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원수 (먼저 된 원수 나중 되고, 나중된 원수 먼저 된다) (시편 83)

 

온 세계의 지존자와 여호와의 이름 (원수를 붙이시는 이름 전쟁)

 


(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20:1, 개역)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0:8, 개역)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20:9, 개역)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20:10, 개역)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20:11, 개역)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20:12, 개역)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20:13, 개역)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20:14, 개역)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20:15, 개역)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시편 83편을 다시 보니

 

정작 본문은 마 20장을 올렸지만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12:7, 개역)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20:14, 개역)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내용은 악한 농부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앞의 글 시편 96편을 통해서 오늘 시편 83편을 보게 되니

 

의도적으로 이방나라를 붙이셔서 전쟁을 유발케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스라엘(기업 상속자)은 모든 주변의 나라가 원수가 됩니다.
자 이것을 미리 알았던 참선지자라면 국력을 강하게 하라고 경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참선지자는 국력을 약하게 하는 분열을 조장하는 부정적인 말만 합니다.
정작 거짓선지자는 대동단결을 외치면서 결코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거꾸로 된 것 아니냐 말이죠.

종을 보냈는데 다 죽여버리더라 말이죠. 주인이 아들을 보내면 안 죽일것이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속자가 오니 더더욱 죽여서 이 기업을 다 빼앗자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라는 상속자가 오기전 까지는 눈에 보였던 누구든지 다 아는 원수는 원수가 아니였습니다.

그런입장에서 육적 이스라엘은 이 원수개념은 자기육체를 기준으로해서 파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기존의 모세언약에서 이방과의 철저한 단절성을 기록하셨기에

그것을 철저하게 지킬려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말이 전쟁이지

힘과 즉 칼과 창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무기는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본인들도 싫어하는 무기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힘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인들이 그렇게 원수들에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스라엘 본인들이 예수님이라는 상속자를 죽일려고 원수노릇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사랑하는 가족 곧 아내와 아이들을 지킬려면

저들과 같은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즉 행위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롬 9:6, 개역)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7, 개역)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롬 9:8, 개역)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믿음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전혀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예상할수 없는 불명확성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말이죠.
세상사람들도 다 격는 단순한 불확실성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처자식을 그런 불확실성의 세계로 몰아가는 마음이 과연 편할까요?
가장으로써 더군다나 자기자신도 안되는, 창세전의 생명책으로 몰고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성 그 자체로 더 안되는 겁니다.
행위를 의지하면 할 수록 더더욱 말이죠.

책임감에 대한 그 강박성은 더 가면 갈수록 심해질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름이 무슨 놈의 전쟁의 무기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보나 마나 한 전쟁입니다.

백이면 백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입니다.

이름으로는 백날 해도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힘을, 창과 칼을 무슨 수로 이길수 있냐 말이죠.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인, 하나 마나 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모든 사건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벌어진 사건이였습니다.

그런 믿음의 사건을 아무리 교육시킨다고 해도 현실에서는 도저히 믿음이 가질 않는 겁니다.
교육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믿음이 믿음을 더더욱 믿음가지 않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육은커녕 현실적인 문제로 부딧히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막상 그 사건의 내용의 당사자가 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상을 못한다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성경 말씀은 그 어떤 가능성도 안줍니다.

오히려 불가능한 것으로만 몰고갑니다.

말 되는 상황으로 절대 몰아가지 않습니다.

말 안되는 상황으로만 몰아가는 겁니다.

 

아니라 다를까

이스라엘은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멀쩡합니다.
오히려 놀려먹습니다.

너의 여호와 하나님이 있기는 있냐? 너가 이렇게 우리에게 괴롭힘 당해도 가만히 있네
너희가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도 않는구나. 과연 너의 하나님이 있기는 있냐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이스라엘은 공중분해 됩니다.
망한 것은 기도했던 시편 83편을 통해 부르짖었던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분명 시편 83편에 원수들을 몰아내고 그 원수들을 제대로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망하는 것은 저들 원수는 하나도 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기도한 이스라엘이 망해 버립니다.

 

그 잔여물 찌끄래기만 남아서 늘 망한 이스라엘 국가 재건을 꿈꾸는 겁니다.

놀랍게도 1948년쯤에 드디어 이스라엘은 국가를 재건합니다.
기여이 기여이 행위를 의지해서 2000년이 넘어서 기여이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웁니다.
.

과연 그 이스라엘이 그 이스라엘 맞을까요?

과연 행위가 그 이스라엘을 제대로 재건 한 것 맞을까요???

 

그 사이에 1948년 전에

 

그렇게 구약에서 공중 분해된 해체된 이후에 그 이스라엘에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시 새이스라엘을 형성하십니다.

그럼 앞의 이스라엘과 새이스라엘이 어떤 차이가 있냐 말이죠.

그리고 혈통적 이스라엘이 1948년이라는 공백을 깨고 재건한 이스라엘과의 차이는 뭐냐 말이죠.

물론 앞의 이스라엘과 같죠

그럼 한데 묶어서 구약의 혈통이스라엘과 1954년에 재건된 이스라엘(현재 2016년 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이스라엘 국가)
이 둘을 하나로 묶어서 앞의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해서,

앞의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의 차이는 뭔가 하는 점입니다.

 

뭐가 이상하냐 하면

구지 앞의 이스라엘이 있는데

먼저 된 이스라엘이 있는데

의도적으로 주변의 나라들을 다 일으켜서

이스라엘이 해체 되도록 하는 방관하는 모습처럼

결국 이스라엘은 망했고

 

그리고 다시 새이스라엘을 형성하신다고 하니까 (사실상 전혀 다른 새이스라엘이지요)

왜 앞의 기존의 이스라엘로는 새이스라엘을 형성하지 않냐 하는 점이고

어차피 이스라엘을 세울꺼면

구지 해체 시킬 필요가 있냐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시간 순으로 해석해야만 가능성의 해석이 되겠지만

역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혀 다른 시선이 나타납니다.
곧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된다 라는

이 원인 없는 결과를

먼저 선포 선언 하심으로써

나타나야만 하는 것들이 바로

 

악한 품꾼들이 선한 주인의 삯 계산법에 반기를 드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결국 처음부터 먼저 된자 나중되게 하실려고 의도적으로 반발할 수 밖에 없는 셈법을 원인 없는 결과로 나타내신 겁.

 

이것을 오늘 시편 83편에 적용해 봅시다.

미리 답안지를 보고

시험문제를 봅시다.

수수께끼를 풀어봅시다.

 

미리 말하지만 모든 수수께끼의 곧 모든 성경말씀의 답은

사랑입니다. 번제와 제사의 차이로써의 인애와 자비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미리 말해서 김빠지죠

그런데 원인 없는 결과 아니면 풀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에 더더욱 감사함에 뿅가서

남들이 도저히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를 곧 문제를 보는 재미를 누리는 겁니다.

한마디로 얄밉게 미움받는 짓만 골라하게 된다는 거죠,

? 미리 답을 알았기 떄문에 말입니다.

 

시편 96편에서 제목을 열방 곧 이방나라와 새노래 라고 부제목을 다시 달았는데

정작 이스라엘은 새노래를 못 부릅니다.

그리고 못 불러야 할 원수인 이방나라가 오히려 새노래를 부릅니다.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었다는 겁니다.

미리 답을 보는 반칙인 편파 편애가 이방인에게 덮쳤다는 겁니다.

 

이 원인 없는 결과(십자가)를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겠지요.

?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만이 새노래를 부를수 있는데

정작 아무리 해도 못 부른다는 겁니다. 새노래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리끼는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받은자만이, 너희는 신이다 라는 처음자리로써의 참이스라엘만 자랑하는 십자가인데

그들은 거리끼는 이 십자가를 오히려 절대로 노래 못 부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결국 새노래를 부르는 자만이 새이스라엘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작 아무리 해도 이 새노래에 들어갈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멀쩡하게 이스라엘이 눈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들이 눈 시퍼렇게 떠 있는 그 바로 코 앞에서

새이스라엘을 형성하시는 겁니다.

 

어렵죠

앞의 글들에서 언급한 내용을 떠올리시면 무슨 말인지 아실겁니다.

쉽게 말해서

미리 답을 보듯이 말해 보면

신약의 안식일에 밀싹을 먹는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충돌하는 장면을 보시면 됩니다.

 

마태복음 12장입니다.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그 뿐이겠습니까?

 

당신의 제자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


하나님이 우리 바리새인을 도와주시니까, 저들 예수의 제자들이 꼬투리 잡을 것이 너무 너무 많은 겁니다.

허물 투성이입니다.

 

(9:14, 개역)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5:2, 개역)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2:18, 개역)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니까

(7:5, 개역)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5:33, 개역)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안식일 지키는 먼저된 이스라엘 코 앞에서

나중된 새이스라엘은 그 안식일을 보란 듯이 어겨버린다는 겁니다.

 

충돌이 안 생기고 배기겠습니까?

 

과연 먼저 된자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나중 된 새이스라엘을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당연히 가만히 안 두겠죠.

 

오늘 시편 83편에서는 원수 개념이 신약에서는 두 원수로 나누어지듯이

신약에서는 이스라엘이 먼저된 이스라엘과 나중된 새이스라엘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 싸움이다는 겁니다. 임마누엘 싸움입니다.

한 쪽은 여호와를 붙들고써 안식일을 지키고 있고

다른 한쪽은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붙잡고써 안식일을 어기는 겁니다. 막사는 겁니다.
왜냐하면 안식의 주인이 안식일날만 골라서 고치시는

명료한 인애와 자비를 베풀고 있고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은 번제와 제사라는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더라 말이죠.

 

여호와와 여호와의 이름의 충돌이 생겨버린 겁니다.

여호와는 존재입니다.

너 라는 존재 있고 나 라는 존재가 있으니 이 존재끼리 소통하겠다는 겁니다.

존재에 대해 믿음을 투영하는 것이 인간의 믿음입니다. 즉 행함입니다. 종교성이다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비존재입니다. 이름은 기호입니다. 문자입니다.

문자가 무슨 힘이 있겠냐 말이죠.

보나 마나 뻔한 결과를 저절로 예상케 하는 것이 이름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불신을 조장한다 말이죠. 참선지자처럼 분열 이간질한다 말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믿음도 이름에 믿음을 투영할 수가 없습니다.
도박에서 전재산을 다 걸어서 심지어 영화 타짜의 아귀처럼 손모가지 걸듯이
목숨을 
걸듯 베팅걸듯이 걸수가 없는 겁니다. 

목숨을 걸수가 없어요.
걸었다고 우겨도 소용이 없어요. 부자청년 보세요
.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없거든요. 비존재이거든요.

뭐 있어야 걸거 아니겠습니까? 없는데 어떻게 걸어. 존재하지도 않는데 !!!!

믿음을 도저히 가질수 없도록 되어 있는 비존재입니다.

믿음은 존재에게만 한다 말이죠.

마치 이것은 수십년의 전쟁 경험이 있는 베테랑 군인이 전쟁에서 이기겠느냐!!

아니면 방금 태어난 젖먹이를 통해서 전쟁하심에 있어서 이길수 있겠느냐 라는 충돌이다는 겁니다.

 

베테랑 전쟁 영웅 군인과 무경험 무능 무존재인 삼무 三無인 젖먹이와의 전쟁

누가 이기겠느냐 말이죠.

꼭 전쟁하기 전에 반드시 할례를 해서 엉거주춤 바로 설수가 없는 상태의 사람과 전쟁하는 것과 같다 말이죠.

 

더 쉽게 이야기 하면 골리앗 거인과 어린아이 다윗과의 전쟁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름전쟁입니다.

 

존재와 존재의 전쟁이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의 전쟁이다는 겁니다.
현실과 유령의 전쟁입니다. 유령(안개 
三無)이 어린다윗입니다. 

허깨비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말이죠.
[이름]이 무기로써는 아무것도 아니듯, 어린아이는 무능 그 자체이니
 말입니다.

이 전쟁을 의도적으로 붙이시는 전쟁으로써 한다는 겁니다.

불가능한 전쟁을 말입니다.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2:9, 개역)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개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개역)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12:15,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2:16, 개역)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2:17,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2:18, 개역)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자 이런 원인 없는 결과 곧 답안지를 미리 보고서

시편 83편을 보면

 

이방의 나라를 자꾸 여호와의 이름이 시비를 걸 듯이

싸움을 하자 라는 식으로 전쟁 분위기로 몰아간다는 겁니다.

 

여기에 과연 이스라엘이 동의를 하겠냐 말이죠.

당연히 안하지요.

이스라엘은 전쟁 하기 싫어합니다.

민족 전체 역사가 전쟁 뿐입니다.

쉼도 없을 정도로 전쟁이요 전쟁이요 전쟁입니다.

얼마나 지긋 지긋 할까요?

누가 전쟁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족속이 어디있겠냐 말이죠.

결핍이 생기면 그때 어쩔수 없이 하는 것이지

한 민족의 전체 역사가 전쟁 밖에 없다면

과연 그 민족에 남고 싶겠냐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은 자꾸 이방나라에 이 이스라엘의 존재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도록 깨작 깨작 성질 긁어대듯이 자꾸 눈에 거슬리도록 만든다는 겁니다.

 

왜 일까요?

 

전쟁입니다.

싸움 붙일려고 말입니다.

 

누가?

 

여호와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 그렇게 싸움 붙이는 겁니다.

 

졸지에

출애굽사건이 옛날일로만 끝나는게 아니라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주변의 강대국이면 강대국일수록

이스라엘을 얍잡아 보도록 만들어 버리고

그래서 블레셋과 같은 거인 장수가 이끄는 군사를 보내듯이

전쟁을 하도록 한다 말이죠.

 

정작 이스라엘은 전쟁 하기 싫어합니다.

이것이 먼저 이스라엘의 왕이된 사울왕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어린아이 다윗은

이 여호와의 이름에 미친 듯이 전쟁에 환장한 듯이 달려듭니다.

사울왕은 이 다윗이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블레셋 쪽에서 어린아이를 보냈다고 놀려먹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 전쟁은 골리앗과의 전쟁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의 전쟁이 아니라

바로 사울왕과의 전쟁인 여호와 이름 전쟁이다는 겁니다.

 

자 이뿐이겠습니까?

엎친데 덮친격으로

 

(12:18, 개역)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성령을 받아서 심판을 이방에게 전하는 겁니다.

정작 그 심판 곧 원수에 대한 심판을 이방원수는 받아들이는데

똑같은 원수인 이스라엘은 이 심판을 거부하는 겁니다.

오히려 똑같은 원수이지만

이방은 회개하여 돌이키고 (둘째된 나중된 새이스라엘)

역시나 원수인 이스라엘은 오히려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도 않은 겁니다.

성령으로 인한 심판을 거부하는 겁니다.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시편 8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황을 부채 펼치듯이 쫘악 펼치면

오늘 시편 83편과 같은 상황이 나타나는 겁니다.

 

주의 이름 전쟁의 상황으로써 벌어지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악하다 라고 예수님께서 외쳤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로인한 원수와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그 원수는 외부 바깥의 골리앗과의 싸움이여야 하는데

정작 전쟁의 양상은 내부 사울왕과의 전쟁에 더 집중이 되어 있습니다.

골리앗이 원수가 아니다 라는 말이 아니라

사울왕도 역시나 마찬가지인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저 골리앗과 다를바 없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끄러워 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이 원수 사울왕의 패거리가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래서 자꾸 자꾸 시편에서 다윗은 출애굽을 자꾸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되받아서 참선지자들은 출애굽 사건을 외치는 겁니다.

도대체 주변나라와의 전쟁은 관심도 없고

자꾸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내부 싸움에만 더 신경을 쓰고 있으니

아무리 거짓선지자가 평강이다 평강이다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봐라 망한적 있더라

절대 망할 리가 없다고 오히려 거짓선지자가 대동단결로

평강을 외치면서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한다 말이죠.

 

정작 오히려 참선지자가 자꾸 분열시키는 이간질을 하는 비꼬는 말만 합니다.

에라이 잘도 뭉치겠다. 벌써 끝났당께 ~~~

 

저들 거짓선지자는 존재적인 이스라엘에 신경쓰고 있고

참선지자는 이미 완료된 결과적인 비존재적인 이스라엘만 외치는 겁니다.

 

한 쪽 거짓선지자는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는 존재 이스라엘

원인이 되는 이스라엘을 주장하고

그래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듯이

번제와 제사를 반복하는 강도의 소굴을 형성해야 하고

 

반대로 다른 한쪽 참선지자는 비존재인 이스라엘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미 이스라엘은 완성이 되어버렸다고

십자가의 사랑이 다 이루었다고 결과를 보고 이스라엘에게 통보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아예 못 지키도록 아예 나라 자체를 민족 자체를 날려 버리는 겁니다.

오로지 안식의 주인의 인애와 자비만을 쳐다보라는 겁니다.

이것이 새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혈통 이스라엘을 잇고 잇는 그 연결이나 소통이나 개방 따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다 완료가 되어버렸으니

 

예수님이 형성한 새이스라엘은

도대체 민족도 없고

소속도 없고

역사도 없고

성전도 없이

 

그들 자체가 신이 되는,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가 되는,

그들 자체가 성령의 전인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도 문법파괴죠.

동아리 모임은 모임이지 사람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너희가 성령의 전이다 라고 하십니다.

구지 따지자면 동아리가 크고 거기에 예속 복속이 된 구성원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구분이 졸지에 사라지게 되는 말이 바로

너는 성령의 전이다.

너가 교회다 라는 겁니다.

교회 평생 다닌 적이 없는데도

앞으로도 다니지 않는데도 너는 교회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 안의 표현이다 말이죠.

 

자 이렇게 원인 없는 결과로

미리 답안지를 몰래 훔쳐서 본 상태에서

이 시편 83편을 보면

 

원수는 정작 해체되지 않고

원수를 멸해달라고 기도하는 이스라엘이 해체됩니다.

 

이것 때문에 성경박사들이 원수가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문제에 부딧혀서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해석을 못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쪼아대는 주변의 열방들이 곧 원수들이

도리어 새이스라엘이 되고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스라엘은 해체가 되어

다시 회복운동하자고 바리새인들처럼 모여서

오히려 상속자로 오신 예수님을 죽여서 기업을 빼앗자 라는

원수로 남아버리게 됩니다.

 

자 그럼 시편 83편의 기도는 완성되었던 것 맞죠

그러나 아직도 혈통적 이스라엘에게는 시편 83편은 미완료인채로 남아 있습니다.

 

정작 새이스라엘에서는 완성된 말씀인데 말이죠.

 

비존재인 새이스라엘 곧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세운 이 비존재들은

오히려 먼저된 이스라엘로부터 지독스럽게 미움을 받는 원수짖만 골라하는

강퍅함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럴까요?

답을 미리 봐 보니까

이미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완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 땅에서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으로써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완성하겠다는 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헛짓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완악함이라는 원수성을 표출하게 되어서

그래서 발생한 사건이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서는 도리어 과거에 그렇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나라 원수들이

도리어 새이스라엘로써 안식의 주인의 인애와 자비에 의해 긍휼을 입어

성령의 전, 또는 너희는 신이다 라는

마치 맏아들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그 코 앞에서

잔치를 벌리고 금가락지 새신발 새망토를 입히는 것과 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겁니다.

나중된 자를 먼저 된 자 코 앞에서 대놓고 보란 듯이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서

먼저된자 나중되고 나중된자 먼저되게 하시는 십자가의 편파적인 용서를 베푸시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여기서 진짜 원수는 그 자비를 베푸심에 반대하는

즉 여호와의 이름이 하시는 일에 반대하는 강퍅함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이 주의 이름이 베푸신 자비를 높이고자

이 자비에 반발하는 세력을 들추어내심으로써 십자가의 용서를 풍성하게 하심

이것이 이름이다는 겁니다.

존재는 그 지역에서 안 벗어납니다.

그런데 발도 팔도 다리도 없는 이름은

온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주에 까지 주의 이름을 펼치십니다.

바로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인 십자가의 피용서 말입니다.

 

그런데 의문의 죽이는 것의 반복인 제사와 번제는

온 세계에 퍼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주에까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해와 달과 별에게 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을 전해보라 말이죠.

 

아마 해와 달과 별이 화를 낼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구 꾀냐 말이죠.

! 막살면 안된다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는구나 라고

화를 낸다 말이죠.

 

그 안식일 지키는 것이

막살지 않는 것이

멀리 우주에까지도 안바랄께요

해와 달과 별에게 한 번 전해 보라니깐

나 안식일 제대로 지켰다 해와 달과 별 너 봤지? 라고 한번 말해 보라니깐

 

어딜 감히 누굴 속일려고 사기를 치느냐 라고 화를 낸다 말이죠.

 

(148:3, 개역)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148:4, 개역)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148:5, 개역)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1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2, 개역)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19:3, 개역)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19:4, 개역)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다윗은 심지어 하늘과 궁창과 날()과 밤과 해와 달과 온 세계 온 우주가 모조리 다

출애굽 사건에 동원이 되고 이 출애굽사건인 구원사건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출애굽사건을 다시 다시 다시 재현케 해달라는 요청으로 시편을 외치는데 있어서

정작 이스라엘은 고만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이제 그만 하자 라는 겁니다.

전쟁 싫타 라는 겁니다.

 

오죽 하면 남자들이 전쟁을 하기 싫어해서

여성인 마리아가 전쟁요청을 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한나와 마리아의 기도가 바로 오늘 시편 83편과 너무 너무 똑같다 말이죠.

원수들 손에서 건져내 주시고

원수를 파 하게 해 달라고 말이죠.

 

결국 십자가의 자작극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주변의 원수와 즉 주변의 강대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붙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온 세계에 지존자가 자기 이름을 만망에 퍼트리는 방식입니다.

 

앞의 글 시편 96편에서도

반드시 만방에서

열국 열방에서 주님의 이름이 찬양케 만들도록 하겠다입니다.

원수들을 파 하시는 출애굽을 다 격도록 만들겠다는 겁니다.

출애굽이 이스라엘만의 고유경험인줄 알았는데

맞습니다. 먼저 된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건을 벗지 않는 완악함 때문에

딴 민족은 경험 격으면 안된다고 광채나는 얼굴을 수건을 가리우게 됩니다.

어차피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왜 사라지느냐 의문의 죽이는 것의 반복으로써의 광채이거든요.

 

결국 모든 나라와 열방 열국들이 이 출애굽사건 곧 십자가사건을 경험케 되어서

새이스라엘이라는 비존재를 형성합니다.

민족과 나라(국가) 라는 경계를 뛰넘어서

어디에서든 존재하는 비존재로써의 새이스라엘 말입니다.

그들 새이스라엘은 이 십자가의 영광을 찬양하는 겁니다.

새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성전도 필요가 없이 그들 자체가 성령의 전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고아 과부 나그네인 새이스라엘의 찬양이 우주에까지 전파 됩니다.

벙어리의 기도 곧 찬양이 하늘에 닿습니다.

소경이 봤다고 외치는 그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입니다. 왜 그 소경의 증거가 우주에까지 전해지거든요.

오히려 눈 건강하다고 소경아니다고 하는 자는 예수님 조차도 자기처럼 존재로 따지는 겁니다. 모든 소동의 원인은 저 예수 때문이다는 겁니다.

귀머거리가 들었던 말씀이 제대로 된 말씀이다는 겁니다.

아니 귀머거리는 듣지를 못하는데 말이죠.

 

바로 이런 비존재들

이들이 바로 새이스라엘입니다.

먼저된 이스라엘이 비웃습니다.

아이고 꼬라지 하고는

꼴에 새롭게 모여진 이스라엘 꼬라지가

겨우 저런 모습들의 사람들인가?

나 안할래

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래

문둥병자 9명 조차도 새이스라엘이 싫다고 드디어 건강한 자의 세계 속에 들어갈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왜 안가노 너도 가라고 등떠밀어도 안갑니다.

 

바로 원인 없는 결과라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이 간극에서 말입니다.

갈 곳이 졸지에 문둥병 고침으로 인해서 너무 많아졌습니다.

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로 떠나지도 않고

갈릴리 또는 예루살렘으로도 떠나지 않고

갈곳이 여전히 없습니다.

? 행위를 의지할 수가 없도록

믿음에 의지하도록 예수님에게 사로잡힌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홉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버린 겁니다.

99마리 양을 버리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이유입니다.

 

(17: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누가 진짜 원수입니까?

문둥병 고침을 받은 9명의 유대인 입니까?

즉 개같은 이방인이 아닌 9명입니까?

 

아니면 이방인 사마리아인 1명 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는

이스라엘만의 출애굽이 아니라

전 세계의 출애굽이 되고자

전 세계에 이 십자가의 영적전쟁을 확대해 보니

 

온 세계에 이 여호와의 이름 전쟁을 펼쳐보니

곧 출애굽 구원전쟁 곧 십자가 전쟁을 펼쳐보니

 

정작 결과적으로 원수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듯이

유대인이였듯이 오늘날은 기독교가 벗겨진 수건을 도로 쓰고서

그 완악함을 펼치더라 말이죠.

 

나는 저 막사는 원수들인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게 해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오늘도 막살지 않은 증거인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안식일 지키기

막살지 않기를 지키 자고 주장하는

그 완악함을 펼치더라 말이죠.

그놈의 성화됨이, 똥덩어리를 온몸에 쳐바른줄도 모르고

온동네 온 교회다니면서 자랑하더라 말이죠.

 

원수가 뒤 바뀐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결국 오늘 시편 83편은

이렇게 이방나라 원수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그 이스라엘 조차도

원수에 포함된다는 사실에서

십자가라는 여호와의 이름의 전쟁은 더 깊게 들어가는 겁니다.

그 이름의 전쟁을 그들 조차도 싫어했다는 겁니다.

싫어한다고 해서

지긋지긋하다고 해서

 

멈춰 지거나

피할수 있거나

잠시 휴식을 주거나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쉼도 없이 주무시지도 쉬지도 않고 매일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풍성했으면

벙어리도 귀머러기도 소경도

고아도 과부도 나그네도

이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자

열방에서 모여서 우주에까지 전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원수는 이 이름이 싫어서

이름이 벌리는 자작극으로써 벌어지는 전쟁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완악함을 보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를 치는 답안지로써

이렇게 원수를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출애굽 사건을 재현함에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그 애굽이 이스라엘로써

원수인 이스라엘은 이렇게 박살이 난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원수인 이스라엘에게서 건져낸 새이스라엘은 이미 완료 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구원전쟁입니다.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입니다.

이 결과를 소급해서 선언하는 시편 83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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