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시편 139편)

 


(
13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139:2, 개역)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139:3, 개역)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139:4, 개역)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5, 개역)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139:6, 개역)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39:7, 개역)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139:8, 개역)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139:9, 개역)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39:10, 개역)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39:11, 개역)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39:12, 개역)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39:13, 개역)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139:14, 개역)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39:15, 개역)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139:16, 개역)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39:17,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39:18, 개역)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139:19, 개역)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139:20, 개역)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139:21,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139:22, 개역)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139:23, 개역)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139:24, 개역)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오늘 제목을 신약의 사건 내용으로 적어봤습니다
.

시편 139편을 보니 그 사건이 생각이 나서요.

한 쪽 강도가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게

주님에게 요청합니다.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마당에

그런 요청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말이죠.

그것도 예수님이 살아 계신 와중에 요청을 해도

당장 제자들이 달려들어서 차단 시키고도 남을 요청을

그 불가능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죽는 마당에

자기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이것은 마치 주여 저 아시지요? 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인 거죠.

 

또 베드로가 참으로 뻔뻔스럽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서 3초도 되지 않아

입에 침도 안바르고 거짓말처럼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하는 겁니다.

 

아마 오늘날 교회가 이런 고백을 하는 한 쪽 강도와 베드로

오늘 다윗 그냥 다윗이 아닌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이름없는 아이까지 죽음으로 몰아버린 그 다윗을

당연히 교회는 쫏아내고도 남을 껍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용어가 그래서 나왔다 말이죠.

 

즉 때려죽어도 이 구원받은 강도의 고백에 동참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에는

같은 고백인데도 불구하고 반대는 못하겠고 아무튼 어물쩡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공격을 받을까봐 미리 방어막을 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교리이고 신학이 되어버린 겁니다.

 

또 다윗은 어떻고요?

 

아무튼 이 세 인물 한 쪽 강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밧세바 취하고 남편 우리야 죽이고 그 가정의 아이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다윗

 

이 세 명의 고백이 바로

주여 저 아시지요? 라는 겁니다.

 

이런 와중에 이런 고백이 과연 나올까요?

 

진짜 교회라면 즉 성도라면 나옵니다

그 성도 안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짜 교회 즉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종교집단

곧 교인들 또는 신념가들 에게서는 나올수가 없는 고백입니다.

 

주님 저 아시지요? 라는 고백을 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보라는 식입니다.

완전 불교와 똑같지요

 

성도란 자기 삶을 보여주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 예수님이 착하고 선한 분이 아니다 말이죠.

 

앞에 계시록 11장의 글을 올렸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착함과 선함 즉 종교에서 말하는 선을 주장하는 분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십자가의 저주가 막힌 담을 헐어버림으로써

다 이루었기에 그 십자가의 영광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인간들의 자존감과 충돌하는 즉 전쟁하는 방식으로써 십자가를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만이 고난 속에 들어가는데 한때 두때 반때 짖밟힌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3일이라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간극이다 곧 주의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결국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오직 주의 인자하심 뿐이다 말이죠.

그 주의 인자하심을 받은 자는

참으로 뻔뻔스럽기 그지 없이

주여 저 아시지요? 라고 고백

그 불가능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한때 두때 반때 라는 간극에서 나오는

주의 인자하심에서 나오는 고백이기에

성령의 고백으로 하는 고백이기에

 

주여 저 아시지요? 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가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선하게 살고 착하게 살아서 예수님을 보여주는게 아닙니다.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토색하는 세리 매국노의 삶을 살지 않아서

하나님께 감사해서 예수님을 보여주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의 모임이 그거 달인들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것은 고난입니다.

고난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그런게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안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세상으로부터 받는 미움이다 말이죠.

 

여기에 예수님이 그럴줄 알고 뛰어드시는 겁니다.

어떻게?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나를 미워함의 까닭이다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나를 아시는 것과

내가 내 삶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예수님만을 보여주기 위한 삶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자기 삶이 없어요.

 

그러니 구원받은 강도 그리고 베드로 그리고 다윗은

그야말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자들인 겁니다.

당연히 사단의 회인 유대인이 무시를 했듯이

오늘날도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안 무시한다굽쇼? 오히려 세상 보다 더 심하게 무시합니다.

그것이 조직을 유지하는 방식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바로 환자가 바로 의사를 찾거든요.

주여 저 아시지요? 누군데? 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입니다.

아 그래? 나의 환자구나

잘 알지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거든

나를 나타내라고

너는 나를 못 나타내지만

성령을 심어서 나를 나타내라고 했거든

 

이것이 오늘 나오는 주여 저 아시지요 라는 겁니다.

 

안다 라는 야다 라는 뜻은 심지어 성적인 관계까지 의미를 하는데

 

분명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모른다 즉 알지 못한다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임신을 하겠냐 말이죠.

 

이 부분을 제가 설명하는데 있어서

심지어 어떤 교인은 이런 의미로 공격하더라 말이죠.

그럼 성령이 성추행했느냐 라는 식으로 말이죠.

 

즉 서로 서로 존재로 본 겁니다.

성령도 존재 마리아 라는 인간도 존재로 본거다 말이죠.

육으로 봤다 말이죠.

존재 이전의 기능 개념을 아무리 설명해본들 이미 도덕과 윤리적으로

말도 안된다고 그러니 그 뒤의 말은 들어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그래서 얼마나 교회에서 쫏아낼려고 하던지

그러다가 본인이 도리어 쫏겨나듯이 나가버렸다 말이죠.

얼마나 집착을 하던지 말이죠.

 

앞의 서두에서도 언급한 베드로를 하필이면 교인 가족 중에 카톨릭 신자가 저의 복음증거를 듣고

왜 베드로를 폄하 하느냐 라고

베드로는 그런 사람 아니다 라고

마치 교리에 세뇌당한 사람처럼 무시하더라 말이죠.

 

즉 죄인 베드로가 아니라 의인 베드로로 천주교에서 세뇌 당하다가 저의 말을 들으니

화가나거든요.

 

저는 베드로는 폄하한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죄인이라는 기능을 언급한 것인데

기능이 아닌 존재로 보니

그 높으신 양반을 니가 뭔데 깔 보냐 라는 식으로

괜히 개신교 교회에 와서

목사나 장로나 그런 사람에게는 안 덤벼요

꼭 제일 만만한 저에게 시비를 걸더라 말이죠.

 

그러다가 도리어 본인이 씩씩 거리면서 화내고 가더라 말이죠.

 

자 이런 사고방식이

개신교에서도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둥 취급하는데 있어서

천주교의 이단성과 다를바 없다 말이죠.

 

구원이 얼마나 어마 어마 한데

부끄러운 구원이 어디 있고 자랑스러운 구원이 어디 있냐 말이죠.

마치 옆에서 비아냥 거리는 다른 옆의 강도와 똑같더라 말이죠.

 

결국 본인들이 구원을 부끄러워 하더라 말이죠.

 

당당하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말 못하는 교회가

도대체 그거 아니면 무엇으로 교회를 채울까요?

 

착함 선함 도덕성

그거 부자청년이 그러다가 지옥갔는데? 근심하고 돌아섰는데?

왜 그 부자청년은 율법을 어릴적부터 다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주여 저 아시지요? 라는 소리를 왜 못할까요?

 

드라마 그 유명한 파리의 연인

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하냐 말이죠.

 

당신은 나의 남자요? 라고 애모의 가사처럼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왜 말을 못하냐 말이죠.

 

평생을 강도로 살아왔다고

예수님을 만나고도 그 말을 못할 이유가 있으면 말해 보세요

 

뭐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에라이 마귀새끼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말 못한 이유가 있으면 말해 보라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 곧 사단의 회나 오늘날 교회를 보면

그 이유를 억지로 라도 만들어내어서 자꾸 조직을 보존할려고 해요

교회 질서가 개판 되면 안된다는 식이다 말이죠.

 

마치 미국의 몰몬교 였던가? 1년 줄 딱 하루만 죄인되는 막살기를 허용하는 그 종파가 뭐였죠?

그런 이단과 다를바 없어요

세상과 단절해서

세속의 문물을 거부하고

전통방식으로써

전기로 깔지않고

순수한 노동으로만 사는

수녀회 비스무리하게 말이죠.

 

그런다고 의인 됩니까?

그런 식이 오늘날 성화론 아니냐 말이죠.

결국 뿌리는 같은 사고방식이거든요.

존재

 

그러나 이런 고백은 존재에서 안 나옵니다.

기능에서만 나온다 말이죠.

 

주여 저 아시지요? 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말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관계라고 한다 말이죠.

야다

안다 라는 겁니다.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아는

 

그래서 거짓목자의 주장이 왜 거짓인지 조차도 안다 말이죠.

? 목자의 음성이 아니니까 말이죠.

 

음성 소리 복음 노래 자체가 관계성이라는 기능에서 아는 것이지

존재로서 아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이 베드로 다윗 구원받은 강도와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진 존재들과의 차이성에서

 

예를들면 부자청년 등등 탕자의 형 맏아들 또는 실로암 소경 너는 예수제자냐 난 모세제자야 라고 했던 바리새인 등등의 특징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말을 못해요 말을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내 남자가 말을 못해요 말을

 

그것은 기능 곧 태어나기도 전 부터의 기능인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죠.

 

구약의 이스라엘 개념이 그렇거든요.

이스라엘은 육의 개념이 아닙니다.

영의 개념이다 말이죠.

없는 족속이예요

다른 민족은 육에서 나서 육으로 돌아가지만

이스라엘은 육에서 나지 않았다 말이죠.

다 할례 곧 단절에서 태어난

성령으로 난 자들이다 말이죠.

 

마리아 만을 특별히 높여서 동정녀 라꼬

예수님의 어머니 라고 높이는 것은

천주교의 교리와 뭐 다르냐 말이죠.

 

마리아는 죄인이다 말이죠.

기능입니다.

존재가 아니라

즉 이스라엘이다 말이죠.

 

그런데 존재로 보니

육으로 보니

계급을 짖는 겁니다.

아니 계급을 짖는 양반들이 그래서 율법대로 돌삐 쳐죽일려고 했냐 말이죠.

 

제가 마리아는 예수님의 딸입니다.

딸의 몸에서 태어났다 말이죠.

? 마리아를 구원할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면 마리아도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특별대우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자꾸 존재로 보니

육으로 보니

이 말의 취지를 육으로 계산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저 변태적인 것으로 밖에 안보이더라 말이죠.

그러니 막 째려봐요

어떻게 해서든 쫏아낼려고 하다가

도리어 본인이 걸려넘어지더라 말이죠.

 

이런게 성경에도 나옵니다.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 결국 천국에 가면 도대체 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되냐 말이죠.

그러니 천국이 개판 될게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잔머리 꾀를 쓰는 것이 사두개인이 부활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은 부활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거 하나 때문에 부활교리가 주는 엄청난 많은 혜택을 포기할수 없기 때문에

그런 논리적인 오점이 있어도 그냥 밀어붙이더라 말이죠.

 

이것이 존재들끼리의 잔머리입니다.

유익을 따져서 빼고 넣고 한다 말이죠.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존재로 안 보고 기능으로 본다 말이죠.

남자 여자가 라는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남편 개념이 없어요.

모조리 다 예수님의 아내만 있는 것이 천국이다 말이죠.

 

천국에서의 아내란 여자 라는 존재개념이 아니라

머리를 외치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즉 주여 저 아시지요 라고 말하는 자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외치는 기능이 바로 교회 라는 거죠.

 

머리와 몸으로 표현된 기능의 관계성이요

 

(1:18, 개역)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목자와 양으로 표현된 기능이고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포도나무요 그의 가리로 표현된 기능이다 말이죠.

 

(15:5, 개역)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육의 세계의 결혼은 서로의 자존감 자기존재감을 위한 결혼이다 말이죠.

그래서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써 달라고 요구를 하는 겁니다.

걸리적 거리거든요.

실컷 이용해 먹다가 더 이상 단물 빠지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말이죠.

 

(5:31, 개역)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5:32,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깊숙이 우리의 깊은 죄악까지 파고들어서 들추어내시는 전쟁이다 말이죠.

 

이 전쟁에서 구원받은자가 다윗 베드로 구원받은 강도 이기 때문에

 

감히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이 사람이 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내 남자입니다.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외친다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데요?

 

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니 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거든요.

또 성도는 놀랍게도 이것도 압니다.

 

왜 너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냐 라고 따지는 자가 바로 마귀라는 것을

예수님이 따지지도 않는 것을

주서담아서 정작 마귀가 따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이거든요.

 

그러니 당당하게 마귀보란 듯이 주님 저 아시지요? 라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외치는 겁니다.

 

사단의 회인 자칭 유대인 모임에서는 때려죽어도 나올수 없는 고백입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에게서는 때려죽어도 안나오는 고백입니다.

만약 고백해 버리면 사도바울처럼 와르를 무너져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기뻐함으로

그 동안 쌓아올린 자기 의를 배설물처럼 여길테니 말이죠.

그 자랑스럽고 향기나는 성화된 의로운 행위들을 역겨운 똥냄새 나는 것으로 취급할 수가 있을까요?

더럽기 짝이 없는 똥 덩 어 리 라고

그렇게 귀하디 귀하게 높이 쌓아올린 기념비를 냅따 깨부술수 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때려죽어도 나올수 없는 고백입니다.

성령으로 인한 고백이니

인간은 불가능하다 말이죠.

 

뭘 잘했다고 주님 저 아시지요?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하겠냐 말이죠.

 

개 죽음 당하는데

저들에게 말이죠.

그런 고백을 못하는 저들에게 말이죠.

 

이래서 간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또 벌어지는 겁니다.

한때 두때 반때 라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세가지 물증의 간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맞네 맞아 죄인맞네

거봐 도장 니꺼지?

맞네

도장끈 니꺼지?

맞어

지팡이 니꺼지?

죄인 맞네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이스라엘 니꺼지?

거봐 맞네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스라엘 니꺼지?

거봐 맞잖아

만나를 담은 항아리! 이스라엘 니꺼지?

죄인 맞네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하루에 한 바퀴

마지막 7일째 7바퀴 야호 죄용서 받았네 앗싸라 비야 뿌뿌뿌 나팔 불었는데

전쟁에서 승리

 

이 무슨 희한한 전쟁이냐 말이죠.

 

한때 두때 반때 그래서 죽었다 말이죠.

그런데 살아났뿟고

죽었으니 실패인데 아무런 연고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승리를 했뿠다 말이죠.

 

기능이거든요.

이미 생명책 곧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은 주의 인자하심 곧 세가지 물증을 잡은

십자가의 승리만 기록이 되어 있기에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십자가의 승리만 기록이 되었다 말이죠.

 

그러니 이 십자가의 승리를 성도에게 채우시니까

성도는 십자가의 용서만을 외칠 수밖에 없기에

 

주여 저 아시지요?

라고 뻔뻔하게 외치는 겁니다.

? 십자가의 승리만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를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지혜인데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기에

 

이 십자가만 외치도록 되어 있어서 말이죠.

 

그러니 오늘 시편 139편을 보면

꼭 한 쪽 구원받은 강도의 고백처럼

다윗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지 3초도 되지 않아 바로 말을 바꾸면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시지요 라고 세 번 외치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다윗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 개인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고

교회의 고백이기에

 

주님 저 아시지요 라고 외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흐릿하고 모호하게 아는 자가 아니라

또렷하게 아는 자로써 외치는

성령이 임해서 외치는 고백이기에

 

이 고백에 마귀는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과연 꾀겠냐 말이죠.

어딜 감히 되도 않는 흐릿하고 모호한 것으로

의문의 반복 뿐인 끝도 마침도 없는 밑빠진 장독대의 물붓기 식으로

번제와 제사를 감히 주장하냐 말이죠.

 

인애와 자비가 이렇게 또렷한데

 

뭐 막살면 안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왜 막사냐 말이죠.

주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막사는 인간 뿐이다 말이죠.

뭘 해도 죄 밖에 안짖는데 말이죠.

왜 예수님의 시선을 거부하고

자꾸 가능성을 주장하냐 말이죠.

 

그것은 주님 저 아시지요 라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는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말이죠.

자꾸 쪽팔리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마귀에게 속아서

거짓목자들에게 속아서 뭘 갖출려고 하니

그런 조건 갖추기 곧 막살지 않는 조건 갖출려고 하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까짓 의문의 모호한 흐릿한 것을 들이댄다는 자체가

꾈려고 하는 거짓영을 받은 자이다는 겁니다.

 

오늘 다윗 보세요

뭘 잘했다고 주여 저 아시지요? 라고 외치냐 말이죠.

그 사람 다윗 존재가 아니라

 

죄인이라는 기능이기에

이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다 이 예수님이 내 신랑이다 이 예수님이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예수님이 더 잘아신다 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말을

 

그것도 원수들 앞에서 말이죠.

원수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거든요.

성화론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거든요.

사단의 회인 유대인이 가장 듣기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아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같은 운명이 되는 겁니다.

죽임 당하는 어린양께서 미리 딱은 그 길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간극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얼마나 인자하셨으면 우리를 세 번 죽이는 길을 미리 딱아 놓으셨겠냐 말이죠.

 

얼마나 나를 잘 아시면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

곧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제가 생각해도 얼마나 뻔뻔한지

다들 마귀 라고 달려드는 판국에 말이죠 ㅋㅋㅋㅋ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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