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을 넘어서는 시온 (시편 129)

 

시온성, 다윗성(주의 인자하심)을 미워하는 자들

 

시온을 반대하는 시온, 반대를 위한 반대, 시온을 초월하는 시온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129: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129:2, 개역)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129:3, 개역)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129:4, 개역)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

(129:5, 개역)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129:6, 개역) 저희는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129:7, 개역)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줌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129:8, 개역) 지나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무엇을 미워하느냐 와 무엇을 좋아하느냐를 통해서

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시온을 미워하는 자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시온을 미워하는 자가

시온 밖에서 시온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누구든지 그것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온 안에서 시온을 미워하게 되면 도대체 누가 시온을 미워하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시편 129편을 달달 외워 본들 소용이 없겠지요.

 

자 그런데 오늘 시온을 미워하는 자 중에 한 사람이

오늘 시편 129편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수용할 수가 있을까요?

아니 시온을 미워하는 자가 어떻게 시편 129편을 기록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 시온을 미워했던 자가 바로 다윗이였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 129편을 기록하기 전에는

무엇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고

무엇을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줄 몰랐다 말이죠.

이것은 마치 사도바울이 믿음을 미워하고 행함을 사랑했었듯이
이제는 행함을 미워하고 믿음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그 당사자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도 미워하는 것이 있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 말이죠.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이죠.

그런 이 여호와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다윗을 사랑했고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다윗은 미워했었다 말이죠.

 

시편 129편을 기록하기 전에 말이죠.

 

물론 시편 129편의 기자는 누구인지 모르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라고 이미 완성 곧 미래완료의 입장에서 언급 됩니다.

 

즉 모세언약에서의 율법은 가두기 위함이다 말이죠. 죄 아래

다윗언약에서의 율법은 율법을 넘어서는 율법으로써 메타율법인 사랑의 법 곧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셨다에 기초한다 말이죠.

 

그러니 다윗은 모순 되게도 율법의 4배나 갚으라 라고 외친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미워하는 겁니다.

죄아래 갇힌바도 모르고 율법을 외쳤으니 말이죠.

물론 내가 율법을 지킨 것이 율법을 미워했구나 원수 짖을했구나 라는
회개 곧 더 나은 율법 외의 한 의가 나타났기에

그것을 보고 고백하는 겁니다. 원수라고 죄인이라고

자기반성이 회개가 아니라

율법 외에 한 의를 보고 하는 것이 회개다 말이죠.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니 본인이 율법을 외치면서 율법을 어기고 있는 원수임을 보게 됨이

율법 외의 한 의를 보게 됨으로써 외치는 겁니다.

 

마치 시온에 살면서 시온을 넘어서는 시온을 보고서

본인이 시온을 미워했구나 라고 알게 되듯이 말이죠.

 

그럼 진짜 시온을 봤다는 겁니다.

시온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곳이다 말이죠.

 

그런데 시온이라는 장소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 살면서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냐 말이죠.

 

그런데 진짜 하나님이 이름 되신 예수님이 오니까

시온에 산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였고

예루살렘에 산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인

가짜 시온 가짜 예루살렘으로 들통인 난 겁니다.

누구처럼? 다윗처럼 말이죠.

 

내가 시온을 미워한 원수로 들통난 것이 바로 진짜 시온이 옴으로 나타난 것이다 말이죠.

이것을 기뻐하는 겁니다.

 

마치 손할례한 자들이 마음판의 할례를 미워하듯이 말이죠.

할례를 미워한 겁니다.

세례를 미워한 겁니다.

안식을 미워한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안식의 주인을 죽이듯이 말이죠.

 

그것이 들통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시온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온에서 머물지 말고 시온을 넘어서는 시온이 되라는 겁니다.

시온 곧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장소가 되라는 겁니다.

성령의 전이 되라는 겁니다. 너희는 성령의 전이다는 겁니다.

곧 신부된 교회 말이죠.

 

이것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즉 교회 다닌다고 교회라는 장소를 차지하게 되면

 

교회 구성원 중에 되도 않는 인간 구스 여인이 모세의 아내가 되는 꼴을 못 보게 됩니다.

왜 세고 센 괜찮은 이쁜 처자 다 내버려 두고

저 제일 못생기고 흙수저 중에 흙수저인 새까만 구스여인을 왜 아내로 삼느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된다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사랑의 하이라이트가 뭡니까? 결혼입니다.

결혼은 결혼 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하루 하루가 계속해서 결혼입니다.

그러니 구원 그 이후 라는 말이

말이 안되듯이

결혼 그 이후 라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그러니 지키고 행하는 법 적인 개념이 결혼이나 사랑이나 구원에게 붙일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법을 본능적으로 붙일려고 한다 말이죠

선악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법을 넘어서는 법으로써의 사랑의 법인 십자가 이기에

결혼에는 법을 붙이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붙입니다.

붙이다 보니

껍데기는 결혼인데 껍데기는 시온인데

정작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진 이 시온이

하나님의 이름이신 예수님을 싫어하더라 말이죠.

미워하더라 말이죠.

 

왜 이런 악마성에 우리는 갇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애굽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받으시듯이
마귀를 통해서 영광 받으심은
그 마귀의 손에서 끄집어낸 여호와로라
애굽의 종 된 너희를 끄집어낸 여호와 로라 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로 빼내신 너희는 전리품이다는 겁니다.

그 전리품 중에 하나가 다윗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전리품으로써 이 시편 129편을 외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계시록의 24장로들도 그렇고 말이죠.

이 잃어버렸다가 되 찾은 이 주의 인자하심을
곧 처음사랑을 거부하는 자는
자꾸 인애와 자비를 원치 않고, 미워하고
번제와 제사를 사랑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존재입니다.

존재는 자꾸 법을 찾습니다.

나의 존재의 정당성을 법으로 규정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래서 구원을 법으로 정당화 할려고 한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불안 해서이다는 겁니다.

내가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미리 조치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 그 이후 라는 말이 유행한다 말이죠.

불안하니까 자꾸 법을 지킬려고 한다 말이죠.

 

구원은 구원 그 자체로써 계속 증폭 됩니다.

 

불이 산의 나무에 붙었다 말이죠.

불이 확산 됨에 있어서

불 그 이후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 라는 시간적인 개념을 붙이는 이유는 불안하기 떄문에

불멸성을 억지로라도 집어넣고 싶어라는 교리 곧 법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겁니다.

 

정작 불의 증폭이다 말이죠

시간에 갇히는 것이 불이 아니다 말이죠.

불은 시간을 넘어버리는 메타 불이다 말이죠.
시간마저도 불 태워 버립니다.
공간 장소 마저도 불 태워 버린다 말이죠.

 

그러니 나의 존재에 이 불을 담을수가 없으니까 법을 찾는 겁니다.

그러나 기능은 곧 이름은 존재를 넘어서는 비존재로써의 당위(마땅함)입니다.

 

나의 존재는 불을 담으면 불타버려서 존재 자체가 잿더미가 되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존재 존재 백날 우겨도 사라져 버리는 쟂더미 안개 먼지가 실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기능은 이 불을 담아 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니 시온에 살면서 시온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당할 줄 알았는데 택도 없음이 드러난 거죠.

오히려 시온을 미워한 원수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되도 않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담을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 안 타죽도록 배려해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는 주의 인자하심을 담는 그릇이 바로 시온이 되는 겁니다.

 

신부라는 거죠 즉 모세의 온유다 말이죠. 불쌍히 여겨주는 인애와 자비이다는 겁니다.

 

이것에 대한 반발로 미리암누나가 이스라엘 진영 바깥에서 문둥병에 걸려 있다가

모세의 기도로 온유로 불쌍히 여겨주심에 대한 배려를 베풀어달라 로 인해서

미리암은 다시 시온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말이죠.

이스라엘 진영 곧 여호와의 이름이 담겨진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말이죠.

 

미리암과 같은 시온을 미워하는 자가 되지 말자가 아니라

비록 우리의 본성인 시온을 미워할 수밖에 없지만

불쌍히 여겨주셔서 원수로 죄인으로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완악하지 않도록 불쌍히 여겨주셔서 회개케 하도록 돌이켜 주심이라는 섬김 때문에

전에는 시온(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그릇)을 미워했으니

이제는 본인 자체가 시온이 되어 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그릇인 예수님을 보고서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뻔뻔하게 회개함으로써

예수라는 이름을 외치는 그 기능을 말할 수밖에 없는 당위로써의 신부로써 십자가의 사랑을 외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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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 않는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을
자신의 신부로 삼는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의 법

되도 않는(예수님을 세번 배신한) 베드로 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선악의 법을 넘어서는 사랑

곧 자기 신부로 삼는 최고의 사랑의 결정타인 결혼 하고자 다가오는 예수님


시동생과 결혼해야할 형수의 입장

시아버지와 결혼 해야할 며느리의 입장 
도통 이해 불가능한 다들 무시하는 이 은사(성령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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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내는 것을 지키는 자가 십일조 되신 예수님을 죽였듯이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3:2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6, 개역)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3:28,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23:39,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시온에 사는 자가

예루살렘에 사는 자가 예수님을 죽였다 말이죠.

 

신부된 교회라고 교회에 다니는 자가 구스여인(모세의 아내)을 하루살이를 다 걸러내고

약대(낙타) 부자들이 타는 고급승용차 약대를 탄 부자들만 대접하더라 말이죠.

 

왜 이 껍데기기에 집착할까요?

마귀가 씌여서 그렇다는 겁니다.

 

왜 유대전체가 마귀에게 장악 당했을까요?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하기 전 시작 스타트 전에

왜 광야에서 마귀에게 세가지 시험을 받았을까요?

 

마귀에게 장악당하지 않은 유일한 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자 답잖아요.

구원자가 이미 마귀에게 장악당했으면 그게 무슨 구원자 입니까?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마귀가 구원자의 조건을 따지는 겁니다.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 세가지가 바로 마귀가 유대인을 장악한 내용인 겁니다.

광야에서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에게서 마귀가 잠시 떠났다고 하던데

그 마귀의 시험이 놀랍게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선생 바리새인들의 입에서 이 잠시 떠난 마귀의 시험들이 나오더라 말이죠.

바리새인과의 충돌에서 인간 바리새인들의 공격 내용들이 다 이 마귀의 세가지 시험 속에 다 있더라는 겁니다.

 

곧 시온을 미워하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들이 미워함과 좋아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수 있듯이

그들이 미워하는 것이 들통났습니다.

곧 시온에 살면서 시온을 미워하는 곧 여호와의 이름이 담겨진 장소로써의 시온인데

여호와의 이름이신 예수님을 미워하더라 말이죠.

 

그것이 들통났고

그럼 무엇을 좋아할까요?

 

마귀에게 장악 당했기에

자꾸 구원자를 찾더라 말이죠.

구원자의 조건을 자꾸 따졌듯이 말이죠.

그 이유는 바로 번제와 제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번제와 제사를 받는 구원자를 찾는 겁니다.

 

이게 마귀다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작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데

 

그들은 껍데기를 갖추는데 도사들이고 그것을 좋아하는

번제와 제사의 중독

이 번제와 제사를 받는 구원자 중독에 빠졌다 말이죠.

 

그래서 십의 이조 드리는 십의조 중독자들이고 십일조 중독자들이고

가짜 시온 중독자들이고

가짜 교회 중독자들이고

이레에 두 번 금식 중독자들이고

성화 중독자들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애와 자비를 싫어하는

주의 인자하심을 싫어하는

십자가를 거리끼는 지혜로 여기는

구스 여인(모세의 온유)을 거부하는

진짜 교회(신부)를 거부하는 가짜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교회를 넘어서는 교회로써의 신부된 교회

곧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가

여호와의 이름이 담겨진

주의 인자하심이 피 발려진 교회가

교회 속에서 교회로써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다윗은 출애굽을 외치는 겁니다.

원수로부터의 탈출 곧 구원사건 말이죠.

 

자꾸 교회로부터 탈출 하자고

이스라엘로부터 탈출하자고 말이죠.

이들이 원수 곧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라고

그래서 인애와 자비인 율법 외에 한 의

곧 하나님의 의 속에 들어가자고

 

여호와의 이름만을 쳐다보자 라고 말이죠.

 

오히려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이스라엘 속에 산다는 것이

시온에 살고 있다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쳐다보지 않는 원수로써

예수님을 미워해 터져버린 사건이 십자가라는 거리끼는 어리석은 지혜가 나타났듯이

이 지혜가 이 십자가 지혜가 나보다 옳았다고

다윗은 이제 시온을 미워했던 자에서 시온을 사랑하는 자로 옮기움을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시온의 기능이다 말이죠.

 

말씀을 나누고 난 뒤에 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488

 

428.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488]

1. 내 영혼에 햇빛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 이 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2. 내 영혼에 노래 있으니 주 찬양 합니다 주 귀를 기울이시사 다 듣고 계시네

3. 내 영혼에 봄날되어서 주 함께 하실때 그 평화 내게 깃들고 주은혜 꽃피네

4. 내 영혼에 희락이 있고 큰 소망 넘치네 주 예수 복을 주시고 또 내려 주시네

[후렴]

주의 영광 빛난 광채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때 나의 영혼 기쁘다

 

 

막상 찬양 부르다가 갑자기 어머니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노래 딱 누가 불렀는가에 딱 맞다고

누구? 한 쪽 구원받은 강도 말이죠.

 

나 강도는 평생 강도짖만 하고 살인을 하고 완전 인간 말쫑으로 살았는데

이 어두운 내 인생에 갑자기 햋빛이 비추이니까

이 죽는 순간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라는 이 귀한 분을 만남으로 인해

이 죽는 순간이 심각하지 않고

오히려 감격에 부풀러 올라

온 세상이 햇빛으로 가득한 찬란함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마 이 강도가 평생 시온 한 번 가본적 없다 합시다

시온에 사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면 이런 짖을 하고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졸지에 하나님의 이름 되신 예수님을 이 마지막 순간에 봤으니

이런 말이 아니 나오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죠.

 

여기에다가 이 말도 안되는 고백에 장단을 맞춰주는 예수님은 도대체 왜 맞짱구를 쳐 주실까요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오죽 이것이 말이 안되면 옆에 있던 다른 강도가 외칩니다.

둘다 미쳤군 죽는 마당에 무슨 헛소리냐 라고 말이죠.

 

즉 시온을 미워하는 자를 반드시 대동시켜서

그 코 앞에서 시온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즉 이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끝까지 완악한 마음인

번제와 제사입니다.

 

여기에 성령의 소욕은 이들 육의 소욕을 거부하면서

끝까지 인애와 자비를 외칩니다.

곧 십자가의 피 용서입니다.

 

인간은 번제와 제사를 사랑함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것이 마귀에게 장악당한 인간의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빼내시는 방법이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인애와 자비 라고 말이죠.

 

이 두 원수지간의 소욕을 통해서

그 차이로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129:2, 개역)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이 넉넉히 이긴 사랑을 저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인애와 자비를 미워하고 번제와 제사를 좋아하는 마귀에게 빠져있는 자들에게

외치는 겁니다.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기 때문에

곧 이미 완료된 넉넉히 다 이루었기에 다 승리했기 때문에 말이죠.

 

아무도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기 때문인 겁니다.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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