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 (시편 38)

 

죄인이 된 예수님


(마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4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마 27:42, 개역)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3, 개역)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 27:44, 개역)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5, 개역)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마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8:1, 개역)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38:2, 개역)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8:3, 개역)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38:4, 개역)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38:5, 개역)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38:6, 개역)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38:7, 개역)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38:8, 개역)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38:9, 개역)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38:10, 개역)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38:11, 개역)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38:12, 개역)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38:13, 개역)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38:14, 개역)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38:15,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38:16, 개역)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38:17, 개역)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38:18, 개역)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38:19, 개역)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38:20, 개역)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

(38:21, 개역)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38:22, 개역)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예수님이 범죄자 곧 죄인이 되십니다.

죄인이 되니까 그에 따른 형벌이 주어집니다.

 

그 형벌은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 당하는 의인의 아픔이 고난이지만

형벌은 죄에 따른 마땅한 징계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 형벌을 받아야만 할까요?

 

다윗은 일종의 그림자입니다. 실체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다윗은 졸지에 이 예수님의 운명 때문에 졸지에 이 상황을 격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의 폭격요청(마리아, 한나)은 바로 예수님의 폭격요청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할수 없는 불가능한 기도인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마귀에게 잠식된 상태이지
마귀에게 전쟁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기 떄문에 아쉽지만 우리는 나와 똑같은 한 개인의 인간으로써 다윗을 쳐다봐서는 안됩니다.

다윗을 볼 게 아니라 다윗이 보여주고자 하는 실상

곧 믿음인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 시편 38편을 통해서 다윗만 봤지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오해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시편 38편 그대로 오신 예수님을 시편 38편을 달달달 어릴적부터 외워온 유대인들이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죽이는 방법은 있느냐? 물론 없는 겁니다.

 

다윗을 아쉽지만 과감하게 빼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의 우리의 구원도 사실을 빼버려야 합니다.

내 구원은 빼버려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만을 구원하시는가? 만을 집어넣어야만 합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되고 모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원해 봤자 그것은 실상이 아닌 그림자일 뿐입니다.

아니 그림자를 구원해서 뭐하게요? 안개를? 연기를?

다 뜬구름 잡는 소리인 겁니다.

그래서 거짓선지자는 이런 뜬구름인 허상의 구원에 집착하게 만드는 겁니다.

 

실상은 우리 곧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이지

(5:30, 개역)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우리 구원은 실상이 아니거든요. 그림자요 허구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범죄자가 되셔야만 하시는 이유는 율법을 찢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문의 증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지킬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완성하셔야만 합니다.

어떻게요?

 

이 율법은 한마디로 뫼비우스의 띠와 같습니다.

아무도 지킬수 없는 법을 내어놓은 겁니다.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말입니다.

시이소처럼 이것을 지키면 상대적으로 자동적으로 반대편은 어기게 되는 시이소입니다.

 

그러니 의문만 더해갈 뿐 명료한 것이 없게 됩니다.

(2:11, 개역)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2:12, 개역)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2:13, 개역)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2:15, 개역)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그럼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뭔가?

사랑은 결국 그 율법책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짐을 남에게 지우지 않고자 하는

남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짐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죄짓자

은혜를 더하고자

사랑을 더하고자

더 이상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사랑이 있기에

사랑을 이용해 먹자

라는 것이 통할까요?

역시나 사랑 또한 뫼비우스의 띠와 같습니다.

율법 보다 더한 외설성입니다.

 

율법의 외설성이 사라지게 되니까

더 심하디 심한 외설성이 자리 잡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남을 사랑해서 율법을 찢으니까

율법의 의문을 더 이상 짐 지우지 않겠다고 하니까

이것을 역이용해서 인간은 자신의 옳다함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못 지키도록 한 외설성인데

바리새인이 마치 지킨냥

사자를 등에 업고 여우가 정글의 왕인냥 설치는 동화처럼

그저 왕이라는 그 권력을 탐할 뿐이지

섬김이라는 무시 무시한 사랑을 못 보여주더라 말이죠.

 

그래서 그 왕 됨이, 그 은사가 과연,

그럼 과연 그것이 옳은지 한번 알아보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겁니다.

3일 만에 하나님이 다시 너를 살려내는지 말입니다.

 

의인은 내 행함이 옳았잖아 가 아닌 믿음으로 다시 살거든요.

내 행함이 옳기에 다시 3일만에 살아나는게 아니라

믿음으로 다시 살아난다면 한번 십자가에 못 박아 보자 라는 것이

 

(2:4, 개역)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0:38, 개역)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무시 무시한 십자가의 완성입니다. 곧 사랑의 완성입니다. 율법 완성입니다.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9, 개역)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러니 율법을 패하러 온게 아니라 일점일획이라도 다 완성하러 왔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사랑을 조작하느냐 말이죠.

모세가 써준 이혼증서를 오히려 역이용하듯이 조작한다는 겁니다.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7, 개역)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19: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것이 바로 일만달란트 탕감의 비유와 같은 십자가의 용서의 비유입니다.

 

본인은 정작 일만달란트를 용서 받아놓고서는

자기 돈 띠먹은 100 데나리온 꿀꺽한 놈은 도저히 용서 못해서 경찰에 신고해 감옥에 가두더라 말이죠.

 

그렇게 되면 누가 부끄럽냐 말이죠.

자신이 부끄러워야 하는데

사물인 주변사람과 주변 물건들이 부끄러워 하는 겁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데나리온

하루 노동자 품삯이 1데나리온 결국 100일의 노동 값 가치와

족히 비교도 되지 않는 16만년을 일한 노동 값이 일만달란트 라는 거죠.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3-4조 라고 하고

누구는 16조 라고 하는데

 

딸랑 한 명의 개인에게 해당되는 돈으로는 안본다는 공통점이 있잖아요.

개인 소유를 넘어서는 빚탕감입니다.

개인의 남 용서인 7번에 해당되지 않고

개인의 타인용서를 넘어서는 770번의 용서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의 초 거시 간극이다는 겁니다.

 

즉 율법을 제대로 지킬려면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16만년을 살면서 지켜야

제대로 지킬수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100년도 못 사는 판국에? 뭐 율법 지켰다고?

또 이러니까! 어차피 못 지킬 율법, 내 마음대로 살자? 누구 마음대로!!!

빚이 없는채 하고 살수 없는 겁니다.

끊임없이 독촉장이 날라옵니다.

오로지 지키든 안지키든 자기 몸에서 시선을 옮길수가 없는 겁니다.

 

외부에서 누가 율법을 완성하는가를 봐야할 것인데 말입니다.

 

율법을 찢는 것은 16조원의 빚 일만달란트를 탕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무슨 원리로?

용서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섬기는 자 왕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실감이 나지 않으면

평생 살면서 누가 왕의 얼굴을 매일 보겠습니까?

딱 한 번 볼까 말까 한데!!

오히려 100 데나리온 띠먹은 것이 더 실감이 날 정도인 겁니다.

 

즉 인간에게는 일만달란트 탕감 보다 백데나리온이 더 현실적이다는 것이죠.

 

다른말로 하면 율법전체를 찢는 것 보다

안식일 십일조 주일성수 이웃사랑 몇몇개 지키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실감이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안식일 월살 절기 먹는 것 입는 것 모조리 율법에 저촉이 되는데

이것이 더 실감이 나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거시적인 일만달란트 빚탕감은 아무리 아무리 쳐다봐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이 불가능한 것은 성령으로만 되지

육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백날 백날 광야에서 불뱀 물려 죽게 되어도

약 바르는 것이 더 실감이 나고

죽게 되었다는 것이 더 실감이 나지

 

아니 생뚱맞게 나무에 달린 구리놋뱀 쳐다보면 낫는다 라는 것은 이것은 말장난과 같은 겁니다.

무슨 수로 그 불가능성에 참예 합니까?

우리가 이런 지식을 알았다.

그래서 타임머신 타고 그때로 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안 쳐다보지만

나는 쳐다봐야 낫는다는 지식을 알았기에

사람들에게 설득한다 칩시다.

 

쳐다 볼까요? 안 쳐다 볼까요?

지금 남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속에 있는 타임머신을 타고 간 나도 안쳐다 본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아브라함이 10명 의인 있으면 안 멸망하실껍니까?

물어 보고서는

점점 줍니다. 54, 3, 2, 1

심지어 자신도 의인이 아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사랑인 겁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먹는 것 보다,

말만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산다고 하고서는

떡으로 사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 마나 한 소리만 하시는 겁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예수님은 목숨을 거시는 겁니다.

인간은 떡에 목숨을 다 걸고 평생을 떡을 위해서 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항상 불가능한 말만 하는 겁니다.

 

즉 우리 신체 자체가 태생부터 말씀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원수지간이다는 겁니다.

소유물 자체가 틀리다는 겁니다.

물과 기름처럼 말입니다.

 

그 정도로 저주 속에 하나님의 진노 속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이것을 무슨 수로 끊겠습니까?

 

우리는 못하나

예수님은 하시겠다고 덤비시는 겁니다.

 

어떻게?

 

자신이 범죄자가 되겠다는 겁니다.

너의 죄가 뭔데?

아 그래?

그 죄!!

내가 다 책임 질께 라고 하시는 겁니다.

 

백이면 백 피식 웃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사래처럼 말입니다.

니가 뭔데 나의 죄를 대신 지겠다는 거냐? 니가 뭔데???

 

(17:15, 개역)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7:16, 개역)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17, 개역)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그리고서는 다들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막무가내의 예수님의 행동에 누구만이 반기는 겁니까? 누가 영접합니까?

이것 또한 불가능하게도

정작 자기 백성은 거부하는데

유대인의 원수인 이방인들은 영접하는 겁니다.

 

소경 창녀 세리 강도 과부 문둥병자 포로된자 귀머거리

이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희년입니다.

희년완성입니다.

 

딴 사람들에게는 전혀 복된 소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결핍이 있어야 그 결핍에 따른 해결자가 고마운 것이지

 

건강한 자에게 무슨 놈의 의원(의사)이 필요 하겠냐 말이죠.

 

결국 예수님은 자기 구원을 말하고자 곧 십자가의 용서를 말하고자

죄인을 의도적으로 양성하신다는 점입니다.

 

죄인이 죄인 스스로가 조작하는 은혜를 더하기 위한 조작이 아닌

예수님이 자신(십자가의 용서)을 말하기 위한 죄인 원수를 조작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의 외설성 보다 더 심한 외설성인 겁니다.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겁니다.

누가 끊으리요????

 

이것이 개혁주의나 성화론에서 받아들일수가 없는 것이 됩니다.

교리 형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죠.

그들의 관심사는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교리 곧 지침서가 있어야

그 뒤에 그 교리를 실천하는 행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리 플러스 실천

이것이 바로 불교 사상입니다.

 

종교 중에 최고의 종교는 불교입니다.

모조리 다 불교 따라잡기일 뿐입니다.

유대교는 결국 신을 앞장세운 불교입니다.

그 신이 결국 자기자신인 인간 자신의 투사물이니까 말입니다.

그게 교리 아닙니까?

 

개혁주의도 말로는 죄인만들기 하신다고 말하지만

정작 죄인이 되어 교회 질서에 덤벼들까봐 조마조마해 하니까

결국 말해놓고서는 실제로는 취소 취소 하는 식입니다.

 

필요할 때, 아쉴울때만 쓰는 거죠. 마치 고난 주간이나 뭐 그런 행사때 말입니다.

행사용입니다.

 

그들의 십자가는 행사용일 뿐입니다.

실제상황이 아닙니다.

늘 교회를 허물어 버리는 십자가가 아니다는 겁니다.

매일 매일 허물고 다시 세우시는 주님의 손이 아니고

인간의 손으로 성전을 짖고 있는 겁니다. 불교죠.

 

이것을 매일 매일 매초 매초 매시간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골치아프게 되죠.

그렇게 되면 복음이 아닌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편함이 되니까 말입니다.

 

행사용으로 땜빵질 하듯 하면

고난주간처럼 딱 좋은데

매주 마다 해 버리면 사람들은 화를 낸다는 겁니다.

불편하고 불쾌하고 거북스럽거든요.

크리스마스에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 보세요

누가 좋아합니까?

미움받기 딱 좋죠.

 

복음은 딴 사람이 아닌 교회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겁니다.

복음 자체가 의인화 되어서 교회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그러니 고난은 죄가 있는 죄인이 받는게 아닙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의인이 받는 고난이 고난인 겁니다.

그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어서 형벌 받을 때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 남들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거든요.

 

다윗은 지금 고난받는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격게 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당연히 당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고통이 아닌 고난이 덮쳐짐으로써

다윗 자신 속에서 다른 분이 받는 고난을 낯설기 짝이 없이 격게 되는 겁니다.

동참하고 참예케 됩니다.

욥에게 닥친 낯선 고난과 같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고통을 훨씬 뛰어넘는 겁니다.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셈이

고통 보다 훨씬 몇백배나 더 심한 고난을 격는 겁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고통 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판국에

예수님의 고난을 보게 되니까

자신은 고침받을 자격 자체가 없다고 해 버립니다.

졸지에 예수님의 고난이 덮쳐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 취급 받는 겁니다.

고난 받는 자만 죄인 취급 받지

고통 받는 자는 죄인 취급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슨 말로 설명을 해줘도

친구들 가족들 모조리 다 달려들어

죄인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설득 포기입니다.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덮쳤다니깐요.

 

백날 말해도 저들은 어쩔수 없습니다.

 

(38:11, 개역)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38:12, 개역)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38:13, 개역) 나는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38:14, 개역)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보이는 그대로 행동할 뿐이니 탓할 수 없는 거죠.

 

저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겁니다.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인간은 전체를 못 봅니다.

어떤 뇌과학자 말대로 전방 2미터가 전부인 겁니다.
이것을 점점 확장 확대 시키는 것이 인간의 뇌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주에 까지 인간은 유비쿼터 해야 합니다.

?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없이 무조건 확대 확장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살고자 하는 구원입니다.

심지어 자기 인간 나라도 아닌

천국 곧 하나님 나라까지

이유 없이 확대 확장하는 겁니다.

 

전체를 볼려면 제가 위에서 적어도 몇 년? 16만년을 살아야 전체를 볼까 말까입니다.

그것도 율법 하나만 보는데 말입니다.

인간은 부분으로 전체를 해석할려고 달려들 뿐입니다.

다 겐또죠 겐또

 

소 뒷걸음질 하다가 우연히 하나 걸려든 것으로 육의 자랑을 평생 삼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율법책인 의문의 증서를 왜 찢으셔야 하는지 적어도 알려면

성령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알려면 16만년을 공부해야 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16만년은 상징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 정도로 간극의 갭이 크다 라는 겁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우리 연변에서는 적어도 16만년을 일해야 일 좀 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개그처럼

주님의 시선에서는 인간은 믿은 적도, 말씀을 지킨 적도, 선을 행한 적도,

거룩한 적도, 찬송한 적도, 십일조 낸 적도,

 

그 어떤 것도 한 것이 없는

분명히 단 하나도 한 게 없는데

그야말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다는

피 흘리셨다는

율법을 찢고 사랑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본인이 본인의 규율을 어겼다는 겁니다.

본인이 법이면서 그 법을 어기는 범법자가 되심은

 

이제 오로지 사랑으로만 대화하겠다는 겁니다.

사랑 아니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율법이나 행함이나 말씀실천으로 하지 않겠는다는 겁니다.

월살 절기 먹는 것 입는 것 안식일 등등으로 폄론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누가 그딴거로 말 거냐 말이죠.

 

이것이 율법 보다 사실은 더 외설적인 겁니다.

 

저번에 말했지요?

 

주님의 살과 피 외에는 대화하지, 상대하지 않겠다고!!!

 

뭐든지 주의 피로만 소통하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감히 자기 행함이나?

자기 믿음이나?

교회나?

성경지식 따위를 언급했다가는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한 지옥이 된다는 겁니다.

 

정 그딴거로 대화나 소통을 하고 싶다면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시겠느냐 라고 다짜고짜 따지시면서 들이대시겠다는 겁니다.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10:3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10:32, 개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10:33, 개역)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10:34, 개역)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10:35, 개역)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10:36, 개역)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10:37, 개역)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10:3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10:39, 개역)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10:40, 개역)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10:41, 개역)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10:42, 개역)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10:43, 개역)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10:44,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10:45,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에이 설마

안 그런데???

 

그러니 주님은 말도 안되는 소리만 골라서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일만달란트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는 백데라니온이 실질적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결국 보상 때문에 참는다는 겁니다.

섬기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자의 무조건 이유없이 다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화투 치는 할머니들은 16조원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싸움은 10원짜리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16조원은 딴나라 말이고. 10원짜리야 말로 실질적이고 심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조원으로 막 죽이지 않습니다.

10원짜리로 죽입니다.

 

엘리야는 7천명으로 심각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 하나 만으로 심각합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왕상 19:10,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4,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인간에게는 전체가 없습니다. 내가 전부이고 내가 전체인 겁니다.

 

복음에 괜히 하나님나라비유인 잃어버린 동전 한 닢 비유가 있는게 아닙니다.

진짜 화딱지 나게 하는 살인은 10원짜리로 벌어지는 겁니다.

16조원 때문에 발발하지 않습니다.

아주 아주 사소한 것으로 전쟁이 벌어집니다.

물 한 방울로 전쟁이 벌어지는

천국과 지옥의 전쟁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가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돈 이야기가 현실적이지

주님의 살과 피가 뭐그리 대단한 것이냐 말이죠.

 

나만 딸랑 혼자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는 겁니다.

 

? 현실적이니까 직시합니다.

 

그러나 7천명 남겨놨다는 말은 붕뜨는 말입니다.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겁니다.

 

7번 용서가 나에게는 딱 맞지

770번 용서는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인겁니다.

그렇게 까지 멀리 갈 필요가 없거든요.

 

경쟁자도 없는데 그게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이냐 말이죠.

 

나를 중심으로한 이야기만이 현실적이다는 겁니다.

자꾸 딴나라 딴세상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믿고픈 것만 보고픈 것만 듣고픈 것만 듣고 믿고 보고 말하고픈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과 똑같은 다윗임에도 불구하고

딴세상의 딴 분의 고난이 다윗에게 졸지에 덮치게 됩니다.

불가능한 고난을 맛보게 됩니다.

 

인간은 견딜수 없는 불가능한 고난입니다.

불 속에 들어가는 셈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 속에서 다시 살더라 말입니다.

 

그럼 일단 나는 아니다 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됩니다.

? 나는 위에서 말했듯이 나와 연관된 것만 인식할 뿐이지

나와 거리와 먼 것은 인식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멀리 있던 것이 나에게 덮치니까

시야가 확 바뀌는 겁니다.

 

도대체 누구세요? 라고 대화 자체가 나를 중심으로 한 대화에서

도대체 이런 일을 벌리신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그 누구 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대화 자체가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 38편은 다윗의 고난, 나의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펼쳐지는 전혀 다른 대화인

주체 자체가 전혀 다른 주인공

알수 없는 그 분을 중심으로 하는

그 분을 말하는 대화이다는 겁니다.

 

그 분이 당하는 고난 때문에

그저 찔끔 쪼매 한 번 맛본 것 뿐인데

뼈가 다 썩어 들어갈 정도로 감당이 불감당인

그 분의 고난을 맛보는 겁니다.

 

과연 고난의 잔을 마실수 있냐 라는 물음인 거죠.

 

저는 도저히 마실수 없습니다 라고 빨랑 자수하시면 됩니다.

다윗도 안되는 판국에 우리인들 버틴다고 억지로 참는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 불가능한 고난을 말입니다.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것만 다윗은 누리게 됩니다.

그 불가능한 예수님의 고난을 누리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던 폭격요청 곧 악을 없애달라는 폭격요청은

마리아의 기도도 아니요 한나의 기도도 아니요 다윗의 기도가 아닌

실상은 예수님의 기도이다는 겁니다.

 

불가능한 것만 다윗에게 막 덮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의 운명을 임신하듯이 다윗 속에 임하게 되니까

비로소 악을 본색들을 다 보게 된다는 거죠.

 

마리아도 한나도 약속이 임하지 않으면 전혀 볼 수 없었던

악의 활동들을 비로소 약속이 임하니까

 

이 약속에 대한 악마들의 발악들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악들이 다윗을 공격하는 겁니까?

마리아를 공격하는 겁니까?

한나를 공격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공격하더라 말이죠.

그것을 맛본 겁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범죄자로써 형벌을 받게 되니까

일단 남이 아닌 나부터도 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더라 말입니다.

남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아담의 속성이 말이죠.

 

이것을 들통당하고 지적받는 사랑

그것을 지적해 주시는 십자가를 과연 고마워 할까요?

아니면 그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 십자가를 어떻게 해서든 방해를 해서 막아야 할까요?

 

이것 또한 나의 숙제가 아닌 예수님의 숙제로써

십자가가 두 패로 가르게 한다는 겁니다.

 

원하는자로 말미암도 아니고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는

오로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말입니다.

 

끝까지 인간을 위한 예정이나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영광만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교회로 사기치느냐 말이죠.

 

필리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흉내내는 것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그게 과연 고난입니까?

 

고난은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닌

예수님을 향한 공격을 보는 겁니다.

심지어 나도 그 예수님을 싫어하는 그 공격성을 보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예수님을 향한 공격을 감행할 때

 

예수님은 폭격요청을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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