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과 하루살이와 공중의 새가 더 좋사오니!! (시편 84)

 

솔로몬의 천년 영광 보다 공중의 새가 더 부럽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를 삼키는 악의 세계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을 오늘 귀히 입히시는 믿음의 세계

그리고 무화과 나무 저주

 


(
11: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11:12, 개역)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1:13, 개역)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1:14, 개역)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1:15,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1:16, 개역)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1:18,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1:19, 개역)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11:20, 개역)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11:21, 개역)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11: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11:2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11:2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1:25, 개역)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어제 말씀을 나눈 본문은 시편 84편과 마태복음 625절에서 34절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가복음 11장을 올린 이유는

조카가 방학이라서 형님네가 토요일에 할머니 집에 놀러온 겁니다.

그래서 나눈 말씀이 바로 무화과나무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영화 곡성을 봤다 길래

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뭐냐고

 

조카가 하는 말이

 

절대 현혹되지 마소잉

 

이게 결론이다는 겁니다.

많은 리뷰와 평론가들의 글들도 다 각기 다른 내용들이라서

감독은 오히려 자기가 의도한 대로 되었다는 거죠.

 

읽혀지는 디자인, 보여지는 디자인은 이미 실패한 거죠.

그러나 안보이는 디자인은 그 만큼 성공한 것이다 라고 디자이너 들이 하는말이 있던데.

 

그런데 저는 조카가 하는 말에

이런 의문을 달았습니다.

그럼 현혹되지 말아야 하는데 결국은 현혹되어버렸잖아

그럼 결론은 뭔데?

 

그러게? 현혹이 되어버린 인간이네! ㅋㅋㅋ

 

성질 급한 제가 그냥 느낀바를 이야기 해 버렸습니다.

 

어떤 누구는 무당과 일본인은 마귀고 미친 여인은 인간 곧 주인공을 돕고자 하는

그래서 성경의 내용처럼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절대 가면 안된다고

마치 22의 싸움처럼 보였지만


저는 그 미친여인 또한 마귀로 보고 있고

셋다 다 마귀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 결론이 뭔디?

 

저의 결론은 이유 없다입니다.

 

영화 처음에 나오는 성경구절 자체가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의 대조에서

자꾸 육은 이유를 묻지만

영의 세계는 이유가 없는,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우와 또 이단 하나 나왔죠.

예수 믿어서 천국가는게 아니라

 

이유 없이 천국 가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왜 지옥에 가느냐?

그 사람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이유 없이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럼 대상은 뒤로 빠지고 주체에게 물어보자 말이죠.

주체인 예수님에게 왜 저 사람은 천국에 가죠.

내가 용서했거든, 이유 없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랑이란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용서 입니다.

조건이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그럼 주체인 마귀에게 왜 저 사람은 지옥에 가는데 마귀야?

그런데 마귀가 놀라운 간증을 합니다. ㅋㅋㅋ

내 한테 묻지 말고 지옥 보내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저분이야 라고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놀랍죠!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삯꾼 목자들은 오직 예수만 외치고 있습니다.
교회 돈 문제는 후차적일 뿐이다 라고 거짓영들이 주장한다께용
.


그럼 예수님! 물어 봅시다. 왜 저 사람은 지옥에 갑니까
?

내가 미워했거든, 즉 이유 없는 미움이다는 겁니다.

미움이란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옥 가는 겁니다.

 

로마서 9장 토기장이 비유가 생각나시죠!!!!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으니 힐문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 말이죠.
따질 자격이 안된다는 겁니다.
단절이니, 이유가 없으니, 따지고 싶어도 따질 뭐가 있어야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반드시 이유를 따진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를 따지는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것이 영이다는 겁니다.

마귀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마귀 조차도 가지고 노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마귀를 유혹하는 예수님의 유혹이다 라고 했죠. 지난 시간에 언급했습니다.

 

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안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욥입니다.
즉 영화 곡성으로 치면 종구(경찰, 딸 아빠)가 이유 없다 라는 것을 아는 셈인데
정작 성경상에서 욥은 알지만 영화 주인공은 끝까지 모르다가 죽는 셈이지요.

 

[원인이 없다] 라는 것을 오히려 당사자 욥은 아는데

욥의 세친구들은 자꾸 이유가 있다는 둥

원인이 있다는 둥 자꾸 그것을 파고 드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으니
무조건 이유없이 회개 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치는 가운데
욥은 놀랍게도 [이유 없는 고난]이라고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 또한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꾸 원인을 따집니다.
마치 귀신들린 세 명의 영화 조연들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언급한 것이 무화과 나무 비유입니다.

물론 위에 언급한 무화과 나무 저주와

밑에 성경구절에 언급한 무화과 비유는 다릅니다.

 

그런데 둘의 공통점은 열매 싸움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삯꾼 목사들인 거짓영들이 현혹하고 있습니다.

열매로 알게 된다고 말이죠. 나무를 말입니다.
열매 없으면
절대 현혹되지 마소잉

라는 말 자체가 마귀가 하고, 그렇게 한다는 자체가 이미 현혹 속에 들어가 뿐졌다는 거죠.

총신의 누구처럼 책까정 나오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던데

[열매로 알리라]
그게 현혹 시키는 겁니다.

한국 교회 다 넘어갈 정도입니다.

사실은 넘어갈 정도가 아니라 그 책이 그런 주장이 나오기 이미 훨씬 전 부터이니

오히려 그 결과로 나온거께

 

오늘날 현혹하는 거짓영을 받은 삯꾼 목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목사 자신은 현혹하는 자가 아니다는 주장을 펼치는 기술을 잔뜩 모아서 현혹 합니다.
거짓선지자임을 감추고자 말이죠.

오히려 참선지자는 대놓고 현혹하듯이 자신이 거짓선지자이다고 대놓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또 따라하지 말라 말이죠.
상대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이니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요 입니다.

제 말은 이것이 상징계라는 세계의 명령어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현혹되지 말라는 말이, 명령어가, 이미 현혹 된 채로 작동한다는 겁니다.

 

금지 라는 명령어는 오히려 전혀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는 것을

더더욱 자극해서 금지를 어기고픈 마음을 새롭게 가진다는 점에서
그 금지의 선을 반드시 넘도록 만드는데 더더욱 부추기는 명령어 금지어가 된다는 겁니다
.

명령어 자체가 그렇게 맹글어 버린다는 거죠.
명령어가 없으면 안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것에 더더욱 부정적인 것은 바로 실재계의 명령어 이다는 겁니다.
상징계의 명령어는 다들 죽기 살기로 지킬려고 목숨을 걸어 지킬려고 하지만 (참람죄 다 무조건 이유 없다 예수를 죽여라),
실재계의 명령어는 지나 개나 다 무시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는 겁니다.(너희는 신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

부정의 부정이지요.

마귀의 유혹에 더 더더 유혹적인 예수님의 유혹이다는 겁니다.

 

(24:32, 개역)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24:34,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24:35, 개역)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4:36, 개역)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24:37, 개역)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13:28, 개역)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13:29, 개역)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13:30,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13:31, 개역)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13:32, 개역)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13:33, 개역)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13:34, 개역)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13:35, 개역)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13:36, 개역)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13:37, 개역)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13:3,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4, 개역)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5,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6, 개역)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13:7, 개역)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13:8,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13:9, 개역)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21:29, 개역)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21:30, 개역)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21:31, 개역)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21:32,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21:33, 개역)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1:34, 개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21:35, 개역)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21:36, 개역)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얼마나 삯꾼 목자들이 사기를 칩니까?
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 맞잖아 라고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왜 나무로 열매를 안다고 해야 되지 않나요?

왜 반대로 [결과로 안다] 라고 하시죠?

왜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하시는 거죠?


왜 원인으로 출발하지 않고

결과로 출발하시냐 말이죠.

그래야 자칭 열매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배경을 깔고서 나무가 등장하는 겁니다.

열매가 결과가 아니라 나무 자체가 이미 결과였던 겁니다.

 

제가 시편 84편을 하면서

본문을 마태복음 6장으로 하니까

어머니께서 며칠전에

푸하하하 나는 맨날 이방인이 구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만 구하는데

여기 본문에 나오네 라고

며칠전에 어머니 자신이 그 말씀을 보시고 웃껴서 저랑 나누었던 그 말을 생각하시더라 말이죠.

 

그런데 제가 언급하고자 했던 바는

그게 아니라

공중의 나는 새를 말하기 위함이였다는 겁니다.

악인의 장막 천년 만년 보다

솔로몬이 입은 옷과 같은 그런 영광 됨 보다

주의 아름다운 장막의 단 하루의 문지기가 더 좋다는 겁니다.

공중의 나는 새가 더 좋고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에 핀 백합화가 더 좋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였다 말이죠.

 

즉 누가 공중의 나는 새를 부러워 합니까?


성경은 말 되는 소리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소리만 하는 것이 복음이요 기쁜소식이요 성경말씀이다는 겁니다.


공중의 참새가 농사 지은 곡식을 먹을려고 오면

쫏아내기 바쁘지

아니 누가 그 참새를 부러워 하느냐 말이죠.

도둑처럼 익은 곡식을 훔쳐가는데?
그래서 허수아비를 만들지 않나

요즘은 사냥총 소리를 흉내내는 장치로 참새를 쫏아내기 바쁘지

그 쫏겨나는 참새를 부러워 하는 자가 세상에 어디있단 말입니까?

 

결국 상대적인 솔로몬의 영광을 다들 부러워 해야 그게 정상이다는 겁니다.

 

하루살이(무가치)는 걸러내는 것이 정상 맞습니다 맞고요

약대(낙타- 고급 승용차)는 삼켜야 그게 정상입니다.

 

교회에서도 돈 되는 놈은 어서옵쇼 라고 대우가 다르지만

교회에서 돈 안내고 밥을 축내는 놈은 쫏아내야 그게 정상이다 말이죠.

 

즉 하루살이는 가치성이 없는 무가치이다는 겁니다.

그런 무가치를 추구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 교회든 사회든 국가든 그 어떤 단체든 조직이든

그 사람 쫏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약대와 같은 자는 이용해 먹을수 있을때까지 쪽쪽 빨아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교회 라고 해서 안그런줄 아십니까? 더 했으면 더했지 절대 그 강도가 덜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성화를 주장하는 교회일수록 개혁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더 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본 바 입니다.


얼마전에 스포트 라이트 라는 실화를 다룬 영화를 봤는데 더했으면 더했다 말이죠. 종교는 더 합니다.

또 어제 갑자기 채널 잠깐 돌리다가 봤는데

네팔의 그 지진에 무너진 그 처참함 속에서도 사람들의 희망은 불교사원의 황금빛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아시아의 불교의 사원은 항상 금으로 도배 되어 있다 말이죠.


솔로몬 황금 성전을 성경은 왜 깨뜨리고 오히려 저 참새가 더 부럽다고 하시는 줄 아십니까?

 

문제는 그런 세상이 천년 만년 이어져 본들

사실상 황금의 의미는 영원성으로 어떤 종교에서든 신격화 되어 있습니다. 황금 자체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는 겁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될 뿐인 챗바퀴일 뿐이다는 겁니다.

 

바로 우리가 억수로 부러워 하는 그 솔로몬의 황금옷 영광이 바로 의문의 반복이다는 겁니다.

 

차라리 그럴빠에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말이죠.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말이죠.

 

의문이 없어요 없어

또렷하고 명료합니다.

도대체 쟈들은 누가 기르고 먹이시지?

아무리 봐도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데 말야!!!

 

원인이 없는데 말야

어떻게 살아있지?

벌써 죽었어야 하지 않나 라는 겁니다.

 

자 이런 입장에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사건을 보자 말이죠.

 

다들 놀랍니다.

성경 말씀 자체가 알려줘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미리 자수를 하듯이 알려줘요

아니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왜 열매를 내라고 강요하냐 말이죠.

당연히 열매를 낼수 없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다 말이죠.
불가능이요 단절이다 말이죠. 그런데 열매를 내라? 

말이 안된다고 스스로 성경말씀이 인정하는 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대로 이 말도 안되는 것을 밀어붙여서 저주를 해 버리니까

또 더 웃끼는 것은 저주 했다고 진짜로 말라 죽어버리는 겁니다.  진짜 나무가 죽네요.

 

우리가 때가 되지도 않는 시간에 어떤 나무를 붙잡든지 상관없이 나무를 붙잡고 저주를 해 보세요.

과연 말라 죽느냐 말이죠.

분명 배고픈 상태에서 그대로 따라 했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 없는 꼴이 되잖아요.

제발 한번 해 보시라니깐요.

그럼 이것을 확대해서 교회 전교인들 다 해보라고

그럼 목사 지부터 안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우리가 믿음 없는 것이 다 들통이 난다 말이죠.

 

제자들이 깜짝 놀랄정도로 충격적이여서

예수님이 그 중간 사이에 강도의 소굴에서 상을 뒤엎어버리는 사건을 펼치시고

그 다음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강도의 소굴의 상을 엎어버린 것 보다 더 충격적이었다는 증거죠.

 

도통 그 이유를 알수가 알수가 없어 차라리 묻고 말았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그 이유를 너무나 알고 싶어서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패러디 해서 난 몰라요로 개사 했습니다 ㅋㅋㅋ

 

난 몰라요 제발 알려주세요 라고 제자들이 요구하니까

이건 뭐 아예 안 들었던 것이 더 나을 정도로

동문서답입니다.

 

(11:21, 개역)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11: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11:2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11:2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1:25, 개역)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왜 무화과나무가 저주한 대로 말랐지요?

왜요

그 이유가 뭔데요

무슨 잘못이라고 했던 가요?

 

우리도 제발 예수님에게 베드로처럼 이유를 물어서 따져 봅시다.

 

왜 저주 받았냐 라고 말이죠.

 

예수님의 대답은 이겁니다.

믿음의 세계는

이유 없는 용서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반대로 행함의 의지하는 세계인 육의 세계는 이유 없는 미움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내가 그 동안 예수 잘 믿어서 저주 안 받고

예수 제대로 못 믿어서 축복 못 받는

그런 원인에 따른 결과의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이유 없이

원인 없이

주어지는 끝을 결과를 미리 앞당겨 누리는 세계이다는 겁니다.

그런 믿음의 세계는 행함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이 산을 들어서 저 바다에 던지면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의심치 말라는 겁니다.

 

곡성 처음 부분 성경 구절 의심치 말라는 겁니다.

그것을 다시 마귀인 무당이 따라서 흉내내는 겁니다. 절대 현혹되지 마소잉 라고

 

(24:37, 새번역)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24:38, 새번역)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24:39, 새번역)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영의 세계를 흉내내는 마귀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흉내내는 행함을 의지하는 육의 세계이다는 거죠.

마귀는 육이면서 끝까지 영이라고 우긴다 말이죠.

살리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그 정도로 이미 예수님의 유혹에 넘어가버린 겁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육은 죽이는 겁니다.

우상의 특징은 약속을 못 지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영이신 예수님은 약속을 지키는게 아니라

그냥 약속 그 자체이시다는 겁니다. 약속 지킬 필요가 없이

원인 없이 그냥 결과로

약속이 되었뿐다니께요

약속 그 자체로 이미 완료로써 와버렸다는 겁니다.
이유 보다, 원인 보다, 먼저 앞서서 성취 되어버린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허물 땜시

우리의 어두운 눈 땜시

모릉께 아무리 알려줘서, 의심 뿐잉께

그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는, 약속 그 자체이신 그 양반이

그 약속을 이미 성취해 버리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누리시러 십자가 지시는 겁니다. 이미 벌써 성취 됐응께

이것은 믿으라 라는 소리가 아니라, 더더욱 못 믿도록 걸림돌로 걸려 넘어지는 식이 되어버린 거당께요.

 

인간들은 신이 될려고 성화될려고 성령받은자 될려고 얼매나 노력의 노력을 헌다말이지

그런데 내가 신이다 너희는 신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 당께 라고 나오면

딴놈들은 몰라도 신이 될려고 무단히도 애를 쓰는 놈에게는 그 말이 참람죄가 아니고 뭐다냐요잉.

 

똑같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언어로 쏙맴(속마음)을 빡빡 끍어대는 말이

안식일 지킬려고 무지 무지 애쓰는 자들 코 앞에서

일부러 안식을 어기는 짓을 했뿌제

더더욱 안식의 주인이 나여 나당께 나랑께롱

이 말 땜시 안식일 지킬려는 자들은 안식의 주인을 죽이게 되는 마음을

새삼스럽게 품을 수 밖에 없다 말이지잉

 

그러니 그들 또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죽일려고 하지

평상시에 예수 미워 죽겠다고 죽일려고 늘 음모를 펼친 것이 아니여

절대 아니당께

그러니 갑자기 이유 없이 죽이고픈 것이지

이유 있어서 죽이는게 아니다는 거여

묻지마 살인 이지, 아무리 조사해도 원인 없어요. 

증거도 없어. 원한 관계도 아녀. 그냥 묻지마 살인인 아무 이유 없는 거당께

즉 그러하듯이 이유 없이 지옥에 간다는 말이여

상대적으로 이유 없이 천국 가듯이 말이여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로 말랐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기뻐하고 기뻐하세 주의 날일세

주의 날이 왔다는 겁니다.

종말이라는 끝이

드디어 침범했다는 것이다 말이죠

천국의 침노가 이 의문의 세계를 끝낼려고 왔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마침 에스더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만은 의문의 행함을 의지하기에 이유없이 죽일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에스더는 또렷한 왕비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로 더더욱 하만을 유혹하듯이

아무 힘도 없는 무능한 그 무가치를 덮썩 물어부렀더라 말이죠.

제대로 낚이더라 말이죠.

마귀 지도 몰랐겄지잉

하만 지도 몰랐겄지잉

죽으면 죽으리라 가 걸려들줄 말이지잉

이게 바로 부림절이라는 또렷한 구원의 날이다는 겁니다.
 

되도 않는 의문의 것이 밑도 끝도 없이 반복하는 그것을 끝내는 마침이 되니까 말이죠.

악의 장막 천년 만년을 살아도

주의 장막의 하루가 더 좋은 이유는

의문의 것이 이제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의문의 죽이는 것인 이 지옥의 삶이 드디어 끝났으니 말입니다.

 

3개월 전에 올린 시편 84편은 바로 이런 의문의 강도의 소굴과 대조해서 올렸지만

오늘은 무화과 나무 저주를 통해서 그 대조로 올리는 겁니다.

 

베드로는 결국 무화과 나무를 걱정해서가 아닌

자기가 이 꼴이 날까봐 계속 다시 물었던 겁니다.

 

맞습니다. 무화과 나무처럼 처음부터 우리는 저주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것이 기뻐야 합니다.

드디어 이 의문의 세계를 끝장내는 심판의 주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의 주가 바로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자꾸 심판의 주를 빼고서

구원의 주 로만 보기를 원한다 말이죠.

 

버린돌을 빼고서 머릿돌로만 보기를 원한다 말이죠.

그런 예수님은 없습니다.

 

반드시 버린돌과 머릿돌이 한 분이셨듯이

우리는 심판의 주로 보여야만 그런 사람한테만 구원의 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통해서 바로 자신이 심판의 주로써

이 산을 저 바다에 던지는 분으로써

드디어 의문의 죽이는 것인 행함을 의지하는 세상과 그 속에 갇혀 사는 자를

심판하러 오신 믿음의 세계를 몰고오신 분이다는 겁니다.

 

물론 베드로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동문서답과 같은 대답을 통해서

이것은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신거나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말귀를 알아 먹는 자가 없을 뿐더라

오히려 듣게 되니

바리새인들이 다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다 자기들 들으랍시고 했다는 것을

눈치 백단으로써 잘 알아챘지만

역시나 제자들에게도 자기들이 그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로 여겨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알면서 모르는 척 하면서 듣고 있으니

말씀하시는 주님 입만 아프겠죠.

그러나 그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셔야

심판의 주이시다는

종말을 몰고오신 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몰고오신 분

즉 이 말은 율법의 마침이 되고

의문의 증서를 찢고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는 악인의 장막 천년 만년의 그 의미 없음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드디어 의문을 끝내는 종지부를 찍는 분으로써 말이죠.

 

이것이 기뻐서 기쁜게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드디어 기쁘지 않고 못배기는 이유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이 곤고한 의문의 사망의 몸

의문의 반복인 세계에

 

드디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새 것이 되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또렷하면 의문의 반복으로써의 몸이 아닌

새 몸, 새 것 이라고 할까요

더 이상 옛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롬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래서 내가 그 무화과 나무처럼 저주 받아 마땅한 자이군요 라고

주님이 심판 주이시군요 라고

심판 주를 만났다고 드디어 기뻐 기뻐 해야 한다 말이죠.

그것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유 아니 원인 없는 결과고 즉 이유 없음이고

말라 죽인 무화과 나무를 보여주시는 이유 아니 원인 없는 결과 로써 이유 없음 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이 의문의 세계를 마쳐 주시니까, 끝마침 해 주시니 말이죠.

천년 만년 계속해서 뭐하게요?

 

그래서 향유를 깨뜨린 여인은

예수님을 미리 장사를 치르는 겁니다.

의문의 세계를 드디어 끝내시는 군요. 고맙습니다 라고 말이죠.

 

여러분은 평생 천년 만년 안식일을 지키면서 살껍니까? 즉 이 지옥인 의문에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안식의 주인과 함께 살 겁니까? 즉 주님의 아름다운 장막의 단 하루만이라도 문지기가 더 좋습니까?

 

가정부로 천년만년 살고 싶나요 아니면 단 하루만이라도 사랑하는 아내로 살고 싶나요

 

가정부로 살다가 천년 만년 월급 받는게 낫습니까?

아니면 일한적도 없고 돈도 번적도 없이

그저 남편의 사랑만 받아 먹는 자로 살고 싶나요!

 

마르다가 나을까요? 싸가지 없이 예수님 무릎팍에 앉아서 말씀만 듣는

언니 마르다처럼 예수님 대접할 생각도 없이 바빠 죽겠는데

일손 돕지 않는 그런 마리아로

싸가지 없이 살고 싶나요!!

 

요즘 제가 동생 마리아처럼 싸가지 없이 살게 되니까

전에 마르다처럼 예수님 대접하다가 정신없이 살던 그 때를 포기하니까

시샘을 내서 욕하는 놈들이 한 둘이가 아니다 말이죠.
목사님 덕분에 겨우 빠져나오게 되었는데,

배 아파 죽을려고 해요 ㅋㅋㅋ

 

어차피 다들 무화과 나무처럼 저주 받아 말라 죽어야 마땅한 자들인줄 모르니까

자꾸 비교와 대조를 한다 말이죠.

 

그래서 아예 모조리 다 가짜로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우리는 뭘 해도 다 무화과 나무처럼 저주받아 말라 죽어 마땅한 자들이다는 겁니다.

뭘해도 저주요 뭘해도 죄요 뭘해도 의문의 죽이는 것의 반복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만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통해

심판의 주로써의 예수님이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 보통 기쁨입니까? 의문을 드디어 끝장내버리시는데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지 않냐 말이죠.

 

그래서 오늘 귀히 귀히 입히시는 그 긍휼을 통해서

내일 아궁이에 던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심판의 주 되심을 나타내심 앞에서

증인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그래서 세 번 부인 했뿟쬬 뭐

우짭니까 심판의 주이시니까

너는 나를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 했뿌니까 말이죠.

이유 없어요

이유 따져도 소용 없어요.

그런데 바로 그런 심판의 주가 나를 구원하는 구원의 주 이다는 겁니다.

 

왜 이 하나 마나 한 일을 하시느냐 말이죠.

 

왜 이런 이유 없는

원인 없는 결과를 보여주시느냐 말이죠.

 

그것은 이유를 따지고

원인을 따지는 저 마귀과의 대조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사랑을

그것도 이유 없는 사랑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아무도 오늘 귀히 입혀도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그 들풀을 부러워 하는 자 없습니다.

다들 솔로몬의 입은 옷을 부러워 하는 세대 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고집은 완고합니다.

절대 주님의 아름다운 장막의 문지기 하루가 더 좋다고 시편이 아무리 우겨도

그 시편을 아무리 내가 베드로가 제자들이 백날 외웠다고 우겨도

외운 것은 외운 것이지

현실이 되면 안된다고 우기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 절대로 꿈쩍하지 않는 산처럼 고집불통인 우리를 바다로 옮겨 빠뜨리시는 주님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안 되는데 주님은 된다 말이죠.
이것이 믿음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마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유없이 시편의 그 내용이 우리에게 쳐들어와서

나를 무화과 나무처럼 말라 죽이시면서 까지

시편의 주의 장막의 하루 문지기가 더 좋게 만들어 버린 이상

 

우리는 할말 못하는

이유를 감히 따지지 못하는

힐문 할 자 없게 만드시는

놀랍고도 놀라운 진짜 현실 그 자체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말씀은 장난이 아니야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십자가는 장난이 아니야 임을

 

말이 아닌

 

이유 없이 무조건 쳐들어오는 그의 나라에 압도 당하면서 외치도록 하시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내가 무화과나무처럼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고 심판하시는

의문의 세계의 마침이 되시는 분을 제가 만났어요 여러분 그 심판의 주가 나타나셨어요

 

내 죄를 드디어 용서 하실 분이 나타나셨어요 라고

 

물동이 던지면서 우물가의 여인처럼 동네방네 외치게 하신다 말입니다.

 

악인의 장막의 천년 만년 보다

밑도 끝도 없이 물을 길어서

밑도 끝도 없는 목마름을 채우고자 하는 그 의문의 반복 보다

주의 아름다운 장막의 단 하루의 문지기가 더 좋다 라는 말씀이

 

말만

믿는척만

입으로만 해서

 

인간들끼리 속이고 속이는 종교 속에서

 

진짜로 나타나서 현실이 되겠끔 하시는

 

이유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공중의 새가 더 부럽게 하심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너무 너무 귀해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디서 그런 의문의 것들을 들고와서 꾀더냐 라고

십자가의 용서를 자랑하게 만드시는 또렷함이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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