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삶)이란 없다 인자(人子)의 싫어버린바된 고난받는 종의 길 외에는

 삶이 있다고 착각 유발과 
 그 반대의 죽음의 길로만 골라 가는 인자(성령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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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0:27:11,

신약의 복음 원리로 구약의 삶을 사는것이다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답변:

방금 올린 눅 29번째 녹음에서 10분 쯤의 보충 내용을 글로 올렸는데 바로 그 내용이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다룬 것이 구약 맞습니다. 인간이 신과 일치하고자 하는 모든 내막과 속성과 그 실체를 말이죠.
그것이 선악을 아는 자로써 거룩을 붙잡고 나오는 형태가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유대인의 입장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삶과 자기를 비교해야 합니다.

그 자기 삶을 자기가 자기를 정립하는 것은 그런 사기를 치지 말라고

구약이 있는 겁니다.

구약이란 새언약의 대비로써 왜 예수님과 옛언약이 규정한 인간 곧 자아를 포함 모든 인간의 삶의 내막을 다 규정했다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그 불가능성의 길을 옛언약을 통해서 발견해야 하고
왜 이런 나의 모습이 새언약의 예수님과 다른가 라는 차이성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이나 유대인 바리새인이나 사실상 내 모습인데 위선자죠 연기만 하죠 연기
그런 자들이 새언약의 예수님과 자기를 일치시킬려는 모습들이 옛언약의 버릇 그래도 시도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또 예수님과 같은 미래의 영광(약속의 완료 더 보탤것이 없는 미완료의 반대모습)이 덮친자를 또 무시하고 미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세리를 무시했기에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먼저 천국 간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인간에게 거룩이란 단절인데 지나개나 다 거룩을 손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는 거룩(완료)는 부정한 죄인을 앞장세우고
반대로 성화할려는 인간과 하나님과 자기를 일치 시키고 성경말씀과 자기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자는
역설적으로 마귀의 모습만 닮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예수님만이 밝혀 버리니
그 예수님과 예수님의 긍휼을 입은 자만 없애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삶이란 예수님의 이런 자작극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을 드러내는 식이고 (모든 피조물이)

(롬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반대로 인간이 자기 삶을 성경적으로 일치시킬려는 인간 자작극은 바로 고난 즉 징계맞음이 아닌
자기 믿음에 도취되는 겁니다. 이런 예수 잘 믿는 말씀 잘 지키는 자기에 멋져브려 라는 보람을 찾는 겁니다.

그 보람이 아니면 살맛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보람 따위를 찾겠나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 보람에 도취 되었기에 남을 어린아이취급하고 자기는 장성한 자에 놓고픈 겁니다.

저는 이 모습이 바로 천국에서 누가 크냐 작냐 라고 싸우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다고 봅니다.

정작 인자의 모습은 어린아이와 같이 무시 받는 징계의 길
매 맞는 길로 갑니다.

그렇다고 또 연기할려고 자기가 자기를 매 맞는 길로 가면 안되고
이미 예수님이 징계 맞으심을 본다는 자체가 같은 삶의 노선에 놓였다는 겁니다.

때가 차면 그 예수님의 고난에 다 동원되도록 성령은 부지런히 일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 추가해서

구약의 여호와란 인간들이 붙이 일종의 별명입니다. 하여튼 전쟁 하나는 최고의 신이다 구원하는데 최고의 신이다 라고 말이죠.
사물을 판단하고 그 내막을 해석해 보니 그렇게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호와를 만나면 누구십니까? 라고 하염없이 낫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직접 알려주지 않는 이상 모른다는 뜻으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라고 포착 불가능하고 해석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포착 불가 해석 불가 그 상태 그대로 밀어붙이니까 누가 박살이 나느냐 하면
자아가 박살 납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반드시 전능자 됨을 앞세웁니다. 전능자란 괴롭히는 자 라는 뜻입니다.
감히 여호와와 친해 질수 있는 자기 편으로 삼을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이 엉터리죠
괴롭힘 안 당해보니 그런 소리 하는 겁니다.

선배들이 당했으니 왜 당했냐 분석 파악해보니 말씀 안지켰구나 그래서 완벽하게 지킵니다.
지키니까  지키면 지킬수록 나는 괴롭힘을 당하는 것과 멀어진다고 본 거죠

지키든 안 지키든

괴롭히는 전능자를 만난다는 자체가 샬롬 평안이다는 겁니다. 괴롭힌다는 단절을 극복하고 살아남았기에 말이죠.

이런 구약의 삶의 정황도 엉터리로 해석을 하면서 우에 신약을 해석 하겠습니까?

같은 원리로 예수님은 인자를 앞세웁니다.

인자란 구약의 전능자 처럼 괴롭히는 여호와 처럼

인자란 인간의 생각을 무조건 반대로 오는 겁니다.
(무조건 반대 그정도로 자유이니까 부정한 길로만 골라서 가도 상관없는 사랑이기에)

반대로 가는 겁니다.

무조건 너희들은 틀렸다 라고 모든 행동을 해버리니까?

인간들이 일치점을 주장할때 마다 작살이 나버리고
껄끄러운 돌에 다 넘어지는 판국에 놓여지게 되니
싫어하고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인자가 나를 껄끄럽게 만드는데 이 인자의 길을 바로 성령님이 앞으로의 자기 자녀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버립니다.

즉 인자란 이 땅을 악하다 규정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 다니는 자도 악하다 (특히 강도 소굴 사건)
자기들의 성전에 목매인자 도 악하다

이 악함을 불뱀의 모습으로 달려서 더더욱 죄를 확정 지어 버리니
누가 인자를 눈치채고 입맞추겠습니까?
괴롭히는 자인데?

그런데 이것이 사랑이고

반대로 인간과 진짜 한 패거리의 마귀는 바로 광명한 천사이다 라는 겁니다.
거리낌이 없이 누구든지 수용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누가 봐도 빛나는 천사이니까 거부감이 없고 (배타성의 반대인 열려있는 수용적임) 
인자는 반드시 없던 거부감 마저도 유발케 해서 그 인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싫어 반대로 먼저 손 쓰는 것그래서 인자로 인해 실족지 않는 자는 복 받았다고 복을 실족(넘어짐)과 연관시켜 증거하죠

시험이란 인간 자기가 자기를 챙기는 수단으로  예수든 성화든 말씀지키기를 하는 그 내막을 다 까발리는 것이 인자 입니다.

까발리지 않으면 알수 없기에 까발리는 그 징계가 매가 사랑입니다.

결국 이 수단이 된 것이 우상이라고 하고 그 우상의 모든 목적은 자아 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나를 수단 소품 삼아서 이런 불뱀같은 악마도 원수도 인자가 피 흘리지 않으면 올수 없다고
용서이긴 한대 껄끄러운 용서인 십자가만 앞장세우는 겁니다.

그 껄끄러움을 없애버리는 것이 인간 쪽의 종교기술 입니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신약의 복음 원리로 구약의 삶을 사는것이다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

삶을 살려고 하지 말고 이미 구약의 삶을 살고 있고 한치의 그 범주에서 못 벗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율법 속에 가두기 위해서 막으신 분이 우리 인간의 삶을 자기에게 도취되도록 갇히도록 규정했기 때문 입니다.

(롬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마치 선악과를 따먹도록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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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56:21,

출 6:30 절에서 모세가 입이 왜 둔하다고 했으며 주님은 왜 아론을 대언자로 썼는지 궁금합니다 

아론 역시 할례받지 않은 입인데 말이죠 주님이 영으로 부어 주셔서 말씀하시게 했나요

만약 그렇다면 모세에겐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은사의 차원에서 설명할께요

은사란 일종의 자기가 잘 하는 기술로 보는데 정반대 입니다. 그것을 도리어 착각을 유발하는 정반대의 길
(마치 지금 처럼 자기 삶이 있고 그 삶을 자기가 다룰수 있는냥 착각하듯이 유발케 하는 명령어처럼
또 모세가 두번 바위 쳐서 가나안 입성 못하는 이유도 영의 일(은사직분)을 자기소유성으로 지킬려고 했기 때문)

모세의 둔한 입을 대신해서 아론을 쓴것이 아론은 말을 잘한다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을 둘 다 양발차기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둘 다 쪼다라는 증거 입니다.

이런 어설픈 지도자들에게 누가 따라오겠습니까?

결국 반드시 이런 어설픈 두 사람에게 덤벼들게 하기 위한 죄를 악마성을 유발케 하고 (사사기의 사사들은 더 심합니다.)

영의 일이란 잘할줄 아는 기술로 연결이 아닌 그 반대로써 미움받기 위한 조치로써 단절을 구체화 확대화 하는 것이
직분이요 영의 일입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에게 덤비는 놈은 사대가 망한다 라는 소문을 사기꾼 목사들이 낼 만하죠?

올무에 걸려든 겁니다.

아무도 영의 일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은사란 결국 마귀를 겨냥한 사명입니다.

인간 상대가 아닙니다. (인간끼리의 비교가 아님)

그래서 잘 할 줄 아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못하는 것을 주는 의미로 은사 입니다.

모세가 자기 믿음으로 입이 둔한 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외부의 믿음 곧 은사 영의 일이 덮칩니다.

이 입이 둔한 것을 더더욱 타인을 겨냥한 미련함과 약함이라는 단점 흠이 되는 것으로 즉 부정적인 것으로 앞장세우는 겁니다.

선악의 판단이 유발되지 않고는 못배기는 거죠

인간 개개인의 능력의 차이 삶의 수준 차이에 관심 없고
판대기 전체 집단으로써 이스라엘을 마귀과 대적하는 군사로 삼았다는 자체가
인간 개개인의 삶의 단점 약함 약점 흠이
영의 일에 하등 방해나 미흡함에 일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인자는 더더욱 그런 단점들만 모아 모아 모아서 영의 일을 하십니다.

참선지자가 심판(단절)을 말하기 위해 자기 신체에 담아버리니

타인이 손가락 질 안하고는 못배기듯이 올무를 칠 정도로
마치 위에서 말한 전능자 괴롭히는 자와 똑같은 식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삶이든 죄악이든 뭐든 예수님의 손아귀에 벗어난 행동들이 나온게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마귀도 말이죠.

자 그럼 아론이 할례 받지 않은 입이라는 것은 아마 님의 교회 목사의 주장인듯
그렇다면 자기 입은 할례 받았다는 주장이 이미 깔린 것이겠죠

그게 사기죠 연기죠

그 사기꾼 주장대로
할례 받지 않은 입이라고 칩시다.

더 나은 할례가 있습니다.

마음 판의 할례

그렇게 되면 아론이나 그 사기치는 목사나
둘 다 할례 안한 것으로 둘다 마찬가지 인 셈입니다.

마치 부자 청년이 모든 계명을 완벽하게 지켰는데
예수님이 단 하나도 지킨적 없다고 단절을 이야기 하신

진짜 할례

진짜 계명을 통해 단절이 되어버리듯
예수님이 알려주는 그것이 계명이지
예수님과 상관 없이 자기가 말씀을 보고 지키고 독자적으로 계명지켰다고 다가온 자체가 이미 계명을 무시한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알려주신다는것 자체가  계명 완수 입니다. 완료 입니다.

그 완료를 들이대시는 것을 자아가 없다는 식으로 안 보고
여전히 자기를 쳐다보니
근심하고 등 돌리고 돌아서버리는 겁니다.

저는 성화론자들을 보면 다 부자구나 라고 봅니다.(성화 곧 완료를 붙잡겠다는 자체가 영원한 미완료)

할례가 세례요 세례가 그냥 연합이 아닌
인간 쪽에서의 출발의 단절을 확정지은 주님 쪽에서의 영접인데 죽음을 딛고 다가온 사랑인데

사랑 자체로 예수님을 소유하고 그 소유집착을 타인에게 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목사들의 믿음 없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겁니다.

차라리 모세와 아론 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고
수시로 공격받아서 무시 받는 성령의 은사인 직분을 받았다면

내가 인자(예수님)을 계명 안 지켰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였고(성전 모독죄 참람죄 자칭 하나님이다는 죄)
내가 지킨 말씀을 단 하나도 인정 못하겠다는 그 예수님의 교만을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심판하는 그 기준의 계명을 자기가 소유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의 악마성임을 인자는 유발하시는 겁니다.

이 영의 일에 안 넘어지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넘어져서 일으켜 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저는 개요 세리요 창기요 강도 입니다. 라고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차라리 솔직한 거죠.

* 육체라는 껍데기는 잠시 머무는 장막입니다.

지나가는 것에 집착 하지 마세요

버스를 탈때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인데
영원히 그 버스에서 목적지 없이 말뚝 박을 이유는 없습니다.(버스 자체(나의 삶)를 소유할려고 하기 때문)

버스는 목적지 도착할 하나의 지나가는 소품일 뿐입니다.
어차피 자아란 잊어버릴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을 붙잡을 이유 없습니다.

잠시 머물고 앉아서 내려버리는 입장에 지나가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목적지 곧 사명(은사)이 없기 때문입니다.

(빌 3:12, 개역)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 3:13, 개역)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개역)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자기 목숨을 걸만한 목적성이 없다는 것이 바로 가짜라는 증거이고

그래서 진짜는 자기 목숨 걸었다는 목적을 달성해서 모든 인간이 가짜라는 것이 규정이 됩니다.

(고전 7:19, 개역)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말씀이 말씀을 지키는 완료 외에는 다 가짜 다 미완료
인자 외에는 없습니다.

그 인자가 반드시 나의 손에 죽을려고 당하는 사건만 골라 골라 하시니까

(마치 안식을 인간은 지켜서 자기 자아를 드러내는 식이지
안식에 자기 목숨 걸지는 (자기부인) 않거든요 

그 안식이 바로 날짜 개념이 아닌 누구냐 라는 주인 개념입니다.
계명 지키는 그 놈이 계명 파괴자 입니다. 장로의 유전)

(골 2:8, 개역)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 2:9, 개역)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10, 개역)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 2:11, 개역)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2, 개역)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3, 개역)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개역)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개역)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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