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사랑하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원수 속에서의 찬양 (시편 97)

 

예수님의 기쁨을 욕망하라 (마귀 보란 듯이)

 


(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97: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97:2, 개역)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97:3, 개역)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97:4, 개역)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97:5, 개역)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 같이 녹았도다

(97:6, 개역)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97:7, 개역)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97:8, 개역) 여호와여 주의 판단을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하였나이다

(97:9, 개역)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 위에 초월하시니이다

(97:10, 개역)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97:11, 개역)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

(97:12, 개역)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

 

 

오늘도 불가능한 찬양인 시편 97편을 보게 됩니다.

즉 인간에 의해 불리워 지는, 불림을 당하는 찬양, 또는 시편 곧 말씀은 없습니다.

시편이 우리를 데리고 찬양하는 겁니다.

이 불가능성이 바로

 

바벨론 포로 속에 들어가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신앙대상물이 아니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인간은 신앙의 주체가 될 수 없는 도리어 대상물이다는 겁니다.
신앙의 대상물이 인간입니다. 신앙의 주체는 믿음되신 예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는 겁니다.
.

인간이 믿고자 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는 겁니다.

도리어 인간이 말씀의 대상물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대상물이 인간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말로 예수님의 욕망의 대상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입니다.

자기가 뭘 원하는 것 조차도 모르는게 인간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이 하는 욕망이 정답인줄 알고

남이 추구하는 신앙과 믿음을 그냥 무조건 따라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모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저들은 알지 못하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쁨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원수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타인의 욕망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마귀의 욕망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시편이 우리를 원수 속으로 데리고 가서 찬양토록 하는 겁니다.

이 불가능성이 바로

 

바벨론 포로 속에 들어가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시편 97편의 내용이 정말 정말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는 상태인데

바벨론 포로 되어 있지 않는

바깥의 자유의 몸인 것 같은 내용으로써 기쁨이 가득차 있습니다.

아무리 눈 씻고 봐도 거꾸로 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오히려 바벨론 바깥의 자유때 보다

더 나은 찬양인 새노래로써 바벨론 포로 속에서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불 바깥 보다 불 속에서 더 나은 찬양으로 신나게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 바깥에서가 아닌 여호와의 심판 속에서 진노 속에서의 찬양이 더 신나더라 말이죠.

 

과연 그렇게 신나게 부를 수 있는 그런 환경이냐 말이죠.

환경은 정반대입니다.

한 마디로 지옥과 같은 곳에 놓여졌는데 왜 저렇게도 기쁨이 넘칠까요?

마치 요한계시록이 온통 기쁨의 승리로 가득차 있듯이 말입니다.

 

또 마치 요나선지자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큰 물고기 바깥에서 헛발질을 하며 하나님께 시위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불가능이다는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마찬가지죠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 죽어도

포도 나무에 열매 없이 죽어도

감람나무 잎이 말라 죽어도

논 밭에 식물이 전혀 없어 다 죽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어도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그 반대가 되어야 인간은 찬양하겠다고 나설것 아니겠습니까? 열매가 풍성해야 말이죠.


(합 3:13, 개역)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합 3:14, 개역) 『그들이 회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합 3:15, 개역)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합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9, 개역)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오히려 있었을 때 보다 감사가 더더욱 더 넘치게 나온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덮쳐진 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 중에

 

(살전 5:16, 개역)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개역)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개역)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라 라는 기쁨은 기쁨을 내가 판단하는 그 기준에서의 기쁨이 아니라(주객이 뒤바뀜)

뭐든지 이미 완료가 되었기에

원인 없는 결과로써

조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전혀 기쁠수가 없는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불가능의 기쁨이 덮쳐져서 항상 기뻐하라 이다는 겁니다.

즉 기뻐하라를 행함이나 지켜서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큰 물고기 뱃속에 큰파도 큰물결에게 삼킨바 되어서

지옥 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안 기쁜데

기뻐할수 조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쁨이 나를 가지고 놀 듯이 나를 기쁘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만들어서

기쁨이 넘쳐나서 찬양을 노래를 기쁨의 찬미로 이 시편 97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옥 속에 집어넣어보니 그 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것이 얼마나 호사스러울 정도로 화려했던 감사였는데

아무리 해도 감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을 원수 속에 집어넣어보면 그것이 감사였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지옥간 부자가 물 한 방울이 없어서 제발 제발 제발요 ~~~~~ 간청하고 간청하고 간청해도 갭이 넓어서 건널수가 없는 겁니다.

 

그 물 한방울 그 상쾌한 공기 지금 우리는 공짜로 마시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너무 흔해서 감사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결핍한 곳에 데리고 가면 감사 안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기쁨이 저절로 넘쳐요

 

구원이 뭔지 아십니까?

천국 가는게 구원이 아닙니다.

지옥에 분명히 갔음에도 불구하고

확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옥에 간 그 속에 뛰어들어서

빼내었다는 자체가 이미 천국이다는 겁니다.

그 분의 뛰어드신 그 사랑이 천국이지

우리가 나 라는 주체를 천국이라는 공간에 집어넣어서 그 공간에 안착하는게 천국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천국은 없어요. 주님 쪽에서 넘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심인데

누구를 뛰어넘어 왔느냐로 천국이 명료하다는 겁니다. 믿음이 바로 그게 믿음이다는 겁니다.

 

분명 원수에게 잡혀왔는데

도리어 원수는 이스라엘 너희는 이미 졌다 라고

원수가 이겼기에 그 패배로 인해서 잡혀왔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겼다고 승리했다고 도리어 거꾸로 노래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원수여 너희는 이미 졌다 라고 노래하더라 말이죠.

이 무슨 역설도 이런 역설이 어디있겠습니까?

말도 안되잖아요.

 

원수가 기가막혀서 이래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너를 수갑채웠고 너는 잡혀왔단다

정신 좀 차려라 라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너가 수갑 채워졌고 너가 잡혀왔는줄 모르느냐 라고 오히려 우기고 있다 말이죠.

 

그럼 누가 의아해 하는고 하니 저들 원수가 의아해 하는 겁니다.

마치 이것은 무엇을 재현하는고 하니

 

(삼상 5:1, 개역)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삼상 5:2, 개역)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삼상 5:3, 개역)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삼상 5:4, 개역)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삼상 5:5, 개역)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삼상 5:6, 개역)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삼상 5:7, 개역)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삼상 5:8, 개역) 이에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삼상 5:9, 개역)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삼상 5:10, 개역)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삼상 5:11, 개역)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삼상 5:12, 개역)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법궤 곧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는데

발도 손도 없는 이 언약궤가 블레셋의 신들을 모아둔 산당 또는 그들의 제단에 있는 우상들을

모조리 모가지 손목 발모가지를 다 짤라서 발통도 달리지 않은 언약궤가 블레셋 우상들을 다 짤라버리고서 돌아오는 겁니다.

너무 기뻐서 노래 불렀지요

바지가 내려갔어요

그것을 보고 왕 꼬라지가 뭐냐고

다윗 왕이여 체통을 지키세요 라고 하다가 불임이 되더라 말이죠.

 

즉 진짜 기쁨이 될려면

진짜 사랑이 될려면

상대적인 원수에게는 슬픔이 되어야 하고

상대적인 원수에게는 미움받은 저주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기쁨이요 사랑이 되는 법은 없다 말이죠.

상대적인 다른 한쪽이 슬픔과 미움이 구체화 되어야

 

이쪽이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는 겁니다.

 

또 유명한 사례가 바로

 

이스라엘을 저주할려는 거짓선지자 발람입니다.

분명 자기 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했습니다.

자기가 한 말인 저주가 자기 귀에도 축복으로 들리는 겁니다.

이상하다 다시 합니다.

또 다시 합니다.

아무리 저주를 해도 막상 언어로 선포되는 것은 축복이다 말이죠.

 

또 있지요

사실상 성경 전체가 다 이런식입니다.

분명 뱀이 오소리 였던가? 하여튼 삼켜서 죽였어요.

그런데 새끼들이 뱀 몸 속에서 자라서 뱀을 삼키더라 말이죠.

도대체 누가 누구를 먹은 겁니까?

 

이처럼 이스라엘의 가치를 이스라엘 본인들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이스라엘 본인들도 몰랐던 의미를

어디서 그 가치를 아는고 하니

원수 속에서 그 가치가 드러나더라 말입니다.

본인들도 몰랐던 원치 않았던 기능이요 가치였다 말이죠.

 

자 그럴려면

이스라엘이 아주 아주 상태가 좋은 상태 좋은 환경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원수가 이스라엘을 삼킨바 되어서 아주 아주 안좋은 상태이고

원수는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좋아라 하는 판국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역으로

이스라엘이 이긴 모습으로써 나타나는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괜히 건드린 거죠.

물론 안 건드릴수가 없습니다.

 

왜 원수들은 이스라엘은 안건드릴수가 없는고 하니

이것을 어머니와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들어간다 라고 되어있네

네 그럼요 그럼요.

 

우리는 마귀를 이길수 없습니다.

마귀에게 다 패배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보다 나을려고 바리새인을 뛰어넘을 것으로 볼게 아니라

반대로 바리새인을 바리케이트로 이 선을 넘지 마세요 라고 보라는 취지입니다.

 

천국이 도리어 바리새인을 뛰어넘어서 우리 쪽으로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을 의도적으로 천국 못가도록 천국이가 직접 뛰어온다는 겁니다.

언약궤가 직접 우상의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짤라서

발통도 없고 다리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다 일처리 해서 우리 쪽으로 넘어오니

바지가 내려 갈 정도로 그 정도로 기쁘지 않고서는 못배길정도로 노래 안하고는 못배길정도로 기쁨이 막 흘러 흘러 쓰나미처럼 밀려온다는 겁니다.

 

천국이 그렇게 오시니 바로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뛰어넘어서 온다는 거죠.

 

결국 바리새인들 듣는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한다는 자체가

사랑은 악을 구체화 하면서 악을 미워하면서 증거하시는 곧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악을 미워하는 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사랑은 아니면서 악을 미워하는 흉내를 내는데 그 흉내가

바로 더러운 이방인과 죄인 세리 문둥병자 창녀 강도 등등이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미워해요 ㅋㅋㅋㅋ

 

마침 또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을 구하지 마라

이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나는 맨날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 구하는데 푸하하하하하하

 

제가 아니요 어머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입을 것 제발 구하세요

먹을 것 제발 구하세요

마실 것도 제발 구하세요.

 

이것 또한 상대적인 바리새인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귀 보란 듯이 말입니다.

마귀는 그거 안 구한다고 자기자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런 바리새인 듣는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저들은 우리같은 개같은 이방인과 같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모든 기도 내용이 바로 입을 것 먹을 것 마실것이다는 거죠.

자 이렇게 되면 바리새인이 그렇게 자랑하고 과시했던 그 구별

그 거룩성이 사실상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분명 모든 그들의 행동 자체가 저들과의 차이성으로써 했다 말이죠.

오늘날 성화론자나 개혁주의자가 다 이런식이다는 겁니다.

분명 차이성 나게 구별된 삶을 살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방인이 구하는 기도하는 하지 말라가 아니라

바리새인이 구하는 기도가 바로 이방인의 기도이다는 겁니다.

 

구별이 없다는 거죠.

저들은 그것이 구별성이요 차이성이요 거룩성이다 라고

구별되게 했다고 우기는데

그들 또한 이방인이 하는 기도와 다를바 없는 기도이다는 겁니다.

 

그럼 제대로 된 기도는 뭔데?

제대로 된 구별은 뭔데!

너는 바리새인을 넘을 생각하지 말고

너는 백날 해도 구별된 삶 안되니까

내 쪽 곧 예수님 쪽에서 왜 너에게로 넘어오시는가

영화 제목이 가물 가물 아 맞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자기 자신이 천국으로써

기도로써

구별로써

거룩으로써 나에게 보내시는 겁니다.

거룩하지도 않았는데 거룩해 졌뿟네

 

그것을 바리새인 코 앞에서 하니까

바리새인이 드디어 안색이 변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 자신이 기도로써 우리에게 덮쳐지는 방식입니다.

반드시 한 쪽이 악하다 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말이죠.

누가 봐도 제대로 된 기도를 바리새인이 달성했고

이방인과 우리는 백날 해도 먹을 것 입을 것 마실것에 못 벗어나는 기도 밖에

분명히 그 기도 밖에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그의 나라 그의 의가 그냥 덮쳐져서

이미 다 완료해 버린 기도가 나타나더라 말입니다.

 

기도는 인간 쪽에서 하는게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리에게 덮쳐져서 구하는 것이다 말이죠.

그 그의 나라와 그 그의 의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기도는 우리가 언어로하는

모든 종교에서 하는 그런 바램을 구하는게 아닙니다.

기도는 인물이다 말이죠.

이 기도라는 인물이 아닌 이상은

의문의 죽이는 것의 반복이다 말입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의문입니다.

그런 의문을 엉터리다 라고 지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 그들 또한 의문의 기도이기는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래는 식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우리는 마귀를 구체화 하는 기도를 못해요

인물이 아니니까

기도를 인물로 못 보니까

그런데 기도가 인물로써 나타나서

기도가 나를 감싸 안으면서 그냥 안아버리니까

 

악이 구체화 되더라 말이죠.

 

참 제가 언어로 표현할려고 하니 참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짭니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소리 밖에 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예수님에 의해서 구별 차이 거룩성으로 분리 된다 말이죠.

다른 인물로써는 구별 거룩 차이성 분리가 안된다는 겁니다.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개 맞습니다.

그러니 이방인이 구하는 그런 기도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 바리새인들이 저 이방인과 같은 기도 하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바리새인들이 자기자신들을 더러운 이방인과 구별화 차별화 시킬때에

그래서 십의 이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바른 기도를 하게 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했을때에

바로 그것이 이방인의 기도와 같다 말이죠.

구별 차별 분별은커녕 그들도 도찐개찐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지적해 주시고

구별 차별 분리화 시키시는 그 당사자 그 인물이

바로 그의 나라요 그의 의 이다는 겁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닌 이상

인간 쪽에서의 구별 차별화 분별화는 없는 도찐개찐이다는 겁니다.

 

이것 역시 주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와서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천국 자체가 아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개맞습니다. 그 개에게 몰래 바리새인 보는 앞에서

뒤로 성령을 주셔서 이런 놀라운 말을 본인도 깜짝 놀랠말을 하게 됩니다.

개 맞습니다. 그러나 주여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찌끄래기를 먹지 않습니까?

 

그렇게 냉소적으로 차갑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분명히 이야기 하셨습니다.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런데 왜 반칙하냐 말이죠.

왜 이랬다 저랬다 하냐 말이죠.

 

그런데 그래야 바로 마귀가 돌출되는 겁니다. 반박하고파서 말이죠.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 중에서는 아무도 주님을 주로 보는 자가 없다 말이죠.

정작 유대인이 욕하는 유대인이 원수로 여기는 그 원수들이 주님을 주로 본다 말이죠.

 

제가 뒤바뀐 원수 라고 제목을 앞에서 달았는데

뒤바뀐 원수라고 하니까 원래 원수였던 자가 원수 아니게 되고

원래 원수 아니였던 자가 나중에 원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둘 다 원수이다는 겁니다.

둘 다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 원수 아니다고 하니

원수 맞고

저 원수 맞습니다 라고 하니 원수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난 절대 원수 아니다 라고 하는 자가

저봐 저봐 저 원수 맞습니다 라고 자기 스스로 자수하네요 저 사람은 누가 봐도 원수 원래 맞아요 라고

나설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유혹인데

안 넘어가는 원수가 없어요.

사울 왕이든 다윗 왕이든 둘 다 원수요 둘 다 강도 맞아요.

그래서 두 강도 그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거룩이 함께 죽을때에

원수가 비로소 등장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죽지 않는 이상

즉 십자가가 아닌 이상은 절대로 인간의 판단에 의한 원수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피 때문에 갈라지지

십자가의 피 아닌 이상

즉 사랑이 아닌 이상

절대로 구별이 안됩니다.

 

자 이렇게 원수들 속에서

그것도 두 원수 두 강도 죠.

여호와를 미워하는 상황 속에서

바리새인이 악을 사랑하는 그 속에서

 

찬양과 기쁨이 흘러넘치듯이

지금 바벨론 포로 된 입장인데

오히려 천국이 덮쳐와서 천국을 누리고 천국을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다 완료가 되어서 말이죠.

이스라엘은 정작 망하고 패배하고 해체 되었는데

원수는 손가락 하나 다친적도 없는데

승리를 이미 했다고 나팔을 뿌뿌뿌 부르는 겁니다.

전쟁하지도 않았는데 나팔을 불 듯이

이미 전쟁 승리했다고 말이죠.

이제는 전쟁에서 아주 아주 보란 듯이 패배해서 완전 쫄딱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승리했다고 뿌뿌뿌 나팔을 부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시선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말이죠.

 

오히려 바벨론 포로 되기 전에는 이런 찬양이 없었어요.

그런데 포로 되어 잡혀가는데도 불구하고 포로되기 전 보다 더 기뻐, 완전기뻐,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

몰라 몰라! 기쁨이 막 흘러 넘쳐 흐르나 감당이 불감당이

기쁨이가 나를 다루지 내가 기뻐할려고 해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다 말이죠.

기쁨이 나를 마구 마구 통과해서 마치 간지름 태우니까

나는 하하하 하하하 하고 남들이 보기에 미친놈처럼 웃고 기뻐서 좋아라 한다 말이죠.

 

마치 다윗과 같애

아까 좀전까지만 해도 우시더니 금식하시더니 회개하시더니 기도하시더니

왜 이제는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웃고 막 웃으시는 겁니까?

혹시 미치신 것 아닌지요?

안 미쳤다

내 눈물 내 기도 내 금식 내 회개로 아이를 살릴수 없다

도리어 이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이미 용서 받았다 라고

여디디야 꼬끼오 여디디야 꼬끼오 여디디야 꼬끼오로 기뻐하더라 말이죠.

닭이 대신 안 울었다면 베드로는 행위를 의지해서 행위에 죄책감에 빠져 못 헤어나올텐데

닭이 무능한 닭이 자신을 건지더라 말이죠.

닭의 울음 소리가 베드로를 통과해서 간지럼을 태우듯이 태우니까

기쁨이 넘쳐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고 나오는 겁니다.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마귀다 말이죠.

누가 봐도 마귀는 이겼다고

베드로는 졌으니까 쫄딱 망했으니까 자신있게 잡아왔는데

도리어 베드로 좋게 하는 꼴이 되었다 말이죠.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이가 마치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도로 좁혀준 꼴이 되니

미워 죽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이 제대로 사랑에게 패배하는 순간이다 말이죠.

마귀가 배 아파 죽어요 죽어

마귀는 무슨 짓을 해도 이 십자가의 용서를 이길 방법이 없고

도리어 이용만 당하는 보충물 역할만 톡톡히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주 아주 중요하다고 말이죠.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못 이깁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감사하게도

마귀는 예수님의 유혹을 못 이긴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바둑은 못 뜨니까 장기로 설명하기를

어릴적에 아버지랑 어린 나랑 장기를 두면

뻔히 지니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차 포 때고 하자고

완전체로는 절대로 장기 할려고 하지 않지요

왜 지니까

그런데 내기 장기에 차 포를 때면 또 속아넘어가는 겁니다.

혹시 이길수 있다 싶은 기대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유혹하기 위해서 차 포를 때주니까

마귀는 덮썩 내기 장기에 뛰어들더라 말이죠.

욥기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은 바로 이 마귀만을 대상으로 한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마귀를 빼고 말씀을 대하니까

거꾸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바로 저런 바리새인의 시선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원수 속에서 장기(여호와의 거룩한 전쟁)를 하시는 겁니다.
곧 십자가 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심판 속에서 장기를 두신다 말이죠.

 

우리는 그 심판 속에서 주님의 또렷하고 명료한 승리를 본다 말이죠.

심판 바깥에서는 의문의 죽이는 것만 반복하는 짓을 멈출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되어 잡혀가서

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속에서

주님의 또렷하고 명료한 완료를 보고

이 모든 것이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진 사건들임을 인식하게 된다 말이죠.

 

우리가 기뻐해서 그 다음 그 기쁨을 통해 천국을 누리는게 아니라

 

천국이라는 인물이 지옥 속에 있던 우리에게 뛰어들어서

건져내니까 안 기뻐할래야 안 기뻐할 수가 없어요.

분명 물 한 방울도 못 마셨던 원수 속이였는데

이제는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너무 너무 기뻐

그 물 한 방울이 나의 목을 통과하면서 나를 깔깔깔 웃게 만들어버리는

간지러움을 태우더라 말이죠.

 

지금 어린아이가 옆에 있다면 간지럼 놀이를 해 보세요.

그 어떤 지옥의 상황이다고 여겨져도

절대 기쁨이 없을 것이다 여겨져도

간지럼 놀이를 하면 아니 기쁠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주님의 기쁨이 나를 간지럼 태우면

원수들 속에서

아무리 심각한 상황 속에서

7천명이 나에게 덮쳐진 이상

안 웃고는 못 배긴다 말이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나를 대신해서 우는 닭 울음이

나를 안 웃고는 못 배기도록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잘 아십니다 라고 만들어 버린다 말이죠.

 

오히려 누가 당황 하냐 말이죠.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돌삐를 들었던 마귀가

땅에 쓱 하고 적으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도망치고 말았다 말이죠.

 

우리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였지만

기쁨이

항상 기쁨이 그 현장에 뛰어들어서

건짐을 받았다 말이죠.

안 기쁘겠습니까?

 

괜히 쓸데 없이 마귀는 덮썩 무는 바람에

입 안에서 예수님의 기쁨이 도리어 마귀를 도망치도록 만드는

마귀가 웃사꺼리가 되고 말아 도망을 치는 굴욕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귀만을 상대로한 일만 하신다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왜 원수 속에 집어넣을까요?

예수님이 악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악하다 했기 때문입니다.

 

악은 그 예수님을 미워해서 우리를 저주합니다.

그렇게 저주를 하면 할수록

마귀는 굴욕을 당하는 악순환에 갇혀 있습니다.

 

누구 유혹이 더 클까요?

누구의 욕망이 더 클까요?

예수님의 욕망이 마귀 보다 더 큽니다.

 

마음놓고 지진이 일어나든 말든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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