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허무)는 나(허무) 보다 옳도다 (시편 39편)

허무한 종말 속에 더 허무한 십자가의 용서(허무를 깨는 허무)

 

 

(3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 여두둔으로 한 노래]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39:2, 개역)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9:3, 개역)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39:4, 개역)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39:5, 개역)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39:6, 개역)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39:7, 개역)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39:8, 개역)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39:9, 개역)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39:10, 개역)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39:11, 개역)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39:12, 개역)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39:13, 개역)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제목이 참 재미있지요?

보통 우리는 부정적인 의미를 앞에 두면 그 뒤는 긍정적인 의미를 두어야 역전이라고 봅니다.

축구나 야구나 모든 스포츠가 막장 드라마 곧 역전이 될려면

앞에는 늘 지고 있는, 패하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가 고정화 되어야

그것을 뒤엎는 전복성이 크게 느껴짐으로써 잉여성 곧 기쁨이 커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앞의 부정에 뒤의 긍정이 아닌

앞의 부정에 뒤의 부정이 되어버리면

허무한데 더 허무하게 되는 이것은 결국 결론적으로 나의 기쁨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복음은 어디까지나 나의 기쁨이 아닌 예수님만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승리가 이렇게 부정의 부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는 다 이루었도다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더 어렵게 해 보면

 

마귀나 죽음이나 사망의 권세 또는 저주 종말 심판을 이길려면

이런 부정적인 것을 극복할려면 상대적인 생명을 완성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모호하다 라는 인간의 지혜이고

십자가의 지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완성하는 것이 명료한 또렷한 승리이다는 겁니다.

생명을 완성하는게 아니라 죽음을 완성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행함(곧 믿음을 포함해서)에서는 더 모호한 것이 되고

예수님의 믿음에서는 또렷한 승리이다는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말입니다. 소욕을(부정)을 못하도록(부정) 말입니다.

즉 극복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도저히 극복 못하도록 그 갭을 더 벌려놓음으로써
원인 없이 결과가 주어지도록 하는 불가능성으로 만드는 겁니다.
사실상 극복 또는 깨는게 아니라 더 벌려버리는 겁니다.
원래 불가능한데 더 더 더 불가능하도록 말입니다.

 

제가 이 말을 설명하겠다고 나선다는 자체가 말도 안되듯이

위의 말들이 말이 안되는 겁니다.

 

죽음을 이기는데 죽음으로 이기더라 말이죠.

 

죽었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누구 말 마따나 양탈무리에서 무는 무일 뿐이다 라고 짜증유발케 하는 복음이니 말이죠.
무는 원래 없는데 무를 자꾸 언급하니까 히스테리를 팍팍 부리는 권씨 얼마나 웃끼던지.

 

그런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도저히 인간으로는 믿을수 없는 이야기만 적혀 있는 것이 성경말씀이다는 겁니다.


결국 의인인척 하는 자들이 얼마나 믿는척 하면서 말려들겠냐 말이죠.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드는 겁니다.

나는 성경 말씀 믿는다.

어릴적부터 성경말씀 믿어왔다 라는 사람

과연 부자청년처럼 등 돌리고 돌아서지 않을 장담이 있을까요?

어릴적부터 지켜서 몸에 배였는데?


그런 인간도 안될 정도면 모든 인간은 안 되는 겁니다.
결국 더 불가능하게 갭을 벌리는게 모든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 말씀이였던 겁니다.

불가능한 율법 지킴을 지켰다는 구라치는 것을 더 더 더 불가능하게 그 다 지킨것을 가난한자에게 다 주게 되면
자신은 아무것도 지킨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등돌리는 겁니다.
율법은 결국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완성되지 율법지킴이 도리어 올무가 된 줄 몰랐던 겁니다.
그러니 불가능에 더 더 더 불가능을, 불가능성 그 자체를 유지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트릭에 더 큰 트릭을 언급하니까? 비로소 인간의 트릭이 들통이 나는 거죠.
결국 인간의 믿음은 다 사기요 트릭이다는 거짓인 것이 더 큰 트릭에 의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성화론자와 개혁주의는 무슨 근거로 된다고 자꾸 가능하다고 하냐 말이죠 웃기지요

어떻게 해서든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거짓선지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야 종교장사가 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자기자신이 가치가 있게 된다 말이죠.

정작 복음은 나는 하나도 가치가 없다 라고 말하는 불가능한 회개입니다. 자기부인입니다.
그런데 가능으로 본다는 자체가 성령의 소욕 보다 육의 소욕을 주장하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잖아요. 가능하다고 해야 돈이 됩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상대적인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곧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면 인간의 트릭이 안 드러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의미를 마침 누구랑 나누었거든요.

시편 36편을 통해서 말입니다.

 

9편이 아닌 6

 

(36:1, 개역)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36:2, 개역)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6:3, 개역)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36:4, 개역)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36:5,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36:6, 개역)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36:7,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36:8, 개역)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36:9, 개역)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36:10, 개역)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36:11, 개역)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36:12, 개역)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다윗이 악인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 말이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다윗을 오히려 비판했습니다.

과연 이 악인에 대한 이 상세한 내용을 다윗은 어떻게 알게 되었냐 말이죠?

 

사울왕을 살펴보고? 천만의 말씀!!

사울왕은 그야말로 우발적인 겁니다.

이유없이 다윗이 밉기 때문에 우발적이지 철저한 계획아래에서 나온게 아니다는 겁니다.

 

자 그럼 이미 힌트가 나왔죠?

다윗이 이 악인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도 자세하게 알게 되었느냐?

우와 다윗 니 어떻게 이 악인의 성향을 제대로 알았노? 라고

다윗에게 물어보자 말이죠.

 

응 그게 나야 ~~~~~

그 악인은 바로 내 모습이었어 ~~~~
철두철미한 치밀한 계획!! 밤마다 짯던 계획!!
그 악인이 바로 자신임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라고 다윗은 대답하더라 말이죠.

 

우리는 성화론자처럼 죄를 다 지웠으니까 우리도 다 잊지 자꾸 과거 기억을 캐내서 뭐하냐 라고 하지만

 

그런 취지로 캐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 문제가 아닌 지금 현재도 악은 늘 우리 속에서 펼쳐지거든요, 그래서 죄 죄 죄 자꾸 카지 말라고 하는 그 짜증도 자신의 악 임을 거부하는 악이다 말이죠. 과거 문제가 아닌 현재 문제이다는 겁니다.)


그 바닥의 바닥까지 캐내어 보자 말이죠.

사실상 다윗은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신체에서 나온 그런 죄악상을

자기 입으로 바닥을 캐내어 보니 이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로써 펼쳐진 것이다는 겁니다.

 

마치 첫아담 땜에 죄악이 들어왔지만

정작 첫아담은 생명인 하와를 보고 구원받았고

더더욱 가죽옷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오히려 죄를 악을 보편화 시킨 당사자이면서 정작 자신은 얍삽하게 쏙 빠지는 구원을 받게 되니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나리오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구원 받을려면 나처럼 이런 방식으로 구원받아라 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죄 죄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 라고 말하는 성화론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죄를 이제는 바닥을 뜯고 뜯으면서

 

전에는 죄 아래에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잘나서가 아닌 주님의 용서 때문에

죄 아래 가두게 하는 의문의 증서가 찢어졌기에

 

이제는 왠 사랑이 이렇게 큰지? 왜 이렇게 넓고 깊고 높은지?

그 사랑의 높이 깊이 넓이를 누리고자

죄를 겁내하는게 아니라

왜 이런 막다른 곳에 몰린 자를 어떻게 건지시는 그 구원자의 능력 기능을

왜 죄를 거쳐서 주님의 살과 피가 등장하는지의 그 내막을 뜯어보는 재미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 향유를 누려 보자 라는 겁니다.

죄라는 괴물 보다 더 더 더 괴물적인 십자가의 용서 라는 괴물을 누리자 말이죠.
얼마나 신나겠어요
더위가 싹 가십니다.
더워 죽을 판국인데 이 부정 속에서 등꼴이 오싹한 주님의 냉철하디 차갑고 시원한 냉소적인 한치 오차 없는 구원의 치밀성을

등꼴 오싹하게 사랑을 누려 보자 말이죠. 시원 합니다.


(약 1:14, 개역)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개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6, 개역)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약 1:17, 개역)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8, 개역)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을때에

이것을 악인을 보고 아 이렇구나 라고 내어놓은 의미가 아니라

바로 다윗을 보고 이 야고보서의 내용을 적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다윗 또한 자신이 악인이다고

 

마치 남 이야기 하는 듯이 하지만

자신은 분명 자신을 보고 이야기 했다는 식으로

남들이 못 알아먹는 ...

? 당연히 다윗은 빠졌다고 본 겁니다.


악인을 누가 말하기 때문에?

다윗이 말하기 때문에 다윗아 그래 너가 악인에게 시달렸구나 라고

다들 그렇게 다윗은 당연히 빼는 입장인데 사실은

정작 당사자 다윗은 그 악인을 다윗 자신의 모습에서 봤기에

너무 너무 잘 알기에 적었지만 남들은 그 악인이 다윗인지 모르는 거다 말이죠.
응당 다윗은 아니다고 본 거죠. 이것이 상상계 입니다.

고로 유대인이나 우리들도 이 본문을 읽으면 자꾸 그 악인 속에 나 자아 자기자신을 빼놓고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유대인처럼 예수님을 죽일수 밖에 없는 겁니다.

타임머신 구지 타고갈 필요가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예수님이 오셔도 우리는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 박을 수 밖에 없는 거죠.

 

어쨌든 그 악인을 통해서 정작 불에 들어가게 되는 심판 속에 놓이지만

그 심판이라는 불 속이 오히려 천국일줄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죽음의 불 속에서 오히려 노래 부를줄

악인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빼도박도 못하는 그 순간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쌩뚱맞은 질문으로 인해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둘이 수다의 꽃이 만발하는 그 완료를 봐 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뻔뻔스럽게 악인을 남이야기 하듯이 하는 겁니다.

 

분명 자신임을 그 내용속에 집어넣었지만 남들이 그렇게 못본 거죠.

그러니 이 시편 36편이든 39편이든 달달달 외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악인 속에 자꾸 자신을 빼버리니까 졸지에 모호해 지고
(우리는 선명해 질줄 알았는데 착각이였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오독, 오해, 착각을 거쳐서 보게 되는 십자가의 죽음만이 명료하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 외에는 다 모호한 안개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독 이라는 부정 뒤의 부정인 십자가의 죽음만이 옳은 겁니다. 그 죽음 속에는 또렷하다고 확신한 나 만이 유일하게 모호하게 되니까 말이죠. 나를 잊게 됩니다.)


오히려 그 악인이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크면 클수록 자신이 주인공이기에

이 악인을 처단하는 졸지에 지금 다윗은 뫼비우스 띠를 올무처럼 놓고 있는 셈입니다.

 

악인의 속성이 이렇다고 그들의 올무를 말해놓고서는

더 심한 부정적인 뫼비우스의 띠인 올무를 십자가로써 걸림돌로써 쳐놓은 겁니다.

안 말려들고 배길까요?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적어도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 곧 부정적인 지혜라면
반드시 그 이전에 배경 백그라운드로 인간의 최고의 지혜가 상대적으로 깔리는 겁니다.
 

자 이렇게 죄와 악과 맞부딧히도록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죠.

 

그것이 시편 36편에서는 악으로 표현되었지만

오늘 본문 시편 39편에는 허무 또는 종말로 표현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해하시겠죠?

허무를 극복하는 것이 허무의 허무 이다는 겁니다. 극복 아닌 더 벌려버리는 불가능성되기 입니다.

 

허무 라는 기능이 허사가 되게 하는 것이 허무의 허무이다는 겁니다.

 

나는 허무하다 라는 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면

 

허무를 긍정으로 바꾸는게 아니라
(마치 상처는 백날 해도 안 고쳐지는 겁니다. 과거니까 그 트라우마는 죽을때 까지 무한반복 됩니다.
그래서 괴치는게 아니라 그대로 두고 그것 보다 더 자극적인 창조성을 누리는 것이 치료아닌 치료의 방식이다는 겁니다.)

허무하다고 느끼는 그 나를 허무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면
허무하게 없애 버리면
극복할 이유 조차 없게 되는 겁니다.

내가 허무를 규정하는 그 허무가

의미가 없게 되는 허무한게 된다는 겁니다.


즉 원인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우연이게 되는 거죠.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결과 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말입니다.
 

사망의 권세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 하는

그 나를 없애버리는 것이

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지금 시편 39편에서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용서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 죄를 용서 받은 자의 행복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다윗을 언급하는 이유입니다.(롬 4장)

 

내가 없는데 허무하다고 인식하는 그 허무가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죠

미국의 실용주의의 역이용인 거지요.
내가 있어야 허무하든 말든, 내가 있어야 하나님을 믿든 말든 할것 아니냐 그 나에 대한 중심적 사고가 실용주의 아닙니까?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실용주의 말입니다.

 

죽음 조차도 벌벌벌 떠는 죽음이 바로 죽음의 죽음인 십자가이다는 거죠.

죽음이라는 기능이 소용이 없게 되는 무기능이 되니까 말입니다.


죽음 그 까짓것 뭔데 죽음을 바닥을 뜯어 보니까 별거 아니다 말이죠.
바닥의 바닥
 

마귀 조차도, 공포 조차도 벌벌벌 떠는 것이 바로

죽음 보다 강한 사랑 곧 십자가라는 공포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시편 36편처럼 악인의 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편 39편의 허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긍정이나 선함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추구해봤자 또 허무하고 또 악이 되는

모호한 짖이니까

 

아애 그 허무를 거쳐서 허무의 허무

악의 악

부정의 부정

종말의 종말을 추구해 보니까

 

시이소처럼 반복되는 모호한 것들이

명료하게 끊어지더라 말이죠.
뫼비우스의 띠는 그렇게 해결 되는 겁니다.

 

끊어지는 것에 멈추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 십자가라는 부정성이 나에게 명쾌하게 답을 주니까

죽음도 사망도 근신도 칼도 이제 그까짓것 두렵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내가 괴물인데 괴물 보고 괴물이 나타났다고 고함치던 과거는 이제 지나갔다는 겁니다.

더 괴물적인 십자가의 용서가 왔다 라는 거죠.


십자가의 용서는 죄인 중의 괴수(괴물) 만이 외치도록 하셨다 라는 겁니다.

(딤전 1:15, 개역)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랑보다 더 큰 괴물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라고

 

다윗은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허무 극복해도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또 허무하다고 징징 거립니다.
똑같은 원리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일어나도 또 소용이 없습니다. 또 기적을 또 바랄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허무를 없애는 유일한 것은

 

허무의 시선에서 보는 허무 즉 허무를 허무하게 만드는

무가치 무기능으로 만드는 허무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다는 것

 

그래서 다윗은 왜 인간은 허무할 수 밖에 없는가?

라고 다윗 자신을 빼고서 인간 밖의 시선에서 말하는게 아니라

남 이야기하는듯한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정작 자기 이야기만을 가득채워서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고자

눈물의 기도

금식의 기도

회개의 기도

백날해도 안통하더라

그건 트릭이다 라고

트릭을 안한 시선이 아닌

 

내가 써먹어 볼수 있는 트릭이란 트릭은 다 써먹어보니까 안 되더라 라고

자신 이야기를 넣어서 증거하는 십자가의 용서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 완료된 것을 보고서

이 허무한 것들을 나열함에 있어서

이 아무것도 아닌 허무

하나 마나 한 허무

 

이 허무에 충실하게 그 내막을 상세히 적는 겁니다.

그것이 지혜문서 아닙니까?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욥기

결국 허무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하신 예수님을 노래하는데

 

이미 완료된 것이 덮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보면

역시나 도리어 허무에 그 뫼비우스 띠에 더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비록 말려들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만나도록 되어 있는

지혜문서인 겁니다.

 

지혜 쌓으라고

구원 되라고

천국 가게해 줄려고

성경지식 갖으라고 주어지는 지혜문서가 아니였다는 거죠.

오히려 더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와 정면충돌하게 된다는 겁니다.

정면 충돌하더라도 그 용서를 보면 되는데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켜왔던 부자청년은 등돌리게 된다는 겁니다.

왜 어릴적부터 지켰기 때문에

자기 구원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끝까지 놓지 않으니까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의 용서를 본 자는

자기 구원도 결국 모호하기 짝이 없는 허무하다는 겁니다.

오로지 이렇게 부정의 부정으로 십자가의 지혜를 펼치신 예수님이

 

나 보다 옳다는 것만 완료하시면 된 겁니다.

 

그는 나 보다 옳도다

 

(38:26, 개역)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나의 부정함을 깨뜨리기 위해서 더 부정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오셔야만 했던 예수님

나의 허무를 깨뜨리기 위해서 더 부정한 십자가에 허무하게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님

 

그런데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이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지 함 맛보라고

죽음도 사망도 칼도 기근도 우겨삼도 실제로 이 허무한 것들을 퍼붓겠다는 겁니다.

 

아이고 아이고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줄 몰랐심더 라고 다윗은 외치는 겁니다.

 

우리는 이 허무 속에서 더더욱 풍성하기 짝이 없는 넉넉한 주님의 사랑을

쫑알 쫑알 불구덩이 속에서 수다 떨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이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21:18,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9, 개역)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어떤 죽음으로도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주님의 뻔뻔스러운 사랑이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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