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수 없는 새노래를 부르는 어린양에게 속한 십사만사천명 (14: 1- 5)

 

불가능한 새 노래가 임한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 144000

 


(
14:1, 개역)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14:2, 개역)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14:3, 개역)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4:4, 개역)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14:5, 개역)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짐승의 표를 받은자의 상대적인 의미로

오늘 본문 계시록 14장에서는 어린양에 속한 자가 언급됩니다.

마치 맏아들의 상대적인 의미로 탕자가 언급이 되거나

독사의 자식인 바리새인들이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놀 때 상대적인 의미로

저들 스스로도 상대적인 의미로 죄인 중의 괴수인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니까

저주를 받아도 날 때부터

어릴적부터 단 한번도 눈떠 본적이 없는

저주 속에서만 평생을 산 실로암 소경을 상대적인 의미로 들고 나왔듯이

실로암 소경이 언급 되듯이 말이죠.

 

즉 누가 봐도 거룩한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런 시선을 놀랍게도 실제로 양탈쓴무리의 주장에서 본적이 있었는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말씀을

어쩌면 바리새인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강요 하더라 말이죠.

곧 실천입니다.

교리 플러스 실천 이것이 불교의 핵심인데

모든 종교는 짐승이거든요

곧 짐승의 표 666를 받은 거죠.

 

그러니 누가 봐도 거룩한 자가 아닌 자를 가지고서

그것도 날 때부터 죄인 중의 괴수

그 어떤 이유로도 의인이 될 가능성이 단 1도 없는

그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서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늘 나오는 배울수 없는 노래

곧 새노래를 부르는 자 144000명이라는

하나에서 나온 여럿인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금가락지요

그것이 바로 어린양에 속한자 그 하나 곧 예수님이라는 하나에서 나온

새이스라엘로써 새노래를 부르는 자입니다.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43:21, 새번역)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벧전 2:9, 새번역)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 43:20; 19:5-6; 43:21

(43:21, 공동)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43:21, 쉬운)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43:21, 킹흠정)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그들이 내 찬양을 전하리로다.

(43:21, 현대인) 네가 나를 위해 이스라엘을 세웠으니 이 백성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43:21, 현대어) 그러면 내가 만든 새 백성 이스라엘이 이 일을 계속 이야기하면서 나를 찬양할 것이다.'

 

 

행함 곧 역사란 시간을 빼버리면 졸지에 원인을 만들어 낼수가 없게 됩니다.

그 원인이란 존재 이거든요

나 라는 자아입니다.

결국 말씀도 내 하기 나름이 되는 겁니다.

말씀도 내가 믿기에 따라 달라진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는 겁니다.

 

웃끼는게 말씀을 안 읽으면

말씀과 멀어지게 되고

말씀을 읽으면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만약 그런 주장이 맞다면

말씀은 인간의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 여부에 달린 운명을 가진 말씀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말씀은 인간을 상대한 적이 없다니깐요

그런데 자아는 곧 존재는 자꾸 말씀을 상대할려고 하다 보니

자꾸 말씀을 대상물로 삼고자 하는 겁니다.

도대체 말씀이 강아지 입니까?

다마고치 맞나?

 

휴먼 로봇 제로미가 수리 서비스 종료하게 되니까

더 이상 고장난 것을 고칠수 없게 되니

장례식을 치르는 겁니다.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불교가 바로 짐승이다는 겁니다.

사실상 모든 종교가 다 그렇거든요,

죽은 자는 죽은자에게 맡긴다 말이죠,

 

감정이입을 해서 일본에서 로봇 강아지 장례식 뿐만 아니라 매년 제사를 치르더라 말이죠.

 

이제는 컴퓨터 OS 프로그램과 결혼하는 시대가 되었다 말이죠.

영화 허 her 2013 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나오듯이 말이죠.

 

베개랑 결혼 하는 자도 있고요

일본에서 그랬는데

이제는 중국에서도 나타났구요

한국에서도 이경규가 진행했었던 화성인 바이러스에서 베개랑 연인인 사람도 나왔구요

 

서양의 어떤 여성은 여군 출신인데

군용 칼

각개 전투할 때 백병전에서 칼 검을 총에 착검해서 적군을 찌를 때 사용하는데

그 칼이랑 결혼을 했다는 여군 출신의 여성이 칼이랑 결혼했다는 겁니다.

물론 이혼도 쉬워서 다시 총이랑 결혼하고

심지어 프랑스 에펠탑과 결혼하기도 했다 라는 뉴스를 접하기도 했습니다.

즉 이렇게 대상물과 결혼하기 쉽다는 것은

곧 이혼하기도 쉬운거다 말이죠.

대상화 곧 대상물로 삼았다 또는 선택했다는 말은 언제든지 버릴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들의 특징이 마치 실로암 소경과 같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가장 정상적이다 라고 우기는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말씀을 대상으로 해서 자기를 투영 투사하여서

말씀을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즉 섬기는 자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대상물로 섬기겠다고 하는 겁니다.

섬김을 받아야 하는데

770번 용서함을 도리어 받아야 하는데

직접 남을 7번 섬기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모호한 것인데

의문의 반복이요 함량미달인 666인데

 

완료로 충만해서 넘치는 144000에 속하지 못하는 것은

섬기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접

베개에 자신을 투영하고

로봇 강아지 또는 다마고치에게 자신을 투영하듯이

감정이입을 해서 결혼까지 하듯이

 

이게 바리새인이 말씀을 대상물로 삼는 짖이다는 겁니다.

자유의지 이런게 다 짐승의 사고방식이다는 거죠.

이게 종교입니다. 짐승의 수 666을 받은 자입니다.

 

자기자신에게 미쳐 있기에 좋다 싶은 것은 다 끌어들이는 겁니다.

말씀도 십자가도 예수님도 예외 없이 말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이 곧 유대인이 그렇게 하다가

시게 디인 겁니다.

사투리인데 아주 세게 불에 데여 화상을 입듯이

십자가를 그렇게 대상화 하다가, 대상물로 삼다가

디이다 보니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로만 남아버리는 겁니다.

멋도 모르고 끌어당기다가 디이는 겁니다.

 

방금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상이란 입이 있는데 말을 못하고

귀가 있는데 듣지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못 보는 겁니다.

과거는 나무조각 돌조각이였는데

그것이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신이기에

만들지 말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호세아 시대로 가면 이것이 음란한 마음으로 인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우상숭배로 표현 되어 있고

 

(1:2, 개역)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2:20, 개역)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5:4, 개역)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5:6, 개역)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6:3,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또 이것이 신약으로 가면 탐심 곧 욕심이 우상숭배로써

땅의 것을 찾는 것 즉 상대적으로 위의 것을 찾이 않는 것이 우상숭배로

그 의미가 깊어지는 겁니다.

 

(3:5, 개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3:2, 개역)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3, 개역)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3:4, 개역)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5, 개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6, 개역)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3:7, 개역)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3:8, 개역)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3:9, 개역)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3:10, 개역)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3:11, 개역)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3:12,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3:13, 개역)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3:14, 개역)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3:15, 개역)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호세아서에서 나온 이 우상숭배는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과 음녀에서의 음녀 개념과도 연결 됩니다.

 

 

결국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기에

내가 믿는다는 탐심으로 나의 믿음의 대상물이 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결국 모조리 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만 달려있기에

주님의 대상물이 되느냐에 달려있지

내 스스로가 음란 개념 또는 탐심 또는 우상개념을 설정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해결한 자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리새인 인데 도리어 이런 자들이 바로 음란한 자요 우상숭배자인

독사의 자식들이다는 겁니다.

아니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데? 말이죠.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우상의 특징이 우상은 다리가 있어도 나에게 못 옵니다.

우상의 대상물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약속도 못 지키는 겁니다.

우상이 나를 섬길 줄 모르더라 말이죠. 발이 있어도 말이죠.

그러니 나를 섬기지를 않습니다.

우상으로부터 섬김을 받을수가 없습니다. 다가오지를 못하니까요

그래서 그 빈자리를 꽉꽉채워 결핍을 채우는 방식이 바로

결국 인간이 모조리 다 다가가는 겁니다. 우상에게 말이죠.

우상을 섬기고 말이죠.

이것이 성경에서는 지난 주에 말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되는 겁니다.

물론 상대적인 의미는 성령의 전 이구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바리새인에게 속지 마세요

그들이 가장 우상숭배자 이다는 소리를 하고픈 겁니다.

 

그들은 음란과 토색치 않음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하고 있다 말이죠.

오히려 토색하는 세리 매국노를 정죄하고 있다 말이죠.

그게 음란이예요

그게 우상 숭배입니다.

성전에서 십의 이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양탈무리처럼 거룩한 삶 살고자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

이것이 종교입니다. 곧 짐승의 표를 받은 거다 말이죠.

사람의 수 666 미흡한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이 음란한 겁니다.

완전 반대로 알고 있었죠?

한달전에 질문하신 분도 그렇게 알았던 겁니다.

 

아니 왜?

 

결국 음란이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겁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탕자를 용서하는 인애와 자비를 모르고

오로지 번제와 제사라는 의문의 미흡한 함량미달인 666만 채웠던 겁니다.

 

그래서 맏아들에 속한 자의 특징은 자꾸 막살면 안된다 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탕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냥 생긴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뭘 믿고 말이죠?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뻔뻔스럽게 막사는 것일까요?

그런데 새노래가 놀랍게도 때려죽어도 맏아들에게는 나오질 않고

탕자에게서는 나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원인 없는 결과이니까 말이죠.

맏아들이 배울수 없는 새노래이기에

자꾸 원인 있는 노래로 만들려고 하니까

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유대인 보다 여호와를 잘 아는 민족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이 아버지를 잘 아는 자녀 아니겠습니까?

탕자 저런 놈 곧 개같은 이방인놈은 아버지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말이죠.

 

그런데 우찌된 심판인지 예수님으로부터 들통났어요

맏아들도 유대인도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우상숭배자 라는 것이 말이죠.

오로지 탐심 욕심만 가득한 자였다는 것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켜온 부자청년이 들통났듯이 말이죠.

 

그들은 여호와가 누구인지 가장 모르는 민족으로 말이죠.

결국 소경이 소경을 소경의 길로 인도한 바리새인이기에

독사의 자식으로 사단의 회로 들통난 겁니다.

 

지옥 길로 안내한 자들이다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천국을 외치는 교회사람들이

가장 천국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로 들통난 거다 말이죠.

하나님 나라 운동했던 가룟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

 

음란한 자이다는 겁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음란한 짖을 단 한번도 하지 않고

경건한 삶은 사는 자들로써 주변인으로부터 칭찬받는 삶만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은 그들을 음란하다고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성화론자들 보세요 개혁주의자들 보세요

음란 하던가요?

그런데 우상숭배자라고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아니 왜?

 

바리새인은 돈만 생기면 선교기금으로만 오로지 사용했다 말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돈을 사랑하는 자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이유요?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에 말이죠.

 

아니 왜 바리새인을 돈을 사랑하는 자로 취급해 버렸을까요?

아니 왜 바리새인들은 돈만 생기면 남을 7번 용서하고자 선교기금으로 사용했을까요?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내 곧 사랑하는 신부가 아니라

가정부였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월급을 주어야 하는 노동의 관계 주종의 관계였다는 겁니다.

 

안다 라는 표현은 남녀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야다 라는 표현인데

신랑과 신부의 관계인 결혼의 의미가 아니다는 것이 저들의 말씀 지키기 라는 겁니다.

 

성경 어디에서 지킬 말씀이 없어요.

누릴 말씀 뿐입니다.

만약 성경을 보고 지킨다면

마귀가 그렇게 한다 말이죠.

가정부처럼 월급 타기 위해서 일해주듯이 말이죠.

 

그런데 신랑의 신부인 사랑하는 아내는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 하나 없이 누리기 바쁩니다.

 

누가 이런 이상한 마귀 운동을 펼치던데

부부 십계명이라고

그건 부부 관계가 아니라 노사 십계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이 새노래를 부를수가 없게 되는 거죠.

 

그럼 새노래는 뭡니까?

 

먼저 그럼 오늘 나오는 144천 명의 의미는

어린양에게 속했다는 의미로써

하나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하나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개별적이지요

사적입니다.

자기 하기 나름이기에

자기자신의 실천력에 따라서

하나에 가까워지는 인간 쪽에서 출발하는 우상조각에 다가가는 식과 같은 겁니다.

이게 짐승 표인 종교입니다.

 

위에서 적었던 문장 다시 적어볼께요

 

즉 섬기는 자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대상물로 섬기겠다고 하는 겁니다.

섬김을 받아야 하는데

770번 용서함을 도리어 받아야 하는데

직접 남을 7번 섬기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모호한 것인데

의문의 반복이요 함량미달인 666이기에 확정적입니다.

짐승의 뿔처럼 말이죠.

 

그런데 144천은 자신들이 하나도 거룩하지 않는데

어린양이 거룩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 하나에서 툭 하고 건드리면 거룩한 새이스라엘이 새노래를 부르면서

144천명이 나오는 겁니다.

 

144천명의 각자의 말씀 실천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단 한 명인 7 되신 안식의 주인이신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서 나오는 것이 십사만 사천이다는 겁니다. 집단적이지 개인적인 사적인게 단 하나도 없어요

개인 구원이 없는 이유입니다. 집단 구원 뿐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144천명 속에 속할수 있겠냐 라고

그 방법을 배워 볼려고 밤에 몰래 예수님께 다가와도

 

이 새노래를 배울 방법이 없는 겁니다.

단절이다 말이죠

임의로 부는 성령의 전이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원인이 없다는 말을

자꾸 원인을 어떻게 만들고 구성하느냐에만 달려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은 헌 노래이지 새노래가 아니거든요

 

그럼 새노래는 뭔가?

 

바로 시편입니다.

 

(대상 25:1, 새번역) 다윗과 군대 지도자들은,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을 뽑아 세워, 수금과 거문고와 심벌즈로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직무를 맡겼다. 이 직무를 맡은 사람의 수는 다음과 같다.

(대상 25:2, 새번역) 아삽의 아들은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이다. 이 아삽의 아들들은 왕의 지시에 따라, 아삽의 지도를 받고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

(5:19, 새번역)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3:16, 새번역)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또는 '주님의'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주님께'

 

 

시편의 저자들이 바로 역대상 25장에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24반열의 각 반열 12명입니다. 121000이라는 묵시성 곧 시공간을 빼버린 묵시성을 미래완료성을 곧 존재가 아닌 기능성을 곧 이름 예수라는 이름

다른 이름을 준적이 없는 이 이름을 곱해서

이스라엘 12지파에 천을 곱해서 12곱하기 1000 = 12000 12을 곱한 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수가 되면 존재가 되고 곧 666이고

완료 곧 결과에 못 미쳐서 항상 미달상태인 의문의 반복이고 미완료이고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묵시로써의 숫자이면 기능입니다.

곧 결과로써만 완료가 충만 충만이다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가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어딜 흐릿하고 모호한 것을 들이대냐 말이죠.

 

그러니 바리새인은 666 주제에 자꾸 실로암 소경이라는 144000을 건드린 셈입니다.

아니 실로암 소경이

아니 탕자가 왜 144000인데?

 

원인이 없거든요

예수님의 일방적인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피 발라버렸거든요.

 

그럼 나도 나도 바리새인인 나도 발라줘?

아니 그런데 바르고 싶어도 먼저 바리새인 속에 들어가 있는 존재라는 주인이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두 주인이 있을 수가 없다 말이죠.

바리새인은 이것도 저것도 다 가지고 싶어 하더라 말이죠.

이게 우상입니다. 탐심

땅의 것을 찾더라 말이죠.

 

? 섬기는 자가 없어서 말이죠.

자기가 직접 주인을 곧 섬기는 자를 선택해야 하는 피곤함에 빠져 있는 겁니다.

선택했으니 언제든지 버려야만 하니 말이죠.

 

그런 의문의 짖을 반복하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 말이죠.

 

단번에 드리는 마침이 없어요.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6:10, 개역)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7:27, 개역)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9:12, 개역)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26, 개역)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9:28, 개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3, 개역)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10:4, 개역)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자 새노래란 결국 단번에 드린 이 십자가를 찬양하는 겁니다.

시편의 저자들이 곧 역대상에 나오는 찬양대

다윗의 찬양대원들이 기록한 내용은 딱 하나입니다.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신 그의 선하심과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라는 찬양입니다.

 

그러니 원수가 있어야 하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라는 창세전에 유일하게 생명책에 기록된

약속이 벌리는 사건이 벌어져야 하고 곧 출애굽사건이지요 십자가사건입니다.

그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저주를 우리는 새노래로써 찬양 하는 겁니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개역)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왜 하나님을 더 잘 믿는 유대인들은 왜 새노래를 왜 못할까요? 왜 못 부를까요?

배울수도 없을까요?

 

맞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요 저주이기에 십자가라는 거리끼는 걸림돌을 노래 할 수가 없어요.

헬라인도 마찬가지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를 노래 못합니다.

 

이미 그들에게 주인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마귀입니다.

그 마귀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겁니다.

우상 말이죠.

 

사도바울이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사도바울에게 여섯날개를 가진 천사도 감당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덮쳐지니까

눈이 가버렸지요

그리고 누구십니까? 라고 졸지에

너 예수 알지? 라고 아냐 알고 있니 라고 묻는 겁니다.

나는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 나사렛 이단 예수라고

이름을 주더라 말이죠. 이름

 

졸지에 예수님을 알게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그냥 예수가 아니라

사도바울 아니

그때는 사울이라는 청년 이였지요.

스데반 집사까지 죽이는데 성공한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냥 예수가 아닌

너 사울이 핍박하는

또 여기서 그냥 예수가 아닌

나사렛 예수

또 여기서 그냥 나사렛 예수가 아닌

핍박할 수밖에 없는 나사렛 이단 예수 라는 기능을

 

마치 핫도그 그냥 주는게 아니라

치즈 올리고 케찹을 팍팍 뿌려 듬뿍 담아서 주듯이

 

그냥 예수가 아닌 나사렛이라는 기능 곧 부정을 붙이고

핍박 이라는 심판받아야 마땅한 기능 곧 부정을 또 붙이듯이

 

주렁 주렁 주렁 달리듯이 기능 기능 기능이 마구 마구 막 뿌려지는 겁니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가 막 뿌려져요! 죄인에게 말이죠.

 

나사렛이라는 거기에 무슨 놈의 메시아가 나겠느냐 라는

부정한 마을 동네 곧 선한 것이 날수 없는 곳으로써의 부정

 

나사렛 자체가 이단적일 수 밖에 없는 상대적인

무궁한 정통의 역사를 자랑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써

이단을 몰아내고자 핍박했던

선함이 없는 자 이단을 쳐단하고자 했던

너가 핍박하는 예수 라는 겁니다.

신흥 이단

역사가 짧디 짧다 못해 역사가 없는

딸란 예수 단 한 사람의 3년 행적 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울음 뿐

탄식 뿐인 역사 자체가 없는 이단 신흥 이단 선한 것이 일체 없는 ...

 

그런데 사울이라는 청년인 사도바울이 거기서 그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심판을 만나는 겁니다.

주의 진노를 만나는 겁니다.

심판의 주를 말이죠.

 

어 그런데 그 심판 속에서 허물을 모든 허물을 덮으시더라 말이죠.

광야 속에 집어넣어서 세가지 물증을 확보하고자 죄인만드신 후에

그 세가지 물증을 증거궤에 담고 두껑을 덮은 후 어린양의 피를 뿌려서

다시는 허물을 보시지 않겠다고 대신 심판받는 그 피 흘리심

 

번제를 원치 않고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가 그 언약궤 뚜껑에 피 뿌려질때에

 

여리고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고 하니

새노래로

나팔소리로 무너뜨리더라는 겁니다.

 

저들은 짐승의 표 666을 받아서 매매를 해서 소통도 잘 되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여기 십사만사천명을 매매를 커녕 소통은커녕

심판을 받아서 심판 속에 놓여져서 졸지에 죄인이 되어서

피 뿌려지는 주의 인자하심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만 취급당한다 말이죠.

어차피 매매도 못해 죽어야 할 판국에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까지 저주까지 받아야 하는 탕자인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넹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도 곧 타죽어야 할 정도로 감당이 안되니

 

나야 뭐 뻔히 타 죽어도 마땅한 입장에 놓여졌구나

 

아 그런데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원인 없는 결과로써

새노래를 부르게 되더라 말이죠.

몰라요 이유 없어요

원인 없어요

새것이 되어버렸어요

새것이 되는데 내가 한게 없었다 말이죠.

이전 것을 지나가게 하는데 내가 뭐 한게 있기라도 해야죠

없었다 말이죠.

 

그럼 시험 친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합격이 되었나

무시험 합격이 되었나?

졸지에 나 만을 향하던 시선에서

다른 분을 찾더라 라는 겁니다.

 

나에게 이유 없이 새노래를 부르게 만든 분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새노래를 부르게 하신 분

 

아 어린양 예수 라는 이 하나에서 144000이라는 여럿이 나왔다는 겁니다.

 

시편이 놀랍게도 다윗의 찬양대가 하나님의 군사이기도 한데

그들이 여럿임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똑같은 노래를 하는데

곧 새노래인데

다들 한결 같이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더라 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노래 해요

 

유대인은 이 십자가를 노래 못 불러요

죄 죄 죄 고만좀 캐라 라고 말하는 오늘날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과 너무 너무 똑같아요

짐승의 표를 받아야 그들은 매매 소통 대화가 가능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의 영이 오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심판하신다고 했을때에

 

(16:8, 개역)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8, 쉬운) 보혜사가 오시면, 그분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한 것들을 책망하실 것이다.

(16:8, 킹흠정)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를 십자가 진 자들이 죄를 지은 자라고 봤는데

의를 십자가지지 않은 자를 의로운 거룩한 자 라고 봤는데

심판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 심판을 받은 자 라고 봤는데

 

그게 거꾸로 임을 성령 곧 십자가의 영을 통해서

 

그것이 바로 헬라인은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노래 부를리 없고

유대인은 거리끼는 걸림돌이라서 노래 부를리 없지만

십자가의 용서로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새노래로써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감사의 조건을 따지는 저들에게는 감사가 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감사 무조건 감사요 범사에 감사

자나 누우나 먹든지 마시든지

벙어리 일찌라도

목소리 자체가 나오지 않아도

원인 없이 결과로써만 새노래를 아니 부를수가 없는 겁니다.

 

절대로 베드로 너는 예수님을 찬양 못할 거야 라고

원수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아왔다손 치더라도 말이죠.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예수님으로부터 저당잡혔다 치더라도 말이죠.

광야에서 심판 속에서 십계명 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 라는

원망한 증거 세가지를 증거궤에 잡혔다 치더라도

 

여리고 성에서

마귀 원수 앞에서

마귀 보란 듯이

나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신다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새노래를 부르는

 

유대인으로써는 도저히 이 모순되는 새노래를

아주 뻔뻔스럽게 베드로가 노래하듯이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선택하셨고

십자가에 대신 심판 받으셨기에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이 주의 인자하심만을 노래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마귀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또 바리새인은

베드로 라는 미끼를 괜히 물었던 겁니다.

정작 자신들이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자를 그 미끼를 확 물어버림으로써

새노래를 정작 못 부른다는 것이 들통나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 구원에 관심 없고

마귀만을 상대로한

약속 곧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만에만 신경쓸 뿐입니다.

 

아무도 못 부르는

도저히 배울수 없는 이 불가능한 새노래를

신나게 즐기면서 막 부르는

어린양에 속한 자만이

144000명만이 새노래를 부르는 막사는 자 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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