라와의 간격이 되는 겁니다.

즉 반대를 위한 반대인 것입니다.

 

인간이 내미는 것 족족 무조건 이유없이 반대이다는 겁니다.

인간 개입의 반대인 인간 누락입니다.

 

그리고서는 그 반대의 이유를

심판을 거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