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8:35-43)

 

주여! 저는 단절된 자 맞습니다.

이 저주받은자도 주의 긍휼로 먹고 살지 않습니까? 고쳐주소서.

잃어버린자를 되찾는 희롱 능욕 침뱉음 받는자

 

(18:31,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18:32, 개역)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18:33, 개역)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18:34, 개역)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18:35, 개역)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18:36, 개역)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18:37, 개역)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18:38, 개역)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8:39, 개역)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18:40, 개역)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18:41, 개역)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18:42, 개역)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18:43, 개역)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음성이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그런 음성이 아닙니다.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음성이다는 겁니다.

그럼 귀 있다 에 또 포인트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아니 귀 없는 자가 누가 있냐 말이죠?

 

그러니까 [귀 있음] [존재하는 귀]에 포인트가 있는게 아니라

그 정반대로 음성이 귀를 새롭게 만들기 때문에 새로운 귀

그 새로운 귀 있는 자에게만 이 음성이 들린다는 겁니다.

고로 음성이 우리의 평상시 귀로는 못 듣는 음성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음성] [그 소리] [그 목소리]는 결국 [소리 없음]
단절된 소리

없는 소리

곧 세미한 음성

 

있으나 마나 한 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

아무 의미 없는 소리

들릿듯 말 듯 아무리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렇다고 없다고 부정은 할 수 없는

[부재로써의 소리]

 

거세당한 소리

무능한 소리

그럼에도 그 어떤 능력의 소리 보다 더 뛰어난 소리이다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쾌하고 찝찝해서 빨리 지워버리고 싶고 삭제하고픈 소리

 

응시로써의 음성이다는 겁니다.

얼룩으로써의 소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함으로써 삼일이라는 그 간극 속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인자의 찢겨지고 매맞고 못박히고 찔림을 당함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27:14, 개역)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15:5, 개역)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23:9, 개역)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주님은 죽는 그 순간 까지도 이 간극 만들기에 전념하십니다. 침묵으로 일관 하십니다.

물론 요한복음 18-19장에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꼬박 꼬박 오히려 정반대로 반박을 하십니다. 모순 그 자체죠.

말씀하신 그 내용 자체가 단절의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같습니다.

내 소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단절이요 간극입니다.


(18:29, 개역)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18:30,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18:31,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18:32, 개역)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8:33, 개역)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8:3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18:35, 개역)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18:3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18:37,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18:38,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아니 소리가 세상에 속하는 소리가 있고 세상에 속하지 않는 소리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단절로써의 소리입니다.

 

 

지옥간 부자는, 또 역시나 빌라도 또한 마찬가지로 이 간극에서 나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건너 뛰고 선지자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이미 선지자는 깔려 있고

지옥간 부자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선지자가 하는 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딱 하나입니다.

 

간극, 단절, [그 자체]입니다.

 

거지나사로 되기 할 필요 없이 그 자체

이스라엘 되기 할 필요 없이 그 자체

십일조 낼 필요 없이

기도 할 필요 없이

안식일 지킬 필요 없이

교회 되기 할 필요 없기

 

그 자체 로써

 

간극되기 단절되기 할 필요 없기 그 자체 이다는 겁니다.

 

형제들에게 보내달라는 그 선지자나 아브라함선지자나 하는 일을 딱 하나

! 지옥간 부자 너도 역시나 무시하는

바로 너와 나 사이의 간극

그 간극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무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소리만 하는 겁니다.

 

헛소리죠

하나 마나 한 소리죠

아무 의미 없는 소리죠

무능한 소리죠

땡 탈락 마이너스 100점 소리 말입니다.

 

그 간극에서 나오는 소리는

희롱당하심 능욕당하심 침뱉음 당하심으로써 나오는 소리입니다.

 

침묵의 소리입니다.

 

침묵인데 침묵이 어떻게 소리가 됩니까?

없음인에 없음이 어떻게 없음이 됩니까?

말장난이다 라고 양탈무리들이 얼마나 씩씩거리는지

 

그러나 귀 있어도 들을 귀 없는 지옥간 부자는

안듣끼는데 목소리가 있다고 하니

내가 잘못 들었나 안듣끼네 정말 기가막히고 코가막힌다고 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_CK9MlgjPc8

 

예수님의 삼일이라는 간극에서 나오는 희롱 능욕 침뱉음을 매도하지마 ~~~

 

거지나사로 보세요

죄인 주제에 목소리가 어디 있어~~~
목소리가 거세당한채로

 

아브라함이 다 대신 변론합니다.

 

어딜 감히 거지나사로 보고 오라 가라 명령하느냐 말이죠

 

이렇듯 목소리 조차도 음성 조차도 응시물로 작용합니다.

 

(10:27, 개역)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아니 둘다 목소리가 제거 당한자들인데

둘이 니 캉 내 캉 서로의 음성을 듣고 서로가 알수 있는 싸인

표적으로써 작용하는 음성이다는 겁니다.

 

즉 양은 다른 음성을 못 듣는다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시츄에이션 입니까?

아니 남들이 다 듣는 소리를 못 듣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음성만 듣는 귀라는 겁니다.

 

위에서는 예수님의 음성만 못 듣는 귀 라고 모든 귀를 단절 시켜버리고

이제는 모든 사람이 듣는 소리를 못 듣는 단절된 귀 라는 겁니다.

 

이렇게 성경의 언어 곧 방언은 단절로써만 표현하는 방식의 언어표현입니다.

성경 전체가 이런 식입니다.

소리 없음 으로서의 소리 곧 세미한 음성

단절의 음성이 말씀이다는 겁니다.

 

 

마치 야곱을 붙잡고 밤새 씨름하는 자처럼

누가 봐도 야곱이 붙잡는데

사실은 도깨비가 야곱을 붙잡고 밤새도록 놓아주지 않는 겁니다.(혹부리영감)

그래놓고 편파해석을 합니다.

야곱이 놓아주지 않는다고 뒤짚어 씌워 버립니다. 부정의 부정입니다.

 

그 단절을 그 어떤 방법으로도 메울 길이 없습니다.

그 결핍의 간극을 무시하고 건너뛰고

그 협곡을 매우고 그 움푹파인 웅덩이를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평평하게 평탄길로 시멘트 발라서 길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다음날 일어나보면 또 웅덩이가 파여 그 간극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겁니다.

 

얼굴에 자리 잡은 얼룩 점을 빼면

그 다음날 또 생기고

또 점 빼면 또 생기고

 

이 자체가 불쾌함이요 응시물이요 반작용을 유발케 하는 부정성이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선지자는 외칩니다.

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 라고

 

하면 할수록 평탄케 하는게 아니라 그 협곡이 더 심해지는 겁니다.

그 간극을 더더욱 벌려져서 극과 극으로 치닫습니다.

 

야곱 쪽에서 그 간극을 좁힐 재간이 없습니다.

밤새도록 씨름하여 싸워봐도 안 됩니다.

 

그래서 허리 환도뼈를 치십니다.

 

절뚝 절뚝 거립니다.

이것이 평탄케 되었다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일방적인 편파해석이요 뒤짚어 씌움이요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아니 야곱 자체 그 자체가 이제 간극을 웅덩이를 메운자가 아니라

그 반대로 야곱 [그 자체]가 이미 간극 [그 자체]

응시물 [그 자체]

얼굴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얼굴의 점, 얼룩, [그 자체]인 겁니다.

 

가는 곳 마다 이 야곱을 죽일려고

점 빼듯이 얼룩을 제거하고 싶어서 환장하듯이 달려들고

불쾌한 점을 빼버릴려고

주변에서 이유없이 덤벼드는

 

바로 [그 자체]인 이스라엘이 그 부러진 그 환도뼈 그 틈새에서 나오는 겁니다.

마치 레위기의 굽이 갈라진 그 틈새 그 자체가 예수님의 모습이듯이

 

그러니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 언제 어디서 어떤 시간에 놓여지든

이유 없이 주변에서 달려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누구의 운명처럼 그 자체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파해석 하기를

하나님과 겨루어 싸워 이긴자 라고 표현한 겁니다. 뒤짚어 씌운 겁니다. 이긴적도 없는데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이겼다 라고 미래완료로 표현해 버립니다.

(그는 그냥 무조건 이유없이 복 달라고 했을뿐입니다. 그래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즉 그 정도로 다급합니다. 모조리 앞서 보낸 이유가 강을 건너면 무조건 죽기 때문입니다.

천국 언제 옵니까 영생 어떻게 얻습니까? 7번 용서했는데 몇 번 더 용서할까요?

다 배부른 소리입니다. 지금 당장 죽는 판국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냐 말이죠!!

형 에서가 나를 죽일려고 강 건너편에서 칼 갈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건져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살려달라고 무조건 붙잡은 겁니다.

갇혔다는 증거입니다.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가 없다는 겁니다.

이 음부의 권세에서 그 권력을 가장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무능함을 호소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문제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자신에게만 떨어진 발등의 불입니다.

불 붙은 자에게만 심각합니다.

갇혔고 포로되었고 억매인 자에게만 살려달라고

오늘 본문 소경에게만 그 간절함이 있는 겁니다.

과부에게만 아무리 모두가 하나님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해도

나에게 만큼은 구원자 곧 이 난제를 해결 해 줄수 있는 유일한 자이다는 겁니다.

즉 그 문제 만큼은 철저하게 무능하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입니다.

무능 곧 육의 해결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육의 통로 환도뼈를 쳐서 그 틈새에서 나오는 영의 소욕이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곧 무능의 자리가

이 틈의 간격에서 나오는 겁니다.)

듣기지도 않는데 내 음성을 듣는 양이라고

음성 자체가 선언해 버린 겁니다.

 

들을 귀 있느냐 라고 성경박사들(바리새인들)이 유무를 따지기 전에

(저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인데 자기 죄인가? 부모 죄인가? 그래서 신학교리를 형성하듯이 성경의 난제를 푸는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배부른 소리죠)

 

이미 먼저 이스라엘 곧 야곱이라는 존재 이전에 다 결정해 버린 상황을

그냥 통보하시는 식입니다.

 

창세전에 이렇게 기록 되었습니다. 라고 기록된 것 읽어주듯이

통보해 버립니다.

일방적인 통보죠

 

어머니와 얼마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펭귄을 보면 부모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 사이에

펭귄에게는 특수한 유치원제도가 본능적으로 있는데

돌아오면 그 수 많은 새끼들이 모여있는 그 유치원에서

자기 새끼를 부릅니다.

오로지 떨어져 있던 단절에서 만남을 성사 시킬수 있는 것은

목소리 뿐입니다. 목소리 만이 유일한 응시물입니다. 표적 곧 싸인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냄새나 기타등등이지요

 

떨어져 있는 그 간극 속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것은 목소리입니다.

그것도 응시물로써의 목소리

즉 희롱 능욕 침뱉음

 

이게 무슨 목소리입니까?

 

소리도 아닌데

 

희롱 능욕 침뱉음이 무슨 소리이냐 말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소리도 아닌데 목소리입니다.

비목소리 비음성

 

목소리도 아닌데 세미한 음성이다고 합니다.

비음성

 

이것만이 유일한 앎의 싸인으로써 표적으로써 서로가 누가인가를 아는 길이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만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진짜 나의 목자 맞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그 어떤 목자도 없는 것이

나의 목자에게는 있습니다.

 

나의 유일한 목자에게서만 나오는 유일한 목소리는

 

바로 삼일 이라는 간극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입니다.

희롱 능욕 침뱉음

 

이것 만이 목자의 음성을 아는 길입니다.

사실은 하나 마나 한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소리죠

아이구 의미 없다.

 

불가능한 의미이거든요

아무 의미 없는 거죠
목소리는 결국 주님이 자기 양에게 들려주느냐에 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들려줘도 못 듣는 귀일 뿐이니
주님의 목소리가 새롭게 들을 귀로 만들어 주지 않는 이상은 의미없는 소리입니다.

 

의미 두고 싶어도 의미가 없는, [의미][의미 없는 진리]의 간극입니다.(바디우)

 

결국 상대적으로 다른 목자는 즉 거짓목자는 이것이 없습니다.

삼 일 이라는 간극은 없습니다.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하심이 없습니다.

 

그 불쾌한 세미한 음성이 없습니다.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없습니다.

나의 허물을 획득해서 담는 증거궤 박스가 없습니다.

인자의 몸은 그 물증을 담는 박스로써의 약속의 몸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저 사람을 좋게 하는 소리 뿐입니다.

 

심일 이라는 간극에서 나오는 희롱 능욕 침뱉음 받는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보이지도 듣기지도 않는 소리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기지 않는 소리

 

참 표현이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표현이지요

괜히 표현한 표현인거지요.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기가막히는 표현이지요

일부러 의도적으로 못 믿도록 하기 위한 표현만 골라 골라서 쓴 것 같습니다.

 

?

깨닫지 못하게 단절

돌이켜 죄 사람 얻지 못하게 단절

고침을 받을까봐 두려워 걱정 단절

 

깨닫지 못하게 할려고 희롱받으시고

돌이켜 최 사함 얻지 못하게 할려고 능욕받으시고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할려고 침뱉음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받고자 다가오는 자는 다 단절되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합니다.

부자청년을 돌려 보내는 이유입니다.

 

영생을 얻고자 다가오는데

구원을 받고자 다가오는데

이제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는 것만 알면 되는데

 

돌이켜 등돌리게 해 버립니다.

 

심판의 날 인자의 날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는 날을 언급하십니다.

 

등돌리게 한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응시물입니다.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는 겁니다.

이것은 부자청년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요구 했으니까 못하니까 등돌린 것 아니냐?

 

아닙니다.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아낌없이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행하라 라는 취지가 아니라 저는 못합니다 라고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못하니까 못하는 것을 제시한 졸지에 예수님과 적대 관계가 드러난 겁니다.

천기도 구별하고 우주의 비밀도 푸는 수학천재인데

1 더하기 1을 못푸는 것을 들통내버리는 그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을 들통내 버리니 등돌려 버리는 겁니다.

 

못하니까 주님이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나오는게 아니라

못하니까 주님이 졸지에 그 일을 하심에 자신은 경쟁자가 되어 버리고

어릴적부터 지켜온 율법이 무용지물이 된 것에 대한 반감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즉 못함을 통해서 주님이 오심이 기뻐하고 더더욱 즐거워 해야하는데

기쁘기는커녕 근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응시물 맞지요

주님의 음성이 졸지에 두 패로 갈라놓는 간극이요 응시물이 된 겁니다.

음성 그 자체가

 

그 간극이 오히려 보이는 자는

아니 보여주심을 당한 섬김을 받은 자는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처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리지만

단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제가 바로 환자 맞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만났으니

의사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고쳐 주세요 라고 돌아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치니까

제자들이 가로막습니다.

가로 막으면 가로 막을수록

더 심하게 고함을 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아니 의사를 드디어 만났는데

환자는 그 의사를 보고 기뻐하지 않고 배기냐 말이죠.

 

정작 소경은 눈이 고장나서 안보이는데 봤습니다.

의사를 봤습니다.

나의 목자의 음성을 듣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이 있어도 그 간격을 못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호수행해야 한다는 것만 의식할 뿐입니다.

그것이 [의미] 있지, [의미 없는 진리], [의미 없는 소경의 외침]은 그야말로 의미 없습니다.

 

아니 누가 누구를 지켜요?

저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갈 뿐이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도망칩니다.

 

고만 고만 하니까 가로막고 경호노릇하겠다고 하지
막상 큰 권력 앞에서는 경호는커녕 내 목숨 하나 챙기기 바빠 내몰라라 하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나보다 권력도 없는 소경이기에

무능하기에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다

땡 탈락

단절되었기에

소경이고 안 보이기에 나는 상대적으로 보기에

가로막아서 잠잠케 하겠다고 간격을 벌려서 예수님을 보호하겠다는 겁니다.

 

그 간극을 제자들 곧 건강한자가 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극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엉터리 간극과 함께 피의 간극이 함께 나타나는 겁니다.

바리새인도 늘 주장하는 간극벌리기입니다.

(저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고 간격이 벌어져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도리어 환자 그들이 이 간극을 벌리는 겁니다.

소경이요 무능한 자요 어린아이가 벌리는 겁니다.

건강한 자와 제자들에게 벌리는 겁니다.

환자이니까 간극 [그 자체] 인 겁니다.

 

간격벌리기를 행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

 

나쁜데 더 나쁘게

이단인데 더 더 더 나쁜 [이단 중의 이단]으로

단절의 단절로

 

누가 봐도 단절된 자인데

아무도 옆에 안 가는 간극이 저절로 벌어지는 자인데

건강한 자들이 이들을 가로막고 잠잠케 해서 간극을 벌리는 것이 아니라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 성전 안의 바리새인 기도.)

 

이들 소경이 간극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18:39, 개역)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더더욱 심하게 소리를 질러대는 겁니다.

 

나 환자 맞아요 당신이 의사 라면서요?

불의한 재판관 앞의 한 과부의 기도처럼 간절한 긴박성 다급함 이다는 겁니다.

 

남들은 다 불의하다고 하지만

나에게 만큼은 나의 원통함을 풀어줄 유일한 자입니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 일지라도 말이죠.

즉 자신은 그 정도로 갇혔다는 겁니다.

포로되었다는 겁니다. 억눌렸다는 겁니다.

죄인이다는 겁니다.

죄인에게만 의사가 필요하고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만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관계성을 말하는 겁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안다는 이 관계성을

부정의 부정으로 표현한 겁니다.

증상의 증상으로 말입니다.

 

기능을 제대로 보고 그 기능이 나의 존재 보다 먼저 앞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땅하다는 겁니다. 무능과 기능의 관계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말입니다.

? 그 관계를 이런 부정적인 방식으로 기여이 표현해야만 하시는 것일까요?

이 관계가 없는 악마의 세상에 갇혔다 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당신은 의사가 마땅하니

병을 그냥 못보고 지나칠수가 없다는 겁니다.

 

죄악을 그냥 못 보고 지나칠수가 없다는 겁니다.

심판을 하시든지

불쌍히 여겨주시든지

이 죄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 창조주 이니까

 

나는 그의 피조물 이니까!

당신의 징환으로써의 나 일 뿐이다는 겁니다.

 

아기는 엄마가 단 한 순간이라도 만져주지 않으면

눈을 마주쳐 주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

은혜의 관계 사랑의 관계 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에 대한 간절함은 환자에게만 있습니다.

 

애굽 왕을 주님이 강퍅케 하니까

그 고통이 극심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는 겁니다.

 

누구의 자작극 입니까?

 

하나 마나 한 일 아닙니까?

세미한 음성 아닙니까?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는 뜻도 이런 의미입니다.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누가 아쉽겠습니까?

고통 스러운 자가 부르짖도록 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여 저 개같은 이방인이기에 이스라엘이 아니기에 죽어 지옥마땅히 갈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여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찌끄래기를 먹지 않습니까?

 

누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 평화롭고 온화한 일상을 깨뜨리고

소동을 일으키는 뻔뻔하고 무례하고 법을 어기는 짖을 하겠습니까?

 

갇히고 포로되어 오로지 은혜만을 바라는 자만이 법을 어길수가 있는 겁니다.

 

바로 저주받은자 눈이 안 보이는 자 소경입니다.

 

잃어버린 자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이들 죄인 곧 환자에게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의사 뿐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즉 이들 자체가 간극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단절 인간, 소외 인간, 누락 인간 그 자체로써

소경은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8:41, 개역)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데려오라고 하시고서는 내가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니까

 

그야말로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남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나 마나 한 소원일 뿐입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뭐 대단한 것인줄 알았는데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소경만이 외치는 소리 그 자체입니다. 소경의 소리 그 자체

소경이 보는 예수 그 자체입니다.

벙어리가 외치는 예수 그 자체입니다.

 

누가 소경이 본 것을 볼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벙어리가 외치는 것을 말할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귀머거리가 들은 것을 듣고자 하겠습니까?

하나 마나 한

아무 의미 없다.

탈락

마이너스 1000

 

고아 과부 나그네가 외치는 은혜의 해를 누가 갈망하겠습니까?

 

소경은 갈망합니다. 내가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요

사망의 그늘에 주저 앉은 자요

흑암의 백성 곧 지옥의 백성인 저주받은자요

개같은 이방인 이다는 겁니다.

 

죄인의 소리 그 자체는 피만을 원하는 겁니다. 긍휼

그래서 모세가 변화산에서 대화하는 내용은 이것 뿐입니다. 피 별세 죽음

자신의 구약의 실패 곧 약속의 땅 땡 탈락 마이너스 100점을 만회할려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 밖에 더 되겠습니까?

모세는 자신도 고아 과부 나그네인 죄인이기에 고쳐달라고 하는 겁니다.

고쳐주실 분이 당신 뿐이기에

이 죄악을 해결해 주실 자는 십자가를 지심을 완성하시는 분 밖에 없다는 겁니다.

 

죄를 뼈 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천국 구원 따 놓은 당상이라서 변화산에 나타난게 아니라

 

오늘 본문의 소경의 외침

간절한 외침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변화산에서 모세는 이 말만 하는 겁니다.

모세 자신이 소경이기에 보게 해 달라는 겁니다.

 

건강한자 본다고 하는 자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미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기껏 수천년 만에 변화산에 나타나서

그것도 유대인의 영웅이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외치고 있으니

 

애 보다 못하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모세라는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인 간극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간극 만들기입니다.

 

어린 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던 제자들은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혀 간극으로 안 보입니다.

 

그저 만져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린아이의 소원은 딱 하나입니다.

 

만져주세요

 

아이는 만져주지 않으면 1초라도 멈추게 되면 죽는 존재입니다.

 

존재 자체를 위한, 존재를 말하는 존재가 아닌

존재 보다 앞서 있는 기능을 말하기 위한 무능의 존재인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닌, [의미 없는 진리]를 말하기 위한 [허무]

 

그야말로 허무입니다. 아벨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 한

허무

 

늘 눈을 마주쳐야 하고

늘 엄마의 감응 감격(과잉된 제스쳐)을 먹고 사는 존재

철저한 무능 그 자체가 아기, 어린아이입니다.

 

그 만져주심을 제자들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보디가드 한다고

알고보니 별거 아닙니다.

만져주는 것 까지야 허락해 주마 라고 제자들이 인심 베푸듯이 하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그것이 간극 그 자체로써 작용한다는 것을 그들 제자들은 모르는 겁니다.

 

정신 없이 밀려오는 인파 속에 예수님을 보디가드하는 일에 바빠서

어린아이인지 도둑놈 소매치기인지 알길이 없으니

그냥 한데 묶어서 모조리 다 단절시켜버리는 것 뿐입니다.

그게 편하니까 말이죠.

 

그런 와중에 누락 되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만져주심입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인간의 육의 한계입니다.

 

그 빈 틈을 노리고 오는 무능한 어린아이의 만져주길 바라는 다급함입니다.

 

이것이 간극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부자청년과의 차이 곧 간극 그 자체입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것을 갖춘상태에서 더더욱 완벽하게 하고자

영생을 얻는 나 뿐 아닌 나를 존경하는 자들에게도 베풀수 있는 영생 얻는 법

성화되는 법 구원 얻는 법 천국 가는 법 천국이 언제 임하는가를 아는 지식의 법

그것을 더 더 더 갖추고자 하는데

 

에구 에구 에구 그까짓것 만져주심??

에구 에구 에구 그가짓것 보기를 원하나이다?

 

너무 소박한 소원 아닙니까?

 

아닙니다. 절박합니다. 너무 너무 절박해서 가로막아도 더 심하게 소리지르는 겁니다.

 

이 절박함이 바로 기도할 필요가 없이 기도 그 자체인 겁니다.

 

거지나사로 되기 할 필요 없이 거지나사로 그 자체입니다.

소경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 단절을 모릅니다.

보세요 제가 글을 올리니가 여러분은 지금 이 글을 보고 있으니까

그 단절을 모르는 겁니다.

 

글을 못 본다는 그 단절성을 뼈저리게 알 길이 없습니다.


천국은 언제 임합니까 라는 질문은 자체가 단절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치 따 놓은 당상처럼

우리는 천국 갈자 인데 언제 천국이 임합니까?

마치 천국 당연히 가는 조건을 갖춘냥 천국티켓을 소유한 그 자부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질문이 바뀝니다. 주여 어디서 심판의 날 인자의 날이 임합니까?

 

즉 누가 봐도 지옥가도 마땅한 저주받은 소경에게 심판의 날이 어디서 임합니까?

지금 당신을 만난 이 자리가 나의 죄악을 나의 소경을 심판하는 날이 아닙니까?

라고

 

주검을 시체를 인식하는 자에게만 그 간절함이 있는 겁니다.

기도 그 자체입니다.

 

기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주여 나는 시체 덩어리입니다.

보세요 눈이 못 보는 소경입니다.

이 주검 시체 좀비를 고쳐 주세요

이 죄악을 해결해 주세요

 

애굽 왕으로부터 건져 주세요

 

이것이 주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을 애굽왕의 강퍅으로 고통을 받게해서

부르짖게 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니 갇혔습니다. 갇혔으니 고쳐주시고 이 쇠사슬을 풀어주시고

이 포로됨에서 건져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과 양의 대화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소리 인줄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만져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단순 합니다.

 

그런데 이 대화가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모세가 변화산에서 나타나

주여 별세해 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저 영웅이 나타나니까 베드로는 뿅가서 집 세채 짖겠다는 소리 밖에 안나옵니다.

 

아쉬운게 없으니 영생 얻는 방법이나 찾고

아쉬운게 없으니 예수님을 남이 아닌 내가 보디가드하고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리겠다는

 

왠 다이아 아 아 아~~~ 보디가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배부른 소리죠.

 

내가 7번 용서하겠다는 겁니다.

반대입니다. 니가 무시한게 있다는 겁니다.

뭔데요? 너가 무시해 버린 것은 바로

770번 용서 받아야 하는 것을 무시했다는 겁니다.

남 용서할게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소경이 그 간극 그 자체로써

제자들이 가로막고 잠잠하여라 해도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얼마나 불쌍하면 자기를 자기가 봐도 너무 너무 불쌍하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갇혀버려서

포로 되어서

사망의 권세에 주저 앉은 앉은뱅이라서

흑망의 백성인 버려둠을 당한 지옥백성 그 자체라서

 

고쳐 달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봐도 자기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겁니다.

 

당신만이 고치실자 이다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만져달라는 것은

갇혔다는 것을

그로 인한 철저한 무능이다는 것을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간극이요 [그 자체] 이다는 겁니다.

 

펭귄이 배고파서 물고기를 물고 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저 멀리서도 듣고

그 작은 입술에서 배고파 소리도 못내면서 엄마 엄마 밥 주세요 배고파요 라고

소리 아닌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면서 엄마를 찻습니다.

엄마는 저 멀리서도 식아 배고프제 밥 무으라 라고 자기 음성을 저 멀리서부터 외칩니다.

 

누가 이 음성을 듣겠습니까?

갇힌자가

무능한자가

배고픈자가

환자가

죄인이 그 음성을 아는 겁니다.

 

먼저 외친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심하게 외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자들이 말려도 안됩니다.

감히 누가 끊겠습니까?

이 사랑의 음성을 말입니다.

 

아무도 못 말립니다.

 

왜 십자가의 도가 이런 어리석도 미련하고

소경된 자에게

포로된 자에게

무능한 자에게

 

하나님의 지혜로써 다가오고

 

저들 건강한자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다가오는지?

 

가진데 더 가질려는 소유가 아니라

 

누가 봐도 단절인데

이 단절 된 자에게

희년이라는 복음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그 잉여적이다는 겁니다.

은혜이다는 겁니다.

 

아쉬울게 없는 자에게는 아쉬울게 없으니 등 돌리고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절박한 자에게는

유일한 기도 그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기도 못하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기도 그 자체입니다.

 

즉 나는 갇혔습니다 라는 겁니다.

포로 되었다는 겁니다.

 

강도는 부재된 채

강도 만난자 이다고 만져주심 배려해주심 섬겨주심이 아니면 안된다는 겁니다.

강도 만나지 않은 자는 아쉬울게 없으니

그냥 다 지나가버리는 겁니다.

왜 내가 시체 주검을 만져야 하느냐? 부정하다 라고 비켜 가는 겁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는 법

 

(24:28, 개역)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나는 시체 맞습니다 라고 하는 곳에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하심이 있다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왕의 강퍅함이 있기에 다들 비켜가겠지만

 

그 강퍅함 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하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때에 솔개가 독수리가 모이는데

바로 주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그 쪼개진 갈라진 제물 의 간극 사이로 여호와의 불이

주님의 제사 곧 십자가 제사가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이 약속 때문에

이 십자가의 피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피를 높이고자

 

우리는 소경으로써

어린아이로써

강도만난자로써

 

주님이라는 의사를 드러내고자 동원이 되는 겁니다.

 

강도도 애굽왕의 강퍅함도 여기에 다 동원이 되는 배치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더 심하게 외칠 그 절박함이 있습니까?

 

아쉬울게 없잖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갇혔습니다.

주님의 자작극에 말려들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 비로소 외치게 됩니다.

 

애굽왕을 강퍅케 해서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부르짖도록 하시듯이

 

다윗의 자손이여 ~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

 

이 악마의 세상에서 제발 건져 주옵소서 ~~~~

 

악마에게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이 악마에게서 구원해 주옵소서 ~~~~

 

 

 

 

 

 

 

 

 

 

 

 

 

 

 

 

 

 

 

 

 

 

 

 

 

 

 

 

 

 

 

 

대신 능욕 받으심 과 베드로의 전재산 버림 (18:28-34)

2014/08/29 21:24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복수심으로서의 반작용(베드로의 반작용-모든 것을 버린 행함)

 

가능성에 대비되는 인자의 희롱 능욕 침뱉음 (18:28-34)

 

 

(18: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18:28, 개역)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18:29, 개역)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18:30, 개역)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8:31,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18:32, 개역)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18:33, 개역)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18:34, 개역)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부자청년이 그것도 모든 인간의 표본 모범 이상향이 가난한 자에게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지 못하고 근심하고 돌아서자

 

베드로가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옵니다.

주여!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마치 자살한 목사의 주장처럼 [거지나사로 되자]

저 부자는 못 했지만 나는 거지나사로 되자를 행했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지금 자신이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그 증거가 여기 있으니

예수님도 부인 못하시는 것 맞죠?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오냐 오냐 잘했었었어용 이라고 말하는 듯이

베드로를 끌어들여서

 

(18:29, 개역)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18:30, 개역)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집 아내 형제 부모 자녀를 버린 자는

반드시 이 땅에서 여러 배나 더 얻게 될 것이고

내세 천국에서는 영생을 못 받을 리가 없다 라고

 

당황하지않고 칭찬하는 척 하면서 베드로를 끌어들여서

방심한 틈을 노려서 뒤통수를 팍

 

 

"뒤통수 팍"이 무엇인고 하니 인자는 [이방인으로부터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함]이라는 겁니다.

 

즉 위에 언급한 바를 역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빙자해서 부모 형제 자매 자녀 집 아내 버리는 것은

누구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이 나 라는 주체가 결국 나에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주님은 역전 시켜버립니다.

내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부자청년처럼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는냥 버리는게 아니라

저들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집이나 아내에게나 형제에게나 부모에게나 자녀에게

버림은커녕 그래서 도망치기는커녕

저들로 부터

철저한 노리개처럼 도가니 영화처럼

 

희롱 당하고 능욕 당하고 침뱉음 당하면

 

그것도 집(사물)으로부터

 

아니 내가 사는 집인데 조직인데 구조인데

내가 주도권을 쥔 집이 아닌

집이 주도권을 쥐어서 나를 희롱 능욕 침뱉음으로 내가 당한다?

 

집이란 인간의 최후의 보루

최후의 보호막 입니다.

집 없으면 거지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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