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모 작전

2008누가복음 2008. 10. 23. 04:53


볼모 작전

질투의 여호와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0-22 23:45:59,

눅22:1~23 에서 나오는 떡과 포도주에서 떡은 주님자신의 몸을 나타내는 교회의 상징이고
한떡 한몸 한생명 덩어리로 되어 있는 단체적인 교회를 의미한다고 하고
떼어먹는 떡은 주님의 생명을 소유한 개체적 교회를 말한다고 합니다

답변 :
교회의 상징이 아니라 교회 자체도 최종적으로 누락되는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딱 하나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한 떡 한 몸 한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둘이 될 수 없도록 자기부인의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가 생존할려고 빠닥빠닥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들을 내어주신 분의 마음처럼 자기를 내어주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이미 하나가 완료이기에 완료성으로써 내어주어도 상관 없다는 모습이고
반대로 가짜들은 하나 될려고 하기에 미완료에서 점점점 완료 답게 흉내낼려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가짜였으면 하나 될려고 할까요? 그러나 이 가짜가 세상에 먹혀드는 이유는 그 하나 될려는 모습이 악마가 보기에 기특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하나인데 왜 또 하나일려고 하느냐 ?
이미 완료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또 다시 온전케 할수도 없는 법에 다시 서로를 얽매이게 하느냐? 그것이 바로 단체 집단으로써 진행 됨을 바울 서신을 통해서도 맹렬한 대립들이 나타납니다.

결국
인간이란 문자를 소유하면 그 문자를 자기 쪽으로 땡겨서 해독풀이를 하기 마련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가인에게 이마표를 주게 되니 그 이마표가 자기를 위한 보호막으로 사용하듯이 그 이후부터 가인은 때려죽어도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자기방어에만 미쳐 사는 죄의 소원에 갇혀 버립니다. 방금 이 질문이 딱 그런 식입니다.

바울서신의 내용은 딱 하나입니다. 몸입니다. 이 몸을 말하는데 있어서 가짜몸을 드러내면서 또는 유발케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이 몸 조차도 십자가를 향하는 영적인 몸이기에 죽어도 상관 없는 길로만 골라 가지만
가짜 몸은 명령어를 지키고 그 몸에 좋은 것들만을 흡수시키는데 예수(이마표처럼)마저 이용하는 식으로 한 몸 개념 사상을 구약 유대인의 선민사상처럼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울은 한 몸을 말하는 자신이 그 몸을 약함과 사단의 가시가 깊이 박힘과 고난의 길로만 가는 몸으로써 실제로 그 신체에 담고 증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정작 자신이 믿은적 없다고 믿음의 주체를 예수라고 증거하는 믿음을 개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누락 곧 자기부정을 통해서 증거합니다. 그러나 이마표를 받은 자들은 주님의 보호함으로써 가인의 성을 짖게 되었다고 도리어 죄악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사고방식을 퍼트리는 계기가 언약 때문에 실행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개체적은 가짜교회의 모습이고

바울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자신의 죽기로 작정한 도살장에 끌려가는 미말에 둔 구경꺼리 미끼로써 증거합니다.

고로 교회를 교회로써 의식하고 교회 됨을 추구하는 자는 다 가짜요.
교회(그리스도의 몸) 조차도 될 수 없는 자에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주어진 것은
소유 할 것이 아닌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비로소 자기의 사명으로 보게 되는 성령의 등떠밀림으로 인해 그 살과 피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끼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럼으로 가짜는 선악과 나무처럼 예수님을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증거하고

반대로 사도바울은 생명나무를 사람들이 싫어버린바 된 미움받아 죽은 죽음으로써 증거합니다.

생명을 앞세우는 것은 광명한 천사이고
죽음을 앞세우는 것은 성령의 증거입니다. 부정적으로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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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23:49:00

본래 큰떡은 각자 자기분량에 맞게 떼어 먹는것이고
포도주는 주님의 생명의 피를 상징하는것고 성령이라 하죠

떡과 포도주를 마신다는것은 교회시대에 있을 영적교제를 의미하고
유월절이 구원을 받아서 심판을 받아서 나온것이라 하면
주님의 만찬은 생명안에서의 교제를 말하는것이라고 하죠


답변 :

인간이 얼마나 건방지면 주님의 살과 피를 뜯어먹는 입장에서
자기분량이라는 개념을 말한다는 자체가 이미 형식화 된 껍데기에 미쳐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남 눈치를 보고 먹어야지 혼자 욕심차리지 말라는 그 충고가 바로 악마가 욕심부리지 말라고 충고하는 식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마신다는것은 교회시대에 있을 영적교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특징은 교회를 동아리 단체로 만들어버린 기술 노하우를 교회 역사를 통해서 전수해 왔습니다. 그것이 프로그램이고 교리입니다.

교회시대라는 것도 말도 안되는 자기들이 붙인 의미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영적교제라는 교회의 레크레이션 화합도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비로소 소통(성령)이 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소통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땅에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너를 가지고 이루겠다고 우리를 하나의 소품으로 삼는데 그게 바로 미끼 라고 했습니다.

그 모델 케이스가 바로 인자입니다. 이 인자의 길을 불가능 하지만 이 불가능을 너희는 못하나 나는 한다고 성령을 보내신 겁니다.

즉 예수님처럼 자기의 살과 피를 내어준 자기목숨을 내어주었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 소통입니다.

물론 우리의 목숨 더럽기 때문에 내어줘도 남을 살릴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생명 그대로 내어주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내가 얼마나 힘들게 따내고 소유하게 된 생명을 미쳤다고 내어주냐 ? 라는 식이

바로 부자 청년의 근심하고 돌아서게 되는 소통이 아닌 단절이 되고

반대로 내가 성화해서 힘들게 따낸 구원이요 생명이요 영생이니 너에게 줄수 없다고 고집피우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에게 작살이 나서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얻게된 생명이기에
공짜로 받은 것 공짜로 언제든지 다 줄 수 있는 겁니다.

비록 내가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들어도
원래 처음부터 내 몸뚱아리도 공짜요 공기도 햇빛도 잠도 눈도 코도 가족도 원래 다 공짜였듯이
아무에게나 주지 않았던 그 예수님의 살과 피도 공짜였기에
언제든지 나는 없어도 상관없으니 너가 차라리 공짜라 다 가지고 가라 라고 하는 이런 모습이 법 의식이 없는 소유 의식이 없는 주의 자녀이고

반대로 구원을 소유로써 보는 자는 절대로 남 줄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 도리어 이마표가 되어버리는 죄의 소원이 되고마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나 차라리 지옥 갈게 너 천국 갔으면 차라리 좋겠다 라고 합니다.

구원이 자기를 지우는 자가 있고 그래서 자기를 챙길 필요도 없도록 구원(살과 피인 예수님의 죽음)이 자아를 지우는 자가 있고

반대로 그 구원이 자기 자아를 더더욱 집착하는 자로 만드는 주님의 살과 피가 있습니다.

주도권은 인간의 조심성이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가 한 쪽은 긍휼의 그릇 또 다른 한 쪽은 진노의 그릇으로 구체화하면서 뚜렷하게 경계선을 긋는 유일한 약속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감히 어떤 누가 소유하겠습니까?

이렇든 저렇든 소유 당할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에 무지한 귀가 막혀서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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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23:51:16,

주님의 상은 교회시대에 영적교제가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한몸 한영 한 생명 살은 먹는다는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것이기에
그 말씀을 먹고 우리가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만드는것을 나타낸다

피는 포도주로 나타낸 영원한 생명 그것으로서의 계속 공급되어질 음료라는것
교회안의 영적교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답변:

그것이 바로 소통이 단절된 육의 전형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육도 육 스스로가 규정 못합니다.

육은 곧 어두움은 반드시 새언약이 규정시켜야만 육이 뭔지 압니다.
그것이 바로 옛언약입니다.

옛언약 속에 속해있던 바리새인들의 육에 대한 판단의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그 질문 수준 보다도 훨씬 높을 정도라는 것은 우리도 잘 아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인간 쪽에서 전혀 접근도 못할 한 기준을 보내어야 그 차이가 단절로써 나타납니다. 그 인물이 바로 인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인자를 못 박아서 원수들에게 내어주십니다.

그 인자를 바로 우리에게 내어주었고 우리는 인자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원수죠

자 이미 완료로써 그 사건은 벌어져서 끝난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이 인자에게 나타난 십자가라는 사건의 비밀을 풀지 못하면

어떤 인간도 패스 못 넘어온다는 겁니다.

기가막힌 걸림돌 비밀 수수께끼를 박아버린 겁니다.

마치 어떤 동화처럼 어떤 임금이 자기 딸 공주를 걸고서(물건도 아닌데 말이죠)
이 공주를 사랑하는 자를 임금의 나라를 준다는 식의 설화구조가
여러형태로 변형이 되어서 살이 붙어 편집이 되듯이

이 공주에게 걸린 저주에 뛰어드는 그 자가 누구냐 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공주는 마법의 저주에 걸렸는데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난다거나(백설공주,숲속의 잠자는 공주)
또는 공주가 아주 못댄 성격인데 어떻게 제대로 잡아주느냐?(고멜이야기 등등등,우물가의여인)
또는 울보인데 이 공주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웃도록 하는 자에게 남편삼아주겠다는 (서양은 기본적인 동화 구조이고 한국은 전형적인 평강공주)
또 이런 기본 구조에서 점점 확장 스케일이 좀더 반전에 반전이 있는 식으로
(피리부는 사나이-귀신을돼지때속에집어넣어해결했으나동네에서 쫏겨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그래서 제가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먼저 제목을 붙인 뒤 한참뒤에 떠오른 단어가 바로 볼모 라는 단어가 생각 나서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즉 볼모 (요셉의 은잔시험), 담보, 전리품, 탁란 등등의 비밀스러운 수수께끼 같은 지혜 곧 이 모든 것이 저주의 마법을 깨우는 수수께끼 풀기와 연관된 것인데 이 비밀의 열쇠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에

질투의 하나님만 독점을 쥐었다는 것에 이 독점성은 많은 타인들이 풀려고 달려들면 들수록
그 비밀의 수수께끼 독점성은 더욱 더 깊은 겁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크듯이

즉 사랑(열쇠)에 대한 독점을 질투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수수께끼를 푸는 독점이 사랑만이 가지고 있고 이것만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공주 또는 마법에 걸린 사랑의 대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첫사랑의 대상으로 계속 남아있지
이제 사랑으로 눈 뜨게 되었으니 자율권이 있다고 본다는 자체가 바로 성화론자들의 전형적인 이론입니다.

사랑으로 인한 비밀풀이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에
왕자의 입맞춤으로써 눈 뜬적이 없기에
소경인체로 비밀풀기에 나서겠다는 시건방짐을 떨고 있는 겁니다.

이 사랑의 독점성은 바로 개인적 구원이 아닌
집단적인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제한된 겁니다.
(아무리 유리구두에 자기발을 성화되게 만들어서 집어넣어도
이미 유리구두의 주인은 따로 있는 법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는 것에 이미 확정되었듯이. 이것이 신데렐라 (교회) 이죠., 가인이 백날 제사 잘 드려도 이미 아벨에게 편애된 겁니다. 그 편애(단절=불공평)의 확정을 확대 시키는 것이 사랑이요 질투입니다. 걸레 속에 뛰어든 왕자의 사랑, 한 마리의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는 목자, 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 희년완성.출생의 비밀 풀기 지요. 미(美) 곧 아름다움이란 소유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도리어 미란 죽으면 죽으리라 로 그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미가 죽으면 죽으이라 로 다가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마법에 걸려 잠에서 깨어날 수 없는 죽어있는 입장일 뿐입니다. )

이 독점적인 단절성을 계속 남겨두는 것이 사랑인 반면
인간은 항상 법과 보편성과 다수(허상)를 동원해서
편애(불공평)를 희석 시킵니다. 그런다고 사랑의 질투는 멈추지 않습니다.

항상 예정의 편애성을 희석시키는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행함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방나라화(혼합주의) 된 이스라엘 속에서 갈라버립니다.

이 입맞춤(편애)을 어떻게 제대로 받았는가를 또 갈라놓듯이 말이죠.
선민에서 다시 남은 자로 그 남은자에서 다시 새이스라엘로
(선민 - 남은자 - 새이스라엘)

가르고 가르고 갈라서 말이죠 (노아의 유언, 야곱의 유언, 모세의 유언은 바로 이런 단절성을 더더욱 보여줍니다. 마치 가인의 족보와 아벨의 족보는 유언으로 남기듯이 말이죠. 창 3:15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립으로 증거합니다.)

그럼 숫자상으로 손해를 보느냐? 전혀 손해보는 것이 없습니다.

마치 구원 이라면 이거 보면 된다는 식의 출애굽기의 내용이 바로

뭐뭐뭐 로부터 빠져 나와서 빠져나온게 전부가 아니라 뭐뭐뭐 들어가는 것

애굽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자 여기서 애굽에서 60만명 탈출
다시 광야 40년에서 그 60만명 다 죽이시고
다시 60만명 채워서 숫자 맞추어서 들어가는 가나안 입성
이것을 맞나 틀리냐 라고 지독스럽게 따지는 식이 바로 민수기
백성의 숫자 세는 겁니다.

약속 시시하게 보는 것은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니만 손해지 뭐 라고 말이죠

그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끝나느냐? 다 쫏아내어야만 하는 겁니다.

독점성 때문입니다. 사랑은 질투이거든요

자 못 쫏아내니까 도리어 썩여버립니다.

자 그럼 주님이 손해 봅니까?
하나 하나 일일이 가려냅니다.

이스라엘 선민 속에서 다시 남은자로 (바벨론 포로 보내어서 땅을 정화 시키죠)

그 남은자 속에서 그루터기 속에서 (유대지파만 남음) 다시 가려냅니다.

바리새인들 마저도 남은자 그루터기 라고 우기니까 다시 가려냅니다. 철두철미하게
약속 외에 잡것들이 썩인 것 일체 용납 안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외에 다른 이스라엘 다른 그루터기 다른 남은자 일체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자 다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새이스라엘을 다시 확대 시킵니다. 즉 단절성의 확대이지
양적인 확대는 없습니다.

편애의 확대요 확정입니다.

예정의 확정입니다. 그런데 양적인 확장을 꿈구는 자에게는 예정이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지금 현대에도 현대가 현실이 아니라 말씀이 현실로써 일곱교회는 이미 확정적입니다.

아무리 전세계에 교회가 새롭게 세워지고 다시 허물어져서 헤쳐져도
이미 확정된 성전이 있기에
그 참성전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지상의 교회들은 유동적이고 누락되는 식으로 예정된 성전을 증거하지 (계시록)
자기 교회의 교회됨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이미 완료된 어린양 되신 성전을 자랑하고 증거하고 충성하지
눈에 보이는 자기 출석 교회 충성이나 그 속에서 믿음이나 성화 잘 되었다는 소리 듣고자 행하는 목사의 똘마니는 도리어 어린양되신 참성전을 모독하는 자들인 거죠.

말씀을 먹고 우리의 삶으로 만들겠다 (편애가 없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편성으로 독점성을 희석 시킴)라는 자체가 아직 꿈에서 덜 깬 허상에서 머물러 있는 겁니다.

눈을 떳다면 자기에게 누가 입맞추었는가 라는 단절성을 외치니 그 단절된 누구 만을 외친다는 것이 자아가 확립된 자들에게는 가장 듣기 싫은 겁니다.

실제로 보편성을 허문다고 미움 받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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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23:58:01,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면 떡과 포도주를 마시고가 무의미 하다
출애굽 , 교회시대, 왕국시대까지의 양식의 변화가 있다

하나님의 지식을 배우는 사람은 교회시대를 사는 사람이고

왕국의 시대는 물이 땅을 덮음 같이 다 안다 배울 필요도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답변 :

양식이란 먹냐 안 먹냐 행하냐 안행하냐 라는 것에 좌우되지 않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 라는

말씀 되신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 역으로 말씀의 소품으로써 사람이(그릇)이 동원되는 식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양식은 소품이 되었고(선택당할 입장)
사람은 어느새 그 양식을 소유 할 수 있는 선택권의 행사 당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주객이 전도된 성화론자들의 가장 큰 단점입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사랑으로 아무리 예수님을 따라 가도 못 따라 가는 이유는
그 자유의 선택권을 자발적인 선택을 반드시 이전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하는 꼬기오의 울음이 아니면
베드로는 자신의 자유의 선택권이 도리어 버리는 선택권의 실체 앞에서
자기의 자유가 순 거짓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지 않는 이상
빠져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너의 사랑은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라 법 이였다 라는 겁니다.
남을 살리는 자유 곧 사랑이 아니라 남을 족쇄로 가두는 법이다 소유다 라는 겁니다.
왜 법이냐 하면 날 버리면 안된다는 이유로 선택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묻고 계십니다.
자기 사랑으로 다가간 지난 사랑을 지우심을 영으로 인한 시몬의 고백으로 지워버립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피조물이 되었다 즉 사랑에 대한 반대로 대상이 되는 거지
사랑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나의 선택권의 빼앗김입니다.
과거를 예수님이 지워버리지 않으면 베드로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권은 곧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인 죄의 소원입니다.
(죽기 싫어서 히 2:15, 나온 자유이기에 예수님은 죽을 곳으로만 골라간 겁니다. 그러니 막을 수 밖에요)

처음부터 양식은 예수님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외에는 소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양식으로써 소통(대화)를 늘 시도한 겁니다. 그 내막을 들추어낸
다른 양식들의 내막을 보여주는 것이 각 시대상입니다.
오늘날의 양식은 바로 돈입니다.

돈 먹지 않는 이상은 이 세상에서 추방입니다.

돈 없는 나라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소망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물이 땅을 덮는다는 것은

(사 11:9, 개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합 2:14, 개역)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새(성령)성전 완성인데 그렇다면 기존의 성전의 파괴의 단절을 말합니다.

인간은 지식을 통해서 자기만의 성을 쌓습니다. 그것이 교회요 그 교회의 보호막을 교리로서 법으로 규정해버립니다. 미래의 영광이 덮칠 필요 없이 자기 쪽에서 완벽하게 완료 시키겠다는 열심을 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이요 가인성이요 죄의 소원인 강도의 소굴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선택해서 쌓은 하늘의 통로 구원통로인 자아의 성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것은

마치 물두멍(세수대아)의 그 조그마한 양의 물이 바다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정도의 불가능성을 기정사실화 하겠다는 겁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조그마한 씨앗이 사울왕의 애굽왕같은 강력한 국가체제와 왕권을 허물 듯이 대립적인데 말도 안되는 식으로 전개되는 전쟁양상을 말하는 겁니다. 젖먹이를 통해서 전쟁을 한다는 둥 즉 이말은 불가능성의 단절이기에 여기에 너가 하등 보탬이 된적 없으니 그야말로 진짜로 공짜중의 공짜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까 조그마한 씨앗의 능력이 모든 악한 마귀권세 사망권세 지옥권세까지 다 이길정도로 넉넉한 것처럼 반드시 건축자들의 버린돌 무가치한 쪼매한 돌맹이가 전체 건축물을 떠 받드는 주춧돌이 되는 방식만이 성령이 짓는 새성전의 의미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처럼 말하면

왕국의 시대는 물이 땅을 덮음 같이 다 안다 배울 필요도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가능성과 가능성의 연결입니다.
정작 불가능성을 말하는 단절의 의미인데

안다 라는 것은 마치 다윗이 자기 속에 정직한 영이 없다 라는 단절을 알았을때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래서 정직한 영을 쳐다보듯이

전혀 몰랐구나 나야 말로 반드시 틀릴 수 밖에 없구나 라는 것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인자(성령이 등 떠미는 분)을 통해서 비로소 나의 무지를 직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홀로 유일하게 아는 분
하늘에서 직접 오신분.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유일한 분
즉 십자가에 달리는 분이 유일하게 다 아는 분 곧 다 이루었다는 분입니다.
저 분이 진짜 다 아시는 분입니다 라고 쳐다보는 겁니다.

그것이 충만 충만하다는 것이지 지식의 소유개념 지식의 활용개념 다 헛소리입니다.
(안다 라는 것은 무지를 통해서 증거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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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23:59:22,

배우는자와 아는자가 충만한자가 있다 그 안에는 주를 파는자가 있다

자기 생각에 머물고 유익을 생각하는자이다 주님을 얻는것은 힘들지만 넘겨주는것을 쉽다

답변:

얼마나 엉터리이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주님이였으면 넘겨주기가 쉬울까요?
얼마전에 sbs에서 신의 길? 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한국 기독교계가 기독교를 허문다고 데모를 하고 그 담당 pd 가 교회집사인데 뉴스엔조이에 글 남긴 것 본적있는데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던데 제가 보기엔 양 쪽 두 놈 다 예수님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하여튼 장난을 치고 있더군요.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결국 내가 하기 나름이다 라는 사상인 겁니다.

저번에 질문 중에 부모도 자식이 어떻게 효도 하고 말 잘 듣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식과 같은 식인 거죠.

언약 곧 약속(사랑)은 인간에 의해 일체 좌우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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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00:03:25,

그 부분에서 제가 우리 목사님을 파는 가롯유다인가 하는 생각도 들도군요 ㅡ.ㅡㅋ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는 이유가 종의 의식으로 부터 자유하게 하려고 하는것이다

아브라함 몸에서 난 자가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의 몸이고  그 몸에서 난자는 언약의 동질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네 몸은 복음이고 그것은 곧 교회를 통해 난자가 아니면 후사가 될수 없다고 하는데요

답변 :

그러니까 속을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또 속아봐야(외부의 자극이 오면 그 다음에는 방어할려고 하기에 기억에 남겠죠)
다시는 안 속을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듯이 주님은 늘 우리를 그렇게 인도 하십니다.

가룟유다는 그 때 비로소 예수님을 쉽게 넘겨준게 아니라
이미 구약의 예언대로 하도록 되어 있기에
그것을 예수님께서 자극을 준 겁니다.
너 예언대로 해야지 라고 예수님이 시동 걸지 않으면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 13:27, 개역)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누구는 저에게 이런 반박을 하더군요

사단이 들어갔기에 사단 보고 했지 가룟유다보고 한게 아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마저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자 했다 라고 말이죠.

그 사단도 주님이 부리시는 영입니다. 사단은 독자적인 행동을 절대로 할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자기 멋대로 할 권리나 입장도 일체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단 마저도 사용하시듯이
사단의 가시를 바울 깊숙이 찔러 넣는 것도 주님입니다.

자 그리고 노예 근성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함이다 라는 말은 자유시민의식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지 성경을 이용하든 불경을 이용하든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는 계몽의식처럼 늘 써먹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노예근성으로부터 자유를 주기 위한 인간에게 자유심을 줄려는 목적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자유가 여호와를 왕으로 두기 싫어함으로 발전한다는 겁니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이든 애굽 속이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을 자신이 직접 실행 완성하신다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목격자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종이 되어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합니다.

맨날 법정에 서서 (미끼처럼 말이죠) 누가 배신을 하든 말든 또는 사단에게 내어주든 말든
또는 늑대소굴에 던져지고 이리 때 속으로 등떠밀리든 말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무조건 목격한 대로 증인 노릇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진 그 내용들을 본대로 들은대로 경찰서 불려가서 진술해야하고
재판이 일어나면 거기서 증언 해야하고
시도 때도 없이 장소 불문하고 맨날 그 진술을 반복 반복 계속 해야합니다.

자아고 뭐고 없어요? 자유? 좋아하시네 ㅋㅋㅋ

자기 삶? 배불렸죠

맨날 증언만 하기 위해서 성령이 부르는데로 달려가서 진술 해야만 합니다.


자 그 다음 질문은 후사인데

문제는 바리새인도 자기들이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의 자손이라고 우겼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언약에서 두 갈래가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예로 제사장도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한 쪽은 보편화 될 수 밖에 없는 계열 레위계열이고
한 쪽은 절대로 보편화 불가능한 단절의 숨겨진 계열 즉 멜기세덱 계열이 있는 겁니다.

모든 의미가 다 그러합니다.

이스라엘도 두 계열

남은 자도 두 계열

하나님의 백성도 두 계열

한 쪽은 항상 역사적인 이음이 가능하지만

다른 한 쪽은 항상 역사 속 조차에서도 끊어진채로 불쑥 불쑥 나타나서 끊어졌다가 다시 등장 하는 식으로 이음이 불가능함에도 숨겨진채로 어느새 또 등장하면서 내려온다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남은자 개념이 이스라엘 속에서 나타났다면 기존의 이스라엘을 치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자 또 역사적인 시간 속에 정체 되면 또 남은자 개념이 보편화 되어서

바리새인들 마저도 남은자 운동인 하나님 나라 운동 하고 묵시 운동을 펼칩니다.

그럼 그때의 남은자 개념을 깨뜨리면서 또 등장하는 단절의 인물이 있는데 바로 인자가 되는 겁니다.

언약은 항상 그 앞의 언약의 죄악을 더더욱 깊이 구체화 시키면서 더더욱 은혜의 깊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후사가 내가 탐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누가 봐도 넌 가짜 후사네 라고 공격할 수밖에 없으니까 솔직할 수가 없는 겁니다.

더더욱 교회 목사 이고 하니 자기가 먼저 후사 라고 우겨야 남들이 같이 사기에 동참할 수 있는 겁니다.

자 그럼 가짜 후사와 진짜 후사에 대한 의미로써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죠

가짜 후사의 특징이 바로 교회를 주장 합니다.

교회는 낳아짐의 결과 물이지
낳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렇기에 진짜 후사는 나를 나은 분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너 누가 낳았는데? 교회

교회가 나를 낳았다는 것은 교회가 중보자 역할을 했고
또 교회가 나를 낳았다는 것은 세상에서도 별로 욕먹지 않는 마귀세계에서도 보편화 된 의미입니다.

그러나 너 누가 낳았는데 ? 예수님

이렇게 말해 버리면 저쪽 마귀세계를 건드리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맞을 짖과 미움 받을 짖을 못하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서입니다.

그래서 보편화 된 개념을 교육 시키고 그 교육으로 가르치는 자가 필수적인 직분론을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교회 시스템이 필수조건이 되는 거죠.

이게 바로 유대교 카톨릭교 그리고 개혁주의 죠 다 마귀집단입니다.

그런 보편성의 힘으로 밀어붙이니깐요. 사람을 교회 소속케 만드는 것이 세례인 겁니다.
특히 유아세례 - 이거는 비성경적임. 교회 소유물로 삼는 식임

그러나 후사 개념은 잇는다는 의미가 바로 단절로써 그 차이를 드러내듯이
세례 또한 연합 개념이 아니라 먼저 단절의 의미로써 누가 나에게 뛰어들었는가를 통해
교회가 아니라 나와 함께 죽고 나와 함께 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때려죽어도 믿지 않는 교회에서 죽을 각오하고 외쳐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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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00:07:07,

은혜는 기본구원이고 성화는 상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영생으로 보상해 준다고 하거든요

차선책이 나오면 믿음의 한계가 온것이고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에고가 있다는것이다 하는데 이 말은 동감이 되더군요

답변 :

이 질문 참 마음에 드네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차이를 극대화로 드러내기 때문이니깐요.

성화는 상급이라고 말했죠?

상급 아닙니다.

인간은 노동의 댓가를 바라고 행동 합니다.

댓가를 노리지 않는 행동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 잘 질문 하신 겁니다.

그 댓가가 상급으로 나타나야지 안주면 재미 없을 줄 알아라 라는 협박공갈이지요.

정작 24 장로는 벌벌 떨고 면류관을 반납하고서 떳떳한게 아니라 대가리 팍 파묻습니다.

감히 그 영광 앞에서 안 타죽는 것만 해도 감사할 판국에 무슨 상 까정 탈려고요?

개근상? 우리 솔직히 말해 봅시다. 학교 경험상 가장 기본의 상이 개근상인데 개근한적도 없으면서 기본도 안 되는 주제에 그 위의 상들을 바랄정도면 이거 보통 심각한 탐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성화도 두 계열로 보세요.

마치 저의 경우는 삼위일체를 아예 부정해 버리는 발언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하면 눈치채기가 쉬울테니

어떤 마귀적인 의미도 다 주님 께서 깔아놓은 배경이기에

뭐든지 두 계열로 생각하면 저 쪽은 더더욱 눈치를 못 채겠지요.

성화는 인간의 성화와 성령의 성화가 있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간의 성화는 노동의 댓가 노리는 탐욕에서 비롯되고요
성령의 성화는 그 차이성으로써 드러내면 됩니다.

즉 성령의 성화는 우리를 인자와 같이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말한 아니지 화요일에 말한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의 차이를 뭐라고 했습니까?
징계 라고 했습니다.

매 죠 매 회초리

성령의 성화는 늘 인간의 성화를 꿈구는 우리를 매 질 하는 겁니다.

늘 인간의 성화로 영혼의 의사니 영적 아버지니 따위의 헛소리를 하고 또 그런 놈들과 어울리는 그 자체를 박살내는 것이 성령의 성화입니다.

육이 실행하는 말씀 지키기와
성령이 실행하는 말씀 지키기가 얼마나 차이나는 지를 그것을 파악하는 재미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면 그것은 조건적인 것이고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아니라 법이지요,

바로 그겁니다. 인간은 사랑을 원치 않기에 법을 원하는 겁니다. 구색을 갖추어서 주님이 날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도록 하겠다는 법적인 사기입니다. 그 정도로 잘 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차선책이 나오면 믿음의 한계가 온것이고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에고가 있다는것이다 하는데 이 말은 동감이 되더군요

이 말은
동감이 아니라 상식입니다. 보편적이기 때문이니깐요.

즉 자아를 쳐다보는 것처럼 불확정적인 것이 없으니까요 막막하고 깝깝하고 답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자아 아닌 다른 분을 쳐다볼수만 있다면 인간은 자아를 잊어버립니다.

예로 인간이 자아를 90일 정도를 잊어버릴 수 있는 기간이 자기 몸의 화학반응 때문에 맞배기로 누릴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상대 여자를 만났을 경우입니다.

즉 여자란 남자 없이는 여자라고 말 할 수 없고
남자란 여자를 염두해서 나온 의미이기에

주님께서 깔아놓은 배경에서 한치도 못 벗어나는 주님의 창조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피조물로써 창조물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데 그 하나님이 글쎄
언약으로만 자신을 드러내고 숨겨버렸기에
두 계열의 하나님이 우리를 빼앗는 겁니다.
하나는 자아 라는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인자의 하나님입니다.

자아의 하나님은 유대인이 보여줬고
인자의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겁니다.

결국 이 두 하나님의 전쟁터 마당이 역사입니다.
자아가 남아 있던 사라졌던 그것은 결국 인자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지
병든 놈이 자기가 자기 진단을 할 수 없습니다.

의사의 세계는 별개의 외부의 문제입니다.

그 분의 숙제에 우리는 당할 입장 뿐이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입장이 못대고 보탬이 안됩니다.

차라리 마음껏 내 몸 구석 구석을 쭉쭉 찢으시고 내 암덩어리 여기 큰게 있다고 갇혔다고 포로되었다고 고쳐주소서 라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요청만 할 입장의 개같은 이방인 여자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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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00:08:23,

항상 많은 질문을 하는데 답변 올려 주는것에 감사드리며
제가 궁금해 하는 부분을 보냈으니 전 이만 자러 가겠씁니다 즐밤 되시길~

답변:

인간이 감사하다면 죽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감사가 닥칩니다.
그러나 습관적인 일종의 상대방의 예의일 뿐이니까
그저 이용할 뿐입니다.

백날 호기심에 충족시켜 봤자 밑빠진 장독대 물 붓기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면서도 주님이 허락하시는 이유는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도 정말 길가에 아무가치성 없듯이 막자라고 막피어버린 저 들풀도

오늘은 햇빛과 촉촉한 가을비가 내려서 귀히 귀히 귀하게 입히시는 것은

감사를 우리 쪽에서 이루시지 않고
자신이 이루기 위해서

도저히 감사 할 수 없는 그 세계로 단절 시키는 겁니다.

불 속에서도 감사가 나오느냐를 보시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도 감사가 나오느냐를 보시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도 저주 속에서도 말이죠,

그래서 요나의 감사를 받아내기 위해서
주님은 지옥의 흑암 속에 집어넣어 기어이 감사를 받아냅니다.

우리를 그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감사를 모르는 겁니다.

이 질투성에 놓였다는 자체가
볼모 작전으로써 우리를 적진 깊숙이 악마 때거리 늑대 가장자리에 푹 집어 넣은 겁니다.

마치 사단을 바울 몸 속 가장자리에 푹 수시듯이

이제는 우리를 저 악마 소굴 깊숙이 푹 수셔놓는 겁니다.

제가 님을 보니 그렇게 보이는데 말이죠. ㅋ ㅋ ㅋ


주님은 손해 안 봅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집어넣었듯이 인간 상대 안합니다.

인간은 뭐를 하든 감사를 하든 성화를 하든 돈에 목숨을 걸든
종교에 목숨을 걸든 모조리 다 장난입니다. 이렇게 답변을 달든

진지하신 유일하게 미쁘신 분은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넉넉한 자유하신 인자가

예수님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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