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p70-79 나무와 열매 (누가복음 8장 1- 56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www.su.or.kr
1월 25-28일 날짜 QT

나무와 열매의 관계

오늘 살펴볼 내용은 25,6,7,8 4일치의 큐티 내용인데 다 같은 내용들이고 또 지금 마가복음 강해를 우리교회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참고하시면 될 것 같고 저는 이 부분을 하나로 묶어서 살펴볼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영적인 믿음의 행위는 반드시 그 반대의 육적인 소욕을 들추어 내면서 그 차이성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 차이가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줄도 모르고 저 예언자라는 예수라는 작자가 그 더러운 여자의 바치는 물건을 받는다는 것은 예언자가이기 보다는 더러움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한패거리와 같은 먹기를 탐하는 먹보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이며 세리 곧 매국노와 더러운 창기인 죄인의 친구임을 확인하게 되는 겁니다. 즉 아무리 봐도 예언자 일리가 없다 라는 사실만 점점점 더 명확하게 확인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기적이다든지 가끔씩 뛰어난 해석으로써 바리새인인 자신들 보다 월등한 모습을 한번식 보여주기도 하지만

정작 그들이 가장 신경 쓰는 행함의 문제에서는 그 뛰어남을 다 깍아먹는 그야말로 더럽기 짝이 없는 철저한 모순을 비추어볼때에(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임을 바리새인들이 알기 때문에) 도리어 일관적인 태도의 문제에서는 자신들이 그야말로 예수라는 이단을 충분히 제어할수 있는 신학체제가 예수가 지금 펼치는 운동에 비해서 훨씬 역사적이고 전통적이기에 구지 이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은 예수는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그 한계점을 충분히 들추어낼수 있는 그런 수준밖에 안됨을 더더욱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신앙이든 신학이든 행함이든 믿음이든 학문이든 뭐든지 수준 문제입니다. 어떤 수준에 미달하면, 사람이란 언제든지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구약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아무리 수준 높은 기적을 쫏아 따라가 구원을 소유할려고 해도 정작 물없는 곳 양식없는 곳 원망할만한 곳으로 인도하는 자기들이 생각한 구원과 기적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고서는 바로 돌아서서 아무리 처참하게 당해버린 애굽나라 황무지라도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갈려고 하는 겁니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 없는 곳에서 과거의 자기는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돌아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수가 날고 기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 주변인과 그의 한계를 빨리 들추어주면 줄수록 그 사람 곧 예수를 빨리 정신차리게 만드는 것이고 허무맹랑하게 그를 쫏는 무리들을 빨리 정상사회로 복귀시키는데 욕을 먹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실행을 하는 겁니다.

자기의 수준을 보라는 겁니다.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 밖에 안되는 수준을 좀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처럼 이 창녀의 향유부음을 좀 과대해석좀 하지 말고 정신차리고 이 창녀의 평상시의 삶을 좀 보라는 겁니다. 더럽다고 해야 그녀가 자극을 받고 그 일에 돌아서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바리새인의 생각을 유도하시기 위해서 창녀의 향유부음을 더욱더 기념하는 겁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이 한 과부 한 뭉둥병자 한 창녀 한 죄인이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를 표함으로써 즉 동참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깨끗하다 라는 사고방식 자체를 정죄하기 위함인 겁니다.

결국 영의 소욕은 바로 이 여인이 보여준 예수님의 죽으심을 소유할려는 겁니다.

반대로 육의 소욕은 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빼버리고 선악을 추구하여 선과 거룩으로 자기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바로 이런 두 모습을 가르고 나누기 위해서 동원되는 겁니다. 왜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기념하는 것일까요? 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모든 실상들의 내막을 다 드러내주는 유일한 진리 이기 때문입니다. 곧 걸림돌입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은 비록 자신이 죄인의 신분인 더러운 창녀라 할지라도

바리새인의 거룩에 대한 공격과
제자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공격과
가룟유다의 가난한 자에게 실질적인 베품에 대한 공격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계명이다. 이 두 개의 큰 계명이 바로 바리새인과 제자들과 가룟유다가 기준을 삼고 이 향유부은 여인을 공격하는 기준이 된다. 완벽하게 법을 제대로 잡고 싱행하는 모습이지 않는가?)
반드시 통과함으로써
그들이 아무리 유전화 시키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리화 신학화 신앙화 실천화 해도
정작 그들의 마음은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는 것을 율법을 쥔 모습을 갖추도록 해서 들추어내는데 바로 이 여인이 제격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진적도 없이(즉 자기 부인) 율법과 큰 계명 곧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아무리 실천해 보아도 그것 자체가 법이 되고 자기를 과시하는 육의 자랑인 육의 소욕에 빠지는 결과임을 영의 소욕으로써 이 여인이 영에게 소욕 당함으로써 철저하게 구경꺼리가 되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살펴본 중간에 끼인 버림받는 독생자의 모습을 성령은 반드시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그러했고 구원받는 강도도 그러했고 여기 향유부은 여인도 또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중간에 끼인 법(행함)과 긍휼(믿음)을 들추어내는 미끼가 되는 겁니다.

자 그렇기에 바리새인의 눈에는 뭐든지 부정스럽게만 보이도록 주님은 일관되게 일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영의 일이요 영의 소욕이요 오늘 공부할 복음이라는 씨앗의 할 일입니다. 말씀이 말씀을 이루고 성취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모든 본질의 내막을 말씀이 들추어냄으로써 비로써 알게 되는 겁니다.

4일치의 큐티 내용은 한 마리로 말해서 열매에 관한 이야기로 다들 알려졌고 그것으로 대부분 사기를 쳐 왔습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전부 나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5일자 좋은 열매 맺어요 라는 제목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씨 뿌리는 비유인데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밭비유로 사기를 쳐서 좋은 밭 되자 곧 좋은 열매 되자 라는 운동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걸림돌을 빼버리니까 좋은 밭 비유로 밖에 되지를 않는 겁니다.

26일자 큐티 제목은 믿음의 사람이 되자 라는 제목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죽게 되자 예수님을 깨워서 풍랑을 잠잠케 하심으로써 믿음이 적다 라는 야단을 맞음으로서 우리는 야단 안 맞고 제대로 된 믿음의 사람이 되자 라는 취지로 큐티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믿음이 큰 사람이 되자 라는 것 보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시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그저 예수님을 이용만 할 뿐이다는 겁니다. 믿음이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시각은 바뀌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빠뜨리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풍랑은 주님이 일으키시고 주님이 잠잠케 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 나무가 도대체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세계의 믿음의 나무라는 생명나무라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예수님을 선악의 나무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보기 때문에 이 교재의 내용처럼 믿음이 큰 사람이 되어서 나도 하나님과 같이 되는 그야말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죄를 부추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믿음 마저도 경쟁상대로 따라잡아야할 선악의 나무로 취급할 수 밖에 없도록 종교는 그렇게 사람들을 사기치고 자기들의 계명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감안하시고 이 사건을 제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도록 일으키신 겁니다. 아마 그 이후 또 사도행전 이후에 어떤 사도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풍랑을 만났다고 합시다. 풍랑을 잔잔케 했나요? 사도바울이 그런 풍랑을 만났다고 했지요.(행 27장) 잠잠케 했나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열매주의가 지금 팽배해 있음을 볼때에 사기 치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열매다운 껍데기를 아무리 양의 탈을 갖추어 본들 나무는 멍청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압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그 연결점은 그렇다면 뭘까요?

십자가라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열매론자들은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빼버리고 행함이라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무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나무를 쳐다보고 긍휼을 바라는 것 보다 차라리 열매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어떤 누구도 공격하고 웃사꺼리로 만들 수 없도록 하는 완벽한 성벽인 캐슬이 외부의 모든 침략으로부터 방어해 주는 요새요 산성이요 구원이 되지 않을까요?

왜 미련 스럽게 십자가 라는 자폭의 길을 갈 필요가 뭐가 있나요? 굴욕만 있을 뿐인데

그 다음 27일 자 내용은 귀신 글린 자를 구원했다 라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 내용입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내용입니다.

(눅 8:37, 개역)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귀신들린자를 고치니까 누가 싫어하느냐 라는 겁니다.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니 돼지가 물속에 빠져서 몰살하게 되니 이제 그 돼지 축산업의 주인은 망했고 마을 경제는 또 다시 가난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괴롭게 하는 자 라는 의미입니다. 전능자 이심을 이렇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여러분은 만약 주변에 여러분은 괴롭게 하는 것이 없다면 저는 그 사람을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라는 의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자기 친구인냥 좋은 분으로 만들고 파도

주님은 자신을 반드시 괴롭게 하시는 자로써 자신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돼지 떼가 몰살 당하면 이제는 처 자식을 꼼짝 못하고 죽게 됩니다. 학원도 못 가고 못배워 무식하면 바보 취급당하고 교회 안에서도 왕따 당하며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학식 딸리면 가감히 처참하게 짖밟아 버리는 곳이 더더욱 교회라는 곳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회 자체가 고아 과부 나그네를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귀신을 물리쳤다 라는 긍휼 보다 정작 그 긍휼 곧 오죽 못난이였으면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가망없는 인간이다 라는 것을 도리어 싫어한다 라는 것을

졸지에 돼지떼 몰살로 인해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귀신에 대한 복수에 감사 보다
이제 고아 과부 나그네 되어버렸다는 데서 오는 자존심 상함이 예수고 뭐고 나발이고 다 쫏아내고 멀리 멀리 떼어 놓고픈 겁니다.

결국 예수든 뭐든 다 자기유익에 보탬이 위해서 신앙하는 것이지
자기를 도리어 고아 과부 나그네로 만드는 자존심 다 무너뜨리는 복음 따위란
인간은 절대로 받아들일수 없음을 밝히면서 정작 귀신들린자는 딴 사람이 아니라
정상인이라고 우기는 자기유익 때문에 늘 정상인의 레벨에서 벗어나지 않을려는 그 자가
진짜 마귀새끼 임을 밝히시는 겁니다.

그 다음 28일자 믿고 따라요 라는 제목의 내용은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는 내용인데 정작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통해서 그 주변의 모든 사람을 육의 소욕에 빠진자임을 예수님 자신의 일하심의 비웃음거리로써 밝혀 내시는 겁니다.

반드시 주님의 영의 일은 육의 비웃음을 유발케 하시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결국 주님의 모든 일하심은 걸림돌을 제시하고 거기에 반드시 모든 인간들은 걸려 넘어져야만 하는 겁니다. 넘어져서 빠드려져서 죽게 되어야 누가 구원자이고 누가 외부에서 유일하게 손을 내밀자인가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물에 빠뜨리시는 겁니다. 찢으셨으나 감싸 주심은 주님의 공로만을 남기기 위함이지 안 빠지는 방법 따위를 몰색하는 종교꾼들은 늘 피할 방법을 알려주기 마련입니다.

자 여기에 아이가 잔다 라는 주님의 말씀 성취에 다들 비웃습니다. 거기에 부모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비웃음을 받아내신 후에 그것을 반드시 무참하게 굴욕토록 만들어야 그 차이성을 인식하는 겁니다. 그래서 웃음으로 바꾸는 이삭 곧 하늘에 속한 일은 예수님만이 믿음이고 나머지 인간들의 믿음은 흉내일 뿐임을 밝히시는 겁니다.
(마치 나사로를 살리는 그 사건의 내용과 일치 합니다. 반드시 그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과 그들의 거짓된 울음을 보시고 쪽팔려서 주님이 우시는 그런 사건의 내막과 같습니다.)

이상의 네 개의 사건들은 바로 열매맺자 라는 운동이 아니라.

누가 나무요 그 나무의 열매인가 라는 관계를 밝혀내는데 있어서
반드시 육의 소욕을 들추어 내심으로써 상대적인 차이성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열매를 강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나무되심을 자기의 열매를 통해서 드러내심으로써
반드시 가짜 열매와 가짜 나무인 그 관계성 까지도 밝혀내시는 겁니다.

저들의 아비는 마귀요 너희는 그 마귀 새끼이다 라는 것을 밝혀내시는 것이
이 네가지 이야기의 초점인데

이런 예수님의 일하심은 인간들은 그 실체를 밝혀내는 영의 일 보다
그것은 도리어 믿음 좋은냥 주님께 맡기고 자신들은 그저 열매됨만을 충실히 함으로써
좋은 나무를 만나면 된다고 자기가 좋은 열매가 되면 자동적으로 좋은 나무가 예수님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 네가지 사건에서 반드시 유발케 하심으로써 증거된다는 것을 주님이 보여주시는 겁니다.

귀신들린 청년들 보다 더 나중에 일곱 귀신을 몰고 들어와서 귀신 들린 자들이 바로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요 오늘날 기독교라는 종교인 이듯이

주님은 이런 의미를 놓치지 않고 증거하심은 우리가 열매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을 아시고 행하시는 겁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표현과
예레미야의 경고로 이런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이다 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회개를 하게 되면 천국이 잠시 보류가 되나요?
회개가 포인트가 아니라 천국이 포인트입니다.

천국이 오기 때문에 회개를 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회개를 당하는 곧
천국의 허리케인 앞에 모든 무릎이 안 꿇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인간의 회개의 유무에 따라서 천국이 왔다가 되돌아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회개 하든 말든 이미 천국 자체가 밀어 붙이기에 그냥 당하는 입장 뿐이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참선지자의 경고의 심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본 미래의 영광인 허리캐인을 그들이 미리 앞당겨 봤을 뿐이지 회개하고 경고대로 지키고 행하면 그 허리케인이 멈춘다는 소리는 그야말로 개소리입니다. 허리케인 앞에서 회개한다고 또는 믿는 사람이다 라고 봐주면서 비켜 가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게 된다는 것에 기뻐하기에 참선지자들은 눈에 비이는 것이 없이 그 새옷을 빨리 입고자 헌옷에 온갖 저주와 심판을 담고서 이스라엘 앞에 서니까 멀리 멀리 떼어 내고 싶은 겁니다.

자 이상의 나무와 열매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 봤는데
참 재미있게도
열매가 생각 하는 나무는 그 열매의 생각 대로의 나무입니다.
마치 성화론자들의 나무는 그들의 생각 대로의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예수를 파악 하면 됩니다.

바리새인의 메시야는 그들만의 메시야입니다. 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결국 머리만 보면 됩니다. 열매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보면 열매는 구지 안봐도 그 나무에 그 열매
그 아비에 그 자식입니다. 그 자식이란 그 아비의 생김새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보면 그들의 아비가 누구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자 왜 이것을 강조 하느냐

바로 이 네 가지 이야기가 바로 그들의 아비를 들추어내는 사건들인 겁니다.

육의 소욕을 드러내는 것이 영의 일입니다.

그들의 아비를 들추어내지 못하는 영의 일이란

소위 성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남 보다 자기 단도리만을 제대로 하면 된다는 발상이니
자기 구원 챙기기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래놓고 사랑의 실천이라고 죽어도 외쳐야하는 이유는 악령이 들어갔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사랑을 완성했습니다 그 주님만으로 족합니다 라는 고백을 그들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곧 열매들의 특징이 바로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고백으로써 믿음이 누구였군요 라는 고백만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나무는 자기의 목숨과 공로 전부를 자기 열매에게, 그 열매는 그 나무 외에는 일체 자랑치 않는 자기마저도 부정하는 것 외에는 이 관계의 밖에서는 그저 이 관계가 어리석고 미련하게만 보이는 선악의 상대적인 모습일 뿐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뿌리시는 씨앗은 이 땅의 속성들을 다 제대로 밝히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씨앗 때문에 그 씨앗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열매는 저절로 맺는다는 것을 나머지 땅의 속성을 들추어내시는 씨앗의 능력으로 인해서 그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이 네가지 이야기의 사건을 통해서 땅에 속한 자들의 속성을 들추어내심으로써 씨앗은 제대로 밝혀내시고 그 땅의 속성을 들추어 낼때마다 얼마나 이 씨앗의 꿈틀거리는 활동에 모조리 다 걸려 넘어짐으로써 이 씨앗을 얼마나 싫어한다는 것을 봄으로써 아 주님이 제대로 복음의 운동력을 펼치신다는 것에 우리는 당하는 입장으로써 그저 그가 하신 일로써 그가 옳다함을 받음이 마땅함을 알고 우리도 한가닥의 행동을 통해서 옳다함을 받을려고 헛짓꺼리를 할것이 아니라 누가 이런 일들을 펼치시고 운동력으로써 내막을 들추어내시는가를 통해서 씨앗의 위대함을 알고 모든 것이 이 씨앗에 무너뜨림을 당한다는 사실에 기뻐할수 있도록 하옵소서. 부딧히는 돌에 모두가 산산조각 나는 그 현장에서 오로지 나는 아니요 예수님만이 옳았습니다 라고 외칠수 있도록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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