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 보다 더하도다 (시편 130)

 

 

(130: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2, 개역)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3,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130:4, 개역)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130:5, 개역)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130:6, 개역)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130:7, 개역)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130:8, 개역)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파수꾼이 밤새도록 보초를 서고 난 뒤에 하품과 피곤과 빨리 빨리 안식을 취하고픈

잠자리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래서 어서 빨리 아침이 왔으면 하고 아침을 기다린다 말이죠.

 

그 정도로 몸이 피곤하다는 겁니다.

몸이 무겁다 말이죠.

인간의 한계입니다.

 

마치 인간의 번제와 제사가 이런 식입니다.

죄를 짖게 되면 그 정도로 몸이 무거워 집니다.

피곤해 집니다.

스스로 마저 짖누르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고맙게도 이 죄를 씻는 장치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다시 아침에 상쾌하게 된다 말이죠.

안식을 취하고 난 뒤에 시원하게 말이죠.

 

바로 그렇게 몸에 때가 많으면 피곤해 지고

그래서 몸을 물로 깨끗이 씻으면 시원해 지듯이 말이죠.

 

문제는 여기서 이런 구원의 장치 조차도 결국 의문의 반복에 해당되는 겁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보고 어머니께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사건을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세상에 물위를 걷다니?

세상에서 물 위를 걷어본 사람 나와보라 말이죠.

 

마술쇼는 온 갖 속임수의 장치를 동원해서 물 위를 걷는 트릭을 펼쳐 결과적으로 돈을 번다 말이죠.

 

유리겔라의 초능력이 거짓으로 밝혀지기 까지는 다들 속아서 결국 돈을 주었듯이 말이죠.

달려들어서 투자하는 놈들도 서로 서로 이용해 먹기 위한 차원이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의 시험에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메시아의 조건이다 말이죠.

대중을 사로잡는

 

그래서 어떤 부자가 진짜 초능력을 보여주면 어마어마한 상금을 주겠다고 하니까

한참을 아무도 도전을 하지 않다가

어떤 누구가 나서다가 그 부자가 똑같이 따라하니까 망신만 당하더라 말이죠.

 

아예 돈으로 눌러 버리니까 아무도 사기를 못 치더라 말이죠.

 

그래서 심심해서 부자 그 사람이 직접 사기조작을 실험으로 펼쳤다 말이죠.

호주에서

완전 사람들이 그 실험에 다 낚여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초능력 따위란 없다고 아예 못을 박아 버린 겁니다.

 

이 이야기를 20년 전에 건희아빠를 통해서 들었는데

마침 유튜브에 나오더라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yErYTj755d0

 

 

그런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은 무시 당해야 하는 은사의 차원이다 말이죠.

세 걸음 밖에 안된다 말이죠.

 

3

 

즉 우연이다는 겁니다.

단절

 

그런데 이 세 걸음을 마치 기적이라고 베드로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라 말이죠.

이것이 의문의 반복입니다.

아침을 기다려 아침이 와 본들 또 반복입니다.

또 피곤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아 진짜가 있구나

이런 가짜를 통해서 진짜가 있구나

난 심장이 없어 난 믿음이 없어 
난 가짜일 뿐이야 라고
딴 분을 쳐다 봐야 할 판국이지
자기를 왜 보냐 말이죠. 가짜인데
단절인데

 

그래서 물 위를 걷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풍랑을 일으켜서 빠뜨립니다.

즉 물 위를 걷고 있을때는 주님을 기다리는게 아니다 말이죠.

 

여기에다가 어머니께 탕자의 비유까지 연결 시켰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빨리 물려받은 자기분량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립니다.

탈탈탈 털려야 인간은 떠나고 싶은 겁니다.

 

물 위를 세 걸음 걸었을때에

이것을 이 3초를 영원히 하고 싶다면 예수라는 존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와야 한다 말이죠.

 

이것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식입니다.

그래 봤자 또 피곤해 지고 또 다시 아침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싫어하시는 번제와 제사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증거할려며는 또 물 위를 걸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유리겔라처럼 서로를 이용해 먹는 투자자가 몰려 올 뿐이지

예수님의 자녀는 모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미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서 나타났다 말이죠.

 

주님을 기다리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직접 우리에게 다가오심은 바로 심판입니다.

베드로를 물 위에 빠뜨려 죽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다 죽었을때에 건져내게 되면

베드로가 좀 전까지 자기가 알던 그 예수님이 더 이상 예수님이 아닌 겁니다.

자기가 취사선택해서 믿게 된 그 예수님이 아니라서

도저히 당신 누구인지 알길이 없어서

그냥 그대로 내 뱉게 되는 겁니다.

 

주여 누구세요?

 

부분 기억 상실증일까요?

아니면 완전 기억 상실증일까요?

예수님이 얼마나 낯설었으면 누구세요 라고 할까요?

 

자기가 알던 그 예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내가 알던 예수 라고 메모리 저장 장치에 그 동안 예수님과 나누었던 모든 것을 차곡 차곡 쌓아 올려 놨는데

 

졸지에 다 삭제 되어 탈탈탈 털려 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낯선 예수님 때문에 주여 누구세요 라고 한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를 기다리는 거다 말이죠.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 보다 더 하도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사건을 통해서만 아는 겁니다.

반드시 대조적인 것을 통해서 그 차이로 말이죠.

 

그냥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린다가 아니라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과 대조시켜서 말이죠.

 

마침 찬송가를 어머니께 부르시길래 이 내용의 가사 있더라 말이죠.

 

199

 

1.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후렴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2.

흉악한 죄인 괴수라도 예수는 능히 구원하네

온 몸을 피에 담글 때에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후렴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3.

심판할 때에 모든 백성 행한 일대로 보응받네

주님의 피로 죄 씻으면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후렴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4.

구주의 사랑 크신 은혜 보혈의 능력 의지하세

심판의 불이 내릴 때에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후렴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3절에 4절에 아무도 이 심판의 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말이죠.

의문의 제사로는 주의 진노를 면할수 없다 말이죠.

오로지 유월절 어린양의 피만 보고 넘어간다 말이죠.

 

그러니 주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가 행하는 개념이 아니라, 내가 기다리는게 아니라
주님이 기다리도록 그 마음을 새롭게 그 순간 심어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의 인자하심이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도 나오죠,

 

(130:7, 개역)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130:8, 개역)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이 주의 인자하심이 결국 뭔고 하니 탈탈탈 털리도록 지근 지근 밟아버리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심판 곧 전쟁입니다.


즉 물 위를 걷고 있는 신난 베드로를 확 물에 빠뜨려 죽여버리는 겁니다
.

다 죽여 놓고 인공호흡해서 살려놓는 겁니다.

어차피 살릴 것 왜 죽이실까요?

이게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졸지에 물 위를 걷다가 확 빠져 죽고 다시 되찾는 인공호흡으로 살려놓는 
그 사이에 간극이 생겼고

흠집이 생겼는데 그 틈에서 예수님의 인애와 자비를 보게 하는

탈탈탈 털리는 심판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갈 6:13, 개역)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갈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5, 개역)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갈 6:16, 개역)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갈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것이 주의 인자함이다 말이죠.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졸지에 관계를 맺어버리십니다.
구원자와 죄인의 관계

의사와 환자의 관계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3, 새번역)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호 6:6』

(막 2:17, 새번역)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심 말이죠.
주님의 기다리심 말이죠.

 

맏아들은 탈탈탈 털리는게 없어요

심판이 없어요

그런 사람에 무슨 놈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필요 하겠습니까?

 

환자 한테만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데 뭐가 아쉬워서 병원 못 간다고 안달해 하고
의사가 나를 고쳐주지 않으면 나 죽습니다 라고 하겠냐 말이죠
.

 

탈탈탈 털린 것이 없는데

 

탕자 보세요 주변에서 다 달려들어서 다 털어먹었다 말이죠.

빈 손이 되니 아버지 집의 돼지가 먹는 밥이라도 감지덕지다 라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겁니다.

아니 글쎄 아버지가 탕자 본인 보다 먼저 기다렸다 말이죠.

 

그러니 내가 주를 기다리는게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기다렸다 말이죠

그 주의 기능에 부합된 것이 탕자이다 말이죠.

 

이 주님의 먼저 기다리심에

맏아들은 부합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바리새인)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는 둥 (밧세바를 취해 우리야 장군을 죽인 다윗)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둥 (부자청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는 둥 (베드로)

 

이런 것들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인간의 최선 이다 말이죠.

 

이것은 의문의 제사의 반복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해서

그 상대적인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이루시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비로소 본색이 마귀처럼 드러나는 겁니다.

탕자를 용서한 아버지의 사랑에 반발하는 맏아들처럼

 

졸지에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에

 

완악해 지는 애굽이라는 원수의 세력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숨어있던 눈에 보이지 않던 마귀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귀적인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번제와 제사에

상대적인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그 찬송가에

제가 말씀을 나누고 난 뒤에

195장으로 예배를 마쳤다 말이죠.

 

1.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맑히시는 주의 보혈

성자 예수 그 귀한 피 찬송하고 찬송하세

주님 앞을 멀리 떠나 길을 잃고 헤맬 때에

나의 뒤를 따라오사 친히 구원하셨도다

흰눈보다 더 흰눈보다 더

주의 흘리신 보혈로 희게 씻어주옵소서

 

2. 가시관을 쓰셨으니 피로 얼굴 물 드셨고

십자가의 모진 고통 나를 위해 당하셨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구세주의 구속하심

그 은혜와 크신 사랑 찬송하고 찬송하세

흰눈보다 더 흰눈보다 더

주의 흘리신 보혈로 희게 씻어주옵소서

 

3.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바른 길을 저버리고

여러 가지 죄악으로 주홍같이 되었으니

물같은것 가지고는 씻을 수가 아주 없네

주여 귀한 보배 피로 날 정결케 하옵소서

흰눈보다 더 흰눈보다 더

주의 흘리신 보혈로 희게 씻어주옵소서

아멘

 

3절에 물 같은 것 가지고는 씻을 수가 아주 없다 말이죠.

 

진짜 파수꾼의 노래는 뭐뭐 보다 뭐뭐 이다 라고

대조를 하면서 부른다 말이죠.

 

물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세탁세정제가 바로 주의 흘리신 피 보혈이다 말이죠.

 

흰 눈 보다 더 흴 정도로 피 속에 풍덩 빠져 살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탕자를 기다려서

탕자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 풍덩 빠져 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 효과가 살진소 새 신발 새 옷 금가락지가

내가 주님을 기다린게 아니라

주님이 멀찍이 맨발로 기다려 주심으로 인한 효과 이다는 겁니다.

 

이 차이성이 바로 대조로써 맏아들이 반발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마귀가 이 주님의 흰눈 보다 더 깨끗하게 씻기신 보혈의 효과가

마귀 조차도 미끄러 자빠질 정도로

족히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피를

주님이 먼저 기다려 주심으로 인해

그 기다림이 우리에게 덮쳐져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 보다

물로 씻는 것 보다

 

족히 비교도 안되는

즉 비교한다는 거죠

차이성을 나타내겠다는 거죠.

 

그 차이로써

족히 비교도 안되는 십자가의 피 보혈로 흰 눈 보다 더 희게 씻겨 주시는 겁니다.

 

심판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주의 기다려주심으로 인해

그 심판 속에서 건지셔서

이 땅에서 어서 어서 떠나는 탈출을 시행하시는 겁니다.

 

이 구원 사건을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겁니다.

이미 다 이룬 주의 인자하심은

오로지 여호와의 이름으로써 홀로 이루셨기에

우리는 주를 기다리면서 살 수 밖에 없는 탕자 막사는 죄인으로써

주님의 기다림에 부합되는 주의 인자하심 곧 지근 지근 밟혀 탈탈탈 털리는 삶을 사는 겁니다.

이것이 아무도 주를 기다리지 않는 그 이스라엘 속에서

주님을 기다리게 만드시는

탈탈탈 털려야 주님을 기다리게 하시는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인해

탈탈탈 털려야 비로소 부르짖게 되는 주님만의 아이디어인

구원의 자작극

피의 자작극

십자가의 자작극인

탕자를 사랑하시고

맏아들을 미워하시는

아버지의 인애와 자비인 구원 사건, 십자가의 피 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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