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8. 철저한 단절과 그 단절을 뚫어버리는 희년

영접과 머리 둘 곳 없는 배척받아 싫어버린바 된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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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p80-95 영접과 머리 둘 곳 없는 배척받는 예수님 (누가복음 9장 1- 62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www.su.or.kr
1월 29- 2월 2일 날짜 QT

영접과 머리 둘 곳 없는 배척받는 예수님

오늘 살펴볼 내용은 교재 1월 29일 - 2월 2일자 큐티인 누가복음 9장 전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까지 큐티 교재를 사용하고 다음차례부터는 성경 누가복음 아마 10장부터 하겠습니다.마태복음 39. 사람의 일 VS 하나님의 일 의 내용과 같습니다.

이 내용이 너무 중요합니다. 언약은 비언약을 동원해서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알려면 사람의 일이 뭔지를 알아야 하고 그 차이로써 하나님의 일을 증거합니다. 사람의 뜻이 뭔지를 알아야 그 대비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옛언약을 알아야 새언약을 알 수 있습니다. 참 재미있게도 이 옛언약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난 갇힌 인간이 바로 언약을 잡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옛언약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그와 정면대립된 예수님의 새언약 완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복음에서는 희년을 완성하는 임금 이니까 희년을 중심으로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교재내용은 1월 29일자에서는 육체의 굶주림과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주는 예수님 이라고 어린아이 교재에서 책을 만든 분은 채워달라고 요청하면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린아이 소유개념과 어른의 소유개념은 다릅니다. 아이는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 모르기에 채워달라는 것이 관계성으로써의 의미이기에 뭐든지 다 주십니다. 그러나 어른과 또 어른같은 아이 곧 부모 없는 아이는 늘 독자성을 띠는 채움의 소유만을 꿈꿉니다. 독자적인 세계를 확대하고 확장하는 소유란 있는것도 빼앗기는 소유이고,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를 자기도 모르는데 주님이 다 아시는데 그 주님이 아시는 것을 채워달라는 고백은 오로지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비롯된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 자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뭐든지 채워주시는 예수님을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예수님을 본다면 뭔가 착각한 겁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할때에 예수님이 도망치시는 겁니다. 너희가 먹고 배불러서 임금삼고자 하심을 알고 피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 곧 약속에만 관심 둘 뿐입니다. 이 약속만을 바라보는 것을 어린이 교재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짜인 30일 날짜의 교재의 내용은 정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예수님을 우선 순위로 두고 따라야 한다 라고 이미 교재 상으로도 앞뒤가 조금 안 맞는 식으로 전개 됩니다. 결국 좋아하는 것이 뭐냐? 라는 관점에 달린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할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엄마 아빠가 싫어하는 것은 자기도 싫어하고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도 좋아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 것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유도 조건도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세계의 죄의 세계는 이유와 조건을 갖추기 위해 타인을 삼키고 이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일이요 사람의 일입니다. 결국 약속이라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일 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면서 증거 되는 그 차이성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31일자 교재는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이 죽으러 왔다 라는 낮아지심을 강조하고자 스스로 잘난체 하지 말자 라는 취지로 다루었는데 정작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믿음은 2월 1일자 내용의 인간의 믿음 없음과 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스스로 잘난체 하지 말자 라는 우리의 믿음의 조건을 갖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늘 잘난체 하는 나를 늘 지적해 주시는 무조건적이고 이유 없는 사랑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주님과 제자는 이런 우리의 믿음없음을 늘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해 지적받는 그 관계성이 사랑이기 때문에 지적해 주시는 겁니다. 지적받을 필요 없이 완벽하게 갖춘 인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율법 아래 갇혀 살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들려 병든 소년의 경련을 사람들이 고쳐달라는 것을 요구하자 능히 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직접 고쳐 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다구치고 심지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라고 제자들의 면상에서 확 까발리는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을 정도로 꾸짖고 지적하십니다.

제자들이 이런 모욕을 당했다면 우리들일뿐이겠습니까?

이렇게 해서라고 주님은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뭔가라는 차이를 강조하시고 드러내시는 겁니다.
즉 죄를 감당하러 왔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곧 희년 완성 곧 약속 성취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랑 완성인데 이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하나님의 법을 완성하기 위함인데 그렇게 될려면 원수가 설정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사랑이신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수를 사랑한 예수님의 일하심의 상대자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원수입니다. 사랑의 혜택은 원수에게만 돌아갑니다. 그런데 원수가 되지 않을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제자들에게 향한 꾸중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이 원수가 누가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경험(철저한 단절성:버림)이 있는자 곧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는 영접 받지 못하고
정작 유대인들이 원수로 취급하는 이방인들에게 영접을 받는
고아 과부 나그네의 고엘이 됩니다.

정작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자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먹보요 술꾼이요 매국노의 후원자 동지일 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누가복음의 9장은 원수를 설정하고 죄인을 규정하고
이런 죄인을 건지기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약속을 성취할 자 희년을 완성자로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일에는 관심 없고
그저 사람의 일인 제자들끼리 누가 크냐 라는 다툼과
정작 크냐 라고 싸울 뿐이지 죄를 감당하는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믿음과는 전혀 상관 없는 모습만 나열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각기 제 갈길로만 가는 양같은 자들로써

누가복음 9장은 사람들 곧 예수님 빼고 제자들과 모든 인간들을 각기 제 갈리로만 가는 양
길잃어버린 양으로써 설정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사람의 일 곧 자기를 위하여만 살 뿐인 자기 일에만 빠져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 혼자만 묵묵히 갈 뿐입니다.

오늘 마침 저의 어머니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수 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인간 쪽에서의 출발은 다 거짓될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영접하는 자는 결국 구원이다 그런데 어떻게 영접할 수 있느냐 불가능 할텐데 라고 아무도 영접할 수 없지 않느냐 라고 질문하신 겁니다.

저는 거기에다 불난 집에 더 기름 붓듯이 영접이 보통 기존 교회에서 자기가 예수님을 초대하여서 대접하는 식의 영접이 아니라 심판의 의미라고 설명 했습니다.

영접하면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운명인 곧 저주의 운명인 십자가의 길 가심인 심판 받으심 버림 받으심의 같은 운명이 된다 라는 의미로 이야기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심판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심판을 절대 심판 받을 이유가 일체 없는 분이 혼자 대신 다 감당하고자 심판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런 예수님을 영접 한다는 것은 나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의 괴수요 지옥가도 할 말 없는 자입니다 라고 심판받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정작 이런 마음의 믿음인 반면
인간의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정반대인 믿음인 그야말로 종교적인 영웅 곧 우상적 믿음에만 빠져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나무와 열매를 말하기 위해서 그 반대인 나무와 열매의 하나 됨이 아닌 차이가 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가 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출발하는 모든 열매들이 나무가 달라서 즉 아비가 달라서 나온 것들임을 차이성으로 드러내면서 진짜 열매는 진짜 나무가 하는 일에 의해서 드러남을 8장을 다루면서 살펴봤습니다.

결국 우리 쪽에서는 일체 우리 스스로가 나무의 열매됨을 갖출 입장이 전혀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 뿐임을 보여주는 이 말씀 즉 너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가는 이 말씀이 들추어내는 약속이 들추어내는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시는 것이 바로 말씀이라는 운동력이 있는 약속 곧 십자가에 달려 심판 받아 죽으시러 온 예수님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고마워 하고 보고싶어 하고 영접할 것 같지만 절대 안 그렇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9장은 밝히고 있습니다.

아무도 영접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자들 마저도 말이죠.

예수님을 영접 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심판 받아야 함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심판 받기를 바라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외면하고 싫어버린바 된 겁니다.

맞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앞부분의 공부 내용과 앞으로 살펴볼 내용은 바로 이 십자가 길로 가시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 모두를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다 각기 제 갈길로만 가는 양으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아무도 영접하지 않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 겁니다.

어떻게 말이죠?

모든 인간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원수로 죄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과 원수라는 이 언발란스의 불륜의 관계로 십자가의 지혜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부자의 모습으로 왕의 모습으로 우리를 영접하러 왔다면
우리를 영접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영접했을 겁니다.

그러나 머리 둘 곳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영접하시겠다 라고 하면
도리어 우리 쪽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발로 차버리고 외면해버릴 겁니다.
멀리 멀리 도망쳐 버리고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쫏아내기 바쁠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비로소 이사야 53장이 이해가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희년을 완성할꺼면 희년은 남이 아닌 나를 적으로 삼고 이루어질 전쟁종식인 겁니다. 즉 나를 향한 전쟁일 뿐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아니 위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영접하러 왔다 라는 전제가 이미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그러니 이런 결론을 도출한 이야기 과정도 비웃지 않으면 이런 결과를 받아들어여 할 입장인 겁니다.

성경의 문자는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라고 기록했다면 우리가 하는 것 아니냐 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말이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영접한 적이라도 있냐 말이죠. 아무도 없습니다.

영접을 마치 인간 숙제나 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문제인냥 다룬다면 이미 대화는 단절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동 매사 하나 하나가 영접을 하든 믿고 따라가겠다는 것 또한 모두 자기를 위한 우상숭배 자아숭배인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적극적으로 이 자아를 붕괴 시키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가 영접하고픈 모양이 일체 없는 흠모할 모양 없는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온다는 겁니다. 우리는 착각하기를 남들이 싫어하겠지 뭐 난 절대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고 흠모만 할 것이다 라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다름 아닌 나를 겨냥한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만 오시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고픈 마음을 가질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좋아할수 없고 무지무지 싫어하는 모습으로만 일관하시겠다는 것에 우리는 그 또한 외면하고픈 사실이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날마다 나올 수밖에 없는 고백입니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이 말만 고백했습니다.

그럼 누가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해 보니 모조리 다 불가능함을 보게 된 겁니다. 철저한 단절성입니다. 이게 바로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리새인 사두개인 종교 지도자들 이야기는 그저 다 행하고 지키기만 하면 다 가능하다 라는 말로만 일관합니다. 이게 바로 육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

그래서 이 차이성을 보여주고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영접을 알려며는 반드시 그 반대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머리둘곳 없다 라는 겁니다. 서로 영접할려고 달려들 것 같은 인간의 속성을 예수님은 역으로 자신을 머리 둘 곳 없는 자임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은 마귀뿐이다 라고 거짓선지자를 잘도 영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암담한 사실은 누구든지 사람에게 대접 받을 생각 조차 먹지를 말라고 합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영접은커녕 죽기까지 싫어버린바 된 버림받는 예수님을 성경은 일관성있게 증거 합니다.

이런 철저한 단절성을 먼저 확정 짖고 그 고아 과부 나그네라는 처음의 자리를 죽음의 자리를 뚫어버리는 것이

너희는 못하나 나는 한다.

(마 19:26,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막 10:27,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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