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빠뜨려 건지는, 주여! 뉘시오니까? (시편 86)

 


속았어 속았어 시편
86(예수님)의 연기에 속았어! 난 뱅기 타고 배 타고 갈꺼예요

 

시편 86편 읽는다고 (물위를 걷는다고) 죽기라도 하겠어요?

죽었어!!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그만 역병에 걸려 죽고 말었어!!

 

지옥에 빠뜨려 건지는, 주여!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86:4, 개역)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86:13, 개역)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86:1, 개역)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86:2, 개역)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86:3, 개역)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86:4, 개역)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86:5, 개역)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86:6, 개역)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86:7, 개역)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86:8, 개역)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86:9, 개역)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86:10, 개역)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86:11, 개역)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86:12, 개역)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86:13, 개역)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86:14, 개역)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가 일어나 나를 치고 강포한 자의 무리가 내 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86:15, 개역)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86:16, 개역)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86:17, 개역)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14:25, 개역)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14:26, 개역)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14:27, 개역)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4:28, 개역)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14:29, 개역)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14:30, 개역)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14:31, 개역)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14:32, 개역)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14:33, 개역)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시편 86편을 다윗의 탄원시라고들 하더군요.

그런데 지난 시간의 85편을 통해서

글을 올리면서도 놀랬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놀라운 점이

긍휼과 진리의 만남, 의와 화평의 입맞춤을

정작 이스라엘은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분명 입으로는 분명 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원치 않는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 합니다. 모순되지요.

그럼 그런 이스라엘을 탓할수 있는가?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지면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럼 말라꼬 이런 내용을 기록하셨는가?

어차피 불가능한 내용들인데 인간을 놀려먹을려고 하는가?

 

 

인간 쪽에서 나올수 있는 오류란 오류는 다 뱉어내도록 하시는 겁니다.

즉 긍휼과 진리의 만남, 의와 화평의 입맞춤을

이스라엘이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원하고 원하지만

정작 주님의 원하심과 다르다는 겁니다.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긍휼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긍휼로 부터 나온 긍휼이 아닌 겁니다.
(7번 남을 용서하는 열심은 있어도, 7에 70번 용서를 받아야 하는 긍휼을 쫏은 것은 아니다는 겁니다. 이 차이가 3일의 간극의 차이인 지옥과 천국의 차이입니다.)

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의 되신 예수님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 곧 십자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정작 십자가에서 나온 의를 싫어하는 모순점을 적극적으로 대놓고 드러내더라 말입니다.
누가? 우리가 그래요 우리가~!

그래서 이스라엘이나 우리는 어떤식으로 해석을 하는고 하니

다시는 바벨론 포로 같은 상황을 격거나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리와 만나기 위해서 긍휼을 갖추는

마치 조건을 갖추듯이 긍휼을 갖추고

화평과 입맞추기 위해서

의로움을 갖추어야 한다는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저런 일들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윗 언약은 정작 다윗 개인이 그 긍휼을 갖출려다가 개박살났다고 선언하는데서 다윗언약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점이거든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는 지금 현재까지도

반복하지 않기는커녕

더욱더 반복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말하는 이스라엘이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과 무관한 이스라엘이니까

육적 이스라엘의 저런 반복하지 말자 라는 해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다는 거죠.

? 예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는데

이스라엘은 정작 예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은 원치 않고

자신들이 형성한 이스라엘을 주장하고 있으니까

 

처음자리로써의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긍휼과 진리의 만남에서

긍휼도 진리도 만남도 우리는 다 엉터리 개념을 미리 설정해 둔 입장입니다.

특히 이웃 이라는 개념은 더더욱 엉터리 개념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도 사실상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들은 가난한 자 개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어있는 개념들을 비어있는 그 자체로 견디질 못해서

반드시 채워넣어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가난한 자 개념을 인간쪽에서 만들어 버려서 채워버리고

빈공간을 매꾸어 버림으로써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자 개념을 이룰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든 인간들은 그 노력과 열성에 다 넘어가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의 조작에 넘어가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고로 가난한자 개념은 없어요.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그때 달라요.

그리고 그 새로운 가난한자 개념을 통해서 새로운 이웃 개념을 새롭게 만들때에

놀랍게도 그 어떤 인간도 동의하지 못하고 반발하고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가난한자도 싫어버린바 되고

이웃도 싫어버린바 되는

그런 가난한자와 이웃을 새롭게 만들어 냅니다.

 

아마 인간에게 맡겨보면 아무도 이 싫어버린바 되는 가난한자와 이웃을 못만들어 낼겁니다.

 

오늘 시편 86편에서도 돕는자가 나옵니다.

다윗은 다윗 개인이나 아니면 이스라엘 혈통 곧 만족에서나

아니면 이스라엘 국가에서 만들어낸 가난한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윗을 돕는 이웃으로써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돕는자 곧 주 여호와는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이웃이 된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생소하고 낫설기 짝이 없는 가난한자 다윗이어야만 하고

그런 다윗을 생소하게 만든 아주 낯설기 짝이 없는 주 여호와 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말로 표현하기 참 어려운데 다행히도 본문을 올렸듯이

마태복음서에 나옵니다. 14장

 

베드로가 다들 유령으로 착각했던 예수님을 이제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친밀감으로 접근하고자

그 멀어진 낯선간극을 좁히는 시도를 합니다.

주님이 명하시기만 하면 저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수 있게 됩니다 라고 말입니다.

 

인간 쪽에서의 사랑으로 출발하는 아주 당연한 스승에 대한 친밀감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물 위로 걷도록 유도하시는게 아니라

사실상 물 밑으로 빠뜨리는

지옥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죽음을 퍼붓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반응은 당현히 다시는 이런 죽음의 경험 다시는 하지 말자 라고

나오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이다는 겁니다.

긍휼을 남들에게 7번 베풀수 있는 위치와 조건의 자리가 아니라

너희가 원래 애굽의 종 되었던 노예였다는 겁니다.

죽어도 마땅한 자들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긍휼을 베풀어 긍휼을 덮어씌이도록 한 이유는

너희에게 그 어떤 긍휼이라는 의미가 딱 맞는자라서가 아니라

그 어떤 이유로도 긍휼의 의미가 전혀 없기 때문에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으로 부었다는 겁니다.


불쌍해서

불쌍한 조건이 되어서

불쌍히 여긴게 아니라

 

그 어떤 원인도 없는데

결과적으로 불쌍함을 부었기 때문에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풍요롭게 살아왔고 근심 걱정없이 살았어도

원인 없이 결과로 불쌍히 여겨서 불쌍히 여김받았다는 편파적인 긍휼이 입혀졌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가난함이란 내 쪽에서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편파적 해석이다는 거죠.


예를들어

솔로몬은 단한번도 가난함 자체를 모르고 살았겠죠.

그런데 그의 입에서 허무라는 헛되도다 헛되도다를 말할때에

정작 남들은 겉으로는 반발 안해도 속으로는 다 비웃습니다.

참 배부른 소리를 하는 구나

 

자 이럴때에

정작 솔로몬 개인은 공중의 새가 더 부럽고

주의 아름다운 장막에 집짖는 참새가 부럽고 제비가 부러워 몸이 말라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악의 장막에 천년을 살빠에 주의 궁전에서 단 하루가 좋고

주의 장막에 가장 비천한 낮은자리인 문지기가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솔로몬을 바라보는 모든 이스라엘 집단은

정작 이 솔로몬의 영광이 더 낫다고 합니다.

나도 솔로몬이 되어서 저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싶다고

아무리 공중의 나는 새가 자유롭게 날아도 하나도 안부럽습니다.

누가 솔로몬의 옷을 입고싶어 하지

내일 아궁이에 던질 풀을 부러워 부러워 너무 너무 부러워 몸이 말라 비틀어 지겠습니까?

상사병 날 정도가 되겠냐 말이죠.

 

솔로몬은 개인이고 이스라엘은 집단인데

누구 말이 맞냐 말이죠.

 

그런데 주 여호와의 낯선 개입은 솔로몬이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단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솔로몬의 영광을 바라는 이스라엘 집단은

집단이 아니라 바로 개개인이다는 겁니다.

 

개인 부활, 개인 구원 따위는 없다고 했지요.

집단 구원, 집단 부활 밖에 없습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의 몸으로써의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하는 겁니다.

 

개개인이 모여서 집단을 형성하고 국가 민족을 형성한 그것이 집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개인일 뿐입니다.

 

결국 집단 구원, 집단 부활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구원과 부활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수 없는 개념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종교의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영생과 부활에 전혀 일치점이 없는

완전 다른 의미이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구원과 부활이라면

그 그리스도의 몸인 이스라엘의 자리는

 

홍해를 건넌 그 자리도 아니고

요단강을 건넌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리도 아닌

 

오로지 3일의 간극이였던 자리인

광야가 바로 이스라엘의 자리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광야라는 죽음 속에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구원을 운운하고 있는 분은 여호와 자신이지

 

광야 밖에서나

개인 구원이나 등등의 개념들을 아무리 인간의 본능 때문에 발설해도

주님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심어버린다는 겁니다.

원인도 없이 결과로 말입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세계를 우리는 걷고 있는 겁니다.

입으로 놀래서 막 터져나옵니다.

어머 어머 이거 이거 말도 안돼 라고 하면서 막 걷고 있는 겁니다.

본인들이 걷고 있으면서도 말이 안된다고 누가 믿겠냐고

나도 지금 안 믿겨지는데 어머 어머 이게 말이 되기나 하냐 말이지 라고

혼자 놀래서 혼잣말로 떠들어대면서 실어증환자처럼 말이죠.

 

그런식으로 적힌 것이 시편 86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국 누가 봐도 왠지 연극처럼 연기하는 것처럼 다윗은 외치는 겁니다.

 

연기죠 연기

 

그런데 이 연기가 실상 보다 더 실상 같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14장의 베드로에게서 보자 말이죠.

 

예수님이 명하셔서 물위를 걸으라 하시면 저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됩니다 라고

능동적으로가 아니라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물위를 걸었잖아요.

시켜서 물 위를 걸었다 말이죠.

아 그런데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제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 위를 걷도록 하는게 목적이 아니라
물 아래로 빠뜨리는 것이 목적이였다는 거죠.
속았어 속았어 예수님 한테 속았어 뱅기타고 배타고 러시아로 갈꼬예요

 

이게 다윗에게는 연기하듯이 나타났듯이

 

우리는 에이 말도 안돼 라고 수동적으로 연기다 연기! 구라다 구라 라고 누가 시킨냥 자연스럽게 반응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의 깊은 내막이 더 중요하다 말이죠.

 

마침 누가 전화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불교에서도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한다고 말이죠.

 

어떤 미국인였던가? 부자인데

만약 기적을 제대로 증명해 보이면 상금을 주겠다고 내걸었던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은 기적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그 따위 기적을 발가벗겨버리겠다고 나서는 인물이였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의 성과로인해

기적을 행사하던 자들이 실제로 사기꾼으로 몰려서 엉터리가 탄로나기도 했지요.

 

그러니 불교의 그런 기적 보다 더 골치 아픈게 바로 과학이 되는 셈입니다.

과학이 종교 보다 더 뛰어넘는, 종교 보다 더 종교적인 것이 되어버린게 과학이니까 말입니다.

 

의문의 죽이는 것이 서로가 의문의 죽이는 것을 감추고자 서로가 의문의 반복을 통해서

답도 없는 의문만을 추구하더라 말이죠.

 

아무튼 불교에서도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베풀더라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것이 기적이라고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에이 저게 무슨 기적이야 라고 무시받는 기적

기적 아닌 기적

기적이라고 전혀 볼수 없는 기적

기적을 없애는 기적이다 말이죠.
기적을 깨뜨리는 기적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떤 기적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 낯설게 보이는 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달라졌어요.

 

다르게 보이는 겁니다.

어떤 분

 

내가 긍휼을 갖추어서 진리와 만난줄 알았는데

정작 예수님은 진리 같기는커녕 철저하게 비진리로 취급받고 나도 귀히 여기지 않는

거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내가 갖춘 긍휼 7번을 모조리 탈탈 털어버려서 개나줘버리고

정작 그렇게 나에게 마저도 귀히 여김받지도 못하면서도

정작 나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770번 용서하시겠다고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불쌍히 여겨주시겠다고 하니

너무 너무 기가차서 말이 안나오는

아니 주님이 나 보다 더 쇠하였는데

나 보다 더 매맞았는데

나 보다 더 질고를 당하는데

누가 누구를 고쳐요?

 

바로 이게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안믿겨져야 하는 예수님인데 이게 요나의 표적인데
인간들이 너무 너무 예수님을 잘 믿어? 예수님 믿기의 달인들만 모였어
알고보니 가짜 예수

도저히 안 믿겨져야 진짜 예수인데

그것도 내가 싫어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박아라 내가 외쳤는데

그 예수님을 내가 안믿을수 없게 된 그 예수님 자체가 기적이라는 겁니다.

어떤 현상이 기적이 아니라, 그런 현상의 기적을 깨뜨리는 구체적인 인물이
그 인물 자체가 기적이다는 겁니다.

이런 기적은 다들 싫어합니다.
인물이 기적이 되는 꼴을 인간은 때려죽어도 못 봅니다.
기적을 받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나라는 인물을 깨뜨리는 다른 인물
저번에는 쌍둥이로 표현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도플갱어로 표현해야 이해가 된다죠!

에이 기적 아니잖아!
그런데 왜 기적인척 해! 에라잇 퍽퍽퍽 맞아 죽어라!!!  
이게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기적을 이미 설정했거든요 나에게 유익이 되니까?

그런데 그 어떤 유익은커녕 대따 미움만을 독차지 하게 되더라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좋다고

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잖습니까 라고 세 번 대답하는

이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참 제가 지금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소리를 말도 안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유익이 될줄 알고 대따 물 위를 걷다가

물에 확 빠뜨려 죽여버려서

다시 건져내는 예수님을 보니

전혀 딴 인물이다는 겁니다.

내가 알던 그 예수가 아닌 예수이다는 겁니다.
내가 알던 그 예수
내가 친근하게 다가가서 겨우 겨우 내 편으로 만들었던 그 예수를
깨뜨리는 예수이다는 겁니다.
내 자신을 투사한 예수를 깨뜨리는 예수라는 인물 때문에
도대체 누구세요? 당신 누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유익이 전혀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믿게되는 예수

그 예수를 새롭게 만나는

 

이것이 바로 긍휼과 진리의 만남이다는 겁니다.

내 믿음으로 믿을수 없는 예수를 만난 거죠. 믿음이신 예수님을 말입니다.
내가 믿고자 하는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을 깨뜨리는 진짜 믿음을 만난 겁니다.

 

나를 물에 일부러 빠뜨려 죽여서

3일 광야로 데리고가 기적을 탈탈 털어버려

다시 끄집어내어서 보게되어 만난 그 예수

내가 알던 그 예수가 아닌 전혀 낯선 예수

이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요

의와 화평의 입맞춤이다는 겁니다.

나의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져서 태워버리는 그 입맞춤인거죠.

누가 감히 여호와의 불과 입맞추겠습니까?


화로다 화로다 나는 이제 망했구나! 누가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이 영광을 보겠는가?

불에 타 죽어 마땅하구나!!

그런데 안타죽은 것은 주님의 편파적인 긍휼이지
내 쪽에서 긍휼을 얻을맏한 그 어떤 조건을 갖춘게 없다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주의 영광을 봤구나 샬롬 샬롬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방적인 편파해석을

70년 바벨론 포로 마치고 돌아왔다고

불과 입맞추고도 멀쩡하게 돌아왔다고 편파해석을 하시는 겁니다.

혼자 기뻐요 혼자 막기뻐요.

 

정작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하나도 안 기쁜데

 

한번은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갑자기 막생각이 떠오르면서

귀신들린 딸 때문에 어미가 예수님을 만났구나 라고

벅찬 감격의 놀란가슴으로 일어나서 계속 되내이면서 말씀을 보게 되니

정말 깜짝 놀랬습니다.

 

귀신 들린 딸 덕분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말이죠.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데 다들 입을 츳츳 찹니다.

그렇게 만날 바에

좀더 더 좋은 환경에서 만나야지

왜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한데

왜 하필이면 귀신 들린 것이 뭐냐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좋니?

누가 좋으냐?


다들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을 그래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별로 합리적이지 않거든요.

별로 이성적으로 안 보이거든요.

천박스럽거든요. 고급스럽지 않다 말이죠.

 

그러나 목마른 놈이 우물판다고

얼마나 간담이 써늘하게 녹아버릴정도로 썩어 뭉드러진 마음으로 입맞추었겠냐 말이죠.

누가 이 화평과 입을 맞추겠습니까?

비싼 향유를 부어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긴 창녀 아닙니까?

 

놀랍게도 의인은 이 화평과 입을 맞추지 않아요!!!!!

오로지 죄인만이 이 화평과 입을 맞춘다 말이죠.

 

그것도 더럽기 짝이 없는 발에 입을 맞춘다 말이죠.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그 집단성에서

도저히 찾아 볼래야 찾을수 없었던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이다 말이죠.

분명 개인인데 이스라엘이라고

집단성 곧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저들은 이스라엘이라고 자꾸 집단성을 운운하지만

정작 예수님 앞에서는 개인의 구원 따위나 운운하고

개인의 부활 따위나 운운하는 자들임을 드러나더라 말이죠.

 

집단성이 아닌데 개개인의 성화론 따지는 놈들인데

그런 놈들이 교회를 형성하게 되니까

입맞추기는 입맞추는데 팔아넘길려고 입맞추더라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일방적인 편애와 편파미움이 각각 달리하는

차이나는 입맞춤으로 나타나야 인간들이 변명을 못하는 겁니다.

 

(22:48, 개역)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분명 그 개같은 이방여자

곧 귀신들린 딸의 어미가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운운했거든요.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 부스러기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습니다.

시편 찬양자도 주의 장막의 문지기가 더 좋다고 했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가 더 부럽다고 했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가 솔로몬이 입은 옷 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했습니다.

? 이것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이니까 말이죠.

바로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가 말입니다.

누가 봐도 죽은태인데 분명 죽은자인데 저주받은자인데 귀신들인 자의 어미인데

거기서 이스라엘이 태어난 겁니다.

 

분명 집단성은 99마리가 누가 봐도 집단입니다. 다수 아닙니까?

그리고 분명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개인적으로 보이는 딸랑 한 마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의 반복성은

오히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로부터 부여받고

 

집단적인 99마리에게는 없는 겁니다.

집단이라고 우기는 그 집단이 없는데도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집단인 개개인의 결합인 거죠.

개개의 한 마리들이 모인 것이 99마리이니까 말입니다.

 

철학책 화폐 라는 책을 보다가 생각난 것이

일만달란트 비유 속에서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반복하더라 말이죠.

나는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건진 여호와 이니라 라고

 

양의 목자로써

몸의 머리로써

 

집단 이스라엘의 자리를 운운하고 반복하는데

정작 일만달란트 용서 받은 자는

그 어마 어마한 집단적 화폐(잉여)인 일만달란트를 개인의 용도로 활용해 버리는 겁니다.

사적인 구원으로 말이죠.

 

25장의 종말 3종 세트 비유도 동일하지요.

다들 집단적인 의미를 개인 성화로 취급해 버리더라 말이죠.

종말의 단체인 이스라엘이 개인성화를 운운하니 말입니다.

 

아니 제가 남 돕기의 달인인데

언제 예수님이 목말랐고, 언제 예수님이 헐벗었으며, 언제 예수님이 배고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그런 봉사의 달인인 우리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당장 해결하는 해결사인데

 

소자 한테 안한 것이 나한테 안한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가난한자에게 전재산을 다 나누어 주어라

가난한자에게 못한다면 나 한테도 안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 지켰다는 소리 하덜덜 마시라 말이죠.

성화 지키자 그 따위 소리 하지 말라 말이죠.

막살지 않겠다 따위 소리를 하지 말라 니깐

 

화폐(잉여)란 관계성이거든요.

관계를 맺고자 다가오는 분이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편파해석입니다.

너무 너무 외설적인 불법의 해석이다는 거죠.

그래야 인간의 정의롭고 의롭고 공정한 해석들이 불법인 살인의지가 가득한 해석임이 들통나니까 말입니다.

일방적인 전체권력의 주체는 편파성을 부으시는 분의

자기 양과, 자기양이 아닌 양을 가르는 관계성을 말한다 말이죠.

 

그래서 시편 85편에서 정작 바벨론 포로 당해 70년 만에 돌아올 때

신났어 신났어 오로지 신난 분인 예수님 혼자 뿐이다 말이죠.

여호와 혼자 신났지

이스라엘은 하나도 안 신났어요.

 

말씀 대로 되어버린 것이 오히려 굴욕적으로 느껴지니 다시는 이런 일을 격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이 얼마나 완악합니까?)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9: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3:5, 개역)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11:25,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절대로 그들은 수건을 벗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손할례를 함으로써 더욱더 완고해졌지

마음판의 할례인 수건을 벗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런 다짐을 잇고 잇는 겁니다.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듯이 말입니다.

완고함을 잇고 잇는 역사를 반복하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정작 이스라엘 쫄딱 망했을때에

좀전까지만 해도 울었거든요

눈물의 선지자라고

그런데 막상 망하니까 아주 신났어요

막 춤 추고 술 먹고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서

 

돌아와 나에게 돌아와 빠른 댄스곡을 춤추면서 부르더라 말이죠.

아니 왜?

좀전까지만 해도 우시더니 이제는 왜 웃습니까?

 

너희들은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표시 해라 말이죠.

말씀대로 착착 진행이 되는 것 보니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하나도 안 기쁜 겁니다.

다시는 이런 일 격지 말자고 다짐을 하지만

그것이 완악함이 되어서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눈물 흘리기는커녕 아주 신바람 났어 춤까정 춰요

하도 하도 하는 짖이 밉지만

그렇다고 대들 수 없거든요

예레미야 선지자 말대로 망했으니까

 

그 말이 듣기 싫어서 거짓선지자 말 듣고

안망한다고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외치는 거짓선지자 말을 들었으니

할 말 없거든요. 핑계치 못한다 말이죠.

 

그런데 예레미야의 신나게 춤추는 것에는 함께 춤추느냐?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슬퍼하느냐?

과연 함께 할수 있느냐? 역시나 못하니까

 

그저 인간으로써 할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자

이것 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은 ~~~~

 

이런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 라는 다짐 뿐인데

아무리 다짐해 본들
의문의 죽이는 것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반복하심을 누가 막겠냐 말이죠.

오히려 그 처음자리를 반복하심에 더 기뻐 신나게 놀아야지요.

막살아야지요.

 

얼마나 이게 불가능한 말도 되도 않는 소리냐 말이죠.

누가 그런 상황에 춤추고 노래 부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선 검 위로 춤추고 노래하면서

우리는 죽음의 날 위로 걷고 있는 겁니다.

춤을 덩실 덩실 추어가면서 말이죠.
광야의 죽음 위를 걷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홍해라는 죽음 위로 걷는 자들 말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감격에 겨워서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아무리 막을려고 해도 주체를 할수 없어요.

감당이 불감당입니다.

 

주의 구원을 노래하지 않고 배길소냐

 

의문의 역사가 아닌, 또렷한 묵시 위를 막걸어요.

물 위를 걷는 것 보다, 죽음의 칼 날 위를 것는 것 보다, 더 낯설기 짝이 없죠.

말이 안되는데 걷고 있어요.

물론 예레미야 혼자 신나게 걷고 있듯이

돌아와서 기쁘게 춤추는 여호와 혼자 걷고 신났어요.

 

다윗 개인이 격었던 경험으로 끝난줄 알았죠.

다윗은 개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집단입니다.

미리 이스라엘의 운명을 미리 보여준 겁니다.

다윗은 샘플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 집단은 뿔뿔히 흩어진 마냥

개인의 다짐들로만 변해버리는 겁니다.

 

뒤바뀐 것 같지 않냐 말이죠.

개인은 집단을 누리고

집단은 정작 집단성을 누리는게 아니라

개인성만 추구하고

참 희한하죠 그러니까 85편을 보고 놀랬던 겁니다.

집단은 아무리 집단적인 표현을 해도 순 거짓말이고

개인은 집단도 아니면서 철저한 개인(다윗)의 경험만을 외치는데

오히려 이스라엘 집단의 운명이였던 겁니다.

삼손의 개인적 경험의 수수께끼가 생각나네요.
이스라엘의 운명을 말하는 수수께끼 아닙니까? 사랑이라는 처음자리

 

3일이 있다는 것(광야라는 죽음)

3가지 물증을 잡혔다는 것

3일만에 46년 동안 지은 성전이 허물어 졌다는 것은

 

슬픈일이 아니라

아주 신나고 신나는 춤추어야 할 일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집단성이 집단도 아니면서 집단인척 하는 것이

예수님 개인에 의해 허물어졌으니까 말입니다.

 

영이 집단이고 육은 개인이다 말이죠.

어딜 감히 책임질라꼬 하냐 말이죠.

집단도 아니면서

살리는 영도 아니면서

 

의문의 죽이는것만 반복하는 주제에 어딜 감히 책임질라꼬 ~~~~

 

의문의 죽이는 것이 허물어졌는데 안 기쁘고 배기냐 말이죠.

나 돌아갈래 라고 외치는 애굽성전이 무너졌는데

노래가 안 나오고 배기냐 말이죠.

 

아니 성전이 허물어졌는데?

교회가 무너졌는데?

춤추라니?

 

얼마나 엉터리로 지었으면 허물어졌겠습니까?

반석 위에 짖는 집은 무너지지 안잖아요.

46년 동안 지으면 뭐합니까? 강도 7.5도 아닌 강도 3 만에 무너지는 건물

쭉쭉 금이 가버리는 건물,
그 새건물 그게 무슨 건물입니까?

부산의 어떤 대학교 기숙사 신축 건물이 일본 지진 영향으로 금이 쭈우욱 가는 겁니다.
그게 과연 새건물 맞나요?
의문으로 지어진 것이 판명이 났으니 오히려 기뻐해야지요
.

그것도 모르고 그 안에 들어가 살다가 깔려죽었으면 어쩔뻔 했냐 말이죠.

 

그러기 전에 미리 무너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말이죠.
감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니 기뻐서 춤추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스스로 발로 차버린 그 처음자리를

예수님은 포기하시지 않고 계속 반복하시니까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사건)을 반복하신다는 것 보다

더 기쁜 소식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이 빈공백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70년 포로가 되는 그 빈공백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첫사랑의 자리이다는 겁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태어난 겁니다.

 

그러니 돌아오니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70년 포로 생활 다시는 격지 말자?

격지 말자 백날 해본들

소용이 없어요.

 

요한계시록은 그야말로 퐈~~~~리이 입니다. 파티입니다. 파티

아주 아주 신났어요. 복음의 축제입니다.

 

70년 포로 다시 격지말자 라는 의문의 반복 조차도 이제 마감이 될 정도로

살리는 또렷한 영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누가 이 살리는 영에게 입맞춤하겠습니까?

 

오늘 시편 86편의 물에 빠진 죽음에 놓여진자가 입맞춤하는 겁니다.

개같은 이방인 여자가 귀신 들린 딸 덕분에 주를 비로소 만난 겁니다.

그들만이 주님의 더러운 발에 입맞추는 겁니다.

?

너무 너무 아름다운 귀한 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분의 아름다운 발

 

(1:15, 개역)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6:15, 개역)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6:15, 새번역)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 52:7; 1:15

 

그런 자들에게만 십자가는 밝히 보이는 또렷한 살리는 영이요

아름다운 발입니다.

 

그러나 아쉬울게 없는 자들에게는 그저 싫어버린바 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역시나 강조 합니다.

다윗은 주의 병에 눈물을 담고자

주의 책에 기록것만 반복하고자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심지어 핍박도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말이 연기지 진짜로 얻어터지거든요,

그런데 기뻐요 얻어터져서 계수를 하면서 그 눈물을 주의 병에 담고서

기뻐 좋아라 합니다.

 

베드로도 물에 빠지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말이 연기지 물에 빠진 것은 실제로 죽는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연기를 하는 겁니다.
죽음을 진짜로 연기하는 연기자는 없습니다.
성령의 세계에서만 죽음 조차도 연기가 됩니다.
죽는 것도 불가능한 단절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더 엎친데 덮친격으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도 연기해야 합니다.
참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래서 일부러 예수님이 3일을 지체를 하면서 골프치고 당구쳐서 3일이 되니까
죽은 나사로에게 가는 겁니다.

 

이 연기가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반복하는 연기입니다.

 

그러나 이 연기를 할 줄 모르는 진짜로 말씀을 제대로 실천한 자는

완고한 수건을 벗지 못하는 완악함 때문에

이 집단성인 처음자리인 그들의 태를

십자가가 아닌

의문의 태로 고집피우는 겁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태 싸움

 

너 어디서 태어났어?

그들 입에서 누구태인지를 듣게 되는 셈입니다.

? 예수님 태이지? 겨우 역사가 30?

난 모세의 태에서 태어났어 역사가 무려 2천년이 넘어 이거 왜 이래

난 모세대 나온 여자야 ~~~~

 

그거 자랑하던 베드로 죽었습니다.

모세대 나온 것 자랑하다 역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되게 건짐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러러 봅니다.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라고

 

왜 저를 이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않고 건지시는지요?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당신 도대체 누구죠? 라고

 

(86:13, 개역)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인애와 자비 = 긍휼)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긍휼과 진리의 만남이요.

지옥에서, 죽음에서, 귀신 들린 딸 덕분에 입맞추게 된 그 십자가가 옳았다는 겁니다.

옳소이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관계성으로 살지 않습니까?

의와 화평의 입맞춤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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