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 :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



죽음에 대한 해석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0-26 21:18:00,

출애굽기 12장 5절에서 왜 양이나 염소나 인가요


2008-10-26 21:43:15,

출12:11절의 의미는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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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질문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녹음이나 글로 남기고픈 찰나에 이 질문과 결부시키기에 좋다고 여겨서 이 질문과 최근 공부 인자(人子)를 중심으로 해서 답변을 하고자 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령님은 인간의 소유품화 된 메시야를 인자를 앞장세워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자란 인간이 절대로 저렇게는 되기 싫다 라는 철저한 거부성 단절성을 보여줍니다. 어떤 이유로도 나는 저런 인간 상(像)은 절대로 연결되고 싶지 않다 라는 이미지만 다 끌어 모아서 인자 속에 담습니다. 이유없이 미운 모습. 바로 이 모습만 앞장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과 연관이 됩니다.

그렇다면 관계란 바로 이런 인자의 모습과 연관된 모습만 보여주는 관계만을 성령은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속내가 이 인자로 인해서 다 들통날 판국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개인 뿐만 아니라 전체 인간의 이미지가 다 허상임을 인자만이 밝혀내시는 겁니다. 곧 우상이라고

자 그럼 질문에 답변을 해 보도록 하죠

언약이란 그 앞 전의 언약을 담고서 증거 됩니다. 모세언약이라면 앞의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노아언약 그리고 창조언약을 다 담고서 그 언약의 완성을 완료로써 증거하면서 모세언약이 진행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그 앞전의 언약에 상대적인 비언약적 요소를 극복하고 또 이게 중요합니다. 또 극복 뿐만 아니라 더더욱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다음 언약인 다윗언약에 바톤을 넘기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비언약적 요소가 앞 전에 어떻게 제시 된 겁니까?

우리가 앞에 질문 답변에서 살펴본 야곱의 유언을 힌트로 삼아보면
야곱은 언약의 완성을 보고 동시에 12 아들들에게 유언 곧 약속의 언약을 선포하면서
약속과 그 약속을 거슬리는 비언약을 더더욱 구체화 합니다.

이런 모습은 인간의 지금 행동여부에 의해서 죄나 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비언약적 성향을 예언으로 깔아놓고 그 깔려진 예언대로 비언약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창조 언약의 비언약은 비창조입니다. 즉 무질서죠. 어두움입니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성향과 (보편화 되고 공개된) 생명나무 (단절 차단되고 비밀화 된)의 성향으로써 창조언약과 비창조 언약의 성향이 점점점 구체화 되는 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의 두 계열에서 보여줍니다. 가인에게 이마표를 줌으로써 그들의 사고방식이 퍼지도록 합니다. 악을 퍼트려서 약속이 중심이 되는 활동이 되도록 배경을 깔아버리듯이 이것을 더 구체화 시키는 것이 노아언약에서 보여줍니다.

노아언약에서는 창조언약에서의 비창조언약의 심판과 그 심판을 구체화 시키는 성결제사에서 노아홍수와 무지개의 약속이 구체화 되는 겁니다. 이 은혜성을 기준으로 심판 속에 살아남은 자들 속에서 두 갈래로 갈라버립니다. (용서의 의미를 역으로 이용하는 인간의 선악판단을 전쟁(심판)의 근거로 삼음. 마 18장 일만 달란트 탕감 비유 )

셈 야벳의 뒷걸음질로 허물을 덮어버리는 은혜와 반대로 선악의 판단으로 홀라당 벗은 노아 아버지의 수치를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함의 사고방식을 퍼트려 버리는 겁니다. 바로 이런 함과 그의 열매인 가나안의 사고방식인 선악의 사고방식을 여호와는 겨냥하고 전쟁을 하시는 겁니다.

또 노아언약에서 벌어지는 홍수 심판 이후에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부정한 짐승의 허물을 피로써 덮어버리는 번제를 드립니다.

(창 8:15, 개역)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창 8:16, 개역)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창 8:17, 개역)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창 8:18, 개역)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창 8:19, 개역)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창 8:20, 개역)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창 8:21, 개역)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 8:22, 개역)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자 이런 거룩의 의미를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과 대조를 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를 그 뒤의 언약들은 점점더 구체화 시킴과 동시에 이 성결의 제사의 의미도 구체화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아브라함 언약은 국가체제의 영역 곧 나라와 나라의 세계와 세계의 싸움을 보여주기 위한 민족형성의 전초단계입니다.

그러나 악의 나라가 구체화 되는 부족장 시점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써 믿음의 민족을 어떻게 형성하는 가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 생각에서는 순풍 순풍 놓는  인간의 생식능력으로써 민족을 이루면 된다고 여기지만 바로 그것이 비창조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죽은태의 불임여성과 남자의 생식 능력 밖에서(할례=세례) 낳은 자식이 바로 약속의 자식이 되고 약속의 민족을 이루는 전초가 되며 그들이 약속의 전쟁을 벌리게 되는 겁니다. 그 전쟁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여호와의 전쟁(거룩한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주는 것이 바로 멜기세덱 살렘 왕 전쟁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함 열심과 대비된 자기를 이끄는 믿음과의 차이를 이삭의 제사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노아 성결제사의 구체화)

즉 누가 죽는다 라는 것을 누가 희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런 그림자의 제사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겁니다.

이미 노아 언약 물론 창조언약에서의 아벨의 죽음 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동물의 피 흘림은 그 동물 자체의 피 흘림과 상관없고 예수님의 피 흘림과 연관된 겁니다. 자 그렇다면 바리새인이 그 의미를 예수님과 연관을 못 시키고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그 의미를 십자가와 연관 못 시키는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주님이 일방적으로 막았다는 이유없는 미움 때문이지 그들에게 잘잘못을 따질수 없습니다.

자 이제 출애굽기의 양과 염소는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이삭의 제사를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양과 염소냐 라는 것은 의미 없구요, 정결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단 이 정결한 짐승도 이미 창조때부터 분류된 예수님의 분류이지 인간의 분류는 정결과 부정함을 나누는데 어떤 권리도 없이 소외된 입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과 염소라는 것은 예수님을 드러내는데 의미있지 특히 수양 암소 수소 세세하게 분류되는 레위기의 제사와 제물의 세세하게 인간이 손 못댈 정도로 자세히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거룩에 대한 인간의 접근 불가와 또 죽음을 다루는데 있어서의 철저한 죄 해결의 완료성에 인간이 어떠한 보탬도 된 적이 없는 차단의 의미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양과 염소를 마련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보탬이 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마치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데 있어서 그 나귀를 준비한 것이 그 나귀의 주인도 아니요 그 나귀를 데리고 가는 제자의 거래술도 아닌 창세전의 철두철미한 계획이듯이
예수님 자신이 제사를 드리고 또 직접 제물이 되시는데 있어서 인간은 철저한 소외 입장 뿐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소외에 참여 시켜준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하면 직접 멀뚱히 구경만 하라는 입장이 아니라. 또 그렇다고 유대인처럼 그림자만 잔뜩 모아서 연기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직접 뛰어들도록 성령을 보냈다는 겁니다.

자 그럼 이 양과 염소를 그냥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태어난지 8일 된 흠없는 양과 염소입니다.

이것은 이삭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낳은 약속의 자식이 약속의 민족을 이루듯이
이 약속의 의미를 여호와 본인이 이루는 겁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은 늘 방해꾼 노릇 밖에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믿음은 결국 주님이 다 이룬 것을 공짜로 다 아브라함에게 퍼붓는 의미인데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 완료를 받았다는 것에서 자기가 자기열심으로써 한 것이 미완료 뿐임을 비로소 본 것이 바로
미완료를 버리고 완료를 믿었다고 로마서 4장에서 다윗을 통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삭이 난 지 8일 만에 할례 라는 단절 차단 이라는 영의 일 약속의 일을 행하듯이
출애굽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할례를 하듯이 저 애굽나라와의 단절 차단 그리고
여호와 세계와 연합 된 것이 바로 이 피 때문인데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인한 피 언약인데 그 형태가 이삭의 희생제사를 또 노아의 성결제사 또 아벨의 제사를 형식이 아닌 그 근본에 깔려진 약속의식의 연결로써 전개 되는 겁니다.

이 난 지 팔 일 된 양과 염소의 유월절 희생제물의 의미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한 철저한 응징입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애굽은 장난으로 여기고 이스라엘과 오늘날 교회는 중심내용은 다 무시하고 껍데기만 중요시 여겨서 장사하는 생계수단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화론은 결국 목사집단의 생계수단일 뿐임)

또 그렇게 된 것이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할례나 세례나 주님 나라의 형성과 그 백성들은 결국 예수님 홀로만 다 하시지 어떤 인간도 보탬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출 12:5, 개역)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출 12:6, 개역) 『이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출 12:7, 개역)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출 12:8, 개역)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출 12:9, 개역)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출 12:10, 개역)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출 12:11, 개역)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왜냐하면 생계 곧 생명에 대한 해석은 죽음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냐를 통해서 생명의 해석도 달라지는 겁니다.

죄와 죽음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힌트로 요나는 직접 큰 물로기 뱃속인 음부의 권세 속에 들어가보니
자기가 자기 식으로 오해한 약속을 죽음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기적으로 이루어진 나라요 약속의 민족입니다. 자기들의 생명은 이 기적 때문입니다. 모세의 계통을 잇는 자라면 이 기적 한방이면 다 되는 겁니다. 약속이니깐요.

그런데 바로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가 바로 악한세대라고 합니다.
이유는 너희들이 먹은 양식은 바로 생존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희생물로써의 양식이라는 겁니다. 그 혜택이 희생으로 인해서 온 것인데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은 희생에는 참여할 생각은 없으면서 그 혜택은 볼려는 그야말로 악마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정작 핵심이 되는 중심인 피를 빼버린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그것은 부자청년에게서도 나타나고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열매주의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들의 해석은 결국 죽음을 해석을 못한다는 겁니다. 개인의 죽음이 아닌 하나님의 죽음을 해석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말이지요.

죽음이라는 정의도 죄라는 정의도 결국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나지

인간의 행동 여부로 인한 죄와 죽음은 의미 없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양식이라는 해석은 바로 출 12:11에서 나타납니다.

(출 12:11, 개역)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양식이란 생존을 위한 양식이어야 할 터인데 그 반대입니다.
집단 자살을 위한 양식인데 개인이나 집단의 죽음이 아닌

의인의 죽음에 동참입니다. (할례 = 세례)

이삭의 희생 제물 됨에 아브라함이 동참 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여긴 겁니다.

이것을 점점 구체화 한 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사입니다.

집단 이스라엘이 바로 이 어린양의 희생 제물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양식을 그냥 안 먹고 급히 먹고 또 맛을(간을) 내지 않고 또 고통스럽게 또 아무 맛 때까리 없고 또 남기지 않고 전부다 먹어야 하는 양식

즉 죽음에 동참입니다.

안정된 상황에서 편안한 집에서의 오순도순의 식사시간이 아니라
빨리 떠나야 한다는 나그네의 차림과 나그네의 지팡이 신발처럼
뭔가를 말하는 메시지를 담은 식사모습입니다.

즉 이 땅은 가짜야 이런 세계는 가짜야
우리는 이 가짜를 이런식으로 증거한다 라는

빨리 떠나는 것으로 인해서

이 땅의 양식은 다 가짜야 라는 식으로

또 단절을 통해서 도리어 이 땅을 차단시키는 의미입니다.

본인들이 이 땅에서 왕따(단절)를 당한적도 없는데 스스로 왕따 당했다는냥 유발하고
또 역으로 이 땅 자체를 왕따 시키기 위해서 차단된 세계를 증거함으로써 이 땅 전체를 이 땅의 세계 전체를 자기들이 차단 시키는냥 허겁지겁 후다닥 뜰려고 빨리 빨리 뜰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 모습이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영생 나무를 따먹을까 싶어서
마치 선악과 나무 잘 따먹었다고 야호 성공 외치고 동시에 후다닥 생명나무를 허겁지겁 치우는 모습처럼 그런 양상을 보여줍니다.

자 이렇게 되면 양식이라는 생명에 대한 해석은 일제 접근 불가가 되는 식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요6장에서 자기의 살과 피가 생명의 양식이다 라고 하니까
그동안 예수님이 벌린 기적을 통해서 많이 따라다녔는데 그 계기로 다 떨어져나가버리는

단절의 양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거짓 목자들이 다 생명을 바로 접근해서 생명을 증거하면 된다고 보고 있지만
정작 예수님은 또 성령님은 죽음을 앞장세운 양식(생명)을 증거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절기날에 이런 형태의 게임들이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모습이 티비에서 우연히 본적이 있는데 여러명의 아이들이 동그랗게 촘촘히 모여서 다리 하나는 깨금발 짚고 또 다리 하나는 다른 아이들의 발에 걸어서 동그라미 원을 그리면서 한 쪽 방향으로 손뼉치면서 폴짝 폴짝 뛰는 놀이인데 유월절 바로 이 모습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양식은 양식인데 나를 위한 양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양식이 아닌
나도 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 동참합니다 라는 죽음에 참여입니다.

(출 12:8, 개역)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쓴 나물과 무교병

이런 것이 더더욱 구체화 된 것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의 잔, 쓴 잔을 마시라 라는 겁니다.

(마 20:2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 20:23, 개역)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것은 어떤 누구도 자발적으로 마실수가 없고 이런 양식을 먹는데 자기의 잘남이나 행함이 일체 동원될 수 없는 단절을 명확히 하는 철저한 소외성을 말합니다.

참 양식인 주님의 살과 피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이 살과 피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아무 한 일이 없을 수 밖에 없는데 성화론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이런 양식을 생명으로 증거하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를 먹고 마시는 양식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도리어 이런 참 양식에 단절을 보여주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대비 시킨 창녀 세리 강도 고아 과부 문둥병자 실로암 소경 등등이 참양식 때문에 불쌍히 여겨달라는 단절을 제대로 보고 참양식에게 무릎 꿇는 자들입니다.

생명을 증거하면서 생명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들의 대표성이 바로 부자청년 니고데모 오늘날 성화론자 성전 안에서 금식과 십일조 낸 것을 자랑하는 바리새인 또 두 큰 계명을 지켰다고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확정지을려는 율법사 그러나 정작 강도와 같은자 였음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밝혀내십니다.

즉 의 라는 것은 죄 라는 것을 겨냥해서 그 반대의 행동이요 죄에 대한 반대된 의를 형성한 것인데 (이미 죄와 부정함을 해석해서 나온 의의 행동을 한 것임)

그런 의가 예수님 앞에서는 악한 배설물이였다는 것을 죄의 기준과 의의 기준이 예수님이라는 참양식에 의해서 규정되었을때에 정작 죄를 제대로 본 자들은 창녀 세리 강도였습니다.

그들이 먼저 천국에 가는 이유가 바로 그러하듯이

죄도 죽음도 예수님의 해석이 덮치지 않는 이상 해석불가요
그로인한 의에 대한 해석 참양식에 대한 해석 또한 예수님의 해석이 덮치는 길만이 참양식에 대해서 알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그런 자기의 그런 기존의 해석들이 다 가짜임을 알고 철저한 단절을 아는 자가 예수님의 해석 때문에 아브라함이 눈을 떠서 믿음이 뭔줄 알았듯이

자기에게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그저 죄인 중의 괴수일 뿐인 자가
죄에 대해서 예수님이 제대로 알려줌을 당한 자 일 것입니다.

지금 출애굽기 12장의 이스라엘은
죽음에 뛰어듭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날마다 죽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가짜 이스라엘과 오늘날의 가짜 성도들은
죽음에 뛰어드는 마음판의 할례와 세례가 아니라,
믿는다는 구색만을 잔뜩 갖추는 형식화 된 할례만을 열심히 지킬 뿐입니다.

즉 죄에 대한 해석과 죽음에 대한 해석을 모르고

모르면서

생명에 대한 해석과 참양식에 대한 해석으로 자기를 드러냅니다.
그것이 결국 돈을 사랑한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한다 라고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해석해 버리는 해석에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했음이 밝혀지듯이

오늘날 성화론자들(모든 종교꾼들의 대표)은 평생을 생명만을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해석을 못한다는 이유로 가짜생명인 독을 퍼트린자로써 낙인이 찍히는 겁니다.

죽음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죽을려고 환장한 인간으로 취급받듯이
차라리 생명을 외치는 것이 자연스레 돈이 되고 교회도 되고 생존이 되는 식이
그들은 자기들의 행함으로써 된다고 보고 있지만 정작 예수님이 그렇게 심은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는 의미를 앞세우는 이유 또한 바로 심판 곧 저주 곧 죽음을 앞세우는 이유입니다.

이 인자 라는 죽음 저주 심판을 해석해 보라는 겁니다.

못한다면 이 인자에게 당해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당하기 싫어서 차라리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자에게 이제 영원히 갇혀 버리는 겁니다.
이제 인자의 섬김만이 인자의 긍휼만이 심판을 패쓰 하지
자기가 긍휼을 따 낼려는 모습은 매를 더 버는 모습입니다. (성화론자들이 꼭 이런 사고임)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는 결국 심판으로써 탕감의 의미를 증거함)

결국 쓴 나물 무교병 맛없이 그 유우러절 어린양의 고기를 급히 먹고 소화 더더욱 안되게 밤새벽사이에 다 먹어야하고 신발신고 허리에 띠를 묵고 아주 불편하게 먹는 이유는

또 이런 모습이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 (오늘날 성찬식은 그야말로 사기에 해당되기에) 이 형식적인 까다로움을 말하는게 아니라

살과 피를 먹는 것이 죄와 대비시켜서 말하듯이 아주 불편하게 껄끄럽게 말하는 것은
평상시 먹고 마시는 것이 편하게 먹는 것과 다르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즉 죽음과 결부입니다. 단절

그래서 성령의 모든 일은 단절 차단 두 패로 가르기 분리 등등의 의미이고
(즉 죽음과 자꾸 맞짱 뜨는 식으로 죽음 속으로 몰고가는 것이 성령의 일)

성화론자들의 성령에 대한 해석은 죽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빼버리고
반대의 길인 선하고 좋은 모습과 생명 등등의 증거하면 성령의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해석이 정반대일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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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상-2008/015강-삼상6장10-16(이스라엘의여호와)-1sa08102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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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여호와

2008년 10월 26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6:10-16

(삼상 6: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삼상 6: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삼상 6: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삼상 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삼상 6: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삼상 6: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여러분 자신들이 죽었다고 여기고, 그 죽어 사라진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를 생각해보세요. 이것을 생각하게 되면 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재수 옴 붙은 일이 벌어지면 자신이 뭔가 부정한 일을 저질러서 더러운 것과 접촉한 것을 통해 나쁜 것들이 달라붙었다고 여깁니다. 즉 사람에게 있어 먼저 자기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붙어있는 더러운 것에 대해서 불쾌감을 갖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그 더러운 오물을 떼 내어 어서 정상적이고 깨끗한 자아성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태도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불길한 악한 것에 감염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즉 자신은 여전히 순수하고 거룩하고 의로운데 여호와 신이 들어오고부터 안 좋은 일들이 연방 터지니까 바로 그 불길한 것을 어서 떼어 낼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38장에서 유다가 며느리인 다말에게 한 태도와 같습니다. 아들이 분명 세 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말이라는 여인이 며느리로서 자기 집안에 들어오고 난 뒤에 뭔가 오염물질이 들어온 것처럼 집안이 부정 타기 시작한 겁니다. 큰 아들 엘이 죽고 그 다음에 둘 째 아들 오난도 죽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이 며느리와 직간접으로 관련되어서 사망한 겁니다.

이제 남은 것은 셋째 아들 셀라입니다. 유다는 황급히 세 째 아들이 걱정되어 그동안 불길한 징조를 가져온 여인인 다말과 격리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마치 블레셋이 속히 여호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서두르는 짓과 같은 것입니다. 재수 없는 것을 떨어져 나가면 그만이라고 그들은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방민족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본성마저 극복하시고 자꾸만 떠미는 그들의 품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다말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서 유다 가문을 다시 언약 속으로 머물게 합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아예 유다에게 직접 관계합니다. 과연 큰 아들, 둘째 아들의 사망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를 제대로 밝히겠다는 겁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자는 다말이 아니라 정작 죽어 마땅한 그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말 자신의 적극적 개입은 도리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게 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작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일이었습니다. 즉 재수 없는 오염된 자들은 다말이 아니라 도리어 유다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이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더러운 오염요소를 떨쳐버리는 의식을 제사 형식으로 치르게 됩니다. 금독종도 만들고 쥐도 만듭니다. 재앙을 초래한 것들을 부각시켜서 그것을 보낸 신에게 되돌려 보내므로서 이제 자신에게서는 떨어져 나가 무관한 관계이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입니다.

얼마전까지 만 해도 그들은 여호와 신을 자신의 포로처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재앙이 덮치니까 이번에서 외래의 불길한 것으로 인해 자기 나라가 오염되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자신들은 깨끗했으니 다시 그 깨끗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여호와 신이라는 오염요소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관심사는 여호와가 어떤 신이냐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나서 자신들이 불편해졌다는 상황을 여전처럼 편한 상황으로 만드는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겁니다. 마치 마태복음 8장에서 돼지 치던 자들이 예수님을 떠밀다 시피하면서 자기 영역으로 사라져주기를 요청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 이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어디로 가야한 단 말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가는 소는 울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소는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재수없는 존재자가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의 죄악됨을 들추어내시는 그런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인간 세상에 거룩이 없기에 새삼 그 없는 거룩을 만들어내어서 그 거룩 안에 거하시겠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기괴한 괴물이 아닙니다. 독종이나 재수없는 쥐로 취급받으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자기 백성들이 울면서 붙들어야 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홀로 자기 백성의 품으로 돌아오십니다. 수행원없이 돌아오십니다. 외롭게 돌아오십니다. 미물의 짐승에 실려서 돌아 오십니다. 

이 하나님의 다시 돌아오시는 사랑 앞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평소에 자신의 처지만을 사수하려고 신경쓰고 있느냐가 폭로당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자신이 얼마나 거룩한 가에 있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편하게 사느냐에 두고 삽니다. 즉 자신이 편하게 살면 그것으로 자신은 의롭고 거룩한 존재인 양 증명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타고난 천성입니다. 자기만 잘되면 만사가 다 잘되어가고 있다고 여깁니다. 공기가 불길로 변하는  날이 오고있음을 모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울고 있는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외로운 홀로 돌아오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할 공간은 스스로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 방식이 바로 블레셋 제사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제사를 통해서 알려지십니다. 벧세메스 레위인들은 법궤를 싣고 왔던 소를 도로 여호와를 위하여 번제로 드립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지목된 것들은 다시 하나님 품으로 되돌려야 하는 겁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사람들의 자기 처신을 우선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에서 나쁜 기운이 붙어있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 자체를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는데 동원시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레위인들이 해야 될 일을 울던 소들이 대신 한 것이고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해야할 일을 대신하신 것이 됩니다. 블레셋에게도 버림받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버림받음’이라는 속성을 그대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 내부에 남기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림바 되고 버림받은 바된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자기 백성 속에 안식하시고자 합니다. 내가 아직 존재한다는 이유로 인해 자신이 훌륭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그 착각의 죄를 지적하면서 쳐들어오시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기쁨만 품고 살거나 죽거나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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