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심으로서의 반작용(베드로의 반작용-모든 것을 버린 행함)

 

가능성에 대비되는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18:28-34)

 

(18: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18:28, 개역)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18:29, 개역)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18:30, 개역)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8:31,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18:32, 개역)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18:33, 개역)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18:34, 개역)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부자청년이 그것도 모든 인간의 표본 모범 이상향이 가난한 자에게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지 못하고 근심하고 돌아서자

 

베드로가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옵니다.

주여!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마치 자살한 목사의 주장처럼 [거지나사로 되자]를

저 부자는 못 했지만 나는 거지나사로 되자를 행했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지금 자신이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그 증거가 여기 있으니

예수님도 부인 못하시는 것 맞죠?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오냐 오냐 잘했었었어용 이라고 말하는 듯이

베드로를 끌어들여서

 

(18:29, 개역)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18:30, 개역)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집 아내 형제 부모 자녀를 버린 자는

반드시 이 땅에서 여러 배나 더 얻게 될 것이고

내세 천국에서는 영생을 못 받을 리가 없다 라고

 

당황하지않고 칭찬하는 척 하면서 베드로를 끌어들여서

방심한 틈을 노려서 뒤통수를 팍

 

 

그 "뒤통수 팍"이 무엇인고 하니 인자는 [이방인으로부터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함]이라는 겁니다.

 

즉 위에 언급한 바를 역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빙자해서 부모 형제 자매 자녀 집 아내 버리는 것은
누구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

버린다는 것이 나 라는 주체가 결국 나에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주님은 역전 시켜버립니다.

내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부자청년처럼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는냥 버리는게 아니라

저들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집이나 아내에게나 형제에게나 부모에게나 자녀에게

버림은커녕 그래서 도망치기는커녕
저들로 부터

철저한 노리개처럼 도가니 영화처럼

 

희롱 당하고 능욕 당하고 침뱉음 당하면

 

그것도 집으로부터

 

아니 내가 사는 집인데 조직인데 구조인데

내가 주도권을 쥔 집이 아닌

집이 주도권을 쥐어서 나를 희롱 능욕 침뱉음을 당한다?

집이란 인간의 최후의 보루
최후의 보호막 입니다.
집 없으면 거지죠


집이 나를 쫏아낸다?
애굽이 나를 쫏아낸다?
그 어떤 소속감이 없도록 한다?
그래서 스스로 자살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갈때
교황의 권력이 왕의 권력으로 넘어갈때
교회권력 당시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녀를 사랑하면 안돼
아내도 사랑하면 안돼
신이 가장 권력을 가지니까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이지요
막살면 안돼

그래서 자녀를 유모에게 맡겨 버리고
아내도 사랑하면 안되기에 무언의 비공식적인 것이 된게 정부를 두는 것
창기 창녀가 암묵적으로 성행하게 돼

그래서 반작용으로(복수심으로)

르네상스에서는 가족의 사랑이 끈끈하게 작용되어서 예술 특히 미술작품에 그대로 그려집니다.
가족들 일일히 친척들 까지 그림 속에 다 들어가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의도적으로 건물의 배경을 큼직 큼직하게 그리는 겁니다.
교황이 정해주는 땅의 영역이 아니라
개인이 그 틀을 깨뜨리고 교황의 권력의 반작용으로써
의도적으로 반전을 그려넣어서 땅도 내가 이렇게 획득했다고
그래서 부동산이 갑자기 활성화 되는 겁니다.
그림 하나에도 정치 종교 사회 경제등을 담아서
항상 반작용으로써 나타나더라 말이죠.

중세 음악에서는 기교를 널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너무 인기끄는 자극적인 리듬을 넣으면 안된다고
교회음악 음산하게 들려지는 겁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교회음악이 사탄 음악 같아요
막살지 않고 안막사는 것만 거룩한 것만 넣은 것만 들어보면
완전 어두움과 침침한 습기와 음산한 오히려 더 성적인것 같아요
원래 모든 음악 모든 미술 모든 예술은 다 성적인 것인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켜 보니까 더 사탄적으로 들리더라 말이죠.

그런 반작용으로 르네상스가 그 틀을 깨뜨리니까? 그럼 그것이 인간적인가?
역시나 마찬가지

제자리 뛰기죠.

뭘 해도 다 죄라는 겁니다.
그러니 죄 짖지 말자가 아니라
그런 것에 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막살아라는 뜻은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골프 치면 죄가 되고
골프 못 치면 죄가 안되느냐?

둘다 다 죄 뿐이며 뭘해도 다 죄입니다.
갇혔다는 뜻인데
골프 치면 안갇혔다고 말하니 정신나간거죠.
 

위에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약대 곧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하니까

 

이 불가능성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베드로는

자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뭔가 역을것이  마침 나에게 있었기에

그것과 연결시켰는데

 

이것은 약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 보다 더 더 더 어려운 말씀인

집으로부터 마누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능욕 희롱 침뱉음을 당한다고

 

주님이! 인간이 말씀을 끌어들여서 반작용으로써 행한다는 것을 알고
개방이다 가능성이다 라고 역는다는 것을 알고 

그 행함을 자랑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반작용으로써 더 더 더 나쁜상황의 더 어려운 말씀으로 차단 단절 하신다는 겁니다.

낙타가 바늘 통과 도 불가능한데 더 어려운것?
그 간격도 불감당인데 더 크게 간격 벌리는데 불감당이 불감당인거죠.

 

지금 거리두기로써 부자청년을 자살치 못하도록 했는데

부자청년은 포기 못하겠다고

등돌리고 가 버립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틈을 노려서 또 자살할려고 들이대는겁니다.
저꾸 행함의 세계에 뛰어들려고 한다는 겁니다.
간격을 보라는 취지인데
부자청년이 못 본 간격을
역시나 못 보고 역시나 행함을 들이대는 겁니다.
간격이라는 믿음을 볼 수 없는 그 정도로 어두운 눈이요 병든 몸이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또 배려하시고 섬기시고 만져주고 돌아봐주시고자

베드로를 부자청년 보다 더 더 더 단절 시키는 거리두기를 하시는 겁니다.

넌 환자고 난 의사야
이 간격만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자살방지의 배려가 넘어오시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우리의 대표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특히 자살한 목사처럼 나는 부자청년이 아니라 거지나사로가 나의 목표요 표본이다 라고 우기는 자들처럼

 

베드로가 마침 그런 인간들을 대표 대변해서
(역시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 줍니다.)

난 다 버리고 거지나사로가 되었습니다. 라고 들이댈 때

 

주님은 역시나 거리두기로써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 보다 더 어려워 부자가 등돌렸듯이

 

인자는

이방인으로부터

집으로부터

아내로부터

형제로부터

부모로부터

자녀로부터

 

희롱

능욕

침뱉음

 

이라는 거리두기 간격벌리기

간극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더 더 더 단절의 단절의 단절을 격게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연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할자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불가능성입니다.

 

그럼 베드로도 부자처럼 등돌리고 근심하며 돌아서야만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돌아서는 모습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전재산을 베드로 말 마따나 다 버렸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말씀 대로 희롱 능욕 침뱉음을 받아서 일까요?

 

둘 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신 희롱 능욕 침뱉음을 당했고

그것도 남이 아닌 베드로에게

바로 우리에게서 말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도리어 베드로를 우리를 만져주시고 돌아봐주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근심하며 등돌리고 돌아서 가버리지 않는 겁니다.


베드로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 보다 옳도다 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소경된 눈을 뜨게 하셔서
부자청년이 못 본 간격 속에서 뭐가 나오는지를 새 눈을 창조해서 박아 넣어서
보여주십니다.

뭐가 보이나?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하심이 보입니다.

바로 그것이 베드로를 붙잡은 겁니다, 등돌리고 돌아가 버리지 않도록
자살하지 않도록

닭이 꼬끼오 꼬끼오 꼬기오 울어야만 베드로는 그 간극에서 뭐가 나오는지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 닭의 울음이 내가 무시했던 무능하다고 무가치하다고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라고 취급한
십자가의 죽음 닭의 울음이다는 겁니다.
대신 죽으심입니다. 

 

베드로도 역시나 복수심으로 가득한 자신의 내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 병을 고칠 자력이 없습니다.
아무도 못 고칩니다.
돈만 뜯깁니다.

그 불가능성의 간격인데

어떻게
저 부자는 못 버렸지만

나는 버렸다는 겁니다.

행했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이란 모두 복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언제 들통나느냐?

경쟁자 한 놈만 붙여 봐도 금방 들통납니다.

부자가 실패하니까 그 실패의 자리에 자신은 성공했다고 들이대는 겁니다.


부자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자리를 포기 못합니다.
부자를 포기 못합니다. 어릴적 부터 지켜온것 포기 못합니다.
실패로 도저히 못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 베드로도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어리석습니다.
무능합니다. 원래 무능 그 자체인데
자꾸 실패하지 않는 성공했다고 안무능하다고 우기는 허세 뿐입니다.
그 허세 허구 허상 속에 베드로가 들어갈려고 할때
주님이 빼내주시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요나의 표적입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포기 못하는 베드로에게
유일한 구원의 방식은 대신 죽으심 뿐입니다.

요나의 표적
곧 유일하게 간극에서 나오는 희롱 능욕 침뱉음이 그 간극 사이에서 나오는 겁니다.

누가 우리 예수님을 희롱 하고 능욕하고 침뱉었을까요?

남이 아닌 너야 너!!

피해자 라고 우기는 너 야 너~~~
 

그 동안 부자청년으로 인한 비교와 자신도 모르게 자리잡은 적개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반작용으로써 변증법으로써 저 사람은 못했지만 나는 했다고

 

꽁꽁 숨겨놓은 것이 그만 방심한 사이에 펑 하고 터져나오는 겁니다.

주님이 부추깁니다.

너희는 못하는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하니까

동기부여가 되어서

나는 하나님 편 맞지요? 라고

미끼를 덮썩 물어버리는 바람에

속에 감춰놓은 복수심 악마성이

자기는 행했다고 자기는 말씀을 지켰다고

자기는 주님과 동일 합일 연합했다고 자기도 모르게 발설하게 되어버립니다.

 

여기에 주님의 섬김은 베드로를 근심하여 등돌리게 하는게 아니라

부자청년처럼 포기 못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시는 방법이

주님의 붙잡아주김이 뭔고 하니

 

인자가 희롱 능욕 침뱉음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붙잡는 방법입니다.

베드로 조차도 행함에서 벗어날수가 없기에

그렇다고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을 믿어주시는게 아니라

(인간의 믿음 조차도 행함이며 인간의 믿음은 결국 복수심이요 적개심입니다.)

성령 받으면 벗어날수 있다?
성령 받아서 그 적개심을 더 정당화 하고 오히려 더 펼치고 있습니다.
성령이 멍청한 바보가일까요? 그 노림수에 놀아나게?
그 탐욕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아주 당연시되고 정당화 되었습니다.
악령 받아놓고 성령 받았다고
성령 운운하는 거죠.

 

예수님 본인이 베드로로부터, 우리로부터, 나로부터,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함으로써

베드로를 붙잡는다는 겁니다.

 

참 아이러니 하죠?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철저한 모순
 

이것이 원인 없는 결과 곧 은혜요 용서요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호한 베드로의 전재산 버린 행함이 그 원인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 영생을 얻게 되는 결과이니

원인 없는 결과가 아니라 은혜가 아니라
에수님의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함이 없이
예수님의 믿음이 필요없이
의사 필요 없이


원인 있는 결과 곧 행함이
, 복수심이, 살인의지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가 구원이 된다니? 말도 안되잖아요!!

 

그래서 십자가(예수님의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하심)이 싫어서 인간은 불가능성이 아닌

가능성을 추구하는 겁니다.

악령 받아놓고 성령받았다고 은근슬쩍 그 간격 속에서 나오는 것을 빼버리는 겁니다.
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저것을 피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내가!! 남이 아닌 내가!! 예수님을 희롱 능욕 침뱉고 있음을 들통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불가능성은 그야말로 불가능하기에 빈영역 빈공터로만 남겨되는 잉여인 겁니다.

다들 미끄러져 버리는 겁니다.

부요한 초과잉적 잉여입니다. 다들 모조리 다 미끄러뜨려 자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원수로 들통나야만 합니다.
안들통나는게 아니라 말이죠.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안들통났다고

절대로 천재성을 포기 못하겠다고

부자청년은 등 돌리고 돌아섰지만

 

베드로는 이 간극 곧 희롱 능욕 침뱉음을 들통나서 미끄러져서

남이 아닌 내가 주님의 원수임을 드러나도록

주님의 섬김 때문에 알게 되는 겁니다.

붙잡은신바가 된 겁니다.

만져주신바가 된 어린아이 그 자체인겁니다.

어린아이가 될 필요가 없이 어린아이로 태어나게 하신 섬김이다는 겁니다.

 

즉 베드로에게 부자청년 보다 더 큰 짐을 지우는 피해자가 되어라

희롱 받고 능욕받고 침뱉음을 받아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자가 받는다는 겁니다.

이방인으로부터

집으로부터 집은 인물도 아닌데 사물이요 공간이요 시간을 담은 그릇으로서의 지구공간인데

집을 중심으로 한, 배치된 인간들로부터 곧 성전으로부터

아내로부터

형제로부터

부모로부터

자녀로부터

 

베드로가 아닌 인자가 받는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저들 중에 하나로 배치되어있는 저들 속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저들 속에 있는 겁니다.

 

즉 피해자가 아니라 역시나 가해자일 뿐이다는 겁니다.

 

인자만이 피해자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가해자입니다.

모든 인간의 믿음은 결국 복수심이다는 겁니다.

 

내가 희롱 능욕 침뱉음을 당하기는커녕

예수님께 퍼붓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런 글을 적는 것 자체도 예수님께 퍼붓는 짓입니다.
멈추면 되잖아?
멈추고 안 적으면 그러면 안퍼붓는 겁니까?
뭘 해도 다 퍼붓는 겁니다.
이런 내 쪽 세계에서는 곤고함 뿐입니다만(롬 7장)

주님 쪽에서는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보라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는 겁니다.(롬 8장)

이 간격을 이 모순을 더 벌리면 벌렸지
그 원인을 우리는 찾아낼래야 찾아낼수가 없습니다.
그냥 비밀 그 자체입니다.

그냥 누릴 뿐입니다. 지켜서 행해서 설공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무능해서 누리는 겁니다.
그 자체입니다.
내가 가입해서, 개입해 뭘 한다고 뭘 안한다고, 더 좋고 더 나쁘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우리는 주님께 퍼부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안퍼부우면 다행일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인데

그 다행이 다행으로 안다가오고

반드시 퍼붓는 입장에 놓여진 구조 속에 있다는 겁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을 뿐이지만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다는 겁니다.
이 자체가 간극 자체 입니다.

왜 이 간극을 못 보는 것일까요?
이 모순을 없애버리고 싶은 겁니다.
걸림돌 거리끼는 껄끄러운 불쾌한 불편한

숭고 이거든요 거룩입니다. 거룩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슈미트의 정치학에서

어린아이의 정치성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내가 왕따 안 시키면

내가 도로 왕따 당하도록 되어 있다는 구조 말입니다.

 

즉 갇혔다는 구조인 겁니다.

 

베드로야 너도 갇혔어

내가 빼내주어야 해

부자청년과 다르지 않아

 

우리는 그 자살한 목사와 다를바 없습니다.

주님이 붙잡아 주냐의 문제이지

우리 힘으로 안 자살하고 버틸수 있는 재간이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연자맷돌 씌워서

서로 자살하라고 몰아세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막살지 않으면 자살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막살면 자살 안할까요?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공백 이 간격에서 나오는 희롱 능욕 침뱉음이 뭔지 몰라서

미끄러져지는 식으로 우리에게 하나의 힌트 팁을 주는 겁니다.

즉 팁준다고 해 놓고서는 그 팁이 뭔고 하니

 

감추어 졌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팁이냐? 힌트가 이게 믄 힌트고?

 

감추어졌다는 것이 힌트요 답입니다.

즉 안된다는 겁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난바 이고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감추어졌다는 겁니다.

 

이것 보다 더 큰 힌트가 어디있겠습니까?

 

거의 정답이요 다 알려준 바 되는 입에 떠먹여주는 것인데

줘도 못 먹냐 말이죠.

 

역시나 같은 답 같은 힌트로써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19: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19: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9:29, 개역)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래 그래 베드로야 너도 부자청년을 이기고 싶은 복수심은 어쩔수 없지?

그래 너도 갇혀있기는 마찬가지야

내가 그래서 왔잖니

 

너가 이겼다고 착각한 것, 부자청년은 실패했지만 난 성공했다는 것,

나는 너를

제일 끄뜨머리에 둘게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단다

 

지금 베드로는 부자를 이겼다고 먼저된 부자 보다 더 먼저가 되었다고 하는

어쩔수 없는 저 모습을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심으로써 베드로를 제일 끝 제일 나중에 두시는 겁니다.

 

 

(20:10, 개역)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20:11, 개역)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20:12, 개역)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20:13, 개역)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20:14, 개역)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20:15, 개역)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즉 베드로가 [거지나사로 되자] 그래서 전재산 다 버렸기 때문에 거지 나사로가 된게 아니라

주님이 거지나사로 될 필요가 없이 이미 넌 거지나사로야 라고

괜히 거지나사로 되자로 비교해서 이길려는 복수심을 펼치는게 아니라

 

제일 끄트머리에 두심으로써 무능케 만들어 버리는

 

거지나사로처럼 목소리를 상실 당한

목소리 거세를 통해서 영생이 임한다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임금 삼는게 아니라
내가 너희의 임금 되어 주지 않으면
먹고 배불러서 임금 삼고자 하기에
도망치시는 겁니다.
 

즉 부자청년이나 베드로나 둘 다 무엇을 해야 영생 얻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뭐!!!~~~~~ 무엇을 해? 한번 해 보렴? 거봐 거봐 뭘 해도 다 복수심만 나오잖아

넌 안돼 내가 해야 돼

그 복수심에서 내가 너를 꺼내줄게 라고

 

들추어내시고 하나는 버려둠을 하나는 데려감을

하나는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이 없어서(만져주심이 없어서-어린아이 취급)

다른 하나는 간극을 보여주셔서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하심이 (이미 어린아이 그 자체이기에 만져주셔서)

아 저것 때문에 영생이 이미 왔구나를 그 간극 속에서 나오는 세가지 증거물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이미 영생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뭘 해서 획득 하는게 아니라
쟁취 하는게 아니라
실패 그 자체가 영생이다는 겁니다.


이 영생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취급했던 겁니다. 닭울음
그 간극
이것이 그 자체로써의 영생입니다.

될 필요 없이 이미 그 자체

 

그래서 끝 제일 끝에 두시겠다는 겁니다.

누락 되어도 상관 없는 무능함 속에 말입니다.

 

거지나사로 될 필요 없죠?

어린아이가 될 필요 없죠?

 

이미 거지나사로요

이미 어린아이 인

 

그 자체

 

바로 간극 속에서

 

희롱 능욕 침뱉음 받으심을 통해 이미 다 이루신바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뭘 거지나사로 되자 라고 하나요?

이미 거지나사로인데

 

행함 필요 없이, 될 필요 없이

 

이미 거지나사로로 살고 있음을 누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벗어나고파도 거지나사로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미래 뿐이다는 것

 

이것이 막살기 이다는 겁니다.

 

막살기 하니까 또 새삼스럽게 막살려고 하니까

양쪽다 말려드는 거죠.

제발 말려들어서라도 그런 의미가 아닌

잉여의 의미라는 것을 알면 되겠지요.

 
막살기 할 필요 없이 이미 막살기 그 자체인 겁니다.

막살기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

막살기도 안생겨요 ~~~~~

 

이미 막살기인데 뭘

 

즉 내가 막살기 하냐 안하냐

반대로 내가 안막사냐 안막살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 곧 항아리 속의 쥐처럼

항아리 자체가 백날 새끼 까도 막살기 라는 구조 항아리 이다는 겁니다.

 

갇혔다는 겁니다.

부자청년 보세요 안 막살기 라는 구조에 갇혀 버렸기에

등돌렸고

 

베드로는 또 그것을 보고 엉터리로 해석한 겁니다.

본인은 막살기 라는 구조에 갇힌줄 모르고

본인이 자기가 막살기로써 막 버렸다는 겁니다.

전재산 모든 것을 막 버렸다는 겁니다.

본인이 한게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은혜죠

그 은혜가 뭔지를 알려주시는 방식이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받으심인데

어딜 감히 자기가 잘 나서 전재산을 버렸다고 할 수 있냐 말이죠

그런다고 영생 얻냐?

막살면 영생 얻을수 있냐 말이죠?

 

그렇다고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안막살았다고 영생 얻냐 말이죠?

 

둘 다 아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막 희롱 당하심 막 능욕 당하심 막 침뱉음 당하심 이다는 겁니다.

 

그카이 또 안그런척 하면서

에이 주님 그러면 그런 상황을 피하면 되잖습니까?

과연 피할수 있을까요?

인간이 지구 끝까지 따라와서 결국은 막 희롱하고 막 능욕하고 막 침뱉는데?

베드로 너야 너

김대식 너야 너

너가 예수님에게 그러고 있다는 겁니다.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무능합니까?

 

그 다음 너 차례이다는 겁니다.

나중 되게 하실려고

그래야 먼저 되니까

 

이것은 말장난처럼 하나 마나 한

왜 이런 어리석은 것에 주님은 충성하시는지?

 

이 감추어진 것을 풀 재간이 과연 있을까요?

이 모순을 무슨 수로 감당하실래요?

 

인간은 결국 쥐 뿔도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할테니
거지나사로는 목소리도 상실 당한채 아브라함이 다 알아서 처리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라는 겁니다.
불가능한 소리 입니다. 가만히 있을 인간은 없습니다.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소리입니다.
참 의미 없다 는 있으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이것이 세미한 음성이요 칠천명이요 7에 70이다는 겁니다.

 

애굽 왕 바로 앞에서는 쥐뿔도 아닌 쥐죽은 듯이 가만히 찍소리도 못하고 있으면서

왜 여호와 앞에서는 심심하면 덤비냐 말이죠

 

이상하잖아요

눈에 보이는 권력 앞에서는 찍 소리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앞에서는 온갖 원망을 다 하는 겁니다.

무능하심을,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를 계속적으로 고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긍휼 은혜로만 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입니다.

 

제가 정신과 의사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환자들 중에 아주 재미있는 환자가 있는데

항상 권력자 앞에서는 얼마나 굽신 굽신

90도 인사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예의를 다 갖춥니다.
그리고 딴 놈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다구칠 정도로 귀찮게 합니다.
얼마나 괜찮아 보입니까?

그런데 자기 보다 조금이라도 약한자 있으면

아예 짖 밟아 버립니다.
권력자 없는 상황에서는
아주 무참하게 모독합니다.
군대에서 늘 흔히 격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그 환자만의 문제가 아닌

세상 구조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이런 식입니다.


이것이 갇혔다는 겁니다.
자력으로 벗어날 인간이 없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직접 짠 세상 구조입니다.

은혜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은혜가 없는 세상의 구조를 상대적인 대치로써 보여준 겁니다.

 

그 어떤 구조에 들어가 봐도 이 말 한마디로 다 설명 됩니다.

 

남자라면 군대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구조입니다.

강자 앞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며 헌신하지만

약자 앞에서는 자신이 그 동안 감당한 모든 굴욕에 대한 보상을 약자 앞에서 다 푸는 겁니다.

 

감옥소 실험에 대해서 말했죠 스탠퍼드 감옥 실험(영어: Stanford prison experiment, SPE)

 

교회라고 해서 다를바 없습니다.

약자와 강자의 구조입니다.

믿음도 행함도 다 그런 복수의 구조로 작동합니다.

 

모든 인간이 다 가해자 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유대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구조에 예수님이 그 속에 들어왔습니다.

뻔한 겁니다.


죽도록 되어 있지

뭐 영웅이니

구원자이니

메시아 이니 다 거짓말입니다.

이용꺼리가 있기에 굽신 거리고


이용꺼리 없으면 그냥 죽여 버립니다
.

어쩔수 없습니다.

 

구조 라니깐요

 

나는 예외다

 

그런 자 없습니다. 예외 없습니다.


그래서 집 아내 형제 부모 자녀를 운운하신 겁니다.
행하라는 취지기 아니라 갇혔다는 구조를 말하는 겁니다.
 

예외는 예수님만 만들 뿐입니다.
그 예외라는 유일한 간극은 요나의 표적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함 뿐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는 보여줄게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갇혔습니다.

가두기 위해서 율법이 가입된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어릴적부터 지켰다

말도 안되지요

한술 더 떠서 베드로는 지금 다 버렸다

그것 또한 말도 안되는 겁니다.

 

영생은 무엇을 하면 되느냐가 아니라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함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누가 알았으리요?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모르도록 감추었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간극은 안 보입니다. 좁은 문은 없습니다. 안 보입니다.
예수님 이라는 문은 없습니다.
없음 으로 작용합니다.
예수님을 백날 연구하고 백날 살펴 보세요 문이 있는가?
그 없는 문을 문으로써 열고 들어갈 자가 없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라는 3일의 단절 의 단절 의 단절을 말하기 위해서

 

앞에 나열되는 이거는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그것도 아니야

베드로 왈 나는 전부다 버렸는데요? 그 부자는 못했지만 나는 했어요.

그것도 역시 아니야

 

뭘 해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포기 하라는 겁니다.

막살지 않았다 라고 말하지 말아라 라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 되자 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너희는 못하나 하나님은 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인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뭘 하는고 보니

 

이 세가지 간격을 벌리는 것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거리두기를 누리면 됩니다.

 

주님께 다가 갈려고 하니
예수님은 도망치시는 겁니다.

보여줘도 볼 생각 조차도 안하는 겁니다.

 

희롱 당함이 그 간격 너와 나 사이에 있다는 겁니다.

능욕 당함이 그 간격 곧 베드로와 나 예수 사이에 있다는 겁니다.

침뱉은 당함이 그 간격 너와 나 사이에 있다는 겁니다.

 

세례는 이 땅의 갈라짐

예수님이 대신 심판 받으심이 땅의 갈라짐이라는 미세간극 미세차이로써

히스테리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감기가 걸리니까 숙주로써 콧물이라는 증상이 나타나듯이

세례는 감기가 장악했다는 증상으로서 나타나는 겁니다.

곧 할례는 인간의 손으로 하는 할레가 실패함으로써

실패한 거세로써 마음판의 할례로

세례가 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거리 두기에 성공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내가 다가가는 것이 실패 했고

주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와서 다가와 만져주심이 성공 했다

다 이루었다

넉넉하게 이루었다는 그 증상으로써

세례라는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자기가 연합하고자 해서 나타나는게 아니라

베드로가 전재산 버려서 영생 얻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해

제일 나중에 되었기에 목소리를 거세 당한 실패당했기에

나타나는 증상이 다 이루었다는 세례 연합이다는 겁니다.

사드와 함께 칸트를 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강박증(성공병)과 함께 히스테리를 라는 의미로

한 쪽이 데리감을 당함과 함께 다른 한 쪽은 버려둠을 당함으로써

그 차이 그 간극을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과 함께 구원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영생에 대해서 물었잖아요?
그럼 영생을 알려면 누가 자발적으로 등돌리고 가는가를 통해서만 본다는 겁니다.

함께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증상입니다.

우리는 완전 거꾸로 생각한 겁니다.

베드로가 이런 실패를 우리를 대변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실패 라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실패 하니까(실패를 인정안하고 거부해서 돌아선 겁니다.)

베드로 나는 성공했다는 겁니다.


차이 둘려고 하는데
간극을 벌릴려고 하는데
저 부자에게 연합할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죠.
 

나는 비인간이 아니라 나도 인간이다는 겁니다. 봐라 인간 다운 인간 답잖아?

베드로도 역시 비인간이 아니다는 주장인 겁니다.

나는 인간의 도리를 한 것 맞죠
인간 답게 인간이 된 거 맞죠.

확 미끄러져 자빠지는 겁니다.

 

비인간

바로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의미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가능성의 말이 아닙니다.

못 돌아갑니다.

결국 하나 마나 한, 아무 의미 없는

무능함 = 비인간

그런 뜻입니다.

 

돌아갈수 있는 행함이 아니라 못돌아가는 불가능성의 의미입니다.

 

돌아갈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써 누리는 겁니다.

거리두기 로써 말입니다.

 

오히려 실패로 진짜 돌아가 버리면

실패한 자신을 또 성공했다고 실패하자를 이루었다고 자랑할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행동은 복수심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복수심이요

예수님을 사랑하겠다는 것도 복수심이요

남을 이겨보겠다는 비교성에서 나온겁니다.

교회 다니는 것도 다 복수심이요

그렇다고 교회 안 다닐 거야 도 다 복수심입니다.

피해자라고 우기는 것도 복수심이요

이제는 아예 가해자라고 자랑하는 것도 복수심이요

이런 글을 적는 것도 복수심이요

나는 너처럼 글은 안 적지롱 이라는 것도 복수심입니다.

 

갇혔다는 겁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부자청년의 근심이 남의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베드로처럼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하심은

베드로가 부자청년이 못하는 것을 베드로는 했기 때문에 먼저가 되어서가 아니라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이 기능이 베드로라는 존재 보다 베드로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도리어 이 간극으로 인해 거리둠을 당하는

거세 당하는 입장

실패함을 당하는 입장에 놓여진

긍휼의 대상일 뿐이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되돌리려는 그 섬김의 대상일 뿐이다는 겁니다.

 

부자청년의 등돌리고 돌아섬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베드로는 역시나 행함 곧 자신의 믿음을 펼치지만 그것 역시나 복수심입니다.

 

그 복수심에서 갇힌바 된 것을 꺼내시는 섬김은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하심 뿐입니다.

 

그 간격이 우리의 시선을 거리두게 하심으로써

나의 행함이 아닌, 나의 믿음이라는 복수심이 아닌

 

예수님의 무능한 믿음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대신 매 맞음으로써 우리를 낫게 하시고자 한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의 낮아지신 마음

 

비인간 되심에 충성하신

희롱당하는 인간 아닌 비인간

능욕당하는 인간 아닌 비인간

침뱉음 당하는 인간 아닌 비인간

 

이 인간 취급 못받는 비인간으로써 희롱 능욕 침뱉음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무능함을 다 이루신 겁니다.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비인간] 예수님과 [인간] 부자청년의 차이 (18:18-27)

2014/08/27 19:56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비인간으로써]의 인자와 [인간으로써]의 부자청년의 근심 (18:18-27)

 

모든 인간을 거부하는 비인간

 

큰 부자 [인간] 청년 과 [비인간]으로써의 인자

 

사람이 아니무이다.

 

(18:18, 개역)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19,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20, 개역)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18:21, 개역)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18:22, 개역)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18:23, 개역)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18:24, 개역)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18: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오늘 본문은 인간과 비인간의 대립으로 보시면 됩니다.

 

부자 청년비유인데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18:18, 공동) 유다의 지도자 한 사람이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18:18, 현대어) [부자 청년;19:16-26,10:17-27] 한번은 유대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18:18, 가톨릭) 어떤 권력가가 예수님께, “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지도자 라고 권력가 라고 보시면 됩니다.

벼슬에 있으면서 나라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 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오는데

요즘으로 치면 공무원 고급공무원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즉 인간이라면 다들 부러워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심지어 자녀가 있다면 바로 저런 사람이 되어라고 모범으로 멘토로 삼는 자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부러워 하는 인간

인간 다운 인간

 

인간의 표본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 권력가 라고 하면 바로 거룩한 사람과 동격인 셈입니다.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에 의하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젋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청년이라고 했고

심지어 큰 부자 라고 누가복음에서는 말하고 있으니

 

다들 부러워도 보통 부러워할 정도가 아닌 그야말로 표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겸손을 갖추어서 예수님께 어쭙고 있습니다.

 

즉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당신은 선한 분이 맞기 때문에

그리고 선생님이 맞기에 알려주실 수가 있습니다.

 

라고 역시나 인간 답게 인간 중의 최고의 인간 답게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생님의 답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고서

진정성을 담아서 묻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지도자로써 곧 모범으로써

백성을 대변해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의 부요함도 백성을 위한 것이고

그의 삶도 백성을 위한 삶이고

그가 어릴적부터 지켜왔다는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그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의 삶으로써

역시나 영생을 얻을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도

백성을 위한 백성과 더불어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세 이다는 겁니다.

 

안 부럽나요?

 

저는 억수로 부럽습니다.

 

이런 인간의 삶이 그야말로 표본 맞습니다. 맞고요

이런 표본의 인간이 되고픈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이것 조차도 강요된 선택입니다.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갖추어진 자아이기 때문에

결국 자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아로 갖추었고

거기에다가 가장 완벽한 율법까지

거룩까지

오늘날로 치면 성화까지 갖추는 바람에

그 강요된 선택이 즉 자유의지죠

가장 대중의 부러움을 사면서

아 저런 인간이 있기는 있구나 라고

본보기가 됨으로써 희망을 갖게 하는 겁니다.

 

명량이라는 영화가 바로 그런 취지입니다.

저런 이순신 같은 사람이 없으면 희망이라도 가지지 않을터인데

괜히 있는 바람에 헛바람이라도 불어서 희망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 희망을 대변하는 것이 이순신이고

오늘 본문의 표본적인 인간 부자청년입니다.

그것도 지도자 곧 백성을 섬기는 백성만 생각하는

리더십이 가장 뛰어난 인간으로써 최고인 젊은 부자청년입니다.

 

바로 이런 자를 배경으로써 깔고서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배치시키십니다.

꿈에도 몰랐지요

예수님을 드러내는 도구로써 부정적인 배치물이다는 겁니다.

이순신 조차도 부자청년 조차도 다 그러합니다.

악마도 그런 취지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이 부자청년과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부자청년의 겸손으로 다가오는 최대치의 예의를 거부합니다.

차단하고 단절시켜버립니다.

 

마치 그 어떤 물에도 묻지 않고자 하는 기름과 같습니다.

절대로 썩이는 법이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 간격이 분명하고 또렷해 집니다.

 

만약 부자청년이 들고오는 그 겸손이든 뭐든 그 어떤 것에도

조금이라도 물에 물탄 듯이 썩이는 것이 있다면

 

그 차이는 불명확해 지고 흐릿해지면

그 경계선도 모호해 집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물에 물 탄 듯 다 모호한 겁니다.

 

안그렇다면 그 차이는 그 경계선은 아주 명확하게 경계선이 명료하고 또렷한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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