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머릿돌 (시편 138)

 

(138:1, 개역) [다윗의 시]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138:2, 개역)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138:3, 개역)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138:4, 개역)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138:5, 개역)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138:6, 개역)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138:7, 개역)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138:8,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의 오른손의 존재한다는 것은 그 기능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존재성만 인정하고 그 기능을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능은 전쟁 속에서만

심판 속에서만 제대로 그 기능을 보고 누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완악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숩니다 믿~~ 숩 니다

 

그러나 기능을 그들은 오히려 다른 개같은 이방민족보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서 거부합니다.

그러니 사단의 회 이지요.

바로 십자가를 누구 보다 더 가장 적극적으로 훼방합니다.

 

이 하나님의 저주를 왜 퍼트리냐 말이죠.

그들의 시선에서는 그것이 맞다 말이죠.

 

하나님의 축복을 전해야지

왜 하나님의 저주를 퍼트리냐 말이죠.

 

이것이 이들이 말로만 입으로만 축복 축복 하지만 속으로는 저주를 하는 모습이다고

성경이 밝혀버립니다.

 

(78:35, 개역)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78:36, 개역)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78:37, 개역)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

 

(78:36, 새번역)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만 하나님께 아첨하고, 혀로는 하나님을 속일 뿐이었다.

 

 

시편 78편은 항상 스데반이 구약을 정리하듯이

시편 78편 기자 역시 이스라엘 구약 역사를 정리하듯이 펼칩니다.

역시나 스데반처럼 미움 당해 돌삐 맞아 죽을 짖만 하는 거죠.

 

(62:4, 개역)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

 

(3:9, 개역)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3:11, 개역)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아닌 기능

곧 오른손의 기능을 누릴려면

즉 구원을 펼치시는 주의 이름을 누릴려면

정작 이스라엘 본인들이 미끼가 되어야 하는

심판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재판관 노릇을 실컷 하다가

그 자리 위치에서 도리어 꼬라박듯이 밑바닥에 놓여져 재판당하는 미끼 노릇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최고의 자리인 대통령 자리에 있다고

이제는 재판받는 범죄자의 자리에 놓여지게 되니

머리고 뭐고 귀신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과연 수백만원 짜리 머리를 혼자서 해 낼수가 있겠습니까?

멀쩡한 인간의 머리를 할 수 있을까요?

 

다윗이 그랬습니다.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고 법을 지마음대로 휘둘렀다 말이죠.

그런데 그 법이 자기를 향하는 줄 몰랐다 말이죠.

 

그 사람이 아직도 그자리에 있습니까

라고 법을 마음껏 휘둘렀다 말이죠.

그런데 그 법이 자기를 향하는 줄 몰랐다 말이죠.

모든 인간은 그래서 법 아래에 놓여인
죄 아래 갇혀진 바 된 겁니다.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개역)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개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마음껏 휘둘렀다 말이죠.

그런데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긍휼을 불쌍히 여겨주심을

자기한테로 향하고 있는

가난한 자에게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자기한테 향하고 있는

그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등돌리고 돌아서서 근심하며 가는 겁니다.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에게 향하고 있는

운동력있는 날카로운 말씀이였다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조리 다 나를 향하고 있는 내용이다는 겁니다.

남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게 아니라 내가 외친거다 말이죠.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 광야에서 시험한게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고

그 물러간 마귀가 바리새인을 통해서 또 시험하듯이

우리는 매일 매일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말이죠.

심심하면 기도 내용이 다 이런 내용들 뿐이듯이 말이죠.

못 벗어납니다.

안됩니다.

그냥 심판 받아 마땅한 뭘 해도 죄 밖에 안되는 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앞의 글 계시록에서 고맙게도 천사들을 동원시켜서 공사 치시는 겁니다.

 

공사 친다

 

갑자기 이 표현이 얼마나 감사한지

공사치는 겁니다.

 

십자가란 나를 공사 치는거다 말이죠.

 

엉뚱한 것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을

천사들은 그 반대로 엉뚱한 것을 세우는 나를 공사침으로써

내가 버린 쓸모 없다고 버린 그 버린돌을 머릿돌로써

나를 건설하는 겁니다. 머릿돌만 남기고 다 철거시킨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공사 침을 당한 자가 오늘 바로 다윗이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없는

주의 인자하심을 곧 머릿돌

그냥 머릿돌이 아닌

다윗 본인이 무시해서 버린 돌 버린 주의 인자하심을

주님은 다윗에게 공사짓는 겁니다.

다윗을 공사쳐서 다윗을 머릿돌을 세우기 위한 반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반석 곧 영원한 흔들리지 않는 터 이다는 거죠.

 

되도 않는 건설물 곧 돼지 삼형제처럼 나뭇잎으로 또는 모래 위에 집 짓기로 등등은

늑대가 후 불면 다 날라가 버린다 말이죠.

 

그러니 늑대가 와 줘야

이 오른손의 기능

반석 위에 짖는 집의 기능이 드러난다 말이죠.

후 하고 백날 불어보라 말이죠. 날라가는가?

지진이 와도

풍랑이 와도

 

의문의 것들은 다 날라가 버리는데

 

반석 위에 짖는 집은

모래 위에 짖는 집과 족히 비교도 안된다 말이죠.

 

후 하고 백날 불어본들 지 입만 아파요

 

죽음이 묻지 않는다 말이죠.

분명 죽었는데 죽었는데 다시 사니까

죽었다는 소리를 취소 시켜야 하는

굴욕을 오히려 죽었다고 선언한 쪽이 당황해서 부랴 부랴 철회해야할 판국이다 말이죠.

 

이 죽음이 묻지 않는 성전을 주님은 만드시고자 하는데

우리 인간은 자꾸 자기 손으로 지을려고 한다 말이죠.

니가 성전인데 뭘 또 성전을 손으로 짖겠다고 하냐 말이죠.

주님이 든든한 반석으로 만드시고자 하는데

우리는 되도 않는 모래 위에 집을 짖고자

자꾸 달려든다 말이죠.

? 본인이 든든한 반석으로 지음 받기가 싫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우짭니까 이스라엘이란 심판 속에서 그 기능이 나타납니다.

죽음 속에서 그 기능이 나타납니다.

? 죽음이 묻지 않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반석인 베드로가 자기가 반석인줄 알려면 죽음 속으로 막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려고 해 본들 그것 조차도 모호하다 말이죠.

진짜 반석은 자기가 취사선택한 죽음 뛰어들기가 아니라

자기 쪽에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주님이 붙여버리는 겁니다.

마귀 앞에서 반석이고 뭐고 다 모래위에 짖는 집처럼 허망하게 다 무너집니다.

그런데도 반석이라고 내 믿음

베드로 자신의 믿음을 붙인게 아니라

베드로 자신의 숙제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책임 지시겠다고

붙여버린 그 반석의 의미를

베드로에게 누리도록 하시고자

마귀를 붙여버린다 말이죠.

 

그제서야 반석인줄 본인이 의심해놓고서 본인이 누려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은사란 곧 성령의 일이란 본인이 거부한 본인 조차도 무시한 기능이다 말이죠.

본인과 정반대의 성향이다 말이죠.

 

가장 겁쟁이 기드온에게 용사 라는 기능을 부여했다 말이죠.

본인도 무시한다 말이죠.

 

나를 성전 삼는 것에

내가 교회 세워 드릴께요

그 대신 날 성전 삼지 마세요 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 짖는 것에 집착한다 말이죠.

하나님이 떠돌이처럼 텐트 쳤다 폈다

이거 뭐 나그네도 아니고

영원한 집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실상은 본인이 그렇게 되는 것이 겁이 난 거다 말이죠.

본인이 이스라엘로부터 왕따 당하는 떠돌이 신세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은사인데 우짭니까?

 

그 은사를 무시하고 성전을 짖겠다고

영원히 계시라고 하는 가운데

 

주님은 정작 사람의 손으로 짖는 성전이 아닌

다윗 너

너 냄새 난다고 너

 

다윗 너를 성전 삼겠다고 하니까

다윗 자기 꼬라지를 아니까

싫다 라고 한다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인 믿음이다 말이죠.

믿음은 비밀입니다.

다들 믿는 믿음은 전혀 비밀 스럽지 않아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래서 자기 힘으로 열국의 아버지 숙제 풀기를 하다가

실패 땡 탈락 당합니다.

 

그 실패 땡 탈락한 아브라함을 가지고

100세 넘으면 땡 탈락

100세 전에 낳은 자식으로 열국의 아버지 숙제 하기를

100세 땡 탈락 실패한 그것으로 열국의 아버지 되게 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숙제를 펼치신다 말이죠.

 

그것이 약속의 자녀 이다 말이죠.

예수님 살아 생전에 제자삼기 12제자 다 도망치고 하나 수제자는 세 번씩이나 배신하고

예수 땡 탈락 실패 했을때에

그 실패로 새이스라엘 약속의 자녀를 생산해 버리는 겁니다.

아니 죽은 몸에서 어떻게? 새이스라엘이 나오냐 말이죠.

젖을 물리지 못한 어미가

수태치 못한 어미가

 

그렇지 않은 어미 보다 더 많은 자식을 낳으니

오히려 순풍 순풍 어미의 자식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수태치 못한 어미의 자식들은 죽음이 묻지를 않으니

이런 비밀이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자 그래서 오른손은 죽음 속에서 건지시는 기능을 발휘하고자

인간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

바로 이것을 반대했던 다윗 본인을 성전으로 삼아버리니

 

구체적 보편적 성전이 되는 겁니다.

 

반대자였는데

인간의 손으로 짖는 성전만을 고수했는데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은 무시했는데

그 무시했던 당사자가

그 당사자를 그 사람 자체를 성전으로 삼아버리니

구체적 보편적 반석

풍랑이 일어도

지진이 나도

심판이 덮쳐도

끄떡 없는 든든하기 짝이 없는 반석이다 말이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되더라 말이죠.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의 손으로 짖는 교회가 아니라

베드로를 교회로 삼는 겁니다.

 

이것이 찬양하는 자와

찬양자로 태어난 자와의 차이점이다 말이죠.

 

그러니 오늘 시편 138편을 외우는 유대인과 곧 예루살렘 성전을 46동안 짖는 자와

나를 시편 138편의 영원한 성전으로 삼아버리는 참성전 되신 예수님과의 차이점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 참성전되신 머릿돌은 그냥 머릿돌이 아니라

버림 받았기에 머릿돌이 되는 겁니다.

버림 받지 않은 머릿돌은 머릿돌이 아닌거죠.

구채적 보편적 머릿돌이다는 겁니다.

 

내가 버렸는데 내가 나를 머리의 자리에서 이 분이 내 머리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회개의 기능으로써 머릿돌이다는 겁니다.

분명 내 믿음이 머리였는데 곧 내가 머리였는데

그래서 그 분이 전혀 머리 같아 보이지 않아서

흠모할 모양이 없고

고운 모양도 없고

한마디로 무시할 수밖에 없는 모습 뿐이였다 말이죠.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아서

내 믿음으로 내 머리 자리를 채워서

그래서 그 분을 쓸모 없다고 버렸는데

내 손으로 버린 그 분을 내 머리의 자리에 놓을 정도면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서 그러거냐 말이죠.

 

그 사이 간극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

곧 하나님의 비밀이

곧 죄인과 의사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심어버리니까

구체적 보편적 성전이 탄생하는 겁니다.

 

자 이럴때만 이런 표현을 쓸수 있다 말이죠.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뉘게 나타났느뇨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들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타났다 말이죠.

아무리 버려도

아무리 죽여도

아무리 거부해도

우뚝 또렷하게 밝히 명료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이것이 오른 손입니다.

 

오른손의 기능을 우리는 뿌리쳤고

그 대신 나의 손으로 짖는 것을 내세우다 보니

무시당한 버림받은 오른손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의 기능은 아무도 말릴수가 없이

그 기능을 당당히 다 해내더라 말이죠.

기능 당위 아니 할 수가 없는

이미 완료된 채로 쳐들어 오는 것이 기능이다 말이죠.

존재가 아니라 기능

마땅한 기능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기능

존재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기능

 

그러니 다윗은 성전 존재를 만들지 않게 되고

다윗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주어진 기능인

성전의 기능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는 그 기능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오늘 시편 138편에 주의 인자하심을 외치는 겁니다.

 

반면에 사단의 회인 유대인의 성전 곧 존재론적인 성전은

주의 인자하심을 외치는게 아니라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돈버는 장사

곧 강도의 소굴만 반복할 뿐이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 성당 절간 사원 모조리 이 의문의 짖만 반복할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비밀을 담은 참성전을 그들은 거부하는 겁니다.

 

죄인과 의사로서의 관계인 성전을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히 담겨진 성전을 말이죠.

마치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처럼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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