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열심(행함의 법) vs 예수님의 열심(피의 십자가) 의 전쟁마당

구원의 조건 갖추는 법적 열매 알리바이(선악의 지혜) vs 심판의 단절인 죽음만 앞장세움 (십자가의 어리석음)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0-23 21:31:47,


히브리어 문법에서 보면 전치사 레와 비동사 하야가 있으면 ~이 되다가 되거든요

그래서 출애굽기 4장 16절을 직역하면  너는 그에게 하나님이 될것이다  했거든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신약에 보면 말씀을 받은자는 신이다와 연결 시킵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자가 신이다 이거죠


답변 :

(출 4:16, 개역)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출 4:16, 개역국한문) 『그가 너를 대신(代身)하여 백성(百姓)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代身)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출 4:16, 현대어) 『그가 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을 해줄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어 네가 말하라는 대로만 그대로 따라서 말할 것이다.』

(출 4:16, 현대인) 『그가 너를 대신해서 백성들에게 말할 것이며 그는 너의 대변자가 되고 너는 마치 그에게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출 4:16, 한글킹) 『그가 백성에게 너의 대변인이 될 것이며, 그가 그리 되어, 너에게 입을 대신할 것이며 너는 그에게 하나님을 대신할 것이라.』

(출 4:16, 킹흠정) 『그가 백성을 향해 네 대변인이 될 것이며 그가 참으로 네게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리라.』

(출 4:16, 쉬운) 『아론이 너를 대신해서 백성에게 말을 할 것이니, 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아론에게 전하여라. 그러면 아론이 너를 대신해서 그 말을 할 것이다.』

(출 4:16, 가톨릭)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의 하느님이 되어 줄 것이다.』

(출 4:16, 공동)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해 줄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에게 하느님처럼 되리라.』

(출 4:16, 우리말) 『그는 너를 위해 백성들에게 말할 것이며 네 입이 돼 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에게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출 4:16, 새번역)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을 할 것이다. 그는 너의 말을 대신 전달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제가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모르기 때문에 원문 의미는 잘 모르고 번역본을 참고해 보면
구지 히브리어 몰라도 의미상의 목적은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감에 하등 문제 없다고 봅니다.

정작 목적은 모르고 너희들이 모르는 히브리 원문으로 한다는 그 모습 자체가
이미 기죽이는 식이겠죠.

물론 목사는 히브리어 헬라어 알아서 조금더 말씀에 대한 공부 자세를 가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노골적으로 교인들에게 까지 히브리 문법을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가 이정도로 까지 나올 정도면
급하는 증거 입니다.

즉 성령이 증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말의 말빨이 안 먹혀 든다는 것에서 미리 자기방어에 나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해석도 엉터리 입니다.

하나님 같이 되어서 대신 전달할 것이다 라는 의미는 쉽게 말해서 종인데
종이란 어디까지나 인간 눈치 안보고 주인의 메세지만 전달할 뿐입니다.

만약 주인이 엉뚱하게도 늑대소굴에 메신저 종을 보내서 메세지를 전달한 후에 죽일것을 뻔히 알면서도
주인이 보낸다는 것은
이제 달려갈길 다 가고 주님의 곁으로 오도록 하는 조치인 것을
자기가 자기를 챙길려고 하니 주인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왜 저들 교인들은 내 말을 안 듣고 안 먹어주느냐에 대한 불평을 이미 깔고서 그 속내를 감추고
미리 그런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 서로 조심하고 예방하자 라는 취지 입니다.


이런 원리에서 삼위일체나 구원교리나 성전에 목숨 거는 성향들이 다 이런 이유 입니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 없는 모습 말입니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담은 그릇은 그릇일 뿐이지 하나님과 같이 된 자는 아닙니다.

번역 본에서도 그리고 말씀 자체에서도 그런 뉘앙스는 없습니다.

그만큼 그 목사가 무시 받을까 싶어서 미리 자기방어하고
하나님을 앞세워서 사기 칠려고 하는 모습을 그런식으로 감추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다 파악한 이단들의 소리는 솔직하게 노골적인 말들인데 정작 자기가 하고픈데 그렇게 말했다가는
요즘 교인 똑똑하기에 금방 들통나니까 그 동일한 마음을 감추는 것이 그런 식입니다.

소위 목사 말 안들어서 3대가 망했다. 목사 건드리면 그 가정 저주 받더라 라는
유언비어를 만들어내는 식이나? 그런 구절을 인용하는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정 그렇다면 예수님과 비교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고자 성령이 등떠미는데로 인간 속에 들어 왔는데 그 인간 속에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의 속내를 까발려 보니
하나님과 같은 자들이기는 커녕 마귀였다 라는 것을 인간들 손에 죽음으로써 밝혀 냈습니다.


그 이후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이고

그 이전의 참선지자들도 동일하게 다 그릇으로써 보석을 담아 외친 겁니다.


그릇은 그릇일 뿐이지 보석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그릇 삼았지
그릇이 하나님 자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복의 근원이라는 원리로

약속을 담은 그릇인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아브라함이 축복하는게 아니라 여호와가 축복하고
사실상 그 축복이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이 아닙니다. 그냥 안 건드리는 것 자체가 축복인 셈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담은 그릇인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아브라함이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그 자를 박살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림자 입니다.

이것이 새언약에서는 사람 아브라함에 해당되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내리겠다는

언약의 완성에 대한 기준을 세우기 위함인 겁니다.

복 근원 설정이

저주와 편애의 기준 설정으로 새언약을 말하기 위함 입니다.


자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거의 아브라함 언약 때의 복의 기준 영접 유무나
모세언약의 모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여호와를 따르는 구원자의 유무가


예수님에게로 완성된다는 것을 예수님의 이끌어주심 용서하심에 차단된자는

바리새인 처럼 옛언약을 이용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거부하듯이

그 목사는 예수님을 이용하지만 정작 자기가 그릇인 주제에
주님께서 미움 받으라고 종의 역할을 준 은사를

죽음 속으로 집어넣는 은사직분인 육의 거부와 차단의 의미로 안 보고 즉 자기부인을 안하고
도리어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속내를 빙빙 돌리는 식으로 한다는 겁니다.


정작 그 모세 가나안 땅 못 들어갑니다.
성질 부려서 입니다.

그 성질 부린 이유가 자기에게 얼마전에 벌어졌던 바위를 쳐서 샘물을 내게한 것으로 백성을 먹인 것이
자기가 행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행하심이였고 그 바위가 곧 예수님 자신 여호와 자기자신을 치심으로써 우리에게 나음을 입게 하는 방식인데

모세는 주님의 희생을 그 순간 잊어버리고

자기가 이렇게 무시받고 푸대접받는 것을
시원하게 한 방에 날려버려서

저들을 반드시 내 힘으로 무릎 꿇게 만들겠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못밖는 짖을 해 버린 겁니다.

자 그러면 그 목사는 모세가 변화산상에서 어차피 구원받아 용서 받았다면

나도 구지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 라고 주장하라고 성경말씀이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제발 옷 벗겨야 합니다.

그 따위 정신으로 목사짓을 할려고 하니 자꾸 남을 가르쳐 들려고 하고
자기 밑에 둘려는 정치술을 부리는 겁니다.

교회가 정치 집단인가요?

히브리 원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또 하나님의 메세지를 대신 전달하는 메신져 역할을 맡겼다면

그 메세지를 듣는 자들이 이 메세지를 잘 듣던 안 듣던 메세지 내용이 알아서 골라서 가릅니다.
목사가 가를 필요 없습니다.

목사는 메신져일 뿐이지 누가 천국 가냐 지옥 가냐를 가를 입장이 못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보내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지옥 가라고 할 껀가요?

그런 사심이 없다고 누가 보장하나요?

목사는 사회 생활을 안하다 보니
더더욱 자기를 건드리는 자에 대한 사적인 감정이 심한 자들인데

그런 정신병자와 같은 목사를 껍데기가 아닌 소품이 아닌 하나님과 같다 라는 존재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목사는 열심히 우편배달부 역할 로써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전할 뿐입니다.

건방지게 예수님도 죽이는 이 세상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따질 입장이 못됩니다.

교회라고 예외 없이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수두룩 빠글빠글 모인 곳이니

그저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다가 죽을 수 있다는 그 영광에 족하면서
교회 탐심 부리지 말고 오늘 하루 하루 외칠수 있는 하루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워낙 감사함이 없기에 자꾸 법과 교리와 시스템과 조직이나 논리 합리 등의 지나가버릴 안개에 신경 쓰는 겁니다.

그런 옛언약의 옛 부대 마저도 새언약의 차이를 드러내는데 증거할 줄 모르기에

목사 자신의 개인에 집착하는 겁니다. 감사함이 없기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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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설명한거 하나 더 설명할께요.

사도 직분이라는 것을 성경을 완성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달성 되면 사도라는 직분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미 사도가 다 완료한 그 성경을 떠돌아다녀서 (자기 눈에만) 뭔가 어설퍼보이니 구색을 갖추겠다고 하는 짖꺼리로
종교시스템의 있어보임의 겉치레하고자 성경완성이라는 니케아 회의로 공식화 합니다.

즉 정치성이지요.

그러나 볼모작전에서 말했듯이
저들이 그런 정치성을 감추고 성경확정이라는 의미로 자기들의 교회를 정통교회라고 그 당시 분산된 교회의 이미지를 자기들에게 시스템을 갖춘다고

기독교를 고급화 하는 있어보이는 형태로 가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성령의 일이 그들 속에 탁란하는 식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인질로 삼아서 자기들 교회의 정치성에 동원했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이런식의 교회역사를 마귀의 역사임을 알려주는 식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나타난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이런 내막을 까발리는 식인 겁니다.

자 그럼 후대는 더더욱 더 깊게 드러납니다.

이런 예가 하나 있고

또 후사도 라는 용어와 교부 라는 용어도
말도 안되는 소리이듯이
이미 영의 목적 달성한 일로써 사라진 것을
그들은 잇고 잇고 전통성의 확정으로써 제대로 내려온 계통 족보 반차라고 우기는 자체가 이미 악령이다는 겁니다.
(이런 성향은 빛과 어두움의 대립에서 항상 드러났습니다. 성경에 수두룩 합니다.
옛언약의 성향은 사람들이 지금도 목숨거는 것들을 살펴보면 알수 있습니다. 교회죠.
그래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는 것을 예수님이 이룰려고 한 쪽은 성전에 목숨 걸고
그 목숨거는 성향을 반드시 동원해서 예수님 자신이 성전으로써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사는 죽음
곧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죽었다가 다시 세워지지 않는 성전은 가짜라고
그 차이를 극대화 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겨냥한 모든 언약 , 약속, 영, 온전함 입니다.)

그래서 정통 주의 정통개혁주의 라고 역사를 내세우는 교회마다
이상하게 예수님 중심으로써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중심으로서 약점있는 그 목사에게 약점 보완책으로 운영이 됩니다.

자 바로 이런 내막들을 세상이 아닌 교회가 가장 마귀 역할을 제대로 톡톡히 한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이 올무친 강도 소굴에서 왜 인간들은 자력으로 옛언약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지

그리고 왜 새언약은 이런 인간들의 종교집착의 내막을 까발리면서 그 차이를 증거하는지?

모조리 다 예수님에게 촛점을 모으고 예수님만 쳐다 보고

초막 셋 짖는 것 보다 너희는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 라고 하신 하늘의 음성대로

더 나은 제사(십자가)가 왜 [번제와 제사와 율법지킴] 보다 더 나은지를, 고맙게 저들과 다를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통해서 그 차이를 알려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면

자기를 챙기는 것 보다 더 근심스러운 것이 없고 시험드는 일이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주님을 쳐다 보라고 일부러 바로 옆에서 목사를 쳐다보라고 의도적으로 발버둥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아 내가 쓸데없는 것을 쳐다 봤구나 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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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21:44:41,

그리고 진정한 출애굽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답변 :

자 그럼 악령도 어떻게 출애굽을 증거하는 지를 봐야 합니다.


이미 완료한 옛언약을 부여잡는 것이 항상 마귀에 속한 자들의 성향 입니다.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넘어갔으면
다윗언약은 새로운 개념으로써 죄를 깊게 다룹니다.

그런데 다윗언약 곧 다윗이 알게 된 그 여호와를 기준으로 똑같이 믿지 못하면
아무리 이제서야 모세언약을 책걸이 했다 라고 다가오는 자들은 악령에 해당되는 자 입니다.

바로 그 자들이 성경문자 율법의 명령을 지키자 라고 나오는 거짓선지자 입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는 겁니다.

기존 성전의 파괴와 기존 이스라엘과 국가 체제가 다 날라가 버리고
미래에서 덮치는 새성전을 쳐다보지 못하는 자는 다 악마에 해당되게 말이죠.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 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내부 속에서의 두 패로 갈라지는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뭐가 부족해서 왜 또 그 속에서 남은자가 나오느냐 라는 겁니다.

구원인데 또 그 속에서 다시 구원을 받지 못하면 안된다 라는 식이 되어버리면
기존의 구원을 폐기처분 시키는 식으로 구원의 활동이 전개된다는 말이 되어버리니

차라리 미래에서 오는 구원을 폐기 무효와 시키고 기존의 구원관을 사수하는것이 훨씬 편한 겁니다.

그런데 다윗언약에서는 그것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가를 날려버리고
바벨론 포로로 다 잡혀가고
소위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을 경험하고 눈으로 봤던 자들은 일부러 다 죽이는 식으로

세대교체를 해 버립니다.

아니 그런 지푸라기의 희망은 이미 광야 40년에서 보여줬기에
세대교체의 여지도 없이 이제는 이스라엘 자체는 어디에도 없는 완벽하게 공중분해 된 겁니다.

이 단절이 바로 새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새언약에서의 새이스라엘 새백성 새하늘 새땅 이라는 새술을 새부대에 담는 의미로써
준비하는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한 제물에 집중이 되는 겁니다.


그 제물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주는 선취가 바로 인자 (다니엘 에스겔 이사야 등등에게 덮쳐진) 고난 받는 종(사53장)의 모습 입니다.

자 이 고난 받는 종을 앞장세우는 여호와와 그 반대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외치는 평화 평화 외치는 거짓선지자의 하나님과 대비 시키는 겁니다.


절대 안 망한다는 이스라엘 국가 민족체제

그래서 더더욱 왕권과 그 왕권의 힘을 받쳐주는 종교시스템과 합작이 되어서
힘이 될만한 모든 것은 다 끌어모으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결국 자기들끼리 힘모으기 위한 서열싸움이 오히려 힘을 소진하는 등등의 일들처럼

인자의 모습을 자기 신체에 담아서 외치는 참선지자들의 외침을 예언을 역사가 아무리 막아서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자 이런 역사의 경험을 누가 또 흡수 습득 스폰지처럼 빨아 들이고 있나요?

바리새인이죠

이 바리새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하는지

우리는 응원을 해야 합니다.

너희들 바리새인이야 말로 예수님을 제대로 드러내는 그 차이의 반대편에 놓였다 라는

임마누엘을 완성하기 위해서

너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이 정확하게 틀리다는 그 경계선을 제대로 그어주는 겁니다.


자 이제는 이런 예수님을 죽이는 상황까지 다 알고 지식 습득하고 다 본 입장에서
오늘날 바리새인 역할을 하는 자와
그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임마누엘은 또 어떤 모습으로써 차이를 드러낼까요?


새언약 곧 신약에서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꾀더냐 라고 앞으로의 상황 또한 미리 앞당겨서 다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즉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자 어리석은 걸림돌 미련한 저 부정적인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자기를 챙기는데 과거의 모습의 분리 속에서 다 드러나듯이
그 성향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출애굽요?

진정한 출애굽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지식화 되어서 내려오는 마귀사상이고

진정한 출애굽은 예수님과의 관계성 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핵심인 예수 안에서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하나님 vs 예수님의 차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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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하나님 열심 vs 예수 그리스도 열심(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김대식  (Homepage)  2004-12-16 15:56:53, 조회 : 4,799, 추천 : 93

[인격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열심 vs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인격적 이다 라는 표현으로 손성식 목사님에게 질문한 내용과 그 답변이고 그 밑으로는 참고하실 자료 입니다.

손성식 목사  아빠방  http://myhome.naver.com/ssson1969


질문 : 인격적 이다 라는 말을 설명 부탁 드립니다. 김대식 41 2004-12-07

안녕하세요. 우리교회 김대식 입니다. 지난번 목사님의 답변에 감사드리며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손목사님의 글에는 십자가 마을과는 다르게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인격적 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묵시에서는 인격이라는 의미와 역사 속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전혀 인격스럽지 않는 비인격적인 즉 은혜(우리의 모든 자존심을 묵살하는)라는 의미가 아닐런지요?

신학자들에게서는 인격 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으며 손목사님은 어덯게 사용하시는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각각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답변을 기다리며

또 질문 하나 추가 합니다. 교회를 유기체 라고 표현들을 많이들 하곤 하는데요 유기체 라는 말뜻이 뭔지요 그 의미의 취지를 밝혀 주시고요, 목사님은 어덯게 보시는지 의견 좀 알려주세요.


주님의 간섭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답변 : [Re][인격성에 대하여] 손성식 4 2004-12-16

[인격성에 대하여]


제가 [교회교의학 따라읽기 20]에서 언급하고 있는 계시의 인격성에 대한 논의를 접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그 곳에서 박 영선 목사님께서 설파하고 있는 계시의 인격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를 납득시킬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계획과 뜻 은혜가 구원의 전적인 원인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거의 같은 수준에서 우리의 인격적인 항복, 지성적인 동의, 심정적인 인정을 요구하신다는 것이 계시의 인격성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생각이 남포교회 박 영선 목사님을 성화쪽으로 인도하게 만드는 근거입니다. 물론 성화를 통해서 구원받자는 것이 아니라, 성도다움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요구 외부에는 개판치는 현실교회가 자리잡고 있지요.

하여튼 [인격성]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계시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힘으로 눌러서 항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으로 죄인을 전인격적으로 항복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임을 주장하면서 박 목사님과 견해를 약간 달리하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냐구요? 그냥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의 열심이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입니다. 좀 더 거칠게 말하면 전자는 신론중심이고 후자는 기독론 중심입니다.

자, 그러면 제가 어떤 방식으로 인격성을 이야기 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인격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십자가-부활-승천이라는 독특한 사역을 통해서 죄인에게 전달되는 끈질긴 사랑입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라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로마서 8:38-39)라는 뜻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인격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대답해주시고 혼내시고 용서하시고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등의 내용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묵시라는 인격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역사를 공격하는 묵시적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항상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요? 우리는 역사적 존재이며 욕망하는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성]에는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 자리잡고 있지요. 좀 쉽게 말하면 마치 고집싸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하는 고집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집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성도란 십자가의 고집으로 자신의 고집이 항상 꺾이는 현실속에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답변하고 다른 질문들은 다음에 답변을 계속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참고 글

[교회교의학]따라읽기 20    손성식

『교회교의학』1/1
저자: 칼 바르트 옮긴이: 박 순경
§6 하나님 말씀의 인식 가능성

【계시의 인격성】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시체'이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거나 그것을 이룰 가능성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시체'라고 해서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욕망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항상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의 구원욕망을 우리는 '종교'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쟁점이 부각됩니다. 즉 죄인 편에서 추구하는 하나님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항상 충돌되며 서로 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에서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은 죄인들의 신앙을 '오냐 고맙다!'라고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상숭배'라고 거부하며 호통치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의 종교를 야단치는 하나님의 싸움을 우리는 [언약]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하나님]이란 죄인들을 향하여 죄가 무엇인지 물으시며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려구요? 하나님의 은혜성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서 말을 걸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여기서 저는 개혁파 신학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누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서 말을 걸고 다가오시는 부분, 다시 말해서 죄를 걸고 넘어 오시는 하나님을 계시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계시란 사실 종교라고 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이것은 예전에 에밀 부룬너와 칼 바르트 사이의 논쟁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그것까지 자세히 다룰 수는 없고 일단 [계시의 인격성] 문제의 핵심으로 넘어갑시다.

[계시의 인격성]은 박 영선 목사(남포교회)의 핵심주제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하나님의 열심』(새순출판사)은 [계시의 인격성]이라는 주제로 [믿음]이라는 문제를 풀어간 역작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 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아무도 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모두 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열심히 만들어 내신 작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믿음 문제를 풀어낸 것은 압권입니다.

여기서 먼저 [계시]라고 했을 때 한 가지를 지적해야 겠습니다. 박 영선 목사가 말하는 [계시]란 정보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격적인 차원입니다. 여기서 정보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마치 상품을 진열해놓고 필요한 것을 찾아가게 만드는 수동적인 내용이 아니라, 개인에게 찾아와서 전인격적인 항복을 받아내시고야 마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성의가 있고 우리가 이해할 여백을 항상 남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요 사실이라는 한 가지만으로 막 밀고 들어오지 않고 이해에 필요한 긴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발하는 것을 용납하고 이해하신다는 것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는 이성의 인과율을 공략합니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부터 '결심'이나 '확신'이라는 문제가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은 이러한 인과율을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은혜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의 원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은 우리쪽에서 믿음의 결정을 내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까지
미쳤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같은 구절들이 마치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에게 그 분의 은혜를 확인시켜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내시는 인격적인 대우인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설명하심으로써 마음으로 항복하여 그 부요로움에 동의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계시의 [인격성] 개념입니다. 특별히 기억해야 할 부분은 인간을 인형처럼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시켜 항복시킨다는 의미에서 인격개념을 들고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납득시킬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계획과 뜻, 은혜가 구원의 전적인 원인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거의 같은 수준에서 우리의 인격적인 항복, 지성적인 동의, 심정적인 인정을 요구하신다는 것이 [계시의 인격성]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계시의 인격성]과 [언약 사건], [은혜의 우발성]을 같이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언약이란 죄를 걸고 넘어오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 사건으로부터 죄가 드러나고 은혜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죄란 인간이 죄에 소속되어 빼도 박도 못한 사태라는 것이고 은혜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계시의 인격성]은 어떤 내용상 관련이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계시의 인격성]이 [언약 사건]의 정보화되고 지식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사건자체가 정보화 되어서 '아! 그래 몰랐는데 이제 알겠구나'라는 지식적인 측면에서 '아 하나님이 옳으시며 대단하시구나'라는 인격적인 항복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그리고 [계시의 인격성]이 이성의 인과론을 공격한다고 했지요. 이런 맥락에서 [은혜의 우발성]도 같은 뜻입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편에서 나의 죄를 물으시면서 다가오셔서 은혜에 항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상당히 같은 늬앙스이지요.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점은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열심을 다 차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계시의 인격성]과 [언약사건],[은혜의 우발성]과 차이는 뭘까요? 제가 보기에 [계시의 인격성]은 성부 하나님으로 시작하고 있고, [언약사건]이나 [은혜의 우발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나아가고 후자는 '십자가중심'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두 가지 모두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안목으로 봅니다. 논의가 너무 길어진 것 같지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http://woorich.net/tboard/read.cgi?board=board4&y_number=846&nnew=2

메일이 와서 수정을 요청하시길래 새로 수정했습니다. 

 

[re] 하나님 열심 vs 예수 그리스도 열심(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2 
김대식  (Homepage)  2004-12-23 14:10:16, 조회 : 183, 추천 : 22

121   [Re][인격성에 대하여]2 손성식 20 2004-12-18

등록일시: 2004-12-18 20:13:24 / IP주소: 211.228.153.244


김대식씨의 질문:[묵시에서는 인격이라는 의미가 역사 속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전혀 인격스럽지 않는 비인격적인 즉 은혜(우리의 모든 자존심을 묵살하는)라는 의미가 아닐런지요?]

제가 예수님에 대해서 그냥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쓰지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또는 "인자라는 묵시적 인격체"라는 용어를 등장시키고 있음을 눈치채셨겠지요.

그냥 일반적으로 널리 애용하고 있는 용어를 쓰면될텐데 왜 이렇게 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중을 역사에 대한 심판으로 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묵시란 역사를 고발하고 심판하실 위치에 계시는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어입니다. 마치 연극이 끝난뒤에 모든 등장인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커튼을 열어젖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즉, 아담의 역사가 왜 죽음의 역사이고 굴레의 역사인지,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시면 마치 시간적인 흐름처럼 나열되어 있지만, 그것은 묵시적으로 완성된 그림입니다. 시간적인 스케줄이 아니라, 완성된 전체 그림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앞으로 종말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확인하려는 노력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성된 그림으로서 역사가 아니라 묵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역사 순서가 아니라 묵시 그림입니다.

역사의 휘장을 열어젖혀서 순간순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알게된 것이 뭐지요?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무엇에 대해서요? 사탄과 그 세력에 대해서입니다. 어떻게 승리했지요? 희생당하시는 모습으로 그렇습니다.

위에서 제기한 김대식씨의 질문은 제가 보기에 인격성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언약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인격성은 실제로 "말씀의 인격화"입니다. 즉,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셨더라도 욕망을 발산하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이루어내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하나님께서 말로만 아니라 온 몸으로 보여주신 묵시의 목적이 무엇인지가 궁금하지요? 제가 볼때 나의 구원이 일차적 목적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만유가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는 것입니다. 즉, 묵시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헤쳐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은혜"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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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23

다시 읽어보니 얼마전에 질문한 인격적 이라는 표현과 또 개체적이라 라는 용어를 썻는데 이 인격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던 질문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그 때에 제가 인자 라는 의미를 잘 모른 상태에서 답변을 보다 보니 제가 원했던 답변과 달리 답을 해서
여전히 인격적 이다 라는 의미가 모호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 이제 좀 알겠네요.

즉 기존의 교회들이(님 교회 목사처럼) 주장하는 인격적이다 라는 것은 쌍방향 언약을 보는 사고방식과 같습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이 답변한 인격이란 예수님이 곧 말씀의 인격화 즉 육으로 오신 사건인데

사람들은 이제 육으로 오신 예수님과 대화하고 만지고 쌍방간의 주고받음을 실제 역사 속에서 펼쳐 보일수 있는 식으로 실제로 주님의 낮아지심인데

그렇다고 그 낮아지심을 통해서 나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을 방식으로써 쌍방간의 인격적 만남이 아닌 일방적 만남으로 즉 역사와 역사의 만남이 아닌 가능과 가능의 만남이 아닌

역사와 묵시의 만남에서 한 쪽이 한 쪽을 감당하는 식이다는 것이 인격적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묵시인 예수님 곧 인자는 역사 속에 있는 우리를 빼내기 위해서 역사가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행동을 하시는데
그것이 단절인 십자가 입니다.

그 단절 속에서의 만남이 바로 손목사가 말한 인격입니다.

건방지게 나도 인격이니 예수님과 맞짱뜰수가 있다는 그 어떤 쌍방이나 전제성을 차단당하고
일방적으로 오신 인격 앞에

진짜 그 인격을 맞이하도록 나의 인격(있지도 않은 인격)을 무릎 꿇도록 박살내고 일방적으로 천국이 침노하듯 쳐들어 와서
내가 영접해서 맞이하는 나의 선택권이 아닌 정복이라는 전쟁의 형태로써 나에게 쳐들와서 관계를 형성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개개인적인 개별성이 모아져서 개체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완성으로 모든 인간을 이 사건에 모으는 전체 판대기를 완성함으로써 개인을 다루지 않고 역사 전체의 배후와 상대함으로써

하나님의 열심과 예수님의 열심의 전쟁 마당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즉 처음 질문의 하나님과 같은 메신져가 바로 바리새인이 말한 하나님의 열심을 주장하는 자들이고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 일체 연결점이 없이 등장한 인자의 모습으로써 하나님의 열심을 박살내는 예수님의 열심을 자기부인(십자가)로 완성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너의 하나님 곧 하나님의 열심과 나의 하나님 곧 예수님의 열심이 다르다 라는 임마누엘 전쟁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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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확인하러 가보니 더 이상 없음으로

이제 결론을 내려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음 입니다.

새언약의 완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요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 사랑치 않는 자는 다 지옥 갈자 입니다.

지옥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이 완성하신 겁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함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살과 피 흘리심이 없는 하나님을 가짜교회가 외치고
하나님과의 일치성을 주장하면 되지 자기부인이 필요없는 겁니다. 자기죽음은 구지 필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싸움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인간과 마귀의 힙직 창작품)과 예수님(人子)의 전쟁입니다.

열매론도 마찬가지 인간의 행함 창작의 열매와 (부자청년))
예수님의 열매는 부자청년들 등돌려 보내버리는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자기부인 입니다.

인간은 자기 열매를 버린다는 것은 아무리 예수님이 그렇게 주장해도 용납못할 일입니다.

열매 자체가 예수님에게 인정받기 위함이요,
구원의 알리바이인데 아무것도 없이 무슨 수로 인정받으랴?

그러나 예수님은 다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 자신이 직접 이루신 자신의 피만 바라보고 피만 자랑하라고 합니다.

내가 흘린 피도 아니요 내가 수고도 하지 않은 피인

타인이 흘린 피를 자랑하다니? 그것도 내가 실수로 못알아보고 죽여버린 그 타인의 피만을 자랑하다니?

이것이 바로 피란 모든 것을 단절시키기 때문에

창세전에 계획된 예언대로만 이루기 위함인 것입니다.


*
참선지자는 이 미래에 오실 인자(심판)를 주장하고
거짓선지자는 기존의 하나님을 주장한다.

복음은 십자가를 주장하고 (단절과 단절의 만남, 죄인 원수와 심판받는 인자와의 만남 = 나다나엘)
다른복음은 자아와 하나님과의 연결성을 주장한다. (니고데모 = 어떻게 하면?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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